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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스페셜 - 구다라열풍 감상문
    동양사의 이해 - 교수님학 과:학 번:성 명:최초의 한류. 구다라 열풍① 영상자료 내용 요약현재 일본의 오사카나 나라 지방에서는 백제(百濟.구다라)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백제역(百濟驛.구다라역)이라는 역 이름부터 시작하여 백제대사(百濟大寺.구다라대사)터라는 절터까지 많은 이들이 백제와 관련 된 단어를 쓰고 있다.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구다라’라는 말은 고대 일본인이 백제를 ‘큰 나라’ 라고 우러러 봄으로써 생겨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만큼 백제와 고대일본은 긴밀한 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사찰, 불상, 불교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백제의 문화들이 일본에 전달이 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고대일본인에게 백제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백제는 고대일본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함께 알아보자.1. 대벽건물, 온돌[그림] 공주 정지산 대벽건물-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백제나라 현 가시하라시에는 백제식의 대벽건물이 발견되었다. 대벽건물이란 사각도량을 파고, 그 도량에 크고 작은 구멍을 촘촘히 뚫어 기둥을 세우는 방식의 건물을 뜻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벽건물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공주 정지산에서 똑같은 형태의 집터가 발견되어, 이런 대벽건물들이 백제에서 건너왔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이런 대벽건물은 모든 일본인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벽건물은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를 했다는 점을 볼 때, 신분이 높은 사람이 사용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집터에서는 온돌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러한 대벽건물은 백제의 도래인이 지은 것으로 생각 된다. 이렇게 백제인들이 사용 하던 집터들이 서일본지역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그림] 백제의 대형 시루- 한신대박물관2. 부뚜막, 시루대벽건물보다 전파 속도가 더 빠른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부뚜막과 시루’이다. 대벽건물이 한정된 지역에서 유행한 것에 비해서 부뚜막과 시루는 일본 전역에서 발견이 된다. 이것으로 인 옷은 고대일본의 의복문화에 충격을 주었다. 여기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는 않지만, 성덕태자(聖德太子.쇼토쿠태자)가 죽은 뒤 그를 기리기 위한 천수국수장 이라는 그림에 보면 어느 정도 파악 할 수는 있다.백제 옷은 화려하고, 정교했다. 그렇기에 고대 일본의 고급관료들과 귀족들이 앞 다투어 따라 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황실에서까지 백제 옷을 입기에 이른다.[그림] 양직공도 左-백제사신 右-왜사신이러한 일본인의 모방은 백제 옷이 들어오기 전 이렇다할 의복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6세기 초에 양나라를 방문한 각 국 사신들을 그려놓은 양직공도 에 보면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백제의 사신은 무릎까지 오는 옷에 가죽신을 신은 반면에 일본사신의 경우에는 천을 끈으로 묶어 몸에 두르고, 신발을 신지 않았다. 백제 옷이 전래되기 전까지 일본은 마나 가죽 등의 원시적인 재료로 봉재하지 않고, 허리에 끈을 묶어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옷의 전래는 일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한 편, 오사카의 문화재센터에서는 최근 히라카타시에서 비단을 짜는 베틀의 한 부분을 발견 했는데, 방사선 연대 측정결과 백제 옷이 전래된 기록과 일치했다. 이것으로 보아 백제인이 비단을 생산하는 베틀을 전달해 주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염료기술도 후지노키 고분 등에서 발견된 꽃씨들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임을 확인 할 수 있다.4. 교역물백제는 일본에 앵무새와 낙타 등의 동물들도 전해주었다. 사실 앵무새와 낙타는 한반도에서도 서식하지 않는 동물이다. 하지만 백제는 승려 겸익이 배로 인도에 다녀오는 등의 발달된 조선술, 항해술로 이러한 동물들은 물론 구슬 등의 교역 품들도 가지고 올 수 있었다. 백제는 이러한 세계의 문물을 자신들의 것으로 발전 시켜 나갔고, 교역 결과물들을 일본에 전달해 주었는데, 이런 선진문물들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많은 충격과 경외를 가져다주었다.5. 기술오사카 항은 동북아의 가장 큰 물류중심지이다. 오사카는 고대부터 많은 사람들이동양최대의 불상을 가지고 있는 동대사에는 사찰건축에서부터 대불에 금을 입히는 작업까지 백제인들의 기술력이 동원되었고, 일본 최초의 절인 아스카사 역시 백제의 지원을 받아서 지어졌다. 사찰 건설 당시 백제에서는 일본에 불사리, 승려 사공, 와박사 등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또한 소가 씨가 탑에 사리를 안치할 때, 100여명이 백제 옷을 입고 식을 거행했다고 한다.6. 기타그렇다면 소가 씨는 어떤 사람들일까? 나라 현의 이시부타이 고분은 백제계인 소가노우마코의 무덤으로 전해지는데, 이 무덤은 그 규모가 거대해 그 세력을 알 수 있다. 소가 씨는 475년 백제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도래인이면서 어떻게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나니와 궁터에서 볼 수 있다. 나니와 궁터 안에는 소가 씨의 창고 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창고 하나의 크기가 90평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이 거대한 창고에 소가 씨들은 백제로부터 들여온 선진문물들을 보관하였고, 이것은 소가 씨의 정치적 기반이 되기에 충분하였다.또한 1999년에 나라 현 백제 대사 터에서 대규모 발굴 작업이 있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천왕의 지시로 백제대궁을 지었다는 기록과 함께 완공된 지 1년 만에 백제대궁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말이 있다. 