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시초프의 도발 ? 쿠바 핵미사일경제학부 20116582 김현석비교경제제도론김승석 교수님1962년 발생한 쿠바 핵미사일 위기는 미국과 소련간 핵 대전을 유발하여 전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었던 냉전시기의 첨예한 대립사건이었다. 당시 소련은 냉전주의 체제 속에서 미국에 비해 다소 열등했던 경제력, 군사력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전환시키고 공산진영인 쿠바를 보호하기 위해 약 45,000명의 군사, 무기와 더불어 중거리 핵미사일을 은밀히 쿠바에 배치하였다. 하지만 이런 소련의 움직임은 미국의 첨단 정보수단에 의해 사전에 탐지되었다. 결국 미국의 강력한 해상봉쇄 정책에 굴복하여 핵무기를 철수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소련의 대외적인 위신 추락과 공산진영의 결속을 와해시키게 된다.소련과 쿠바의 관계쿠바는 독립(1902)이래 미국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비롯된 경제적 착취로 인해 국민들의 반미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 이러한 반미감정과 당시 쿠바 집권세력의 부패와 혹독한 독재는 반대세력의 힘을 키웠으며, 이를 기반으로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즉, 쿠바혁명은 당시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해 오랫동안 쌓여 온 쿠바 국민의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미국이 지지하던 폭력과 부패로 얼룩진 집권 정권에 대항해 일어난 혁명이다. 이런 혁명으로 인해 쿠바는 반미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으며 이러한 반미감정은 자신의 체제 생존문제와 결부되어 소련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쿠바와 미국 사이의 외교가 단절되자 1960년 흐루시초프는 “미국이 감히 쿠바를 침공할 경우, 소련은 군사적으로 쿠바인민을 원조하고 모든 수단을 행사할 것이다”라고 연설을 하며 쿠바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한다. 즉 쿠바의 공산화는 당시 세력이 약했던 라틴아메리카의 공산주의 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으며, 소련은 이를 기회로 삼게 되었다.소련과 미국의 관계1960년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정찰하기 위해 비행하던 미국의 정찰기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되었다. 당시 조종사인 파워즈는 낙하산으로 탈출하였으나, 소련 측에 사로잡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소련은 미국이 국제 법을 위반 하였다고 비난했으며 이 후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이 사건 이후 1960년 11월 미국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케네디는 공화당 닉슨과의 선거에서 승리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 미국은 소련에 대해 사로잡힌 파워즈의 석방을 공식적으로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흐루시초프는 “만약 지금 파워즈를 석방한다면, 닉슨을 유리하게 할 것이다. 나는 닉슨이 소련과 미국의 관계 개선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석방은 선거 후로 미룰 것이다”라고 말하며 케네디의 당선에 힘을 실어 주게 된다. 결국 파워즈는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소련 간첩과 교환되어 석방된다. 이러한 흐루시초프의 발언은 닉슨보다 케네디를 국제정치 경험치 적은 풋내기로 간주하였으며, 견고한 반공산당 태도를 보인 이전 정권을 상대로 실추된 권위를 만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또한 냉전 초기,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통한 전 세계 군사, 경제적 우위를 기반으로 한 정책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흐루시초프의 의지다.소련의 쿠바 핵미사일 배치 배경소련은 냉전시작 이래 쿠바 미사일 위기 이전까지 미국과의 핵 군사력 경쟁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또한 소련은 장거리 미사일의 대량 생산 능력이나 운반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쿠바의 핵미사일 배치는 이러한 열세를 단기간 내 극복할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방법 이였다. 이러한 쿠바 핵미사일 배치의 배경은 첫 번째, 흐루시초프는 쿠바 미사일 배치가 세력균형을 이루게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미국은 터키에 미사일 기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소련도 역시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할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두 번째, 냉전체제 하 공산주의 세력 열세에 따른 위기의식 돌파구 마련이다. 소련은 핵미사일 배치를 강국인 미국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열세를 극복할 돌파구로 생각했다. 