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감상문200801029 최소영칸타빌레남성앙상블 정기 연주회 03.26처음으로 음악회를 갔다. 조금 설레고 긴장이 됐다. 소극장 안에는 교대생과 음악회를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이크 없이 생생한 목소리를 들으니 느낌이 색달랐다. 그리고 사람의 목소리가 그렇게 멋있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극적 사랑, 복수, 슬프고 애절한, 분노의 감정을 담은 오페라를 차례차례로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태리어, 독일어 등으로 되어있어서 해설자의 설명 없이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2부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가곡을 들려주었다. ‘남촌’은 각자의 목소리가 있으면서도 하나로 어우러지는 화음이 멋있었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준 것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섬세한 손놀림과 혼연일체된 감정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목련화’를 들었을 때 한국의 가곡도 오페라 못지않게 멋있을 수 있다는것을 알았다. ‘희망의 나라로’라는 노래는 중학교 때 알던 노래라 더 반가웠고 씩씩하고 경쾌한 느낌이라 웬지 나까지 신이나는것 같았다. ‘Flying Free’는 정말 구름속에 있는 느낌이 들었고 피아노 반주가 특히 아름다웠다. ‘Sunrise, Sunset’은 슬프고 무겁고 우울한 느낌이었다. ‘Kalinka’는 절도있고 마지막 곡답게 흥겨웠다. 공연이 이대로 끝나는것이 아쉬워 모두 이구동성으로 ‘앵콜’을 외쳤다. 그리고 이어진 앵콜곡은 신나고 유쾌했다. 개인적으로 본공연보다 앵콜곡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지루할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간도 빨리가고 좋은 경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부산,대구,전주 성악아카데미 04.16두 번째 여서 그런지 조금 여유있는 마음으로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남성칸타빌레도 멋있었지만 남녀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는게 더 듣기 좋았다. ‘La Traviata’ 처음 시작할 때 남녀가 멋진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고 와인잔을 들며 파티하는 듯 보였다. 드레스를 입고 오페라를 하는 여성의 모습은 정말 우아해보였다. 소프라노의 맑고 깨끗한 높은 음을 들었을때 소름이 끼쳤다. ‘Carmen’의 첫 시작한 오페라는 Cf에서 많이 듣던 익숙한 음악인데다가 칸타빌레에서 본 분이어서 왠지 모를 친숙한 느낌에 편안하게 들을 수 있었다. ‘La fleur que vous m'avez jetee’는 피아노 부분이 정말 애절했다. 프랑스어를 전공했기 때문에 조금 알아들을 수 있을까하고 유심히 들었는데 프랑스어 실력이 좋지 않은데다가 연음이 많아서 몇몇 단어를 빼고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해설자가 이런 말을 했다. ‘성악가에게서 어떤 목소리, 발음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예측하고 들으면서 감성이 개발된다’고 그때 무슨 말인지 몰라서 갑갑했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까 왠지 알고 듣는 것 보다 모르는 상태에서 알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La Boheme’에서 당당하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웃으면서 부르는 여유있는 모습의 소프라노 여성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Rigoletto’에서 마지막 복잡한 심리를 나타낸 오페라가 기억에 남는다. 앵콜곡이 있을까하고 기다렸지만 이번엔 아쉽게도 앵콜이 없었다.
박노자의 만감일기를 읽고200801029 최소영처음에 만감일기라는 제목을 보고 가벼운 일기려니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국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러시아, 일본, 미국 등 ‘국제관계’와 사회전반에서 일어나는 ‘개인과 국가’, ‘타자와 동질적 집단’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무관심했는지를 깨달았다. 박노자는 한국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며 비판의식을 기를 것을 촉구한다.한국사회를 해석하는 저자의 관점 대부분을 동의한다. 한국에서 비 강남 거주자, 비 특목고 학생, 비 SKY학생, 비 영어능통자는 주류의 영원한 타자로 남기 마련이다. 