또한 백제 대사에 9층 석탑을 제작하라는 지시를 하였는데, 그 규모는 80미터가 훌쩍 넘었다. 그만큼 천왕에게 있어서도 백제는 이름 그대로 ‘큰 나라’였던 것이다.백제에서의 선진문물의 전래는 고대 일본인의 의식주와 같은 실질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의 역사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구다라’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고대일본과 백제의 수수께끼와 같은 관계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다.② 보충연구 - 백제와 고대 일본의 관계백제와 고대 일본의 관계는 한반도 내에서든, 일본 내에서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여기에는 많은 문헌자료들과,칠지도는 길이가 75cm정도 되는 칼로써 칼 몸체 좌우로 가치 모양의 곁가지 칼이 각각 3개씩 나와 있어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국에는 이에 관한 기록은 존재 하지않으나.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가 일본에 하사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아래와 같은 금상감이 씌어져 있다.[그림 ] 左-칠지도 右-칠지도 명문문제는 이 명문의 해석을 두고, 한 일간의 이견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백제가 일본에게 ‘헌상’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는 자료라고 말한다. 남북한 학계에서는 백제가 일본에게 ‘하사’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으며, 훗날 진실이 밝혀진다면 백제와 고대 일본의 관계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그림 ] 왕인박사묘2. 왕인박사왕인박사는 국내 문헌에서는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일본의 고 문헌에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와서 일본에 처음으로 한자를 전하고 가르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왕인은 일본으로 건너간 뒤 학자로 중용되어 태자(인덕천왕)의 스승이 되었고, 유교문화를 전수해주었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더불어 그와 함께 간 기술자들이 일본에 새 문명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학계의 일부에서는 왕인 박사의 기록과 업적을 의심하고 과소평가하고 있지만, 일본의 도처에 왕인에 관한 사적)과 유적이 현존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숭앙되고 있으니), 이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또한 왕인이 일본에 간 연대는 고사기의 기록과 일본서기의 기록이 120년 정도의 편차가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이병도박사는 4C말에 들어서 백제가 중국의 동진과 국교를 맺은 이후에 중원의 문물을 많이 받아들였고, 일본과도 교류가 있었으니, 이때쯤이 아닌가라고 한다.3. 불교문화백제의 성왕은 538년에 일본에 불경과 불상을 보낸다. 고대고, 지금이고 일본은 토착종교가 아주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당시 외래종교였던 불교가 정착하기607), 백제대사(642)가 그 이후 연달아 지어지고 645년에는 불교가 국교로 인정 되었다.이런 백제의 영향을 증명이라도 해주듯이 일본에는 ‘백제사’라는 이름을 가진 ‘오대백제사’)가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백제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찰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또한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보여주는 데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다.4. 백제 도래인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해 활약을 하였다. 특히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후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비롯해서 많은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일본 고대 씨족 인명사전 에 수록된 백제 유민과 그 후예들을 살펴보자.)인사라아 - 백제에서 이주한 사람으로 직조에 손재주가 많고, 기예에 재주가 뛰어나 수말재 기의 한 사람이었으며, 주로 그림에 능한 화원이였다.혜총 - 588년 불사리를 가지고 일본에 갔다고 전해지며, 원흥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아스가베쓰쿠리도요무네 - 백제의 곤기의 후예로 벼슬은 주계조와 미농권곌,ㄹ 지냈고, 종 5위의 벼슬까지 올랐다.오쿠라이후쿠루 - 백제멸망으로 이주를 하였으며, 망명 다음해에 태재부에 백제식 산성인 대야성을 쌓았다. 축성과 병법에 밝아 대산하의 벼슬에 오르고 석야연의 성을 받았다.사케노기미 - 백제왕족의 후예로 매를 길러 일본에서 처음으로 매사냥하는 기술을 가르쳤 다. 이것이 일본 응감부의 시작이다.도혼쥬세쓰 - 백제에서 건너간 관원으로 의술에 능하여 시의가 되었고, 종 5위까지 올랐다.이 외에도 수많은 백제 도래인이 일본 고대 씨족 인명사전 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일본의 문화적, 기술적 발전, 그 이외에 부분에서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의 일부 학계에서는 이들 중 상당수를 처음부터 일본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수많은 유적과 기록을 본다면 이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③ 감상‘역사에는 만약이란 없다.’이제까지 .
    독후감/창작| 2009.12.13| 7페이지| 2,000원| 조회(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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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북아시아 지역공동체 구성