특히 흐루시초프의 케네디에 대한 인식이 국제정치 경험이 미숙한, 상대하기 쉬운 인물이라는 자신의 사고는 쿠바 핵미사일 배치라는 매우 손쉽고도 유혹적인 방법으로 다가왔다. 세 번째, 소련은 쿠바가 라틴아메리카 공산화의 새로운 거점이라고 생각했다. 소련은 쿠바에 막대한 원조를 제공했으며 소련과 중남미 공산당과의 유대를 지속시키는 지역으로서 효과적인 곳이라고 생각했다.흐루시초프의 도발, 케네디의 맞수흐루시초프는 쿠바 미사일 배치계획을 1962년 5월부터 구상하였다. 미국이 터키에 미사일을 배치했듯이 소련도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할 수 있다고 제안함으로써, 그 계획을 고려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 제1 부수상이던 미코얀은 쿠바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은 이를 우수한 정보능력으로 조기에 탐지할 것이라는 이유로 그 계획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흐루시초프는 쿠바에 사절단을 파견해 설득에 성공하였고, 그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한다.쿠바에 대한 소련의 미사일 배치는 1962년 7월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1962년 10월 14일까지 핵미사일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결국 10월 14일 미국이 미사일을 촬영함으로써 이 사실을 최종 확인하게 되고,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중대발표를 함으로써 미-소간 위기상황이 시작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에 대해 핵미사일 즉시 철거와 미사일기지 파괴를 요구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에 대한 공중폭격과 상륙작전이라는 극단적인 대응책과, 굴욕적 타협의 갈림길에서 고민하였다. 결국 소련 상선의 쿠바 접근을 저지하면서도 협상의 시그널을 보내는 해상봉쇄를 결정했다. 즉 위기 속에서도 흐루시초프와의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이 핵미사일과 기지의 철거, 파괴에 응하지 않으면 전면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혼인관계를 통해 살펴본 신해혁명 전-후 여성의 인권과 여성인권운동20116582 경제학과 김현석비교경제제도론김승석 교수님신해혁명 전 후 혼인관계 변화를 통해 본 여성의 인권 변화중국은 고대로부터 혼인을 단순히 두 성의 결합이라고 정의하고 그 목적을 위로는 선조를 모시고 아래로는 후세를 잇는 것으로 보았다. 여성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혼인은 비로소 성인이 된 남편을 따르는 것이라는 관념이 팽배하였다. 하지만 사회제도의 변화에 따라, 혼인관념에 차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청일전쟁과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서구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남녀평등 이라는 의식이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전통적 혼인관념에 대한 지식인의 비판과 공격이었다. 중국 사회가 격변하는 가운데 여성들이 집에서 나와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속도가 빠르게 증가하였다. 이처럼 신해혁명으로 인한 중국의 사회, 경제적 변화는 전통적인 혼인관념과 여성에 대한 생각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왔다. 혼인제도 및 관념의 변화가 여성에게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자주혼인을 추구중국 남녀의 결혼은 역사적으로 부모의 명령이나 중매쟁이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부모가 정치, 지위, 재산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사회 변혁에 따라 자산계급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혼인의 자주권과 여성 인권운동이 시작되면서 전통적인 혼인 결정권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남성이 자신의 부모에게 허락을 받은 후 여성의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 상호 동의하에 혼인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보편적으로 이루어 진 것은 아니지만 선진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확산되었다. 특히 신해혁명 이후 중국에서 도시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많은 여성들이 사회로 나와 여성들의 도시 취업과 사회 교류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생활방식 변화로 자유연애, 공공장소 출입, 오락생활을 하는 여성이 증가하였으며 상해에는 ‘타이지’라는 러브호텔이 출현하기도 했다.2)매매혼인, 혼수증정 폐단 타파재화와 부를 가지고 혼인을 논하는 것은 중국의 보편적인 사회적 현상이었다. 남성의 지참금, 재산과 여성의 혼수가 혼인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이런 풍속은 여성에게 특히 해가 심했다. 여성의 가족들은 남성의 인품보다는 재력을 보기 때문에 여성 입장에서는 불행한 혼인의 원인이 되었다. 