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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동법’에 대하여
    ‘대동법’에 대하여20080074 역사문화학과 박병은-목차-1. 머리말2. 대동법 실시 이전의 수취제도3. 대동법 시행의 사회·경제적 배경1) 방납의 폐해2) 소작제의 발달3) 재정궁핍4) 공부부담의 불균형5) 교환경제의 발달4. 대동법의 실시범위5. 대동법의 내용6. 대동법의 의의7. 맺음말1. 머리말대동법은 기존의 특산물로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 제도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국의 토지가 황폐되고, 국가의 수입이 매우 감소된 시기에 비로소 시행되었는데,?영의정?이원익이?1608년(광해군 즉위년) 음력 5월에 중앙에 선혜청(宣惠廳), 경기도에 경기청을 두고 방납의 폐해가 가장 큰?경기도부터 시작하여,??24년(인조 2) 강원도, 51년(효종2) 충청도, 58년(효종 9) 전라도, 77년(숙종 3)에는 경상도에 시행되었으며, 1708년(숙종 34) 황해도에 이를 모방한 상정법(祥定法)이 시행되기까지 평안·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되었다.?대동법의 시행은 공평하지 못한 세금징수와 수취제도의 폐단으로부터 양민들의 원성을 해소하는 문제해결책으로서 수취제도의 획기적인 변화라고도 할 수 있다. 국가의 수입이 증대되었고, 공납을 호구 수가 아닌 토지를 기준으로 부과하였기 때문에 농민의 부담이 크게 줄었다. 또한 전에는 물품을 직접 부담하던 것을?공인이 대동미를 사용하여 구매하는 과정에서 상업이 활발해지고 자본이 발달하는 등 상업의 발달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대동법에 대한 연구로는 고석규(1985)의 , 지두환(1997)의 , 이정철(2010)의 , 이정철(2011) 등이 있다.본론에서는 대동법 실시 이전의 수취제도와 대동법 시행의 사회·경제적 배경, 대동법의 실시범위, 대동법의 내용, 대동법의 의의에 대해서만 알아보고자 합니다.2. 대동법 실시 이전의 수취제도조선후기 대동법 실시의 조명에 앞서 대동법이 실시되기 전의 조선시대 국가 재정을 유지하기 위한 조세제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조선시기의 근간을 이루는 수취체제는 신라가 당의 조용조 홍문관에서는 그 노비의 번가(番價 : 신역 대신 치를 품삯)를 매달 본 현에 독촉하여 징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주인(京主人)) 등이 경저(京邸 : 경주인의 사무실)에 발을 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서울 각사(各司))에 상납할 물건을 가지고 간 사람들이 번번이 번가를 내야 하므로, 도피하는 일이 많으며 본 현의 공물로써 오늘날까지 미수 있는 것은 모두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이 서울에 상납할 공물 등은 서울 사람으로 하여금 방납(防納 : 해당 고을의 공물을 대리 납입하고 대가로 그 倍額을 받는 일)하게 하니 그 사이에 빚어지는 폐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후략))게다가 수령이 공물을 마음대로 나눠 매길 수 있어서, 양반 지주들은 공물 부담에서 쉽게 빠져나갔다. 경제력이 있는 상층 농민까지도 수령이나 향리에게 뇌물을 주고 빠져나가거나 가벼운 공물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방납이 심해질수록 농민들의 공물로 인한 부담은 무거워져 농민의 재생산 기반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3. 대동법 시행의 사회?경제적 배경앞서 대동법이 시행되기 전의 조선의 수취제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살펴본 바에 의하면, 조선초기의 수취제도는 불공정하고 백성에게 너무나도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농민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쳐서 유랑자가 되는 등 더 이상 국가 재정의 일익을 담당할 수 없게 되자 조선의 수취제도는 변화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토산물을 징세하는 공납제가 전세보다 가중한 부담을 민에게 주고 생산력의 발전과 그 자체이 모순의 확대로 말미암아 점차로 사회경제의 폐단으로 변화해 감에 따라 잉여 수탈방식에 일대 변혁을 이룩하기 위해 대동법이라는 제도가 논의 된다. 따라서 여기서 이 시기에 공납제도를 중심으로 대동법이 실시된 사회경제의 배경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1) 방납의 폐해공납제가 철폐된 주요요인의 하나는 방납의 폐해이다. 공납제 아래 만연된 방납은 조선 전기 이래로 농민의 공납 부담을 가중시킨 사회적 고질이었다. 방납의 폐해 때문에 일찍이 중종기로부가에 접어들어 궁핍의 징조를 드러내기 시작한 국가재정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하여 파탄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7년간의 전란으로 농촌이 황폐되어 생산이 대폭 감소하였다. 그리고 세역 부과의 기초자료가 되는 각관 전세의 전안(田案)), 공부의 공안, 신역의 군안?노비안을 거의 소실하거나 분실하였다. 특히, 재정수입의 대종을 이루는 전세수입이 임진왜란 후 대폭 감축되었다. 임진왜란 후 전국의 전결이 전전(戰前) 수준의 약 1/3로 감소되었고, 또한 전세의 세율이 1결에 4∼20말이던 것이 전후에는 4∼6말의 수준으로 감하되었다. 그 결과, 국가 수입의 대종을 이루는 전세의 세입이 전전의 약 40만석에서 10만석 안팎으로 감축되었다. 이처럼 임진왜란 이후 재정수입이 크게 줄어드는 반면에, 군사비의 증대, 국가 기구의 확장, 기강의 이완에 따른 중간 횡령과 낭비로 말미암아 국가경비가 팽창해갔다. 최악의 재정난에 부딪힌 봉건정부는 선조 35년(1602)에 신세(新稅) 로서 삼수미)를 설정하였고, 또한 관해군, 인조조에 걸쳐 임시세인 결포를 토지에 부과하였다. 한편, 국고 지급을 받지 못하게 된 중앙관부와 각 궁방은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자체의 둔전을 설정하기도 하였다.이 같은 상황 하에 대동법을 적극 추진한 이원익, 조익, 김육을 위시한 양심적 관료들은 대동법을 실시하여 농민의 과중한 세역 부담을 경감하고, 한편으로는 위기에 놓여있는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의 재건을 시도하였다.4) 공부부담의 불균형전기 공납제는 봉건적 분해가 진행됨에 따라 부농과 빈농, 자작농과 소작농의 각 계층의 농민 상호간의 부담이 고르지 못할 뿐 아니라, 도와 군현의 지역 간에도 심각한 부담 불균형의 모순을 빚어내었다. 먼저, 자작농과 소작농간의 공부부담의 불균형에 관해서 살펴보면, 15세기 전반기의 세종조 이래 공전의 내부에서 소작제가 발생?발전해 감에 따라 보유지 자작농에서 자소작농 또는 순수작농으로 전락하는 농민이 증가해갔다. 그런데 농민의 경작지를 기준으로 공부를 부과하더라도 같은 규모의 경지지 토호들만 싫어할 뿐, 백성들은 모두 대동법을 보고 기뻐합니다.)그 세력은 대토지 소유의 양반층, 방납인, 지방 수령, 토호 등이었다. 방납인 수령의 대행인, 토호 등은 대동법 실시로 종래의 중간 이익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양반지주층의 대동법 실시 반대는 대동법이 실시되면 토지 결수에 따라 일정한 대동세를 일율적으로 부담하게 되어 그들의 과세부담율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토지에 과세를 하기 위한 전국적인 양전이 일시에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그 이유이었다. 대동법이 흥양현을 비롯한 전라도지방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실시되었는가를 알아보면 광해군 말기에 전라도 연해읍(沿海邑)은 공물을 포(布)로 환작(換作) 상납(上納) 하라는 임시적인 조처가 내려졌다. 이 조처는 경비의 부족을 내세워 베 1필당 쌀 10두로 다시 환작 상납케 함으로써 농민의 부담을 오히려 가중시켰다. 반정을 통하여 즉위한 인조는 이조전랑) 조익의 대동법의 전국적인 시행을 주장하는 건의를 수용하여 이를 확대 실시하였다. 이에 인조 1년(1623) 강원?충청?전라도의 대동청(大同廳))이 설치되고 그 사목(事目))이 의정 시행되었다. 