    동북아 공동체 구성(동북아시아 지역공동체구성이 난항을 겪는 원인과 향후 동북아시아 공동체 구성의 전망과 방법)과목명 :담당교수 :교수님제출일 :2009년12 월일경 영대 학3학년학번 :성명 :Ⅰ. 서론세계적으로 지역주의 추세가 확산되는 가운데 한국, 일본, 중국에서도 동북아 경제협력을 위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동북아 3국은 자국을 동북아 물류의 중심지로 발전시키기 위해 국제공항을 신축하고, 자유무역지구를 설정하는 등 동북아경제통합에 대비하여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 역시 노무현 정부시기에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을 경제 분야의 핵심 국정과제로 제기했고, 2002년 1월 한국을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로 육성한다는 기본구상을 발표하여, 관련 부처 간 협의를 거쳐 기본계획(master plan) 및 세부실행계획(action plan)이 확정된 바 있다. 이 계획에 따라 정부가 제출한 경제자유구역법안은 2002년 11월 국회를 통과하였다.세계적 규모의 인구와 경제를 가진 동북아시아는 통합에 의한 발전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경제대국이자 고도의 기술력을 보유한 일본과 거대한 상품 및 인력 시장인 중국, 그리고 세계 10위권대의 경제력을 가진 IT강국 한국의 경제 협력은 3국 공동번영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더불어 동북아시아 국가의 산업화 전략에 의한 고도성장이 야기한 황사, 전염성 질병, 무역마찰 등의 초국가적 문제들은 단일 국가에 의한 해결이 어려워, 역내 공동체 구성의 필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또한 세계10위권 내의 군사력을 가진 한 ? 중 ? 일 3국과 이를 둘러싼 세계 양대 군사강국 미국과 러시아의 개입, 그리고 핵 문제를 비롯하여 동북아를 자주 긴장관계로 몰아넣는 북한까지 존재하는 동북아시아는 안보적차원에서도 실질적 영향력을 가진 협력체 혹은 공동체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역내 국가 간 긴밀한 협력시스템에 대한 논의와 시도는 계속해서 전개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필요성의 인식과 논의에도 으로써 ASEAN+3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향후 이를 정례화하기로 합의하였다. ASEAN+3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ASEAN+1(한?중?일)의 FTA와 역내 개별국 간의 FTA가 활발히 진행되게 되었고, 동북아 국가들의 대 ASEAN 투자도 크게 증가하였다. 초기 경제적 논의가 주를 이루었지만 점차 안보와 정치적 현안도 다루게 되었고, 지역공동체로의 논의 역시 계속되고 있다. ASEAN+3 체제의 인구는 20억1천만 명으로 전세계인구의 32%를 차지하고 경제규모는 2004년 기준 7조8000억 달러로 전 세계GDP의 19%에 달해 NAFTA와 EU와 함께 3대경제권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ASEAN+3체제는 APEC과는 달리 지역 정체성을 기반으로 구성된 공동체라는 점과 동아시아 금융위기 시 가졌던 집단적 경험과 이해들이 부합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아시아 공동체의 실질적 기반이 되는 한국, 중국, 일본이 긴밀한 협조를 보인다는 점에서 보다 높은 통합 공동체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2)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CMI)ASEAN+3회의에서 논의된 역내 경제협력 관련 논의들 중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로는 2000년 5월 ASEAN+3 재무장관회의에서 논의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가 있다. 이는 97년 동아시아권의 금융위기상황에서 보여준 서방국가들의 소극적 태도와 실질적으로 미국이 개입하고 있는 IMF체제의 한계에 반발한 아시아국가들이 금융 위기 시 역내의 국가들간의 공동대처를 목적으로 외환을 서로 맞바꾸는 ‘통화스왑’(SWAP)계약을 의미한다. 이것의 연장선상의 논의로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로 인한 세계 경제의 위기에서 한국이 일본?중국과의 통화스왑을 체결하여 실효를 거둔 바 있다.3) 아시아통화기금(AMF)AMF 창설은 1997년 홍콩에서 열린 IMF 총회에서 처음 거론됐다. 일본정부는 IMF에 의한 긴급 금융지원의 한계를 지적하며, 아시아 국가간 상호부조를 위해 AMF를 새로 만들어 IMF를 보완 하자고 제안했다. 이 주장이 처음 제기 될 때에는 미국 공동 개최하는 비정부간 안보대화로서 동북아시아지역만의 안보와 관련된 유일한 민간차원의 기구이다. 동북아시아 국가간 대화를 통한 상호이해와 신뢰구축, 협력 증진을 목표로 창설된 것으로, 비록 개인자격이기는 하나 정부의 관리가 참여하는 준 정부적 회의로 정의되기도 한다. 따라서 동북아국가와 관련된 안보문제에 대한 대화와 논의가 실제 정책에 반영될 가능성이 높고, 이로 인해 그 중요성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3. 정치부문현재 동북아시아에는 한ㆍ중ㆍ일ㆍ러ㆍ북ㆍ몽ㆍ미 7개국만을 포함하는 정례적인 정치협의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탈냉전이 진행되던 90년대에 들어 동북아지역의 적대국간 정상회담이 증가하기는 했으나, 이러한 정상들간의 접촉방식은 양자 혹은 3자간 회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동북아지역의 다자간 정상회담은 동북아지역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적 협력기구를 통해 이루어져왔다. 기본적으로 동남아국가들과의 정상회의와 연계된 형태의 정상회의라는 점과, 중국의 경우 실권자가 아닌 국무총리가 참석을 한다는 점 등으로 인해 진정한 의미의 동북아 정상회의가 될 수는 없다.1) 한ㆍ중ㆍ일 정상회의1999년 11월 마닐라에서 개최된 ASEAN+3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일본이 한ㆍ중ㆍ일 3국 정상들간의 비공식 조찬회동을 제안함으로서 제 1차 정상회담이 성립되었다. 이후 일본이 ASEAN국가들과의 협상력 제고 차원에서 정례화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은 동북아시아 화해와 공동번영을 위한 토대마련과 남ㆍ북 관계 진정에 따른 주변 환경 관리차원에서 유익하다고 판단하여 동의했지만, 중국은 논의의 영역을 경제문제에 한정할 것을 주장하면서 정례화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후 2차 정상조찬회동에서 한국이 정례화를 제의하고 중국이 기존의 입장을 수정하고 이를 받아들임으로서 2000년 11월 한 ? 중 ? 일 3국의 정상회의가 정례화 되었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주요 국가이지만 역사적 골로 인해 갈등을 빚어오던 한ㆍ중ㆍ일 3국의 정상들이 모여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문제에 대이다. 이로 인해 동북아지역의 협조체제는 역내 국가들의 실질적 정책이나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순한 ‘대화의 장’으로 전락하고 있다. 