사실 기독교 학교에 다니면서도 ‘기독교’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해 본적이 거의 없다. 교양 필수 과목인 채플, 기독교와 문화, 성서와 문학을 들으면서도 하나의 ‘과목’으로만 받아드릴 뿐이지 진지하게 종교적으로나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부족했다. 전공이 종교문화였기 때문에 개신교의 이론적인 측면을 학습할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도 무방한 상태였다. 또한 전공 공부를 하고 있는 상태였고 무신론자로 평생을 생활하다보니 ‘신이 없다’는 무신론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3학년이지만 성서의 세계 안에 있어서는 ‘새내기’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책 제목을 처음 접할 때부터, 아 이것이 나에게 맞는, 또한 내 의심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기대하기도 했다.나는 신에 대해 무지하고 의심만이 가득 하지만, 그 의심 속에는 분명히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다 느낄 수 있었다. 즉, 내 의심 혹은 기대, 관심에 이 책은 꼭 답을 들려줄 것 같은 느낌도 받을 수 있었다.사전에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도 파트 10번이었다. 제목은 “역사적 예수의 생애: 사실일까, 신화일까?”였다. 궁금해요, 교수님!이라는 짧은 질문란의 질문은, ‘예수는 실제로 살아있었던 인물인가요?’ 라는 것이었다. 제목만 읽고도 마치 내가 교수님에게 하고 있는 질문 같았고, 그 내용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게 되었다.책에 언급되어 있듯이 예수에 관련 자료들, 예수라는 인물을 다룬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은 정말 많이 존재한다. 책에서 언급되어진 것처럼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예수의 실제적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이 부분을 관심 있게 읽다보니 예전에 내가 봤던 기독교 관련 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영화 내용이 인상 깊어서 여러 번 봤었는데, 이 글을 읽고 나서 영화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 전에는 단지 내가 느꼈던 예수와 기독교 느낌만으로 영화의 인류의 정신과 문명의 중요한 부분을 계승 발전시킨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알아보는 것은 교양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고 인류 역사의 유산을 바라보는 중요한 자산임을 인식하길 바라고도 있다.이러한 내용을 읽다보니까 다음 부분 내용 또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더 많이 알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마침 다음 부분 제목이 “예수는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했나?”였다. 이 부분에서는 예수의 삶의 방식과 가르침에 대한 내용을 닮고 있었다.책을 읽어보니, 예수는 바다라고 불릴 만큼 큰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살았고, 그의 아버지의 직업은 목수였고, 그의 제자들의 직업은 고기를 잡는 어부라는 점에서 간단한 어업과 농업을 위주로 한 시골이 성장 배경이었다고 한다.예수의 탄생 배경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여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한 내용의 이야기는 처음 알게 된 내용이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예수의 가르침은 철학적 개념이나 종교적 관념보다는 일상적 삶의 이야기에 기초하고, 그의 가르침은 주로 농촌을 배경으로 전개된다고 한다. 그의 비유 이야기에 등장하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겨자씨, 누룩, 어부의 그물, 밭, 무화과나무 등은 예수의 언어가 갈릴리 농촌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갈릴리 촌락들을 돌며 자신의 가르침을 전했다고 한다. 당시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유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은 마지막 예수께서 잡히시고 죽음을 당하시는 곳으로, 갈릴리와는 대조적으로 갈등과 충돌이 있는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복음서에 담겨 있는 예수의 언어는 그레코-로만의 철학적 개념을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당시 갈릴리 민중들의 삶에 근거한 일상적 언어에 기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누가복음 9장 57~58절에서 예수는 자신의 삶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사람의 아들(예수를 지칭하는 말)은 머리 둘 곳이 없도다.”하고 말한다고 한다. 이 표현에 의하면 예수는 일정한 거처나 직업도 없이 정처 없이 떠도는 ‘음서가 묘사하는 예수의 가장 두드러진 이미지는 가르치는 자로서의 예수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전통적인 속담과 격언이 담아낼 수 없는 놀라운 재치와 참신한 감각을 담고 있다고 한다.태어나서 한 번도 예수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공감은 되지 않았지만, 담아낼 수 없는 놀라운 재치와 참신한 감각이라고까지 표현이 되어있어서 정말 그 정도 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예수의 말씀은 특정 개인의 색다른 관점이나 개념을 나타낸다고 한다. 