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계 제국을 연 정치집단-關?集團(관롱집단)의 형성과 몰락-目次목차본론1. 무천진군벌2. 주국 12대장군3. 북주 수 당 황실의 혼인관계4. 관롱집단의 지배5. 측천무후의 등장과 관롱집단의 몰락결론序論관롱이란 서위의 본거지로서 섬서, 감숙성의 위수를 따라 있는 위수분지 일대, 즉 관중지방을 가리킨다.) 관롱집단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되었고, 서위·북주 그리고 수와 당 왕조를 창설하는 주체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북위 말 과도한 한화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인 ‘육진의 난)’ 이후 선비족의 한 세력이 남쪽 중원지역으로 유동하면서 마지막으로 관롱지역에 정착한다. 당시 여러 정치세력 가운데 세력적 열세를 면하지 못하던 선비군사집단은 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그곳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한족들과 합작하여 새로운 호한 융합의 정치세력을 만들어냈다.이후 우문태는 이 지역에 정착했던 호한의 무력, 재주가 있는 자들과 결탁하여 패업을 완수했고, 수·당조는 이러한 유산을 계승, 확충하였다 황제와 이들 공신은 모두 이 ‘관롱집단’에서 배출된 자들로 이른바 8주국가문이 그것을 대표하였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 무천진 출신 군벌, 8주국 대장군, ‘북주·수·당 황실의 혼인관계’와 이후 당대 측천무후 시기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관롱집단’ 그들에대해 살펴보고자 한다.본론1. 무천진군벌수 문제 양견의 아버지 양충은 우문씨와 마찬가지로 무천진출신으로 서위 24군 창설기에 12대장군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수조를 대신한 당조의 창설자 이연의 조부 이호도 당시 주국대장군이었는데 역시 무천진출신이었다. 그밖에 주국대장군이나 대장군의 성원으로 무천진출신인 사람을 들어보면 독고, 조, 후막진, 하란 씨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들을 무천진군벌이라고 부른다.)북주, 수 , 당의 각 왕조는 모두 무천진군벌 출신자에 의하여 지배되었음이 주목된다. 그들은 모두 서위 이래 장군가문으로 본래의 출신은 결코 존귀하지 않았다. 양씨, 이씨 모두 한인 귀족 출신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호족위군은 낙양 근교 망산에서 동위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우문태는 한족 장정을 징집해 서위군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전에는 유례가 없었던 새로운 제도를 창안해 낸다. 이른바 8주국 12대장군제이다.이 제도는 8인의 대장군과 그 밑의 12대장군으로 구성된 서위의 상비군 편성을 말한다. 12대장군 아래에는 24군이 있고 그 군은 24개부의동삼사라하는 지휘계통에 의해 통치된다. 또 그 아래에 징병의 모체로서 96개의 의동부가 있었다. 이는 수당 전기 통치체제하에서의 부병제)의 기원이 된다.) 8주국 대장군의 우두머리는 우문태이고, 그 아래로 위 황실의 광릉왕 원흔(탁발흔)이 있었으며, 나머지 6주국 대장군이 12대장군을 통솔 하였다. 6주국 중에는 당고조 이연의 조부 이호와 양충이 따랐던 독고신이 있었다.)8주국 대장군 중 대야호는 당 고조 이연의 조부이고, 이필은 이밀의 증조부이며, 독고신은 수 문제 양견의 장인이자 당 고조 이연의 외조부이다. 총사령관 우문태는당 태종 이세민의 외증조부이다. 호한체제를 통해 유지되었다고 하는 수당시대의 연원은, 알고 보면 8주국12대장군제를 만든 우문태의 발상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이들은 끼리끼리의 결혼을 통해 서로간의 유대관계를 강화해 나아갔다.3. 북주·수·당 황실의 혼인관계주국 중 한명인 독고신은 황후가 된 딸이 셋이나 있었다. 우문태의 아들인 북주 명제의 황후와, 당고조의 어머니 즉 이연의 아버지인 이병의 처, 그리고 수나라 문제 양견의 처로서 훗날 수나라 문헌독고황후가 그들이다. 북주·수·당 황실은 출신지 뿐만 아니라 모두 그 선조와 동료였던 독고신을 중심으로 혼인 집단을 구성하여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4. 관롱집단의 지배당대 초기까지는 皇帝와 將相·大臣들이 같은 집단에서 나왔기 때문에 거기에 다른 지배급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 후 칙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하자 이 집단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관롱집단에 대한 파괴작업을 시도하였다. 파격적인 인재의 등용과 부병제의 파괴가 그것이었다 현종 대에 당조는 다시 4세기나 지속되던 구품관인법을 폐지하고 시험제도에 의한 관리등용을 실시하려 했던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북위 이래 현재주의의 이념을 제도로서 확립한 것이었다. 또한 향관폐지는 종래 지방귀족이 독점했던 주자사의 속관(향관이라 부름)을 폐지하였다. 이것은 과거제와 함께 문벌주의에 대한 일대 충격을 주었다.단,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문벌관료제에서 과거관료제르 이행되는 과정에서 귀족제 자체가 부정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서위 [육조조서]의 탁현량에 대한 항목에서도 귀족의 덕행과 말단관리의 실무능력을 겸비한 인물이 이상적인 관리상이 되어있어서 귀족제의 본질인 인격주의는 결코 부정되고 있지 않았다. 다만 문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문벌주의적 사고가 배제되었던 것이다.)수, 당대의 과거는 귀족적 인격을 교양시험을 통하여 인정한 제도였다. 시험과목이 경학의 소양이나 시부의 창작력에 대한 시험에 중점이 두어졌던 것도 그 한 예이다. 또한 과거합격자에게 실시되던 시험제도도 신(身), 언(言), 서(書), 판(判)이라는 귀족다운 용모, 말투, 필적, 문장을 시험하였다. 이처럼 수,당대의 과거관료제는 본질적으로 귀족제적 인격주의에 입각하였다. 다만, 문벌주의를 버리고 기회균등의 원칙을 내건 점에서, 말하자면 개방된 귀족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예전의 군벌로부터 한인에 이르는 모든 계층을 포괄했으므로 귀족제는 부정된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사회적 기반 위에서 자기완성을 이루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개방된 귀족제는 당연히 종족의 차이에 대해서도 개방되었다. 호족출신자를 상충부로 하는 관롱집단이 그 전형적인 형태였다. 일찍이 북위의 효문제가 의도했던 귀족제를 통한 세계의 통일이라는 이념은 이러한 개방체제에 의하여 실현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이념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관롱집단이라는 지배집단이 건재해야 했다. 수 문제 開皇時代의 약 20년이 경과하면 수왕조는 일종의 전환점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황태자 용을 폐위하고 진왕 광이 태자가 되었던 사건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봉기했기 때문이었다. 대업 7년 왕박이 무리들과 함께 長白山에서 농성하면서 “요동에 가서 개같이 죽어서야 되겠는가”라는 반전가를 만들어 민중을 선동했는데 이것이 전국적인 반란의 선구였다.