그 후 이 지역에 대동법의 시행 여부를 염찰(廉察))하는 암행어사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전라도에 시행된 대동법은 그 실시 당년과 그 이듬해에 거듭되는 흉년으로 주민들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특히 전라도 지방은 본읍 진상물의 잉정(仍定)이 많아서 수납과 점퇴의 폐해가 존재하였다. 또 수운선마가와 인정(人情)?작지미(作紙米))가 규정되지 않아 남징(濫徵))이 예전보다 더하였으며, 쇄마가(刷馬價)도 대동미수에 포함되지 않아 남징의 온상이 되었다. 부호들의 수미액이 흉년에는 4두씩 감해졌으나 결당 12두의 쌀을 일시에 수납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정부도 수미의 대부분을 경창(京倉))으로 조운하는데 어려움을 지니게 되었다. 그 결과 인조 2년(1624) 12월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대동법이 혁파되었다.병자호란 전후 대동법의 경장론이 일시적으로 제기에서도 논보다는 밭이, 정전보다는 속전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논?밭을 막론하고 소정의 부과량을 백미로만 징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효종 3년(1652)에 충청도에 대동법이 다시 시행되면서 이 원칙은 파기되기 시작하였다. 인조 원년(1623)에 처음 시행하였을 때의 산군민의 불평, 즉 연해읍에 비하여 쌀값이 비쌀 뿐만 아니라, 조창(漕倉)까지의 운반비도 많아서 실제로는 산군민의 부담이 더하다는 불평을 대동미의 조운난(漕運難)과 함께 고려한 김육이 을 마련할 때 산군을 따로 정하여 이곳에서는 소정의 무명(대동목)으로 환납하도록 규정지어 놓은 것이었다. 이른바 환봉의 제도가 강제 규정으로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면포로 납부할 경우 5승 35척(대동목)을 1필로 하는데, 그 환가는 대체로 백미 5~8말로 하였고, 화폐는 1량에 백미 3말 정도로 하였다. 대동법은 종래의 공물?진상물?요역을 전세화한 것이었다. 대동세는 백미로 징수되었으나 연해읍에 비하여 미가(米價)가 비쌀 뿐만 아니라 조창까지의 운반비가 과다하고 역이 과준하다는 산군 주민의 원성에 의해서 木 또는 포, 전으로 대신 납부되기도 하였다. 이를 대동목 또는 대동포, 대동전이라고도 한다. 대동미는 공상 진상물의 마련을 위한 경납분과 각 군현의 관수 및 잡역의 충당을 위한 저치분으로 나누어져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분량은 당초의 각 도별 부과량이 그러하였듯이, 종래의 부담 물종과 그 수량에 따라 환산?편성되었다. 그리하여 경기대동법에서는 1결당 16말 중 14말을 경납하고 2말을 유치하게 하였고, 강원대동법에서는 10말을 경납하고 6말을 유치하게 하였다.그러나 이 같은 상납?유치의 편성은 전결수가 적은 군현의 경비 부족을 초래하여 일부 군현에서는 과외 징수를 불가피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충청도에 대동법이 다시 시행될 때(효종 3년, 1652)는 대동미 중 춘봉(春捧) 5말을 상납하고 추봉(秋捧) 5말을 유치하게 하되, 상납미로서 지용이 부족할 경우에는 전결수가 많은 군현, 즉 유치량이 소요 경비를 초과하는.
    인문/어학| 2013.01.17| 13페이지| 2,500원| 조회(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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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인의기질
    충청인의 특성과 기질20080074 박병은사람이란 태어난 지리적 환경과 부모, 친척, 친구를 포함해서 성장기 주변의 인문적 영향에 따라 하나의 인격을 형성해간다. 이와 같은 여건이 국가를 단위로 할 때는 민족성, 또는 국민성으로 나타나며, 지역으로 좁혀 보면 지방의 특성 있는 기질로 f하는 것이다. 지역 색을 말할 때의 대 전제는 민족성이나 국민성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란 점이다. 「대개 그렇다」는 차원이지, 칼로 무 자르듯 명백한 선을 긋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민족성이나 국민성도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것인데, 항차 지역 색이겠는가 하지만 나라나 민족마다 국민성이나 민족성이 분명히 존재하듯, 지역 색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그렇다면 충청인의 특성과 기질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충청도는 본래 충주와 청주의 머리말을 따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충청도는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이며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또한 충청도는 항일독립운동이 「충청도 사람의 투쟁」으로 잘 나타나 있듯 독립 운동가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충청인들은 어리숙하게 보이지만 계산적이며 속은 빠삭하다. 또한 속는 척하면서 실속을 확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충청인들은 속내를 감춰 여론조사가 맞지 않는 대표적인 지역이라고 하며 명분이 있을 때는 사리를 돌보지 않고 대의에 앞장선다. 하지만 충청인들은 동향 결속력은 약하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면 똘똘 뭉쳐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충청도는 본래 충주와 청주의 머리말을 따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三韓(삼한)시대에는 馬韓(마한)의 영토였고 삼국시대에는 百濟(백제)의 판도에 속했다가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후에는 지금의 충북지역이 신라 세력권에 들었다. 공주-부여가 백제의 수도가 되면서 충청도는 백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통일신라 한 가운데에 위치한 충주에 中原(중원) 小京(소경)이 설치돼, 중원이라는 이름의 시발이 됐다.고려 성종(995년)때, 전국을 10도로 구분하면서 中原道(중원도)라 했고)로 잠시 바뀐 적도 있으나 충청도라는 이름이 계속 이어졌다. 1896년 갑오경장 이후,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비로소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로 나눠졌다. 조선조 태종 때 여흥(여주), 안성, 음죽, 양성, 양지가 경기도에 이속되고 경상도에서 옥천, 황간, 영동, 청산, 보은 등을 넘겨받았다.전국이 8도로 나뉜 조선조 이후 만들어져, 민중 사이에 구전돼 내려 온 사자성어는 한번쯤 음미해볼 만하다. 이 성어는 각 지역 사람들의 성향을 네 글자로 비유해 놓고 있다. 함경도 사람을 泥田鬪牛(이전투우), 평안도 사람을 猛虎出林(맹호출림), 황해도 사람을 石田耕牛(석전경우), 경기도 사람을 鏡中美人(경중미인), 강원도 사람을 岩下老佛(암하노불), 경상도 사람을 雲天高鶴(운천고학), 전라도 사람을 風前細柳(풍전세류), 충청도 사람을 淸風明月(청풍명월)이라고 했다.그렇다면 충청인을 가리킨 청풍명월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조선조 숙종 때 사람 리중환은 擇里志(택리지)의 人心條(인심조)에서 충청도 인심을 『권세와 이익에 쏠리는 경향이 짙다(專趨勢利ㆍ전추세리)』고 했다. 또 『산과 강이 평탄하고 아름다우며 서울의 남쪽 가까이 있어서 士大夫(사대부)가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는 지리적 여건과 함께 『서울의 세가들이 이곳에다 전답과 집을 두는 등 생활의 근거지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 풍습이 서울과 가까워서 별로 큰 차이가 없으므로 살 곳을 택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인문적 여건을 덧붙이고 있다.헌종 때 실학자 李圭景(이규경)은 「五洲衍文長箋散稿(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충청도 사람의 특징을 『湖西(호서ㆍ충청)는 이익과 권세를 노린다(勢利장학ㆍ세리장학)』고 평했다. 이것은 리중환과 비슷한 견해다. 