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MBC 특별기획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라고 표지에 노란색 배경으로 박혀져 있다. 한 때 유명했던 TV 프로그램이다. 나 역시도 어릴때 보고 자란 프로그램으로서 그 당시에는 대중들에게 책을 읽자는 운동적인 프로그램이였다. 거기서 선정한 도서란 의미는 확실하게 검증받은 책이란 뜻이다. 내가 검증을 받든 안 받든 이 책은 북리뷰 도서로서 반드시 읽었어야 겠지만, 그 문구 하나가 책을 읽는 나에게 단순히 북리뷰 도서로서 읽는다는 느낌이 아니라 꼭 도움이 되는 책이 될 것을 기대하게 했다. 또 지금까지 이런 한국 전통 고전 미술이나 건축미에 대해서 책을 읽어 보거나 알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다. 기억에 남는 도서가 한권도 없는 것을 보면 이 종류의 도서는 처음이라고 판단 내려진다. 건축학과 학생으로서 이번 기회에 읽게 되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우선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글을 쓴 작가가 정말 세심한 사람이란 것이 느껴졌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는 풍경을 보통사람들은 ‘ 아 이쁘다 ’ 라고 느낀다 라고 가정한다면 작가님은 그 풍경에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이나 꽃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보고 느껴지는 것을 솔찍하게 느낄 것 이다. 그리고 그 느낌을 정확하게 글이나 말로써 표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릴 때 모두 한번 씩은 불국사를 가봤을 것이다. 지금도 딱 떠오르는 생각은 다보탑, 석가탑 끝이다. 여기서 책을 잠깐 인용해보면,-조용한 시간을 틈타서 이 뜰을 거닐 때면 언제나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생각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손에 안 잡히는 나의 그리운 사람은 차라리 보살 부처이기나 했으면 좋겠거니 생각하노라면 나는 금세 눈시울이 더워오곤 했다. -이처럼 그저 지나가는 뜰을 바라보면서도 스스로 많은 감정을 느끼고 쉽게 지나치는 돌 하나 하나를 보면서 그 돌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줄 아는 것을 보았다. 이 것이야 말로 내가 배워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생각 할 때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 뜻은 아무리 행복한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이 행복을 느끼지 못 한다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란 말이다. 위에 불국사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글을 적은 작가의 시선을 180도 다르다. 작가의 이런 세심하고 감정적으로 묘사 한 부분이 책을 읽으면서 한층 더 몰입시켜 주었다. 이것은 불국사 뿐만이 아니라 이 책에 있는 모든 한국의 자연 미를 나타내고 묘사하는 부분에서 드러난다.또 예를 들면 한국미의 산책에 연경당에서를 보자.-연경당 넓은 대청에 걸터앉아 세상을 바라보면 마치 연보라빛 필터를 낀 카메라의 눈처럼 세월이 턱없이 아름다워만 보인다. 이렇게 담담하고 청초하게 때를 활짝 벗은 우리 것의 아름다움 앞에 마주서면, 아마 정말 마음이 통하는 좋은 친구를 만났을 때처럼 세상이 저절로 즐거워지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왕자의 금원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니 어디인가 거추장스러운 우엄이나 호사가 물들었을 것 같기도 하고 궁원다운 요염이 깃들일 성도 싶지만 연경당에는 도무지 그러한 티가 없다.-여기도 마찬가지로 그저 넓은 대청에 걸터앉아서 바라본 것 뿐일 수 있는 것을 작가는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표현 했다. 일반 사람들은 그저 지나 칠 수 있는 것이고 여기서 저 감정을 못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 이다. 정말 저렇게 느낄 수 있을 까 하는 호기심에 인터넷으로 사진을 검색 해 보았다. 역시 직접 가서 보는 것 보단 못 하겠지만 사진으로 나마 본 결과 확실히 선이 굵고 진하게 느껴지는 지붕에서 세삼 우리의 것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것 중에 이런 호기심을 자극 시켜서 찾아가 보고 사진을 보는 것으로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 알리는 것 역시 포함되어있다.정말 더 놀라운 것은 이 책은 그저 건축물 뿐만 아니라 불상, 석탑, 공예, 토기, 도자기, 회화에 까지 다방면에서 우리미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사실 도자기나 공예, 회화에 대해서는 정말 하나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읽으면서도 기초지식을 습득할 수 있어서 좋았다. 고려 조선 시대에 걸쳐서 엄청 나게 많은 종류의 유물이나 유적들이 발굴 되었다. 이 책에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말 조금만, 진짜 필요한 것만 소개 되어지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진다. 무식한 나에게는 몇 개 안 되는 이 것도 머릿속에 다 들어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중에 기억하고 싶은 몇 가지만 소개해 보겠다.이 사진은 청자석류주전자다. 12세기 초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책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나와있지만 솔찍히 읽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저 저 시기에 저렇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기술에 감탄했다. 이 석류주전자가 고려 도공들의 공예 조각 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예의 하나이다. 데테일하게 무늬 하나 하나를 정교한 솜씨로 나타낸 이 청자석류주전자는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다.이 사진은 하화탈의 양반탈이다. 탈에는 마을사람들의 오랜 소망과 시름, 그리고 울분과 익살이 함께 겹쳐져 있다. 탈을 쓰기전에는 신분에 나늰 시대에서 입이있어도 함부로 말 을 못 하지만, 봉산탈춤의 말뚝이의 푸념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 밑바닥 사람들의 웃음과 눈울이 얼룩진 모습들을 이 탈에서 볼 수 있다. 이 탈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는 있지만은 자세히는 모른다. 나도 그랫다.
