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갈 레부 사람들의 전통공간서아프리카에 위치한 세네갈은 나에게 떨어져 있는 그 지역적 거리보다도 더 멀게 느껴지는 나라다. 수도인 다카르라는 도시를 이번 과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을 정도로 세네갈이라는 국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은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서 약 15km 떨어져 있는 요프라는 지역 중에서도 그 안의 전통 마을에 거주하는 레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직접 그들의 마을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질문하고 그들의 생활 모습을 지켜보면서 레부 사람들의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그들의 전통에 대한 인식 등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레부 사람들에게 전통문화가 어떤 위치에 자리매김해 왔으며, 도시화와 현대화의 물결이 거세지는 오늘날 이들이 어떻게 그들의 문화를 지켜가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레부 사람들은 그들의 전통을 유지하기 어렵게하는 외부 문화의 유입이나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반기지 않고 있었으며, 그들만의 사회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위기에 처한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가고자 하고 있었다.제1장은 레부 사람들이 거주하는 요프 지역에 대한 지리와 자연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까운 나라 일본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섬나라’라는 설명이 빠지지 않듯, 지리와 자연 환경 즉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를 설명하든지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가 된다. 어떤 사람이든 그들의 삶이 펼쳐지는 무대가 되는 ‘공간’이라는 요소가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요프 마을은 세네갈 최북서단 외진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자연 환경은 바다 생물체에 대한 신앙을 중요시 할 정도로 그들의 삶을 바다와 밀접하게 하였으며, 외부 문화의 유입을 막아 전통을 유지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로도 작동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중요한 국도가 마을 어귀를 지나며 외부 사람의 왕래가 잦아지고, 현대화 된 지역들이 요프를 둘러싸게 됨으로써 이 요프 마을의 환경은 과거와 달라지게 되었다. 특히 세다르 셍고르 지속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 요프의 레부 사람들은 그들의 전통을 위협할 수 있는 외부인들의 유입을 못마땅해 하며 그들을 배척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또한, 전통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젊은 층들의 마을 이탈 역시 전통의 유지를 힘들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교류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특히 오늘날의 사회에서 주변 지역과의 교류 없이 고립된 생활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프라는 지역과 그 환경에 대해 설명하는 1장에서부터, 요프 지역의 레부 사람들은 외부와의 교류 자체를 경계하는 상당히 경계하고 있다는 듯 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전통문화라는 것은 꼭 외부와의 단절을 통해서만 지켜지는가? 물론 지나친 현대화와 새로운 문물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인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고 또 지켜져야 할 만한 전통마저 과거의 구습으로 치부해버리며 잃게 되는 모습을 우리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통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어쩌면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곳에서는 모든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역사의 오랜 기간 동안 그들만의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해왔던 곳에서 이것은 더 큰 문제로 인식될지도 모른다.레부 사람들의 역사는 한마디로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이주의 역사였다. 이어지는 제2장에서 저자는 레부 사람들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한다. 레부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모습의 되짚어 봄으로써 그들의 생활 방식과 전통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에 보다 가까워 질 수 있다.레부 사람들은 세네갈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월로프족과 세레르 족이 오랜 기간에 걸쳐 혼종된 것으로 추정되며, 행정상으로는 월로프족의 하위 종족 집단이다. 이렇게 레부 사회는 단일 민족에 의해 구성되었다기 보다, 다양한 종족과 가족들로 구성된 집단에서 시작되었기에 이들의 사회는 이러한 다양한 혈통 집단을 통합하고 통제할 수 있는 형태로 재조직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이 두 가지 해석은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레부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도망치든, 저항했든 어떤 방식으로든 피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레부 사람들은 기나긴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6세기에는 졸로프 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프랑스 식민지 지대에는 식민 정부의 지배를 피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특히 19세기에는 레부 사람들만의 고유한 공동체인 ‘레부 공화국’을 건설하기도 했었다.오늘날까지도 지속되는 이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에 대한 의식은 이러한 이주와 독립의 역사를 통해 공고해져 온 것일수도 있다. 