혈연, 학연, 지연 등 사회자본에 의해 형성되는 한국사회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교수식당에서 한국인이라고 말했다가 한국인이 아니라 ‘귀화인’으로 인식되었던 경험담을 말한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하지만 귀화인도 한국인인데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남’ 대접받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지금 한국에 귀화해 살고 있는 노동자들, 혼혈인에게 한국인으로서 굉장히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한국의 ‘관계문화’도 사회자본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한국인들은 ‘모나지 않게 둥글게 사이좋게 원만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거절을 할 경우 매우 ‘공손한 태도’를 취하며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거절해야 할 상황에서도 웬지 미안한 마음에 남는다. 한국은 집단에서 낙오되거나 관계망에서 차질이 생기면 생존이 어려워지는 문화가 지배적인 데다가 사회와 국가가 개인의 생존을 공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정글 사회다 보니 대인관계가 외교화 될 수 밖에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저자는 ‘이사장님’ 앞에서 학과교수, 대학원생 일동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고 절망을 느낀다. 학교에서 지식근로자가 되려면 어느정도 이사회의 시스템에 적응해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진보 운운하는건 사실 무의미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권력에 ‘내 몸’을 맡기는 순간, 독립적 개체로서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교원 노동자로 살아가려면 결국 나자신을 버려야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된다. 대학이 순수하게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들이 재벌의 부속 사원 양성소가 돼버리면, 결국 교수는 거기에서 ‘고급 훈련 조교’가 되어서 깊고 창고적인 새로운 이론 탐구 등을 생각하기에 앞서 주인 눈치부터 보면서 살게 될 것이다. ‘재벌 대학’ 안의 학자는 결국 자신의 내면에서 인간의 존엄성부터 죽여야 한다. 이는 인간, 지식인으로서의 자살에 가깝다. 대학이 재벌의 식민지가 되면, 성장, 즉 논문 편수의 증가 등은 가능할지 몰라도 제대로 된 의미의 발전은 없을 것이다.한국사회는 원칙상 ‘아랫것’에게 자존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제 간에도 선생이 “아, 이자식” 하면 학생은 별 잘못이 없더라고 무조건 머리를 숙이고 잘못을 빌어야한다. 학교에서 종종 선생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학생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분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 이라고 생각했다. 박노자는 이를 자본에 포섭되어 자본의 질서를 당연지사로 보는 시각을 이미 내면화한 ‘순치된 대중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말한다. 즉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내면의지’를 가지려고 노력해야한다고 말한다.저자는 어렸을때 소년공산당에서 강요된 맹세를 한 경험을 말하며 지배, 복종의 사회에는 규율이 있을지언정 ‘권위’는 없다고 한다.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어쩔 수 없이 거래의 관계인데, 이 관계에서 국가로부터 충성에 대한 어떤 가치있어 보이는 보상도 얻을 수 없다고 판단되면 결국 국가에 대한 충성에 냉소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권위’는 작은것에서부터 민주주의로 출발할 때 생길 것이라 생각한다.저자는 인권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는데 특히, 북한의 인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새롭게 느껴졌다. 대부분 내가 알고 있었던 북한의 인권문제는 수용소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는 그것도 중요하지만 민중으로서는 그 노동력을 보다 나은 조건으로 팔기 위해 이전의 자유를 영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이전의 자유’를 당연하게 생각해왔었는데 북한사람들은 이렇게 억압받고 있다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대한민국이라고 해서 인권이 다 보장받고 있는것은 아니다. 미국에선 월마트를 상대로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는데 노조 결성권이라는 주요 인권을 무시하고 짓밟는 삼성을 상대로 우리가 전국적인 투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라고 저자는 묻는다. 우리에겐 여러 가지 근대적인 척도들 중에서 인권 보다 삼성이 담보한다고 인식되는 부국 또는 개인들의 경제적 위치가 더 일차적으로 생각되는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인종차별 역시 인권이 무시되고 타자로서 소외되는 현상이다. 필자는 학원가에서 흑인 강사들이 당하는 차별에 대해 말하며 한국인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차별받는 것에 비유를 하는데 인종차별만큼 잔인한 행위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담 후세인이 미군에게 붙잡혔을 때 방송사들은 앞다투어 그의 입안을 ‘연구’하는 미국 의사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그가 인간으로서 가진 기본적 존엄성까지 만천하 앞에 모조리 짓밟으려 한 것이다. 