혼수가 없으면 시어머니에게 학대를 받으며, 결혼을 해주는 남성 또한 없었다. 특히 여자 아이를 출산하면 강물에 익사시키던 풍속이 있었는데, 이는 빈곤한 가정에서 여성을 길러 시집보낼 재산이 없었던 데에 그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 신해혁명 후 지식인들은 이런 중국의 관습을 여자를 물건으로 취급하는 상인의 무역과 같은 것이라며 강렬하게 비판했다. 당시 신문에 상류층 남성의 구혼광고가 자주 실렸는데 전족을 하지 않은, 동서 학술에 능한, 선진 사고를 가지고 있는 여성을 구한다는 글이 많았다고 한다.3)산아제한 제창 및 조혼다산을 반대신해혁명 당시까지 중국(청)정부는 인구를 늘리기 위해 늘 조혼을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조혼이 여성의 교육, 꿈을 가로막으며 아이를 올바르게 키우지 못해 가정을 해친다며 반대하였다. 특히 산아제한에 대한 제창으로 다산을 반대하였다. 빈곤은 다산의 원인이 아니라 다산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다산은 많은 아이를 재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채 기아와 추위 속으로 내몰고 여성을 아이를 기르는 도구로 전략시키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하였다.4)이혼의 자유 고취중국 남녀는 이혼의 권리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여성에게 불평등했다. 남성만의 일방적인 이혼을 보장하며 남성은 아내를 내쫓거나 유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남성의 권리는 과거 사회 통념이었으나 청 정부에 의해 법률조문으로 채택되었다. 이런 불평등은 서구 문명과의 접촉이 많아지고 신해혁명 후 지식계층의 생각이 변하기 시작하면서 함께 변했다. 혼인이 자신들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헤어지자는 관념이 사회에 팽배하였다. 이혼안건이 많이 발생했으며 여성이 주도적으로 이혼을 요구하는 현상도 증가했다. 이런 분위기는 사회여론의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당시 사례를 보면 남성이 이혼을 주장할 경우 여성에게 부양비용을 지급하며, 여성이 이혼을 주장할 경우 혼인할 때 받았던 지참금을 다시 상환해야 했다고 한다.5)축첩제와 일부종사제 반대18C 초까지 중국 남성은 혼인배우자 외에 기생과 성적 배우자를 두는 일이 많았다. 명의상 일부일처제였지만 실제로는 많은 배우자와 첩을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여성에게는 부계혈통의 순결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생긴 일부종사제와 정절관념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여성을 매매하는 일 역시 일상적이었다. 이렇게 여성을 낮추는 구 윤리적인 도덕의식은 신해혁명 전후 진보적인 신문, 잡지, 간행물을 통해 집중적으로 비판되었다.여성 인권 운동의 시작과 한계점이렇게 여성문제에 대한 큰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시발점은 1894년 청일전쟁 후이다. 선구자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여성도 자립하고 배우며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일본에게 전쟁에서 패배하고, 일본의 위상이 높아지자 서양의 기술만이 아닌 자유, 평등, 박애 사상을 받아들여야 부강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의식이 생겨났다. 이런 분위기가 신해혁명과 맞물려 많은 여성들은 자신들의 삶을 뒤돌아보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평등을 호소하게 되었다. “여자는 재능이 없는 것이 미덕이다”라는 봉건관념을 비판하며 여성의 교육, 여성 결혼의 자유, 전족 관습 폐지 등을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애국여성학교와 여성 간행물이 생겼으며 여성운동 혁명가 또한 많이 증가했다.
소련 때문에 ‘웃다가’ 소련 때문에 ‘운’ 고려인비교경제제도론김승석 교수님경제학부 20116582 김현석현재 ‘고려인’이라 불리는 한인들은 1937년 스탈린 정부에 의해 연해주에서 머나먼 카자흐스탄 및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구소련 해체 후 자신들의 마음속 고향인 연해주로 다시 재이주하고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있었지만, 2007년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다큐멘터리가 나오면서 재조명 받게 되었다.연해주 고려인 사회의 형성“한인 13가구가 빈곤과 굶주림 및 착취를 피하여 비밀리에 이주해 농사를 짓고 있다. 이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 해줄 것을 요청한다”한인들이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19C 중엽이다. 당시 국경 감시소 책임자가 연해주 총독에게 보낸 공식문서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이주 시기는 1863년이다. 이 당시 조선의 심한 기근과 조선 북부지방에서 발생한 대홍수 그리고 양반들의 착취와 억압은 한인들의 이주를 재촉하였다.당시 구소련 정부는 변방지역을 개척하기 위한 욕심으로 한인이 연해주에 이주해 오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토지까지 제공해 주었을 정도로 한인의 이주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1905년 국권박탈, 1910년 강제 한일합방으로 인한 일제의 억압은 일반인 뿐 아니라 독립 운동가들의 이주를 촉진시키며 극동 러시아의 고려인 사회를 더욱 커지게 한다. 