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벨기에 플랑드르 분리독립 움직임Ⅰ. 서론Ⅱ. 벨기에와 플랑드르(1)벨기에 기본개괄(2)플랑드르 지방Ⅲ. 분쟁의 요인(1)분쟁의 원인(2)신플랑드르 연대(3)갈등의 사례(4)분리 독립 움직임과 이해당사국들의 입장(5)전망Ⅳ. 결론Ⅴ. 참고자료Ⅰ.서론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는 수많은 갈등을 가지고 있다. 민족, 인종, 종교, 문화 등 수많은 갈등의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에도 도농간의 갈등, 전라도와 경상도간의 지역적인 갈등 등 다수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모든 갈등들을 국제분쟁의 대상이라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국제 분쟁이란 수많은 갈등 중에서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수행하는 주체들이 세력화한 장기적인 활동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유혈충돌과 같은 물리적인 수단이 존재할 수도 있다.우리가 생각하는 유럽 내의 모습은 선진국이고, 유럽연합이 발족한 뒤 유럽은 미국 등과 경쟁하기 위해 통합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적인 움직임 속에서 각 민족들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가장 최근의 국제적 화두는 단연 우크라이나의 분리 문제이다. 크림반도의 러시아인 자치주의 독립을 계기로 유럽 내 많은 지역에서 분리 독립운동들이 거세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스페인 카탈루냐, 영국 스코틀랜드, 벨기에의 플랑드르 등 고유의 역사·문화를 간직한 지역들이 본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경제난은 역사적 이유로 지속돼온 분리주의 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스페인에서는 정부 재정이 불공평하게 쓰이고 있다는 불만이 커졌고, 독일어권인 이탈리아 북부의 남티롤에서는 부패하고 재정난에 허덕이는 남부 지방과 인연을 끊고 1차 세계대전 당시 속해 있던 오스트리아와 합병하거나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유럽 정치가 좌우 이념 차이로는 더 이상 유권자들을 끌어들일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자 정당이 지역과 민족에 기반을 둬 지지를 호소하면서 분리주의 운동이 힘을 받는 면도 있다.이와 종교가 있다. 이들 6개 종교가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보조금을 받는다. 벨기에의 의무교육 기간은 12년이다.벨기에는 입헌군주제의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의회는 상·하원 양원제로 구성되어 있다.(2) 플랑드르 지방이란?플랑드르 지역은 벨기에어(語)로는 ‘블렌데렌(Vleanderen)’, 영어로는 ‘플랜더스(Flanders)’라고 한다. 북해(北海) 연안의 저지대로 스헬데(에스코)강(江)이 동쪽 경계를 이룬다. 역사의 변천을 따라 플랑드르 지방의 경역도 크게 변하여, 한때는 네덜란드의 남부에서 프랑스의 북동부 일대를 통틀어 지칭한 일도 있었다. 이때의 면적은 1만㎢가 넘었다.북해에 임하여 북유럽과 지중해, 영국과 라인 지방을 잇는 교통의 십자로에 위치하기 때문에 평화시에는 브뤼주를 중심으로 하여 통과(通過)무역이 번창하였고, 유럽 최대로 알려진 모직공업도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전략상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전란(戰亂)으로 자주 지배자가 바뀌고 영역에도 변화가 뒤따랐다. 1482년부터 합스부르크가(家)가 영유하였고, 1584∼1714년에는 에스파냐가 지배하였으며(에스파냐령 네덜란드의 일부), 1830년 벨기에 독립전쟁으로 네덜란드에서 분리되어 지금처럼 동·서 플랑드르 2주가 성립되었다.17세기 후반에 릴을 포함하는 플랑드르 서단(西端)이 프랑스에 귀속해 있었으므로 벨기에의 저지대가 지금도 플랑드르의 중요한 부분으로 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군이 점령하였다. 10세기경부터 토산 양모를 원료로 하는 모직공업이 일어나 13세기경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 때 영국이 양모의 수출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타격을 입었다. 전란을 피하여 다수의 직공이 영국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모직물 생산의 중심은 플랑드르에서 영국의 요크셔로 이동되었다. 브뤼주 ·겐트 등의 역사적 도시가 있고, 플레미시파(派)로 불리는 화가·건축가의 작품들이 이들 도시를 장식하고 있다.Ⅲ. 분쟁의 요인(1) 분쟁의 원인벨기에만큼 국가라는 관념이 하고 있다. 기독민주당도 플랑드르 지역 기독민주당이 있고, 왈롱 지역 기독민주당이 있다. 같은 이념과 정책을 표방하지만 지역별로 나눠진 ‘동지 정당’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 다른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당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언어권 별로 같은 이름의 정당이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양측의 갈등을 부추기는 또 하나의 요인은 수도 브뤼셀의 선거구 획정 문제다. 인구 100만명의 브뤼셀은 지역적으로는 플랑드르에 속해 있지만 주민의 90%는 왈롱계인데, 선거구는 외곽 플랑드르권인 할레_빌보르데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이 때문에 플랑드르 쪽은 선거구를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왈롱은 반대하고 있다.이와 같은 분리 독립의 움직임이 거세진 것은 2010년의 총선에서 신플랑드르 연대가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며 플랑드르 지역의 최대 정당이 되면서 거세졌다.(2) 신플랑드르 연대플랑드르 지역의 분리 독립을 위한 최대의 움직임은 신플랑드르 연대(약칭N-VA)의 활동이다. 이들은 가장 강경한 분리 독립 노선과 자치권 확대를 요구해오고 있다. 특히 2010년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 플랑드르의 독립 움직임은 거세지고 있다.