특히 요프는 초기 레부 사람들이 정착하고 세운 마을 중에서도 자신들의 전통을 꾸준히 지키며 남아있는 3개의 마을 중 하나로, 레부 사람들이 이주해서 세운 전통 마을 중에 가장 오래된 마을 중 하나에 속한다. 그러므로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믿음은 이러한 그들의 역사에서 시작된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른다.제3장에서는 레부 사람들의 종교문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과거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아프리카에 자리 잡은 국가이기 때문인지, 세네갈에는 이슬람을 믿는 인구가 전체의 94%에 이른다. 이슬람은 세네갈 전 국민은 물론 레부 사람들에게서도 일상 종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주로 무어 상인들, 이주민, 마리부 신도들이 레부 사람들에게 이슬람을 전파하였으며, 현재 레부의 대부분의 이슬람 신도들은 마라부 신도들이라고 한다.그런데 레부 사람들의 이슬람에서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의 전통종교와 결합된 형태의 레부 토착 이슬람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9세기에 창시된 이 토착 이슬람은 역시 레부 사람들의 독립적인 정신을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전통을 고수하는 레부 사람들의 설 곳이 점차 줄어든다고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토착 이슬람은 현재 요프 라엔느 지역에 거주하는 일부 레부 사람들만의 종교로 남아있다고 한다. 종교 역시 그들의 것에 맞게 변화시켜 토템 신앙, 레부 사람들이 사는 모든 장소와 그들의 모든 물건에 붙어 있다고 여겨지는 토착 신 랍과 같은 민간 신앙은 아직도 그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아 그들의 생활과 삶에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요프에 사는 모든 레부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모두 다 함께 모여 투르 제례를 거행한다. 여드레 동안 진행되는 이 제례는 그들이 레부 공동체를 건설할 때 승리를 가져다 준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내는 것으로, 레부 사람들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가 된다.앞서 레부는 다양한 종족의 오랜 이주 과정을 통해 형성된 공동체라는 것을 언급했다. 제4장에서는 레부의 정치와 경제에 대해 알아보며, 다양한 종족이 모여 형성된 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었던 사회 구조적 배경에 대해 살펴본다.레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모계 혈통을 중시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구조적으로 어느 한 혈통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한 것으로, 모계 혈통에서 그들의 지도자를 선출한다. 또한 외부 종족과 결혼하여 출생한 자식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함으로써 종족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게 한고 있다. 현재는 명예직으로 남아 있지만, 마을의 최고 통치자인 자라프, 두 번째 직위인 은데예 디 레브 역시 모두 모계 혈통 출신에서 임명되었다.특히 레부의 집행기구와 의결기구는 하나의 혈통에 의해 모든 권력이 장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각 기관의 대표를 정해진 혈통에서만 선출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각 지도 계급을 같은 모계 선조의 혈통이 선출될 수 없게 함으로써 권력의 독점 예방은 물론, 권력의 분권을 통한 사회 균형을 꾀하고 있다.레부는 ‘레부 공화국’ 시기를 거치며 여타 아프리카 전통 사회에서와 같은 추장 제도가 거의 사라졌다. 반면 외부의 침입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한 레부 전체의 마을 연합이 조직 되어있다. 오늘날 각 마을은 독립적인 자치 기구를 통해서 유지되며, 마을 대표들의 회합을 통해 마을 간의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 회합에서 마을의 문제점 해안가에 형성된 마을이다. 또한 요프에 사는 레부 사람들은 요프에 정착하기 까지 해안 지역을 따라 이주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삶에서 어업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경제 활동으로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 특히 이들이 어업활동을 벌이는 까브-베르 해안은 어족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며, 레부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어부였다고 말해질 정도로 어업에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최근의 어획 활동의 양상은 과거의 공동체나 여러 가족 간의 협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과 다르게 개인 적으로 어획하는 경향이 많아지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마을의 어획량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점차 산업화 되어가는 오늘날의 생활 모습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회에서 전통의 방법으로 어업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또한 해변 지역이 오염되면서 어족 자원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경제활동에서 어업보다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농업과 목축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도 젊은 층의 이탈을 가속화 시키고 있다는 것에서 더 큰 문제로 발전할 수 있음을 우려할 수 있다.아프리카는 과거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를 경험했다. 특히 세네갈은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 중에서 주요 거점 역할을 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지막 5장에서는 이러한 식민 도시가 레부 사람들의 생활에 미친 영향을 비롯한 그들의 생활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20세기까지만 해도 세네갈의 수도인 다카르는 서아프리카 프랑스 식민지의 주요 거점 도시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것은 다카르의 도시화가 본격화되는 계기도 되었다. 세네갈의 독립 이후에도 다카르의 도시화는 계속되었고, 자꾸만 유입되는 인구 등으로 인해 도시의 범위는 점차 넓어지게 된다. 다카르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요프도 다카르 행정 구역에 포함되며 이러한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도시 공간이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잠식해 들어오는 것은 역시 요프에 살고 있는 레부 사람들의 문화적 정체성에 흔들리게 한다는 우려를 가져오게 하 있다.
