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낭만주의의 원어인 'romanticism'은 'romantic'이란 말에서 온 말이며 그것은 'romance'에서 유래한다. 즉 기사도, 모험 및 애정의 이야기들과 관계되어 있었으며 허황한 감정과 비개연적인 과정 및 비현실성과 같은 것, 곧 건전하고 합리적인 인생관과 정반대되는 요소들로 특징지어져 있었다. 로망스는 기이하고 가공적이며 경이적인 것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로망스는 등장인물(신비의 보물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기사들, 고독한 영웅들), 풍경(폐허, 절벽, 폭포), 감정(우수, 정열, 자연에 대한 심취) 등 모든 면에서 낭만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최초로 이 말을 문학사에서 쓴 이폴리트테는 낭만주의 작가들이 고전적인 것과 대조되는 당대성을 지닌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넓은 의미로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 전체에 걸쳐 서구에 나타난 문예사조이며 좁은 의미로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사이에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나 서구의 주관적이고 개성적이며 공상적, 상징적, 신비적, 초자연적, 혁명적인 특성을 지닌 문학예술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대체로 후자에 중심을 두고 개념을 사용하지만 추상적인 초시대적 사조로서 일반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독일의 폭풍 노도 운동에서 시발점을 찾으며 프랑스 혁명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혁명적 낭만주의와 병적 낭만주의를 구분하기도 한다. 전자는 사회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에서 나온 문학이며 후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침체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으로 도피하려는 지향을 보이는 등 퇴폐적인 성향이 두드러진다.Ⅰ. 낭만주의 발생의 사회적 조건1.사회적 배경낭만주의가 발생한 배경은 산업혁명(18C 중엽)과 프랑스혁명(1789년)에서 전형적인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산업혁명은 발달한 과학기술을 생산에 이용하여 대량생산을 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을 가능케 하였다. 이 자본주의 사회는 생활의 합리화와 도시적 삶을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서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는 방편이기도 하였지만 전통적인 삶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낭만주의는 이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태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한편 프랑스혁명은 사회체제를 민주적인 제도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으며 사회의 진보를 촉진하는 계기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혁명의 진전 과정에서 여러 부정적인 측면이 노출되기도 하고 예측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는 양상이 나타나면서 이에 대한 환멸이 낭만주의를 촉진하기도 하였다. 즉 합리화 되어가는 사회, 도식적인 생활, 부르주아적인 생태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낭만주의의 배경을 형성하였다.2.사상적 배경낭만주의의 사상적 배경은 고전주의와 함께 나타난 계몽주의에서 찾는 경우도 있지만 통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로 유명한 루소의 사상에서 기원을 찾는다. 루소는 모든 불행과 죄악의 원인이 문명에 있고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선하고 완전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것은 전시대의 철학자들이 전능한 이성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과 대비되는 양상으로서 루소는 사회진보를 믿지 않았으며 사적 소유권에 의해서 원시적인 자유와 평등이 깨졌다고 보고 자연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즉 사회 계약에 의해 달성되는 인간의 문화적 성과와 도덕적 자유에 의한 평등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즉 사회 계약에 의해 달성되는 인간의 문화적 성과와 도덕적 자유에 의한 평등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루소는 인간의 기본 性徵이 이성보다 감성에 있음을 주장하여 낭만주의의 인간관을 선취하였다.Ⅱ. 낭만주의시대의 문학이론낭만주의는 고전주의의 규범성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다. 이에 따라 어떤 이론이 먼저 제시되고 낭만주의 문학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시인, 작가, 비평가들의 활동에서 낭만주의에 고유하다고 할 수 있는 공통적인 문학관을 살펴 볼 수 있다.1.감정의 표현고전주의가 감정의 절제를 주장한 데 비해서 낭만주의는 감정과 상상력을 마음껏 표출하도록 장려한 측면이 강하다. 루소는 에서 '한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의 진실을 꾸밈없이 보여 주고자 한다'며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고, 영국의 시인 워즈워스는 '모든 좋은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 발생적 유출이다'고 말하였다. 