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통하여 성욕을 지속적이고도 합법적으로 충족시키며,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여 종족보존을 한다. 또한 결혼을 통하여 정서적으로 안정을 취하며,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게 된다.그럼에도 요즘 ‘비혼’이 늘고 있다. 학습자가 생각하는 결혼의 장단점은 무엇인지 또한, 비혼이 성인기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토론해보자1.결혼의 장점과 단점.a)장점ㄱ)인간의 성욕구를 합법적으로 해소기본적으로 우리나라는 인권을 중시한다. 그렇기에 매춘 등은 우리나라에서 불법 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에 맞춰봐도 매매춘은 정당 화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물론 연인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법적 구속력에서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한마디로 연인과의 관계 는 어떠한 법적으로 구속된 관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연인은 가족법이라든 지 기타 민법에 의한 법적효력이나 권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연인관계가 틀어지거나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긴다면 강간, 데이트폭력, 기타 등등의 우리나라 형법에 저촉될 행위를 할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물론 부부간의 강간도 폭넓게 인정되지만 그래도 연인관계보다는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된다.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평균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결국 결혼이란 제도를 통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성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일종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결혼이라고 할 수 있다.ㄴ)종족번식의 욕구를 해소인간을 우리가 뭐라고 일컫냐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결국엔 이성을 가졌지만 생물이자, 동물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후계자를 키워낸다. 동물의 생명력은 무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동물들은 자신의 2세를 낳아서 자신의 유전자를 계속 이어나가고자 한다. 유한한 삶을 사는 동물들에겐 자신의 유전자를 잇게 만드는 데에 있어서 그것만큼 최선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물의 왕국이나 그런 프로그램을 보면 하나의 무리의 수컷이 다수의 암컷과 교배를 한다. 결국 무리의 상대적 약자인 수컷은 그만큼 종족번식을 할 기회가 낮아진다. 그렇게 되면 약한 수컷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이 상황을 그대로 인간의 사회에 대입시켜 본다면 아마도 끔찍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결혼이란 제도로 묶지 않는다면 아마도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결혼이란 제도는 우리를 동물과 다른 경계로 만드는 일종의 차이점을 나타내는 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결혼을 통하지 않고 2세를 낳는다면 아마 무수한 사생아들이 양산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태어난 그 사생아들은 무슨 잘못일까. 이것은 인륜에 맞지 않는 것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그 아이의 인생은 시작부터 망가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부모란 울타리가 없이 자라나는 아이들은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것으로 우리 사회체제를 안정화 시키는데 일조하는 제도라고 생각한다.ㄷ)결혼을 통하여 사회적 성인으로 인정을 받는다.과거의 시대에서부터 쭉 이어져 온 통념은 성인과 미성년자를 구분하는 경계는 바로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 가정을 부양하는 구성원이 되느냐와 아니면 부양받거나 홀로 살아가는 책임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를 부양한다는 것은 굉장한 책임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필자 본인도 우리 부모님을 존경한다. 이러한 행복한 부담을 지면서 자신의 자식들과 함께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거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사회로 나온 기혼자와 미혼자의 생활패턴은 너무나도 다르고 책임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흔히 말해 가장의 무게 이런 표현들은 너무나도 숭고하고 값진 것이라 생각한다. 각각 저마다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 사회에 나와서 필사적으로 살아간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가장을 암묵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 이 점을 말이다.b)단점ㄱ)자아실현의 어려움결혼을 해서 애를 낳고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행복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그 생활이 장밋빛 인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필자의 예를 들자면 우리 부모님은 내가 성장하는 동안에 본인의 성함이 불리는 비율보다는 누구엄마 누구아빠 점차 이렇게 불린다. 