또한 동북아시아 지역의 주요 사안들에 대한 역내 국가들간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사실상 중요한 안건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주변적인 논의들만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Ⅳ. ASEAN과 한국의 대응방안한국에게 ASEAN은 1980년대부터 본격화 된 무역투자의 급증으로 경제적 측면에서 중요한 대상이 되어왔다. 2004년 한?ASEAN의 총 교역량은 464억불로 한국전체 교역의10퍼센트를 차지하여 5위에 해당하고, ASEAN 투자액은 4억8천만 달러로서 전통적 투자지역인 중국?미국에 이어 제3위를 차지하였다. 한국은 지역안보차원에서도 ASEAN이 주도하는 ASEAN지역안보포럼(ARF)과 ASEAN+3에 참여해왔다. 동아시아 역내 유일 안보협력체인 ARF는 2000년7월 북한이 가입하여 북한 핵 문제를 논의하는 장을 마련하여 주목을받았다.한국은 ASEAN+3정상회의에서 한국의 역할이 중간자적 역할 수행에 있음을 인식하고, 초기 동아시아비전그룹(EAVG)과 동아시아연구그룹(EASG)등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협력체제에 대한 논의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전략적입장이 부재하고, 외교전략이 동북아에 한정되어 있어 동남아와의 연대 강화에 한계를 가졌다. 반면, 중국과 일본은 동아시아 공동체논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힘겨루기 양상이 치열해지면서 대 ASEAN 외교를 강화하고 있는 실정이고 경제협력방안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ASEAN은 1967년 결성된 이래 개발도상국가들 간에 형성된 지역협력체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왔다. 동남아 자유진영 국가에서 시작되었지만 탈냉전 이후 공산권을 포함한 동남아의 거의 전 국가를 아우르게 되었고 체제 내 결속도 공고히 되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ASEAN 국가들은 서방금융자본에 대한 내부적 취약성이 드러나고 ASEAN 체제는 변화를 모교우위에 있기에 한국의 동아시아 협력체제에 대한 논의는 주로 동북아에 한정되어 있다. 동북아 지역의 핵심 국가인 한·중·일 3국은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할 때 전 세계 생산량의 약 1/5을 점유할 정도로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또한 교역 비중 면에서도 전 세계 교역량의 10% 중반 대에 달하여 한·중·일 3국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볼 때 EU, NAFTA에 이어 세계 3위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역내 교역 구조 면에서도, ASEAN을 포함한 동아시아 경제에서의 한·중·일 3국의 비중은 역내 전체 GDP의 약 90%를 차지하고 있고, 총 교역량의 70% 수준에 육박하고 있을 정도로 크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치적"E역사적 갈등으로 인해 아태경제협력체(APEC) 이외에 어떠한 지역경제통합체에도 동시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중장기적인 측면에서 볼 때, 동아시아가 주목 받는 이유는 동북아에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에서 ASEAN을 중심으로 한 지역통합은 한계가 있다고 보여지고, 그렇기에 한국은 상대적으로 동아시아 지역협력체제에 대한 논의보다 동북아시아 협력체제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일지도 모른다. 동북아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공동으로 대응하는 ASEAN 국가들처럼, 동북아 국가들 역시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협조체제를 구축해야 하고, 이것은 동아시아 지역 공동체 논의에 앞선 선결과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에게 있어 ASEAN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동북아 삼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서도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양대 축은 중국과 일본이다. 그 사이에서 우리의 발언권과 영향력을 증대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ASEAN 국가들의 지지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다.ASEAN이 중국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만큼 한국에게 조정자의 역할을기대할 수 있고, 한국 역시 동북아 협력체보다 ASEAN+3체제에서 협상력의 우위를 가질 가능성이 더욱경쟁
    사회과학| 2009.12.13| 13페이지| 2,500원| 조회(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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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지 관도전투에서 보는 두 영웅의 리더십
    『관도대전의 두 영웅』목차상황1. 관도대전 1, 2차 전투상황2. 오소전투결론손책이 죽고 손권이 대를 잇지 조조가 손권을 장군에 봉해 자기의 편으로 만들었다.…이에 발끈한 원소는 유주, 청주, 기주, 병주에서 70만의 군사를 모아 조조를 치기로 했다. 허나 전쟁의 당위성에 의문을 품고, 시기가 적절하지 않음을 피력한 중신인 전풍은 원소의 계획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원소는 울화가 치밀어 전풍을 가두고, 그의 생각에 동조한 또 다른 중요 모사인 저수도 물리쳤다. 전쟁 전부터 가장 중요한 모사 두 명을 잃은 것이다. 이런 원소의 도발을 예측이라도 한 듯, 조조는 7만의 군대를 일으켜 관도에서 맞대응 했다. 처음에 군사력이 워낙 압도적인 원소에게 패하는 듯 했지만, 조조는 중신들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 각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이에 원소는 조조 군이 다른 전투(서주 쟁탈전)를 막 끝낸 직후라 군량과 마초가 부족한 것을 알고 지구전을 택했고, 조조군은 당황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원소의 세작을 통해 원소군 자체 내의 비밀을 알게 된 조조는 서황을 보내서 원소군의 한맹이 운반하는 군량을 모두 태우게 된다. 다시 군세는 조조가 더욱 높아지게 된다.-이문열 삼국지 245쪽-상황1. 관도대전 1, 2차 전투■ 두 영웅의 리더십 분석 1우리는 위 상황에서 조조와 원소의 개인적 속성인 Seed에 기초하여 리더십 행동인 Deed와 상황적 필요와 주변사람들의 요구인 Need를 관찰해 보았다.