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은 공정국가로 가는가?”-『공정국가: 새로운 대안국가 모델』를 읽고목차1. 불로소득은 괜찮아!(1) 부자를 위한 대한민국2. 진정한 동일한 출발선?(1) 우리는 평준화된 고등학생(2) 돈 없으면 병원 가지마!불로소득은 괜찮아!(1) 부자를 위한 대한민국이명박 정부는 출범 후 최우선적으로 법인세와 양도세, 소득세를 크게 깎아주고, 종합부동산세를 대폭 감면하는 획기적인 감세 정책을 내놓았다. 정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자산가 계층의 부동산 보유세를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 깎아주고, 대기업의 영업이익에 대해서도 수억에서 수백억 원까지 큰 폭으로 세금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 재벌과 자산가 계층을 위한 정책들뿐이다. 물론 정부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부자들의 가처분 소득을 늘려줘야 경기가 살아나고 그 바람에 서민 경제도 덕을 볼 수 있다는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운다. 즉 부자들에게 세금을 깎아주면 부자들이 투자를 많이 하고 씀씀이가 늘어나 경제가 살아나서 결국에는 서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고 서민에 대한 어설픈 배려를 늘어놓는 것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불로소득인 부동산 양도차익을 사유화하고 부의 대물림을 보장하는 것까지도 경제 활력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최고가 주택을 팔 경우에도 세금을 거의 내지 않게 되었으며, 두 채가 넘는 자라도 팔지 않고 자녀에게 증여를 하면 많은 세금을 절약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하루 벌어 하루 사는 한계 상황에 내몰린 빈곤 계층의 절박한 삶을 구제하는 데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 허황된 주장에 불과하다. 정책적 잘못이 검증된 밀어붙이기식 감세와 규제완화 정책을 오늘의 우리 상황에 무리하게 적용하려 하기 때문이다.진정한 동일한 출발선?(1) 우리는 평준화된 고등학생과연 고교평준화는 명문대학교를 향한 경쟁을 심화시켰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현재 대학교에서 고등학교의 서열을 매기고 그에 따른 가산점을 주는 ‘학교등급제’를 정부에서는 묵인한다. 그 결과 좋은 등급의 고등학교를 가기위해 강남에서는 소위 ‘강남 8학군’으로 가기위한 위장전입이 일어난다. 그리고 자사고와 특목고 집중현상도 일어나게 된다. 그로인해 생겨나는 사교육비 증가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고교 등급제에 의한 대학진학에서 혜택이 이루어진다면 소위 일류대학이라 불리는 학교들은 형평성을 잃고, 상류층 자녀들의 입학률이 높아질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학력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이들의 일류대학 진학은 사회에서의 성공과 연관될 수밖에 없고 배경과 학력을 갖춘 부유층의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 보다 더 나은 조건을 부여받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부의 상속이 이루어지고, 그와 반대의 입장에 있는 빈곤층 자녀들은 여전히 빈곤하게 살 수 밖에 없게 된다.따라서 고교평준화는 필요하다. 먼저, 고교 평준화는 각 가정의 사교육비를 줄여주고, 학생들의 학력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준다. 한국교육개발원(KDEI)의 ‘고교평준화 적합성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비평준화 지역이 학부모 자녀 공부 관리 정도, 사교육의 비용 부담과 우선도, 친구관계에서 성적을 중시하는 정도, 지금 받고 있는 사교육의 개수가 다소 높았다. 이를 통해 비평준화 지역이 사교육비나 학력에 대한 부담감이 평준화지역보다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둘째로, 고교 평준화는 “교육,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므로 비평준화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비평준화로 할 경우에는 경쟁을 통하여 전체적인 학력 수준을 향상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이 학력이라는 것이 주입식 교육을 통한 지식 습득에 한정되어 있다. 이는 창의력과 위기관리 능력 등을 중시하는 21세기 사회적 흐름과 맞지 않으며 수동적인 학생이 되어 진정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로 키울 수 없다. 이는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오히려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리고 평준화는 교육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고 우리나라 공교육의 재정적 지원을 늘릴 수 있어 학생들의 전반적인 경쟁력을 높여준다. 마지막으로 고교 비평준화는 고등학교 별로 서열화가 일어나면서 학교별이나 학생별로 성적에 따라 사회적 인식이 크게 달라지고 좋은 학교가 되지 못한 학교 관계자들과 학생들은 위화감이나 열등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평준화로 신흥 명문 고등학교가 생기는 경우가 있고, 전체적으로 학생들의 실력이 각 학교별로 균일하여 이러한 감정들을 느끼지 않게 된다. 또 우리나라는 학연이라는 특수적인 사회관계를 맺고, 취업이나 승진 등을 할 때 주된 평가수단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고교 평준화는 이러한 비능률적인 관행을 없애는 한편 능력을 우선적으로 평가에 고려할 수 있게 한다.
