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문화가정의 정의국제결혼이나 이주노동자라는 용어가 내포한 국적에 따른 차별성, 사회적 편견 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한 가족 내에 다양한 문화나 민족이 공존한다는 개념으로 사용2. 다문화가정은 우리 사회에서 과연 어떠한 문제를 안고 있을까.1) 아동들의 문제 2) 사회관계3) 경제적 여건4) 교육적 현황 5) 사회 적응의 곤란
Ⅰ. 들어가며.한 국가를 이야기할 때에는 시대상을 빼놓고 이야기하기란 힘들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당시의 정치사상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 지금도 우리에게 배움을 주고 있다. 이 말인 즉 모든 것은 유지되거나 역사의 흐름에 맞추어 변화하지만, 그 중 가장 지속력이 오래되었으며 과거에 비추어 나아가는 것이 국가와 정치이기 때문이다. 국가 수장의 리더쉽을 비롯하여 국민, 법, 정치체제 등이 내용은 바뀌었지만 틀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논의되고 많은 관점을 가지고 있는 정치사상과 국가에 대한 이야기 중 칸트의 ‘영원한 평화에 위하여’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내용을 요약해 비교해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Ⅱ.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Ⅱ-ⅰ.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는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배려가 담긴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역자가 해제를 써주고 많은 주석을 담는 등의 노력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일단 앞서 말했듯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해 이해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칸트는 정치에 있어서 진짜 문제는 법과 정의에 바탕을 둔 권리에 대한 논의를 확실히 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의 자유를 정치실제에 대한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고 순수이성의 원칙들에 기초한 권리 또는 정의 또는 권리의 이론들만이 실제 정치생활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도 국가 간의 평화를 논함에 있어 개인 간의 권리와 정의문제로부터 시작했던 것은 바로 이성을 지니는 인간의 문제를 중심주제로 논의했던 계몽사상과 칸트와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Ⅱ-ⅱ. 칸트의 ‘영구평화론의 예비조항과 확정조항 그리고 추가조항’칸트는 국가 간의 평화를 접근함에 있어 이를 단지 국가 간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개인적 차원에서의 인간간의 문제를 바탕으로 국가차원의 문제와 국가 간의 문제를 다루 끊임없는 전쟁의 위협을 의미한다. 때문에 평화는 적극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수립하는 법적 조건들을 3가지 확정조항으로 제시하였다.제 1 확정조항모든 국가의 시민적 정치 체제는 공화정 체제여야 한다는 것이다.우리는 여기서 개인적 차원과 국가적 차원에서 평화의 조건을 살펴볼 수 있다. 예비조항을 분석하면서 언급했듯 국가든 국가로 형성된 국제 사회든 모두 인간들로 형성된 사회이며 국가의 행동이나 국제사회에서 일어나는 국가들 간의 상호작용도 윤리적, 도덕적 법칙 하에 생활하고 있는 인간들의 상호작용과 같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제평화를 논의하는데 있어 개인간의 윤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칸트가 말하는 공화정 체제는 사회구성원의 자유, 모든 사람의 공동 입법에의 종속 그리고 그들의 평등의 원칙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은 이미 성립된 국가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바로 어떤 국가 혹은 시민적 정치 체제가 수립될 때 근거해야 할 순수 이성적 외부인권 내지 정의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일반적인 법의 관점에서 가능한 한 개인의 권리는 다른 개인들의 자유와 조화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각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동체 속에서의 권리 또는 공공권은 이러한 관계를 계속하게 하는 외부적 법의 고유한 특질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칸트는 시민 헌법이 어떤 강행법에 지배받는 자유로운 사람들의 관계라고 하였으며 이들은 그 동포들과의 일반적 연합 내에서 그들의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공화제에서는‘국민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결정할 수 없는 것은 입법자도 국민에 대해서 결정할 수 없다’는 칸트의 말을 통해 입법자와 신민도 평등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칸트는 개인들의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바탕으로 영구 평화에 대한 구상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롭고 평등하며 독립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대의 정부 및 법에 의해 통치되는 정부형태로서 공화제를 제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본래 지구상 어떤 땅의 부분에 대하여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갖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 이방인의 권리는 토착주민과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의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된다. 