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Ⅰ. 서론Ⅱ. 본론1. 운명이란2. 그리스도교적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한 해석3. 서양 철학자 데카르트를 통해 보는 철학적 논쟁4. 보이티우스의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상충되는 이유5. 영화 매트릭스에 대한 철학적 이해Ⅲ. 결론Ⅰ. 서론인간은 살아가면서 운명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는 신이라는 절대자를 만들어 그에게 의지하고 살아간다. 신이라는 절대자를 우리들 마음속에 만들었기에 비현실적인 운명이라는 단어까지도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운명이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과 두려움 때문에 만들어낸 허상이라고도 생각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원인과 결과로 이뤄지는 인과관계에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신에게 기도하고 운명에 매달려 믿어버리는 행위가 아이러니 할뿐이다.신이라는 운명을 결정해 놓은 절대자로 인해서 우리가 과연 기계처럼 프로그램되어 살아가는 것일까?이 논문을 통해 신에 대한 운명의 결정론과 그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론에 관해 서술하고 생각해보도록 하겠다.Ⅱ. 본론1. 운명이란운명이란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一切)가 지배를 받는 것이라 생각할 때 그 지배하는 필연적이고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 힘에 의하여 신상에 닥치는 길흉화복.)이라고 간단하게 정리 할 수 있다. 좀 더 풀이해서 말하면 자기 스스로의 상태를 안 인간은 의지(意志)의 힘을 부정하고 ‘체념(諦念)’으로 향하여 무슨 일이나 고민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탈피하여 정적주의(靜寂主義)로 빠지는 경향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경우는 그 운명의 힘 속에 신의 섭리와도 비슷한 의지의 존재를 믿고 그것에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데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따라서 운명을 깨달음으로 해서 세상을 비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낙천적이 되었다. 어찌 되었건 운명을 안다는 일은 인간으로 하여금 여하한 형태로든지 그곳으로부터의 해방 ·탈출의 수단을 강구하게 한다. 운명에 대한 관념에는 형이상학적 경향이 강대한 해석성경에 문구들을 인용하면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이렇듯 종교적 입장에서는 하느님께서 이세상 만물을 창조하였다는 신에 의탁한 결정론에 입각하였다. 그러나 절대신이라는 하느님께서도 인간에게 처음으로 자유의지를 주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렇듯 처음으로 자유의지를 갖게 된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 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타락시킨 뱀을 가르켜 이렇게 말한다.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훗날 뱀은 여자의 후손 성모마리아에게 머리를 밟혀 상처를 입는 현실이 이루어 졌다.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에 대한 결정을 해 놓았지만 어느 부분은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3. 서양 철학자 데카르트를 통해 보는 철학적 논쟁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명백하고 확실한 진리의 출발점을 찾기 위해 모든 것들을 위심해 보았다. 그는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에서 한 번이라도 자기를 속인 적이 있는 모든 형태의 지식을 일단 거짓으로 여기고 그것을 거부하는 태도, 곧 방법적 회의를 제의했다.① 권위에 기초한 지식은 노련한 전문가들도 간혹 틀리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②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때때로 착각을 낳으므로 믿어서는 안 된다.③ 초론에 기초한 지식은 덧셈과 같이 가끔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으므로 믿을 수 없다.④ 어떤 지식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경험하도록 해 사람을 속이는 악마나 꿈, 정신착란 등에서 오는 환상일 수 있다.그는 이런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의심했다. 그는 전능하고 간사한 악마가 있다면, 2+3은 다 의심하더라도 의심하는 자신의 존재가 있다는 것만은 의심 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명확하고 의심할 수 없는 사유의 제1원리로 삼고, 모든 보편적인 진리를 연역해냈다. 데카르트의 이와 같은 방법적 회의는 ‘의심하기 위한 의심’이라는 회의론자의 의심과는 달리 확고부동한 진리를 얻는다는 목적을 위한 적극적인 의심이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신을 부정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과거에는 인간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신의 은혜’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은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신의 명령대로 생각하고 신의 뜻대로 존재한다.’라는 것이었다. 생각도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못했는데, 어떻게 인간 스스로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선언한 데카르트가 위대하다 평가받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 선언을 통해 인간의 이성이 독립적이라는 것을 알렸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이다.)4. 