고구려원정의 거듭되는 패배와 국내반란의 격화가 상승작용을 이뤄 수왕조는 붕괴하였다. 이와 동시에 국내적 통일을 기초로 제국질서의 확립을 지향하려던 역사적 움직임도 좌절되었다. 실패의 원인을 추궁해 보면 결국 양제의 독재적인 행동방식에 돌아가게 된다.양제가 독재자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관롱집단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그가 진의 평정작전 이래 강남의 풍물을 좋아하여 강도의 이궁에서 비운의 최후를 마쳤던 것이 이를 상징하고 있다. 즉 양제를 지지했던 것은 우문술, 우세기, 배온, 배구, 곽연 등의 총신이었다. 우문술을 제외하면 모두 한인으로 대부분 강남계,북제계의 관료였다. 우세기는 학문적 재능으로 조칙을 관장하고, 배온은 모열제도를 고안하여 수탈을 강화하였다. 배구는 양제에게 서역정벌을 권장했으며 나아가 고구려원정을 실행시킨 사람이었다. 이들은 모두 뛰어난 아부로 양제에게 선발되었던, 말하자면 간신인데 관롱계의 우문술도 결코 다른 유형은 아니었다. 그는 강남원정중 곽연과 함께 양제를 부추겨 형인 태자를 대신하여 황제에 즉위하도록 계획을 추진하여 양제의 총애를 얻었다.수왕조 말, 민중폭동이 더욱 극심하게 일어난 것은 이들 총신들이 양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정확한 정보를 전하지 않았던 데도 기인한다. 결국 정부대관 가운제도 반기를 드는 자가 나왔는데 그 선구는 낙양에서 거병한 양소의 아들 양현감이다. 양현감이 패사한 후 그 휘하에 있던 이밀(582~618)이 활약하였다 또한 태원방면을 지키고 있던 이연이 거병하였다. 양현감 · 이밀 · 이연 모두 관롱계에 속한다.당시 농민을 이끌고 봉기했던 토호세력 가운데 부병제의 장교였던 인물이 많은 것도 내란의 동기중 하나가 양제와 관롱집단 사이의 대립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연은 아들인 이세민의 활약에 힘입어 장안을 점거하고 각지의 군웅을 하지 말고 당조에서 받은 관작을 척도로 하여 개정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 결과 제1등이 황족, 제 2등이 외척으로, 최민간은 제3등으로 등급이 떨어졌다. 이 때 태종은 ‘고씨는 산동에 치우쳐 근거했고 양, 진은 강남에 치우쳐 있었다. 비록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 해도 어찌 거론할 정도가 되었겠는가?’라고 하였다 천하재통일을 달성한 것은 일류 귀족을 배출한 산동,강남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 등 관롱집단의 힘이었다는 기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태종은 이러한 생각에 근거했기 때문에 관리등용의 이념도 당연히 현재주의를 택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즉위 초기에 신속히 표명되었다. “왕은 지공무사(至公無私)해야만 천하인민을 감복시킬 수 있다. 짐과 그대들이 매일 먹고 입는 것은 모두 백성에게서 취하는 것이다. 관직은 진실로 백성을 위하여 설치된 것이기 때문에 현재를 선발하여 담당케 해야 한다”그러나 현재주의란 결코 귀족출신자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과 비귀족을 가리지 않고 재능이 있는 자는 모두 중용하였다. 태종은 진왕이었던 시기부터 문학관을 열고 18명의 학사를 두어 자신의 고문으로 삼았다. 그 가운데는 후의 유명한 재상으로 평가되는 방현령, 두여회외에도 정관시대에 활약한 학자, 문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출신지를 살펴보면 강남, 산동, 관롱 등 전지역에 걸쳐 있고 특히 위진 이래에 귀족가문이 많았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후에 24공신 안에 들어가 능연각에 그 화상이 전시되었다.따라서 수·당조 두 정권을 중추에서 담당한 것은 이른바 관롱집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지역적 집단은 아니었다. 현재주의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는 반 문벌주의의 정치집단이었다. 그리하여 구래의 귀족도 이 이념아래서 국정에 참여하는 길이 열렸다.현재주의는 결코 귀족제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귀족제의 개방화, 보편화라는 역할을 하였다. 태종의 ‘정관의 치’란 이러한 이념위에서 구축된 것이었다. 태종이 죽은 후 당왕실의 동요는 결국 측천무후의 혁명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
삼국통일은 국제전이다.-삼국통일과 국제전-◆목차- 머리말1.삼국통일은 고구려의 혼이다(고구려와 당)2 삼국통일은 국제전이다(일본과 백촌강전투)3. 삼국통일은 미완성이다(‘신라통일론’의 이해)- 맺음말- 참고문헌? 머리말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 이후 여러 국가로 분리되었던 한반도는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지고 온 유이민 세력을 흡수하여 부족국가에서 발전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를 맞는다. 지방의 족장세력은 중앙의 강력한 힘에 의해 왕권에 복속되었고, 왕권이 확대됨에 따라 율령을 반포하는 등 체제의 정비작업이 추진되었다. 이와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끊임없이 정복활동을 펴 영토를 확장시키는 한편으로는 불교가 수용되어 고대국가가 중앙집권화국가가 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삼국은 백제, 고구려, 신라의 차례로 한강유역을 차지하며 주도권을 가졌으며, 사회·경제·정치면에서도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로써 신라는 미진한 출발을 보였지만 삼국을 통일하는 주체가 되는데 발돋움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라가 국내적인 팽창만으로 삼국의 통일주체가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신라의 통일전쟁에는 당이 개입되어있기 때문이다. 당은 수 이후에 등장하여 고구려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국가로, 여·당 전쟁에서 패한 뒤에도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할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왜는 백제와 동맹관계에 있었다. 신라는 이런 당과 연합하여 나·당 연합군을 이루었고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삼국 중 중앙집권체제의 정비가 가장 늦었던 국가였던 신라가, 아무리 당의 도움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삼국시대를 마감하고 일통(一統)국가를 만들었다는 것은, 민족사적으로도 대단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삼국통일의 문제점을 간과하기에는, 그 문제점이 너무나 크다.이제 삼국이 통일되어 가는 과정과 그 안에서 발생한 여러 논쟁들을 다루며 각 파트별로 삼국통일이 가지는 의미와 역사적 의의를 탐구하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어떠한 시각에서 바라볼 것인지 알아보겠다.1. 삼국통일은 고구려의 혼이다당나 강경책을 구사해 정국을 긴장상태로 몰아가는 것이 대내적으로는 자신의 집권을 유지하는데 유리하였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이후 신라는 고립에서 벗어나려고 당에 더 매달리고 그 결과 신라와 당의 군사적 동맹으로 이어졌다. 