2013학년도 2학기 과제물교과목명 : 세계의 종교○ 과제유형 : ( 공통 ) 형○ 과 제 명 :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리처드 도킨스, 이한음 옮김)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시오.비합리적인 믿음에 대한 합리적 의심나는 언제라도 무지의 경외심보다는 이해의 경외심을 택할 겁니다.-181쪽, 더글러스 애덤스《만들어진 신》이라는 이 발칙한 제목의 책의 원제는 《The God Delusion》으로 Delusion은 망상, 또는 환각 등을 가리킨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는 로버트 퍼시그의 말을 책의 가장 앞부분에 실으며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시 한번 확실히 밝힌다. 종교인들에게 이 책은 대단히 불경스럽고 위협적인 도전장으로 여겨질 것이다. 실제로 책이 나온 뒤 반응은 뜨거웠고, 반박을 위한 책들이 출판되기도 했다. 아마 굳이 종교인들이 아니더라도 무신론자, 유신론자 할 것 없이 책의 제목을 보면 과연 어느 정도로 신을 반박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묘한 호기심이 동할 것이다. 나 역시 어디 한번 보자, 라는 약간의 심술궂은 마음을 한구석에 품은 채 책을 펼쳐 보았다.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이 앞으로 독자들을 안내할 여정에 대해 친절하게 안내하며 호기심을 이끌어낸다. 소재가 종교이니만큼 태도가 조심스러울 것이라는 예상을 깨는 명확하고 날카로운 필치도 인상적이다.1장의 제목인 대단히 종교적인 불신자 는 아인슈타인의 말에서 따온 것으로,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들의 범신론, 즉 자연으로서의 신에 대해 설명한다. 아인슈타인은 인격신이라는 개념은 내게 아주 이질적이며 심지어 소박하게까지 보인(29쪽) 다며 내 안에 종교적인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과학이 밝혀낼 수 있는 세계 구조에 대한 무한한 찬탄(28쪽)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믿음 자체를 믿는 종교를 비판하며 앞으로 자신이 다룰 신이 아이슈타인의 신과는 다름을 확실히 구분 짓는다. 사회는 통상적인 존중보다 더 과장된 존중을 종교를 비판하며, 그저 조금 다를 뿐인 견해들에 유독 심한 적대감을 보이는 이유는…증거가 전혀 없어서일 것이다(56쪽) 라고 말한다. 또한 초기 미국의 국부들은 신앙과 무관한 나라를 세우려 했지만, 미국의 현주소는 전혀 그렇지 않으며, 가장 열성적인 종교 국가가 되었다며 우려를 표한다. 종교는 일시적 불가지론(TAP)에 속하며, 신의 존재는 일종의 과학적 질문(77쪽) 으로, 신이 반증 불가능하지 않다(86쪽) 고 단언한다.3장에서는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들을 늘어 놓고 그것들을 반박한다. 그것들은 논증이 아니라 말장난에 불과하며, 때로는 어리석은 짓이고, 때로는 자신보다 나은 인간에 대한 질투(그의 능력은 신이 주신 것이 틀림없다는), 혹은 개인적 착각에서 비롯된 것들이라고 말한다.이 장에서 작가는 그러한 논증을 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며 신앙과 IQ 사이, 신앙심과 교육의 부정적 상관관계가 있다는 통계들을 제시하는데, 사실을 바탕으로 한 증거가 뒷받침되고 있다 해도 약간의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날카롭고 명쾌한 논리와 유머는 마음에 들었지만, 유/무신론자 사이에 우월감, 혹은 열등감을 자극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신론자의 성취는 책의 뒷부분에서 밝히는 인간의 자주적 가능성과 그 실천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저는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우리는 단지 진화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면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저런, 목적이 없다고 생각하다니 당신의 인생은 참 황량하겠소.하지만 나는 맛있는 점심을 먹을 기대감에 차 있습니다. -159쪽, 제임스 왓슨다시 4장으로 넘어가면, 나는 증거가 전혀 없음을 인정하오, 그래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겁니다(170쪽) 라는 사나운 확신 을 하는 종교(를 가진 과학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한 이유 를 풀어낸다. 저자 스스로 4장에 이 책의 핵심 논증이 들어 있음을 밝힌다. 그가 지적 설계자의 창조론에 내세운 해답은 다윈의무지의 경외심보다는 이해의 경외심을 택할 겁니다.(더글러스 애덤스, 181쪽)과학적 논리와 설명이 많은 이 장은 비전문가들에게는 조금 낯설고 힘들게 읽힌다. 이해를 돕기 위한 저자의 배려가 깔려 있어도 말이다. 중간 중간 저자의 말을 그저 믿고 따라가는 입장이 되어 종교의 교리를 따르는 듯한 오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그렇다면 자연 선택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종교의 혜택이란 무엇일까. 5장에서는 종교의 뿌리를 탐색한다. 저자는 다른 상황에서는 유용한 혹은 과거에는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의 불운한 부산물일지도 모른다(265쪽) 고 말한다. 자연 선택은 아이의 뇌에 부모나 다른 어른이 어떤 말을 하든 믿는 경향을 심어놓 았고, 그 성향은 생존에 매우 유익(269쪽) 했으며 때로는 비합리적인 강한 확신이 마음의 변덕을 막는(285쪽) 다는 점에서 종교가 발달할 수 있음을 설명한다. 인간은 천성적 이원론자이며, 목적론자이기 때문에 종교에 빠지기가 매우 쉬우며, 독자적이면서 비슷한 숭배 의식들이 그토록 많이 융성했다는 사실은 전반적으로 인간의 심리에 어떤 특징이 있음을 시사(310쪽) 한다고 한다.이성은 신앙의 가장 큰 적이다. -291쪽, 마르틴 루터종교의 기원이 다윈주의의 질문이 될 수 있다면, 도덕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6장에서는 도덕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도덕이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 역시 다른 무언가의 부산물인 것이다. 