이 후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고려인 사회는 크게 확장되어 한글 신문이 발행되었으며, 대한민국 독립 운동가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우리나라 독립 역사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7년 스탈린 정부에 의한 강제이주 전 연해주에 거주하였던 고려인은 최소 20만명 이상 이였다. 이들은 소련인들 마저 포기한 척박한 극동러시아 땅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소도, 농기구도, 윤택한 땅도 없는 척박한 자갈밭에서 고려인의 끈기와 인내심으로 자신들만의 새로운 사회를 일궜다. 이들은 연해주뿐 아니라 주변 지역에도 고려인 시장을 형성하여 그들만의 경제 사회를 만들었다. 7개의 신문사와 6개의 잡지사, 고려인 극장, 고려인 교육대학, 380여개의 고려인 학교 및 출판사가 존재 하였을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커졌다. 이들은 타지에서 민족적 공동체를 형성하여 우리의 언어, 문화, 풍습을 지키며 살았다.고려인 강제이주의 배경“소비에트 한인의 얼굴을 가장한 만주와 조선의 요원들이 콜호즈, 노동조합 그리고 콤소몰 조직으로 침투하고 있다”러시아 극동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1918-1922년 소련 내전시기 일본, 미국, 영국군에 대항하여 러시아 적위군과 함께 투쟁하였으며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러시아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자국의 국민이라고 칭하며 소련에 지속적으로 간섭하였다. 이런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두 번째 배경은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등 소련 남부 지역의 벼농사 증진을 위해서이다. 한인의 쌀, 면화, 담배 작물 재배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이용하여 척박한 토지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특별히 구성된 ‘벼농사 조사단’과 함께 이주 되었다.세 번째 배경은 전쟁의 암운이 짙어질수록 커지는 소련 인민들의 두려움과 공포심이다. 국경지역 소수민족의 간첩행위에 대한 신문기사, 이들을 주제로 한 소설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해주 지역에서 그들만의 큰 사회, 문화적 기초를 다지고, 척박한 땅을 비옥한 토지로 개간해 큰 수확을 얻는 고려인이 그들에게 더욱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고려인 강제이주의 시작과 과정스탈린 정부는 한인 강제이주를 1937년 이주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한인 강제이주는 1937년 8월 말부터 시작해 12월경 끝나게 된다. ‘극동지역 철도 운영국’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소련 정부 공산당원은 이 강제이주를 정부의 의무적 과제를 모범적이고 정확하게 수행하였다 하여 표창까지 내렸다고 한다.이러한 강제이주 과정은 구소련 붕괴 후 공개된 모스크바 국립 중앙문서보관소의 한인 이주에 대한 지령서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최초 한인 이주는 행동지침에서 한 달 안에 이주를 완료해야 한다고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초 국경지역의 한인들만 이주시키기로 한 계획을 극동지역 거주 한인으로 대상을 확대하면서 이주 대상자의 폭이 급격히 증가해 12월경 완료된다. 1937년 9월 4만명을 시작으로 12월 24일 84명을 끝으로 총 17만명의 한인을 이주시켰다. 이송 기간 중 2000여명의 한인이 일본 간첩이라는 이유로 총살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사망하였다. 특히 1930년 전염병으로 인해 텅 비어버린 척박한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으로 이주시켰다는 점을 보아 민족청소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 후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폴란드, 독일, 타타르, 체첸, 칼므이크인 등 수 많은 소수민족이 이주되어 1930-40년대 카자흐스탄 및 중앙아시아는 소수민족의 ‘감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까레이스키’의 기적최초 연해주와 러시아 극동지방에 정착해 오랜 기간 자신들의 터전을 건설한 고려인은 집도, 재산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당시 중앙아시아는 구소련에서도 포기한 벼농사 불가능 지역 이였으며, 강제이주 전 전염병으로 인해 사람이 살기 불가능 할 정도로 피폐해진 곳 이였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 고려인 1세는 현재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2세 3세를 낳았으며, 벼농사 불가능 지역인 중앙아시아에서 새롭게 벼농사를 시작하여 성공하는 기적을 일궈냈다. 