당대표인 바르트 데 베베르는 “더 플랑드르적이고, 덜 벨기에적이며, 더 유럽적인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벨기에의 국가부채가 초래하고 있는 제도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고 있다. 최종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유럽 연방 내부에서, 플랑드르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이들은 연방 구성국의 자율권을 확대한 새 헌법을 추진하고 있으며, 오는 5월의 총선에서 승리할 시 자치정부를 출범하겠다고 선언하였다.(3) 갈등의 양상(사례)1. 벨기에의 540일 간의 무정부 사례2010년 6월에 치러진 벨기에 총선거에서 북부 플랑드르(네덜란드어권) 지역의 분리, 독립을 목표로 하는 '신플랑드르 연대(N-VA)'가 큰 격차로 승리를 거둔 후 벨기에 분열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그렇지만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플랑드르 정당에만, 왈롱지역에서는 왈로니아 정당에만 투표해야 하는 방식 한 벨기에 플랑드르 분리주의자들은 이날 노란색 바탕에 검은 사자가 새겨진 플랑드르 깃발과 “유럽, 우리는 자결권을 위해 투표하겠다.”는 글이 적힌 팻말을 들고 브뤼셀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본부 건물에서 유럽연합 의회를 향해 행진했다. 또한 지역 상징색인 붉은색과 노란색 의상을 입고 나온 스페인의 카탈루냐인들은 독립을 외쳤다. 카탈루냐의 수도 바르셀로나에서 온 이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 왔다”며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알리고 분리주의 운동을 확대하길 원한다”고 행진 시위했다.3. 중국의 판다 외교와 지역갈등2014년 2월 중국이 벨기에에 '양국 친선'의 상징으로 선물한 판다가 벨기에의 지역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시진핑이 준 중국 판다 '싱후이(星徽)'와 '하오하오(好好)'가 이날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도착한 가운데 이를 계기로 벨기에 남부와 북부 지역의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게 되었다.문제는 작년 9월 벨기에가 중국으로부터 판다 한 쌍을 15년 기한으로 임대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판다 한 쌍을 어느 지역에 있는 동물원에 보내느냐를 놓고 벨기에 남부와 북부의 주민들이 다시 두 편으로 갈라진 데서 비롯됐다.벨기에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북부 플랑드르 지역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남부 왈롱 지역간의 언어적·정치적 갈등이 지속돼 왔다. 이러한 가운데 벨기에로 보내진 판다의 새 보금자리가 프랑스어권인 남부 왈롱 지역의 파이리 다이자 동물원으로 결정되자 북부 플랑드르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플랑드르 지역 주민들은 판다 사육장이 파이리 다이자로 결정된 것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이 지역 부근 출신인 뤼포 총리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유서 깊은 북부의 안트베르펜 동물원에 판다를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며 불만을 표하고 나섰다.(4) 분리 독립의 움직임과 이해당사국들의 입장1. 플랑드르 지역의 입장극우파 정당인 ‘블람스 벨랑’의 당수 필립 드윈터에 따르면 “벨기에는 강대국 사이의 완충지대로 건립된 인공 국가이기 때문에 사실은 국가 국민 통합을 목표로 분주하고 있다.3. 스페인 카탈루냐의 입장신플랑드르 연대의 2010년 총선 승리는 결국에는 유럽연합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 지 보도에 따르면 바르트 데 베베르는 신플랑드르 연대의 지도자로 분리주의를 지향하는 중도 우파이다. 그가 선거 승리의 그 날 밤에 거대한 유럽 연합 깃발을 들고 승리기념 집회단상에 올랐는데, 이는 분리주의의 관습적인 상징이 변모했음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유럽 연합에 대한 구애이자, 단절을 주장하는 정당측이 제공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메시지이고, 플레미시라는 정치적 결사를 위한 주장이 유럽 연합 건설 계획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의 찬조적인 입장은 그 지역의 분리 독립 움직임과 같이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페인 본토와는 달리 유독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4. 스페인, 영국 등의 입장영토적 분리 독립움직임이 진행중인 국가에서는 플랑드르 지방의 독립문제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스페인의 경우에도 카탈루냐의 분리 독립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는 최근 “어떤 지역이든 독립한다면 EU로 들어오는 문을 영원히 막아버리겠다”고 경고했다.최근에 영국 이탈리아 등 분리 독립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는 국가에서는 스페인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만약 분리 독립이 이뤄진다면 연쇄적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계속되기 때문이다.5. 프랑스 극우 정당 입장프랑스의 극우정당은 벨기에 분리 독립 상황을 이용하여 자국의 이익을 늘리려 하고 있다. 만약 플랑드르 지역이 벨기에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왈롱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고자 하는 입장이다.실제로 2011년에 벨기에가 무정부 상태로 진행되고 있을 당시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마린 르 펜 당수는 현재 그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데 만약 플랑드르가 독립을 선언하고 벨기에가 갈라지면 프랑스는 왈롱을 환영하며된다.