특히나 이 질문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중간에 서서 의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할 것이다. 유신론자라면 도덕의 뿌리와 이유는 신에게로, 무신론자라면 인간 스스로에게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저자가 인용한 극단적이지만 독실한 기독교도들은 자신과 다른 자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그들이 처형받기를 기도한다. 이들은 선하게 느껴지기 보다 오히려 악에 가까워 보인다. 종교인들은 다윈주의가 본질적으로 허무주의적인 것이라 믿으며, 허무에는 악이 뒤따른다고 설정한다. 다윈의 자연선택 관점에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 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유아를 살해하고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자식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50쪽) 라고 말했던 성경에 묘사된 신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언급한다. 《구약성서》는 윤리적으로 재앙의 수준 이며, 《신약성서》에도 선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지지해서는 안 될 가르침(378쪽) 들이 있다고 한다. 특히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원죄와 속죄를 혐오스럽다며 비난한다. 성경에서 권하는 타인에 관한 도덕적인 내용들은 상당수가 협소하게 정의된 내 집단만을 고려한 것이며(382쪽),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말은 오로지 다른 유대인을 사랑하라 는 뜻으로, 미국의 의사이자 진화인류학자인 존 하텅에 의하면 성서의 이면에는 외집단에 대한 적대감이 깔려 있다고 한다(383쪽).성경이 인상적이고 시적인 소설 작품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자식들에게 도덕을 함양하라고 줄 만한 책은 아니(372쪽) 라는 것이다. 성경 속의 신의 충격적이고 공격적인 행동들에 대해 어느 부분은 골라서 믿고, 어느 부분은 상징이나 우화로 간주 하는 취사선택 을 하는 행위는 무신론자의 도덕 판단과 마치 개인의 판단적 문제 이며 “어느 한쪽이 직감에 좌우되는 도덕 이라면 다른 한쪽도 그렇다(358쪽) 고 말한다.저자에 따르면 종교는 망상일 뿐 아니라 해로운 망상이다. 8장에서 그는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를 밝힌다. 저자는 과학자로서 나는 근본적인 종교에 적대적이다…알아낼 수 있는 것들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430쪽) 는 것이 그가 꾸준히 종교를 비판하는 큰 이유이다. 기독교인들이 신앙과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이유로 낙태를 절대로 반대하며-그들은 심지어 강간으로 인한 임신의 낙태도 살인이라고 말한다- 94년에는 의사와 그 변호사를 총으로 사살한 사건까지 일어났다. 특정한 부류의 종교인은 미세한 세포 덩어리를 죽이는 것과 장한다). 불합리한 것을 당신이 믿게끔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에게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게도 할 수 있(몬테르, 467쪽) 으며 이것이 바로 끔찍하게 왜곡된 종교적 극단주의가 아니라 정상적인 종교(567쪽) 자체를 비난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9장은 19세기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1858년 에드가르도 모르타라라는 여섯 살짜리 아이가 종교적 이유로 부모에게서 격리 당한다. 이유는 몇 년 전 모르타라가 아기였을 때 그를 돌보던 가톨릭 소녀가 아픈 아이가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을까봐 겁이나 아이에게 세례를 했기 때문이었다. 모르타라의 부모님은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이었던 부모는 안식일에도 일을 할 수 있는 하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가톨릭 소녀를 고용했다. 당시 열 네 살이었던 가톨릭 소녀는 한 아이를 가톨릭교도로 만들 의식을 치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혼자서, 양동이에 담긴 물로. 심지어 신문은 교회가 모르타라를 유대인 가정에서 구조했다고 표현했으며, 교회가 베푼 엄청난 은전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당혹스러워했다. 모르타라의 가족들이 세례를 받는다면 아이를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가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의 이유는 종교였다.종교가 아이들을 학대하는 방식은 또 있다. 저자는 아이들에게 가톨릭교(가톨릭 아이) , 이슬람교(이슬람 아이) 등의 표현을 쓰는 것을 반대한다. 아직 스스로 종교를 선택할 만한 판단력과 지식이 없는 아이들은 어디까지나 가톨릭교도의 아이 혹은 이슬람교도의 아이 일 뿐이라는 것이다. 가톨릭 아이 라는 표현은 마치 아이에게 마르크스주의자 라는 표현을 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주입되는 종교는 아이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가하기도 한다. 그 중 더 무서운 것은 정신적 학대인데,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지옥 이라는 무서운 곳의 존재를 두려워하게 되고, 종교가 다른 자신의 친구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공포를 끌어안게 된다. 아이들과 종교에 대한 논의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종교는 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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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학년도 2학기 과제물교과목명 : 공연예술의 이해와 감상○ 과제유형 : ( 공통 ) 형○ 과 제 명 : 고전발레와 현대발레(모던발레)의 차이와 그 차이가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에 대해서 논하시오.고전발레와 현대발레의 차이와 그 역사적 의미1. 발레의 역사2. 고전발레와 현대발레3. 고전발레와 현대발레의 차이4. 차이점들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1. 발레의 역사발레의 기원은 보통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궁정 발레에서 찾는다. 발레라는 말도 이탈리아어 발라레ballare 에서 유래했다. 