전 세계 벼농사 가능지역을 가장 북쪽 지역인 북위 47도로 올렸으며, 그곳에서 역시 연해주에서처럼 고려인 시장을 형성해 김치, 고사리, 꽃나물 등을 거래하는 등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이들의 끈질긴 노력을 본 소련인 들은 고려인을 ‘까레이스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만든이 김현석!!!一 (한 일)? 최초에는 太極이 있었고, 道는 一에서 세워졌으며 天地가 분리되어 만물이 생겨났다.? 一을 地로 삼은 것이 많은데 그 대표적인 예로 至, 旦, 之등이 있고 一을 天으로 삼은 것은 雨등이 있다.元 (으뜸 원)? 或者는 기울여서 보고 있는(?視)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특히 큰 머리를 돌출 시킴으로써 ??라는 本義를 나타낸다고 한다.? 說文解字에서는 위(上)와 사람(?)을 따른 會意字로 사람의 윗부분인 머리가 本義라고 한다.天 (하늘 천)? 정상 꼭대기이다. 위에 다른 것을 더할수 없는 가장 높은 위치이다. 一과 大를 따른다.吏 (아전 이)? 사람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吏의 甲骨文을 뒤집으면 대체로 ?(?)의 甲骨文(?)과 유사하다. 즉 손에 붓을 들고 무엇을 기록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옛날에는 史(?/?/?)와 吏가 구분이 없었다고 한다.? 或者는 一은 법을 ?行하는 것이 하나같음을 나타내고, 史는 人을 빌어 쓴 것으로 法을 ?行하는 官?을 표시한다고 한다.上 (윗 상)? 한 물체 위에 다른 물체가 있음을 뜻하는 指事字이다帝 (임금 제)? 자세히 살핀다는 뜻이다. [또는] 천하를 통치하는 칭호이다.? 或者는 花?(꽃받침)의 모양을 그린 것으로 ?(가시, 꽃받침, 체)의 ?文이라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쌓아둔 나무나 묶어 둔 나무를 불살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고대 제왕이 지내는 제사 체)의 ?文다이 라고 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는 것에서 ??되어 天帝의 帝나 ?王의 ??가 되었다고 한다.下 (아래 하)? 없음示 (보일 시)? 二을 따르고 (上의 古文으로 하늘을 나타낸다) 세 개의 세로 획은 [각각] 해와 달과 별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천문의 모습을 살펴 時世의 변화를 고찰한다? 甲骨文은 神主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說文解字의 日月星이 드리운 것이라는 것과는 字形과 뜻이 다르다.? 示는 神主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示를 따르는 글자들의 本義는 일반적으로 조상들에 대한 숭배 신 제사 ????등과 追 (쫓을 추)? 或者는 ?와 止를 따르며, ?와 ?는 같으므로, 스승(?)을 삼으려고 좇아 다니는(止)것을 그린 것으로 本義는 스승을 삼으려고 좇아 다니다라고 한다.? 또 或者는 二千五百人을 ?라고 하므로 군대(?)를 따르는 것이라고도 한다.逐 (쫓을 축)? 뒤쫓는 것이다. ?과 豕(돼지 시)나 豚(돼지 돈)에서 肉을 생략한 글자로 이루어진 會意字로, 동물을 쫓는 것이라고 한다.道 (길 도)? 道는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이다. ?과 ?를 따른다. 갈림길 없이 단번에 이를 수 있는 것을 道라 한다.?(자축거릴 척)? ?은 行의 左半?라고 할 수 있다.? 或者는 行은 甲骨文과 金文에서 ?이라고 쓰며, ?은 사방으로 통하는 길의 모습이다. ?은 行의 생략이며, 本?에 속한 글자는 모두 行을 따르는 것들과 뜻에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甲骨文에서는 ?과 行, ?(길게 걸을 인)은 같이 쓰였으며 ?字들의 의미도 대체로 같다.德 (덕 덕)? 或者는 걸을 때 눈을 똑바로 전방을 보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행위가 단덩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즉 한 목표를 향하여 가는 것으로 本義는 행위가 端正하다라고 한다.後 (뒤 후)? 說文解子에서는 ?과 ?와 ?(천천히 걸을 쇠)[?(뒤쳐져올 치)]을 따른 會意字이며, ?은 작은 것(小)으로 행동이 더딘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或者는 ?은 실을 그린 것이므로 길(?)에서 뒤이어(?) 걸어오는(?)을 나타낸다고 한다.得 (얻을 득)? 거리에서(?) 손으로(?) 조개 껍질(貝)을 줍는 형상으로, 本義는 얻다라고 한다.律 (법 률)? 손에 붓을 쥐고 글을 써서 ??하는 것을 말한다. 즉 本義는 보편적으로 시행되는 법률이라고 한다.? (길게 걸을 인)? 길고 멀리 걸어가다. ?(의 획)을 길게 뺀 것을 따른다.? 說文解子에 따르면 ?과 ?(지) ??의 ?字인 延(끌 연)을 모두 [長行也]라고 ?하였으므로, 뜻은 같고 소리는 ??하다.? 또한 ?의 甲骨文은 ?이므로 ?과 ?은 같다고 한다.廷 (조정 정)? 金文에서는 한 사람이 정원의 계단 앞에 통용되기도 하고, [???中 (병이 가슴에 있다)]과 같이 膈(흉격 격) 과 통용되기도 하였다.? ?(가마 솥 종), ?(용가마 심), ?(솥 권), 融(화할 융)融 (화할,녹을 융)? 불을 지필 때 기운이 위로 나오는 것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或者는 대략 아래 부분은 땅이 있고, 위에는 벌레가 그려져 있어서, 얼음과 눈이 녹아 봄기운이 피어오르니 겨울잠을 자던 벌레가 꿈틀 거리며 움직인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다리 굽은 솥 력) 42p? 솥이다. 古文은 ?이다. 다섯 가지(온갖) 맛을 삶아 익힌 기운이 위로 나오는 형상이라고 했다.? (죽 죽)? 솥에 쌀을 넣고 끓여 김이 나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爪 (손톱 조)? 손을 아래로 뒤엎고 물건을 움켜 집으려는 모양이므로 ?(할퀼 조)의 初文이라고 한다.? 