이와 같은 평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우리 조상들이 누천년을 두고 겪어온 경험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무시할 수 없고,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충청인을 「專趨勢利」나 「勢利장학」이라 한 것은 이 지역이 조선조 . 충청도 사람들은 언행이 젊잖다. 공손하다. 급하지 않다. 서두르지 않는다. 날카로운 면이 적다. 모나지 않다. 두루뭉술하게 아무하고나 잘 어울린다. 무덤덤하고 싱겁다. 미온적이고 소극적이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다. 그래서 온건 보수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다.혹자는 이 지역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에서 중립, 무색 성향의 논거를 대기도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정립시기에는 이 지역이 삼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친 곳이었다. 예컨대 충북 청주 상당산성의 북쪽은 고구려였고 서쪽은 백제, 동쪽은 신라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충남 북부를 포함한 한강 일대의 경우, 백제 초기에는 백제 땅이었고, 고구려 전성기에는 고구려 땅, 신라 전성기에는 신라 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누구의 편임을 쉽게 드러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가졌든, 겉으로는 어느 쪽에도 고개를 숙이고 순응하는 척이라도 해야 생존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순응 잘 하는 기질 때문에 조선조 이후 최근까지 정부에서 어떤 정책을 시행하려면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전에 시범적으로 실시해보는 곳이 충청도였다.충청도는 백제 때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를 품에 안고 있고, 조선조 후반기엔 권력을 독점했던 기호세력의 축을 이룬 선비들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지금도 노인들은 젊은이를 야단칠 때, 「주리(주뢰)틀 놈」, 「우라(오라)질 놈」이라는 욕을 자주 쓴다. 주뢰는 두 다리를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두개의 막대기를 끼워 넣고 비트는 형벌이다. 오라는 죄인을 묶는 붉고 굵은 줄을 말한다. 모두 상민들을 붙잡아다 사형을 가했던 양반시대의 잔재 같은 단어다. 그런 만큼 자부심과 자존심이 강하다.율곡 이이로부터 시작된 조선조 중기 주자학의 학맥은 율곡의 제자이자 조선 예학의 비조로 꼽히는 사계 金長生(김장생ㆍ충남 논산)과 그의 아들 愼獨齋(신독재) 金集(김집)으로 이어졌다. 사계와 신독재의 제자가 조선 후반기를 지배한 노론의 영수 우암 宋時烈(송시열ㆍ충남 옛날에는 왕이 곧 국가였으니까, 지금 말로 하면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충청인 평소에 조용한 것 같지만 국가가 위태롭거나 국권이 유린당하는 상황을 맞으면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허다한 충신, 열사, 의인들이 배출된 것도 사리보다 명분을 더 앞세우는 이 지역 사람들의 성향 때문일 것이다. 백제말기의 성충, 흥수, 계백 등을 필두로, 간난신고 끝에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김유신 장군(충북 진천), 충주성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려의 김윤후 장군(충북 충주), 쓰러져가는 고려를 지탱해보려다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한 「붉은 무덤」의 최영 장군(충남 홍성), 불사이군을 실천한 고려 말의 대학자 이색 선생(충남 서천), 사육신 성삼문 선생(충남 홍성), 박팽년 선생(대전)과 사육신에 버금가는 김문기 선생(충북 영동),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성웅 이순신 장군(충남 아산), 진주대첩의 주인공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충북 괴산), 병자호란 때 유일하게 청에 대항한 임경업 장군(충북 충주) 등이 이름난 충청인이다.특히 일본의 침략이 시작된 19세기 후반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다른 어떤 지역보다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일어난 의병운동 초기, 일본군과 싸우다 홍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민종식 선생(충남 청양), 을사보호조약에 반대, 73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대마도로 끌려갔으나, 적국의 식량을 먹지 않겠다며 단식 끝에 순국한 최익현 선생(충남 청양), 일본의 국권 침탈에 항의하다 부자가 나란히 일본군에게 참살당한 이남규 선생(충남 서천), 헤이그 밀사사건의 이상설 선생(충북 진천), 평생을 항일운동으로 일관한 유학자 의병장 유인석 선생(충북 제천) 등은 비교적 근왕의식이 강했던 독립투사였다.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사단을 무찌른 무장 독립운동사의 금자탑 김좌진 장군(충남 홍성), 김좌진 장군을 도와 청산리 대첩을 이룬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장군(충남 천안), 3ㆍ1만세운동의개석 총통으로부터 『중국군 몇 개 사단이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칭송을 들은 윤봉길 의사(충남 예산), 항일 독립단체인 신간회 초대 회장과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한 이상재 선생(충남 서천),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동녕 선생(충남 천안), 꼿꼿한 선비정신의 표상이자, 민족주의 사학을 정립한 신채호 선생(충북 청주), 상해임정의 국무총리 대리를 지내다 임정 내에 內紛(내분)이 생기자 단식 끝에 순국한 신규식 선생(충북 청주) 등 꼽자면 한이 없다. 비록 공산주의자이긴 하지만 해방 전까지 일제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인 박헌영과 홍명희도 충남 예산, 충북 괴산 출신이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20세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는 충청인의 투쟁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충청인의 기질을 논할 때, 인용되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있다. 충청도 어느 시골의 오일장 장터에서 시금치, 고구마순 몇 다발, 고추 몇 무더기, 옥수수 몇 개를 길가에 늘어놓고 팔고 있는 사람과 이것을 구입하는 사람 간에 오간다는 대화다. 이 대화를 보면 팔려고 애쓸 것 없다는 느긋한 태도와 함께 속내를 쉽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 충청도 사람의 기질을 잘 나타내고 있다.또한 방송출신 코미디언의 40%가 충청도 출신이다. 1997년 서울대학교 사회문화연구소에서 전국 성인 남녀 799명을 대상으로 한 「충청도에 대한 고정관념」이란 지역 정체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전형적인 성격, 스테레오 타입으로 한국인이 생각하는 충청도 사람들은 「느긋하다」 78.6%, 「소박하다」 70.5%, 「온순하다」 66.9%로 조사되었다. 느긋하다는 것은 느리다는 것, 즉 여유가 있다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충청도 사람들은 속내를 쉽게 표현하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다. 어눌한 이미지의 게다가 소극적이기까지 한 충청도 사람들이지만, 이런 충청도 사람들이 남 앞에 모습을 드러내놓고 더군다나 남을 웃기는 웃음 제조사라 불리는 코미디언이나 희극배우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충청도말한다.