분명히 우리 부모님도 각자의 이름이 있을텐데 점차 가까운 지인과 가족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게 된다. 이름이라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평가하고 내가 판단되는 일종의 그릇이 되는 것이 이름이다. 이름을 부를 때에는 그 사람의 특징, 기호, 성격, 외모 등을 모두 내포하여 말하는 것이다. 즉 이사람의 외관이 어떻다, 성격인 이러이러하다, 무엇을 좋아한다 등등을 그 사람을 호명할 때에 무엇을 좋아하는 자야, 성격이 어떤 자야, 이렇게 부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담은 것이 우리 이름이다.우리 부모님들은 자식을 기르며 이름만 빼앗긴 것이 아닌 셈이다. 작게는 자신이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같은 사소한 것들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나 꿈을 자신의 자식에게 양보한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그렇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 부모님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세대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식에겐 나의 어려움과 고난을 물려주지 말아야지란 일념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그 혜택을 크게 누린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인생을 살아오며 부모님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그 혜택을 누린 현재의 우리의 세대는 미래를 내다보지만 부모님들에게 남겨진 것은 과연 무얼까? 자식을 성인까지 키워놓고 결혼을 시켜 놓으면 자신의 짐을 덜었다는 안도감을 느낀 후에 앞으로 황혼기에는 부모님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사셔야 할까? 남겨진 것이라곤 자식밖에 없는 분들이 태반일텐데...이런 점은 경력단절과 연계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여성의 경우가 그렇다고 볼 수 있는데 여성은 결혼을 한 후 맞벌이를 하는 가정도 존재하지만 결혼 후에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가정일을 하는 분들이 많으시다. 육아휴직을 내고 어는 정도 아이가 성장한 이후 다시 일을 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기존에 있던 직장보다 페이가 낮은 직장에 들어가든지 혹은 직급을 낮추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슬프게도 대한민국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ㄴ)결혼 후의 비용문제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국가라는 것은 확실하다. 타국에 비해 월등히 좋은 치안시스템, 큰 자연재해를 겪지 않는 지정학적 위치, 빈곤과는 먼 경제대국.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결혼 후 부모의 도움없이 시작하는 가정이 몇이나 될까? 우리나라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물론 그 덕에 우리는 배고픔을 모르는 대한민국 최초의 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IMF이후 우리사회는 점차 성장동력을 상실해갔다. 또한 성장동력 외에도 우리세대는 부모님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부모님 세대는 막노동을 하여도 집을 살 수 있었고, 결혼을 할 수 있었으며, 자식에 대한 교육비, 대학등록금, 결혼자금 등을 부담이 되더라도 비용을 지불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학력과 직업이란 개념이 결혼생활을 영위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았다. 허나 80년대 생부터 이러한 분위기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 대학을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대학이외에도 많은 자격증과 어학점수를 요구한다. 그렇기에 많은 학생들이 투자한 인풋이 지나치게 많으니 그만큼의 아웃풋을 취하기 위해서 평균이상의 임금을 주는 직장에 들어가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이해도 되는 것은 월급 세후 140~150주는 직장에 취직을 하면 결국 자기 몸하나는 건사해도 한 가정을 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자기 살기도 빠듯한데 언제 집을 살 것이며, 본인의 아이가 태어난 이후 이 아이에게 드는 생활비, 교육비 등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굉장히 힘들 것으로 예상한다.우리나라의 출생률이 급감하고 비혼자들이 느는 것은 결국엔 돈이다. 주거비와 아이의 교육비만 해결된다면 아마도 결혼하고 애를 낳는 것에 부담이 없다면 이는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자발적으로 결혼을 안하는 사람보다는 결혼을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Ⅱ.비혼이 성인기의 정신건강에 끼치는 영향a)비혼을 선택하게 된 동기부모님, 혹은 결혼한 지인들을 옆에서 보면 행복해 보이지 않고 희생만 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며, 남들이 다하기에 결혼은 반드시 해야한다는 굴레에 사로잡힌 모습들을 보며 혼자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즉, 결혼이 주는 행복함보다는 자신의 감수해야할 부담이 더 크기에 결혼을 선택하지 않고 혼자사는 삶은 선택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필수생활비의 증가로 인하여 한 가정을 일구고, 이끌고 가기에는 경제적으로 꽤 팍팍한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정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그러한 무거운 짐을 들 필요성을 못 느끼기에 비혼을 선택한 동기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모습은 사회분위기에서도 반영된다. 혼술, 혼밥, 심지어는 티비버라이어티쇼에서는 혼자사는 연예인의 일상을 다룬 이야기를 소재로 한 나혼자산다가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싱글로 산다는 것은 더 이상 타인들이 신경 쓸 정도로 불편한 모습은 아니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결혼을 통해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부부가 아이를 갖고 가족이 함께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결혼이라는 과정은 인생의 굵은 쉼표이자 마침표라고 생각한다. 영화로 따지면 하나의 큰 에피소드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과 같이 말이다.
