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계 이황의 생애·사상·교육사상 】Ⅰ. 이황의 생애1. 초년기 :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대과에 급제하기 전 시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엄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람-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 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 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 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숙부 밑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숙부마저 17세 되던 해에 사망- 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 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 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 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 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 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 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 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함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본 틀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1. 이기론- 퇴계의 사상은 정자, 주자의 입장을 바탕에 둔 정주학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그리하 여 정주 계통의 성리학설을 기본 입장으로 하여 퇴계는 이와 다른 이론이나 학설을 배척한 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다른 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성리학이라 하더라도 심학이라 불려지는 양명학이라든지, 서화담 계통의 기일원론, 나정암(나순흠이라고도 함, 명의 성리 학자)의 주기설 및 오초려(오징이라고도 함, 원의 학자)의 주륙 절충적 견해 등을 배척한 다. 그 중에서도 양명학과 화담계의 기일원론에 대한 배척이 가장 강력하다.퇴계는 양명학의 심즉리설과 지행합일설을 거경궁리론과 지행병진설로 조목조목 반박하 고, 화담의 기일원론을 이기이원론으로 반박한다. 결국 퇴계는 정주의 이기이원론만을 인 정한다.2. 심성론(인성론)- 이처럼 퇴계는 정주의 입장을 자신의 학문적 토대로 하여 출발하였지만 깊이를 더하여 감에 따라 독자성을 띠게 되었고, 마침내 정주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는데 그 좋은 예가 심성론 특히 사단칠정론이다. 퇴계는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이기론의 이론을 심성 개념의 분석과 해명에 적용하여 한국 유학의 중요한 특징인 심성론(인성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퇴계의 사상으로 인하여 한국 성리학은 강한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 하게 된다.3. 수양론- 퇴계의 학문정신은 이론적 정밀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 는 수양론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심성을 살아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이해한다는데 중요한 특징이 있다. 퇴계의 수양론은 심(心)과 경(敬)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은 수양이 이루어지는 바탕이요, 경은 수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퇴계의 학문적 관심은 항상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귀결되고 있으므로 이 '경'이야말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며, 퇴계가 존경받는 이유도 이러단계 더 높은 단계의 연구서로 제시하였다.그는 제자들에게 '주자전서'를 통해 학문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학문이 심화되면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을 소개하였다. "'주자전서'를 읽을 수 있으면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이미 그 방법을 알 게 되면 반드시 느끼게 되어 떨치고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공부를 시작하여 오랫동안 익숙한 뒤에 사서를 다시 보면 성현의 말씀이 마디마디 맛이 있어서 비로소 자기에게 쓰이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그리고 정주의 학문을 한결같이 표준으로 삼아서 지행병진함을 가르쳤다.3. 교육 방법① 거경의 중시- 퇴계가 교육을 통한 인격완성에 있어 가장 중요시한 것이 경(敬)공부였음.(持敬의 목 적은 지경을 통한 도덕적 인격형성)- 이가 스스로 발현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 이황은 수양의 방법으로 이를 드러나 게 해주는 '경(敬)'을 중시했다.② 잠심자득(潛心自得)의 원리- 마음을 바르게 하여 고요히 하면 이가 우리의 의식 속에 떠올라 그 실상을 드러낸다 고하여 잠심자득(蠶心自得)의 원리를 수양의 방법으로 내세웠다.③ 지행호진설(知行互進設)- 이황은 왕양명(왕수인)의 「지행합일설」을 비판하면서 지행호진설을 제시했다.- 선(善)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다 실천하지 못하는 사례가 있듯이, 지와 행은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퇴계는 지와 행을 새의 양 날개와 같은 것으로 보고 이들이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지행호진'을 강조했다.④ 수기(修己)의 중시- 이러한 수양방법론을 내세우는 이황은 수기를 더 중시하여 '수기가 곧 치인'이라는 입장을 취한다.