피에 젖은 다이아몬드와 외다리 소년들-다이아몬드 전쟁과 그 것이 휩쓸고 간 흔적들과 목 명 : ooooooo담당교수 : ooo 교수님학 과: 목포대 ooooo과학 번 : oooooooo성 명 : ooo제 출 일 : 2013년 7월 7일- 목 차 -Ⅰ. 서론Ⅱ. 시에라리온Ⅲ. 시에라리온 내전1) 원인2) 진행 과정Ⅳ. 내전의 휘발유, 다이아몬드Ⅴ. 시에라리온 내전이 남긴 것들1)시에라리온의 전반적 상황2)추락한 인권Ⅵ. 결론 - 느낀점※참고문헌1. 서론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기에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 속에 시에라리온이라는 나라가 있다. 인구 6백만 명의 작은 나라 시에라리온에는 아무리 보석에 문외한이라도 잘 알고 있는 다이아몬드가 많다. 그러나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는 축복의 날에 함께하는 반짝이고 단단한 다이아몬드가 아닌 참혹한 내전의 상징이 되었다. 이 반짝이는 돌덩어리는 시에라리온 아이들이 아이로 자라지 못하게 하며, 수많은 시에라리온 국민들의 팔과 다리를 앗아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991년에 사직되어 2002년에 공식으로 종료된 시에라리온 내전은 종결된 지 10년이 넘게 지났지만 그 흔적은 시에라리온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이 글에서는 시에라리온의 내전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내전의 진행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조사함으로써 전쟁이 시에라리온 사람들의 삶에 끼친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다.2.시에라리온▲시에라리온의 국기아프리카 대륙 서부 대서양 해안에 위치한 시에라리온은 기니와 라이베리아에 인접해있다. 약 6백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고, 정부의 소재지이며 가장 큰 도시인 프리타운을 수도로 삼고 있다. 시에라리온 국민들은 공식 언어로 영어를 사용하며 종교는 이슬람교, 토착신앙, 기독교가 있다.15세기 불룸족이 살던 시에라리온으로 멘데족과 템네족이 이동하였고 1495년에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해안 지역에 요새를 건립하고 이즈음부터 유럽 상선이 해안에 정기 전 지역에 영국 보호령이 선포되었다. 196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 시에라리온은 71년에 공화국으로 출범하게 되나 91년에 육군 장교 출신 포다이 산코가 혁명연합전선 (RUF)를 결성하고 부정부패 척결을 주장하며 반정부 투쟁에 돌입하게 되는데, 점차 권력 장악으로 성질이 변하면서 시에라리온 내전으로 확대가 되게 되고, 이 내 전은 2002년 카바 시에라리온 대통령이 내전 종식을 선언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된다.3. 시에라리온 내전1)내전의 원인자원 전쟁이라고도 분류되는 시에라리온 내전은 다이아몬드에 의해 일어난 불행한 사건 같지만 그것은 오해다. 시에라리온 내전이 다이아몬드 전쟁이라고도 불릴 만큼 다이아몬드가 시에라리온 내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시에라리온 내전의 요인은 따로 있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사실상 자원 전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자들의 이권투쟁과 사회의 불안정한 환경이 결합한 결과라고 봄이 옳을 것이다. 1961년에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한 시에라리온은 독립을 쟁취한 후 정치적 혼란이 오고 민주정을 수립하지만 쿠데타와 내전이 되풀이되는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의 자취를 답습한다.시에라리온은 독립 이후 독립 이후의 혼란 끝에 의회에 의한 간접선거를 채택하고 초대수상으로 인민당(SLPP)가 당선되어 민주 정부를 형성하게 되지만 두 차례의 군사 쿠데타로 군부가 정권을 장학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1991년 포데이 산코가 이끄는 혁명연합전선(RUF)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 사건은 본격적인 시에라리온 내전의 원인임과 동시에 내전의 시작인 된다.2)내전의 진행과정내전이 진행되던 1996년 민주적인 선거방법으로 티잔 카바 정부가 출범한다. 그러나 1997년 쿠데타 세력이 봉기를 일으켜 RUF에 합류하게 되고 이로 인해 더욱 규모가 거대해진 RUF는 정부군과의 치열한 교전 끝에 1999년 시에라리온의 수도인 프리타운을 장학하게 된다. RUF는 프리타운을 장학한 6일 간 방화, 약탈, 조직적 강간도 모자라 죄 없는정한다. 이러한 국제군의 개입은 UN 평화유지군의 파병을 촉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1만 6천명의 평화유지군이 시에라리온으로 파견되고 로메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종전이 선언된다. 이렇게 시에라리온엔 평화가 온 듯 했으나 1년을 채 유지하지 못했다. RUF 반군에 대한 완전한 무장해제 조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2000년 RUF의 재 반란으로 평화유지군 수백 명이 포로로 잡히는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하였다. 이에 평화유지군은 협정 체결 후 사면조치를 받았던 RUF의 중심인물 포데이 산코를 다시 잡아들였고 산코는 UN이 지원하는 시에라리온 전범재판을 받기 위해 구금된 도중에 폐경색으로 사망한다.2001년 반군 무장해제로 인해 내전이 종결되었으며 2005년 평화유지군도 공식 철수했 다. 다이아몬드 이권을 둘러 싼 내전은 종결되었으나 분쟁의 결과 국내 경제가 피폐해지고, 농업 등을 포함한 산업 기반이 붕괴되어 국가 경제를 주로 선진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 는 실정이다.4.내전의 휘발유, 다이아몬드2010년 8월 네덜란드 헤이그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 법정에서 영국 출신의 모델 나오미 켐벨은 찰스 테일러를 심판하는 재판에 증인으로 섰다. 캠벨은 찰스 테일러에게 받은 다이아몬드를 ‘더러운 돌멩이’라고 표현하며 그에게 다이아몬드를 받은 사실을 인정했다.1930년에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이래, 시에라리온은 다이아몬드 채굴을 기반으로 한 다이아몬드 수출을 꾸준히 해왔다. 시에라리온에 풍부한 이 다이아몬드라는 존재는 내전 상황에 휘발유 같은 존재가 되어 전쟁이 더 타오르도록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전 대통령인 찰스 테일러가 있다. 