발레의 종주국은 이탈리아지만 발레를 꽃 피운 건 프랑스라 할 수 있다. 궁정과 귀족사회에서 향유되는 사교무용이었던 발레가 극장 예술의 형태로 나아가는 토대를 갖추게 된 건 프랑스에 전파된 이후였다. 16세기 프랑스 왕실로 시집을 간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고향의 춤을 프랑스 왕실에 전파했다. 프랑스에 전파된 발레는 17세기 루이 14세 때 번성했는데, 루이 14세는 왕실음악무용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직접 공연에 출연하기도 하는 등 무용에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태양왕 이라고 불리게 된 것도 라는 작품에서 아폴로 역을 맡아 태양왕의 복장을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발레를 고안하고 전파한 것은 러시아로 마린스키 극장은 세계 발레의 중심지였다. 19세기 마리 카르마고, 마리 살레, 마리 탈리오니 등의 발레리나로 대표되는 낭만발레 시기를 거쳐, 19세기 말부터 20세기는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와 무용수이자 안무가였던 마리우스 프리타 중심으로 고전발레가 발전했다. 그리고 이것은 20세기 초 등장한 바슬라프 니진스키로 대표되는 현대발레,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컨템퍼러리 발레까지 이어져왔다.2. 고전발레와 현대발레1) 고전발레예술사조의 흐름은 고전에서 낭만으로 이어지지만, 발레는 특이하게 낭만에서 고전으로 흘렀다. 고전발레는 이전의 낭만발레에서 보여주던 동화 같고 서민적이던 모습에서 벗어나 다시 왕과 귀족들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러한 현상은 러시아 황실의 후원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전발레가 낭만발레 이전의 궁정발레와 다른 것은 발레의 테크닉이나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제 귀족들은 루이 14세 시절과는 달리 관람자로서 만족했다.프랑스에서 태어난 마리우스 프티파(1822~1910)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무용수였다. 그러던 그가 1847년 러시아에 제1무용수로 초빙되었고 1858년 이라는 2막물 발레로 안무가로서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그 후 42년 동안 꾸준한 활동을 하며 고전발레의 대표작들인 , , 등을 만들어냈다. 러시아를 세계 발레의 중심으로 끌어 올린 그는 고전발레의 완성자로 불린다.2) 현대발레1878년 전통의 무게가 적은 미국에서 태어난 이사도라 덩컨은 거의 독학으로 무용을 시작, 자유 무용을 창시하여 후에는 현대 무용의 어머니로 불리게 된다. 처음 토슈즈를 벗어던지고 타이즈도 입지 않은 채 시카고의 무대에 올라 발레를 한 그녀는 조소를 받고 이에 실망하여 유럽으로 건너간다. 그녀는 자유로운 무용으로 유럽에 큰 자극을 주었고, 1905년 러시아 방문은 디아길레프와 포킨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다. 발레의 중심지였던 러시아에서 디아길레프는 발레 뤼스를 결성하였고 최초의 안무가는 미하일 포킨이었다. 포킨은 정형화된 발레 전통을 뛰어넘으려는 열망이 있었다. 그에게서 비르투우조 발레 테크닉은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되고, 표현의 수단이어야 했다. 그러던 중 무용의 신이라 불리는 천재적인 무용가 바슬라브 니진스키가 등장했고,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를 안무가로 승진시키며 포킨과는 결별한다. 니진스키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무용가이자 안무가였지만 그가 짠 파격적인 안무는 스캔들을 일으켰고 외설 논란에도 휩싸이게 되었다. 모던발레는 고전발레 시기를 거치며 지나친 기술경쟁으로 인해 퇴색된 시대적 낭만주의 정신을 부활시켰다.3. 고전발레와 현대발레의 차이1) 시기의 차이오페라가 대두되면서 발레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발레는 오페라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다. 파리에서 쇠퇴하던 낭만발레는 러시아로 옮겨왔다. 러시아는 서구화에 힘을 기울여 무용을 장려했으며, 1735년 프랑스 발레 교사인 랑데를 초빙하여 수도인 상페테르부르크에 제실무용학교를 창립했는데, 이것이 마린스키 극장이다. 이어 1825년에는 볼쇼이 극장이 개장된다.19세기 후반 발레의 쇠퇴기에도 러시아에서는 역대 황실의 열렬한 지지가 이어져 러시아는 발레의 중심지가 된다. 1847년 마리우스 프티파가 러시아로 초빙된 후 무용가로서 안무가로서 명성을 떨치며 러시아에서 고전발레를 완성시킨다.이후 20세기 초 미국에서 전통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운 현대무용이 탄생했고, 이 영향을 받아 신고전주의 발레가 시작되었다. 현대발레의 시조를 개척한 안무가는 발레뤼스의 미하일 포킨이었다. 그는 이사도라 덩컨의 영향을 받아 (1905)를 발표했다. 또한 낭만발레 시절의 탈리오니에게 빼앗긴 남성 발레리노의 자존심을 백년 만에 회복한 무용의 신, 니진스키가 등장하여 10년간의 화려한 활동을 펼친다. 니진스키의 (1912)를 기준으로 이전 작품은 고전발레, 이후 작품을 현대발레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대발레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공식적으로 현대발레를 선언하며 출발한 이는 독일의 쿠르트요스라고도 하며, 20세기 초의 발레를 신고전주의, 중반부터를 현대발레로 나누기도 한다.2) 형식과 표현의 차이고전발레는 형식에 엄격하여 정해진 규칙에 따라 제작되고, 감정적 표현이나 깊이보다는 테크닉의 완벽함을 추구했다. 형식이 먼저였으므로 정서적인 표현들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명료함, 완벽한 조화, 통일성, 대칭, 질서와 같은 가치들이 중요시 되었고 전통적 규칙을 따랐다. 또한 남녀 2인무인 ‘그랑 파드되’가 작품의 성공 여부를 가렸으며, ‘디베르티스앙(잠깐동안 여러 가지 춤을 선보이며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부분으로 오락 또는 막간의 여흥 이라는 뜻이다. 솔리스트들의 기교를 과시하기도 했다)’, ‘코르 드 발레(오페라의 코러스에 해당하는 군무진)’ 등의 볼거리가 작품을 풍성하게 했다.그에 비해 전통에 대한 반발로 토슈즈를 벗어던지며 태어난 현대발레는 의상과 형식, 안무 등 모든 면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했다. 발레의 상징인 튀튀와 토슈즈를 벗은 춤은 처음부터 환영받지는 못했다. 현대발레는 주제와 형식을 중요시하던 고전발레와는 달리 무용수의 감정표현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는 동작에 기초를 두었다. 고전발레는 스토리텔링, 디베르티스망, 바리에이션, 그랑 파드되, 코르 드 발레 등의 형태를 갖추어야 했는데 이것에서 벗어난 것이 현대발레였다. 고전발레가 상체보다 하체 위주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표현이었다면, 현대발레는 신체의 모든 부위를 자유롭게 움직이며 표현한다.3) 무대와 의상의 차이고전발레는 바로크식 웅장함을 재현하기 위해 화려하고 스케일이 큰 무대를 사용했다. 