조선시대의 기틀을 마련한, 그리고 왕좌를 피로 물들인 절대군주 태종 이방원에 대해 알아보자이방원은 고려시대 원간섭기 이성계 장군의 5남으로 무관출신 중에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재였다. 이성계 본인도 무인집안이라는 콤플렉스가 있었는지 이방원이 과거급제 합격장을 받았을 때 이를 두고두고 볼 정도로 기뻐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성계의 아들인 방과나 방우 음서제 등을 이용하여서 관직에 임관하였기에 고려말 그렇게 빡센 경쟁률과 권문세족의 음서제와 같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시골이라고 불리는 함길도에서 과거급제를 한 이방원은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다.과거에 급제하여 개경에 들어온 이후 이방원은 문신으로 들어온 것이기에 풍부한 인사교류를 통하여 인맥을 넓히고 아버지의 힘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는 데에 큰 공이 있는 인물을 2명 뽑자면 나는 삼봉 정도전과, 태종 이방원을 뽑겠다. 1388년 이성계가 명의 철령이북 도발에 대하여 우왕과 최영이 명을 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4불가소를 제시하며 위화도에서 회군하게 된다. 물론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어린 자녀들과 아내를 인질로 잡고 있었다. 이성계의 아킬레스 건을 쥐고 있는 우왕과 최영 때문에 이성계는 손과 발이 묶인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방원이 기지를 발휘하여 계모와 동생들을 무사히 이천으로 피신시켰다. 결국 인질이 풀려난 것을 아는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후에 모든 사태를 정리하였고 최영을 숙청하고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옹립했다.이 사태를 보면서 이방원은 확실히 무인의 기질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갖춰야할 정치력과 사태를 파악하는 직관력과 판단력 등을 갖추었다고 판단된다. 분명히 왕의 재목이라 할 수 있겠다.또한 1392년 조선을 건국하기 얼마 전에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큰 부상을 입고 벽란도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으며, 방원과 형제들의 친모인 한씨의 3년 상중에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공양왕과 함께 이성계 세력을 몰아내려는 계략을 꾸몄다. 개경엔 이성계가 없었고 그 아들들도 모두 없던 상태... 그러던 와중 이성계 사람들이었던 조준, 남은 같은 문신들이 모두 귀향을 갔고, 이방원은 이 소식을 듣고, 3년 상을 포기하고 아버지 이성계를 개경으로 모셔와 상황을 정리한다. 결국 빠른 상황 판단으로 아버지와 가문을 지켜낸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성계의 정적들은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목은 이색, 그리고 그의 제자 정몽주 등이 건재하였다.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인 인물이다. 백성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그렇기에 이성계도 개인적 친분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쉽사리 건드릴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자칫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자신의 역성혁명에 명분이 없어지고 쿠데타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 모든 허물을 이방원 본인이 짊어지게 된다. 물론 조선 건국에 정당치 못한 행동이 들어간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이성계가 직접할 수 없는 일을 본인이 대신 행동에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일 때에 마지막으로 회유하던 하여가, 그리고 정몽주가 자신의 절개를 지키며 읊은 단심가 등은 정말 드라마틱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결국 백주대낮에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은 이성계의 미움을 사게 된다. 허나 이것으로 역성혁명의 시기가 앞당겨졌다고 할 수 있다. 정몽주고 죽고 난 뒤 3개월 후 공양왕을 퇴위시킨 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고 난 뒤에 이방원은 정안대군으로 봉해진다. 허나 이성계의 브레인 정도전이 점차 이방원을 권력에서 배제시킨다. 물론 이성계도 동의하였을 것이다. 정몽주를 살해한 사건을 통해 부자의 갈등의 골이 너무 깊어진 상태였다.이러한 상황에서 조선건국이래 최초의 혈육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1차 왕자의 난이다. 조선을 건국하고 나서 이성계의 후계자를 정하는데 첫째 둘째도 아닌 새까만 꼬마인 방석이 왕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는 정도전의 목표인 재상중심의 정치체제를 이루기 위함이라 추측된다. 어쨌든 이성계의 입장에선 합리적인 결정이었겠으나, 정녕 손에 피를 묻히고 더러운 일을 다한 방원에게는 매우 허탈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자신의 형도 아닌 이복동생이 왕위에 앉는 것을 어찌 볼 수 있었을까? 