칸트는 이런 식으로 서로 이방인에게 환대하다보면 서로 멀리 떨어진 대륙들이 공공법에 의하여 규율되는 평화적인 상호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계 시민법에 가까이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 보편적 인권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Ⅱ-ⅲ. 칸트가 말하고자하는 영원한 평화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평화의 개념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연이 영원한 평화를 보증해 준다고 믿었다. 여기서 자연은 이념으로서의 자연이며 기계론적 자연이 아니라 반성적 판단력의 대상이 되는 유기적 전체로서의 자연으로 보았다. 인간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 평화기구를 만드는 것, 전쟁을 통해 불모 지역에까지 사람들이 살게 된 것, 전쟁을 통해 인류가 다소간 법적인 상태가 된 것들은 결국 모두 자연의 교묘한 이치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칸트는 개인들의 자연상태는 평화가 아닌 전쟁의 상태라고 보았다. 끊임없이 적대적 행위가 일어난다는 의미는 아니나 그러한 전쟁의 위협이 어느 때든 도사리고 있는 상태라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라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무언가, 전쟁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 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쉽게 우스개로 비유하자면 싸우기 위해 훈련시킨 투사견의 목줄을 풀었을 때에도 안전한 상태의 투사견일 것이다. 그러나 그 때 투사견은 한 마리의 큰 개로 보아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도덕적, 윤리적 원칙이 중요하다는 점을 제시한 것이다. 단순히 국가 차원에서의 전쟁의 종식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국가들의 정치 체제, 국가들의 연맹을 구성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관계원리와 지 않으며, 사적으로는 비윤리적인 행위가 공적인 영역에서는 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마키아벨리가 정치영역에서 윤리적 문제에 무감각했다는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정부가 안정되고 확고한 상황에서 운영된다면 정부는 연민, 신뢰, 정직함, 인류 그리고 종교와 같은 기존의 덕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곧 마키아벨리는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는 공적인 윤리와 사적인 윤리가 일치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는 정치적인 상황이 군주를 포함한 정치적 행위자에게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위해서 비정하고 냉혹한 행위를 강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영혼의 구혼을 원하는 자는 차라리 정치영역에 들어서지 않는 편이 낫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정치적인 상황이란 선과 악 중에서 택일 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 보다 적은 악 중에서 보다 적은 악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서 마키아벨리 사상의 현실주의적인 면모를 잘 보여 준다.Ⅲ-ⅲ. 마키아벨리 사상의 외양의 강조마키아벨리는 정치의 핵심을 상징과 외양으로 파악했다. 정치적 행위자로서 통치자는 능란한 위선자요 가장자여야 하며 성실함, 자비, 인간애 및 신실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서 보이는 외양의 강조를 필자는 세 가지 함의를 지니는 것으로 보았다.첫째, 마키아벨리는 정치가 본질의 영역이 아니라 외양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정치는 변전 무상한 생성과 현상의 영역이기 때문에 앞서 말했듯, 철학적 진리나 종교적 진리(당시에는 기독교적인)의 적용을 거부한다. 마키아벨리에게는 군주나 정치적 행위자들이 권력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은 영혼의 완성이나 진리의 실현이 아니라 영광과 명예였는데, 이 역시 외양의 속성에 불과하다.