그에 따라 고구려는 남과 북 양 방면에서 적을 맞이하는 치명적인 전략적인 열세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② 태종의 고구려정벌 단행연개소문의 정변 소식이 알려지자 당 조정에서는 고구려 정벌을 주청하는 신하가 있었으나, 태종은 산동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이유로 거듭 용병을 뒤로 미뤘다. 그런 것뿐만 아니라, 이우의 반란과 후계 문제로 촉발된 내부 갈등의 격화로 인하여 당시 전쟁을 일으킬 상황이 아니었다.한편,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비록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여 대당 강경책을 취하고 있었지만, 정면충돌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좀더 국내 정치의 기반을 닦고 나아가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력을 배양하는 데 열중하면서 되도록 대외적 긴장관계를 피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에 대한 정책일 뿐, 백제와 보조를 맞춰 신라를 공격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이에 신라로부터 다급한 구원요청을 받은 태종은 고구려에 사절을 파견하여 그 편에 ‘신라는 우리의 번속이 되어 종래 조공이 그치지 않았다. 너희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거둘지어다. 만일 재차 공격하면 망년(644년) 군사를 내어 너희를 토벌할 것이다’는 새서를 딸려 보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대꾸는 한마디로 어림도 없다는 투였다. “전에 수가 우리를 침략하는 기회를 틈타 신라는 우리 영토 5백 리를 침탈했었소.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전쟁은 멈출 수 없을 것이오.” 귀국한 사절단이 태종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여 격노한 태종은 마침내 고구려 정벌의 뜻을 밝혔다.그리하여 본격적인 고구려 원정에 시동을 걸기 시작한 태종은 정관 18년 7월, 홍주洪州?요주饒州?강주江州 등 3주에 운량선 4백 척을 건조하여 군량을 싣도록 했다. 같은 해, 10월, 태종은 방현령에게 경사의 유수를 맡기고 낙양으로 향했다. 그리했다.④ 고구려 멸망과 유민660년 12월 당 고종은 고구려 원정을 발표하였다. 이어 661년 정월 하남과 하북 등에서 모병한 4만 4천 명을 평양 방면으로 진격하게 하고, 소사업과 함께 여러 유목민 집단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갔다. 같은 해 4월, 당 고종은 철륵 출신의 계필하력, 소정방 등을 파견하였다.침공군의 진로를 살펴보면, 소정방의 전투는 661년 8월 패수에서 고구려 군과 교전해 격파하고 마읍산을 점령하고, 그 곳에 군영을 세운 뒤 평양을 포위하였다.그리고 계필하력이 압록강에서 막리지 남생(연개소문의 장남)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하였다. 이는 당의 원정군 주력인 소정방 군대의 진격로를 엄호하기 위해 계필하력에게 육로로 요동과 압록강 하류 지역을 공격하게 하여 고구려 방어군을 그 방면으로 쏠리게 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던 것 같다.이 작전은 일단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그런데 곧이어 서부 몽골 방면에 있던 철륵이 당에 반란을 일으켰다. 당 조정은 철륵 출신인 계필하력, 소사업을 소환하여 이 방면에 투입하기로 하였고 그는 급히 철군하였다. 이는 소정방의 군대가 고립되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으나 당군은 작전을 계속 수행하여 평양성을 포위하였다.결국 싸움은 장기화 되었고 날이 점점 추워지자 당군에게는 전세가 점점 불리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구려군의 반격이 본격화되었고, 평양 북쪽 교외에서 패수로 흘러드는 지류인 사수에서 방효태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고구려 군의 총공세를 간신히 막은 당군은 이후 신라군의 식량 지원을 기다리면서 퇴로를 확보하려고필사적으로 노력하였고, 신라군의 도움으로 당군은 퇴로를 확보하여 바닷길로 철군한다. 이때 신라군의 식량 공급과 지원이 없었다면 당군은 추위와 고구려의 공격으로 전멸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보듯 그간 수와 당의 침략군이 지녔던 가장 큰 약점은 군수품 보급 문제로 드러나게 되었고, 신라군의 지원 덕분에 크게 개선되었다.고구려의 불리한 정세 속에서 666년에 집권자 연개주해간 이들이다. 이들은 당의 지배를 피해 집단적으로 옮겨갔는데, 그중에는 고문간(高文簡)처럼 돌궐 묵철가한의 사위가 되어 ‘고려왕 막리지’라 칭한 이도 있었다.마지막으로 요동 지역에 그대로 계속 머문 이들이 있다. 이들은 668년 이후 당의 안동도호부 통치를 받았는데, 이곳에는 약하고 가난한 소수만 남아있었다.일부 고구려 유민은 당 제국에 충성하여 출세하기도하고 이런저런 자취를 조금 남겼지만, 당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의 대다수인 일반민은 장졸들에게 전쟁포로로 주어져 노예로 처분되기도 하였고, 변경지대나 황무지에 집단 정착하여 어려움과 천대 속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다가 자취 없이 동화되었다.※ 연개소문은 독재자인가 영웅인가?- ; 연개소문을 성품이 잔인하고 모질며, 그의 정변을 단순한 세력 싸움으로 인한 쿠데타로 보았다.- ; 고구려 내부의 남수북진파와 북수남진파의 충돌로 벌어진 세력다툼으로 사대파를 몰아낸 자주파의 쾌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의 기록은 지나치게 쿠데타 시점에 몰려있으며, 또 다른 중국의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한 기록들은 고구려의 적국이었던 당에서 연개소문을 지나치게 왜곡한 것으로 여러 문제가 제기된다.연개소문은 남과 북 양방면으로 고립되어 있던 당시 위태로운 상황에서 나라를 지켜내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끊이지 않았던 당의 침략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2. 삼국통일은 국제전이다① 7세기 왜7세기의 왜에서는 국가형성이 진척되는 가운데 밖으로부터의 선진문물의 수요에 대항 욕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6세기 이래의 백제와의 용병관계만으로는 왜가 필요로 하는 선진문물의 수요를 채울 수가 없게 되고, 또 백제는 6세기 중엽의 신라의 발전에 의해 이전과 같은 선진문물의 도입처로서의 역할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그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야마토왕권은 백제 이외의 수·당, 고구려, 신라와도 외교관계를 맺는 등 대외관계를 다면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의 야마토왕권의 대외관계는 친백제계 씨족인 소단, 즉 일본의 출병은 660년 백제의 멸망에서부터 비롯된다.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함으로서 백제가 공식적으로 멸망하는 것이 660년 7월 18일이다.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자 백제부흥군이 제일 먼저 구원을 청한 나라가 일본이다.백제부흥군의 구원요청을 받은 지 두 달만인 12월 24일 드디어 제명천황(655-661)은 출병을 결정하고 오사카의 난파궁에 행차해서 제반 무기를 준비하도록 명하고 특별히 준하국에 대해서는 배를 만들도록 명한다. 