즉 낭만주의 시인 작가들은 상상력을 통해 자아의 감정을 인식 대상물을 보다 큰 전체로 통일시켜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주고자 했던 것이다.2.천재론낭만주의자들에게 문학은 더 이상 현실에 있는 것의 재현이 아니었다. 감정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상상력에 의해 생명력 있고 창조력 있는 힘으로 심미적 균형과 통일을 나타내며 주관과 객관, 현실과 이상. 감각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의 시인 블레이크가 말했듯이 상상력은 궁극적 실재를 창조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이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동이 가장 뛰어난 존재가 독창성을 지닌 천재들이고 고전주의의 모방 원칙과 대조적인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에게서 모방은 기왕의 소재를 가지고 제작 기술이나 노력을 통해 만들어 내는 데 비해 천재는 반항적이고 초인간적이며 신적인 거인으로 신적인 영감 순간적 인상과 직관에 의해 일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실제의 깊이에 도달하는 존재였다. 즉 고전주의에서 천재가 좀 더 세련된 교양, 더 높은 지성에 의해 특정 지어지는 인물이었다면 낭만주의에서는 일상의 논리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물상과 꿈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이상화된 인격의 소유자였다.3.상징과 암시낭만주의는 감정 표현론과 천재론을 주장함으로써 표현수법에 있어서 상징과 암시를 중시하게 된다. 특히 낭만주의 대표적인 장르인 서정시에서의 상징과 암시는 창조적 변용력의 중심이었다. 독일의 슐레겔은 낭만주의가 표현하는 초월적인 것은 오직 이미지와 기호를 통해 상징적으로만 밝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4.민족 문화의 강조낭만주의는 시어로는 일상생활에 쓰이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며 민족의 전설적인 과거를 되살려 주제를 다양화해야 한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이는 현실의 정치를 비롯한 기존 질서에 대한 회의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즉 이는 낭만주의 문학작품에 있어 이야기 줄거리가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을 만들어 내었다. 첫째, 주인공들의 사랑이 너무 강하고 이상적이어서 현실의 삶에서 그 실현이 불가능하여 이 이상적인 사랑을 영원히 실현할 수 있는 죽음을 선택하는 이야기, 둘째, 주인공들의 삶의 공간이 너무나 권태롭고 이상적인 장소와는 거리가 멀어 자신의 감상주의를 채워 주는 장소를 찾아 여행을 하는 이야기. 셋째로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재가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주인공들이 신비스럽고 모험이 많은 중세로 옮겨가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끝없이 움직이며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남성적인 성격보다는 여성적 특성을 지니며 따라서 역동적이기 보다 섬세하며, 현실은 가능한 이상화되어 있다.Ⅳ. 한국문학의 낭만주의1920년대 《백조(白潮)》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한국의 낭만주의 문학은 유럽의 감상주의?허무주의?퇴폐주의 등 여러 가지사상이 혼류되어 있어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한국 근대문학 초기의 낭만주의적 경향은 서구 문학사에서처럼 정상적인 발전과정을 밟아온 낭만주의의 문학사조와는 달리,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한국의 낭만주의는 국권상실과 3?1운동의 실패로 인한 절망감과 새 출발의 고갈에서 비롯한 감상과 흥분, 또한 그 도피구(逃避口)로서 몽상(夢想), 근대화의 맹아를 제대로 피우지 못한 상태에서의 일본을 통한 세기말적 사상과 서구 낭만주의의 수입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자율적인 문학사의 전개과정상에서 근대문학형성의 한 과정으로 성립된 문화현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나는 왕이로소이다-홍사용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 하는 그 소리였지마는, 그것은 '으아!' 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님의 말씀인데요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님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그 날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도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는 아무 대답도 없이 속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발가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그 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으스름 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 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 버렸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김남천의 작품 - ‘맥’, ‘사랑의 수족관’ 작품분석 고찰목 차Ⅰ. 서론Ⅱ. 김남천의 생애Ⅲ. 김남천의 이념Ⅳ. 김남천의 통속성Ⅴ. 김남천의 작품특성Ⅵ. 김남천의 맥 작품분석Ⅶ. 김남천의 사랑의 수족관 작품분석참고문헌Ⅰ. 