주 관객들이 황실과 귀족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전발레의 무대와 의상, 소품 등은 화려하고 사실적이었고, 그것들은 극적인 드라마(스토리텔링)와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함이었다.반면 현대발레는 효율성과 효과성을 중시하여 상징적이고 단순한 무대장치를 이용하였다. 의상 또한 토슈즈와 튀튀를 벗어버린 이사도라 덩컨의 현대무용이 문을 열었듯이 점점 자유롭고 간소하게 변하였다. 신체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타이즈와 같이 최소화된 의복을 착용했다. 현대무용에 이르러서는 의상의 제한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4) 내용상 차이고전발레는 신화나 전설 등 환상적인 이야기, 혹은 왕과 귀족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권선징악의 테마가 작품의 주요 근간이 되었다. 고전발레는 특히 러시아 황실의 후원하에 성장하였기 때문에 루이 14세 시절 바로크 무용과 마찬가지로 귀족, 즉 권력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볼거리를 제공했다. 법도와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던 관객들을 위해 고전발레는 정해진 춤의 규칙이나 테크닉, 화려한 볼거리 등 꽉 짜여진 형식미에 중점을 두었다.반면 현대발레는 인간 신체의 움직임을 강조하며 감정 표현을 중요시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내용적으로도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려고 했다. 포킨은 발레의 주제나 의상이 시대 상황과 어울리거나 어떤 식으로든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루는 이야기 역시 현대사회의 문제나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리 등이다. 현대발레는 줄거리나 춤의 기교적 과시보다는 손과 입, 눈 등 신체의 모든 부분을 이용한 남녀무용수 간의 감정 표현에 주력했다.4. 차이점들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치마 길이의 역사가 발레의 역사라는 말도 있듯이 발레에 있어 의상의 변화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낭만발레 시기의 마리 카마르고는 자신의 완벽한 앙트르샤를 과시하기 위해 스커트를 발목 위로 잘라버렸다. 이것은 당시에 부도덕하기까지 한 심각한 일이었지만, 관객들은 그녀의 용기를 택했다. 그녀가 처음 스커트를 자른 것은 자신의 기술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듯이, 의상의 변화와 신체의 노출은 더 많은 표현을 용이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결점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발레 의상은 꾸준히 짧아지고 타이트해져 점점 더 신체의 움직임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니진스키가 마린스키 극장에 있었을 무렵, 그의 무대 의상이었던 타이즈가 외설적이라 비난받고 결국 해고까지 되었던(디아킬레프의 계략일 가능성이 높지만) 사실까지 떠올린다면 지금의 발레 의상은 참으로 많은 진화를 거쳐 온 셈이다.
신라 천년왕조의 시기구분과 각 시기 변화과정 및 특징1. 시기구분신라 왕조의 시기구분은 크게 와 의 시기구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에서는 삼국 통일 이전까지의 신라 왕조를 묶어서 ‘상대’로 보고 있으며, 이후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의 무열계 왕조를 ‘중대’, 이후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는 ‘하대’로 나누어 놓았다. 이에 비해 에서는 1대 박혁거세부터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돋움 하기 시작한 지증왕때 까지를 ‘상고’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후 법흥왕부터 삼국 통일 이전의 신라 왕조인 진덕여왕까지를 ‘중고’, 이후 통일 신라를 모두 묶어서 ‘하고’로 분류하고 있다.와 는 각기 신라 천년 왕조에 대한 시대구분을 달리하고 있지만, 삼국 통일을 한번의 변화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신라 왕조에 대한 시기구분은 대체로 와 의 구분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삼국통일을 중요한 기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1 22박혁거세-지증왕23 28법흥왕-진덕여왕29 36무열왕-혜공왕37 56선덕왕-경순왕삼국사기상대중대하대삼국유사상고중고하고2. 각 시기 변화과정 및 특징1) 삼국사기의 신라사 시대구분은 왕족의 혈연을 중심으로 나누고 있다는 데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골품제가 엄격했던 신라 사회에서 삼국 통일 이전까지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골품은 성골이었다. ‘상대’의 박혁거세부터 진덕여왕까지는 모두 성골 출신으로, 신라가 고대국가체제를 갖추고 김씨에 의한 왕위 독점 세습이 가능해졌던 내물왕때 이후 내물계 김씨가 신라의 왕위에 올랐으며, 눌지왕 이후로는 부자상속제가 정착되었음을 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시기에 이르러 그 대가 끊기게 됨으로써 내물계 김씨에 의한 왕위 세습이 끝나게 된다. 또한 ‘상대’ 성골 왕들은 박씨가 왕비족으로 고정적이었음에 비해, 삼국통일 이후 진골 왕들에 이르러서는 가야 김씨계에서 왕비족을 맞아들이고 있음 또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29대 무열왕부터 36대 혜공왕까지 이르는 시기는 진골 중에서도 무열왕 계열이 왕조를 차지하고 있다. 이 시기에 삼국통일과 함께 무열왕 계열의 장자 상속제가 확립되었으며, 강력한 전제왕권이 등장하였다. 특히 신문왕 시기에는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며 신권을 억눌렀을 뿐 아니라 중앙의 정치기구와 군제를 정비하였으며, 9주 5소경의 지방제도가 완성되는 등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의 면모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혜공왕 시기의 많은 귀족들의 반란, 상대등의 반란 등 정치적 혼란 속에서 결국 혜공왕이 살해 당함으로써 중대 무열계 왕위는 끝나게 된다. 진골귀족 내부 분열로 인한 왕위 쟁탈전 속에서 내물왕의 10세손이라 하는 상대등 김양상이 왕위에 올라 선덕왕이 되고, 그 뒤에는 내물왕의 12손이라 한 김경신이 왕위에 올라 원성왕에 오른다. 이 후로 원성왕계에서 계속 왕위를 계승하게 되며, 이 시기를 나누어 ‘하대’라고 부른다. ‘하대’에는 ‘중대’에 비해 왕권이 약해져 귀족연합정치가 등장하게 된다. 