그리고 직접 북구주에 가서 구원군을 지휘하기 위해서 다음해인 661년 정월 6일 북구주의 츠쿠시를 향해서 출항한다. 도중에 시코쿠의 니키타쓰 등에 들려서 병사들을 모으면서 3월 25일에는 북구주의 나노오쓰의 이하세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다가 5월 9일에는 아사쿠라노 타치바나노 히로하노 미야로 옮겨서 본격적인 출병을 준비하다가 7월 24일 급사한다. 제명천황이 급사하자 그의 후계자인 황태자(후에 천지천황: 662-671) 중대형이 8월 1일 제명천황의 상을 이하세로 옮긴 다음, 10월 7일 해로를 따라 11월 7일 아스카노 카하라에 도착하여 빈궁을 차리고 9일까지 발애한다. 그 사이에도 출병의 준비는 진행되어 8월에는 출병의 계획이 발표되고, 9월에는 1차로 풍장과 그의 호송군 5천을 먼저 보낸다. 그리고 본대는 663년 3월 출병했다가 5개월 뒤인 8월27,28일 양일간에 사투 끝에 백촌강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백촌강 전쟁에서 패배한 뒤 확인되는 숫자만으로도 3천 여 명이상의 백제 유민들이 저예성을 근거로 하고 있던 일본군을 따라 9월 일본열도로 망명한다. 그들이 일본의 율령국가 건설의 핵을 이룬다.당시 60이 넘은 노여제의 신속한 출병 착수와 직접 모병을 하면서 북구주로 향하던 다급한 모습, 그리고 상중에도 차질 없이 출병 준비가 진행되던 상황은 백제 구원이 일본에게 얼마나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였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일본의 백제 구원군이 당군에게 패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 할 수 다.
통일신라와 당나라가 문화적으로 융성할 수 있었던 이유서론1. 당나라(1) 당나라 대외 확장 정책(2) 고시 제도의 확립과 능력 위주의 인재선발(3) 불교의 융성(4) 한족과 호족의 문화적 융합2. 통일신라(1) 당나라와의 교류(2) 서역과의 교류맺음말서론문화적으로 번성했던 국가는 국가의 이점이 있기 마련이다. 당나라는 국운이 기울었던 수나라를 대신해 국가를 건국했으며 삼국에 비해 가장 늦게 출발했던 신라는 강력한 라이벌인 백제 고구려를 물리치고 한반도에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국하기에 이르렀다.신라는 통일을 하기위해 당나라가 필요했고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당나라는 신라가 필요했다 결국 동맹은 성공했고 당나라와 신라는 각자의 견고한 세력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런 당나라와 신라는 공통점도 존재하기 마련인데 각국의 문화적으로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와 공통점을 알아보도록 하겠다.1. 당나라당대는 중국 역사상 정치적 군사적으로 강대했을 뿐 아니라 문화와 경제가 크게 번영한 시대이다. 이 시기는 중국 역사상 문화제국주의에 걸맞게 중국이라는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중국 문화의 범세계적 확대를 모색하였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유래 없는 물질적 풍요, 제도적 발전 사상과 종교의 새로운 도약, 창조적 예술성 등으로 특징지어진 시기이다.수 양제 대업 13년(617). 안문에서 황제가 돌궐족에게 포위되고 권력의 붕괴가 분명해졌을 때 이연과 이세민이 구름처럼 일어난 농민전쟁 속에 병사를 일으켰다. 다음해 5월 이연이 장안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당이라 고쳤고 무덕 7년에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이세민은 황태자가 주도한 암살 음모의 표적이 되었고 그는 2년 뒤에 황태자와 그의 다른 형제를 포함한 일당을 모두 살해하고 아버지를 퇴위시키고 정관이라는 연호를 선포했다.(1) 당나라의 대외 확장 정책당나라의 정치적 모델은 한나라였는데 한나라의 유교주의가 갖는 도덕적 이념적 체제를 이어받으려 했다. 초기의 당나라는 정관의 치세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국가를 발전 시키려 했는데 정관의 치기가 되었다.(2) 고시 제도의 확립과 능력 위주의 인재 선발당 왕조는 이전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통일 중앙 집권의 봉건국가를 세웠으며 이와 함께 관리 시험과 임용권도 중앙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신분 사회의 성격 변화가 두드러진 시기로서 혈연 중심의 신분사회에서 능력 위주의 신분 사회로 옮겨가던 때였다. 즉 개연적이고 객관적인 인간 관계가 설정되기 시작했다는 말로서 이런 변화는 과거 제도라는 제도적 장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인간의 능력을 중시한다는 기본적 입장에서 출발한 과거 제도는 선비의 질적 향상을 통해 황제로 대표되는 조정과 민중으로 대표되는 사회의 중간적 지검에 서서 상호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당대의 고시 제도는 제거와 과거 두가지를 겸용했는데 전자는 비정기적인 시험으로서 황제의 요청에 의해 시행되었다. 과거는 당나라 초기에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다가 무측천의 시대부터 중시되기 시작하여 과거를 통하지 않고는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기 어려웠다.관리가 되려고 하는 자는 먼저 지방의 주나 군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 한 후 향공 또는 거인이 되어 다시 상서성의 예부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응시해야 한다. 과거 과목으로는 수재과 명경과 진사과 명법과 명산과 도거과 등 13개나 되었다. 이 가운데 진사과의 지위가 가장 높았는데 진사의 지위는 국가의 의해서 규정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또한 당대 진사의 지위가 높았던 것은 고시의 내용과 관계가 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시 짓기를 큰 재능으로 간주하였고 진사과 시험은 시부를 위주로 치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마다 한두명을 선발하는 수재과가 가장 어려웠다.당대에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1년에 평균 20명에서 30명을 넘지 않았지만 과거 제도는 관료 내의 지배층을 판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제도는 명문대가의 자제들보다는 하류층 출신의 뛰어난 인재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제공되었다. 이 때문에 당대에는 고시 출신가 상당히 융성했는데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 경전은 대부분 범문으로 쓰여졌다. 인도와 한나라는 거리상의 차이로 인해 왕래가 어려웠으나 동진 남북조부터는 많은 스님들이 중앙아시아 인도 등으로 길을 떠나 그곳의 글을 익히고 불교 원전을 한문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런 불경 번역 사업에서 대표적인 업적을 남긴 이는 현장이다. 현장은 정관 3년 서역을 거쳐 서돌궐을 통해 천축국 즉 인도에 가서 15년 동안 불교 교의를 깊이 공부하며 56개 나라를 주유했다. 그는 정관 19년 정월에 장안으로 돌아와 태종의 지원을 받으며 불경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현장은 장안에 위치한 대자은사 주지로 있으면서 죽을 때까지 75부 1330권을 번역하였다. 