BOOK REVIEW* 간디 자서전 을 읽고...간디 . . . 많이 들어봤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쭉 들어왔지만 그 분이 어떤 사람인지 . . . 어떤 일을 하셨는지 모르고 23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냥 비 폭력 주의 비 폭력 주의 . . 그 정도로 짧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번 서양건축사의 북리뷰를 준비하면서.. 간디 자서전을 읽고 그 분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이 알아볼 수 있겠구나, 그 분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 보고 내가 가진 지식을 보충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간디의사진제가 책에서 본 간디라는 사람은 우리 나라의 시대적 배경과는 너무나 달라 서 이해하는 부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간디는 1869년 ~ 1948년 인도 민족 운동의 지도자이자 사상가 ‘마하트마’ 라는 존칭을 불리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다.여기서 마하트마라는 말의 뜻 은 위대한 혼, 큰 상인 이라는 뜻 이다. 그의 집 안 배경은 아버지는 유능한 행정가였고, 어머니는 비폭력을 중시하고 도덕적으로 매우 엄격한 종교를 믿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이런 가정환경 속에서 간디는 아힘샤와 채식주의, 자기 정화의 단식, 그리고 모든 종파의 상호 관용을 배우면서 자랐다. 또한 대학을 런던에서 나왔으며, 그 곳에서의 생활은 간디의 인격과 정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 1893년 변호사의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으며, 1893년 1년간의 계약으로 부인과 함께 남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의 인도 사람이 이주해 있었는데 백인에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 거기에 사는 인도 사람의 지외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 자 결심하고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에 대한 인종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조직, 1914년 까지 그는 지도자로 활동하였다.여기서 제가 느낀 점이 아무리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 일 지라도 그 상황에서 다수의 편 보다 소수의 편을 선택 하는 것은 교육과는 별개로 정신적인 부분이나 사상적인 부분이 남들 과는 다른 것을 느겼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에서 친하게 지내던 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불량 학생들에게 맞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가서 하지말라고, 괴롭히지 말라고 해야된 다는 것을 머리 속에서는 교육을 받아서 알고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이 되자 그 말을 실천 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비겁하게 못 본체 하며 집으로 돌아간 기억이 납니다. 제 생각에는 제 행동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간디는 달랐습니다.간디가 지도자로 활동 하면서 처음으로 ‘사티아그라하’가 생겨났습니다. 이 것은 적대자들에게 원한과 투쟁, 폭력을 쓰지 않고 저항해 그것으로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새로운 방법이다. 이후 사태가 보여 주듯 그는 아프리카의 인도인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감춰진 특별한 능력을 찾아 냈으며 일약 세계의 간디가 되었다. 1915년에 모국에 돌아온 그는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지만, 정치 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그러나 1919년 민중 탄압법인 롤라트 법이 제정되자 영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선언하고, 곧 봉기가 일어나 펀자브에서 400명에 달하는 인도인이 영국군에게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다시 투지를 갖고 일어나 1920년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간디는 인도 국민 회의를 민족주의의 효율적인 정치 기구로 바꿔 놓아 대도시의 중산층부터 시골의 작은 마을에 이르기 까지 대중 조직을 갖추게 하였다. 그는 영국 정부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이 운동으로 인도 민중이 갖고있던 외국 지배자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인도 각지에서 유열 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그 동안 간디는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왔으며, 1924년부터 1년간 국민 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었으면서 인도인이 자력으로 농총 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1929년의 연차 대회에서 국민 회의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 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가 된 간디는 1930년 3월 소금세 신설에 반대하여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시작하였다. 영국 통치에 대한 간디의 비폭력 운동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운동에서 6만명 이상이 투옥되었다. 1년 뒤 간디는 어윈 총독과 협살아여 반영 불복종 운동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간디-어윈 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 정책을 쓰는 영국 장국에 항의하기 위한 복복종 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가 1932년 석방된 이후부터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에 진력하였다.영화로도 제작-영화 간디-여기에서 시대적 배경이 현 우리 시대와는 다른 것을 확연히 느겼다. 카스트의 계급을 알아보면 최상층은 브라만 (승려), 크샤트리아 (귀족 또는 무사), 바이샤(평민 또는 상인), 최 하층은 수드라 (수공업자 또는 노동자)이다. 각 계급의 사람들은 직업 음식 습성 풍속에 의해 오렴되며 그 결과 의식상에서도 오렴된다는 말도 안 되는 법이다. 또 가장 불결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수드라 밑에 ‘불가촉 천민’으로 분류되었다. 이들이 바로 하리잔, 즉 ‘신의 아들’로 불리며 이 이름은 간디가 그들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이처럼 다른 시대 적 배경으로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다.