토사구팽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어쨌든 원인제공은 이성계에게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합리적으로 보이는 결정이라도 권력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느 왕조라도 장자를 내버려두고 막내를 왕위에 앉히는 것은 쿠데타를 유발하는 지름길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린 막내를 왕위에 앉힌다는 것은 결국 그 옆에 붙어있는 외척이나 종친이 권력을 잡는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과거 개국공신 세력이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그리하여 정실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이 사병혁파를 계기로 반발하여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되고, 삼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죽었고, 자신의 이복 동생인 방석마저 살해하였다. 태조는 이 사건을 통해 방원을 증오하며 왕위를 방과에게 넘겨주고 물러나게 된다.방과가 즉위 후에 또 문제가 발생하였다. 방과가 죽고 난 다음에 누가 후계자가 될 건지에 대해서 말이다. 결국 이방원의 형 방간과 박포가 왕좌의 탐을 내었다. 물론 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의 압승으로 끝났다. 평소의 이방원 성격이라면 방간을 죽여야 하겠지만 자신의 친형은 살려주게 되는 의외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아마도 이방원의 후대에 자신의 평가를 염려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친형까지 죽이게 되면 정말로 자신의 이미지는 회복불가한 상황으로 가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동복형제와의 권력 싸움에서 승리한 이방원은 세자 혹은 세제에 책봉된다. 정종도 물론 이방원의 허수아비였지만 어쨌든 자신이 권력계승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결과를 얻은 것이다. 정종은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태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사실 더 버티고 있었으면 본인의 안위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후 살아있는 동안 정종은 상왕으로서 제대로 대접받았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는 둘이서 명절날마다 같이 장난도 치고 사냥도 같이 나갔다는 기사가 실록에 실려 있을 정도이다.왕위에 즉위한 태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왕권강화였다. 정도전이 재상중심의 정치를 주도하고 왕은 그냥 명목적인 왕으로만 군림하는 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기에 아직 왕의 힘은 막강하지 않았다. 왕권이 강화되려면 일단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해야 한다. 그렇기에 태종은 사병혁파를 주장한다. 신하와 왕족들의 사병들을 없애고 그 군사를 삼군부로 편입시키는 것을 말한다. 결국 군사력은 왕의 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태종은 착실하게 이를 수행해 나갔으며 결국 왕권을 강화하는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또한 관제를 다시 정립한다. 기존에 고려의 시스템인 도평의사사(도당)를 없애고 의정부와 삼군부 그리고 6조등을 만든다. 또한 삼사를 만들어서 권력기간에 대한 견제시스템을 만들었다. 태종 본인도 간관의 기능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물론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혈안인 태종이기에 의정부는 일종의 자문기관 정도의 역할을 하고 6조에서 직접 왕에게 보고하는 6조 직계제를 실시한다. 실질적으론 6조직계제를 실시하였지만 태종은 조선의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기틀을 다진 인물임은 틀림없다. 물론 틀을 완성한 것은 성종이지만 기틀을 다지기 시작한 것은 태종이라고 볼 수 있다.
아Q정전 독후감아q 정전을 읽고이 소설의 타이틀인 아q정전은 중국식 발음을 대체할만한 방법이 없어서 아q라고 명명 지은 주인공의 얘기를 담은 내용이다. 하지만 이 주인공은 그 당시 근대화되기 전의 미개한 중국인 전체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아q-이제부터는 아큐라고 쓰겠다-는 전형적이고 평균 이하의 중국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자신감만 있고 그 자신감을 갖는 이유도 없는 한마디로 근거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틈만나면 “우리도 옛날엔....”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 부분에서 중국은 과거에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고 강대국인 모습을 향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근대화가 먼저 이루어진 서양인들에 의해 그들은 철저히 패배한다.패배를 통해 얻어야할 교훈은 명백히 있었으나 그들은 눈을 돌린다. 