□원소Big Five 성격조조충동적성실성책임감, 계획적활동적, 확신, 지배적외향성활동적, 확신, 지배적익숙한 것만 선호(전술)개방성(전술)창의성(발석거 전술)감정 기복이 심함정서적 안정성안정적, 자신감, 침착배려심이 없음친화성배려, 유연, 개인적 유대 강화(원소를 배신한 적장에게 후하게 대접함)리더 개인의 성격 - Big Five 모델로 비춘 두 리더⇒ 조조는 매우 꼼꼼하게 따지는 리더십 행동을 보인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며 사실을 중시한다. 조직화와 계획화에도 능하다.반면 원소는 감정을 중시하고 느낌과 자신의 정서에 많이 휘둘리는 성격을 보인다. 마음이 맞는 신하는 일하기 쉬우나 여타의 다른 신하들은 같이 일하기 힘들다.⇒ 추가적으로 원소는 부정적 나르시즘 성향을 보였다.원소는 자신의 비전을 구축하고 여기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여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성공했지만, 전풍이나 저수의 간언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부하의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못했다. 또한 지난 전투(하북 평정)에서의 승리로 자만하는 등 부정적인 성격의 나르시시즘을 발휘하였다.통제의지도전추구고고저전풍은 원소에게 전쟁 시기가 아님을 피력했지만, 원소는 그를 옥에 가두고 이번 기회에 천하통일을 이루려고 했다.순욱은 조조에게 이번 기회가 아니면 하북을 못 얻을 것이라 했다. 오랜 전쟁에 지쳤지만 조조는 순욱의 의견을 반영해 적극적인 하북정벌에 나선다.고통제 혁신추구형(HCI)-원소참여자 혁신추구형(PI)-조조□ 두 리더의 전략적 리더십 스타일군주참여유형내용조조CⅡ원소 군이 몰려 온다는 사실을 듣자 조조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급히 모사들을 불러 원소의 대군에 맞설 의논을 시작했다. 그 중 순유가 일어나 계책을 내놓았다. 조조는 순유의 의견을 따라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원소AⅠ손권이 조조 편으로 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한 원소는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바로 유주, 청주, 병주, 기주에서 70만 대군을 일으켰다. 전쟁의 부당함을 말한 전풍과 저수는 이 과정에서 투옥이 되었다.□ 두 리더가 사용한 참여유형⇒ 둘 다 AI, CI, CII를 골고루 발휘했지만, 원소는 주로 AI를, 조조는 주로 CII에 적합한 참여유형을 사용했다.□ 중간 평원소는 조조보다 세력도 훨씬 컸지만 그의 제 1 모사인 전풍을 내치고 간신인 곽도, 봉기, 심배를 선택했다. 또한 추종자들을 설득하기 보다는 자기감정을 지나치게 앞세웠다. 반대로 조조는 팔로워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전쟁에 임했다. 조조는 추종자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리더와 팔로워 간의 욕구를 동시에 달성하려 했고, 비전과 철학을 공유해 전쟁에 임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한맹에게 군량 관리를 맡겼지만 임무가 실패해 크게 화난 원소는 당시 남아있던 모사 중 제 1모사라고 할 수 있는 심배를 그 자리에 맡긴다. 이 와중 원소의 모사인 허유는 조조의 첩자를 잡게 되어서 조조군의 비밀이 ‘군량의 부족’에 있음을 안다. 그리고 바로 조조를 깰 수 있는 계책을 낸 허유는 원소에게 진언을 하지만, 그가 예전 조조의 친구임을 알고 오히려 꾸짖으며 내쫓는다. 여기에 봉기의 모함이 가세해 허유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조조에게 투항해 원소를 깰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른바 관도대전의 가장 큰 승부라고 할 수 있는 오소전투의 배경이 된다. 허유에게 비밀은 받은 조조는 장수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원소의 대장인 순우경을 잡고 원소는 대패하게 된다. 여기서 하북의 패권이 넘어가게 된다. -이문열 삼국지 220~245쪽-상황2. 오소전투 (3차 전투)■ 두 영웅의 리더십 2□ 두 리더의 인재 관리내용조조1. 조조는 투항한 모사 허유의 말을 비판적으로 분석 후 이를 실행2. 투항한 장수 장합, 고람을 바로 장군으로 승격시키고 전장에 배치3. 각 전투에 맞는 장수를 적재적소에 배치 (서황-한맹의 전투)4. 패한 장수를 독려해 사기를 북돋음원소1. 부적절한 인물 배치-한맹의 군량운반, 순우경의 군량보호, 전장 참여 인물인 모사(심배)에게 군량을 셈하게 함2. 가장 중요한 계책을 알린 허유를 사사로운 감정으로 내침3. 패한 장수는 사형 (한맹)4. 저수의 좋은 계책을 물리치고 투옥을 시킴□ 특수신용 이론조조한맹의 마초를 태운 허저, 장료, 서황가 돌아오자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장졸들에게 각기 무거운 상을 내려 그 수고로움을 위로했다.원소한편 원소는 한맹이 눈앞에 서기 무섭게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저놈의 목을 베어라” 뭇 관원들이 힘써 말려 한맹의 목을 가까스로 붙어있게 되었다.안철수 팀의 코멘트여기서 또 한번 조조와 원소의 대비가 이뤄진다. 조조는 일생에서 싸움에 많이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장수의 목을 베려한 적은 없었다. 허나 원소는 걸핏하면 노기로 장수들을 움츠리게 했다.리더는 추종자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기대하는 것을 충족시킴으로써 특수신용을 쌓아야 한다. 특수신용 리더십 발휘는 리더십을 정당하게 해주는 자산이 된다. 리더는 작은 혁신이라도 하나씩 성취시켜 감으로써 특수신용을 쌓을 수 있다. 또한 쌓은 신용을 잃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다.- 원소 : 인재를 볼 줄 모르는 눈으로 신용을 잃어감(충심에서 우러나오는 조언 무시, 전쟁서 패배하면 죽음), 기대를 만족시키기 못함(전쟁에서의 빈번한 패배)- 조조 : 승리 시 상을 줌, 옳은 소리하는 사람에게 무한한 신뢰 줌원소의 비윤리적 리더십조조의 윤리적 리더십거만하고 자기 중심적기만적 행동을 함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림다른 사람의 존엄을 무시함추종자 개발을 소홀히 함도움이나 지원을 제공하지 않음겸손함을 잃지 않는 자세정직하고 올바름공정성을 확보하는 데 진력함스스로 책임을 짐각 개인을 존중함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개발시킴다른 사람들을 섬기려는 자세□ 윤리적 가치와 리더십원소는 그동안 무거운 세금으로 백성들에게 부담한 과중을 주었지만, 조조는 백성의 안위를 생각한 정책으로 민심의 향방이 나뉘었다. 조조는 기본적으로 원칙주의자이지만 능력이 있으면 행실을 가리지 않는다. 허나 원소는 대소완급을 가리지 못하고 겉으로는 관대하나 속으로는 부하의 능력을 시기하는 도량을 보여준다.잘 됨미 비리더십 스킬조조원소조직 시너지창출의 기술능력 있는 사람들을 선발,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전쟁에서 효율적 수행을 가능케 함.