“자각(自覺)에 대한 비판적 성찰.”-『생각의 좌표』를 읽고목차1. 자각(自覺)의 나무2. 끊임없는 물음표3. 콜럼버스의 달걀자각(自覺)의 나무자각(自覺,self-consciousness)이란 사전적 의미로 일정한 상황에 놓인 자기의 능력·가치·의무·사명 등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한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한번쯤은 돌이켜 생각해보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되돌아 볼 때 주로 “현재의 자신”은 어떤가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홍세화는 자신의 생각(나는 이것이 자아(自我)라고 생각한다.)이라는 큰 나무에서 뿌리에 해당하는 부분 즉, 모든 생각의 토대가 되는 기본적인 가치관, 세계관이 어떻게 생성되었나를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나의 뿌리는 진정 자신의 주체적인 생각의 영양분 속에 자라났는가, 아니면 부모의 강압적인 요구 혹은 사회의 통념의 흙 속에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러한 홍세화의 입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나의 이념, 주장은 여러 가지로 뒤섞여 있다. 진보주의적 가정에서 교육받은 나, 현상유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 이상(理想)적인 논리와 말이 있는 책 속에서의 나. 이러한 가치관의 충돌은 나의 생각을 더욱 혼란하게 만든다. 그 뿌리에서 커져간 나의 나무는 풍성하게 자라고 있지만, 사회생활을 함에 따라서 때때로,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그래서 이 사회는 현재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에 대해 알기 위해 직접 견문을 해보기도 했다. 예를 들어, 2008년 뜨거웠던 여름의 촛불시위에 나가보았다. 분명 방관자적인 의식을 가지고 나갔지만, 그 속에서 시민들의 열망과 그것을 막으려는 정부의 대처 속에서 나는 또 한 번의 가치관 혼란을 가지게 되었다. 분명 평화적인 시위였지만 그것에 대해 폭력적 대응을 하는 사회는 내가 알고 있는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후 나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등을 생각하면서 ‘가지치기’를 했고 이러한 혼란 속에 난 자기성찰의 계기를 가질 수 있었고, 나의 나무를 올곧게 뻗어 나가게 하는 좀 더 굵은 뿌리를 가지게 되었다.끊임없는 물음표누군가와 대화를 하다 “왜?”라고 계속 물어본다면 상대방은 상당히 당혹스러워 한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의 귀찮음, 혹은 무지함으로 인해 왜? 라는 질문을 덜 하기를 강요받아 왔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왜?”의 죽음에서 대화와 토론이 사라졌고 그로인해 수평적 관계는 없고 수직적 관계만 이 사회에 팽배해 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왜?”의 회복을 바란다.나도 이러한 경향을 많이 받아서 왜? 라고 물어온다면 대답은 간결하게 말하고 상세하게 말하는 것을 꺼려한다. 분명 나도 작가의 말대로 어렸을 때의 “왜?”의 대답은 분명히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나이, 연륜을 가지게 될수록 그 질문은 많이 하면 안 된다고 느꼈다. 부모님과의 대화에서 “왜?”라고 질문을 많이 하면 되레 “넌 왜 네가 생각해보지 않고 자꾸 물어보느냐?”라며 핀잔을 주신다. 분명 부모님은 알고 있을 수도 있고, 혹은 몰라서 답을 회피 한 것 일수도 있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타인의 생각에 기대려는 것을 줄이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왜?”라는 것은 작가와 생각이 많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의 대한 생각은 조금은 다르다. 자기의 의문에 대해 즉흥적 대답을 얻는 것보다 자신이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하여 알 수 있게 하는 탐구적 능력을 기르고 그로인해 서로 깊은 생각을 가지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게 하는 ‘심층적 소통’이 좋다고 생각 한다.콜럼버스의 달걀우리는 모두 콜럼버스의 달걀을 알고 있다. 달걀을 똑바로 세울 수 없지만 콜럼버스는 달걀 밑을 깨는 새로운 생각으로 우리에게 창의성이란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것이라 알게 했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의 보고 현대 한국 사회의 양극화의 문제점에 일침을 가했다. 이 생각에 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범인(凡人)들은 탁자위에 남아있는 달걀을 중점적으로 보았지만 작가는 깨져나간 부분을 생각한 것이다. 그의 말이 없었다면 우리는 깨져나간 부분은 우리는 신경 쓰고 있었을까?