그 이유는 중국인들이 이 부분을 인정하면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을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과거 우리나라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던 서인 집권시기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북인을 몰아내고 집권을 한 인조와 서인들은 명나라를 사대하는 입장이었고, 청나라를 미개한 나라 오랑캐의 나라, 열등한 족속들로 치부하다가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서 굴욕을 겪고 청나라의 속국이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국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 주제파악을 못한 참담한 결과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중국인들은 중국의 문화를 세계 문화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청나라 말기, 서구 열강들은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근대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자기 것, 자기 문화에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던 중국인들은 상대방의 장점을 수용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아큐가 소설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에 대하여 존경심을 표하지 않거나, 타인을 쉽게 얕잡아 보는 모습에서 당시 이러한 정서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또 자존심만을 내세우는 중국인들에게 반성을 하라는 메시지를 던진 부분은 다음과 같다. 아큐란 인물은 소설속에서 비굴하고 야비한 인물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침묵하고 비구니 같은 약한 존재는 조롱한다. 이런 모습을 통해 서구 열강의 침략과 같은 현실 문제를 피해 하루하루를 비굴하게 견디고 있던 20세기 초의 중국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그리고 아큐는 정신승리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정신승리란 쉽게 말해 일종의 합리화라고 할 수 있다. 아큐는 현실에 맞서 대항하지 않는다. 오로지 침묵.... 합리화... 외면... 그리고 만족을 얻는다. 이 싸이클을 통해 그는 나약하고 비굴한 처세술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 모습에서도 당시 중국인들의 모습을 나타낸 자화상이라 할 수 있었다. 분명히 침략을 당했고, 제국주의국가들에게 모든 것들을 부당하게 빼앗기고 억압받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허나 당시 중국인들은 저항을 하지 않았다. 마치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고 외면하고 자신들의 고상한 중화주의 사상에 흠뻑취해 정신승리를 하였다. 그들은 행동했어야만 하는 타이밍이었다. 물론 소설의 배경은 신해혁명이라는 혁명이 있던 시기를 담고 있었다.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일부의 중국인들도 보였으나 대체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그러면 신해혁명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공화제 수립이 혁명의 핵심이었다. 혁명파는 쑨원을 총통으로 삼고 청조를 타도하려 하였다. 그러자 청조는 위안스카이에게 사태 수습을 명했고, 위안스카이는 청황제를 퇴위시킨다는 조건으로 쑨원의 총통자리를 본인이 차지하게 된다. 새로운 총통 위안스카이가 만든 청정부는 공화정을 수립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혁명파와 쑨원은 공화정을 수립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서구 열강의 지지를 얻은 위안스카이의 탄압으로 공화정 수립은 실패하였다. 물론 신해혁명의 의미 있는 혁명이었다. 2000년 간을 이어온 전제 정치를 끝낸 성과가 있는 혁명이었으나, 과거의 기득권과 서구 열강의 힘에 밀려 민주주의 실현의 기회를 빼앗긴 반쪽짜리 혁명인 것이다. 작가인 루쉰은 이 혁명이 왜 실패하였는가에 대하여 아큐정전에서 보여준다. 혁명은 대중이 참여해야 하는데 그 혁명의 주체인 대중의 의식수준이 저급하고, 미개한 모습을 보여주며 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준 것이다.
주말중 하루동안 안대를 착용한채 의식주등의 일상생활을 하고 체험에 대한 소감과 시각장애인의 학습 및 생활을 위한 개선방안지난주 14일에 과제를 하기위하여 나는 내방에 들어가 안대를 찾았다. 과제의 주제는 내가 하루동안 시각장애인들처럼 시각을 포기하고 단 하루동안 일상생활을 해보는 것이었다. 시각장애인들의 고통을 내가 직접경험하지 못했으나, 평소에 나는 우리 인체 5감중에 가장 중요한 감각이 시각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안대를 착용하자마자 답답함이 밀려왔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우리 5감중에 시각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일단 미각 후각 촉각은 타인과의 교류나 교감에서 시각에 비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타인과의 교류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마어마하다. 그들과 소통을 통해 표정이나 감정표현 등을 캐치 할 수 없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일단 시각 자체가 차단되어 있다면 우리는 외부세계와의 단절되기 쉽다. 밖에 나가는 것은 물론 집안에서도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다. 물론 어느정도 적응하면 집안에서의 문제는 해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일단 본인이 안대를 착용한 후 세발정도를 짧은 보폭으로 걷자마자 방향감각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내가 들어온 이 문이 과연 내 앞에 얼마나 가까이 혹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어서 한발은 그 자리를 유지하고 다른 한발로 조금 조금씩 걸어갔다.한마디로 거리감과 방향감각을 상실하기에 온전히 내가 앞의 물체가 있는지 없는지를 팔다리로 체크해야 했다. 방을 나온 뒤에도 이러한 행동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에는 눈이 불편하신 분들이 없어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집공간이었다. 즉 눈에 아무 이상이 없는 정상인들만 생활하는 공간이기에 너무도 불편하고 무서웠다. 특히나 집안의 계단을 내려갈 때가 더욱 그러하였다.