BOOK REVIEW* 글쓰기와 COMMUNICATION 이동월 교수님건축학과08110342구현모* 간디 자서전 을 읽고...간디 . . . 많이 들어봤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쭉 들어왔지만 그 분이 어떤 사람인지 . . . 어떤 일을 하셨는지 모르고 23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냥 비 폭력 주의 비 폭력 주의 . . 그 정도로 짧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 리뷰 목록에서 ‘간디 자서전’이라는 이름을 봤을 때 아 이번 기회에 간디 자서전을 읽고 그 분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이 알아볼 수 있겠구나, 그 분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 보고 내가 가진 지식을 보충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제가 책에서 본 간디라는 사람은 우리 나라의 시대적 배경과는 너무나 달라 서 이해하는 부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간디는 1869년 ~ 1948년 인도 민족 운동의 지도자이자 사상가 ‘마하트마’ 라는 존칭을 불리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다.여기서 마하트마라는 말의 뜻 은 위대한 혼, 큰 상인 이라는 뜻 이다. 그의 집 안 배경은 아버지는 유능한 행정가였고, 어머니는 비폭력을 중시하고 도덕적으로 매우 엄격한 종교를 믿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이런 가정환경 속에서 간디는 아힘샤와 채식주의, 자기 정화의 단식, 그리고 모든 종파의 상호 관용을 배우면서 자랐다. 또한 대학을 런던에서 나왔으며, 그 곳에서의 생활은 간디의 인격과 정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 1893년 변호사의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으며, 1893년 1년간의 계약으로 부인과 함께 남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의 인도 사람이 이주해 있었는데 백인에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 거기에 사는 인도 사람의 지외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 자 결심하고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에 대한 인종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조직, 1914년 까지 그는 지도자로 활동하였다.여기서 제가 느낀 점이 아무리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 일 지라도 그 상황에서 다수의 편 보다 소수의 편을 선택 하는 것은 교육과는 별개로 정신적인 부분이나 사상적인 부분이 남들 과는 다른 것을 느겼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에서 친하게 지내던 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불량 학생들에게 맞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가서 하지말라고, 괴롭히지 말라고 해야된 다는 것을 머리 속에서는 교육을 받아서 알고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이 되자 그 말을 실천 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비겁하게 못 본체 하며 집으로 돌아간 기억이 납니다. 제 생각에는 제 행동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간디는 달랐습니다.간디가 지도자로 활동 하면서 처음으로 ‘사티아그라하’가 생겨났습니다. 이 것은 적대자들에게 원한과 투쟁, 폭력을 쓰지 않고 저항해 그것으로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새로운 방법이다. 이후 사태가 보여 주듯 그는 아프리카의 인도인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감춰진 특별한 능력을 찾아 냈으며 일약 세계의 간디가 되었다. 1915년에 모국에 돌아온 그는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지만, 정치 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1919년 민중 탄압법인 롤라트 법이 제정되자 영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선언하고, 곧 봉기가 일어나 펀자브에서 400명에 달하는 인도인이 영국군에게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다시 투지를 갖고 일어나 1920년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간디는 인도 국민 회의를 민족주의의 효율적인 정치 기구로 바꿔 놓아 대도시의 중산층부터 시골의 작은 마을에 이르기 까지 대중 조직을 갖추게 하였다. 그는 영국 정부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으로 인도 민중이 갖고있던 외국 지배자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인도 각지에서 유열 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그 동안 간디는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왔으며, 1924년부터 1년간 국민 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었으면서 인도인이 자력으로 농총 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1929년의 연차 대회에서 국민 회의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 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가 된 간디는 1930년 3월 소금세 신설에 반대하여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시작하였다. 영국 통치에 대한 간디의 비폭력 운동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운동에서 6만명 이상이 투옥되었다. 1년 뒤 간디는 어윈 총독과 협살아여 반영 불복종 운동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간디-어윈 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 정책을 쓰는 영국 장국에 항의하기 위한 복복종 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가 1932년 석방된 이후부터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에 진력하였다.여기에서 시대적 배경이 현 우리 시대와는 다른 것을 확연히 느겼다. 카스트의 계급을 알아보면 최상층은 브라만 (승려), 크샤트리아 (귀족 또는 무사), 바이샤(평민 또는 상인), 최 하층은 수드라 (수공업자 또는 노동자)이다. 각 계급의 사람들은 직업 음식 습성 풍속에 의해 오렴되며 그 결과 의식상에서도 오렴된다는 말도 안 되는 법이다. 또 가장 불결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수드라 밑에 ‘불가촉 천민’으로 분류되었다. 이들이 바로 하리잔, 즉 ‘신의 아들’로 불리며 이 이름은 간디가 그들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이처럼 다른 시대 적 배경으로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