둘째, 마키아벨리는 기만과 폭력이 횡행하는 정치상황에서 정치적인 행위자가 자신을 정치적인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보호색으로서 능숙한 가장과 위선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에서 외양의 중요 아니겠지만, 공적인 영역에서는 전체 공동체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유덕한 행위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즉, 마키아벨리는 대부분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하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국가공동체와 인민은 사적인 개인과는 다른 방법으로 통치된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었다.그리고 되도록 정치행위자는 통상의 윤리를 좇아서 행동하라고 주문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독자적인 정치적 윤리 보다는 통상적 윤리가 우월하고, 우선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사악함 그자체로는 권력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영광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가 언제나 윤리적인 도덕과 상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정부가 안정되고 확고한 상황에서 운영된다면 정부는 연민, 신뢰, 정직함, 인륜, 그리고 종교와 같은 기존의 덕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공적인 도덕과 사적인 도덕이 일치하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상태야말로 안정된 국가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이점을 칸트의 ‘영원한 평화에 관하여’의 도덕론과 비교해 본다면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칸트도 도덕과 정치(법)의 역할을 분리하기는 했지만, 도덕은 우리가 그것에 따라야만 하는 무조건적인 명령적 법칙의 총체이기 때문에 본적으로 정치는 도덕법칙에 예속되어야 한다고 본다. 도덕은 실천 이성 자체로서 현실적으로 제한된 실천인 정치에 대해 우선권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경험적 권력정치의 대변인으로서 도덕을 정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을 정치적 도덕가로 보았고, 정치를 도덕의 수단으로 파악하면서, 국가권력의 원칙들을 도덕에 의거하여 입법하는 사람을 도덕적 정치가로 규정한다. 그러면서, 정치적 도덕가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라든가 인간이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이해 없이 마치 인간을 아는 것처럼 떠벌리면서 자랑하지만, 그들은 결국 궤변만을 늘어놓게 될 것이라고 본다. 칸트가 본 그들은 이념은 무시하고 경험에만 의존하는 자르겠다.
국내영화에서 한국영화의 점유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한국 영화의 파급력이 눈에 띄게 강해지고 높아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나란 타국의 영화에 비해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하는 영화가 많다는 것이 또한 특징이다. 다른 나라에서 느끼지 못한 문화가 있기에 그러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해외에서 찬사를 받는다. 그리고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하는 마이너급 영화제를 통해 다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보고 만들 수 있는데, 이는 영화산업의 질적 발전을 발판이 된다.그 예로 국내에서 부산 아시아 단편 영화제는 국내 및 아시아권에서 제작된 다양한 단편영화들을 소개하는 영화제이다. 또한 역량 있는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여 창작자와 관객 그리고 창작자들간의 상호교류와 소통을 촉발하는 축제의 장이다. 1980년을 시작으로 20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부산 아시아 단편 영화제는 현재 한국 영화의 붐을 일으키고 있는 여러 감독들의 데뷔 무대였다. 여기서 나오는 많은 영화들은 네티즌들의 입소문을 타고 흐르는데, 그 파급력은 유명 배우들을 쓴 영화들을 제치기도 한다. 그리고 찬사를 받는다.그리고 이번 수업에서 과제 수행 중 알게 된 인권영화제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영화제였다. 그런데 원래 존재하던 영화제라니...세계 인권선언이나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되어있는 표현, 사상의 자유. 그러나 그것들은 그 동안 정부로부터 많이 무시되어 왔었다. 인권 영화제는 시대를 거스르는 검열을 ‘인권’ 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한다. 인권영화제는 인권교육을 위한 하나의 시도로써 '영화'를 발견하고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의 현장으로,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인류 모두의 과제를 알려주는 주제 속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매년 서울을 중심으로 열리고 있으며 지역 인권 연대들의 영화제 개최 움직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인권 영화제 외에도 퀴어 영화제 또한 필자가 존재했으면 하는 영화제였다. 