시란 무엇인가 - “주체적 독자를 위하여”오래전부터 시는 동서양의 구분 없이 인문교육의 중심이다. 조선시대 이래 우리의 가치관을 성립하고 있는 유교에서도 시를 배우는 것이 곧 말을 배우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시는 언어의 정수이고 시의 이해는 언어의 이해다.그러나 오늘날 시는 우리의 생활에서 멀어져있다. 시를 보는 안목이 곧 인품의 반영 이였던 것은 아주 옛 일이 되었고 글에 대한 엄격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인격 형성의 중요한 시를 이렇게 무관심하게 된 까닭은 여러 가지 있다. 첫 번째로 고전을 통해서 시적 감수성의 훈련이 되지 않았다. 고전을 멀리하게 된 이유는 우리세대가 한문과 격리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문학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이다. 즉, 좋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가리는 분별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한 것이다. 세 번째로는 시를 감미 할 수 있는 향수능력과 무관하게 ‘연구’ 가 증대되고 있다. 연구는 시의 향수와 이해와는 별 기여를 못한다. 네 번째로는 시를 쉽게 보고 시 앞에서 두려움과 존경을 느끼지 못하는 현실이다.현재 작품에 대한 안목은 비평가의 영향력이 크다. 가령 비평가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은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취향이나 안목을 많이 변경시켰다는 것이다. 문학교육이 하는 일은 적정한 향수능력과 감식력의 배양이다. 이러한 향수능력과 감식력의 목표는 개인이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 오늘날 우리는 주체적 판단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시를 들게 하면 우린 널리 인용되거나 비평가가 고른 시를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현재 우리의 문학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또 쉬운 시, 어려운 시를 구분하고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시가 깊이 있는 시라는 잘못된 생각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시는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체적 독자가 되기 위해선 시에 관한 잡다한 관념을 버리고 많은 시를 보고 좋은 시를 접해보아야 한다. 물론 많은 시를 읽게 되면 좋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를 구별 할 수 있게 된다. 주체적 독자가 되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선 2가지를 언급한다. 첫째는 시를 읽는 것이고 둘째로는 꼼꼼하게 읽는 것이다.먼저 시를 잘 읽는 방법에는 시에 쓰인 시어 즉, 소재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필요하다. 물론 경험의 차이에 의해 고전에 쓰인 시어에 대한 파악이 개인 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이 또한 시를 읽어봄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즉 문학경험이 현실경험을 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생들은 기본적인 근대적 고전도 접해보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교과서에 수록된 소량의 옛 시조와 현대시들을 접해본 것이 문학교육의 전부이다. 또 음률적 효과, 간결성, 비유와 상징 등의 창의성을 생각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화자의 마음에 대한 정서적 공감이 필요하다. 시를 읽을 때 개인적 경험을 통한 연상과 기억을 통한 연상을 하는 방법도 좋은 방법이다. 기본적으로는 문맥 속에서 찾아야 하지만 독자도 사회적으로 형성되어있고 저자도 사회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은 시행과 시행을 연결시켜 시의 의미를 설명 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