보이티우스의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상충되는 이유“나에게는 신이 가진 예지의 측면과 자유 의지라는 측면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만약 신이 모든 것을 예견하고 어떤 것에서도 착오가 있을 수 없다면 신이 예견한 것은 결국 발생할 것이고, 그와 같은 결과를 낼 수밖에 없다. 가령 내가 현재에 대해 어떤 사실을 안다면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거나 일어난 일이나 다름없다. 내가 앞으로 발생할 무언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맞는다면 그 일 역시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견된 사건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보이티우스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만약 신뢰할 만한 예언자가 있어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것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다. 그는 거짓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무언가가 발생하리라는 것을 정말로 알 수 있다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아는란약을 주면서 선택이라는 자유의지를 주는 것이 가장 핵심이자 시초라 생각한다)네오가 모피어스와 오라클(예언자)를 만나러 가는 과장에서 묻는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나요?” 모피어스는 대답한다. “그녀는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할 거야.” 네오는 여전히 회의적인 어조로 묻는다. “그녀가 틀린 적은 한 번도 없나요?” 모피어스는 무관심한 듯, 그러나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것은 틀리고 맞고의 문제가 아냐. 그녀는 안내자야,네오. 자네가 길을 찾도록 도와 줄 수 있어.”)이미 모든 상황은 다 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네오가 모피어스를 만나 파란약을 먹었다면 이러한 일들이 생겼을까? 네오가 빨간약을 먹는 것 자체도 이미 결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트릭스 안에서 결정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닌 선택이라는 자유의지가 필연으로 이어진 것이라 생각한다.네오가 오라클을 만났을 때 질문을 하기보다 질문을 받는다. “너는 네가 여기 왜 와 있는지 알고 있니?” “넌 어때? 네가 ‘그’라고 생각해?” 네오는 대답한다. “모르겠어요.” 오라클이 놀리듯 말한다. “너는 귀엽긴 하지만 그다지 총명하지는 않은 것 같구나.” 오라클은 네오가 자신은 ‘그’가 아니라고 스스로 단정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리고 그에게 말한다. ‘그’가 되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아무도 대신 말해 줄 수 없다고. “너 자신만 알 수 있어. 온몸으로 체득하는 거지.” “너는 재능은 가지고 있어. 하지만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구나.” 그러자 그는 묻는다. “무엇을요?” 이어지는 그녀의 예언적인 답변. “아마 너의 다음 생애겠지. 누가 알겠니? 다 그런 법이다.”영화를 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네오는 ‘그’가 맞다. 오라클이 틀린 것일까? 오라클은 결코 네오에게 너는 ‘그’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단지 상황속에서 자신 스스로 ‘그’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끔 유도할 뿐이다. 그리고 재능이 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너의 다음 생애겠지 라는 말들로 더욱더 혼란스럽게 양 극단을 피하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는 많다. 그리고 이 영화가 제시하는 대안은 인간의 자유 문제를 다룰 때 가장 명백해진다. 자신의 인생을 자율적으로 살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위한 삶이 이미 마련되어 있다는 관념에 특히 거부감을 느낀다. 네오는 운명을 믿느냐는 모피어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아니오. 내 사람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네오의 자유관이 그리 깊이가 없다는 것은 이 모피어스와의 대화에서뿐만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 예언자가 그를 가볍게 조롱하는 것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네오가 예언자의 아파트를 나서기 전, 근는 자산이 가르쳐 준 힘든 진실을 잊어도 된다며 그에게 말한다. “너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던 네 말을 기억하겠지. 너는 네 삶의 주도권을 쥐고 있어.”그러나 모피어스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트릭스에 의해 자행되는 자유의 제거 같은 것이 아니다. 운명에 대한 모피어스의 견해는 자기 삶에 대한 완벽한 통제로서의 피상적인 자유 개념과 철저한 운명론적 결정론이라는 모순을 불가사의하게 끌어안고 있다. 모피어스가 평생을 다 바쳐 찾았던 ‘그’가 네오라는 사실을 언급할 때마다. 이 영화는 ‘운명은 일종의 섭리’라는 암시에 빠져든다. 모피어스는 오라클의 예언이 “매트릭스로부터 자유로워질 한 남자의 귀환”을 예고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운명이나 섭리의 어떤 힘들과 인간이 지닌 선택의 힘의 관계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말을 아낀다.이 영화의 가정에 따르면, 매트릭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삶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두뇌에 전자 충격을 입력하는 프로그램이다. 모피어스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만질 수 없는 감옥 안에 갇힌” 노예들이다. 그들이 어떤 자유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이건 간에, 그것은 환상이다. 그러나 실재 세계의 사람들이 향유하는 자유도 마찬가지로 허상일이지 모른다. 우리가 어떤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