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온 후에 내가 평소에 하던 것들을 생각해보았다. 책을 읽는다든지, 티비나 핸드폰을 한다든지, 이런 시각적 요소와 결부된 것들을 제대로 즐기기에는 힘들었다. 책은 점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보는 책이었으며, 티비는 소리로만 그 내용을 듣고 상상해야 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는 것이었다. 평소에 보던 것을 당연시하다가 이렇게 강제적으로 눈을 가리고 일상생활을 해보니 정말 즐길거리가 없었다. 단 하루의 체험에도 불편함이 밀려왔다.저녁때가 되어 배가 고팠다. 주말이지만 우리 가족들은 모두 선약이 있어서 집에 없었다. 할 수 없이 평소에 먹던 스파게티를 끓여먹어보기로 하였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문제가 되버린 순간이다. 물을 끓이는 것 까지는 쉬웠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면이 익는지 익지 않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눈대중으로 익었는지의 여부를 확인을 한다. 티비에서 나오는 쉐프들처럼 면발하나를 뽑아서 맛을 보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방법은 전자레인지로 시간을 가늠하는 것이었다.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서 나는 그때 면을 넣었고 전자레인지를 조리하기 버튼 1번당 30초이기에 총 6번을 누르고 시간을 기다렸다.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스파게티를 먹게 되었는데, 입에 묻힐까 조심조심하며 먹었던 것 같다. 분명히 나의 입이지만 입으로 가져가서 정확히 집어넣어야 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단 하루의 경험을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부모님께 a.m 0시가 지날 때 알려달라고 하였다. 다음날이 되기를 기다리며 노래를 들었다. 정말로 할게 없었다.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청각과 관련된 노래를 듣는 것 뿐이었다. 그렇다고 답답하기 때문에 눈을 가리고 집밖으로 나가는 것은 더욱 부담스러웠기에 그럴 수 없었다.결국 다음날 0시가 되자마자 나는 안대를 벗고 방안에서 나왔다. 빛이 보였고, 약간의 눈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기분좋은 눈부심이었다. 내가 보는 시선하나하나마다 즐겁고 맛이 있었다. 비록 나의 하루동안의 짧은 체험을 통해 시각장애인들의 불편함을 말하는 것은 경솔해보이지만 내가 느끼고 경험한 이 감정을 토대로 시각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일단 위에서 언급했지만 시각을 잃고나면 거리감과 공간적 지각력이 매우 떨어진다. 그렇기에 만약 시각장애인들께서 집이 아닌 밖에서 생활하실 경우에는 아마 내 생각에는 광장같은 곳이 굉장히 두려우실 것 같다. 광장의 바닥은 천편일률적으로 평평하고 까끌까끌한 대리석이다. 그리고 굉장이 넓다. 방향이 어딘지를 가늠하실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천편일률적인 바닥보다는 흔히 말하는 점자처럼 그분들이 알아보실 수 있는 특색있는 표식을 만들어서 그분들에게 알려드리고 보편화 시키는 방법이 좋을 것 같다. 물론 여기다가 청각적인 도움을 꼭 수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호등에 붙어있는 안내메시지 벨과 같이 말이다. 특정 바닥을 특수한 막대기로 짚으면 소리가 나온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런 방식은 창동역 2번 출구의 계단과 같은 방식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다.즉, 요약을 하자면 정부나 지자체에서 시각장애인들을 위하여 특수지팡이를 제공해드리고 바닥재질을 지팡이를 짚으면 인식할 수 있는 바닥재질로 바꾸는 것이다. 일종의 스마트펜처럼 말이다. 물론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선택적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가 중요하며, 사회적 약자를 우선시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자 사회의 역할이라고 본다. 또한 단계적으로 조금씩 해결해 나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매년 멀쩡한 보도블록을 갈아엎는 쓸데없는 전시행정을 줄인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또하나 내 경험에 빗대어 불편한 점을 통해 느낀 점은 시각장애인분들이 문화생활이나 교육문제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감상하는 것과 읽는 것의 본질은 눈으로 사물이나 활자를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이 시각장애인 분들이 느끼시는 큰 에로사항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분들을 위해 이 문제를 조금이나마 가치가 있고 효율적으로 보완해줄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는데, 역시나 청각을 활용하는 방안이 가장먼저 떠올랐다. (물론 점자책은 기존에 있던 방식이니 논외로 한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개헌 그리고 10차 개헌은목차0. 서설1. 개헌의 역사Ⅰ.1948년 제헌국회Ⅱ.1차개헌Ⅲ.2차개헌Ⅳ.4.19혁명과 3차개헌Ⅴ. 제2공화국과 4차개헌Ⅵ. 5차개헌Ⅶ. 6차개헌Ⅷ. 7차개헌Ⅸ. 8차개헌ⅨⅠ. 9차개헌2. 박근혜의 국정농단과 10차개헌의 방향0. 서설1948년 7.17일에 헌법을 제정한 이후로 우리는 9차례 헌법을 개정한다. 하지만 국민의 바람과는 달리 개헌은 위정자들의 입맛대로 헌법을 국민을 통제하는 데 사용하였다. 즉 국민개헌이라기 보다는 독재를 위한 도구로 헌법을 바꿔온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모든 개헌이 그런 방향으로 진행 된 것은 아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에서 하기로 하고, 개헌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대는 변하고 시대의 흐름에 맞게 헌법을 고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인권의식과 같은 부분은 과거 70년대 80대와 비교했을 때 굉장히 많이 신장되었다. 