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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폴레옹 전쟁과 빈체제
    나폴레옹 전쟁과 빈체제(1) 나폴레옹 전쟁(인물의 생애와 연관)프랑스의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은 사관학교를 나온 후 자코뱅 국민공회 때 반란을 일으킨 툴롱항 탈환에 공을 세우고(1793년 12월), 다시 테르미도르파를 위하여 파리에서는 왕당파폭동을 진압하여(1795년 10월) 장교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혁명파와 반혁명파간의 이념 대립 등의 혼란 상태가 지속되어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이에 1796년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은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는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알프스 산맥을 몇 달에 걸쳐 넘은 그는 곧바로 이탈리아를 제압한 후,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굴복하고 캄포포르지오 조약을 체결하여 벨기에와 이탈리아의 북부 지방인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 이러한 군사적인 업적으로 나폴레옹의 인기는 프랑스 내에서 높아져 갔다.그러나 혁명 정부(총재 정부, 5명의 총재가 통치하고 있던 기간)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그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인심을 떨어뜨려 놓기 위해 그에게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다. 명목은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지역의 호족들을 쳐부수고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당시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한편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가있는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내세워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이때의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다음 원정인 인도 원정을 취소했고, 거기에다가 7월 프랑스 해군이 아부키르 만에서 넬슨의 영국 함대에장악된 군대와 30여명의 테르미도르파 의원들의 지지로 그는 500인회를 해산시켜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들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 투표에 부쳤다.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 1통령으로 임명되어 불과 30세의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에 넣었다.통령 정부는 3명의 통령으로 이루어졌으나, 제 2통령과 제 3통령은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권력은 제 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모아졌다. 나폴레옹은 곧 연합국에 강화를 제의하였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직접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려 하였다. 과거 한니발 이후 대규모의 군사가 처음으로 알프스를 넘는 일을 당시 그의 부관들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나폴레옹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 라는 유명한 말을 외쳤다. 그리하여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 1800년 2월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고, 다음해 2월에 오스트리아는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라인 강의 절반을 프랑스 측에 할양하였으며, 북이탈리아 등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했다. 이 강화로 제 2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어, 영국만이 전쟁을 지속하다가 전쟁의 중심축인 소 피트 수상이 물러나자 1802년 3월 양국 간에 아미앵 조약을 체결되었고 나폴레옹은 프랑스 식민지를 모두 양도받았다.국가가 잠시나마 안정이 찾아오자, 나폴레옹은 내정 면에서 일대 개혁을 실시했다. 전국적으로 세금 제도와 행정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혁명기에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공업 생산력의 회복을 실시하여 산업 전반의 부흥에 힘을 쏟았다. 1800년에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경제 안정을 도모했다. 1802년에는 유명한 레지옹 도뇌르(국립 명예의 군단 훈장) 훈장을 창설했다. 또, 교육 개혁에도 힘써 공공 교육법을 제정하였다. 그는 국내법 정비에도 힘써서 1804년에는《프랑스 민법전》,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했다. 이것은 각 지역의 여러 가지 관습법과 봉건법을 하나로 통일한 및 종교 조약을 맺어, 국내의 종교 간 대립을 완화했다. 또, 왕당파와 자코뱅 파 등의 파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국내 정치를 융화로 이끌었다. 한편으로는 현 체제를 뒤집으려고 시도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그리고 1802년 8월 2일에 그는 종신 통령(종신 집정)이 되어, 자신의 독재권을 한층 더 강화하였고, 1804년에는 황제가 되어 나폴레옹 1세라 칭하였다.이후 나폴레옹은 유럽을 제패하기 위한 소위 나폴레옹 전쟁 을 일으켰다. 나폴레옹은 정규적으로 25만 명의 군대를 동원했으며 1812년 러시아 원정에는 무려 60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사실 이전에도 프랑스 혁명 전쟁 이라는 이름으로 유럽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1795년 초 프랑스군은 모든 전선에서 유럽의 동맹군을 격파하고 계속해서 암스테르담, 라인 강, 피레네 산맥까지 진격했다. 더욱 중요한 성과는 프로이센이 어쩔 수 없이 유럽의 동맹에서 탈피하여 1806년까지 유효한 독자적인 평화안에 조인한 것이었다. 1795년 5월 네덜란드 연합주는 프랑스의 속국인 바타비아 공화국이 되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막강하게 포진한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 - 사르데냐군의 요새를 위협했으나 진척이 없자 1796년 3월 더욱 행동적인 장군이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그 인물을 대체해 이탈리아 원정군 지휘관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 ? 사르데냐 군대에 맞서 혁혁한 기동작전을 전개했고 그 결과 캄포포르미오 조약에서 오스트리아에게 오스트리아 령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 ? 룩셈부르크)를 할양할 것과 프랑스가 북부 이탈리아에 수립한 치살피나 공화국과 리구리아 공화국을 인정할 것을 강요했다. 네덜란드 획득은 프랑스 공화국 최초의 영토 확장이었다.나폴레옹의 다음 원정은 대실패로 끝났다. 그는 오스만 제국을 정복할 목적으로 1798년 5월 이집트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나일 강 전투(1798. 8. 1)에서 프랑스 해군이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패배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었다.그리하여 나폴레옹이 혁명력 7년 브뤼메르 18일(1799. 11. 9)의 쿠데타로 프랑스의 제 1통령이 될 무렵에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외세의 간섭 위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1800년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 거둔 승리와 뒤이은 뤼네빌 조약으로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로부터 2년간은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한 영국만이 나폴레옹에 대적할 상대로 남게 되었다. 트라팔가르 해전(1805. 10. 21)에서 넬슨이 압승을 거두어 프랑스가 영국을 침공하는 것은 실패했다. 1805년에는 영국 ? 러시아 ?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제 3차 대프랑스 동맹이 형성되었다.