    인문/어학| 2013.01.16| 5페이지| 1,500원| 조회(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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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운형
    여운형은 왜 암살당했는가.역사문화학과박병은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몽양 여운형만큼 평가가 극단적인 인물은 없다. 그가 살았던 당대에는 물론 사후에도 그를 둘러싼 논쟁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에게는 다양하고 각양각색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작용하였다. 그에 대한 논란은 해방 후 그의 행적과 관련되어 증폭되었으며, 양쪽으로부터 논란과 비난의 표적이 되었으며 한국 역사상 가장 빈번하게 테러의 표적이 되어 마침내 생을 마감하였다.해방직후 여운형은 단지 좌우합작의 부분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층위에서 주목할 만한 역할을 수행했다. 여운형은 해방 이후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 독립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대립. 좌익과 우익이라는 사상, 이념적 대립, 남한과 북한이라는 지역적 분립이라는 세 가지 층위의 대립구도를 극복해야 한다는 판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여운형은 좌익내부, 좌익-우익간의 합작, 미군정과 소련군정과의 관계, 그리고 남북관계의 차원에서 활동했다. 여운형은 좌익 내부의 통일에도 기여했지만, 분열에도 일조한 것이 사실이며 한편으로는 우익진영과 합작을 논의한 유일한 좌파였다. 때에 따라서는 미소 양측으로부터 정치적 유혹을 받은 유일한 남한 정치인이었다.1947년은 미국에 의한 38도선 이남만의 단독정부 수립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던 시기였으며 이러한 미국의 정책에 민족주의 우파 세력인 김규식, 홍명희, 이극로, 여운형까지도 등을 돌리고 좌우합작운동, 미소공위 속개투쟁, 민족자주연맹의 결성, 남북협상 추진 등의 사건이 꼬리를 물고 계속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죽은 여운형의 죽음은 매우 큰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여운형은 단독정부의 수립에 반대하는 정치가로서 그 위치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그를 죽이지 않고는 38선 이남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즉, 그를 죽이지 않고 단독정부를 수립하기에 여운형은 너무도 큰 벽이었던 것이다. 결국 여운형을 암살한 배후세력은 단독정부 수립을 추구하거나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를 원하는 세력이었다.또한 그는 1945년 광복 이후부터 정치 테러를 수차례 겪었다. 1929년?중국에 있을 때 정치테러 2차례,?1945년?8월 광복 이후부터?1947년?7월 암살되기까지 2년간 총 10차례 테러를 당했는데 이는 정치테러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최다 기록 수준이다. 직접적인 테러뿐만 아니라 협박전화와 편지, 비방 벽보, 심지어 살인을 교사하는 신문 기사까지 존재했다. '신탁통치는 식민통치의 한 방식이며, 이를 찬성하는 자는 반역자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믿은 광신자들은 찬탁으로 전환한?박헌영을 비롯해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을 암살 표적으로 삼았다.1947년?5월 무렵, 극우파는 미군정하의 한국인 경찰세력과 연계하여 여운형을 암살하기로 계획했는데, 이러한 극우파의 움직임을 파악한?존 하지는 그해?6월 28일자 이 무렵 미 군정에서는 잦은 테러를 당해온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 헌병을 경호원으로 붙여주겠다고 했으나, 여운형은 “대중과 함께 살아온 내가 어찌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겠는가?”하고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7월 19일 여운형의 생애 마지막 날, 여운형의 행보는 다음과 같다. 그는 독립신보의 주필인 고경흠과 함께 성북동 김호(재미교포)의 집에 9시 20분경 도착했다. 국내정세를 둘러보러 귀국한 재미조선사정협의회 회장인 김용중을 만나러 갔던 것이다. 그는 영자신문인 한국의 소리(The Voice of Korea) 발행인으로 미 국무성에 영향력을 지닌 인사였다. 약 반 시간 뒤 여운형은 3월 사택폭파사건 이후 기거하던 명륜동의 정무묵의 집으로 향했다.점심식사 이후 그는 서울운동장에서 열리는 영국과의 친선축구경기를 관람하려할 예정이었다. 앞서 6월 23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우리나라의 회원국 가입을 결정하였고, 당시 여운형은 체육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장도 겸임하고 있었던 터였다.집으로 잠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려는 생각으로 여운형은 계동으로 이동하였고, 이동하는 중간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습을 당하였다. 탄환은 등에서 복부를, 다른 하나는 어깨 뒤쪽에 심장을 정통으로 관통하였다. 워낙 정통으로 총을 맞은지라 원남동 대학병원으로 달렸지만 손쓸 겨를도 없이 몽양은 서거하였고 이때 시각이 오후 1시였다.여운형을 암살한 범인은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백의사(白衣社)출신의 한지근이라는 청년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암살사건의 배후에는 경찰이 있었다. 이는 사건 발생 27년이 지난 1974년에 그 전모가 드러났다. 당시 몽양의 살해사건의 공범자들이 순순히 자수를 한 것이다. 또한 김두한(당시 백의사 남측 고문)의 회고를 들어보면 "여씨를 사살하기 전날 밤, 한지근에게 권총 한 자루를 주고 악수를 하였다는 내용과, 그 다음날 장택상에게 불려가 '죽이지는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저 혼만 내어주라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시끄럽지 않은가' 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고 한다.이렇게 된다면 배후에 대한 화살은 자연스럽게 이승만과 한민당에게 날아간다. 이들은 1947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운형이 암살당할 시기를 즈음해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파 척결을 위한 법안이 상정되고 논의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경찰에는 일제시대 경찰을 했던 인물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미군정은 합리주의와 실용주의의 원칙에 따라 일제 강점기에 친일을 했을지라도 경찰로서의 경험이 있는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결성되자 수많은 대중들은 당연히 대의기관에서 친일파 처리 문제와 토지개혁 등의 중요한 현안을 처리해주기를 기대했고 1947년 5월에 친일파 처리를 위한 법령의 제정을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때 경찰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방해하기 위한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는 입법회의 의장이었던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을 하고 있던 여운형의 암살과 관련된 것이었다.