퀴어 영화제는 성적 소수자들인 동성애자를 위한 영화제이다. 퀴어 영화란 동성애자들의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발표되고 있는 영화를 일컫는다. '퀴어'는 흔히 변태적 성행위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그 동안 그들이 받아왔던 사회적인 멸시, 편견에 맞서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이 용어 ‘퀴어’ 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2000년 이후, 재정적 위기로 인해 영화제의 공식 개최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수시로 일정 기간을 정해 카페나 바에서 상영하기도 하고 인터넷상에 있는 ‘서울 퀴어 아케이브’라는 공간을 통해 계속적인 상영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영화제는 국내 퀴어 영화는 물론 세계 각 국의 퀴어 영화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영화제이다. 또한 인권영화제와 함께 소수자의 인권을 위한 영화제로 관심을 끌고 있다. 아직 완전한 영화제로서의 기틀은 다져지지 않고 있다. 이 영화제는 성적 소수자들의 사회를 향한 통로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영화제는 그저 배우들의 잔치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영화산업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하나의 창이라고 생각했다. 전자에 대한 나의 생각은 크게 바뀌었지만, 후자에 대한 생각은 변치 않았다. 영화제가 배우들의 잔치일 뿐이라 생각한 것이 큰 오산이었던 것이다. 각 종 영화제의 상의 종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고, 배우와 감독들이 꿈 꾸는 곳이었다. 그러한 곳을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을 뉘우치게 된 것이다. 라디오에서 어떤 배우가 말했다. 영화제에서 어떤 영화가 어떤 상을 받고 배우와 감독 상도 중요하지만 기술부문의 상 또한 중요하다고. 이러한 분들이 없고 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영화 또한 존재하지 않고 발전 없이 퇴화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워쇼스키 남매의 매트릭스 촬영 시절 여러 카메라 기법으로 인해 현재 많은 영화가 그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영화제가 없더라도 이러한 기법은 알려지겠지만, 그로 더욱 각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다시 앞으로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마치자면 국내단편영화나 흥행보다는 상에 주력하는 영화들 또한 존재한다. 국내관객의 관심을 크게 끌지는 못한 점에서 영화제용 영화라는 혐의를 얻을 수는 있지만 의 깐느영화제 본선(경쟁부문)진출도 한국영화의 국제적 위상에서 상징적 기호로 작용한다. '임권택 감독-정일성 촬영감독-이태원 제작'이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황금 시스템에서 나온 은 과거의 것을 현재시점에서 새롭게 풀어내면서 판소리체 영화를 실험해 보인 특별한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2000년 깐느는 어느 때보다 풍성한 한국영화의 축제라는 느낌을 주었다. 본선에 진출한 외에도 감독주간에 오른 , 비평가주간에 오른 정지우 감독의 , 주목할만한 시선에 나간 홍상수 감독의 그리고 단편 영화부분에도 한국영화 한 편이 초청받는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마치 깐느 본선진출이 한국영화의 원대한 야심이자 성취인양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었던 언론의 반응이 떨떠름하긴 했지만 어쨌든 해외에서도 한국영화의 존재와 활력을 인정하는 분위기 가 좀 더 확실해졌다.
- 조지 딕키의 예술제도론 : 예술에 개?폐성에 대한 철학적 소고 ?1. 조지 딕키, ‘예술제도론’ 그것은 무엇인가?현대의 예술은 다양한 관점에 의해 재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관점들에 의해 우리가 흔히 예술 혹은 예술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규정되는 반면 아닌 것도 있다. 예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많은 관점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중 조지 딕키의 ‘예술제도론’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ⅰ. “예술”과 “예술작품” : 분류적(classificatory) 의미와 평가적(evaluative) 의미?. 분류적 의미 : 어느 대상이 어떤 품목 혹은 범주에 속하고 있는 것인가를 지시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경우를 말하고, 이러한 의미로서의 “예술작품”이라는 말의 사용은 어느 대상을 예술작품이 아닌 것과 구별하여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분류해 놓는 일과 관련이 있다.?. 평가적 의미 : “예술작품”이라는 말은 흔히 “저 그림은 예술작품이다”라고 말할 때처럼 어느 주어진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분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평가를 하기 위해 사용된다. 