그런데 과거의 헌법을 지금 시대에 반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하여 국민에게 그 혜택을 돌려주는 것이 개헌의 핵심이다. 권력부분의 개헌도 큰 맥락에서보면 국민을 위한 개헌이라고 볼 수 있다. 병신년과 정유년에 있었던 박근혜의 국정농단을 통해서 많은 국민들이 정치적 각성을 하였다. 8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아이러니한 세대이다. 배고픔을 모르고 가난을 모르고 자란 세대. 아마도 대한민국 아니 과거 이조시대 고려시대를 통틀어 가장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축복받은 세대이다. 이들은 부모님의 말씀을 일종의 사상처럼 받고 자랐을 것이다.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기회의 땅이다. 너가 노력한 만큼 너에게 다 돌아간다. 너만 열심히 하면 너는 취직을 할 수 있고, 집을 살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 또 너희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정치나 사회는 신경쓰지 말고 너의 나이에 맞는 곳에서 니가 있는 곳에서만 최선을 다해라. 그럼 모든게 만사형통이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불문율은 2000년대 후반으로 너머가면서 깨지기 시작하였다. 2000년 중반까지만 해도 웰빙이 화두였지만 지금 시대 청년들에게는 웰빙보단 헬조선이란 말을 입에 담고 산다. 하지만 이 청년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들은 이들이 나약하다고만 치부한다. 또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한다. 과연 청년들이 노력이 부족할까? 그들의 개인의 문제일까? 물론 게으른 청년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 청년들은 게으르지 않다. 청년들은 일확천금을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그들은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평범하게 살아가는게 정말 특별하다. 청년들이 눈이 높은 것이 아니다. 눈을 낮추고 낮춘 것이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것이다. 만약 공무원의 눈높이 아래로 낮춰서 공장이나 월급 150밑을 주고 퇴근없는 삶을 사는 중소기업에 들어간다면 과연 그게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그들에게 과연 미래를 생각할 기회가 생길까? 결국 한마디로 현재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박근혜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이다. 청년들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정치를 멀리하면 결국 그 피해는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싫더라도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아마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일 것이다.우선 10차개헌을 논의하기 전에 개헌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자.1. 개헌의 역사Ⅰ. 1948년 제헌국회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이 단독총선거를 실시하고 나서 그해 7월 17일에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최초의 헌법이다. 제헌국회의 특징은 200명의 국회의원중 제주도지역을 제외한 198명이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후 국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지금처럼 직접선거가 아니라 의회에서 대통령을 뽑는 모습이었다. 제헌국회의 국회의원의 구성원은 무소속이 85석, 이승만을 지지하는 독촉 55석, 한민당 29석 그 외에 29석이었다. 1대 국회는 독립운동가도 많았지만 친일행위를 한 자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대표적으로 한민당의 송진우 김성수 등을 꼽는다. 친일행적을 한 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는 근거는 이승만 정부의 친일행위자를 처벌하는데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국회가 제정되고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1948년 9월에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는 반민특위를 구성했으니 처벌하는데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는 반민특위의 대표자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처벌하였다. 물론 농지개혁법이라든지 친일파 귀속재산 환수법, 국가보안법 등을 시행하여 우리나라의 공산화를 막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으나, 썩은 곳을 도려내지 못한 것은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Ⅱ. 1차개헌1차 개헌은 한국전쟁 중에 실시되었다. 1952년의 개헌은 부산정치파동 흔히 발췌개헌이라고 한다. 발췌개헌의 특징은 대통령제를 직선제로 변경하고 양원제 규정을 만들었다. 물론 참의원 민의원 같은 양원제를 시행하지는 않았다. 개헌을 시행한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이 연임을 하기 위해 직선제로 바꾼 것이다. 그 당시는 전쟁 중이었기에 국민들의 불안감을 이용한 것이라 본다. 국민들이 만약 전쟁통에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면 기존에 있던 대통령을 뽑는 것이 일반 상식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직선제 규정으로 대통령제를 바꿨다고 생각한다. 역시 예상대로 2대 대선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많은 업적을 가려버리는 실수를 하게 된다. 