    경영/경제| 2009.12.13| 5페이지| 1,000원| 조회(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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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스페셜 - 추적 임나일본부의 정체
    학 과:학 번:성 명:동양사의 이해 - 교수님추적! 임나일본부의 정체.① 영상자료 내용 요약1992년 일본에서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조작된 것임이 밝혀지면서 한 일 양국이 충격에 휩싸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게도 큰 파장을 주었던 것은 한 일 양국 간의 고대사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은 고대사의 해석에 있어서 많은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 중의 가장 큰 쟁점이 되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이다. 임나일본부설은 고대 일본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통해서 고대 한국의 남부를 지배하였고, 신라, 백제가 일본에 복종하였다는 내용인데, 이것은 일본의 조선침략의 당위성을 부여해 주었다.[그림 ] 신묘년 기사 변조과정[그림 2] 전성기 고구려영토이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 해주는 것은 공교롭게도 광개토대왕비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광개토 대왕비에는 ‘신묘 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고 주장했고,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인 시라토리는 ‘이 비문에 의해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임이 확인 되었으니 광개토대왕비를 일본에 가져와 박물관이나 공원에 세우자.’ 라고 까지 말했다. 하지만 정인보는 고구려를 주어로 삼으며 새로운 해석을 하면서 반박했다. 특히 1972년에는 재일사학자인 이진희 씨에 의해서 광개토대왕 비문이 변조 되었다는 주장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가지고 온 시기별 탁본을 비교하면서 증명되었는데, 이 이후에도 일본은 비석에 석회를 바르는 등 사실을 은폐한 것임이 밝혀졌다. 이 때, 중국의 학자에 의해서 반론이 제기 되었지만, 국내학자들에 의해서 새롭게 변조된 글자들이 계속적으로 발견되어 변조설에 힘을 더해주고 있다. 또한 논란이 되는 부분 바로 뒤를 살펴보면 일본의 입장에서 해석할 경우 모순이 발생하기도 한다.그렇다면 일본이 과연 이 때 당시, 한반도를 정복하고, 지배할 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경우에는) 광개토대왕이 주적이라고 여겼던 백제를 공격해서 수많은 성을 함락시키고,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왕이 광개토대왕에게 재물을 바치며 영원히 신하가 될 것을 맹세 했다고 한다. 또한 백제를 복속시킨 후 대대적인 남진 정책을 펼침으로써 신라 역시 고구려의 영향권 하에 두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경주에서 발견된 호우총의 호우 밑바닥에서 그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그림 ] 고분의 형식 - 맨 좌측이 전방후원분그에 반해 일본(왜)의 경우에는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할 만큼의 세력을 갖추지 못했다. 광개토대왕비의 일본에 대한 언급을 보면 왜구, 왜적, 왜인 등으로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고, 그들의 멸, 추, 퇴의 대상이라는 점을 보았을 때, 이들은 국가나 큰 세력에 의해서 보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단지 고구려가 백제, 신라, 가야를 정복하면서 등장하는 엑스트라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또한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라면 200년간의 유물들이 나와야 하는데, 발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그 때 당시의 전형적인 일본 고분형식이였던 전방후원분도 발굴되지 않고 있다.[그림 ] 안라국의 위치[그림 ] 화염무늬토기임나일본부설이 유일하게 언급되어 있는 일본서기 에 임나일본부외에 ‘안라일본부’라는 용어가 보이는 데, 여기서 ‘안라’는 금관가야가 세력이 점점 약해지면서 5세기 이후에 새로운 맹주국으로 떠오르게 된 안라국을 뜻한다. 안라국은 고인돌과 그 위치 그리고 기록, 고분, 철제마갑등의 철제유물, 토기 등을 살펴봤을 때, 그 세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독자적인 세력과 발전된 문화는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본서기의 흠명기에 보면 안라에 왜인 사신들이 출입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임나일본부가 군사적인 조직이 아닌 외교사신정도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안라국의 백제와 신라에 대한 견제, 협력의 목적으로 일본을 이용하려 했던 시도와 철기 문화 등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일본의 이해관계가 함께 잘 맞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야가 위기에 처하자 많은 길비직과 하내직등의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안라국의 독립을 보장 받으려 했고, 일본의 경우에는 철과 선진문물을 수입해 가고, 안라국의 뛰어난 요충지적인 성격을 이용해서 국가체제의 완비에 이용하고자 했다. 이렇듯 고대 일본은 가야에서 철과 선진문물을 받아 국가를 형성을 하려고 노력할 정도로 기반이 미흡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러한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결국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는 광개토대왕비문에도 일본서기에도 가야지역에서의 문헌과 고고학적인 유물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증거를 바탕으로 임나일본부설이 점점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일부 일본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왜곡이 일어나는 일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② 보충연구임나일본부설은 일제는 그들의 조선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식민사관중에 하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한국사의 전개과정 자체가 고대부터 외세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고, 한국 혼자서는 발전 할 수 없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는 ‘타율성이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여 증명하는 것 자체가 한국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임나일본부설의 진실을 규명할만한 근거는 광개토대왕릉비와 일본서기 외에 칠지도, 송서 , 남제서 , 양서 , 북사 , 수서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한국, 일본의 기록뿐만 아니라 중국의 기록에서도 논쟁의 실마리는 존재하다. 그렇다면 임나일본부설의 중국 측 사료에 대해서 알아보자.[그림 ] 송서 왜국전1. 중국 측 사료에 대한 한 일 양국의 주장일본 측에서는 왜왕이 6국(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제군사 안동대장국 칭호를 수 차례 받은 점)을 들어 한반도 남부지역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중국으로부터 보장 받았다고 한다. 