나폴레옹은 1805년 울름과 아우스터리츠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1806년에는 예나 ? 아우어슈테트 ? 뤼베크 등지에서 새로 동맹에 가입한 프로이센에게 승리했다. 그 결과 체결된 틸지트 조약에서 프로이센은 엘베 강 지역에서 영토 절반을 양보하고 폴란드의 일부를 잃었다. 이것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민족을 각성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슈타인 및 하르덴베르크가 내정 및 사회개혁을 이끌었으며, 그림 형제 및 피히테 등에 의한 독일의 민족정신이 각성되었다. 이밖에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서의 일시적인 반란에 뒤이어 체결된 1809년 쇤브룬 조약으로 영국 해협에서 러시아 국경에 이르기까지 포르투갈 ? 스웨덴 ? 사르데냐 ? 시칠리아를 제외한 유럽 전역이 프랑스의 주도로 프랑스 제국의 일부가 되거나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하는 순간이었다.하지만, 얼마 못가 나폴레옹에 의해 정복된 국가에서 민족주의가 나오면서 나폴레옹의 몰락이 곧 시작되었는데, 그 시작은 에스파냐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몰락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국가는 영국과 러시아였다.1806년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는 대륙의 항구를 통제해 영국을 간접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나폴레옹은 베를린 칙령을 발표했다. 이로써 영국 항구에 입항했던 모든 선박은기습작전을 동반하는 신속한 기동 타격전술로 적군의 대오를 교란한 이후 각개 격파하는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이 전술은 전장의 지형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필요로 했다. 특히 신속이동으로 부대에 대한 충분한 물자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작전지역 내에서 대량의 군수품을 징발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필요한 것이었다. 이 작전에 대해 나폴레옹의 적군이 취할 수 있는 대응책은 가능한 한 대오를 정비할 때까지 접전을 피하면서 위협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튼튼한 병참선을 갖고 있는 동맹군은 자신들을 추적하고 있는 나폴레옹 군대가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져 고통 받기 시작하는 동안 기회를 기다릴 수 있었다. 이 전술은 1811년 반도 전쟁에서 웰링턴 공작이 처음 사용했는데, 그는 포르투갈을 통한 병참선을 이용해 스페인에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 전술은 특히 러시아의 장군 바클라이 드 톨리와 바그라티온이 나폴레옹의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맞서면서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당시 러시아군은 평행선을 따라 단순히 후퇴하기만 했다. 9월 7일 유일한 전면적 접전이었던 보로디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나폴레옹은 결국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러시아군은 추격전을 전개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왔던 길을 따라 철수하기 시작했으나 영하 35℃로 떨어진 러시아의 겨울날씨 때문에 식량이 고갈되었다. 이 끔찍한 원정에서 나폴레옹은 50만 명의 부하와 동맹국의 신뢰를 잃었고, 적군의 두려움을 얻었다.1813년에 구성된 새로운 대 프랑스 동맹은 마침내 수적으로 프랑스군을 능가하는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동맹국은 하나 둘씩 떨어져나가기 시작했으며 나폴레옹은 1813년 말 라인 강 서쪽에서 철수해야 했다. 대프랑스 동맹군의 프랑스 본토 침공은 1814년 초에 시작되었다. 3월에 파리가 함락되고, 4월 6일 나폴레옹은 퇴위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엘바 섬 유배는 1년을 채우지 못했다. 그는 1815년 3월 프랑스로 돌아와 새로운 군대를 조직했다. 영국 ? 러시아 ?.
    인문/어학| 2008.12.16| 5페이지| 1,000원| 조회(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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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감상문 - 당통
    영화 감상문 - 당통(Georges Jacques Danton)1982년 감독 안제이 바이다가 만들었으며, 프랑스의 유명한 배우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주인공을 맡은 당통 은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권리(소유권 인정, 박애가 아님)를 사상적 기치로 내걸고 자본주의의 정치적 완성을 선언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좀 더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 1789년 7월 14일~1794년 7월 27일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으로 대개 프랑스 혁명은 엄밀히 말해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을 함께 일컫는 말이었지만, 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의미하였다.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절대 왕정이 지배하던 프랑스의 구제도인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평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켜 마침내 1789년에 봉기하게 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렸지만 혁명 후 수립된 프랑스 공화정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에게 쿠데타로 무너진 후 75년 동안 공화정, 제국, 군주제로 국가체제가 바뀌며 극도로 혼란한 정치적 상황이 지속되었고, 이어진 두 차례의 혁명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 하였다.프랑스 혁명은 크게 보면 유럽 대륙의 역사에서 정치적인 힘이 소수의 왕족과 귀족에서 시민에게 옮겨지는 역사적 과정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부터 1794년까지 프랑스가 경험한 격렬한 혁명의 과정은 세계의 역사에 많은 교훈과 논쟁의 소지를 남겨주었고, 오늘날에 프랑스 대혁명과 관련된 많은 역사 영화가 만들어졌다.특히 이 영화는 프랑스 대혁명이 민중혁명의 국면에 접어들고 과거 혁명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이후,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정치가 혁명을 압도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였다. 이때 벌어지는 당통과 로베스 피에르의 대립은 혁명 분열과 이에 연루된 정치적, 이념적 갈로지 공포정치 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당통에 대한 재판에 질 경우 혁명은 끝이 난다는 위기감 때문에 당통을 반혁명자로 처형할 것을 결심하였다. 당통은 관용과 평화와 정의를 주장하는 자신의 희생이 마침내 민중의 눈을 뜨게 할 것이라 스스로 믿고 처형 후에 자신의 잘려진 머리를 민중들에게 보여줄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 뒤의 역사를 보면 민중은 결국 그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로베스 피에르는 그의 처형 순간 혁명이 잘못돼가고 있음을 알았지만, 독재를 원하는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공포 정치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의 혁명정부도 1794년 7월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몰락하게 되었다.이 영화가 비록 프랑스 대혁명의 전반적인 내용을 모두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당통과 로베스 피에르의 대립을 통해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모순된 상황들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이 영화를 만든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시각에서 보면 당통과 로베스 피에르 두 인물 중 당통에 더 관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역사상에서도 당통이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비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안제이 바이다 감독은 당통과 로베스 피에르가 독대하는 장면 등을 구성하여 제작하면서 당통이 추구하고자 했던 사회가 무엇인지를 표출하고자 하였다.