예를 들어 “저 그림”이라고 그림에 대해서 지칭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지시물이 분류적 의미로서의 예술작품임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고, 뒤에 “예술작품”이라는 말은 평가적 의미로서 저 그림이 찬미적 대상임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두 가지 의미를 분명히 구분한 이유 : “예술”의 정의를 위해서 지극히 중요한 예비적 단계의 고찰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비전시적인 성질의 입장에서라면 예술의 정의가 가능할 수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분류적 의미로서의 “예술”이지 평가적 의미로서의 “예술”에 대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어느 대상이 예술작품으로 분류되기 위한 필요하며 충분한 조건이 무엇이냐를 열거함으로써 그는 예술의 정의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2 .인공성(artifactuality)에 대하여? 위의 i를 통해서 본다면 딕키는 예술성과 인공성을 예술을 정의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으로 제시 하였다. 인공성이라는 성질은 전시적인 성질이 아니지만 적어도 통상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구분 짓는 자격을 수여하는 일이 가장 명백하고 선명한 사례들은 법적인 자격이 관련되고 있는 어떤 국가적 행위들이다(ex. 예술학회 종사자들). 즉, 어떤 사회 제도-국가-의 편에서 행위 하는 사람이 법적인 자격을 수여하는 사람들의 사례라는 것이다. 하나의 인공품은 “예술계”라고 부르는 사회제도 내에서 감상을 위한 후보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점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어느 것이 감상을 위한 후보인지 아닌지 항상 알 수 있다는 보증이 없다. 또한 어떻게 자격이 수여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여기서 수여 자격이란 단 한 사람이 어떤 인공품을 감상을 위한 후보로서 취급함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 인공품을 창조한 예술가 단 한 사람에 의해서 수여되는 것이다. Ex)음악과 사진3. 예술과 비 예술에 대해서앞서 말한 것들을 살펴본다면 어떠한 무언가는 특정 속성을 띄어야 예술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즉 예술 혹은 예술작품이라 불리는 것은 어느 정도 사람의 손길이 가해진 것이며, 사회적 관습에 의해 정해진 이들에게 그 지위를 부여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행위 예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행위 예술은 현대사회에 들어 문화적 관습이 바뀜에 따라 예술이라 칭할 수 있게 된다. 행위예술을 하는 이들은 그들 스스로에 의해 후보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며 예술계에서는 하나의 현대예술로 보고 있다. 그렇기에 딕키의 분류적 정의에 의해 예술로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예술가로 불리는 낸시랭 같은 경우는 다르다. 낸시랭 스스로 자격을 부여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지위를 받는 이들에게 예술로서 구분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행위 자체는 예술이 아닌 비 예술로 평가함이 맞다.4. 예술제도론에 대한 종합적 정의‘예술제도론’은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예술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게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이 이론은 이 모든 것들이 공유하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학철학(문학작품을 선정하여 그 작품이 문학언어의 특징을 어떻게 활용하여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는데 성공하는지를 보여주고,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과 문체의 활용방식 등을 중심으로 작품을 비평하시오)Ⅰ. 들어가면서Ⅱ. 본론ⅰ. 영화와 원작 문학의 차이ⅱ. 소설 ‘은교’는 무엇인가ⅲ. 소설 ‘은교’의 특징Ⅲ. 결론Ⅰ. 들어가면서영화의 문학적 작품화화, 혹은 문학적 작품의 영화화 된 작품들은 많다. 그것들은 원작이 이미 뛰어나기 때문에 다시금 영화로 보여지고 싶었을 것이다. 작품들이라고 불리어지는 어떠한 것들은 원작보다 폄하되기도 하며, 때론 우리의 심금을 잡고 되돌아보게끔 한다.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평가하게끔 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또한 우리는 왜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일까. 평가를 하게 되는 기준은 또 우리의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많은 의문을 가지며 원작과 영상매체, 영화와 비교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주관에 의해 달리 해석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앞선 질문들의 공통적인 것이 원작(보통의 원작은 소설이 되곤 하니 소설로 통일하겠다)작품들 안에 숨어져있다. 