또한 백제왕의 칭호가 등급이 높은 점에 대해서 중국에 대한 충성도나 대중국의 외교관계 빈도를 고려한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왜의 무왕이 북쪽의 95국을 정벌 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설이 사실이라고 말한다.하지만 한국 측에서는 5세기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진한이나 모한이 언급됐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으며, 백제왕이 왜왕보다 등급이 더 높은 장군 호칭을 받았고, 중국이 주는 칭호는 실질적인 의미보다는 명예적인 의미가 강하다는 주장을 한다. 그리고 일본서기 에서 보면 한반도는 왜의 서쪽으로 나와 있는데, 기록에는 북쪽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일본 내의 지방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 일본 교과서 수록 예이렇듯 한.일 양국 뿐 만아니라 중국에서도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 교과서)에서는 이미 이러한 내용이 사실로 증명이 됐다는 식으로 수록하고 있다.고구려 광개토왕 비문에 의하면 대화정권은 군대를 조선에 보내어 고구려와 싸웠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렵부터 대화정권은 가라지방에 세력을 떨쳐 그 세력 하에 들어갔다고 간주한 지역을 임나라 불렀다.5세기 초부터 거의 1세기 동안 5대의 왜왕에 조공했고 조선 남부에 대한 군사지휘권을 표시하는 높은 칭호를 얻으려고 하였다.이것은 중국 황제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여러 나라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유리하게 꾀한 것이다.이러한 조선반도에의 진출에 의해 대화정권은 대륙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큰 힘을 지니게 되었다.4세기 말엽부터 5세기에 걸쳐 대화정권은 백제와 연합하여 통일이 늦어진 변한을 발판으로 하여 신라에 침입, 고구려와도 싸운 것으로 생각된다.대화정권은 그 후에도 백제와는 우호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변한의 땅을 임나라고 칭하면서 세력 하에 넣었다.대화정권이 거의 국토를 통일하고 조선반도에도 세력을 뻗쳤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조선반도의 제 민족 사이에 민족적 자각이 높아져서 통일국가 형성의 기운이 높아졌다.3. 한국의 전방후원분역사스페셜에서는 한국 내에는 전방후원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한국에도 전방후원분은 존재한다. 현재 한국 내에 존재하고 있는 전방후원분은 ▲전북 고창군 칠암리 고분 ▲전남 영광군 월산리 월계고분 ▲담양군 고성리 고분(월성산 고분)과 성월리 고분(월전 고분) ▲광주 월계동 1ㆍ2호분 ▲함평 장년리 장고산(長鼓山) 고분 ▲함평 마산리 표산(杓山) 고분군 중 제1호분 ▲함평 신덕 고분 ▲광주 명화동 고분 ▲영암군 자라봉 고분 ▲해남 방산리 고분 외에 이번 해남 용두리 고분등이다.)[그림 ] 영산강 유역전방후원분 분포도처음 한국 학계에서는 전방후원분의 발굴에 대해서 극비에 부치거나, 심지어 존재 자체를 감추려고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이유가 바로 이 전방후원분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이런 전방후원분의 존재에 대해서 한국 학계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는 증거라기보다 반박하는 증거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냈다.
    인문/어학| 2009.12.13| 5페이지| 2,000원| 조회(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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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비자주권과 주의 그리고 운동에 대해서...
    목 차Ⅰ. 서론...............2Ⅱ. 본론...............31.소비자 주권....31) 소비자 주권의 의미2) 소비자 주권의 등장 원인3) 소비자권리의 발생배경과 소비자 8대 권리2. 소비자 주의...51) 소비자주의 의미3. 소비자 운동...61) 소비자운동의 의미2) 소비자 운동 사례4. 소비자주권, 소비자주의, 소비자운동간의 관계........7Ⅲ. 결론..............10Ⅳ.참고문헌...........11Ⅰ. 서론물품거래에 있어서 현대를 ‘소비자 주권 시대’라고 말한다. 그럼 ‘소비자 주권 시대’라는 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말 뜻 그대로 소비자가 공급자보다 우위에 서서 주권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기업체가 제공하는 상품을 수동적으로 사용하던 소비자가 이제는 제품의 생산과 품질, 디자인, 경영에 이르기 까지 소비자의 의사가 반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현대에는 이런 말이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되고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처음부터 소비자가 거래의 주권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소비자는 공급자가 제시하는 물건을 제시한 가격에 살 수 밖에 없었다. 즉 공급자가 원하는 물건을 원하는 가격에 원하는 방식으로 공급했던 공급자 우위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공급자 우위의 시대는 가고 소비자가 우위에 서는 소비자 주권 시대가 도래 들이 의미하는 것은 조금씩 다르다. 지금부터 이들 각각에 대한 정의를 설명하고 이 셋의 관계를 정리할 것이다.Ⅱ. 본론1. 소비자 주권1) 소비자주권(Consumer Sovereignty)의 의미소비자 주권을 한마디로 말하면 시장에서의 소비자 주도권을 말한다.소비자 주권이라는 용어는 Hunt가 1936년에 최초로 사용했는데 민주사회에서 국민이 정치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듯이 시장에서는 소비자들이 경제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좀 더 풀어 말하자면 소비자 주권은 시장 경제에서 소비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돈으로 가장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상품을 사게 된다. 공급자가 어떤 상품을 생산하며, 얼마의 가격에 어느 정도를 공급해야 하는지가 소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소비자 주권이란 시장경제에서 소비자들이 경제적인 주권을 가져야 함을 뜻하며 소비자의 선택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소비자 주권의 확립은 소비자 권리를 실현시켜 줄 뿐만 아니라 소비자 만족도 증진시켜준다. 국민 전체의 복지 수준을 높여 주며 기업의 경쟁력과 국가경제력 향상의 출발점이 바로 소비자 주권이다.즉, 소비자 주권이란 모든 경제과정이 궁극적으로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조건 또는 소비자 선호에 순응하는 생산 활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소비자 주권이 실현되려면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여야 하고, 소비자 정보가 충분하게 공급되어야 하고, 소비자보호행정을 강력하게 추진시킬 수 있는 운동 등이 정착되어야 한다.기업은 기업간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소비자에게 안전하고 품질이 좋으며 값싼 제품을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기업에 대한 심판자로서 행하는 소비자의 불평이나 불만을 도외시할 것이 아니라 기업의 경영활동에 적극적으로 반영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생산자가 소비자주권을 전적으로 무시한다거나 소비자가 생산자 주권을 도외시하는 경우에는 사실상 소비자주권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2) 소비자 주권의 등장 원인(1) 정보의 비대칭1980년대 이후 기 쉽다. 