찰스 테일러는 이웃 나라 시에라리온에서 내전이 벌어지자 다이아몬드 채굴권을 반란군인 RUF와 나눠가지는 조건으로 혁명연합전선에 자금과 무기를 공급했다. 당시 시에라리온에서는 다이아몬드를 채굴할 수 있는 기업들이 모두 정해진 상태였으나 찰스 테일러는 채굴권을 준 종전 정부가 사라지고 새로운 정부가 기전으로 갈 수 있었던 큰 이유이다. RUF는 그에 그치지 않고 주민들의 노동력까지 착취해 1억 2,500만 달러어치의 다이아몬드를 생산해서 무기 구입자금으로 이용했다. 다이아몬드는 반군의 든든한 자금줄임과 동시에, 전쟁을 끝나지 않게 만다는 원동력이었다.영원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거두어 가는데 큰 일조를 하였기에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는 시에라리온만의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짐바브웨, 콩고, 코트디부아르등 독재정권이나 전쟁 때문에 몸살을 앓았던 아프리카 지역 나라들에서 생산된 모든 다이아를 칭한다.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하여 나온 방안이 ‘킴벌리 프로세스’다. 2000년 다이아몬드 생산국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킴벌리에서 만나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밀수출을 막는 방법에 논의하였고, 다이아몬드의 소비자들이 구매한 다이아몬드가 폭력과 관계가 없다는 것임을 확인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 유통 제재 방안을 강화하기 위한 회의 끝에 다이아몬드의 수입과 수출에 있어 "국제 인증"을 두는 방안이 채택 되었다. 이는 모든 다이아몬드 매매에 있어 지정된 단 하나의 포장만을 사용하도록 법제화하며 다이아몬드 시장 세계연맹에서 벗어나는 다이아몬드 거래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2001년 조직된 세계 다이아몬드 협회는 모든 다이아몬드가 전쟁범죄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라는 인증을 받을 수 있는 제도의 초안을 마련했고, 킴벌리 프로세스는 2002년 3월 UN의 승인을 받았으며 2년의 논의 끝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킴벌리 프로세스는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킴벌리 프로세스는 사실상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고 있다. 원산지를 속인 밀거래가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또 정부통제지역에서 채굴된 다이아몬드 지역은 문제를 삼고 있지 않는다. 때문에 다이아몬드가 부패한 독재정권의 기반이 되고 있는 현실은 아예 막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더 실효성 방안이 필요한 실정이다.▲ 다이아에 불과한 1인당 국민소득과 80%에 가까운 실업률로 인해 절도와 강도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반면 정부의 치안 시스템은 부패하여 국민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사지가 절단된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젊은 여성들은 매춘에 뛰어 들었다. 이러한 매춘이 성행하면서 에이즈가 확산되어 많은 이들을 병들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이러한 시에라리온 국민들을 관리할만한 의료 환경은 매우 열악하여 시에라리온 국민의 평균 수명은 34세로 47세인 아프리카 평균 수명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또한 다른 내전 국가들이 겪는 문제 중 하나인 해외 인력 유출도 심각한 상황이다.2) 추락한 인권과 인명피해20만 명이 숨지고 2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시에라리온 내전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 느끼게 해준다.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 찰스테일러의 원조로 기세등등해진 반란군은 정부가 싸우면서 정부에 협조한 혐의가 있는 사람들의 사지를 잘라 버렸다. 총을 쏘거나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 손목을 자르고, 발목을 절단해서 걷지 못하고 굴러다니게 만들기도 했다. RUF의 수장 포데이 산코는 특히 티잔 카반 정권을 투표한 사람들의 손을 무차별하게 잘랐다. 손이 없다면 더 이상 투표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괴상한 논리의 주장 아래 행해진 테러였다.사지가 절단 된 사람들 중에는 앳된 10대 소년들도 있다. 그들은 대부분 소년병 출신들이다. 소년병이란 대여섯 살 어린 아이들부터 10대까지 강제로 징집되어 전투에 참가한 아이들이다. 국제 인권 비정부기구인 국제사면위원회와 세이브 더 칠드런의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시에라리온에는 약 5천 명 가량의 소년병들이 RUF에 의해 강제 징집되었다고 한다. 소년병이란 이름으로 잔인한 전쟁에 내몰린 어린 아이들은 전투에서 총알받이가 되거나, 짐을 나르고 전령이나 스파이가 되었다. 소년병을 지휘하는 어른들은 소년병들이 자신들에게 복종하고 전쟁에 두려움 없이 뛰어들게 만들기 위하여 마약을 먹이는 일까지 자행했다. 소년병들은 마약에 취한있다.
소말리아 해적, 그들은 누구인가?목 차1. 해적의 깃발을 올려라2. 해적의 정의3. 소말리아 해적의 탄생배경1) 소말리아 해적, 그들은 누구인가?2) 그들은 왜 해적이 되었나?3) 해적 그리고 타자들의 이야기...4. 소말리아 해역 해적사건 발생현황5. 국제사회의 대응책6. 한국선박의 소말리아 해적 피랍사건7. 결론1. 해적의 깃발을 올려라동아프리카의 시한폭탄 소말리아가 이번에는 해적들로 인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소말리아 인근 아덴만 지역의 해적행위가 발호한 것은 어제 오늘일은 아니다. 그러나 갈수록 해적행위가 지능화되고, 해적들이 테러세력 및 국제 무장 조직등과 연계하면서 해적에 대한 우려가 날로 증가 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러시아의 한 크루즈 회사가 해적에 대한 살육의 정당성을 들먹이며 새로운 관광 상품을 내놓아 논란이 되고 있다.지난 6월 25일. 러시아의 한 크루즈 회사가 해적퇴치를 모티브로 하는 크루즈 관광 상품을 내놓았다고 오스트리아의 경제지 지르샤프츠블라트지는 밝혔다.배의 여행경로는 해적이 가장 많이 출몰하는 지역인 소말리아 지부티 해역에서부터 케냐의 몸바사 해역까지며 기간은 7일이다. 