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당통이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었다. 1789년 7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당통은 코르들리에 지구 시민군에 가담했고 10월에는 지구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790년 봄 몇몇 시민군 대원들과 뒷날 유명한 코르들리에 클럽이 된 대중단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당통의 이름은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1790년 1월 임시로 구성된 파리 코뮌 위원으로 뽑혔으나 9월 코뮌을 정식으로 구성했을 때에는 의원이 되지 못했다. 1791년 1월 파리 주(州)의 행정관리로 선출되었지만 행정에는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그러나 당통은 코르들리에 클럽과 자코뱅 클럽에서 참여했고, 1791년 12월에는 파리 코뮌에서 '프로퀴뢰르'(procureur:검찰관)의 차석 보좌관으로 선출되었다.1792년 봄 프랑스가 위기에 빠지자 당통은 다시 국민의 권리 옹호자 역할을 했는데, 6월 18일 그는 장군이자 왕의 고문인 라파예트 후작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정치놀음을 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군주제를 타도한 1792년 8월 10일의 폭동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뚜렷하지 않지만 성공을 거둔 데는 그의 힘이 컸다.당통은 혁명재판소 앞에서 8월 10일의 승리는 자신의 덕이라고 연설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통이나 어느 누군가가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라 파리 곳곳에서 몰려온 이름도 없는 시민군들이 힘을 합친 결과였다. 왕을 몰아내는 데 큰일을 하지는 않았으나 입법의회는 그를 법무장관으로 선출했다. 공식적인 정부의 수반은 아니었지만 강한 성격, 혁명가로서의 경력이 주는 분위기, 신속한 결단력 등으로 당통은 새 정부의 동료들을 압도했다.유럽 동맹군이 프랑스를 침입하여 롱위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내무장관 장 마리 롤랑이 정부를 파리에서 블루아로 옮기자고 제안했으나 당통은 강력히 반대했다. 9월 2일 아침 베르됭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파리에 전해졌다. 시민들이 감옥으로 몰려가 반역자와 그 혐의자들을 찾아내는 동안, 당통은 입법의회에서 "조국의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더 많은 용기가, 언제나 적과 맞서 싸울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프랑스는 살아남을 수 있다" 고 유명한 연설을 하는 동안 감옥에서 학살이 일어났기 때문에 온건파 혁명세력인 지롱드파는 이 학살의 책임을 당통에게 돌렸다. 그가 이 학살을 막으려는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틀림없지만 당통이나 그 어느 누군가가 이 사건을 계획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8월 폭동과 마찬가지로 9월 학살은 한 사람이 꾸민 일이 아니라 파리 시민들이 일으킨 집단행동이었다. 9월 6일 당통은 파리를 대표해 국민공회 의원이 되었고 여러 혁명세력들 사이의 싸움을 끝내기 위해 모든 노재판에 관계해왔다. 혁명 초기에 참여했던 라마트 백작 테오도르의 〈회고록 Memoires〉에 따르면 당통은 왕을 살려줄 생각이었다.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롱드파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했지만, 당통은 샤를 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 장군과 공모해 뇌물을 써서 영국 정부의 개입을 유도하려 했었다. 이 계획이 실패하자 왕의 사형집행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당통은 이따금 음모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혁명의 주체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벨기에군을 지휘했던 뒤무리에 장군과 그와의 관계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뒤무리에 장군이 네르윈덴 전투에서 패한 뒤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자 지롱드파는 당통이 뒤무리에와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당통도 똑같은 비난을 지롱드파에 퍼부었다. 결국 양쪽의 불화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1793년 4월 7일 당통은 이전에 생겼다가 혁명정부의 정식기구로 바뀐 제 1기 공안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3개월간 외교· 군사 문제를 맡아 사실상 정부수반으로서 일했다. 2번째로 정부에서 일하게 된 그는 타협과 협상정책을 펴면서 프랑스의 적들과 외교회담을 열 수 있도록 여러모로 노력했다. 동맹국간의 협조체제를 무너뜨리고 나아가 전체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협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1793년 봄 이 협상정책은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승리를 했는데도 적의 무장해제를 위해 양보를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7월 10일 공안위원회의 임기가 끝나자 국민공회는 당통을 탈락시키고 새로운 위원을 뽑았다.이때부터 당통의 정치활동은 전보다 복잡하게 되었다. 정치적 안정을 위해 공안위원회에서 일하는 것은 거부하면서도 그 정책에는 여러 차례 지지를 보냈다. 이따금 그는 전처럼 국민의 권리 옹호자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대중의 요구를 널리 알렸다. 그러나 혁명운동을 안정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고, 또한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코르들리에 클럽에서 생겨난 온건세력인 '관용파'의 지도자로 등장했다.강 또는 가족 문제를 구실로 정치활동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당통은 바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지나친 반(反)그리스도교 운동을 비난하는 공안위원회를 열심히 지지했고 나중에는 헌법에 성직자들의 봉급 규정을 없애서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자는 주장에 반대했다. 정부의 안정정책에 지지를 보낸 데에는 개인적·정치적 동기가 숨어 있었다. 그는 이미 체포당했거나 체포당할 위험이 있는 친구들을 구하기로 결심했으며 한편으로는 혁명정책의 추진 속도를 늦추고자 했다. 당통파의 정책은 자크 에베르와 그의 코르들리에 클럽 동료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주도하고 있던 급진주의적 계획, 즉 극단의 테러와 계속적인 전쟁과는 모든 점에서 반대였다.당통은 1793년 12월 1일 급진주의자들에게 그들의 역할은 끝났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온건노선을 뚜렷이 했다. 이때부터 그는 사람들 눈에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온건파의 지도자로 비쳤다. 1794년초 당통과 그의 동료들은 혁명주의자로〈비외 코르들리에 Le Vieux Cordelier〉지 기자였던 카미유 데물랭을 대변인으로 내세워 훨씬 더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와 혁명정부의 모든 정책에 도전했고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그러나 혁명정부가 우파에게 밀릴 수 없다고 깨닫게 되자 상황은 갑자기 뒤바뀌었다. 극작가이자 열렬한 혁명주의자였던 파브르 데글랑틴이 인도 회사 사건에 타협한 죄로 1794년 1월 체포당했을 때 체포된 대의원은 국민 앞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당통은 그를 간접적으로 보호하고자 했다. 한 대의원이 "저 파브르 옆에 앉아서 아직도 그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고 있는 자에게 재난을 내리소서" 라고 소리쳤다. 이 말은 틀림없이 당통에 대한 위협이었다.이 사건은 관용파의 공세가 꺾인 것 이상을 의미했다. 이미 평판이 나빠진 상태에서 '에그자제레(Exageres) 또는 '앙라제'(Enrages)라 불리던 에베르의 극좌파 세력에게 곧바로 역공세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위기가 더 심각해.