진부한 일상적 세계관에 얽매여 시대의 징조를 읽지 못하는 전통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들의 상식을 뒤집는 풍자와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학자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일화로 잘 알려진 디오니소스를 시조로 삼는 견유 철학자들하고 곧잘 비교하곤 한다. 이들 헬라 철학자들은 당시의 상식적 세계관을 조롱하며 거리를 떠돌았고, 청빈한 삶과 내면의 평화를 지향했으며, 그레코-로만의 대도시를 전전하며 자신들의 철학을 알렸다고 한다. 이들의 반사회적 행태는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들은 짤막한 경구를 이용하여 기존의 상식적인 세계관을 역전시켰다고 한다.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이 바로 비유 이야기이다.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는 곧잘 비유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정체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직접적인 정의를 피하고 ‘겨자씨’, ‘밭에 감추어진 보화’ 같은 비유를 통해 이야기했다.그렇다면 비유란 무엇일까? 그리고 왜 예수는 그렇게 삶을 비유로서 설명하려 한 것일까?비유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 패러블은 헬라어 파라볼레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파라볼레는 어떤 것 옆에 무엇인가를 제시해 대비하고 비교한다는 의미이다. 예수의 비유는 은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마가복음은 예수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청중은 대부분 교육받지 못한 하층민이었기에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농촌 상황과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성격으로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고 해석한 예수의 삶과 말씀은 아직까지도 많은 학자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비록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이스라엘의 회복 신학과 관련이 있고, 그의 운동이 유대교 내부의 갱신 운동이었을 뿐이었지만, 예수의 죽음 후 유대교를 벗어난 새로운 종교 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이미 예수 시대의 유대교의 갱신 운동으로서의 예수 운동이 아니고 세계적인 종교로서 신학과 교리와 체계를 갖추고 잇는 그리스도교인 것이다. 현재 우리가 접하는 그리스도교에서는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이 희미해진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본 모습은 예수의 삶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말씀 속에 원 뿌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이렇게 예수의 존재와 성서에 대하여 간략하게 읽다보니, 앞부분에서 나온 성서의 부분이 다시 떠올랐다. 나에게 성서란 단지 허구적인 책이고, 전혀 과학성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수를 찬양하는 사람들의 예수의 존재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 지어 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서에 언급되어져 있는 예수의 ‘비유’적 개념이 무척 인상 깊었고 내가 지나친 성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책을 거의 다 읽었음에도 처음부터 책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1장에서는 성서를 ‘역사를 변화시키는 책’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에 성서를 읽고 있는 사람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성서의 내용을 읽고 감동하고, 행복해하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무종교인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절대 이해가 불가능 것이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이유로 성서를 찬양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세계성서공회는 작년 12월 말을 기준으로 성서의 번역 언어가 2,479개로 늘어났다고 발표하였다. 성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인쇄되는 책으로서 일 년에 삼천만 권 가량이 팔리며 지금도 새로운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성서는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고 각각 39권과 27권이 들어있다고 한다.내가 지금까지 알고은 인물들의 영웅적인 이야기, 전기적인 기록들이 포함되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서를 위인백서나 역사서로 보기도 힘들다. 무엇보다도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출현 등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과학적인 진실을 담은 책으로 오인되기 쉽지만 성서는 역사교과서가 아닐뿐더러 그런 목적으로 기록된 책도 아니다. 성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삶과 역사를 토하여 그들이 믿고 고백한 ‘야훼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다. 