서론1930년대 중반(상징적인 해가 카프가 해산한 1935년이다)을 기점으로 하여, 1930년대 전반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사상적 대립의 시기로 규정하고, 1930년대 후반은 이러한 사상적 대립이 해체되면서, 다양한 문학적 경향의 발전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가설은 1930년대 후반의 문학이 지니고 있는 사상성의 성격을 문제 삼지 않음으로 해서, 실상 우리 문학사를 바라보는 기준틀의 자의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문학 양상의 변화를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할 것인가는 단지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연구자가 지니는 세계관의 문제이며, 또한 역사 발전(혹은 변화)의 기본적인 원리의 문제이다. 이러한 연구들은 우리 문학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특징을 파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또한 현상적인 접근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의 연구에서는 문학사를 바라보는 시각, 혹은 문학사의 변화를 규정하는 기준 자체를 193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우리 문학사의 발전을 바라보는 기준을 혼동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1930년대 후반을 사상적 대립이 해체되는 시기이면서 동시에 ‘무사상’의 시기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사상이라는 것이 명료한 자기 체계를 갖춘 것이거나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야말로 사상에 대한 천박한 이해에 그칠 것이다. 게다가 사상적인 대립의 부재가 참된 문학적 발전, 혹은 다양하고 풍부한 문학적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인식은 실상 사상과 문학을 대립시키고자 하는 연구자의 무의식적인 의도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 사상 없는 문학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이미 잘못된 대립을 전제하는 것이다. 문학과 삶의 잘못된 이원론, 혹은 삶과 사상의 이원론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24세)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에 연류 되었으나 1차 때 검거 및 투옥되었던 전력과 건강 사정이 감안돼, 불구속 송치 처분을 받음. 이해 「어린 두 딸」「우리들」(1934년 8월)을 발표한 뒤, 계속하여 「감돈된 사나이」「聲」을 썼으나 발표하지는 못했다.?1935년(25세) 임화?김기진과 상의 끝에, 임화와 함께 5월 21일 카프 해산계를 경기도 경찰국에 제출. 카프 해산 직후 김남천은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취직. 신문기자 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T일보사」(『인문평론』, 1939년 11월)를 썼다.?1937년(27세) 「처를 때리고」(『조선문학』, 1937년 6월), 「춤추는 남편」(『여성』, 1937년 10월), 「요지경」(『조광』, 1938년 2월)을 비롯하여 「비판정신에의 대망과 논쟁과정의 중요성」(『조선일보』, 1937년 4월 6일)등의 평론을 발표하면서 왕성한 문학 활동을 전개.?1939년(29세) 『조선일보』에 장편『사랑의 수족관』(1939년 8월 1일 ~1940년 3월 3일을 연재. 장편소설 『대하』(1939년)가 인문사에서 간행. 이 시기에는 또한 김남천이 작가의 문학적 실천의 방법론을 모색하고자 고발 문학론, 모랄론, 로만 개조론, 관찰 문학론으로 이어지는 창작 방법론의 전개와 함께 「누나의 사건」, 「무자리」, 「가애자」, 「미담」 그리고 『대하』에 이르게 됨으로써 작가 생활의 절정기라 할 수 있다. 이 무렵 필명으로 김남천 외에도 파붕(巴朋) 혹은 파붕생이란 아호로서 단편적인 글을 몇 편 발표하기도 하였다.?1940년(30세) 일기체 소설「노고지리 우지진다」(『문장』, 1940년 6~7월)등의 단편과 연작 중편과 장편소설 『사랑의 수족관』을 인문사에서 출간.?1942년(32세) 단편 「등불」(『국민문학』, 1942년 3월)과 중편 「구름이 말하기를」(『조광』, 1942년 6~11)을 연재.?1943년(33세) 일본어로 『국민문학』에 발표한 단편 이외에는 평론활동마저 전무한 현상을 드러낸다. 『조광』에 「신의에 대하여」를 발표한 이래 일제 강점영이 맺고 있는 관계를 기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문영진은 이러한 한계를 작품 구조, 인물, 작품에 반영된 세계, 독자에 대한 작용이라는 네 가지 항목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지적 중 본고의 문제의식에 비추어 볼 때 중요하게 거론될 수 있는 것은 ‘추상적 인물의 창조’와 ‘문학관, 대중관, 실천에 대한 태도’로 정식화된 마지막 두 가지 항목이다. 그에 의하면 이 소설들의 작중 인물이 가지는 추상성은 세계의 왜곡으로 이어지며, 이렇게 왜곡되어진 세계를 형상화한 소설이란 “실재의 현실이 아니라 작가의 관념이 빚어낸 당위적 현실이 제시된 ‘허위의 리얼리즘’”이다. 이는 구체적 대중과의 변증법적인 관련은 지워진 채 오직 전위(혹은 작가의 관념적 의식)에 의해 파악되고 제시된 세계이자 결국은 작가의 관념에 의한 환상적 세계-계급투쟁의 승리를 통한 혁명의 실현-가 실재적인 현실을 본질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렇듯 작가의 자아에 의한 현실의 왜곡이란 작가가 현실과 주로 관념적으로만 교섭하고 있었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작가의 관념성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예외 없이 이념형이라는 점에서도 역시 확인될 수 있다. 이념형 인물이란 하나의 이념을 여과 없이 그대로 투사하고 있는 일종의 ‘날 것’일 뿐이지 결코 ‘살아있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이는 한 인간의 생존을 위한 행위들 즉, 존재자로서의 존재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이 사상되어 버린 까닭이다.