    독후감/창작| 2008.12.16| 5페이지| 1,000원| 조회(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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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태원의 이슬람사원을 다녀와서
    이태원의 이슬람 사원을 다녀와서2004009075 사학과 김태현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 2동 732-21한국의 이슬람 사원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매우 궁금한 가운데 답사 과제가 주어져 10월 20일에 여러 학우들과 같이 서울 이태원에 있는 이슬람 사원을 방문했다.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여 약 2시간 3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느낀 이곳의 분위기는 마치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간 것처럼 신비스러웠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하는 놀라움 속에 조심스럽게 사원 안으로 향했다.먼저 이곳에 대한 개관을 살펴보았는데, 정확한 명칭은 서울 중앙성원으로 1969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배려에 따라 약 5,000㎡의 성원 건립용 부지를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에 주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여러 이슬람 국가가 성원 및 이슬람 센터를 전액 지원하여 마침내 1974년 10월에 착공을 시작하여 1976년 5월 21일 개원한 한국 최초의 이슬람 성원이었다. 한강과 남산의 중간에 자리한 이곳은 1층에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사무실이 있어 우리 같은 관광객들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며, 2층과 3층에는 각각 남자, 여자 예배실이 있었다. 다행히 우리가 방문했을 때 시간이 맞아 예배의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관계자가 성심껏 예배에 대해 설명을 해주어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일단, 예배는 하루 다섯 번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고, 해의 움직임에 따라 정해진 하루 다섯 차례의 시간에 맞추어 진행된다. 그 다섯 차례를 각각 새벽(파즈르), 정오(주흐르), 오후(아스르), 일몰(마그립), 밤(이샤) 예배로 표현하는데, 새벽 예배는 동이 막 터올 무렵 검은 실과 흰 실이 구분되기 시작할 때 드리고 정오 예배는 하루 중 해가 한 가운데 있을 때이고, 오후 예배는 해가 기울기 시작하여 햇빛이 노래지기 시작할 때에 드리면서 일몰 예배는 해가 막 떨어진 직후에 드리고 밤 예배는 완전히 어두워져서 흰 실과 검은 실이 구분되지 않을 때 드리는 것이다.다른 특징은 예배 전에는 반드시 몸을 청결히 닦은 후 예배 드리는 것을 우두 라 하는데, 우두는 손 -> 팔 -> 입 속 -> 얼굴 -> 머리 -> 목 -> 발의 순서로 닦으며 모든 부위를 세 번씩 닦는데 우두를 행하지 않으면 예배를 볼 수 없고 만약 우두 없이 예배를 드리면 그 예배는 무효가 되는 것이다.이러한 준비 과정이 끝나면 예배가 진행 되는데 먼저 선 상태에서 팔장을 끼고 꾸란(코란)의 제 1장을 외우고 다시 짧은 구절을 외운 후에 두 손을 무릎에 대고 허리를 90도 숙인 상태의 반절을 하고 다시 몸을 폈다가 완전히 큰 절을 하는데 이 때 이마와 코끝이 바닥에 닿아야 한다고 하면서 큰 절을 한 번 한 후 허리를 펴 무릎 굽혀 않은 자세를 했다가 다시 한 번 더 큰 절을 하는 것이 바로 예배의 기본 단위가 되는 한 개의 라카아트 라 한다.예배마다 기본적으로 하는 라카아트 수가 정해져 있는데 하루 다섯 번 의무 예배는 새벽부터 2(새벽) - 4(정오) - 4(오후) - 3(일몰) - 4(밤) 의 라카아트 수를 반복하도록 정해져 있다.또한 예배는 혼자서 드려도 되고 이곳과 같이 둘 이상이 같은 장소에 있을 경우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더러운 장소를 제외한 길, 상점, 산, 들, 학교 등등 어느 곳에서든지 예배가 가능하다.그 다음으로 다수가 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릴 때 그 중 한 사람이 앞에서 예배를 인도하는데 이것은 행동을 통일하여 형제애를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예배의 인도자를 이슬람에서는 이맘 이라 부르는데 보통 무리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거나 학식이 유난히 뛰어난 사람이 맡는데 현재 이곳에는 술레이만 이행래 형제가 원로 이맘으로 봉직하고 있으면서 태국인 선교사 압둘라시드와 터키인 선교사 파룩준불 형제가 상주하고 있다. 이맘이 지니는 의미가 단순히 예배를 인도하기 위한 것이지 목사나 신부, 승려 같은 성직을 업으로 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이 예배를 드리는 사람 중 한 사람을 임의로 선정하는 관계로 누구나 이맘을 할 수 있고 장소와 시간 마다 바뀔 수 있는 것 또한 특징이다. 또한 여럿이 드리는 예배에서 이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발끝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좌우로 길게 늘어서는 의미는 모든 신자(무슬림)들이 신 앞에서 평등함을 나타내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예배를 드리는 방향에 대해 이슬람에서는 끼블라 라고 하며, 세계 어느 곳에서든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라는 도시에 있는 까아바 라는 옛 신전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는데, 한국에서는 서서남 약 260도 정도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모두 한 방향을 향해 예배를 드리는 것은 모든 무슬림들이 하나의 형제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라 한다.우리가 몰랐던 이슬람의 예배 방법을 자세히 알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예배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중앙성원 옆에 있는 부속 건물로 이동했는데 이곳은 이슬람 센터로 무슬림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마드라사와 이슬람 문화 연구소 및 학생회 등 각종 산하단체의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었다.두 개의 건물 내부를 보고 밖으로 나와 사진 촬영을 하였는데, 책에서만 보던 사원을 가까이서 보니 이슬람 세계의 건축 양식도 우리의 전통 한옥과 견줄 정도로 훌륭하다고 느껴졌다. 비록 거대한 사원이 아니라서 웅장함은 느끼지 못했지만, 비잔틴과 페르시아 양식의 영향을 받은 둥근 지붕(돔)과 뾰족한 첨탑의 양식 그리고 꽃, 숫자, 문자를 조합한 아라베스크 무늬 등을 볼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되었다. 약 1시간 30분 정도 답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이슬람과 관련된 서적을 파는 서점에 들러 성경과 책 등을 둘러보고, 근처에 있는 이슬람 식당에 들어가 케밥 요리를 맛있게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이슬람 사원 답사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인문/어학| 2008.12.16| 3페이지| 1,500원| 조회(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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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대왕정기의 각국의 발전(서유럽, 동유럽), 영국의 명예혁명