또한 그의 여행 견문록 대당서역기 10권은 중외 교류사의 중요한 저작으로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불교는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서서히 중국화 되어갔는데 이것은 전통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상대적으로 불교 또한 중국 문화의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불교는 작가들의 가치관이나 생활 모습에도 영향을 끼쳐 작품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했으며 불교는 또 문학의 장르를 다양화시키기도 했는데 속강과 변문이 당대에 나타난 새로운 장르이다. 이러한 장르의 주요 특징은 강창에 편리하고 내용은 불경으로 이루어졌으며 형식은 그 당시 민간 설화와 같아 통속 문학의 성질을 지닌다.그러나 당 고조 무덕 초년에 불교 신앙의 지나친 성행으로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지 사대부들의 반감이 나타났고 심지어는 척불론 까지 나타기도 했다. 불교에 대한 적대감은 불교의 경제적 낭비로 인한 조정의 재정난에서 비롯되었으며 시간이 흐른 후에 대규모의 박해로 이루어졌고 수 많은 불당이 폐쇄되었으며 수백만 헥타르의 경작지가 몰수되었다.(4) 한족과 호족의 문화적 융합당 왕조는 외래문화에 대해서도 널리 문호를 개방하는 정책을 폈다. 당 태종은 옛날부터 중화를 귀하게 여기고 이적을 천시하는 것을 지양하고 양자를 똑같이 여기려고 노력했는데 이것을 화이여일 혹은 에 얽매여 있던 구 귀족과 사인들에게 문화적 충격뿐 아니라 당대 사회 전반에 호족의 풍속이 성행하도록 하였으며 개방 풍조를 가져왔다. 특히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남존여비 사상에도 영향을 끼쳐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순종과 정절만을 강요받던 전통적인 보수 관념의 타파로 당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이전 시대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런 문화적 관념을 통해 창조적인 활력이 넘쳤던 시대였는데 이 활력은 당대의 사회를 개방 사회로 만들었고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범으로 삼았는데 장안은 로마까지 이르는 실크로드를 이용하는 여행자들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남북이 8.6km 동서가 9.7km 에 이르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장안은 세계에서 로마와 어깨를 견줄 만큼 가장 큰 도시이면서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으로 국제적 모임 장소로 성장해 나갔다. 이런 장안의 인구는 1백만명 쯤 되었으며 장안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숫자는 5천명에 이르렀으며 다른 국가의 국교등도 자유롭게 교회나 사원을 지을 수 있었고 타국의 여행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들 외국인들은 당나라를 대당이라 칭했으며 전 세계의 문화가 융합되어 급속히 발전하게 된다. 국제화 사회의 인상을 심어 준 당나라의 화이여일 관념은 당 현종 천보 14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면서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2. 통일신라삼국의 국가 중 가장 늦게 중앙집권체제를 시작한 국가였지만 6세기 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꾀하였으며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아 7세기경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인근 나라인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게 된다. 후에 나 당 연합군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는 동시에 신라의 국력을 신장시켰으며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또한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676년 4월 삼국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후인 698년에 발해가 건국됨에 따라 남북국 시대의 남쪽을 담당하게 사라고 불리는 사신단, 학문을 익히러 간 유학생, 불법을 배우러 간 구법승, 그리고 경제적 난민과 정치적 망명객도 상당수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다. 본래 중국에서 방(坊)이란 성(城) 안에 구획된 거주지역을 일컫는 용어이다. 중국의 성은 여러 방(坊)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 방에는 방정이라는 책임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방이란 신라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방을 가리킨다. 신라방의 방정은 신라인이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방의 책임자가 총관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성 바깥에 형성된 신라인의 집단 거주 지역은 흔히 신라촌 으로 불리었다. 신라촌의 책임자도 신라인으로서 흔히 촌장(村長)으로 불리었으며, 여러 개의 신라촌을 묶어 신라소 라는 관청에서 통제했다고 한다. 신라방은 주로 바다 근처 도시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그곳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은 주로 상업과 해운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신라인의 해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업과 선박수리업 등이 발달했으며, 당나라에 왕래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교통 편의를 제공하고 현지 사정을 알려주는 역어와 통사가 있었다. 당나라의 관리가 된 신라인도 다수 확인된다. 이에 비해 성 바깥 신라촌의 경우에는 농업과 어업 등 주로 1차 산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방과 신라촌의 정치구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신라인의 자치지구이며 일종의 치외 법권이 작용했다는 견해가 유력하였으나, 최근에는 이들이 당나라의 강한 통제를 받았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해상무역과 장보고서남해안에 위치한 청해진은 물길이 복잡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물길을 모르는 사람에겐 항해도 어렵다. 그러나 완도의 물길을 아는 사람에겐 천혜의 요새가 될 수 있다. 더욱이 이곳은 중국과 일본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장보고는 여기에 다양하고 편리한 시설에 안전한 보호장치 까지 설치해 청해진을 최고의 국제 무역항으로 만든다. 이런 청해진의 시설을 보고 놀란 신라 흥덕왕은 장보고에게 청해진 대사라는 칭호를 주어 그의 활동을 인정해 주었다. 이때부터 .