나날의 삶을 살아가는 한 개인에게 있어서 일상적 삶이란 존재론적으로 벗어날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이다. 즉 모든 사람은 생존을 위해 먹고, 마시며, 잠을 자고, 자손의 번식을 위한 생식 활동을 하게 되며, 다른 사람들을 만나 서로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것은 사회적 삶을 살아가는 한 개인의 생존을 위한 기본 구조일 것이다. 가정(혹은 가족관계)이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존을 위한 장(場)으로서 일 것이다. 이 가정 속에서 개인은 여러 가지군림하고 있는 주인의 형상으로서, 근본적으로 타자를 대상화시키고 정복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자기동일적 이성에 의한 철학적 유아론(唯我論)일 뿐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사로잡혀 있는 주체의 유아론적 구조 내에서 일상적 삶이라는 타자는 그 의미를 잃게 되고 단지 주체의 내면성으로서만 의미를 지닐 뿐이며 따라서 이 때의 맑시즘이라는 이념은 한 개인의 내밀한 자의식 내에서의 유토피아적 투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김남천의 소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이념의 우위에 의한 일상적 삶의 부정’으로 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타자로서의 일상적 삶을 철저히 배제한 결과라 할 수 있다.이러한 절대적인 이념성에 대한 반성의 단초가 제시되는 것은 에서부터이다. “작품을 결정하는 것은 작가이며 작가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혹자의 이론보다도 그 당자의 실천”이라고 주장하는 김남천의 언급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내세우고 있는 ‘실천’이 가지는 의미 층위가 될 것이다. 일단 김남천의 이러한 ‘실천’ 개념이 구라하라 고레히토의 리얼리즘론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나온 아마카스 세키스케(甘粕石介)의 藝術論 에서의 논의를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는 점은 주목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김남천은 아마카스의 ‘예술가의 창작적 실천’과 창작 활동을 떠난 예술가의 개인적 체험(감옥 체험)을 동일시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김남천의 이러한 착오는 일면 작가적 실천과 개인의 계급적 실천을 동일 선상에 두는 일원론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문학가의 구체적 생활을 문제 삼은 것으로서, 일상적 삶을 관념적으로만 부정하면서 이념을 절대화시켰던 당대의 카프 문학자의 지적 자의식에 대한 반성 즉, 카프 시기의 관념성에 대한 반성의 측면을 가지는 것이다. 이렇듯 그가 개인적 체험의 영역을 우선시함으로써 카프 해산 이후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일상적 삶에의 대응의 노력들이 일제라는 외적 강압에 의한 타율적·수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의식적인 반성의 계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이러회의 질곡을 헤쳐 나가는 개인의 영웅적인 운명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영웅적이란, 서사시나 아니면 중세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영웅을 말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결국 임화가 말하는 것은 한 개인이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향해 나가는 ‘투쟁’인 것이다. 그 투쟁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든지 그것은 개인과 사회와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 임화는 이 개인과 사회의 싸움 속에서 한 개인이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운명 속에서 한 개인이 역사와 만나는 자리, 그리고 사회와 만나는 자리가 생기는 것이다.그러나 김남천은 임화와는 다른 자리에서 통속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김남천은 소설 속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하고 있기는 하지만, 소설은 임화처럼 현실과의 길항에서 오는 개인의 운명의 기록으로 보지는 않는다. 김남천은 임화의 논의가 주인공에게 사상이나 관념을 부여함으로써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김남천이 이러한 임화의 ‘주인공=성격=사상’론에 대해 맞세운 것이 ‘세태=사실=생활’의 도식이었다. 이러한 ‘세태=사실=생활’의 도식이란 “풍속과 사실과 생활이 허무주의적인 색채를 띠면서 부각될 수 있는 것이……일층 소중하였던” 김남천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었다.Ⅴ. 김남천의 작품특성?오월? 계열과 ?녹성당? 등의 소설들에게서 보여 지는 일상적 삶의 인식은 그러나 곧바로 일상적 삶의 수용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그것은 식민지 치하의 당대 현실에 있어서 일상적 삶이라는 타자를 수용한다는 것은 동일하게 타자로서 부정했던 파시즘 역시 수용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철에 의해 제기된 은 바로 파시즘이라는 타자를 사실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은 문단 내적으로 김동리·허준 등과 유진오·임화·서인식 등의 사이에서 벌어진 으로 귀착된다. 30대의 기성 문인과 신진 작가 사이에 벌어진 이 은 순수 대 비순수라는 일종의 모랄론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를 감상하고 나서...