당시 경찰의 책임자였던 조병옥과 장택상은 모두 한민당 당원 출신이었다. 이들은 경찰에 들어가면서 미군정의 요청에 의해 형식적으로 한민당에서 탈퇴하지만 실제로 당시 유일한 물리력이었던 경찰을 한국 민주당의 정책과 활동에 유익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장택상의 딸에 의해서 간행된 그의 유고 모음집을 보면 장택상이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세력은 특히 이승만이었다. 장택상의 당시 상황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장택상의 배후에는 이승만이 있었을 것이며 결국 여운형 암살 뒤에는 이승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이승만이 직접적으로 여운형의 암살을 지목하지 않았을지라도 이승만의 의도를 장택상이, 또는 장택상의 의도를 장택상 수하의 경찰이 적극적으로 수행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의 정황을 미루어보아도 이승만이 여운형 암살의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승만은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 21일까지 미국을 방문하고 귀국하였는데 이때 그는 미국에서 단독정부의 수립과 단독정부가 수립될 경우 자신이 그 정권을 담당하기 위한 미국 내에서의 지지를 구했다. 이러한 노력을 벌였던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 국내에서의 상황은 그의 정치적인 의도와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특히 여운형의 존재는 앞으로의 이승만의 정치행로를 방해하는 가장 큰 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당시의 상황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속개된 상황이었고 여운형은 근로인민당의 결성과 함께 제2차 좌우합장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한 활동으로 인하여 국민적인 지지도가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결국 이승만은 여운형의 정치적 힘이 존재하는 한 정권을 잡는 것은 고사하고 단독정부 수립마저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이승만의 극우파 단체들은 이정도로 그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6월 28일의 하지의 이승만에 대한 경고서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극우파의 여운형 암살계획이 G-2의 정보망에 잡혔던 것이다.하지는 이승만에게 암살계획을 중단하라고 충고했다. 이런 상황은 G-2 주간보고서 97호(1947년 7월 24일자)에도 나타나고 있다.
    인문/어학| 2013.01.16| 4페이지| 2,000원| 조회(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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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비극과시대정신
    ‘그리스 비극과 시대정신’비극시인의 전쟁관학과목 : 서양고대사담당교수님 : 강미숙 교수님학과명: 역사문화학과성명 : 20080074 박병은제출일시 : 2012. 5. 21. 서언그리스인은 이 세계가 신으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하여 신들의 전능과 활약과 계보를 그렸고, 후대에 전했다. 이것이 그리스 신화이다.그러나 그리스 신화는 다른 민족의 신화와는 달리 그것이 꾸며지고 전해지는 데 있어 정치권력이나 종교의 교단(敎團)적 입장에 의해 정리 되지 않고 시인들에 의해 자유로이 윤색되었으며, 한편으로 농민이나 목축민의 생활에 입각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 신화는 인간의 상상과 생활의 예지가 만들어 낸 가장 중요한 문화현상이라 할 수 있다.과거에 시인들의 정치사상과 종교사상을 다룬 바가 있어 여기서는 주로 전쟁에 초점을 두어 비극을 논하고자 한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이 있었던 해에 아이스킬로스는 그 전투에 참가했고, 소포클레스는 소년 합창대원으로 전송가를 노래했으며, 에우리피데스는 그 해에 탄생했다고 한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싸움이 끊임없이 계속된 만큼 기원전 5세기경의 그리스는 만성적인 전쟁 상태에 있었다 하겠으며, 따라서 시인들의 일생은 전쟁 속에 있었고 전쟁이야말로 그들 인생의 최대 인생경험이라 할 수 있다.그렇다면 과연 당시 비극 시인들은 전쟁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비극이 어떻게 성립되었고, 비극 속에 시인들의 전쟁관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2. 신화에서 비극으로1) 신화란신화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미토스(Mythos)는 원래 사람이 말하는 이야기를 뜻하는데, 비극의 테마나 희극의 줄거리, 이솝의 우화도 미토스이다.인간은 합리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합리적으로 해결하지만,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나 설명이 불가능한 문제에 대해서는 비합리적이 방법에 의지한다. 그것이 미토스라 할 수 있다. 즉 미토스는 인간 사상의 비합리적인 면 일체에 특최고도로 완성된 서사시였다. 이러한 걸작은 그 이전에 수많은 시이네 의해 쓰여진 많은 작품이 있어 상당한 기간의 세련기를 거친 결과라 생각된다.그러나 서사시가 그대로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학적 형식으로 볼 때 비극은 서사시와 서정시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서사시는 민족이라는 의식으로 과거를 향하여 거기서 회상되는 기억들, 즉 신화 전설을 영광과 찬미 속에서 노래하는 반면, 서정시는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개인으로서 현재를 바라보고, 거기에 나타나는 결정을 심상에 비치는 대로 읊는다.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는 폴리스 사회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확대되어 식민활동이 전개되어 사회체제가 크게 변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귀족 내부의 분쟁, 귀족과 민중의 대립으로 참주가 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에는 호메로스의 히로이즘 시대에 유래하는 전통의 힘이 권위를 잃고 새로운 느낌과 생활 방식을 갖는 새로운 인간이 등장한다. 서정시의 시대인 것이다.3) 합창서정시서정시에는 제식이나 잔치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는 합창에 가까운 시가 존재했다. 합창시는 무용의 요소가 부가되면서 군무의 리듬에 맞추기 위해 복잡한 형식으로 발달하였다. 합창가의 서정시는 남이탈리아 레기온 출신의 이비코스를 거쳐 기원전 6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걸쳐 시모니데스, 핀다로스, 바킬리데스라는 3대 시인에 의해 정점에 달한다.그리스 비극의 기원에 대해서는 디오니소스 제례에 부속한 합창가인 디티람보스가 ?점차로 발달하여 극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비극의 형식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테스피스였다. 비극이 예술로서 완성되기 위해서는 이른바 비극의 3대 시인이 활약하는 기원전 5세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3. 