결국 권력의 맛에 취해 점점 독재의 길로 접어 들게 된다.Ⅲ. 2차개헌1954년 우리 헌정사상 웃지 못할 헤프닝이 발생한다. 이름하여 사사오입개헌이라고 하는데 개헌통과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여 반올림해서 개헌을 통과시켜버린다. 정말 우리 역사상 가장 부끄럽고 민망한 개헌이라고 생각된다. 2차 개헌의 포인트는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를 철폐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항은 3살짜리 꼬맹이가 봐도 오래오래 대통령 해먹고 싶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개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초대대통령이 누구냐.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물론 국민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허나 1956년 3대 대선에서 아쉽게도 민주당의 대통령으로 출마한 신익희 후보가 뜻 밖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에 겨우 당선되었다.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후보가 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조봉암 선생의 약진이 두드러진 대선이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독재의 길로 본격적으로 접어들게 된다. 조봉암선생을 처형했고 신국가보안법을 만들었으며, 언론기관인 경향신문도 폐간하였다.Ⅳ. 4.19혁명과 3차개헌우리역사상 중대한 사건이 터진 1960년이었다. 우리 나라에 민주항쟁을 3가지 뽑자면 5.18광주 민주화 혁명, 6.10민주항쟁, 그리고 4.19혁명이 있다. 4.19혁명의 시발점은 2.28대구 학생시위였다. 대구학생들이 이승만 정부의 야당 후보의 선거유세를 방해에 대한 저항으로 행동한 시위였다. 그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선거에 부정선거를 자행한다. 자신의 양자인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에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를 하고, 4할 사전투표를 시행했다. 결국 3.15일날 마산의거가 일어나고 그로부터 약 한달 정도뒤에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된다. 결국 이게 기폭제가 되어서 고려대 학생, 서울대 학생과 시민들이 대규모로 시위를 하게 된다. 허나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국민들에게 경찰의 발포를 허가하는 명령을 내린다. 4월19일에 계엄이 선포되고 4월23일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요구가 계속되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날에 하야를 하게되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난다. 이승만이 망명 후 아시아 최초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국민들에게 장면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장명정부는 3차개헌을 단행하게 된다. 3차개헌은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단원제에서 참의원 민의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로 바꾸었다. 우리나라의 개헌역사에서 유일한 의원내각제 개헌이었다.Ⅴ. 제2공화국과 4차개헌허정과도정부가 지나고 장면내각이 들어서면서 제2공화국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4차개헌의 핵심은 3.15부정선거를 처벌하기 위한 소급입법이 개헌내용에 포함되었다.Ⅵ. 5차개헌1961년 5.16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중앙정보부를 통해서 62년에 개헌을 단행하였다. 정부는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 직선제로 바뀌었고, 의회는 단원제로 바뀌었다. 이후 제3 공화국 시대가 열리게 된다.Ⅶ. 6차개헌박정희 대통령이 5대, 6대 대통령을 하고나서 3선 개헌을 단행하게 된다. 결국 이것의 유신헌법의 단초가 되었다. 6차개헌은 1969년에 시행되었다. 3선 개헌을 통과시키는데 야당인사과 많은 학생들이 개헌 반대 시위를 했지만 결국 개헌을 하였고 71년 7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Ⅷ. 7차개헌7차개헌은 72년에 단행된 유신헌법이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임기가 6년이면서 종신집권이 가능해졌고, 대통령의 권한을 극대화 시킨 헌법이다. 일명 긴급조치권과 국해해산권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유신정우회 같은 단체를 만들어서 국회의원 3분의1을 대통령이 뽑을 수 있게 해뒀다. 이것은 개헌의 저지선을 확보하는데 이용하였다. 또한 앞으로의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게 되었다. 결국 국민들의 투표권이 박탈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독재의 마지막은 처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79년 10월 26일 자신의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지게 되었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0대 대통령으로 선출 되었지만 실질적 권력자는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이후에 최규하를 몰아내고 11대 대통령이 되었다Ⅸ. 8차개헌8차개헌은 전두환 씨가 개헌을 단행하였다. 7년 단임제로 하고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결국 전두환 씨의 생각은 자신이 7년을 하고 노태우 대통령이나 다른 부하들에게 대통령을 넘겨줄 요양이었지만, 결국 6.10 민주화 항쟁에 의해 대통령에서 물러나게 된다.ⅨⅠ. 9차개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