왕위쟁탈전이 극심하여 왕위에서 밀린 무열계와 내물왕계의 다툼이 계속되며, 6두품 출신의 개혁정치를 요구하는 세력들도 등장하게 되고, 결국 신라 사회는 각지에서 등장항 지방 호족들에 의해 천년왕조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조선시대의 왕비- 조선 왕실의 가려진 반쪽의 역사-- 目 次 -Ⅰ. 序論 ???????????? 3Ⅱ. 조선시대 왕비들의 주요 활동? 4Ⅲ. 조선시대 왕비별 사례 조사?? 6Ⅳ. 結論 ????????????19參考文獻 ????????????20Ⅰ. 序論유명 정치인들의 부인은 항상 관심의 대상이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국회의원의 부인들이 어떻게 남편을 도와 선거 유세를 하는지, 내조를 하는지 등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리고 부인들은 이렇게 뒷바라지만 할 뿐만 아니라 정치인인 남편의 곁에서 얼굴을 내보이며 함께 행동하기도 한다.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지금보다 더 ‘가족’적인 면을 중요시 했던 그 시대에 왕의 부인이자 한 나라의 ‘국모(國母)’로서 왕비의 모습은 더욱 더 사람들의 관심어린 시선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과 비중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예상을 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궁궐의 암투와 질시에 초점이 맞춘 왕비의 모습만을 바라보고 있다. 최근 TV 사극이나 역사소설에서 왕비들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 그 존재가 한나라의 국모라는 이미지보다는 극의 감칠맛을 더해주는 양념의 역할에 그치고 있다.역사의 정점에 있었지만 왕비들의 삶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조선의 남성 중심 정치, 가부장적 사회에 가려져 왕비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인식하여 본 논문에서는 조선시대 왕비들의 주요 활동을 알아보고, 주요 왕비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아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조선 왕실의 가려진 절반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II. 조선시대 왕비들의 주요 활동(1) 출산과 양육출산과 양육은 꼭 왕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출산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가정에서 자녀의 양육은 여성의 몫이었다. 특히 왕실에서는 국가의 대통을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야 말로 왕비의 가장 큰 의무였다. 왕자를 낳아야 한다는 것이 왕비들에겐 크나큰 스트레스였을 정도로 출산은 중요한 일이었다. 왕비가 왕자를 나갔다.왕비는, 왕이 일찍 죽게 되고 어린 세자가 왕위에 올랐을 경우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통해 어린 왕을 대신하여 실질적인 국정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수렴이란 신하와 왕비가 서로 상견할 수 없도록 발을 친다는 뜻으로, 즉위한 왕이 너무 어린 경우에 왕실의 최존장자로써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잠정적으로 왕을 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했던 정희왕후 윤씨와 함께 실제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인수대비 한씨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조선의 역사에서는 정희왕후 윤씨, 인순왕후 한씨, 문정왕후 윤씨, 정순왕후 김씨, 순원왕후 김씨, 신정왕후 조씨 등 총 6명의 왕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III. 조선시대 왕비별 사례 조사(1) 신덕왕후 강씨 / 태조 왕비조선 최초의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다. 고려 말 신흥 무인으로 전쟁터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성계는 지방 토호로서 변변치 못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에 비해, 원나라 지배 시절 고려에서 찬성사(贊成事) 벼슬까지 지냈던 강윤성의 둘째 딸인 강씨는 권세 있는 집안의 자녀였다. 함흥에 적처(嫡妻) 한씨를 두고 있었으면서도 이성계가 강씨와 혼인을 했던 것은 이러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정략적인 이유였다. 이성계는 개성의 권문세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한 든든한 배경이 필요했고, 강윤성 또한 이성계가 변방 출신이기는 했지만 그가 지닌 무력이 외적의 침입 등으로 혼란스럽던 고려 말에 장차 강씨 집안의 세력을 신장시켜 줄만 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씨는 이성계의 경처(京妻, 개성의 처)로써 고려 말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이성계의 옆을 지키며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하였다.강씨가 우선적으로 힘을 쏟았던 것은 바로 자녀들의 혼사 문제였다. 물론 처가인 곡산 강씨 집안도 세도가이긴 했지만, 이성계가 개경에서 살아남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경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가족들 덕분에 강씨는 이성계보다 정치판의 분위기나 인심의 동향을 소상히 또 정확히 읽을 줄 도 불구하고, 태조는 강씨로 인해 방번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있다. 방번이 고려 왕실의 사위라는 커다란 약점이 있었음에도 태조는 방번을 세자로 삼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결국에는 양자의 타협으로 강씨의 둘째 아들 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태조 5년(1396) 8월 13일, 신덕왕후 강씨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태조 7년(1398) 8월 26일, 방원은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 방석을 비롯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을 모두 살해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태종은 강씨를 왕비로 표상하는 공식적인 기념물과 기록을 철저히 없앴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도성 안에 있던 왕비 강씨의 무덤마저 옮겨버렸다. 