    1. 절대왕정기의 각국의 발전(1) : 서유럽합스부르크와 발루아16세기 전반기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실은 초국가적인 제국건설을 꿈꾸고, 프랑스의 발루아 왕실은 이를 저지하려고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의 구제실이며 유럽 제일의 명문가였다. 10세기 알자스에서 북 스위스에 걸친 소영주에서 비롯되었고, 11세기 스위스에 산성 합스부르크(매의 성)를 쌓은 후로 합스부르크백이라 불렀다.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이후 실력 있는 국왕의 출현을 꺼린 독일 제후가 1273년 이 집안의 루돌프 1세를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이렇게 선출된 왕은 정략결혼으로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 마르크주를 획득함으로써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그의 아들이며 초대 오스트리아 공인 알브레히트 1세도 독일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1308년 암살된 후로 15세기까지 독일 왕위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그 동안 가령 확대정책을 착착 진행시켜 케른텐· 클라인 등을 가령에 병합시키면서 이 집안은 남동 독일의 대 세력이 되었다. 1438년 알브레히트 2세의 국왕 즉위 이후로는 독일의 왕위와 제위를 계속 차지하였다. 15세기 말의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가 중흥의 시조로, 에스파냐 왕실과의 통혼으로 가령확대를 꾀하였고, 그의 손자로 황제와 에스파냐 왕을 겸했던 카알 5세에 이르러 지배영역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남부독일의 여러 지역,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보헤미아와 헝가리, 프랑슈 콩테,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및 기타 지중해연안의 에스파냐 령에 이르는 최대 규모였다. 하지만, 카알 5세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성립의 경위로 보거나 지리적 분포로 보아 결코 견고한 통일제국은 아니었다. 여러 국가와 지역의 집합체에 불과한 합스부르크 제국은 주변 국가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비교적 넓은 영토를 가진 통일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프랑스와 대립을 하였는데, 그 양상은 유럽경제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 쟁탈전의 양상이었다. 카알 5세는 자신의 제국이 통일적인 성질이 아니했고, 영국에게 무적함대가 패하는 일까지 발생하게 되어 결국 에스파냐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네덜란드의 독립네덜란드는 중세를 통하여 북해 및 발트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상업이 융성하고, 13세기 경에는 모직물 공업이 발달해 도시가 성장하면서 시민계급도 점점 커져 갔다. 이러한 네덜란드도 펠리페 2세의 통제 아래 있었는데, 그의 일률적인 가톨릭 강요 정책은 큰 반발을 불러왔다. 하지만, 오히려 탄압을 가하자 네덜란드는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한 일부 귀족과 민중이 합세하여, 오렌지공 윌리엄의 지도 하에 국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 결과 신교도를 중심으로 한 북부 7주가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여 계속적인 투쟁을 벌여 1581년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후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에서 정식으로 독립이 인정되었다. 네덜란드의 독립은 대상인을 중심으로 한 시민계급의 승리였고, 또한 독립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받게 된 것도 그들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네덜란드와 암스테르담은 날로 융성하는 세계적인 국제무역의 중심지로서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사상적인 부문에서도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네덜란드도 영국에 의한 모직물공업의 쇠퇴로 17세기에 번영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프랑스의 절대왕정합스부르크와의 대립이 끝난 프랑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위그노 전쟁이라 일컫는 종교 전쟁에 휩싸인다. 프랑스 칼뱅 계통의 신교도인 위그노들과 구교도와의 대립이 주축이었으나, 귀족간의 세력다툼, 귀족과 왕권과의 대립 그리고 왕위계승문제 등이 엉키면서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결국 그들의 대립은 앙리 3세의 죽음까지 이어졌고, 그 뒤를 이어 앙리 4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하지만, 앙리 4세는 위그노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파리의 완강한 저항에 봉착하여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1598년에는 낭트 칙령을 통해 위그노들의 권리를 어느 정도 허용하면서 종교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앙리 4세는 절대왕정을 다시 안정시켰으며, 그 뒤를 루이 13세가 성립의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의 귀족은 고급관리와 군 장교로서 왕권에 봉사하는 봉사귀족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귀족들의 대가로 동유럽의 절대왕정은 영지에서의 농노 지배를 인정하였다. 