흔히 성서가 한 권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내가 오해했던 것처럼, 단행본 책으로 잘못 알려질 수 있으나 성서는 한권의 책이 아니다. 문학 장르라는 측면에서도 성서의 66권이 다양하기 때문에 일관성을 찾기 어렵다. 그러므로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서의 관점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책을 계속 읽다보니, 성서와 문학 수업시간에 본 영화들과 책을 관련지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수업시간에 본 영화들 중에서 특히 인상적으로 남았던 것은 이었다. 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주인공의 대사 때문이었다. 한 없이 고통 받고 있던 탈북자 주인공(차인표)은 결국 자신의 울분을 토하며 말한다. 하나님은 남한에만 있고, 북한에는 있지 않다고. 결국 나는 영화를 보면서 비극에 대한 존재 자체를 생각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잘사는 길은 무엇인가?’ 구약성서의 지혜를 알려주는 8과 주제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었다.사실 누구나 행복하게 사는 생활을 원한다. 그러면 행복에 이르는 길은 무엇일까. 돈과 명예 건강과 권력, 출세 등이 떠오른다. 즉, 사람들은 이렇게 저마다 행복의 조건으로 나름의 순위를 정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다면, 쉬운 답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곤란한 문제에 직면할 때가 많다. 해결책을 쉽게 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지금 내가 당면한 이 어려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때가 많은 것이다. 자신의 진로와 취업, 이성, 배우자, 신변 문제만이 있다.
교육방법 및 교육 공학- 성찰저널 10000000학과00000(07)?교육방법 및 교육 공학의 이해첫 번째 시간에는 교육이라는 커다란 개념을 두고 교육공학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교육이라고 하면 크게 교수와 학습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둘에 함께 공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예전에는 지식을 전달하는 존재로서의 교수자를 중심으로서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학습자들의 교육에 초점을 두면서 학습자의 능동적인 학습과정을 중요시한다. 즉, 고기를 잡아 주는 것이 아닌 고기 낚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교육철학, 심리, 개론 등 교육에는 다양한 이론들이 있는데, 교육방법과 교육공학은 교육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특히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학습자는 한명이 아니다. 그 특성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다양한 방법을 만들며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첫날의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그동안 들었던 교직수업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는데, 역시 교수님의 말씀대로 교육현장에서 가장 활용도가 높은 수업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교사를 꿈꾸고 있으면서도 그동안은 너무 단순히 이론적인 측면만을 생각해 왔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학습이론들을 배우면서 학습자들의 다양한 면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고, 수업지도안 방법도 많은 도움 또한 기대되었다.?교수-학습의 이해(1): 행동주의, 인지주의2장 첫 번째 부분에서는 크게 행동주의와 인지주의에 관해 학습하였다. 행동주의에서의 학습이란,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행동자의 행동을 통해 설명한다. Pavlov의 실험을 보면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Pavlov의 실험의 주요개념은, ‘모든 종소리’라는 일반화와 ‘특정한 종소리’라는 변별력, ‘종을 쳐도 고기를 주지 않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른’ 소거현상으로 볼 수 있었다. 이에 비해 Thorndike는 인간행동은 보다 주변 환경을 능동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Thorndike의 이론에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통해서 결합의 강도도 높아진다는, ‘효과의 법칙(law of effect)’을 강조하였다. 이 이론은 심화시킨 Skinner는 자극+반응에 따른 시간보다는 강화물, 보상에 중점을 두었다. 즉, 좀 더 능동적인 인간을 가정한 것이었다.다음으로 인지주의란, 자극과 반응의 과정 속에서 내적인 면을 강조하는 학습이론이었다. 즉 인지구조의 변화를 학습이라고 생각하면서 학습자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를 중요하게 여겼다. 책에는 없지만, 자신의 인지과정을 스스로 통제하고 조정하는 정보처리 이론도 학습하였다.나는 먼저 행동주의 이론들의 실험들을 보면서, 학습의 실험을 동물로 했다는 것에 조금 억지스러운 면도 느껴졌다. 하지만 많은 실험들을 통해 나온 결과들이기 때문에, 교실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특히 Skinner의 이론을 교실에 많이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자극과 반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Thorndike는 시간에 관심을 두었다면, Skinner는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 이 ‘강화’라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하게 다가왔다. ‘벌’ 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단기간, 장기간에 따른 결과도 달라진다. 