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 최초 등록일
- 2013.01.16
- 최종 저작일
- 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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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운형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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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몽양 여운형만큼 평가가 극단적인 인물은 없다. 그가 살았던 당대에는 물론 사후에도 그를 둘러싼 논쟁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에게는 다양하고 각양각색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작용하였다. 그에 대한 논란은 해방 후 그의 행적과 관련되어 증폭되었으며, 양쪽으로부터 논란과 비난의 표적이 되었으며 한국 역사상 가장 빈번하게 테러의 표적이 되어 마침내 생을 마감하였다.
해방직후 여운형은 단지 좌우합작의 부분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층위에서 주목할 만한 역할을 수행했다. 여운형은 해방 이후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 독립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대립. 좌익과 우익이라는 사상, 이념적 대립, 남한과 북한이라는 지역적 분립이라는 세 가지 층위의 대립구도를 극복해야 한다는 판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여운형은 좌익내부, 좌익-우익간의 합작, 미군정과 소련군정과의 관계, 그리고 남북관계의 차원에서 활동했다. 여운형은 좌익 내부의 통일에도 기여했지만, 분열에도 일조한 것이 사실이며 한편으로는 우익진영과 합작을 논의한 유일한 좌파였다. 때에 따라서는 미소 양측으로부터 정치적 유혹을 받은 유일한 남한 정치인이었다.
1947년은 미국에 의한 38도선 이남만의 단독정부 수립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던 시기였으며 이러한 미국의 정책에 민족주의 우파 세력인 김규식, 홍명희, 이극로, 여운형까지도 등을 돌리고 좌우합작운동, 미소공위 속개투쟁, 민족자주연맹의 결성, 남북협상 추진 등의 사건이 꼬리를 물고 계속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죽은 여운형의 죽음은 매우 큰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여운형은 단독정부의 수립에 반대하는 정치가로서 그 위치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그를 죽이지 않고는 38선 이남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즉, 그를 죽이지 않고 단독정부를 수립하기에 여운형은 너무도 큰 벽이었던 것이다. 결국 여운형을 암살한 배후세력은 단독정부 수립을 추구하거나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를 원하는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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