비극의 시대배경문학 형식으로 본다면 비극은 서사시와 서정시, 합창서정시가 결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극을 발생시키기 위해선 동방종교, 특히 디오니소스 신앙의 유행과 시와 음악을 보호, 육성하는 참주의 출현이 필요하였다.비극을 출현하게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다.기원전 5세기 100년간은 전쟁으로 점철된 격동의 시기였다. 이 시기는 그리스 문화의 황금기이기도 했으니 특히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비극의 황금기였다.주지하다시피 몇 편의 작품을 제외하고 비극의 제재는 고래의 신화전설로 한정되어 있다. 그 이유는 비극이 디오니소스 제례에서 파생했다는 종교성과 유관한 것으로 보인다. 희극에는 자유로운 픽션이 허용되었지만 비극에는 그의 장엄한 종교적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자유로움이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비극시인은 시인이기에 앞서 폴리스 생활의 교사요 정신적 지도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시사 문제에 대한 언급이 불가피한 의무라 여기고 있었다. 전란의 세기에 살던 그들에겐 전쟁이 최대의 경험이었으므로 그들의 전쟁에 대한 생각과 언급은 시대의 가장 여실한 증언이라 할 수 있다.4. 반전작가 아이스킬로스아이스킬로스의 생애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원전 515년에 출생해서 456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는 500년부터 극작을 시작해서 484년 최초로 우승했다고 전하는데, 이는 그가 마라톤전투에 참전했을 때 이미 10여년의 경력을 지닌 작가였음을 의미한다. 살라미스 전에 있었을 때 그는 45세라는 초로의 나이였으나 한 사람의 별사로 참가했으며, 그대의 전쟁경험을 8년 후 『페르사이』에서 다루고 있다. 무대가 페르시아 왕궁이고 등장인물도 페르시아인 뿐이나 아이스킬로스의 애국심을 단적으로 나타낸 애국극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아이스킬로스는 열렬한 애국자이긴 하나 편협한 쇼비니스트)는 아니었다. 우선 대왕비 아톳사는 “여왕다운 위엄과 아들 크세르크세스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가장 생생한 극적 성격을 형성하고 있다.” 다레이오스는 “영웅적이라기보다 거의 신적이라 할 만한 위엄 있는 거인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페르사이』에는 적에 대한 경멸이나 야유나 비방이 없으며 비겁과 잔학에 대한 비난도 없다.전투장면에 관한 사자의 보고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약 30행에 이르는 페르시아 장군이 되고 있다. 그리고?배우는 그러한 집단을 대표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그와 반대로 그 적대자가 되는 수도 있다.현존하는 가장 오랜 비극 은 배우의 대화에서 운율형식이 일정하지 않아, 장면에 따라서는?이암보스?형식이거나?토로카이오스?형식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것은 작품이 작가의 실험단계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또한, 극 구성의 그 자체에도 서로 모순되는 세 가지 면이 은연 중에 병존한다. 은 말하자면 보고극, 즉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조건이 갖춰진 페르시아 왕궁이란 곳에 중대사건이 보고되고, 그 보고의 서사성에 극적 긴박감이 주어진다는 구성과 망령극, 즉 망령 출현이라는 형태로 사실성을 버리고 초시간적인 수준으로 상상력을 비약시키는 구성이 1편 가운데에서 동시에 사용되고, 또한 마지막으로는 극이란 사건의 당사자가 패배의 슬픔을 서정적으로 노래한다는 취향으로 끝나고 있다. 하나의 극적 사건을 몇 개의 다른 시점(視点)의 수준에서 다뤄 입체적인 깊이를 주고 각각의 시점 사이에 긴장감을 자아내는 그리스 비극 특유의?드라마투르기는 아이스킬로스의 이와 같은 대담한 몇몇 실험이 모태가 되어 서서히 완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또한, 그가 비극예술에 대해 품었던 원대한 포부는 3부작 형식으로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 드라마란 우주의 신비에 대한 시인의 의미 부여이며 또한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이상의 탐구이기도 하여, 이 시야를 포괄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연속 테마에 바탕을 둔 3편의 극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 구상을 훌륭히 구현시킨 3부작(··)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5. 페리클레스, 크레온, 오이디푸스소포클레스(B.C. 496~406)의 생애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시작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에 끝남으로 그야말로 전란의 일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번의 전쟁경험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는 정치성이 희박하며, 더욱이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물론 암시조차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기원전 496년 아테네의 행정 구역 콜로노스에서 부유한 기사의 아들로 태 개인과 국가, 인간의 법과 신의 법, 성문법과 불문법의 대립이라 일반적으로 이해되는데, 그 대립을 구상화한 것이 안티고네와 크레온이며, 양자의 대립의 비극적 결말에 어느 쪽에 책임이 있느냐에 논의가 집중된다. 크레온은 완고하고 흉악한 악한은 결코 아니다. 그는 엄격하고 철저한 원칙주의자이다. 그러나 그것은 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며, 더욱이 당시는 아직도 전운이 가시지 않은 전시요 바야흐로 새로운 정권이 발족했을 때였다.페리클레스와 크레온은 비슷한 점이 많다. 양자는 통치자로서 유사한 신념을 가지며, 유사한 용어를 사용한다. 크레온은 왕의 권한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의 지성과 판단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여 자신에게 위험을 가하는 자를 공공의 적으로 간주하고 나아가서는 통치자가 국가를 소유한다고 말한다. 물론 페리클레스는 이러한 반민주적이고, 독재자적인 발언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기본 사상은 그의 추도 연설에 드러나듯 강력한 정권은 개개인에게 유익하며 강력한 정권으로 얻는 이익이 전체를 희생하여 얻는 개인의 이익보다 크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오이디푸스 왕』에서도 소포클레스와 페리클레스의 관계가 드러난다. 오이디푸스 왕이 최선의 통치를 했으나 테바이에 괴질이 발생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자 페리클레스는 주민들을 아테네 시내로 이주하게 한다. 당시로서는 최선의 정책이었으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괴질이 발생한다. 오이디푸스가 괴질에 의해 결국 파멸한 것과 같이 페리클레스도 괴질로 말미암아 사망한다. 오이디푸스는 페리클레스의 운명의 신화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페리클레스는 특히 비극예술의 완성자로서 유명하다. 비극 경연에서의 1등 우승은 18회나 되었다고 한다. 극·송가·비가·잠언 등 123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7편 뿐이다. 그 밖에 다수의 단편(斷片)이 있다. 그는 극에 있어서 3부극을 폐지하고 합창 대원을 늘리는 등 극의 단순성을 극복하였으며, 치밀한 구성, 완벽한 기교 등으다.