또한 간단한 칭찬 같은 긍정적인 강화와 지각을 하면 화장실 청소를 한다, 같은 부정적인 강화 등의 다양한 강화가 존재했다.이렇게 행동주의에서는 강화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교실 적용 방법이 있었다. 수업 이후에 배운 것을 3개 이상 말할 수 있다, 같은 관찰 가능한 행동 목표를 제시할 수도 있고, 수업내용의 계열화를 만들 수도 있다.인지주의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내면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적용시킬 수 있었다. 정보처리 전략을 활용하면서 보다 많은 기억들을 장기화 시킬 수 있다. 또한 내재적인 학습동기를 중요하게 여길 수 있다. 즉, 칭찬보다는 정말 ‘내가 좋아서’ 나타나는 행동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인지주의와 행동주의를 공부하면서 자극과 반응에 대해 다양한 면을 알 수 있었지만,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인 강화 부분이었다. 벌이나 칭찬 등 말로는 쉽게 적용시킬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어떤 식의 강화를 어떻게, 언제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구체적인 때림이나 꾸중 등, 벌의 제공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되도록 효과적인 정적강화와 부적강화를 통해 적용하는 것이 최대한의 보강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교수-학습의 이해(2): 구성주의인지주의를 배경으로 발전된 구성주의 이론은, 인간이 지식을 구성해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이론보다는 인식론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교육의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즉, 구성주의는 학습의 과정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을 찾아내려는 철학적이고 주관적인 구성인 것이다. 고정불변하지 않기 때문에 과정을 중요시하는 것도 특징이다.
욕망의 끝을 찾아서00000학과0000(07)반지의 제왕 시리즈 1,2 편을 보지도 않은데다가, 특히 3편 왕의 귀환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영화관 맨 앞줄에서 힘겹게 본 기억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왠지 보기도 전에 거부감이 들어버렸다. 하지만 조장이라는 부담감(?) 때문인지, ‘욕망’이라는 요소를 염두 해두고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무척 흥미롭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사실 ‘사람의 욕망’이 언급되어 있어서 ‘반지’라는 것이 욕망을 의미한다는 것은 간단하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반지 즉 욕망의 모습에만 초점을 두고 있지 않았다. 욕망을 원하는 사람들의 변화 모습, 욕망을 초월한 모습, 욕망 속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모습까지 욕망의 다양한 측면을 추상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의미와 내 의견을 잘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반지의 제왕은 두개의 이야기를 축으로 전개되었다. 절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떠나는 샘과 프로도, 중간계의 동맹을 결집시켜 모르도르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간달프 일행. 영화라는 시각매체의 특성상, 또한 블록버스터의 현란한 특수효과에 간달프 일행이 진행시키는 스펙터클한 전투와 모험이 적절하게 흥미로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의도대로라면 좀 더 본질적이며 내면적인 전투, 즉 절대반지를 매개로 충돌하는 인간내부의 선과 악의 문제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고 있는 쪽은 오히려 프로도 일행이라고 생각 되었다.또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전투장면들은 프로도와 스미골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갈등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권력을 향한 열망과 독점적 소유라는 무의식적 욕망으로 대표되는 사우론, 의식적 차원의 선과 윤리로 대표되는 간달프 일행 이 두 세력의 충돌은 옛날부터 인간이 겪어온 선과 악의 인상을 주기도 하였다.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용암에서 프로도가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그 곳에 서는 장면이었다. 그는 실재하는 악의 존재, 욕망의 근원인 사우론과 대면하게 된다. 간달프 일행이 욕망의 주변, 사우론의 부하들과 싸우고 있을 때 프로도는 사우론의 실체와 직접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권력에의 욕구는 끊임없이 반지를 취하라고 프로도를 유혹하지만, 사우론의 목소리로만 알았던 내면의 은밀한 속삭임은 결국 프로도 자신이라고 알 수 있었다. 즉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이라는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스스로의 씨앗을 용기로 안고서000000학과0000(07)사실 처음에는 이 작은 애니메이션으로 성서에 담긴 커다란 의미를 이야기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성서에 담긴 커다란 의미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내가 앞으로 가져야할 마음가짐까지 깨닫게 만들어주었다.