여행 기간 중 크루즈는 시속 5노트 미만의 저속 항해를 하며 해적들의 이목을 끌고, 자연스레 해적들이 크루즈 근처까지 접근하게 한다. 접근한 해적이 발포 준비 등 도발을 하게 되면 관광객들은 배에 실려 있는 각종 개인화기 및 기관총 등을 사용 해적을 격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때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특수부대 출신 경호원들이 자리를 함께하게 된다. 여행비용은 다소 비싼 편으로 승객 1인당 5천200달러(약666만원)를 내면 복도 쪽 2인용 방을, 6천900달러(약 880만원)를 내면 베란다가 딸린 창가 쪽 방을 제공받는다. 무기 역시 렌탈이 가능한데 기종에 따라 비용이 각자 다르지만 가령 M-16 소총은 하루에 25달러(약 3만2천원)이며 탄약 100발당 16달러(약 2만원)다. 여행사측은 여행기간 중 최소 2차례 이상 해적의 공격을 받을 자신이부티, 남서쪽으로는 케냐, 서쪽으로는 에티오피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북쪽에는 아덴만과 예멘, 동쪽에는 인도양이 있다. 아프리카 대륙 동북쪽 뾰족하게 튀어나온 모습 때문에 ‘아프리카의 뿔’로 불리기도 한다.예로부터 소말리아는 고대 세계의 상업 중심지였다. 고대 이집트, 페니키아, 미케네에서 유향, 몰약, 향신료는 귀중품으로 여겨졌는데, 소말리아의 선원과 상인들은 교역을 통하여 이를 공급하였다.하지만 지금의 소말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이다. 보통사람들이 소말리아하면 떠오르는 것 하면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크게 내전과 가난이다. 20년을 넘긴 내전은 여전히 진행형이고 그동안 약 40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67만명가량은 난민으로 세계를 떠돌고 있다. 소말리아 내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유랑민이 된 사람도 142만여명에 달한다. 부족에 뿌리를 둔 세력들이 벌이는 내전으로 인해 소말리아의 젊은 세대들은 총과 함께 성장해 총으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런 상황에서 소말리아 국민들은 제대로 된 생업에 종사할 수가 없게 되었고 현재 소말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소말리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0달러(약 66만원) 정도로 세계 최하위권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하루 2달러 이하의 최저생계비로 연명하는 빈곤층도 인구의 75%에 달한다. 세계은행은 아예 소말리아의 실업률을 산출하지 않는다.자생적 소득원을 찾지 못한 소말리아의 경제는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100만명 가량의 난민들이 송금하는 돈에 의존하고 있다. 소말리아에 송금업체를 만든 이스마엘 아메드에 따르면 연간 약 20억달러(약 2조2280억원)가 송금되고 있다. 90년대 후반 유엔 조사에 따르면 소말리아 경제의 약 67%가 해외송금액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최근엔 그 의존도가 더 커졌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아메드는 “40%의 소말리아 가정이 단지 해외송금액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소말리아 경제의 생명줄과 같다”고 지지를 받고 있지만 통치의 범위는 대통령궁과 수도 모가디슈의 일부에 제한돼 있는 상태다. 특히 이슬람 급진세력이 급성장하면서 이슬람정군벌(ICU)이 2006년 6월 수도 모가디슈를 장악한 적도 있었다. 독재정치를 해온 바레 정권조차 부족 간 경쟁을 뿌리 뽑고 소말리아 내부의 동질감을 퍼뜨리려고 수년 동안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치안유지가 될 리가 없다.소말리아 해적이 사람과 배를 인질로 삼아 수십만 달러, 많게는 수백만 달러의 몸값을 받는다면 GDP가 600달러 밖에 안되는 소말리아에서는 산업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 정도로 엄청난 수입이 될 수가 있다. 작년만 해도 3천만 달러가 몸값으로 지불되었다는데, 소말리아 북부 푼틀랜드 지방정부의 1년 예산이 2천만 달러밖에 안되는 소말리아 실정을 생각해 봤을때 엄청난 수입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올해는 이미 몸값으로 지불된 돈이 5천만 달러를 넘었다고 한다.산업이라는 표현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 소말리아 북부지역 ‘일’항구에서는 외국 배가 한척 납치되어 들어올 때마다 도시 전체가 축제분위기가 된다고 한다. 배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가는 사람들 중에는 고급 SUV에 타고, 고급 양복을 빼 입고 휴대폰과 노트북 컴퓨터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해적들의 회계사’나 ‘인질협상가’라고 자청한다고 한다. 실제로 무엇이 되었든 이미 해적질이 이들에게는 생계수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인질 산업이 중요시되자 범인들의 인질에 대한 대접이 좋아지면서 인질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식당까지 여러 군데 생겨 번창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소말리아는 해적들이 활동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환경이 만들어 지고 있다.1) 소말리아 해적, 그들은 누구인가?소말리아는 얼핏 보면 단일 국가의 모양을 취하고 있으나 내부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소말릴란드와 푼트랜드의 두 개 자치 국가와 소말리아 과도연방정부가 위치한 소말리아로 3등분 된다. 이 중 소말리아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고, 미군 등 서방의 입김이 적은 푼트랜게 된다. 또한 3,300km에 이르는 소말리아의 긴 해안선은 길이만큼이나 풍부한 어족자원과 석유와 같은 에너지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유조선과 화물선 등 수많은 배들이 이곳을 지나게 된다.따라서 수급원리에 따라 자연스레 해적들이 모이게 되고, 해적질로 인하여 얻는 수입이 크다는것이 알려지자 해안선에 위치한 거의 대다수의 어촌이 해적의 소굴로 변화하였다.(2) 자위권 발동과 생존을 위하여소말리아 국민들에겐 먹고살 걱정이 가장 큰 고민이다. 