청말 서원의 학당개편과 근대학제의 성립과정서 론1. 무술변법시기 서원의 학당개편 시도와 중지2. 신정초기 성급서원의 대학당개편3.학제제정의 필요와 임인,계모학제결 론서론중국의 근대교육은 전통교육의 기반 위에 서양식 신교육을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전통교육기구 중에서도 서원은 청대 중추적인 교육기관으로서 과거제를 지탱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다. 1901년 청조가 입고문을 폐지하고 각성의 서원을 일률 학당으로 개편하도록 명한 것은 청조지배체제를 유지시켜주는 관리양성교육의 중심이 서원제에서 학교제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1902년과 1904년 청조가 전국적으로 통일된 학제를 제정, 반포하고 1905년 과거제를 즉시 폐지한 것은 그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청말 근대교육의 발전과 관련하여 서원의 학당개편이 갖는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에 관한 연구는 매우 적었다. 이에 본고는 우선 무술변법시기와 신정초기 청조의 “改書院爲學堂(개서원위학당)” 정책을 과거제 개혁과 경사대학당을 위시한 전국적인 학당설립 노력과 관련하여 검토하고 아울러 당시 각성에서 진행된 학당개편에 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1. 무술변법시기 서원의 학당개편 시도와 중지서원을 고쳐서 학당으로 만들자는 주장은 일찍이 정관응 등에 의해 제기된 적이 있지만, 청조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 직후 순천부윤호 호율분과 형부좌시랑 이단분이 학당설립의 한 방편으로 건의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당시 반대로 인하여 채택되지는 않았으며, 다만 서원의 장정을 개정하여 서학의 내용을 첨가하거나, 서학을 위주로 한 신식서원을 설립하는 것이 서원개혁의 추세를 이루었다. 그리고 서원개혁의 여부는 각성의 독무,학정이나 혹은 서원의 원장을 포함한 지역 신사들에게 맡기는 형태로 방임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무술변법운동 당시 광서제는 강유위의 건의에 따라 각성의 서원을 일률 학당으로 개편하도록 명하였다. 알려진 바와 같이 무술변법운동시기 교육개혁은 과거제의 개혁과 학교의 광설이라는 두 가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광서제는 각성 부청주현의 대소 서원을 일률 중서학을 겸습하는 학교로 고치되, 성회의 대서원은 고등학으로 하고 군성의 서원은 중등학, 주현의 서원은 소학으로 하여 모두 경사대학당장정에 따라 처리하도록하며 그 외 의학과 사학 등도일률 중서학을 겸습하여 조예를 넓히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음사를 소학당으로 개편하자는 건의는 “민간의 사묘중 사전에 있지 않은 것만 학당으로 개편하도록” 고침으로써, 사묘의 학당개편에 따른 민간의 반발을 줄이고자 하였다.이 날의 상유에 의해 기존의 모든 서원의 독무, 학정은 2개월 내에 그 추진상황을 보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유와는 무관하여 통천서원 등을 학당으로 개편한 귀주를 제외하면, 상유의 반포 직후 각성으로부터는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 그래서 광서제는 추진상황을 신속히 보고하도록 재촉하였는데, 강서학정 구홍기로부터 강음의 남청서원을 고등학당으로 개편하겠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는 당시 남청서원의 규모나 영향력에 비추어 볼 때, 무술변법시기 서원의 학당개편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과였다.반면에 강서나 산동, 사천의 경우는 수구인들의 반발이 거세어 따로 학당을 설립하려고 계획학거나 서원의 장정을 개정하여 서학을 겸과하도록 하였을 뿐, 서원의 학당개편은 염두도 내지 못하였다.이러한 상태에서 무술정변이 일어나 9월 26일 서태후는 재철되었던 용관을 복구하고, 시무관보와 사민상서를 철폐함과 동시에 경사 및 각 성회에 이미 설립된 학당은 제외하고, 각 부주현에서 설립할 소학당은 그 지방관이 정형을 참작하여 민의를 들어 편한대로 하라고 명하여 서원의 학당개편을 중지시켰다. 또 사묘의 학당전용을 금지하였다. 이전에 광서제는 음사의 범위를 제한하여 ‘민간의 사묘 중 사전에 있지 않은 것’만 학당으로 개편하도록 명하였지만, 음사와 사묘 그리고 사관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각 지방에서는 지방관이나 서리가 제묘와 함께 상당수의 사묘도관까지 훼손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후에 무술정변이 일어나게 된 하나의 는 당면한 국내외적 위기와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광서제의 명의로 변법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상유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의 장점을 취하여 중국의 단점을 보충하고, 전날의 싨를 반성하여 훗날의 모범으로 삼는다”고 하여 서태후는 중서의 정치를 참작하여 조장,국정,이처,민생,학교,과거,군제,재정에 관한 개혁안을 상주하도록 명하였다. 여기서는 강유위 등의 무술개혁은 ‘난법’이지 변법이 아니라고 부정하였지만, 부강을 이루기 위해 서학의 본원을 배우겠다는 것은 사실상 무술개혁의 연장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동년 4월 청조는 독변정무처를 설치하여 신정을 추진하기 위한 제도적기반을 마련하였으며, 6월에는 무술정변으로 취소된 경제특과를 재개하였다. 동년 7월 호광총독 장지동과 양강총독 유곤일은 위의 상유에 따라 중법을 정돈하여 서법을 행하자는 내용의 ‘강초회주삼접’을 상주하였는데 그 중 제일소에서는 과거제를 개혁하고 문무학당을 설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팔고문을 폐지하고 무과거 고시내용을 개정하며 무과거는 즉시 폐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존의 과거합격자 수를 3년 1회의 향, 회시에서 3회에 걸쳐 30%, 30%, 40%씩 줄이고 그 줄인 액수를 학당에 배정하여, 결국 10년 뒤에는 과거제를 폐지하자고 제안하였다. 또 서원을 일률 학교로 개명할 것을 제안하였다. 지금 서원의 적폐가 지나치게 심하니, 반드시 그 명칭을 ‘학’으로 바로 잡아야 인심을 고무하고 잘못된 습관을 없앨 수 있다.라고 하여 무술정변 당시 서태후를 비롯한 수구인들이 서원과 학당은 ‘명리실동’하니 서원을 반드시 학당으로 고칠 필요는 없다고 한 점에 대하여 서원의 개혁은 ‘정명’의 전통에 따라 명칭부터 바로 잡아야 하므로 서원을 학교로 개명하도록 주장한 것이다.신정시기 교육개혁을 보면, 동년 8월 청조는 내년부터 과거시험에서 팔고문과 시처의 사용을 금지하고 경의와 시무를 책론하도록 하였으며, 동시에 무과거를 폐지하였다. 9월에는 무과폐지에 대한 후속조처로서 각 성회에 무비학당을 설치하여 군사인재를시하였다. 원세계의 산동학당방안은 전성의 모든 서원을 일률 학당으로 개편하라는청조의 상유와 비교하면, 성회서원 한 곳을 개편한 데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신정시기 서원개편의 상유가 반포된 후 첫 번째 사례였고, 또 산동대학당장정은 이전의 경사대학당장정과는 달리 중, 소학당과정에 해당하는 ‘비제’와 ‘정제’의 내용을 갖추었으므로, 이후 각성의 대학당 설립에 구체적인 모델을 제시하였다는데 의미가 있었다.청조도 방침을 바꿔 원세개가 제안한 방식대로 대학당을 설립하도록 명하였다. 