그것이 무엇일지 필자는 최근 개봉되어 이슈를 야기했던 ‘은교’라는 작품을 통해 이야기해보려 한다.Ⅱ. 본론ⅰ. 영화와 원작 문학의 차이영화와 소설(문학)의 확연히 보이는 큰 차이는 무엇일까? 먼저 시각과 청각의 혼합매체가 영화라는 것은 아는 사실일 것이다. 소설은 그에 반해 시각적인 요소만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나 생각하기에 시각에 청각적인 감각까지 요하며 다른 경험을 갖게 하는( 최근에는 의자도 흔들리며 물도 나온다) 영화라는 매체가 더욱 뛰어남을 인정 받아야함이 옳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보다 원작 소설들이 더욱 뛰어나다는 것이다. 왜 이런 것일까? 답은 카메라의 시선,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솔직해짐에 있다. 영화는 카메라가 보는 부분만 볼 수 있으며, 이에 영화의 관점은 카메라의 제한이라는 것을 받게 되었다. 이 또한 cg가 넘어서 문제가 해결되며 더욱 고차원의 매체가 되었다. 당연한 것들에 대한 반역, 다르게 보길 요구한다는 것이다. 가령 살인은 나쁘지만, 그 살인자의 입장에서 소설은 풀어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나쁘지만 타당했던 것이며,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독자로 하여금 이해시킨다. 영화라는 매체에서 이러한 것을 모두 쓸 수 없는 까닭은 인간의 이러한 이해시키는 내면에까지 카메라의 시선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 소설의 작가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독자로 하여금 잃어버렷던 어떠한 생각을 다시 보여주는 체험을 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한 사회, 문화 속에서 당연시하는 것을 뒤집는 역할을 했다. 독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잃어버렸던 어떠한 것을 말이다. 다른 것을 다 버리고 택했던 일반성,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획일화된 방식으로, 특정한 방식으로만 이해되도록 강요되어왔던 것을 문학은 계속 뒤집는 것이다. 이미 인간 안에 있던 어떤 것, 그것을 영화라는 매체가 일반화 시킨다면, 소설 등의 문학은 그것을 벗어난다. 만약 영화가 그러한 문학이 갖는 고유 특징을 갖는다면 처참하게 대중들에게 무시당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문학 작품 내에서 이렇게 표현했다고 하자.‘눈으로 보기에 하늘은 정말 청명하지만, 내 마음은 안개가 껴 그리하지 않는구나’이렇게 표현했을 경우에 영화는 이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담아낼 방법이 없을 것이다. 단지 배우의 몸짓, 혹은 표정만으로 관객은 유추해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표현의 문제에 영화와 문학의 차이는 또 있는 것이다. 문학이나 소설이나 표현과 표현된 것 사이의 관계 안에 있다. Mimesis (현실의 닮은 꼴을 모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은 그 성격 안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미메시스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좀 더 인간의 외적인 것을 추구하는 방면이 보인다면 문학은 인간의 내면, 그리고 세상에 우리가 보아왔던, 모두가 상상해왔던 것의 미메시스 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영화와 문학 간의 차이로 인해 인간의 내면까지 카메라를 담을 수 없는 영화는필가로의 자질이 없지만 스승이 쓴 글들로 문단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베스트셀러가 되며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작가가 된다. 원로가 된 이적요는 그러한 그의 태도를 못마땅해 하지만 방관하는 편에 선다. 그러한 그의 적막함에은교라는 한 소녀가 집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오게 되면서 그는 어린 소녀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가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사이 제자 서지우는 스승의 모든 것을 받고 배우고 싶었지만, 자신의 무능력함에 울부짖으며 자신의 정체성조차 흔들리게 된다. 자신의 필명으로 작품을 내놓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것인지도 모르며 자신을 어리지만 성공한 작가로 보는 세상에게 원망의 감정을 느끼고 있기도 한다. 소녀 은교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며 무언가의 마음 속 안정을 찾은 이적요와 정체성의 혼란 속에 흔들리는 서지우와의 대화에서 소설과 영화 ‘은교’의 서지우를 통해 작가 박범신이 말하고자하는 주제가 나타난다.‘ “사람들, 기자들, 평론가들, 왜 그렇게 둔한가 하는 거예요. 나와 내 문장들, 그걸 그렇게 몰라보는 게 이상해요. 내가 쓴 게 아닌데도, 의심조차 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때로 까발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게로군?” 내가 그렇듯이, 그도 모든 것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고 있으며, 그러면서 동시에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차렸다.’ (p146)‘나는 누구인가, 이적요인가, 서지우인가, 요즘의 내 문제는 그것이다.‘ (p164)‘ “예전 습작기 때는 연필로 썼으니까 그때의 느낌이 남아서요, 마치 연필로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나는 당황해서 하마터면 말을 더듬을 뻔했다. 연필로 쓰는 것은 선생님이었고, 쓰다가 자주 손을 씻는 버릇도 선생님의 버릇이었다.’(중략)‘나는 대체 언제까지 이런 인터뷰를 계속해야 한단 말인가.’서지우는 자신의 문체가 느껴지지도 않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됬음에도 불구하고 의심하는 이가 아무도 없으며 스승 이적요의 그림자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혼돈을 느끼고 있다. 소설 ‘은교’, 혹은 출판사 관계자들, 문예지들은 그런 국면에서 보면 등 돌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학으로 유명해지려는 서지우의 욕망과 그런 시스템은 너무 유기적으로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면면들을 이제 원로가 된 박범신은 적잖게 봐 오지 않았을까 라고 필자는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서지우를 통해 이러한 주제를 보이고 싶지 않았나 싶다. 카프카나 플로베르처럼 전혀 남모르게 글을 쓰는 일은 개인적인 차원과 시대상, 개인사가 합쳐진 것이다. 그러나 서지우에게는 심장과 단편소설 은교에서 그러한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러한 것을 후에 느낀 소녀 은교는 공대생이 쓸 수 없는 것이라며, 그러한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며 후회하는 말을 하기도 한 것이다. 지금의 문학이 쌓아온 것이며 문학이 갖는 특성을 서지우는 표현할 수 없었다.서지우의 이름으로 나왔지만 심장과 단편소설 은교를 쓴 이적요는 중간 중간 많은 시를 삽입하며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그리고 ‘은교’의 작가 박범신은 많은 시들을 통해 이적요의 입장을 보여주며 독자에게 말했다.두 사람만의 상점에서 서로 만나서두 사람만의 술을 우리들은 마신다너는 조금 나는 많이늘 마시는 술을 마시면서낮에 있었던 이야기며 일의 이야기(중략)그리고 갑자기 어둠 속에서의 입맞춤 (p205)쭈글거리는 노파는귀여운 아기를 보자 마음이 참 기뻤다모두가, 좋아하고 뜻을 받아주는 그 귀여운 아기는노파처럼 이가 없고 머리털도 없었다 (p251)이적요는 자신의 감정을 시로 많이 표현했다. 그리고 그 감정의 대부분은 자신이 느끼는 은교에 대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늙은 자신을 한탄하는 것 또한 시로 많이 표현했다. 왜 이적요와 박범신은 이러한 시들을 인용하면서 표현하고자 했을까. 시는 소설에 비해 짧지만 은유적이며 상징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순수하게 자기 내면에서 그것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세계로부터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감정적인 어떤 것을 느껴 자신의 그러한 감정을 느꼈던 내면적 사건을 전달하고자하는 바에 있는 것이다. 인간 느끼는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짧게 표현해내기엔 부족하지만 독자로 하여금 그 감정이 한 번에 닿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찌 보면 시는 심장마비가 온 이들에게 가하는 전기쇼크 같은 존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영화 ‘은교’에서 이적요는 대중들 앞에 서서 말하지만 소설 ‘은교’에서는 이적요의 독백이 있는 부분으로 담겨진 부분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작가 박범신이 말하고자하는 가장 큰 부분이 아닐까도 싶은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p250)이 부분은 이적요가 제자 서지우에게서 가장 크게 느끼는 부분일 것이다. 원로가 된 자신이 갖지 못했던 부분, 그리고 갖지 못하는 부분들을 서지우가 갖는다. 그러나 서지우는 그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적요의 독백은 작가 박범신이 독자에게 주는 핵심 주제라고 본다. 자연에 의해 얻는 아름다움이 있다면 늙음 또한 자연이 주는 것이기에, 늙음과 아름다움을 폄하하지 말 것이며, 올려다보아야 할 존재임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라고 필자는 느꼈다.이렇게 소설 ‘은교’에서 작가 박범신은 서지우와 이적요의 입장에서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소녀 은교의 부분은 그 둘의 입장에서 조금씩 나타나고 있기에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한다. 서지우를 통해 ‘은교’의 작가 박범신은 현 문단들이 갖는 문제, 그리고 스승을 이기고싶은 제자의 욕망, 그리고 욕망을 빼앗음으로 인한 인간의 카타르시스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적요를 통해서는 늙음으로 인해 나서길 두려워하고, 어떠한 감정을 억누르는 방법이 이적요에겐 시와 서지우의 이름으로 발표된 소설들을 쓰는 것처럼 억제하는 것에는 어떠한 방법이 있음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이 후에는 어떠한 결과를 나을지는 몰라도 말이다.ⅲ. 소설 ‘은교’의 특징영화나 어떠한 대중매체는 문학을 토대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