대지는 유탄자국과 총성, 그리고 시독으로 인하여 황폐하고, 구호품으로 들어오는 식량은 대다수가 군벌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이 와중에서 소말리아 인들은 그들의 풍요로운 바다를 통해 생존의 가능성을 보게 되지만, 이마저도 외국 선박들에 의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들이 버린 폐기물들로 인하여 기영아가 발생하고 사람들은 원인모를 병으로 죽어간다. 탐스러운 가오리와 상어, 바다가재는 한국, 일본, 미국 등 거대 외국 원양선박들의 차지이고 그들에게 남는 건 텅 빈 바다와 말라가는 어족자원 뿐이다.소말리아에는 중앙정부가 없다. 에티오피아와 미국에 의해 옹립된 과도연방정부(TFG)가 존재하기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수도 모가디슈 인근만 유효할 뿐, 소말리아 전역은 14개 거대 씨족 군벌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져있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치안 유지가 어렵게 되고, 중앙정부에 통제가 없는 소말리아 전토는 밤이 되면 각기 다른 집단의 민병대간 알력 다툼으로 인한 총성이 그치지 않는 무법천지로 변화한다. 또한 소말리아의 풍요로운 바다는 혼란을 틈타 이득을 챙기려는 서방 약탈자들로 넘쳐났으며, 심지어 핵폐기물 등 산업 폐기물들을 불법으로 가져다 소말리아 앞 바다에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를 응징하고 막아야할 중앙정부의 관료는 부패하고 무능하여 소말리아 국민의 안전 따윈 돌보지 않는 상황이니, 소말리아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자위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나섰다.소말리아 바다의 무법자들은 그리고 국제적으로 위상을 알리기 위한 정치적 쇼인 것이다.소말리아 내부는 어떠한가? 위에서 밝힌 바대로 소말리아의 해적은 군벌이나 각종 무장집단과 연계되어있다. 따라서 소말리아 내부 무장세력들의 입장에서는 소말리아 해적은 자신들의 자금줄 중 하나이며, 전시에는 추가로 운용가능한 해군력으로 여겨질 것이다. 따라서 해적을 굳이 처벌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예외가 있다면 지난 내전을 주도한 이슬람법정연대(UIC)의 경우는 해적을 적극 처형 하였다. 이는 소말리아 정부도 마찬가지다. 마부노 호 피랍자의 진술을 인용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정부의 고위관료에게도 상납금을 바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소말리아 과도정부에서 해적을 그냥 방치하는 것이 단순히 힘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또한 국제적인 돈세탁의 창구로도 여겨지고 있는데, 소말리아 해적이 벌어들인 석방금은 주로 예멘 등지의 부호와 국제 범죄단체들의 돈세탁 창구가 되기도 한다고 한다.4. 소말리아 해역 해적사건 발생현황2009년부터 현재까지 소말리아 인근해역에서 해적으로부터 피랍된 민간선박은 70여척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말리아 해역에서의 해적 사건은 2004년 10건에서 2008년 111건(42척), 2009년에는 217건(47척)으로 208년 대비 95.5% 증가함으로써 해적사건이 이 지역에서 점점 산업화 되가고 있다. PRC(Piracy Reporting Centre)가 선정한 주요 해적 위험지역 현황을 살펴봐도 이 지역에서 이 지역에서 운항선박 피해가 급증하고 있으며 해적들이 점점 중무장 추세로 가고 있다고 한다.2010년 4월 5일 현재까지 27척이 피랍되었으며 선원 400여 명이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적사건은 2008년 하반기부터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활동영역도 소말리아 연안에서 아덴만 및 인도양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PRC가 선정한 주요 해적 위험지역 현황]구분해적 위험지역비고아프리카/홍해아덴만/홍해, 소말리아, 나이지리아, 탄자니청
퀘벡의 분리운동목 차1. 들어가는 말2. 퀘벡 분리운동의 배경ⅰ. 퀘벡은?ⅱ. 퀘벡의 역사ⅲ. 퀘벡의 분리운동3. 분리운동의 전개ⅰ. 조용한 혁명ⅱ. 1995년의 주민투표ⅲ. 분리운동의 확산4. 퀘벡 분리운동 분석ⅰ. Group Identityⅱ. Discriminationⅲ. Ethnic Relationship5. 퀘벡의 정책ⅰ. 퀘벡의 인구와 이민정책ⅱ. 퀘벡의 언어정책6. 맺는 말1. 들어가는 말퀘벡분리운동은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중심지인 퀘벡 주가 캐나다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퀘벡 주를 ‘특별 사회’로 인정하자는 취지의 미치레이크 협약(meech lake accord)와 샬럿타운 협약(charlottetown agreement)에 이어 두 차례에 걸친 퀘벡 주 주민투표가 있었다. 퀘벡당이 대승을 거둔 1970년 이래로 아직 분리주의자들의 염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캐나다의 퀘벡이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프랑코폰(les francophones)이 많이 산다는 것이 여태까지 퀘벡에 대한 지식의 전부였기 때문에 이번 레포트를 통해 퀘벡에 대해, 분리운동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그림1캐나다 기와 퀘벡 기2. 퀘벡분리운동의 배경퀘벡은?캐나다의 퀘벡은 흔히 북미대륙의 ‘작은 프랑스’라고 일컬어진다. 캐나다의 공용어가 영어와 프랑스어이지만 퀘벡 주는 공용어로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퀘벡 주의 몬트리올(Montreal)이나 퀘벡시티(Ville de Quebec)같은 도시들은 프랑스계 식당과 극장이 많아 ‘북아메리카의 파리’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관공서 및 주요 기관에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상징하는 양쪽의 빨간 선에 단풍나무 잎이 중앙에 자리한 캐나다 국기와 잔다르크가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프랑스 귀족들의 백합 문양을 넣은 퀘벡주 깃발이 함께 게양된다. 