아울러 학생들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하여 학당졸업자에 대한 장려방안을 마련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정무처와 예부는 학당선거고려장정을 제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각성대학당의 졸업생으로서 경사대학당의 복시에 합격하여 입학한 학생은 거인, 공생으로 하며, 경사대학당에서 학습 후 다시 예부의 고시에 합격한 자는 진사로 하여 등용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과거제에 종속되었던 구교육체계의 방식을 원용하여 학당출신자에 대해서도 소정의 고시를 거쳐 과거출신과 마찬가지의 과명을 수여하고 관리로 등용한다는 방침이었다.1902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각성 서원의 대학당개편은 이후 청말민국시기 거려 전국적으로 진행된 서원의 학당개편 과정 중에서 그 서막에 해당한다. 그런데 각성대학당은 설립 직후 임인, 개묘학제의 규정에 따라 대부분 각성고등학당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에, 기존에는 대학당의 설립사실이 생략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각성대학당의 설립은 학제반포 이전 서원의 학당개편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또 임인학제 제정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다.각성에서 서원을 개편하여 대학당을 설립한 것은 물론 청조의 상유에 따른 것이지만, 그와 함께 경자배관의 강제할당으로 인하여 각성의 재정이 크게 어려워져 따로 대학당을 신축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각성대학당은 대개 기존의 서원을 그대로 학당으로 개편한 것이었다. 즉 서원의 건물이 학당의 교사가 되고(부족한 부분은 근방의 토지년의 ‘경사대학당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거나, 아니면 각성의 대학당 설립을 인정하고 1898년과는 다른 새로운 학교계통 및 교육행정기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또 서원의 학당개편을 통하여 각성대학당과 중,소학당이 다수 설립되기시작하였으므로, 이들 학당을 위한 장정을 시급히 마련해 줄 필요가 생겼다. 강성대학당의 경우 청조는 ‘경사대학당장정’이나 원세개의 ‘산동대학당장정’에 준하도록 명하였지만 전자는 경사에 설립될 유일한 최고 학부를 위해 마련된 것이기에 각성의 형편에는 적합지 않았다. 그리고 후자는 산동처럼 학당을 다수 설립할 조건이 성숙치 않은 지역에는 적합하였지만, 강소·절강이나 직예처럼 신식학당이 발달한 지역에는 맞지 않았다. 또 중·소학당의 경우는 ‘산동대학당장정’ 가운데 ‘정제’와 ‘비제’에 관한 조항에 의거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과정표가 없었기 때문에 각 과목의 수업시수를 어떻게 나눌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공부할지 알 수가 없었다.따라서 전국적으로 통일된 각급 학당장정을 제정 반포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1902년 초 관학대신에 임명되어 경사대학당의 재개와 장정의 개정을 위임받은 장백희는, 이와 같은 학제제정의 필요성을 깨닫고 ‘경사대학당장정’의 개정과 함께 각성에 필요한 학당장정을 새로 제정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는 경사대학당의 총책임자로서 각성대학당을 고등학당으로 강등함으로써 경사대학당만이 유일한 최고 학부로서 각성의 학당을 통할하는 1898년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이러한 구상에 따라 장백희는 경사대학당을 신속히 재개하기 위하여 예비과 속성과 위주로 「흠정경사대학당장정」과 「흠정고선입학장정」을 마련하는 한편, 따로 「흠정고등학당장전」을 제정하여 “지금 성회에 설립된 학당은 고등학당으로 정한다. 단 대성은 물력이 풍부하고 인재가 많으므로 10년 후 그 학과정도가 대학의 규모와 같아지면 대학당을 칭할 수 있다”고 하여 성학당과 경사대학당의 위상을 분명하게 차등 지었다. 그리고 중·소학당을 위하여 「흠정중학당장정」과 「흠정소학당장전」을있었다.
신라 불교사1. 머리말2. 불교의 전래와 수용 및 공인에 대한 개념1) 고구려의 불교 전래와 수용 및 공인2) 백제의 불교 전래와 수용 및 공인3. 신라의 불교 전래1) 민간의 불교 전래2) 왕실의 불교 전래4. 신라의 불교수용1)민간의 불교수용2)왕실의 불교수용5. 신라의 불교 공인6. 신라에서의 불교수용과 그것의 정치사회적인 의미7. 맺음말1. 머리말신라의 불교 전래와 수용 및 공인에 대해서는 종래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이에 의해 신라사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신라 사상에 대한 이해가 진전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불교연구는 그 수용과 전래 및 공인에 대해 불분명하게 접근하여 개념상의 혼란을 일으켜 왔다. 이것은 지나치게 지배층 위주로 신라불교를 이해하려고 한 데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전해주는 쪽의 입장에서의 불교전래, 받아들이는 쪽의 입장에서의 불교수용, 국가의 법제적 조치로서의 불교공인이라는 입장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민간에서의 전래, 수용과 왕실에서의 전래, 수용을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이에 앞서 전래와 수용 및 공인과정이 비교적 뚜렷한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를 살펴보자.2. 불교의 전래와 수용 및 공인에 대한 개념신라 불교에 대해서 알아보기에 앞서, 불교의 전래와 수용 및 공인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하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누어 불교의 전래와 수용 및 공인을 살펴보자. 먼저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전래와 수용 및 공인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그 개념을 도출해 보자.1)고구려의 불교 전래와 수용 및 공인▶전래· 왕실 :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를 보내 불상과 불경을 보냄으로써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그리고 2년 뒤 동왕 4년(374년)에는 승려 아도가 왔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민간 : 위의 것은 어디까지나 왕실에 불교가 전래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도가 고구려에 오기 6년 전인 366년에 죽은 진나라의 승려 지둔이 이름을 알 수 없는 고구려 승려에게로 기록해 놓았다.소수림왕 2년(372년)순도에 의해 불교가 전래 → 동왕 5년(375년) 고구려가 불교를 수용 → 고국양왕 말년(391년) 왕의 하교에 의해서 불교 공인.2)백제의 불교 전래와 수용 및 공인▶전래백제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침류왕 때이다. 침류왕 원년(384년)에 호승 마라난타가 백제에 와서 불교를 전래하였다.▶수용침류왕 2년(385년 : 마라난타가 온 그 다음해) 2월, 한산에 사찰을 창건하고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와같이 백제에서 사찰을 창건하고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는 것은 불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공인아신왕 즉위년(392년)에 왕이 불법을 숭신하여 구복할 것을 하교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법제적 조치이며 백제의 불교공인을 의미하는 것이다.