或者는 새의 발톱을 그린 것으로 本義는 새의 발톱이라고 한다.? 孚(미쁠 부), 爲(할 위)孚 (미쁠 부)? 새끼(子)가 알에서 孵化하는 것을 말한다. 알은 품을 때는 발톱을 사용하므로 爪를 따른 것이다.? 새가 젖을 먹이고 알을 품는 데에는 항상 그 시기가 같아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때문에 진실되다고(信) 말하였다.? 或者는 ?와 子를 따른 것으로, 한 손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어루만지는 모양이라고 하여, 本義는 사랑하는 대상을 어루만지다라고 한다.? 또 ?(사로잡을 부)의 初文이라고 하기도 하고, 孵(알 깔 부)의 初文이라고도 한다.爲 (할 위)? 說文解子에서는 爲는 암컷원숭이라고 하였다. 원숭이는 걷는 짐승으로 발톱 사용하기를 좋아하며, 발톱은 원숭이의 상징이다. 글자 아래의 ??는 원숭이(머리, 눈, 몸, 발)의 형체이다.? 或者는 한 손으로 코끼리를 끌고 일을 시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하다가 本義라고 한다.? (잡을 극)? 사람이 무릎을 꿇어 앉아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받쳐 잡고 있는 모양으로, 本義는 잡다라고 한다.? (심을,재주 예/형세 세)?? 한 사람이 땅에 무릎을 끓고 앉아 두 손으로 작은 나무를 잡고 그것을 심고 있는 모양을자를 그린 것이다. 소?에서는 직선으로 곧게 펴서 原形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 놀라서 볼 경)과 같은 글자는 目 ?를 세로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가로로 쓰고 있다.? ?(소경 완), ?(눈 안), 相(서로 상), ?(볼 간), ?(잘 수), ?(돌아볼 권), ?(소경 맹), ?(사팔눈 질), ?(눈깜짝일 순)相 (서로 상)? 相은 살펴보는 것이다. 目을 따르고 木을 따른다.? ??에 따르면 지상의 보이는 것들 중에서 樹木(수목) 만큼 보기 좋은 것은 없다 고 하였다.看 (볼 간)? 바라보는 것이다. 手의 아래에 目을 따른다.睡 (잘 수)? 눈 꺼풀이 아래로 드리워지는 것으로 앉아서 자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瞑 (눈 흐릴 명)? 명은 눈을 감는다는 것이다. 目과 冥(어두울 명)을 따른 會意字로 冥은 소리도 나타낸다.盲 (소경 맹)? 盲은 눈동자가 [없어서 눈에서 흑백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다. 目을 따르고 亡?이다.?100. ? (두리번 거릴 구) 61p? 좌우 두 눈으로 사방을 살펴보는 것을 뜻한다.? 瞿(볼 구, ?/?/?)는 ?와 같은 글자라고 한다.101. 眉 (눈썹 미)? 눈과 눈썹을 그린 것이다.省 (살필 성)? 眉가 ??된 것과 草木이 처음 생겨나는 것을 그린 ?(초)가 더하여 만들어진 글자이다. 작물이 처음 생길 때는 자주자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에 ?(초) 를 더한 것이다.102. 盾 (방패 순)? 盾은 방패이다. 몸을 지키고 머리와 눈을 보호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或者는 소?에서 ? 모양을 한 것은 방패를 옆에서 본 모양이라고 하고, 十은 그것의 손잡이를 나타내며, 目은 그것으로 막는 머리, 눈, 몸 등을 눈으로 대표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103 自 (스스로 자)? 코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면서 그의 코를 가리키므로 自己라고 ?하고, 다시 ??되어 ?나 ?을 나타내고, 또 오로지 와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되자자, ?(줄 비)?을 따라 鼻라고 한 것이다.?104 ? (자) 62p? 이 글자가 自와 같은 글자이면서도 와 유사한 키 받침을 더하고 있고, 죽도 더하게 되었다. 기와 ?는 같은 글자이며, 본의는 곡식을 까부르는 키이다.145. ? (대 기)? 밑의 기초이다. 물을 ???아두는 ?를 말한다.? 기는 위가 평평하고 아래는 다리가 있어서 그 위에 ?물을 차릴 수 있는 상이다.? 혹자는 ?(대 기)와 ?(안석 궤)는 형음의가 모두 ??하여 본래 한 글자였는데, ??이 조금 변하여 나뉘어 둘로 되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典 (법 전)? ??의 서책이다. 책이 ?(? 기) 위에 있는 것을 따른다. 책이 기 위에 소중하게 놓여 있는 것이다.奠 (제사지낼 전)? [술과 음식을] 차려두고 제사를 지내다. ?을 따르며, ?은 술(?)이다. 아래는 술과 음식을 놓아두는 ?이다.145. 左 (왼 좌)? 혹자는 갑골문은 왼손을 그렸다고 한다.? ??시기부터 공을 더하여 사용하였는데, 공은 공작을 뜻하므로, ??(왼쪽에 서서 일을 돕다) 의 뜻을 나타내게 되었다가, 후에 인을 증가시켜 ?를 만들어 돕다의 의미를 나타내게 하고 좌는 왼쪽만을 나타내게 되었다고 한다.147. 工 (장인 공)? 說文解子에서는 공, ???, 상인유??야. ??동음. (공은 ??한 ??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를 가지고 있는 것을 그렸다. ?와 ??원리가 같다) 라고 하였다.? 혹자는 지름이나 선의 ??를 재는 공?이며, ??되어 공작, 공?, ??등으로 되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무당이 사용하는 일종의 법기인데, 후에 점차 공작, 공?, ??, 선장 등의 의미로 ??되었다. 고 한다.巨 (클 거)? 거는 ??(규구 ??와 자 법도, 본보기)의 ?(곱자)이다. 공을 따르고 손으로 곱자를 잡고 있는 것을 본뜬 것이다.?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큰 자의 모양을 그린 것으로 ?(구)의 초문인데, ?하여 크다라는 뜻이 되었다고 한다.?148. ? (펼칠 전) 83p? 공은 정교하게 꾸미다 라는 뜻인데, 4개의 공을 합하였으므로 더욱 정교하다 는 뜻이다.149. 巫 (무당 무)? 소?은 여자가 두 개의 소매에 걸