이는 퀘벡이 캐나다 연방에 속한 하나의 주(州)이지만, 북미 대륙에 유럽문화, 즉 프랑스 문화를 전파시킨 출발지로서 그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며 대표적 프랑스어권 지역으로 굳건히 자정과정을 밟은 다음에는 가능할 수도 있다는 나타냈다.2001년 1월 퀘벡 주 총리 뤼시앵 부샤르는 퀘벡 주의 분리 독립을 조기에 실현하지 못한 데 대하여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3월에 부총리이던 질 디세프(Gilles Duceppe)가 수상에 취임하였다. 질 디세프는 퀘벡 주 주권확립 실현에 애쓰겠다고 밝혀 퀘벡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국가적 변수로 남아 있다.3. 분리운동의 전개조용한 혁명(Quiet Revolution)1959년 뒤플레시의 죽음은 국민연합의 몰락을 의미했다. 1960년 퀘벡 의회 선거에서 르사주가 이끄는 자유당이 2차대전 후 처음으로 승리했다. 퀘벡 주민들은 이제 새로운 시각에서 퀘벡을 보게 되었으며, 캐나다와 세계 속에서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새로 인식하고 있었다. 총체적이고 획기적인 변화가 퀘벡 사회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조용한 혁명이라 일컬어졌다. 조용한 혁명은 시급한 현대화와 프랑스어와 문화의 보존, 퀘벡 주민이 리드하는 경제 그리고 캐나다 어디에서든 완전하고 확실하게 보장받을 평등권을 목표로 삼았다.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퀘벡 정부는 많은 개혁을 이루었다. 교회가 관장하고 있던 교육과 의료사업이 주정부에 의해 운영되었고 현대적인 학교와 병원들이 주민들을 위해 세워졌다. 각종 법률들이 프랑스 언어를 보호하고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문화를 보장하기 위해 통과되었다. 또한 노동조합의 권리와 사회복지를 위한 법률들도 확정되었다. 소비자의 권리와 같은 경우에는 캐나다의 다른 주보다 더 강화되었다. 또 주정부는 자원개발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63년에는 퀘벡 주 내에 있는 수력발전회사들을 모두 사들였고, 70년대에는 제임스 만에서 세계 최대의 수력발전공사에 착수했다.퀘벡은 점점 자신감을 얻어 활기 넘치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예술계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수백 명의 예술인들이 새로운 퀘벡을 표출하기 위해 그들의 자질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정치 지도자들도 퀘벡의 권익을 위해 지혜롭고 유능하게 반대한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는 구호가 씌어 있다.분리주의 운동의 확산캐나다 의회가 투표를 통해 폴 마틴 자유당 정권을 불신임함에 따라 각 당이 조기총선 체제에 돌입했다. 이런 가운데 퀘벡 블록당은 총선이 캐나다로부터 퀘벡이 독립하는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로 보고 다수 의석 확보를 위해 총력전을 펼칠 것이다.퀘벡 블록당은 2억5000만 캐나다달러 규모의 ‘스폰서십’(국가통합홍보) 프로그램 예산을 유용한 사건과 관련, 자유당 내각 불신임 사태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지지율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여론 조사에 의하면 지지도가 회복 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퀘벡 블록당은 순수 백인 프랑스계를 위한 정당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카메룬 출신 마카 코토가 퀘벡 블록당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지역 여론조사에서 이민자의 20% 이상 지지를 얻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퀘벡 블록당은 다수 의석을 확보하려면 이민자의 표심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표심 잡기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특히 퀘벡 블록당이 무슬림 등 이민자에 대한 차별 철폐, 사회적 지원 그리고 직업연수 등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문제를 통해 지지를 호소하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총선에서 퀘벡 블록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면 퀘벡독립을 위한 국민투표 실시의 정당성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되면 퀘벡 인구의 15%를 차지하고 있는 이민자의 표는 판세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그림 4퀘벡 기를 흔드는 시민들4. 분리운동 분석Group Identity캐나다의 집단적 정체성은 매우 더디게 발전되어 왔다. 이토록 더딘 발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캐나다 내에 뚜렷이 존재하는 두 개의 사회이다. 역사적으로 캐나다는 하나의 사회가 아니라 프랑스계 캐나다와 영국계 캐나다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프랑스계 캐나다 사회는 영국계 캐나다 사회에 비해 보다 명확히 개별화된 사회의식을 지니고 있다. 퀘벡 주민들은 통합된 캐나다 사회에 대한 영국계 캐나다인들의 의도를 , 대학교육을 받고 사회적 상승이동을 갈망하던 새로운 중산층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스스로의 능력에는 자신이 있었으나, 영국계 기업의 부당한 대우와 지배에 실망하던 프랑스계 신흥 중산층은 정부, 공기업 및 정부기관을 퀘벡 경제의 성장 산업이라 여겼다. 주정부를 통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책 결정권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흥 중산층은 주정부의 개입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조사자료에 따르면, 퀘벡인이라는 정체성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력수준이 높은 젊은 층이었다고 한다. 이들 신층 중산층 중, 지식인은 말과 글을 통해 퀘벡에 대한 새로운 발상 전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다른 해석으로는 퀘벡이 너무나 빠른 사회적 변화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기존 질서가 붕괴되는 등 발 빠르게 진행된 사회 변화는 새로운 질서로의 전환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했다. 