    인문/어학| 2013.01.16| 10페이지| 1,000원| 조회(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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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학사목 강독
    20080074 역사문화학과 박병은勸學事目권할 권배울 학일사눈목권학 사목吉昌君勸近上書,書曰,臣近,길할 길창성할 창임군 군권할 권가까울 근위쓸 서,쓸 서가로 왈,신하 신가까울 근길창군 권근이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가로되 신 근이以章句末學,久?文翰之任,써 이글 장글귀 구끝 말배울 학,오랠 구이지러질 점글월 문편지 한갈지맡길 임,형편없는 학문으로, 오랫동안 문한의 소임을 어지럽게 하여承恩過厚,曾無報效,今又濫爲儒받을 승은혜 은지날 과두터울 후,일찍 증없을 무갚을 보본받을 효,이제 금또 우넘칠 람할 위선비 유받은 은혜가 지나치고 두터웠습니다. 일찍이 은혜를 갚고자 힘쓴 일이 없는데, 이제 또 외람되게 대제학을 맡아學提調,敢不?竭駑鈍,以補文治배울 학끌 제고를 조,감히 감아니 불빌 경다할 갈둔한 말 노둔할 둔,써 이도울 보글월 문다스릴 치감히 노둔한 재주를 다하여, 문치의 만분의 일도 보답을 못하지 아니하겠습니까.萬一,然臣衰多疾,精神昏?,일만 만한 일,그러할 연신하 신쇠할 쇠많을 다병 질,정할 정귀신 신어두울 혼심란할 궤,그러나 신이 쇠하여 병이 많고, 정신이 혼궤 하여 (어둡고 심란하여)目暗於觀,氣疲於講設,눈 목어두울 암어조사 어볼 관,기운 기지칠 피어조사 어익힐 강베풀 설,눈이 독서하기에 어두어, 기운은 강의하여 설명(강설) 하기에는 피로하여,雖慾盡力訓進後學,實不能堪비록 수욕심 욕다될 진힘 력가르칠 훈나아갈 진뒤 후배울 학,열매 실아니 불능할 능견딜 감비록 힘을 다해 후학을 가르치는데 힘을다하고자 했으나, 실로 감당할 수가 없으므로夙夜思惟,恐負殿下委任之意,일찍 숙밤 야생각할 사생각할 유,두려울 공질 부전각 전아래 하맡길 위맡길 임갈 지뜻 의,새벽부터 밤까지 생각하니, 전하가 위임하신(맡기신) 뜻을 저버릴까 두렵습니다.謹將勸學事目一二條件,具錄申聞삼갈 근장차 장권할 권배울 학일 사눈 목한 일두 이가지 조사건 건,갖출 구기록할 록거듭 신들을 문삼가 장차 배움을 권하는 사목(규칙)을 한두 조항을 갖추고 기록하여 거듭 아뢰니伏惟聖裁.一,文科初場罷疑義試엎드릴 복생각할 유임금 성지,형세가 당연히 그러하다. 지금 배우는 자는 경서를 공부한다는 것은以待有司之問,其志先局於句讀訓써 이기다릴 대있을 유맡을 사갈 지물을 문,그 기뜻 지먼저 선판 국어조사 어글귀 구읽을 독가르칠 훈유사의 질문에 대비하고자하는 것이니 그 뜻이 먼저 구독과 훈고의 사이에 국한되어?之間,專務記誦,取辦於口,주낼 고갈 지사이 간,오로지 전힘쓸 무기록할 기욀 송,취할 취힘쓸 판어조사 어입 구,오로지 기억하고 외기만 힘써, 입에 취하기만 힘쓰니其於義理之蘊文章之法,有不暇그 기어조사 어옳을 의다스릴 이갈 지쌓을 온글월 문문장 장갈 지법 법,있을 유아니 불겨를 가그 의리에 간직된 것이나 문장의 법에는 힘을 쓸 겨를이 있지 않도다!致力焉,又恐一言不中,以見斥보낼 치힘 력어찌 언,또 우두려울 공한 일말씀 언아니 부가운데 중,써 이볼 견물리칠 척또 한마디라도 말이 맞지 않아서 이로써 쫓겨날까 두려워해서黜,羞?憚,其氣先挫,此乃文章물리칠 출,바칠 수얼굴붉힐 난꺼릴 탄,그 기기운 기먼저 선꺾을 좌,이 차이에 내글월 문글 장얼굴을 붉히고 두려워하며 꺼려하여, 그 기운이 먼저 꺾이니,氣習靡然猥?之由也.乞自今,기운 기익힐 습쓰러질 미그러할 연함부로 외자질 구레 할 쇄갈 지말미암을 유어조사 야.빌 걸스스로 자이제 금,이것이 문장과 기습이 쓰러지고 함부로 하여 자질구레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지금부터,罷講論復試疑義,但業經義一道,마칠 파익힐 강말할 논돌아올 복시험할 시의심할 의옳을 의,다만 단업 업글 경옳을 의한 일길 도,강론을 피하고 다시 의의를 시험하건데, 다만 전공경전 한문제와四書疑一道,?依前朝舊式,넉 사쓸 서의심할 의하나 일길 도,아우를 병의지할 의앞 전아침 조예 구법 식,사서 중 하나를 업으로 하여 아울러 전조(고려)의 옛 법에 의거하십시오.其五經疑一道,不許諸經各出.그 기다섯 오글 경의심할 의한 일길 도,아니 불허락할 허모든 제글 경각각 각날 출,그 오경의(오경의 해석) 한 문제는 여러 경서에서 각각 내는 것을 불허하고宜如四書疑例,或單擧一經,마땅할 의같을 여넉 사쓸 서의심할 의법칙 례,혹 혹홑 단 가아니 불무거울 중,이제 금의원 의번역할 역그늘 음볕 양법 율배울 학,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의학, 역학, 음양학, 율학은皆有科目,而此獨無,誠爲闕典,다 개있을 유과정 과눈 목,말이을 이이 차홀로 독없을 무,정성 성할 위빠질 궐법 전,모두 과목이 있으나, 문과는 유독 혼자이니 참으로 잘못된 법이 되었습니다.乞依前朝明經科例,文科終場,빌 걸의지할 의앞 전아침 조밝을 명글 경과정 과법식 례,글월 문과정 과마칠 종마당 장,바라옵건데, 전조의 명경과의 예식에 따라 문과의 마지막에?試吏文之士,許於正科,아우를 병시험할 시벼슬아치 이글월 문갈 지선비 사,허락할 허어조사 어바를 정과정 과,아울러 이문을 시험보는 선비를, 정과(과거정규과목)에 같은 방에同榜唱名,使與雜科殊異,같을 동매 방노래 창이름 명,하여 금 사줄 여섞일 잡과정 과다를 수다를 이,이름 불리는 것을 허락하여 잡과와 더불어 달리하여 그 문과에 응시한 자로서其赴文科者,有欲幷試吏文,聽,그 기나아갈 부글월 문과정 과놈 자,있을 유하고자할 욕어우를 병시험할 시벼슬아치 이글월 문,들을 청,아울러 이문을 시험보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들어주고乃於正科之內,加其分數.