⑤ 입지의 강조- 입지란 학문의 자각적 태도를 확립하는 것으로, 현대 학습이론의 준비성 및 동기유발 의 개념과도 상통한다.⑥ 개성에 맞는 학습의 중시- 입지에 의한 학습자의 자발적 태도를 중시하는 이황은 학습자가 입지한 바를 보고 그 사람됨과 능력의 차이에 따른 교육, 즉 개성에 맞는 학습을 중시했다.4. 교사관- 오늘날의 국립대학 총장에 비견되는 성균관 대사성의 책무를 맡으면서 퇴선시대의 유교사상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 잡혀 있기 때문에 이를 알지 못하고는 우리의 교육사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며 앞으로의 교육에 대해서도 예측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이황의 교육사상은 근4세기가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미래의 교육이 나아갈 길을 제시해 줄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스승으로서의 모습과 성리학적 교육목적인 敬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스승을 공경했던 그 제자들의 모습은 교사와 학생이 서로 불신하고 공교육이 흔들리는 지금의 심각한 교육현실에서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7. 교육관련저서① 성학십도(聖學十道)- 성리학에 대한 연구의 성과를 대학수준의 내용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국왕을 대상으 로 하는 교육서이다.②「자성록」, 「태극도설」, 「퇴계집」 등이 있다.【 율곡 이이의 생애·사상·교육사상 】Ⅰ. 이이의 생애제1기 입지기(立志期 :1세부터 28세까지) : 선생이 시류와 도학(道學)사이에서 정신적 방황을 하다가 어머니 사임당과의 사별을 기점으로 마침내 홀로서기를 하고 금강산에서 하산한 후 삶의 큰 뜻을 세운 시기제2기 출사기(出仕期 : 29세부터 40세까지) : 호조좌랑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탁월한 시사의 진단과 처방으로 선조임금의 총애를 받던 시기제3기 은거(隱居)와 후진양성기(後進養成期 : 41세부터 45세까지) : 해주 석담에 은거하여 격몽요결, 경연일기 등의 집필활동과 사계 김장생 등 후진양성에 몰두하던 시기제4기 재출사기(再出仕期 : 46세부터 49세까지) : 다시 정계로 돌아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대비책을 마련코자 10만 양병을 주장하였다가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위 사람들에게 넌지시 가르쳐주는 등 그 동안의 경륜으로 민족과 나라를 위해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한 시기이다.성장과정1. 남다른 총명함- 율곡은 천재형의 학자이자 경세가로서 3세에 이미 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외할머니 이씨가 석류를 가리키며 "저게 무엇 같게?" 하고 묻자, 어린 율곡 책을 읽고 사색에 잠겼다. 그는 이 무렵 새삼 하는 회의에 빠졌다. 사람은 왜 태어나며 왜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 깊은 밤 적막한 산골에서 홀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해답을 구해 보았지만 도저히 풀 길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3년이 지나갔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가을 어느 날 울적한 심회를 풀길이 없어 발길 닿는 대로 거닐던 율곡은 뚝섬 강 건너 봉은사에 들렀다. 승방에 들어 스님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그는 경상 위에 놓여 있는 불교서적을 뒤적이게 되었고 그것은 이전에 볼 때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어쩌면 인생 문제를 풀어 줄 해답이 거기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듬해 열아홉 살 때 금강산 마하연으로 들어가 의암이라는 법명으로 불교 수행을 하였다. 머리를 깎고 가사 입은 스님이 되었는지 아니면 선비행색으로 절방에서 불교 공부만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하여튼 율곡이 인생의 삶과 죽음에 관해 번민한 나머지 금강산 절로 들어간 것은 분명하다. 율곡은 불교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진리를 찾지 못한 채 1년 만에 금강산을 나오게 된다. "내 가슴속에 산수가 있으니 이곳 금강산에 더 머물 필요가 없네"(胸中有山水, 不必於此留) - 등비로봉 -오히려 유교에 성인이 되는 길이 있고 남을 위해 일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이라는 것도 삶의 연장일 뿐 달리 터득할 기이한 이치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율곡은 산에서 나오는 길로 강릉 오죽헌에 들러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그리고 '자경문(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을 지어 뜻을 세우고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5.학문수업- 율곡은 23세 되던 해 봄 자신보다 35년이 연상으로 당시 58세의 노대가였던 이퇴계선생을 예안의 토계로 찾아가 뵙는다. 비록 머문 기간은 2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것이 율곡에게 있어 당시 유림의 종장과 최초로 갖는 대좌였던 만큼 율곡은 여기서 평소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히기도 하고 또 의문점을 질의도 하며 상당히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율곡의 학문수업은 어떤 일정다.