조제에게 있어서 외출(산책)이라는 것은 바깥세상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한 것을 보거나 느끼려고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일상적인 것(꽃이나 고양이)과의 만남을 원하는 것이다. 츠네오가 웃듯이, 그것들이 너무 평범하더라도 조제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소중한 것이고, 그래서 조제는 더 나가고 싶은지도 모른다. 책에서만 보던 세상이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우선 장애인들의 신체가 그들을 속박한다. 한 번의 외출을 위해서는 동행자가 필요하거나 휠체어 같은 장비가 필요하다. 그뿐 아니라 집밖을 나가면 무수히 많은 계단과 언덕 그리고 턱이 그들의 이동을 힘들게 한다. 우리가 10분에 갈 수 있는 거리를 장애인들은 힘겹게 30분 이상씩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의 시선이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장애인들은 그들의 신체적 특성 때문에 다른 비장애인에 비해 더 눈에 띄는 편이다. 비장애인은 장애인들을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고 기피한다. 때로는 그저 호기심으로 접근하기도 하는데 장애인에게 그런 모습들은 더 큰 상처를 남긴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장애인들은 자신들을 부끄럽게 여기고 더욱 자신들의 모습을 숨기려고 한다.이 영화에서 조제의 할머니는 장애인 손녀가 있다는 것이 동네 사람들(즉, 비장애인인 사람들)에게 보여 지기 부끄럽고, 수치로 느끼기 때문에 낮이 아닌 이른 새벽에 외출을 한다. 낮은 시간적으로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 밝고 당당한 의미로 다가오는 반면 새벽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어둡고 은밀한 의미로 느껴진다. 즉 조제와 조제의 할머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새벽에 몰래 산책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제약으로 인해 세상은 언제나 단절되어 있다. 조제가 외출할 때 칼을 들고 가는 모습을 통해 더 절실히 알 수 있다. 단절되어 있는 세상에 조제가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제에게 외출이라는 모험에 있어서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사회적인 보호 또아하는 꽃과 고양이를 보기 위해 타인의 힘(할머니)을 빌려 무던히 시도한다.영화 초반부에 츠네오와 조제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은 조제에게 있어 산책이 어떤 의미 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제는 손에 칼을 든 체 유모차 속에서 담요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조제에게 있어 산책은 위험한 모험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하다. 츠네오가 조제의 뺨에 상처가 나있는 것을 보고 이제 산책을 그만하라고 이야기 하지만, 조제는 “여러 가지 봐야할게 많아. 꽃이랑 고양이랑..” 라고 말하며 산책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는다. 비장애인인 츠네오의 입장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산책을 하겠다는 이유가 고작 꽃이랑 고양이를 보기 위해서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조제의 입장에서는 비장애인의 눈에는 하찮은 것들도 자신에게 소중한 의미이기에 아무리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칼을 가지고서라도 산책을 계속 한 것이다. 츠네오가 조제를 데리고 산책을 하다가 넘어지게 되는데, 조제는 하늘을 바라보며 저 구름도 집에 가져가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 의미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할머니 몰래 산책을 하고 돌아온 후, 조제는 할머니께 꾸지람을 듣는데, 이 부분에서도 조제의 산책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할머니는 “너는 주제를 알아야지 너는 몸이 불편하잖아 몸도 불편한데 조심하고 살아야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남노는 대로 놀다간 벌 받는다.”라며 조제를 나무라신다. 할머니 입장에서는 조제의 산책이 사람들 눈에 띄어 장애인 손녀가 있는 게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장애가 있는 손녀가 괜히 집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게 못 마땅하고 걱정도 된다. 하지만 방에서 할머니가 주워주신 책으로만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조제에게는 산책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삶에 활력을 주는 의미이다.조제의 산책/외출이 조제에게는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는 반면에 비장애인에게 조제의 외출의 의미는 간단하다. 호기심의 대상 내지 기피 대상 더 나아간다면 도와줘야 장애인들에게는 오랫동안 받아들여지는 의미는 아니다. 비장애인들은 그들 스스로 조제의 외출을 큰 의미로 인식하지 않는다.그러나 비장애인에게 조제는 특별한 존재이다. 츠네오 동생은 형의 이사를 도와주면서 장애인과 처음 이야기 해 보았다고 한다. 조제의 할머니는 조제가 한낮에 나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다. 