이런일이 가능한 이유는 그가 백인문화권과 인연이 없는 ‘바깥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종주의가 몸에 벤 그들의 모습은 낯설고 무서웠다.자본주의를 인간에게 내재돼 있는 소유욕의 당연한 표현으로 생각해왔었다.그러나 ‘소유’라는 개념은 일제 초기의 농민들이 소유의 개념을 몰라 토지조사때 강탈 당한것 등 역사적으로 발전, 정서화된 하나의 ‘허위의식’ 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저자는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다. 실질 임금 증가를 통한 내수 부양도 없고, 직장 안정화를 통한 동기 부여도 없고, 노조와의 합리적 대화 무드도 없고, 사회적 합의의 선도 없는 한국식 자본주의야 말로 세계 자본체제의 ‘약한 고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며 우려하고 있다.조선일보를 보면, 전교조가 합법적인 조합이 아니라 무슨 반사회적인 지하 조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만큼 전교조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막연하게 전교조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부정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전교조 교사의 상당수는 수업할 때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키우도록 노력하는데 그 교사에게 수업을 받은 일이 있었던 아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의 의식없이 순응적인 평범한 생활을 거부할 위험이 있다. 재벌 자본주의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교조 마녀사냥’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평소에 일본 애니메이션과 가수를 좋아해서 관련 영상을 보거나 자료를 찾는데 그럴 때마다 주변 친구들이 일본것은 다 나쁘다며 심지어 장난이겠지만 매국노라고 까지 말한 친구도 있었다. 저자는 ‘반미’ 보다는 차라리 ‘반미제’라고 말한다. 즉,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반감과 미국 군대,자본에 대한 혐오가 미국인들과 모든 ‘미국적인 것’에 대한 혐오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과거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가슴 아프고 화나지만 그것이 일본 문화에 대한 혐오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옳았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한국인들이 저자에게 “어떻게 해서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느냐” 라는 질문을 자주 한다고 한다. 귀화한 외국인에게 그 정도는 당연히 물어볼수도 있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늘 적대적인 계급들의 대립과 대처로 이루어져 있는 사회에서 그 관계를 무시하고 ‘사회 전체’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사회과학적 의식의 결여를 뜻한다고 비판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계급’ 이라는 사회의 기본적인 현상에 무지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한국인들은 ‘국적’ 또는 ‘민족’이라는 기준으로 묶는 것을 좋아한다. 월드컵 때 하나로 단결되는 모습은 한국인으로써도 굉장히 놀라운 광경이었다. 한국인으로써 4강신화에 열광하고 기뻤했던게 다였었다. 그러나 박노자는 우리가 승리한 소수에게 박수를 보내 ‘태극전사’라 높여 부르지만, 훈련과 경쟁 과정에서 도태당한 다수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모습을 안타까워 했다. 또한 ‘국기 앞에서의 맹세’의 문화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같은 소수자들을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분위기 만들기에 크게 기여할 것 이라고 말한다. 보통 어느 한쪽의 입장만 생각하기 마련인데 소수와 다수를 항상 같이 생각하는 관점은 사건을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사람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나가 기도하고 성령을 받음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그것은 위안일뿐 ‘신앙’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대다수의 교회나 사찰에서 ‘신앙’이라고 포장하여 파는 것은, 마사지 클럽에서 이루어지는 ‘유사 행위’와 다를 바 없는, 진정한 신앙의 ‘대체품’ 또는 그 수준에도 못 미치는 신앙적 ‘짝퉁 상품’이다. 설교되는 이야기나 행해지는 행위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사랑’ 사이의 거리는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