책소개서명 : 탈구조주의와 교육 Poststructuralism & educational research마이클 피터스.니콜라스 버불스 지음 / 심승환 역 / 교육과학사 / 2007.06.30- 목 차 -1. 들어가며2. 탈구조주의의 개념3. 탈구조주의와 푸코 - 권력/지식4. 탈구조주의와 데리다 - 이분법적 사고와 해체5. 탈구조주의적 교육연구 - 헨리 지루6. 나오며7. 참고문헌1. 들어가며‘탈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용어는 주로 예술 분야나 문학 영역에서 들어봤던 용어였다. 어렴풋이 팝아트나 패러디와 같은 조금은 파격적이고 형식이나 고정 틀을 깨는 형태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탈구조주의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탈구조주의와 교육’이라는 책을 읽고 내가 잘못 가지고 있었던 개념을 수정할 수 있었고 예술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 다양한 영역에서, 특히나 보수적이라고 여겨져 왔던 교육에도 탈구조주의적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실제로 책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탈구조주의에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교육에 있어 탈구조주의와 관련한 책은 거의 없었다. 또한 조금 연관성 있는 것이 있다 해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넓은 범위와 관련되어 있는 책들 이여서 직접적으로 탈구조주의와 연관된 자료는 찾기 힘들었다. 이러한 점에서 ‘탈구조주의와 교육’ 이라는 책은 탈구조주의를 교육과 연관 지은 보기 드문 시도이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번에 이 책을 접하게 되어 내가 가지고 있었던 교육적 시각에도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책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자료를 찾으며 느꼈던 것인데, 비교적 작은 페이지 수에도 불구하고 책안에 깊은 철학적 개념들이 담겨있고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또 한 번 놀랐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중점으로 하여 중간 중간에 내가 생각하는 바를 함께 이야기하려고 한다.2. 탈구조주의의 개념이 책을 읽기 전에는 구조주 시도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나, 탈구조주의는 ‘구조주의’를,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연구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제시하고 있어 일차적으로 구조주의와 모더니즘이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좀 더 포괄적인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서로 동의어도 아니고 반대어도 아니며 포스트구조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에 포섭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전에 내가 접해왔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는 주로 문학, 예술에서 접할 수 있었다. 포스트(post)는 ‘후’란 의미와 ‘탈’ 이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후기구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구조주의와의 연속적인 성격을 부각시키고 ‘탈구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구조주의에 대한 내부적 비판으로서 구조주의를 올바른 방향으로 진보시키는’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구조주의는 쏘쉬르와 자콥슨에 의해 구조언어학을 시작으로 하여 레비스트라우스의 인류학의 연구에의 적용에 이르기까지 번창하였다. 언어가 문법이나 어떤 규칙에 의해 구조화 되어 있는 것처럼 사회와 문화도 구조화되어 있다고 제안한다. 포스트구조주의라는 용어에는 해체주의라는 용어가 따라다니는데, 이것은 데리다에 의해 구체화 된다.3. 탈구조주의와 푸코 - 권력/지식푸코는 “권력/지식”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지식과 권력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둘은 결합체로 작용하고 권력/지식의 결합체가 권력에 이익이 되거나 반대되는 지식을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푸코는 지식은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담론 자체에 권력이 내재되어 있으며 담론 자체가 권력에 의해 생성되고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을 담론의 질서라 한다.권력은 사회전반에 흩어져 있으며 다양한 상호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 새로운 창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에는 진리가 있고 그 진리가 지식이며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공부이고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학 용어는 서양이 자기의 문화가 우월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베트남전에서도 정작 베트남인들은 침묵하고 있으나 미국은 미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자기 식으로 유리하게 해석해왔고 일방적으로 전해져 온 지식을 우리는 듣고 받아들여 왔었다. 또한 학교라는 장치 속에서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에 권력의 힘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 학교는 질서를 가르치고, 기존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지 감시하고 잘못했을 경우 벌이 가해지는 장치를 제공해왔다.한편 권력의 한 기제로서 시간표, 신체와 동작의 상관화, 시간의 철저한 활용, 시험, 제재의 규격화 등등 다양한 훈육의 기술이 발전하였다고 이야기한다. 병원, 감옥, 학교, 공장 등은 사람을 길들이고 통제하기 위해 이 훈육의 기술을 모델로 삼아왔다. 교사 또한 학교 안에서 정해진 시간과 계획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교육을 분석, 연구하고 비판하는 학자들은 훈육, 권력/지식, 텍스트에 대한 담론 분석에 집중한 푸코의 철학을 참고하여왔다. 탈구조주의의 관점에서 교육연구는 기존의 관점과는 색다른 시각을 제공한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듯 나도 학교는 가장 바른 교육을 실천하는 곳이며, 그 안에서 잘 적응하는 학생이 모범생이고 틀 안에서 교육하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어느새 머릿속에 박혀 온 것 같다. 