一,이에 내어조사 어바를 정과정 과갈 지안 내,더할 가그 기나눌 분셀 수.한 일,이를 들어 주고 정과 안에 그 분수(점수)를 더해 주시옵소서. 하나,職帶館閣文臣及閑良文臣可將任用벼슬 직띠 대객사 관집 각글월 문신하 신미칠 급막을 한좋을 량글월 문신하 신옳을 가장수 장맡길 임쓸 용직책이 관각의 문신들과 한량문신으로 장차 임용 할 수 있는 자는.者,令每月五日,一次會藝文館,놈 자,영 령매양 매달 월다섯 오해 일,한 일버금 차모임 회심을 예글월 문객사 관,매월 오일마다 한차례Tlr 예문관에 모여相與講磨,凡有文翰之事,皆令製서로 상줄 여익힐 강갈 마,무릇 범있을 유글월 문날개 한갈 지일 사,다 개영 령지을 제서로 연마하게 하고 무릇 문한(글을 쓸 일)의 일이 있으면 모두 그들에게 글을 짓도록 하고述,擇其善者而用之,考其能否,지을 술,가릴 택그 기착할 선놈 자말이을 이쓸 용갈 옮기어 갈 때幷書所讀經書多少,上者超置淸要어우를 병쓸 서버 소읽을 독글 경쓸 서많을 다적을 소,위 상놈 자넘을 초둘 치맑을 청구할 요아울러 읽은 바의 경서의 많고 적음을 써서, 높은 자는 뛰어 넘어 청요직에 두고中者隨例遷秩,下者外?.一,가운데 중놈 자따를 수법식 례옮길 천차례 질,아래 하놈 자바깥 외베풀 서.한 일,중간인 자는 법칙에 따라 천질(벼슬을 옮김)하고 아래인자는 외직으로 쓰소서. 하나,小學之書,切於人倫世道爲甚大,작을 소배울 학갈 지쓸 서,끊을 절어조사 어사람 인인륜 륜대 세길 도할 위심할 심큰 대,소학의 글은 인륜과 세상사는 도리에 중요함이 심히 크다.今之學者,皆莫之習,甚不可也,이제 금갈 지배울 학놈 자,대 개없을 막갈 지익힐 습,심할 심아니 불옳을 가어조사 야,지금의 학자는 모두 (소학을) 익히지 않으니 심히 옳지 않습니다.自今京外敎授官,須令生徒先講此스스로 자이제 금서울 경바깥 외가르칠 교줄 수벼슬 관,모름지기 수영 령날 생무리 도먼저 선익힐 강이 차지금부터 중앙(서울)과 지방(외방)의 교수관들은 반드시 생도들로 하여금 먼저 이 책을 공부하게하고書,然後方許他書,其赴生員之試쓸 서,그러할 연뒤 후바야흐로 방허락할 허다를 타쓸 서,그 기나아갈 부날 생인원 원갈 지시험할 시바야흐로 다른 글을 배우도록 허락 하고, 나아가 생원시에 응시 하여欲入太學者,令成均正錄所,하고자할 욕들 입클 태배울학놈 자,영 령이룰 성고를 균바를 정기록할 록바 소,태학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성균관정록소’로 하여금先考此書通否,乃許赴試,먼저 선상고할 고이 차쓸 서통할 통아닐 부,이에 내허락할 허나아갈 부시험할 시,먼저 이 책(소학)의 통달함과 그렇지 않음을 상고하고, 이에 시험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고,永爲恒式.一,前朝之時,길 영할 위항상 상법 식.한 일,앞 전아침 조갈 지때 시,길이 영원한 법이 되게 하소서, 하나, 전조(고려)의 시기에在外閑良儒臣,私置書齋,敎訓後있을 재바깥 외막을 한좋을 량선비 유신하 신,사사 사둘 치쓸 서재계할 재,가르칠 교가르칠 훈뒤후지방에 있는 한량 유신이 있을 거익힐 강배울 학,써 이도울 비바람 풍타일러 힘쓰게 하고 그들(수령들)로 하여금 각기 편안히 거쳐하여 강학하여 풍화(풍습과 교화)를 돕게 하소서化.一,詩章唱和,儒者末技,될 화.한 일,시 시글 장노래창화할 화,선비 유놈 자끝 말재주 기,하나, 시로써 창화하는 것은 유학자의 마지막의 천한 지혜이나然亦關於人才盛衰,不可偏廢,그러할 연또 역빗장 관어조사 어사람 인재주 재담을 성쇠할 쇠,아니 불옳을 가치우칠 편폐할폐,또 인재의 융성과 쇠함과 관계 되니 이를 치우쳐서 폐할 수가 없고且其吟詠性情,有所感發而興起,또 차그 기읊을 음읊을 영성품 성뜻 정,있을 유바 소느낄 감쏠 발말이을 이일 흥일어날 기,또 그 성정(성품과 심정)을 읊조리면 느끼어 마음이 움직여 감동되어 떨쳐 일어나는바 있으니,卽古者敎?子典樂詠歌之遺意也곧 즉옛 고놈 자가르칠 교투구 주아들 자법 전노래 악읊을 영노래가갈 지끼칠 유뜻 의어조사 야즉 예전에 주자에게 전악이 시가를 읊음으로써 가르치던 남은 전통입니다.,前朝之時,內有九齋,外置都會,앞 전아침 조갈 지때 시,안 내있을 유아홉 구재계할 재,바깥 외둘 치도읍 도모일 회전조(고려)의 시기에 안에는 구재(구재학당)가 있고 지방에 도회를 두어每於夏月,賦詩爲課,東堂監試亦매양 매어조사 어여름 하달 월,구실 부시 시할 위매길 과,동녘 동집 당볼 감시험할 시또 역매 여름 달에는 시를 짓는 것으로 과업을 삼고, ‘동당감시’ 또한 시를 시험으로 보았는데試以詩,今皆革罷,專務經術,시험 할 시써 이시 시,이제 금다 개가죽 혁방면할 파,오로지 전일 무글 경꾀 술,지금은 이것이 모두 혁파 하여 오로지 경술(경서에 관한 학문)에만 힘써棄末趨本,可謂令典,然今儒者,버릴 기끝 말달릴 추밑 본,옳을 가이를 위영 령법 전,그러할 연이제 금선비 유놈 자,끝을 버리고 근본으로 향하니, 좋은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유학자들이雖號通經,鮮有文章傑出之才,비록 수이름날 호통할 통글 경,고울 선있을 유글월문글 장뛰어날 걸날 출갈 지재주 재,비록 경서에 통달하였다. 이름을 날리더라도 뛰어난 문장이
    인문/어학| 2013.01.16| 12페이지| 2,000원| 조회(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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