이를 통해 보면 장애인의 외출은 사회에서 극히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츠네오가 조제를 데리고 외출을 하였을 때 해코지를 하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제 옆에 사는 아이들 역시 조제에게 잘해 주었다. 단지 할머니만이 조제의 외출에 조심스러웠을 뿐이다. 장애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비장애인에게 있어서 조제의 외출은 다만 신기하고 흥미 있을 뿐다. 부정적인 마치 사회적 악행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외출은 조제가 집이 아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츠네오가 습격을 당하면서도 왜 외출을 하냐고 물었을 때 조제는 “꽃도 봐야하고 고양이도 봐야 해서”라는 대답을 한다. 비장애인에게는 꽃과 고양이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지만 조제와 같은 장애인에게는 집 밖을 벗어나 꽃과 고양이를 보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고 여행이다.조제에게는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와의 유일한 접촉의 수단인 새벽에의 외출이 비장애인들에게는 자신을 포함한 일반 구성원들이 살고 있는 신성한 정상적인 세계에 비정상적인 것은 물론이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혐오의 대상이 침범했다고 여긴다. 야쿠자(사회악의 존재)라는 존재에 연관시키거나, 미라(신비스러운 존재)에 연관 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애초에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의식 자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종종 무지하거나, 악의를 가지고 있는 비장애인들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 비장애인들의 관용의 부족함과 의식의 나약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장애인들을 잘 모르고, 받아들이기 힘든 내면의 표출을 공격성으로 들어내고 있다.하지만 여기에는 애초에 조제의 세상접촉을 이뤄주고 있는 할머니의 장애인들에 수 있다.조제의 할머니와 함께한 폐쇄적인 산책과 츠네오와의 공개적인 산책, 외출의 차이가 비장애인들의 태도에 직접적인 주된 영향을 주었으며, 조제 또한 세상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도 한정적인 범위의 좁은 관점에서 모든 세상을 그대로 받아드리려는 넓은 시야의 관점으로 변화했다는 점에서 장애인이 비장애인들과의 관계에서의 긍정적 방향에의 길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이 영화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비장애인이 유모차 안에 무엇이든건지 알아보려 들췄을 때의 할머니의 행동이었다. 언덕이라 유모차가 굴러 떨어질 것을 알았음에도 할머니는 다른 사람이 유모차를 들추려하자마자 언덕에서 유모차에서 손을 놓아버린다. 언덕에서 유모차가 구른다면 조제가 다칠 것 이라고 할머니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감수하고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단지 비장애인이 조제를 볼까봐. 이를 통해 조제에게 있어 세상에 대한 편견과 단절이 신체의 부상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느꼈다. 조제에게는 외출은 그저 책 밖의 것을 볼 수 있는 신기한 세상이다. 편견과 신체의 불편만 없다면 말이다.또한 영화에서 조제(장애인)와 동네의 이상한 아저씨(장애인)가 일상의 삶에 대처하는 방식(쓰레기 치우는 일)을 통해 우리는 중장애인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저기 옆집에 좀 이상한 아저씨가 사는데..’‘어..’‘할머니가 죽은 뒤, 뭐든 부탁하라면서 살펴봐 주러 오는 건 좋은데.. 얼마전엔 찌찌 만지게 해주면 쓰레기 대신 버려주겠다는 거야.’‘진짜야? 그래서?’‘만지게 해 줬더니 정말로 매일 아침 쓰레기를 버려주더군.’‘그게 뭐야!’‘뭐가?’‘말이 돼?’‘쓰레기장이 너무 머니까..’ / ‘복지과 사람한테 부탁하면 되잖아’‘그 사람들이 오는 건 낮이야... 아침 쓰레기 버리는 시간에 못 오잖아.’이것은 우리들이 그들의 일상에서 생각지 못한 부분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그들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며 그 도움이란 것들이 허점들을 지닌 허울뿐인충 하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장애인들이 주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힘들다. 그 장애인의 보호자가 조제처럼 늙고 병들어 죽었을 때 그들의 남은 삶은 누가 도움을 주며 살수 있겠는가? 이 영화에서도 그러한 현실의 문제를 꼬집어 짚어내는 듯하다.조제에게 있어서 보이는 모습은 항상 숨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몸은 병신이라는 생각은 사회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장벽을 쳐놓는다. 아무도 안볼 때 산책을 한다든가 집 벽장 속에서 책을 읽는 조제의 모습은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갖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그들도 감정이 있다, 단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하나로 정상인들에게 상처받는 것이 싫고 무섭다. 산책 시 칼을 갖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장애인과 정상인 이것을 나누는 기준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이분법에 의한 생각일 뿐이다.