이렇듯 동유럽과 서유럽의 절대왕정은 차이가 있었고, 동유럽에서는 도시와 부르주아지의 미발달 및 왕권과 귀족의 유착으로 인해 밑으로부터의 개혁이나 혁명의 가능성은 희박하였고 위로부터의 개혁만이 가능한 상황이었다.30년 전쟁독일에서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의 화의(和議) 후 곧 신· 구 양교의 대립이 다시 일어나, 17세기에 접어들자 일촉즉발의 상황에 있었는데 전란은 먼저 보헤미아에서 발발하였다.보헤미아에서는 1609년 귀족들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로부터 신앙의 자유 승인을 얻었지만, 17년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왕위에 오르자 신교파를 압박하였으므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전쟁의 경과는 황제파의 대전국에 따라 다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1. 보헤미아 - 팔츠 전쟁(1618~1623)내란의 와중인 1619년에 페르디난트가 황제로 즉위하자, 보헤미아 의회는 페르디난트의 왕위를 취소하고 신교파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뽑았다. 이 때문에 전쟁은 독일 전체에 파급될 형세가 되었지만 프리드리히가 칼뱅파였기 때문에 약간의 신교파 제후의 협력밖에 얻지 못하였다. 다른 한편의 황제는 구교파 제후의 지도자 바이에른 공 막시밀리안의 협력과 에스파냐의 원조를 얻어, 반격으로 나가 1620년에는 프리드리히군을 프라하 서쪽의 바이서베르크에서 격파하였다. 계속해서 황제는 반란에 가담한 신교파 제후군을 각지에서 제압하였고 에스파냐군도 팔츠령에 침입하였다.2. 덴마크 전쟁(1625~29)덴마크왕 크리스티안 4세는 이 기회를 틈타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원조를 확보하고 1625년 북독일에 침입하였다. 곤경에 빠진 황제는 발렌슈타인을 황제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발렌슈타인은 바이에른 사령관 틸리와 협력하여 크레스댠을 격파하고 29년 뤼베크화약을 체결하였다. 크리스티안 4세의 패배와 16주목을 끌고, 또한 중요했던 것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흥기였다. 프로이센은 원래 13세기경에 독일 기사단이 개척한 곳으로, 1400년대에 들어서 호엔촐레른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지스문트에 협력한 공으로 선제후로 승격되고 브란덴부르크를 차지하여 17세기 초까지 브란덴부프크 선제후가 이를 상속하고 라인 강변에 영토를 얻으면서 급속히 성장 하였다. 30년 전쟁에 가담하여 포메라니아, 마그데부르크, 민덴 등을 획득하여 그 영토가 동으로는 니멘강과 서로는 라인강에 이르렀다.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네덜란드 농민, 프랑스 위그노를 받아들여 농업과 상공업을 발전시키는 등 국내 산업 개발에 주력하는 한편, 해상 활동과 통상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아프리카 무역 회사를 설립하고 북방전쟁에 참가하여 동 프로이센에 대한 폴란드의 종주권을 배제하였다. 대선제후의 아들 프리드리히 1세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Ⅰ세를 지원하여 프로이센 왕의 칭호를 얻었다.18세기 초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 관료제와 상비군을 바탕으로 절대 왕정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의 통치 방식은 가부장적 전제 정치와 군국주의에 입각한 것이었으며 경제력의 증진, 군사력의 증강, 왕권신수설의 신봉 등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었다. 그의 치세에서 프로이센은 유럽에서 가장 군국주의적이며 고도의 능률적인 관료 국가가 되었다.또한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2세는 산업과 문화 발전, 계몽 전제 군주를 자처하여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사법 제도를 개편하였으며 상비군을 20만으로 증강시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문제(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인도와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영국과 프랑스의 패권다툼으로 전개됨)와 7년 전쟁(오스트리아의 슐레지엔 탈환과 프로이센의 세력을 꺾으려는 프랑스 및 러시아의 동조,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쟁탈전 이라는 이중의 내용을 지닌 전투) 을 통해 오스트리아로부터 슐레지엔을 탈취하였으며, 오스트리아 ?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 분할노프 왕조를 거치면서 지속되었다.아시아와 유럽의 경계 국가라는 인식을 갖고 있던 러시아를 유럽의 국가로 발전시킨 인물은 표트르 대제였다. 그는 계몽 전제정치를 실시했으며, 러시아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성장시켰다. 내부적으로는 서유럽을 본받아 근대화를 추구하였으며, 행정 기구와 군사제도 역시 서구적으로 점차 개혁해 나갔다. 또 러시아의 근대화와 더불어 직접 유럽과 접촉할 수 있는 발트 해의 진출을 위해 스웨덴과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발트 해를 장악하였고, 과정 속에서 새로운 수도인 상크트 페테르부르크가 건설되었다. 그는 시베리아 쪽으로 진출해 캄차가 반도를 획득하였고, 동쪽으로는 청과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국경선을 확정짓기도 하였다. 그 뒤를 이은 예카테리나 2세는 여성으로서 법전을 편찬하고 농노제를 더욱 강화시키는 등의 정책을 통해 동유럽의 강대국으로서의 러시아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그녀는 알래스카까지 진출하였고, 오스만 투르크를 격파하여 흑해 연안까지 영토를 넓혔다.농노제는 16세기 이래 러시아 사회의 기반이었으며,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확대되었다. 농노는 매매와 도박, 선물과 저당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들의 가족 생활도 해체되면서 동시에 잔인한 학대와 혹사의 대상이 되었다. 귀족과 농민과는 동일한 국민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엄청난 간격은 러시아사회의 가장 큰 모순이었다.폴란드의 분할폴란드는 슬라브 계통의 민족이었으나 다른 슬라브족과는 달리 로마 가톨릭 교회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문화와 정치적인 면에서 유럽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4~16세기에는 비록 느슨한 연합체의 성격을 띠었지만, 꾸준한 영토의 확장과 외세를 물리칠 정도의 국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걸쳐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등장하면서 그들의 국력은 쇠퇴하게 되었다.폴란드의 지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폴란드가 지닌 정치 제도의 한계가 그들의 통합을 이루지 못했으며, 이것은 결국 강대국에 의한 강제 분할로 이어져 1795년 폴란드는 멸망하였다. 그.