태종은 아버지의 적처는 생모 한씨 뿐이며, 강씨는 첩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태종 9년(1409) 2월에 강씨의 묘를 이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비의 제례도 폐지하고, 1412년에는 강씨의 제사를 서모(庶母)나 형수의 기신제(忌晨祭) 예에 따라 3품관으로 대행하게 하였다.) 강씨의 부묘문제는 현종대에 이르러 크게 대두되었고, 서모로 강등된 지 300년 만에 왕비로 복권되었다. 고려 권문세족의 딸로 태어나 조선의 첫 왕비가 되어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삼았던 강씨는 사후에 세자뿐 아니라 자신 소생의 모든 혈육을 잃은 비운의 왕비가 되었다.비록 자신의 의지로 이성계와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결혼한 후에 적극적인 의지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 나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 될 수 있었던 강씨는, 방원을 누르고 자신의 소생을 왕세자로 책봉하게 하는 등 왕의 곁에서 왕 못지않은 정치력을 펼쳤던 인물이었다.(2) 원경왕후 민씨 / 태종 왕비태종 이방원의 왕비인 원경왕후 민씨는 고려 말에 부상한 신진사대부 가문 중에서도 대표적인 명문가였던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이었다. 민씨는 고려 우왕 8년(1382), 당시의 결혼 적령기였던 15세를 넘긴 18세가 돼서야 이방원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이방원은 변방의 시골인 함흥출신으로 크게 내세울 만한 조상행한 대왕대비로 유명하다. 그녀는 결혼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던 11세에 12살이었던 수양대군과 혼인을 한다.세조가 아직 수양대군으로서 왕위에 오르기 전이었다. 수양대군이 혼인하기 전 처음에는 정희왕후의 언니와 혼담이 오갔다. 감찰각시와 정희왕후의 집에 가니 이씨 부인이 정희왕후의 언니와 함께 나와서 마주 앉았다. 그때 정희왕후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짧은 옷을 입고 머리를 땋은 정희왕후가 이씨 부인의 등 뒤로 다가왔다. 이씨 부인이 밀어내면서 “네 차례는 아직 멀었다. 어찌 감히 나왔느냐?”하고 나무라며 들어가게 하였다. 그때 감찰각시가 이씨 부인에게 말하기를 “그 아기의 기상이 범상치 않아 보통 사람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 다시 보기를 청합니다”하였다. 감찰각시는 정희왕후를 보면서 끊임없이 칭찬하였다. 감찰각시가 입궐하여 왕에게 아뢰어 드디어 정희왕후가 정혼하게 되었다. 사람을 알아보는 감찰각시의 안목을 지금에도 칭찬한다. 『대동야승』 「송와잡설」윤씨는 어려서부터 당돌하고 도전의식이 강했으며 욕심까지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윤씨는 언니의 맞선 상대를 빼앗아 혼인한 셈이 되었고, 수양대군의 아내이자 세종의 둘째 며느리가 되었다.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왕위에 올랐다. 병약한 문종은 즉위한지 겨우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이제 겨우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였다.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3) 10월 10을 기해 정변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소문나면서 많은 이들이 주저하기 시작했다. 이때 윤씨는 중문까지 나가 망설이는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거사를 격려했다고 한다. 원래 윤씨는 수양의 계획을 말리는 입장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진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거사를 부추기는 결단력을 보인 것이다. 윤씨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은 세조도 칭찬할 정도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성공하였고, 단종 3년(1455) 윤6월 11일, 수양대군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윤씨는 조카며느리의 자리를 빼앗아 왕비가 되었다.세조내자 인수대비는 그녀를 폐비시켜버렸다. 그리고 3년 후인 성종 13년(1482) 8월 16일 사약을 받고 죽었다.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폐비 윤씨의 아들이자 인수대비의 손자였다.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복위시키려 하였으며, 폐비사건에 관계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 하였다. 손자에게도 다정다감한 할머니가 되지 못했던 인수대비는 결국 연산군에게 꾸지람을 하다 그에게 머리를 들이 받혀 죽고 말았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궁궐에서 살면서 엄격하였지만 가정적이지 못했던 한씨는 불운한 말년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5) 인목왕후 김씨 / 선조 왕비왕비에서 폐비로, 십년간의 유폐(幽閉) 생활을 거쳐 다시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기까지, 선조의 왕비인 인목왕후 김씨의 삶은 앞뒤를 예측할 수 없는 왕실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김씨는 조선 3대 궁중 문학의 하나인 『계축일기(癸丑日記)』)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선조 35년(1602) 7월 13일, 김씨는 선조와 혼인을 하여 죽은 의인왕후의 뒤를 이어 왕비가 되었다. 당시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직후였으며, 선조와 세자에 책봉되어 있는 광해군 사이의 불화가 있던 시기였다. 선조는 즉위한지 25년이 넘도록 의인왕후 박씨가 아들을 낳지 못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어쩔 수 없이 후궁인 공빈 김씨가 낳은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열등감과 위기의식으로 둘 사이의 관계는 점점 나빠졌고, 임진왜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선조는 1601년 전국에 금혼령을 내린다. 이것은 젊은 새 왕비를 들이겠다는 것이었고, 세자를 바꿀 수도 있다는 의지였다. 새 왕비가 아들을 낳는 다면 그 뒤의 상황은 예측할 수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목왕후는 1602년 첫 아이로 공주를 출생했다.그리고 선조39년(1606) 3월에 인목왕후 김씨는 아들 영창대군을 낳았다. 적통론(嫡統論)에 입각한다면 광해군의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