경쟁 대신에 ‘집단행동’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소비자들은 보통 유대감이 상당히 약하기 때문에 힘을 합쳐 문제에 대응하는 것이 힘들다.(3) 기업간의 치열한 비가격 경쟁기업간의 경쟁이 소비자를 위한 기업간의 품질향상 경쟁이 아닌 광고로 경쟁을 하여, 이런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소비자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또한 독과점의 시장구조나 기업간의 치열한 비가격 경쟁이 소비자 문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4) 허위 · 과장광고의 증가광고는 소비자 수요를 창출하고 상품정보를 제공하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으나 반면, 소비자의 선호를 왜곡시키고, 제품가격 상승의 원인이 되고, 허위 · 과장광고를 통하여 소비자가 어느 것이 정확한 정보인지 판단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하여 이에 따른 소비자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3) 소비자 권리의 발생배경과 소비자 8대 권리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권리는 케네디 대통령이 1962년 3월 15일 "소비자 권익 보호를 위한 특별 교서" 에서 소비자의 4대 권리를 보호할 것을 제창했으며, 이후 국제협동조합동맹이 1964년 제24회 대회에서 소비자권리를 선언했습니다.다음으로 국제소비자기구의 소비자권리선언, 그 다음에는 1980년 아시아 태평양지역회의에서 발표, 이후 유엔의 제106회 본회의에서 소비자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이 설정되었다.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소비자 권리를 선언했고, 우리나라는 1986년 12월 31일 제정된 소비자 보호법에서 소비자의 7가지 권리를 규정해 놓았다.첫째. 안전할 권리, 둘째.정보를 제공받을 권리, 셋째.선택할 권리, 넷째.의사가 반영될 권리의 4가지 권리에 추가적으로 다섯째.교육을 받을 권리, 여섯째.보상을 받을 권리, 일곱째,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 여덟째,단체를 조직하고 활동할 권리를 포함시켰다.2. 소비자 주의1) 소비자 주의의 의미소비자주의는 판매자를 상대로 하여 구매자들의 세력을 증대 시키는 일종의 사회 운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업체는 물론 정부기관, 학교,국 대통령 J.F.케네디가 주장한 소비자의 4가지 권리, 즉 안전할 권리, 알 권리, 자유선택의 권리, 의사반영의 권리에 따라 사상적·정치적 기반이 굳혀졌으며, 급진적인 기업비판에서부터 온건한 계몽운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운동이 정착되어 간 시기이다.소비자중심주의를 전개하도록 재촉한 요인은 기본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자각의 결여에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향상에 대한 소비자쪽의 지식 부족과 사회적·정치적 불만과 같은 구조적 긴장요인도 지적되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는 기술혁신에 의해 제품수명이 짧아져 판매경쟁이 치열해지자 소비자의 욕구를 제품계획에 미리 반영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2) 컨슈머리즘과 소비자주권소비자의 주권에 대해 조사하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개념은 컨슈머리즘이다. 1993년 한국 마케팅학회에서는 컨슈머리즘은 판매자에 대항하여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시민과 정부에 의한 조직화된 운동이라고 정의 하고 있다.이런한 컨슈머리즘을 보다 자세히 구분하면 첫째, 소비자 교육에 의해 시장에서의 현명한 행동을 지향하기 위한 ‘적응주의적 컨슈머리즘’과 둘째, 육체적 위해를 포함한 위험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고, 과학적 또는 법규제적으로 소비자를 보호하는 ‘보호주의적 컨슈머리즘’, 그리고 적응주의적 컨슈머리즘을 개선하고 보호주의적으로 개인의 건강이나 안전을 지향하는 ‘개혁주의적 컨슈머리즘’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첫째 컨슈머리즘은 시장시스템과 가장 밀착되어 있다. 물론 인간성 회복운동, 자연보호운동 등과 같은 비시장시스템의 정신적인 기반이 존재하지만 시장 시스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둘째, 컨슈머리즘은 소비자 주권의 확립을 지향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경제주체는 소비자와 생산자이며 이들의 법적 권리는 대등하다. 그러나 고도의 대중소비자시대에 접어들면서 소비자들은 재화와 용역의 구매 시 필요한 정보의 대부분을 생산자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소비자들은 점점 생산자의 권리를 회복하고 시장에서 이를 확립하기 위하 소비자 스스로의 자주적인 운동이며 생활자로서의 국민 생활을 올바로 정립하기 위한 생존권적인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다.이런 소비자 운동도 맨 처음에는 하자 있는 상품에 대하여 불만 처리를 하는데서 대해 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로 집에서 해외의 물건을 살 수 있는 현대에서는 소비자 운동이 나타내는 의미가 훨씬 넓어졌다. 현대의 소비자운동은 상품 등의 유형의 물건뿐만 아니라 서비스에 해당되는 3차 산업에 대해서 까지 소비자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사회운동으로서의 소비자운동은 기존의 구 사회운동들과는 상이한 사회 역사적 맥락에 위치한다. 대표적인 구 사회운동인 노동운동은 산업 사회에서의 두 중심계급인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구조적 대립 타협 그리고 국가의 조정 등을 통해 그 양상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구조 속에서 운동의 초점은 생산과 분배의 문제 등에 모아졌으며 조합주의적 노동조합은 노동환경의 개선 임금인상 고용안정 등을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노동운동과는 반대로 소비자운동은 소비영역에서 발생하는 포괄적인 문제 특히 소비자와 기업간의 힘과 정보의 불균형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일면 기업의 횡포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노동운동과 유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소비자는 공간적 분산성과 관계의 비지속성 때문에 조직적 동원에 어려움이 있다. 이에 따라 소비자운동에서는 소비자 개개인의 직접적인 참여보다는 전문화된 운동조직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2) 소비자운동의 사례교복값 담합과 학부모의 소비자 운동교복 값 거품 빼기 학부모, 교사가 나섰다- 교육부에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장치 마련 촉구최고 70만원을 호가하는 학생들의 교복값 정상화를 위해 학부모와 교사들이 나섰다. 참교육 학부모회, 함께 하는 교육시민모임, 전교조는 8일 오전 11시 교육부청사 후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학부모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교복의 거품 값을 교복 공동구매 활성화로 걷어내겠다"고 밝혔다.8일 오전 11시, 교육부청사 후문에서 전교.
    사회과학| 2009.11.20| 11페이지| 2,000원| 조회(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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