    인문/어학| 2008.12.16| 6페이지| 1,500원| 조회(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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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중 사상 관계 - 정통론 관계에 대한 나의 입장
    한 ? 중 사상 관계 - 정통론 관계에 대한 나의 입장2004009075 사학과 김태현정통론(正統論)은 이전 국가의 멸망과 새로운 국가의 창건을 통한 왕조나 정권의 교체가 있거나 한 국가 내의 혈연적 ? 세력적 분열이 있는 경우, 기존의 국가가 가졌던 정당성을 어느 국가가 계승 또는 담보하고 있는지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철학적 담론의 총체를 의미하며, 다른 말은 정윤론(正閏論)이라고도 한다. 실제 정통론의 용례는 왕조의 교체뿐만 아니라 학설이나 사상, 사적 혈연관계의 계승 문제에서도 쓰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왕조의 교체나 분열에 따른 왕조의 정통과 비정통 논의가 더욱 많아 정통론은 보통 왕조의 정당성 문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정통론의 기원은 우리 책에서 배운 공자의 정명사상과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추연의 음양오행사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춘추》에서 공자는 대일통(大日統) 이라는 말로써, 한 시대에 두 개 이상의 왕조가 같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직 천하에는 하나의 정통만이 있다고 보아 수평적 정통관의 기원이 되었다. 한편 음양오행사상은 전후의 왕조 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수직적 정통론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또한 소동파의 저서 《후정통론(後正統論)》에서는, 正이란 천하의 부정을 바로잡는 것이며, 統이란 분열되어 있는 천하를 통일하는 것 이라고 하여 어지럽고 분열되어 있는 천하를 다시 하나로 합쳐 천하를 평화로이 하는 것에 정통을 부여하기도 했다.어쨌든 중국의 유가는 이미 대일통 을 최고의 정치이상으로 삼아 어떤 일인 통치와 일국 통치를 인정하였으나 사실은 다 그런 건 아니었고, 어떤 일정 시기에는 자주 여러 사람의 통치가 있었고, 열국이 분립하여 이로 인하여 정(正) 과 부정(不正)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결국 무엇이 정 이고 무엇이 부정 인가에 대해 몇 가지의 원칙을 정의할 수 있다. 그 원칙은 바로 할거(割據), 찬탈(簒奪), 이적(夷狄)의 나라는 곧 부정(不正)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의 정통론 논의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중국에서의 정통론에 대한 논의는 삼국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제가 어지러운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고 그 천하를 한고조의 한나라가 이어받았으나, 후한 말기에 접어들어 한나라는 위, 촉, 오로 솥발처럼 셋으로 분열되었다. 이 가운데 위나라는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세워진 왕조로 중원 지방을 포함한 중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위나라의 영역은 후한 13주 가운데 9주에까지 뻗쳐 토지, 인구, 병력 등 종합적 국력에서 촉한이나 동오를 압도하였다. 한편, 익주에 자리 잡은 촉한은 전한 경제의 후손으로 알려진 유비가 혈통상의 정통성을 앞세워 한나라의 재건을 명분으로 인재와 민중을 모았다. 촉한은 흥한(興漢)을 기치로 내걸고 정식 국호는 한(漢)으로 삼았으며, 헌제에게 시호를 올리는 등 한나라와의 연속성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삼국 시대 이전의 중국 역사에서는 전무했던 새로운 역사적 전개(천하에 여러 개의 태양이 있었던 시대)는 과연 위나라와 촉나라 가운데 누가 한나라로부터 정통을 이어받았느냐는 삼국정통론의 논쟁을 낳게 되었다.한 왕조(위나라)는 선양이라는 적법한 형식을 거쳐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천하를 넘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나라의 정통을 이어받은 절차를 밟았으며 인적 ? 물적 자원의 차원에서도 인구와 국토와 병력의 대부분을 이어받는 등 정통의 승계가 자신에게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에 대해 촉나라는 한나라의 위나라에 대한 선양은 사실상 강제에 의한 것으로 적법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인적 ? 물적 자원의 이전이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정통과 비정통의 문제는 명분과 당위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이기 때문에 한나라의 제위를 찬탈하여 황제에 오른 것은 참위(僭位)에 불과하고 한나라를 명분적 ? 정신적으로 계승한 것은 자신의 왕조라고 말한다. 이렇듯, 삼국정통론의 논쟁에는 명분과 실리, 당위와 존재, 이상과 현실, 정의와 실력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후대의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첨예하게 견해가 나뉘었다.먼저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아 그의 사서를 전개해갔다. 위나라의 황제들에게만 제(帝)를 붙였으며 다른 국가의 황제들에게는 주(主)를 붙이거나 이름을 그대로 썼다. 