푸코의 관점을 접하며 내가 당연하다고 받아 들였던 것들 이면에 문제점이 있으며, 정형화된 틀을 벗어날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4. 탈구조주의와 데리다 - 이분법적 사고와 해체해체는 탈구조주의적 비판의 한 형식으로서 데리다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 그것은 텍스트에서의 의미는 중심을 갖고 있거나 고정되어 있다고 보는 구조주의를 반박하고, 의미가 이항구분 이나 이항 대립 관계로 파악될 수 있다는 의견을 반대한다.서구 사상의 뿌리에는 정신/육체, 자연/문화, 남성/여성. 이성/광기, 합리성/감정 등으로 이분법적 체계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둘 중 앞에 것에 우위를 두고 뒤에 것은 배제시켜 왔던 포되고 시간상 유보되기 때문에 구조에 질서를 부여하는 이분법적 체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언어와 텍스트 사이에서 상호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탈구조주의 에서는 독서도 일종의 창조적인 행위이며 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텍스트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독자와 텍스트 간의 상호 작용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 진다. 읽기는 지적 생산물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기존의 지위에서 변화하여 탈구조주의에서는 일종의 능동적인 행위로 간주된다.이러한 탈구조주의 시각은 교육에 있어서도 기존의 관점에 큰 변화를 야기 시켰다. 텍스트에서 작가가 중심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독자의 관점과 생각을 존중해준다는 뜻이다. 독자가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의미가 변화되고 그런 다양한 의미에 대해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가능할 수 있겠구나 하고 인정해 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탈구조주의 관점은 학습자들에게 다양성을 강조하고 다문화주의의 관점을 고양시킨다. 이론을 수행하여 직접 경험해보도록 하는 웹사이트의 발달도 데리다의 사고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고, 읽기와 쓰기의 방식을 전담하는 폐쇄적인 학교를 열린 공간으로 만드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정보가 넘치는 현실에서 교사의 권위 또한 분산되고 전통적인 교실의 개념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데리다의 해체의 개념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안경 쓰고 흔히 말하는 ‘모범생처럼’ 생긴 예술가와 꾸미기 좋아하고 염색을 했으며,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 듯 한 정반대의 외모를 가진 예술가가 있을 때 두 사람 중 누가 학교를 중퇴하고 예술을 하는 사람일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들은 대게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의 고정된 사고가 드러난다. 한 단계 더 이상으로 생각하면, 모범생과 모범생이 아닌 사람의 이미지도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고 ‘학교를 그만 둔 사람은 나쁘다’라는 인식도 인간이 만들어낸 생각일 뿐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교육은 더 이상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부가 원하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정부에서 권하는 교과서를 가지고 정부가 권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해왔다. 이렇다보니 공교육은 획일적인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은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데리다의 해체의 관점, 탈구조주의적 관점을 적용하여 이러한 획일화와 다양성, 창조성의 억압에 대해 비판을 가하게 된다.교생 실습을 나가서 느끼게 된 것인데, 학생들의 개성이 너무 다양하고 지금까지 해온 공교육으로는 학생들 저마다의 개성을 살리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시간에는 수업을 잘 듣지도 않고 떠들고 장난쳐서 선생님께 항상 지적받고 벌 받곤 했던 학생들이 학교 축제 에서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역량을 훌륭하게 발휘하는 것을 보며 학생들에게 는 저마다의 능력이 있고 선생님의 잣대나 지금까지 모범생이라고 여겨져 왔던 모습을 학생들에게 일률적으로 대입하여 평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전에 가져 왔던, ‘수업을 바른 자세로 잘 들어야 착한 학생이다’ 와 같은 고정관념, 이분법적 사고가 해체에 의해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생각이 좀 더 확장되고 교육을 연구하는 사람, 교사들, 정부를 비롯한 권력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현재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교육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탈구조주의 시각들은 현대교육에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현재 교과서를 보면 실험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실험을 통해 답을 도출해냄으로써 학습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어 예전의 주입식, 일방적인 전달에 의한 교육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참여를 유도하고 스스로 답을 얻도록 하는 방식은 탈구조주의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미디어학교, 디지털학교, 컴퓨터 학교, 세무 고등학교 등 과거보다 특성화 고등학교가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