시간이 안 맞아서 쓰레기 버리는 것을, 비상식적인 일을 당하면서까지 타인에게 맡겼다는 말은 츠네오 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츠네오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처럼 복지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어떻게든 해결될 문제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조제도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조제는 오히려 시시콜콜한 일 전부를 그들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또는 그들이 그런 일들을 해준다는 것 자체가 ‘동정’이라 여기고 동정 받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스스로 해결하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즉 정확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부탁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도출할 수 없다고 하여도 성을 이용한 것은 상식 밖의 행위일 것이다. 돈을 위해서 성을 매매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정상적인 한 사회의 인간으로서 성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행위는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조제가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은 바로 자신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모래 군(郡)의 열두 달'그리고 이곳 저곳의 스케치우리는 흔히 인간은‘사회적 동물’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또 그러한 얘기를 많이 한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그 존재 이유가 있으며 또 생존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오직 ‘사회적 동물’인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사회 역시 대자연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가능한 무대이므로, 더 정확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인간은‘자연 속의 동물’이라는 칭호를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인간이 자연의 품에서 그 혜택을 입으며 보호 받고 살지만 오히려 자연을 짓밟고, 고통을 주는 반자연적인 행태를 보이기만 한다. 무차별적인 개발, 경제논리에 매몰된 환경 보호, 경제성장률 기사에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지만 자연 파괴 기사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무관심이 그것이다. 지구 온난화가 훨씬 더 경제에 치명적이라는 것도 모르며, 환경오염으로 인한 의료비 증가가 가계 부담, 국가경제부담으로 얼마나 크게 돌아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두지 않고, 오직 사회 속에서만 일희일비하며 근시안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당장의 ‘돈’인 것이다. 사실 나도 그러한 부류에 들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사람들을 질타할 입장은 못 되지만 말이다.알도 레오폴드의 '모래 군의 열두 달'은 바로 사람들의 그러한 자화상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레오폴드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비춰줄 거울은 바로‘자연’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나 12월의 수필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파괴하는 인간의 야만성을 동시에 서술하고 있어 내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자연은 우리 인간들에게 해를 끼친 것이 없는데, 아니 오히려 그들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을 선사해 주었는데 인간들은 그들에게 잔인한 파괴, 고통을 가한 것이다. 물론 레오폴드는 이러한 전반적인 이야기들을 준엄하지도 사납지도 않은 방식으로 잔잔한 자연의 진면목을 보이면서 마치 거울처럼 인간의 모습을 반추하도록 하는 그러한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러한 방식을 취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게 하고, 더욱 부끄럽게 만든다는 생각도 들었다.특히나 레오폴드가 이 책을 마감하면서 한 말이 아직도 내 가슴과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야생 동식물은 일찍이 우리를 부양했고, 우리의 문화를 만들었다. 지금도 우리에게 여가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의 기계를 통해 이 즐거움을 얻으려 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의 일부 가치를 파괴하고 있다. 이 즐거움을 현대의 지성을 통해 거둔다면 즐거움뿐만 아니라 지혜 또한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대목 말이다. 