일부에서는 전통적 가치를 되찾자고 주장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퀘벡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새로운 안을 제시했다. 내부적 의견 차로 인한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제시된 한 가지 해결책을 내부적 공격성을 외부로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외부의 위협에 대해 내부적으로 단결함으로써 집단 행동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마지막 해석은 퀘벡의 변화가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강한 열망을 반영했다는 것이다. 자결권 향상을 위한 움직임은 새로운 이미지와 현대적 집단 정체성을 추구하던 퀘벡인에게 큰 의미를 지녔다. 콜맨은 퀘벡의 전통 가치가 북아메리카의 물질주의적 가치로 대체됨으로써 정체성의 위기와 상실감을 낳아 결국 특별 사회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퀘벡인이라는 이름에서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를 찾고자 했던 많은 이들은 민족주의 정서를 강화하고 민족성가 정치체를 융합하여 과거의 정체성을 대체하고자 했다.Discrimination - 민족적 불평등캐나다 사회에서 가장 이른 시기부터 인식되었던 불평등의 형태는 아마도 민족적 불평등이었을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이민으로 이어지는 캐나다 역사 속에 민들의 주 수입원을 농업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출산율이 감소하는 한편, 기술사회로의 참여도를 높이는 교육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즉, 도시화, 세속화, 산업화로 인해 프랑스 공동체는 영국계 엘리트 및 자본주의 구조와 더욱 직접적인 접촉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접촉은 프랑스계 퀘벡인이 느끼는 집단의식과 상대적 박탈감의 원천이 되었다.다시 말해서 퀘벡 주민들은 자신들의 언어, 종교, 문화적 전통을 영국계로부터 인정받긴 했지만 점차 영국계 이주민들이 퀘벡의 몬트리올을 거점으로 삼아 퀘벡 주에 정착, 퀘벡의 경제를 지배하게 되면서 경제적 지위가 곧 사회적 신분으로까지 이어져 소수의 영어계가 상류층, 다수의 프랑스어계가 하류층을 구성하는 신분 분리가 이뤄졌고, 바로 이러한 계층 구조가 캐나다 연방이 결성된 뒤에도 한참 존속했기에 이를 부당하게 여긴 퀘벡의 많은 프랑스계는 그들만의 고유한 정서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그 결과 주로 영어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캐나다의 타 주와 차별화하여 퀘벡 주를 캐나다로부터 분리시키자는 운동까지 벌이면서 자신들의 의지와 힘을 보여주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5. 퀘벡의 정책퀘벡의 인구와 이민정책이주와 퀘벡의 변화주 간 이주로 인해 퀘벡이 변화하고 있다. 퀘벡과 캐나다 여타 지역 간의 지속적 대결 양상이 1970년대 중반 이후 퀘벡의 인구 동향에 뚜렷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퀘벡에 거주하는 프랑스어 사용자들은 퀘벡에 남는 반면, 영어 사용자들을 퀘벡을 떠나는 경향을 보였다. 퀘벡으로 전입해 오는 인구의 대부분도 프랑스어 사용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주로 인해 두 언어 그룹 간의 분리가 더욱 심화되었다.최근 들어서는 퀘벡의 전출 인구가 적잖이 감소했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전입자 비율도 감소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퀘벡으로의 전입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아 퀘벡은 이주로 인해 인구의 손실을 입고 있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퀘벡을 떠날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마찬었다.
1-1. 네팔2008년 7월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바뀐 네팔(Nepal)은 공식 국명은 네팔연방민주공화국이다. 중국과 인도 사이인 히말라야 산맥 중앙부의 남쪽 반을 차지하는 내륙국가이다. 북쪽으로는 중국의 티베트와 히말라야산맥을 사이에 두고 접하며, 그 외 지역은 인도와 접한다. 면적은 14만 7000㎢, 인구는 2951만 9114명(2008 기준)이며, 수도는 카투만두(Kathmandu)이다. 카트만두 분지는 네팔계곡이라고도 불렸는데 그 계곡 이름에서 국명이 유래했다는 설과 성스럽다는 의미의 '네(Ne)'와 동굴이라는 의미의 '팔(pal)'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인구의 대부분이 농촌에 살고, 노동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한다. 국민총생산은 96억 2700만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00 달러이다. 이 나라는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제로서, 의회는 단원제(601석)이다. 주요 정당으로는 네팔공산당(CPN-M), 네팔 국민회의당(NC), 공산당연합(CPN-UML) 등이 있다. 13세기에서 18세기 중엽에 걸쳐 마츠라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나라얀 샤에 의해 1768년 12월 21일에 독립하고 이듬해 구르카왕조를 세웠다. 1847년 이후에야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 2007년에 왕정이 종식되고 2008년 5월 28일부터 공화제가 되었다. 1-2. 문제제기 및 연구의 필요성공식적으로는 2006년 11월 정부와 모택동주의자들간의 평화 협정이 마무리 되어 내전은 끝났다고 하나, 아직까지도 네팔내분의 원인이었던 사회 경제적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남부 타라이 지역의 마데시 주의 자치권문제로 여전히 무장투쟁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네팔은 인도와 중국 사이에 끼어서 두 국가의 완충 작용을 할 수 있는 전략적 중요성이 증가되는 국가로서 인접 국가들을 포함, 국제사회에 적지 않는 영향을 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