주인공 플릭을 겉모습으로만 보았을 대에는 사고뭉치에 어디하나 강한 곳을 찾을 수 없는 작은 개미이다. 결국 개미왕국을 위기에 몰아넣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난 오히려 갈등이 일어난 그 상황을 희망의 시작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플릭이 잠시 개미 왕국을 떠나 벌레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에서, 이제 문제가 거의 해결되었다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서커스를 하고 있는 벌레들이었지만 왠지 그들이 싸움을 연습하여 메뚜기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혼자 이상한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싸움을 함께 할 가짜 새도 만들었으니 더 그런 확신을 보였던 것 같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전개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메뚜기는 서열을 확실히 정하고 말겠다는 악을 품으며 날아왔고, 여왕개미는 잡혀 협박을 당하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가짜 새마저 불 태워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정말 이 얼마나 절망 상황인가… 하지만 그들의 운명이 절망 속에 갇혀 있었을 때, 아기 개미는 플릭 앞에 작은 돌 하나를 건네게 된다. 사실 이 작은 돌멩이는 아기 개미에게 플릭이 건네던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런데 플릭은 힘들고 나약한 운명 앞에 희망과 용기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결국 플릭이 느낀 이 마음들이 개미 왕국에 퍼지게 되었고, 개미들 스스로가 갈등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렇듯 내가 처음 예상하던 것과는 달랐다. 가짜 새도 아니고 서커스 벌레들도 아닌 바로 ‘자신’이 운명을 개척해낸 것이다.
사회,내 안의 있는 혹은내 위의 있는0000000학과 0700000첫 장면에서 나오는 학생시절 왕따男을 포함하면, 영화에는 총 4개의 이키가미가 배달된다. 즉 4명의 죽음이 보여 진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어두운 소재라던가 등장인물들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보여 지는 안타까움 때문이 아니라, 영화를 볼 때도 그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역시, 뭔가 굉장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한명, 한명의 세부적인 이야기보다는 그들을 통해서 나타난 공통된 답답함 때문이다. 24시간 안에 죽음을 막을 수 없는 답답함, 죽음을 통해 국가의 번영을 이루고 있다 생각하는 국가에 대한 답답함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느끼고 있는 답답함은, 국가가 자신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많이 반발하지 않고 또한 단지 운명이라고까지 받아들이고 있는 국민들이었다.이키가미를 전달하는 공무원으로 일하게 된 주인공은 영화 초반 부분에 연수를 받게 된다. 그 연수를 받을 때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국가번영유지법을 통하여 죽게 되는 것은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고 국가는 ‘배려’를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키가미를 전달하는 일 또한 엘리트들만이 할 수 있는 대단한 일이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대사가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이미 국가는 ‘살인’의 행위를 ‘영광’으로까지 상승시켜 놓은 것이 아닌가.하지만 막상 사람들은 이키가미를 통한 죽음을 단지 로또처럼 받아드리고 있다 느낄 수 있었다. 나 자신의 죽음이 아니면 그만이다, 이라는 이기심으로 사회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나조차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생방송 첫 무대를 결국 죽음으로 마무리한 츠바사. 그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논란거리로 자리 잡았지만 국가번영유지법 측의 상관은 그 논란과 동정조차 삭막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단순한 갈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사회 속을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즉 사회는 우리의 위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며 조종하는 것이다. 과거의 사회를 생각해보면 사회의 안에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개인으로서 작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 개인이 중요한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개인주의가 발전하게 되었고 사회는 그러한 면을 보다 사회의 측면에서 악용하게 된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사회의 이면을 발견했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더 큰 충격으로 작용될 수 있도록 ‘죽음’이라는 파격적인 요소를 선택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