무역과 보험 REPORT-제주대학교 황정봉 교수님교류수학생 김현석2012F20533과제1> 보험계리사, 손해사정사, 보험설계사(보험모집인), 보험중개사에 관하여 각각 요약설명1.보험계리사-)어원은 라틴어, 로마 원로원의 기록에 종사하는 서기를 actuarius라고 칭하였다. 1762년 영국에서 최초의 과학적 생명보험회사인 에퀴터블이 설립되면서 액츄어리라고 하는 칭호가 생겼다. 액츄어리는 광의로는 확률의 이론을 경제 및 사회의 실제문제에 응용하는 것을 직능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생명보험회사는 사망률, 재해율, 질병률 등 경험률의 작성, 보험료 및 책임준비금의 계산, 잉여금의 분석, 보유계약고의 설계관리, 외무사원에 대한 지급규정의 검토 등을 한다. 손해보험회사에도 액츄얼리를 두고 보험수리, 연금수리 관련 업무에 종사시키고 있다. 우리나라 보험업법에서는 보험수리에 관한 업무는 보험계리인이 담당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보험계리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보험감독원장이 실시하는 1, 2차 시험에 합격하고 소정의 실무수습을 마친 후 보험감독원에 등록해야 한다.즉 )보험계리사는 직접적인 영업활동을 하는 인력이 아닌 보험회사 전반의 위험을 분석하고 평가, 진단하며 보험상품 개발에 대한 인가, 허가 업무와 보험료 및 책임준비금을 산출한다. 따라서 회계사와 그 개념이 비슷하나, 보험 계리사와 회계사의 업무는 상이하다.2.손해사정사-)보험사고로 생긴 손해에 대해 그 손해액을 결정하고 보험금 지급을 담당하는 사람을 말한다. 국내에서는 보험업법에 따라 보험회사와 보험계약자 사이에 전문성을 갖고 공정한 손해사정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손해사정사를 고용 또는 선임하는 제도를 1985년부터 마련해 시행한 바 있다. 손해사정사의 주요 업무는 손해발생사실의 확인, 보험약관 및 관계법규 적용의 적정 여부 판단, 손해액 및 보험금의 사정, 기타 손해사정에 필요한 사항을 조사하는 것을 순서대로 하는 것이다.손해사정사는 보험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고와 손해를 조사해 손해액과 보험액을 정하는 일을 2003년 5월 개정된 보험업법에서부터 보험설계사로 칭하고, 보험회사를 위하여 보험계약의 체결을 중개하는 사람으로서 보험업법의 규정에 따라 등록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법인이 아닌 사단 및 재단도 포함된다.보험설계사는 생명보험설계사와 손해보험설계사 그리고 제3보험설계사로 구분한다. 보험설계사가 되려면 먼저 생명보험협회와 손해보험협회가 매달 1회 주관하는 보험설계사 자격시험에 합격하여야 하며, 생명보험·손해보험·제3보험의 구분에 따라 각각 금융위원회가 정하는 연수과정을 이수하고 관계업무에서 1년 이상 종사한 경력을 갖추어야 한다. 보험회사는 이러한 요건을 갖춘 소속 보험설계사를 금융감독위원회에 등록하여야 한다.)보험회사는 다른 보험회사에 속하는 보험설계사에게 모집(보험계약의 체결을 중개 또는 대리하는 행위)을 위탁하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보험설계사도 소속된 보험회사 외의 보험회사를 위하여 모집하지 못하도록 금지한다. 단, 보험업법 시행령의 규정에 따라 소속된 보험회사 외의 보험회사를 위하여 교차모집을 할 수 있으며, 이 경우 등록요건을 갖추어 교차모집보험설계사로 보험협회에 등록을 하여야 한다.영업범위는 각 구분에 따라 보험업법에 규정되어 있다. 생명보험설계사는 생명보험, 퇴직보험을 포함한 연금보험 그리고 그밖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보험종목, 손해보험설계사는 화재보험, 항공·운송보험을 포함한 해상보험, 자동차보험, 보증보험, 재보험 그리고 그밖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보험종목, 제3보험설계사는 상해보험, 질병보험, 간병보험 그리고 그밖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보험종목을 영업범위로 한다.한편, 오늘날 보험설계사의 업무는 단순한 모집을 넘어 재무상담·생활설계·대출상담 등 가정 금융설계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고객의 절세 방법과 재산증식을 위한 효율적 투자를 보험상품과 연계한 재무상담, 고객의 인생주기에 따라 필요한 목돈 마련과 노후보장을 위한 필요자금 설계, 가계대출이나 주택마련대출 등에 관한 상담 등의 업무를 수행하여야 하므로 금융 전반에 관하여존에 운영하던 수출보험 제도와 운영상품에는 변동이 없다. 수출보험은 수출기업이 수출을 한 후 또는 금융기관이 수출자 등에게 수출금융을 제공한 후 수입자로부터 수출대금을 회수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손실을 보상해 줌으로써 국내기업의 해외진출을 지원해 주는 비영리 정책보험으로, 단기수출보험, 중장기수출보험, 수출신용보증, 환변동보험 등의 수출보험(보증)상품이 제공되고 있다.수입보험은 주요자원(철, 동, 아연, 석탄, 원유 등)을 수입하는 국내수입기업이 선급금 지급조건 수입거래에서 비상위험 또는 신용위험으로 인해 선급금을 회수할 수 없게 된 경우에 발생하는 손실을 보상하는 제도이다.)수출보험제도는 무역거래상 수반되는 위험 가운데 해상보험 등 통상의 보험으로 담보될 수없는 위험, 득 전쟁이나 내란 등 비상위험, 수출계약 상대방의 파산 또는 대금지급지연 및 거절 등에 위한 신용위험 등으로부터 수출자 등이 입은 손실을 보상해 줌으로써 수출 진흥을 도모하기 위한 비영리 정책보험이다. 수출보험의 기능은 수출거래상의 불안제거기능, 신용제고기능, 무역관리제도로서의 기능, 신용조사기능이 있다. 