우리의 문화가 아무리 첨단을 구비하여 그 기술적 수준이 높다고 해도 산업의 원료는 자연에서 얻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질이 가공 되면 될 수록 그 본연의 성질이 사라지듯이 인간이 문명에만 함몰될 때 자연은 소멸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점점 자연과 유리된 인간은 우리의 근원이 자연이라는 점을 잊어가게 되고, 종말엔 우리의 터전을 잃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결국 우리 인간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터전을 잃은 인간들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결국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으로 회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말이 모든 문명적 혜택을 스스로 박탈하고 원시적 생활로 복귀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우리 생존의 필수조건은 공업이 아니라 바로 자연이라는 인식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바로 레오폴드가 '자연을 가르친 예전의 교육'으로 돌아가자는 말처럼 말이다. 지구온난화, 자연재해, 동식물 멸종 등 재난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인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발을 들여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라도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고 자연과 그 속의 생명을 본다면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늦었다고 생각해 포기한다면 정말 우리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후투티를 기다리며'서울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줄곧 서울에서 생활해 온 나로서는 '후투티를 기다리며'라는 책에 나오는 각종 식물, 곤충, 물고기들은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제목의 '후투티'라는 새조차.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이들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책 속에 등장하는 교수님의 자연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애정은 나에게 작은 충격과 더불어 경이로움까지 가져다주었다. 더구나 '북극의 눈물', '아프리카의 눈물' 등 환경 다큐멘터리들을 활발하게 방영하며 생태계의 파괴와 위험성을 보도해 자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때에 '후투티를 기다리며'라는 책은 북극이나 아프리카까지 갈 필요도 없이 우리 생활 주변의 생태계의 변화양상을 알려주며 심각성을 일깨워주어서 피부에 직접적으로 와 닿았다. 그리고 그러한 심각성을 가져온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라는 점에서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는 부끄러움이라는 단어가 떠나지를 않았다. 언제나 발달된 문명을 감탄하면서 그러한 문명의 산물을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며 살아왔는데 이러한 달콤한 문명이 결국은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며 결국은 인간의 삶까지 위협하는 독으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소름이 끼쳤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문명의 발달로 인해 삶이 좀 더 여유로워지고, 풍족해지기는 했으나 반면에 우리 인간들의 원초적인 고향인 자연이 파괴되거나 퇴색되어버리고, 또 우리의 동반자인 각종 아름다운 생물들이 고통을 겪고, 멸종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니 문명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는 것 보다 뺏어가는 면이 더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또한 인간의 탐욕과 그러한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산물로 인해 아무런 죄도 없는 생물들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동냥하는 거지들 마냥 인간에게 예속되어 버린, 야생성을 잃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정말 가슴이 아렸다. 사실 책 속에 등장했던 어느 사람처럼 나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인간을 경계하지 않으며 인간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동물들, 그러한 순간이 바로 진정으로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 생각이 얼마나 우매하고 인간중심적인 사고였는지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야생은 야생답게 인간을 경계하고, 인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자연의 이치고, 그것이 진정으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모습이었던 것이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좀 아쉽고, 섭섭한 상황이지만 말이다.아울러 몇 년 전부터 계속 사회 전반적으로 친환경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자연과 인간이 서로 공생하며 상부상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렁이 농법에 관한 내용을 보고 나니 역시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에서나 친환경이지 자연의 입장에서는 고통을 주고, 생태계를 교란하는 크게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기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사람이 함부로 조정하거나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인간과 자연, 그 사이에 어느 정도의 경계선은 꼭 있어야 하고, 그것이 지켜질 때 비로소 자연과 인간이 공생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