제왕에게만 붙이는 기(紀)도 위나라의 군주에게만 썼으며 다른 국가의 군주들에게는 일반 인물들에게 사용하는 전(傳)을 썼다. 그리고 연호도 한나라와 위나라의 연호를 그대로 썼다.이에 대해 동진의 습착지가 《한진춘추》에서 위정통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촉한정통론을 펼쳤다. 그가 조위정통론을 부정하고 촉한정통론을 주창한 것은 당대의 실력가인 환온이 동진의 제위를 넘보려 하자 한 광무제부터 서진 민제까지의 역사를 담은 《한진춘추》를 통해 촉한을 정통으로 삼고 위나라가 비록 한나라로부터 선양받았으나 이것을 찬탈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환온의 반역을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북송 시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위정통론이 힘을 얻게 된다. 구양수는 위나라가 정통을 이어받은 왕조라고 주장했고 소동파도 이에 동조하였다. 하지만 《자치통감》을 저술한 북송의 사마광은 구주를 통일할 수 있는 것을 정 으로 삼고, 할거함은 곧 부정으로 삼아야 한 다고 했으며, 정통론의 논쟁에서 그는 《자치통감》에서 여러 왕조가 있던 시기에도 기년의 연호로 시간을 나타내야 했기에 위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는 말하길 학식이 천박하여 정윤(정통과 비정통)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 -사마온공집 - 고 하였다. 그리고 자치통감에서 적기를이 모든 것(후대의 정통론)은 자신의 한쪽으로 치우친 논의이며 공정한 통론이 아니다. (중략) 어찌하여 일국만을 존중하여 정통으로 삼고, 그 나머지를 참위라 할 수 있겠는가. (중략) 위ㆍ송ㆍ제ㆍ양ㆍ진ㆍ후량ㆍ후당ㆍ후진ㆍ후한ㆍ후주의 연호로써 각각 나라들의 사 실을 기록한 것이지, 귀함과 비천함을 구별하여 정윤(정통과 비정통)을 따로 구분한 것은 아니다. -《자치통감》-또한 그는 촉한정통론에 대해서도 일평을 했는데,소열제의 한이 비록 중산정왕(한경제의 아들)의 후예라고 하지만 그 친족관계가 멀어서 그 세대의 수와 이름, 관직 등을 기록할 수 없으며, 유송의 고조가 초원왕의 후예라고 칭 하는 것, 남당 열조가 오왕 각의 후예라고 칭하는 것과 같이 그 옳고 그름을 구별하기 어 려우므로 감히 광무제(전한 멸망 후 흥한의 기치를 내걸고 다시 천하를 회복한 후한의 창 업자)나 진의 원제(서진 멸망 후 동진을 강남에 세워 진왕조의 명맥을 이은 동진의 창업 자)와 비교하여서 한나라의 유통을 잇게 할 수 없다. - 《자치통감》 -하지만, 이와 반대로 남송시대에는 촉한정통론이 압도를 하게 되었다. 남송의 주희(주자)는 사마광의《자치통감》의 저술방식을 비판하면서, 정통론에 주안점을 두고 도덕사관에 입각한《자치통감 통감강목》을 저술하는데 여기서 그는 촉한정통론을 주장했다. 성리학을 주창한 주희는 기존의 정통론을 철학적 담론으로까지 이끌어내었으며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 사조는 촉한정통론을 보다 강화시켰다. 그리고 그는 한의 여후, 신의 왕망, 당의 무후 등을 찬적(纂賊) 이라 하여 부정으로 삼았다.또한 이적에 대한 중국 역사가들의 입장은 부정 이라 하여 왕을 받들어 제후를 낮추고 이적을 천시함으로써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화이간의 내외를 엄히 분별하였다. 이것이 바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정신이었다.중국의 정통론을 통해 한국의 정통론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면, 한국 역사의 정통에 대한 논의는 조선시대 무렵에 중요하게 대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리학(性理學)적 명분론(名分論)에 입각하여 한국 역사의 정통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으며 많은 학자들이 이에 참여하였다.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합의된 정통 왕조는 다음과 같았다.기자조선(箕子朝鮮) -- 통일신라(統一新羅) - 고려(高麗) - 조선(朝鮮)이러한 정통 논쟁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대두되었던 것은 여러 국가가 병존하였던 삼국시대 및 후삼국시대, 혈통에 의심을 받았던 고려 우왕(禑王) 및 창왕(昌王), 역사로 인정하기에 사료가 부족하고 신화적 요소가 강했던 단군조선(檀君朝鮮), 삼한(三韓) 등이었다. 특히 삼국시대의 정통 왕조를 놓고 많은 주장이 나타났으며, 조선시대에는 신라정통론과 삼국무통론이 주요하게 논의되었고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최근에 이르기까지는 신라 정통론과 고구려 정통론이 주로 대립하고 있는 상태이다.이익(李瀷)은 단군(檀君)이 나라의 시조이며 기자조선이 이를 계승했고 이것이 다시 마한(馬韓)으로 이어졌으므로 마한이 우리나라의 정통이라고 파악했다.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의 사상을 이어받아《동사강목(東史綱目)》,《열조통기》등을 통해 전통적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한국의 독자적 정통론으로서 삼한정통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일반적으로 조선 중후기의 역사서는 삼한 가운데 마한을 정통으로 삼아 역사를 서술하였다. 마한의 초대 왕으로 일컬어지는 준왕(準王)에서 시작하여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이 마한을 정복하는 7년까지의 역사를 마한의 기년으로 보았으며 마한 9대 왕의 연표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인문/어학| 2008.12.16| 4페이지| 1,000원| 조회(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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