수출거래상의 불안제거기능은 수입국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보상하여 줌으로써 수출거래에 따른 불안을 제거하야 준다.신용제고기능은 보험사고가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기업이 받는 손실을 보상함으로써 수출상의 신용을 제고하고 자금의 유동성을 증대시켜 준다.무역관리제도로서의 기능은 수출보험은 담보위험의 범위와 보상율 및 보험료 등 보험의 인수조건을 정책적으로 적절히 조정함으로써 수출자의 활동을 촉진하거나 제한할 수 있어 간접적인 무역통제수단의 하나로 이용된다.신용조사기능은 수출보험공사에서는 해외수입자및 국내수출자의 신용상태와 수입국의 정치 경제동향 등의 조사를 통하여 발생가능한 모든 위험을 조기 파악하여 보험사고를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수출자를 보호해 주고 있다.종류는 단기성 보험으로는 단기수출보험, 농수산물수출보험, 문화수출보험, 해외마케팅보험, 부품 소재 신뢰성보험이 있다. 단기수출보험은 수출대금의 결제기간산업종합보험(지원가능한 특약항목을 『녹색산업종합보험』 형태로 제정하고, 녹색산업에 해당되는 경우 기존이용 보험약관에 수출기업이 선택한 특약을 추가하여 우대하는 제도), 해외자원개발펀드보험〈해외자원개발사업에 투자하여 발생 할 수 있는 손실을 보상하는 보험 수출보험기금과 별도로 투자위험보증계정 운영)〉이 있다. 수출신용보증에서는 선적전보증 선적후보증이 있는데, 수출입자가 수출입계약과 관련하여 금융기관 등으로부터 대출을 받거나 환어음 매각에 따른 금융기관앞 수출금융채무를 공사가 연대보증을 한다.)수입보험은 국내 수입업자의 자금조달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해외수출자의 계약불이행으로 적기에 화물을 인도받지 못하거나 선불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의 손실을 보상하는 제도이다. 수입보험은 수입자용 수입보험, 금융기관용 수입보험, 국외기업신용조사 가 있다.수입자용 수입보험은 국내수입기업이 선급금 지급조건 수입거래에서 비상위험 또는 신용위험으로 인해 선급금을 회수할 수 없게 된 경우에 발생하는 손실을 보상한다.금융기관용 수입보험은 금융기관이 주요자원 등의 수입에 필요한 자금을 수입기업에 대출(지급보증)한 후 대출금을 회수할 수 없게 된 경우에 발생하는 손실을 보상하고, 국외기업신용조사는매년 3만건 이상의 국외기업 신용조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신용조사 서비스 이용시 공사가 제공하는신용조사보고서를 통해 국외기업의 기본정보, 재무현황, 경영성과 등을 확인할 수 있다과제3> Lloyd's(로이즈)의 역사와 발전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요약설명.)*정의 - 엘리자베스 1세시대가 될 때까지 영국인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영국의 무역 및 금융은 외국상인의 지배하에 있었다.즉 무역은 13세기경부터 Streetyard에 거주하고 있던 한자상인 이 독점하고 있었고, 금융은 이탈리아 북북 Lombardy지방에서 이주하여 롬바르가에 거주하던 롬바드 상인이 지배하고 있었다. 은행업무와 마찬가지로 해상보험은 영국에 전해준 것은 이들 롬바드 상인이었다.해상보험이 언제부터 런던에서 행해지게 되종이쪽지 상에 위험에 대한 비율을 명기하고 저명을 하는 개인베이스의 보험이었다. 따라서 종이 쪽지상에 저명하고 위험을 하는 사람들은 해운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진 상인 들이었다. 로이즈 커피점은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으면 이에 따라 필기도구도 제공하였으면 마침내 보험이 주업소가 되었다. 로이즈는 해운 뉴스를 담은 Lloyd‘s News도 발간하였다.엘리자베스 1세시대가 될 때까지 영국인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영국의 무역 및 금융은 외국상인의 지배하에 있었다. 즉 무역은 13세기경부터 Streetyard에 거주하고 있던 한자상인 이 독점하고 있었고, 금융은 이탈리아 북북 Lombardy지방에서 이주하여 롬바르가 에 거주하던 롬바드 상인이 지배하고 있었다. 은행업무와 마찬가지로 해상보험은 영국에 전해준 것은 이들 롬바드 상인이었다. 해상보험이 언제부터 런던에서 행해지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547년 및 1548년 에 발행된 보험증권의 기록에 비추어 볼 때 늦어도 16세기 초에는 해상보험이 시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 이들 두 개의 증권 모두 본문은 이탈리아어이고 보험자 인수란 만이 영어로 기재되어 있어 영국에서 최초로 해상보험을 영위한 자가 이탈리아 인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영국상인은 롬바드 상인의 번영을 시기하여 1483년 이후 롬바드 인을 억압하는 법률을 수차에 결쳐 제정함으로써 그들의 지위가 극도로 제한되었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여왕시대까지 롬바드 상인은 영국에서 희망을 상실하고 결국 국외로 퇴거하였다. 그리고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한자상인도 1697년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국외롤 추방됨으로써 영국의 무역‥보험‥금융의 실권은 이윽고 영국인이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1568년 왕립거래소가 개소됨에 따라 해상보험거래도 여기서 행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해상보험 사업은 아직 전업화 되지 못하엮고 , 상인이나 은행가의 부업으로 영위되었다. 로이즈 보험회사는 17세기말 해운업계 상인 들이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