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고, 수용되고, 공인되는 과정과 일치한다.우리는 불교의 전래와 수용 그리고 불교의 공인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구별하여야 하는 것이다.3. 신라의 불교 전래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보다 불교 전래와 수용 및 공인에 대한 자료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신라의 불교 전래와 수용 및 공인의 계기를 포착해 내는 것이 쉽지 않다. 와 를 통하여 신라의 불교 전래와 수용 및 공인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1)민간의 불교 전래十五年, 肇行佛法. 初 時, 沙門, 自至, 郡人, 於家中作窟室安置. 於時, 遣使賜衣着香物,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 問. 見之, 稱其名目曰: "此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所謂神聖未有過於三寶, 一曰佛 , 二曰達摩, 三曰僧伽.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 時, 王女病革, 王使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甚喜, 贈尤厚. 出見, 以所得物贈之, 因語曰: "吾今有所歸, 請辭." 俄而不知所歸눌지왕대(417~457년)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신라의 일선군에 이르러 모례의 집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이때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 데 민간에 먼저 전래된 이후에 왕실에 전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왕실의 서 부역에 시달리는 이 지역 백성들에게 불교는 심리적 위안을 줄 수 있었다.이 시기 이 지역은 고구려의 침입이 계속되어 축성작업이 계속되었고, 천재지변으로 현실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전쟁으로 민중은 생활의 기반을 잃게 되어 생활이 피폐하게 되었다. 군역의 의무는 민중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었다. 더욱이 정신적으로 항상 죽음에 대한 공포로 불안해하였다. 백성들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종래 그들이 가졌던 신앙과 종교로는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었다. 여기에 외부로부터 전래된 신앙과 종교에 대한 객관적 요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따라서 이 지역은 소지왕대 아도화상이 와서 포교활동을 하는 근거지가 되는 것이다. 비처왕대(소지왕이라고도 한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와서 일선군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였다. 객관적 조건이 이미 성숙되었기 때문에(묵화자의 불교 전래, 이 지역 백성들의 주체적 수용)아도가 여기에 왔으며, 또한 포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의 불교가 처음부터 왕실에 전래 수용되어 왕권을 지지해 주는 지배이념이 되었다고 하는 견해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2)왕실의 불교수용신라 왕실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눌지왕대 이지만, 그 당시에 불교가 왕실에 의해 수용되지는 못했다. 왕실에 의해 수용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사금갑 설화이다.제 21대 비처왕(소지왕) 10년에 왕이 천천정에 순행하였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면서 까마귀가 가는 곳을 좇으라 하여 왕이 기사를 시켜 이를 따르게 하였다. 기사가 피촌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다가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 버려 길 옆에 배회하였다. 이때 노옹이 못에서 나와 글을 받들었는데 곁에 ‘이를 열면 두 사람이 죽고, 만약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하였다. 왕이 열지 않으려 하자 일관이 ‘두 사람은 서민이며 한 사람은 왕이다’고 주청하자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글중에 ‘거문고 갑을 쏘아라’고 쓰여져 있어 궁궐에 들어가 거문고 갑을 쏘니 내전 분수승(부처 이차돈의 순교설화가 저간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至是, 王亦欲興佛敎, 群臣不信, 騰口舌, 王難之. 近臣[或云.]奏曰: "請斬小臣, 以定衆議." 王曰: "本欲興道, 而殺不(-古) 辜, 非也." 答曰: "若道之得行, 臣雖死, 無憾." 王於是召群臣問之. 僉曰: "今見僧徒, 童頭異服, 議論奇詭, 而非常道. 今若縱之, 恐有後悔, 臣等雖卽重罪, 不敢奉詔." 獨曰: "今群臣之言, 非也. 夫有非常之人, {然} 後有非常之事. 今聞佛敎淵奧, 恐不可不信." 王曰: "衆人之言, 牢不可破. 汝獨異言, 不能兩從." 遂下吏將誅之. 臨死曰: "我爲法就刑, 佛若有神, 吾死必有異事." 及斬之, 血從斷處湧, 色白如乳. 衆怪之, 不復非毁佛事(이 때에 이르러 왕도 역시 불교를 흥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불교를 믿지않고 반대가 많았으므로 왕도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근신 이 차돈이[혹은 처도라고도 한다.] 왕에게 "청컨대 소신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분분한 견해를 하나로 모으소서"라고 말했다. 왕은 "본래 불도를 흥하게 하려는 것인데,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이차돈은 "만약 불도가 시행된다면 소신이 죽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자 왕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들은 모두 "요즈음 중의 무리를 보면, 머리를 깎고 이상한 복장을 하였으며, 말하는 것이 기괴하니, 이는 영원히 진실한 도가 아닙니다. 이제 만약 그들을 방치한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까 염려되오니, 저희들은 비록 중죄를 당할지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차돈은 홀로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비상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의 심오한 경지를 들어보면, 이를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강경하여 이를 꺾지 못하겠고, 너만이 혼자 견해가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 두 편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 마침내 형리로 하여금 그의 목을 王使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甚喜, 贈尤厚. 出見, 以所得物贈之, 因語曰: "吾今有所歸, 請辭." 俄而不知所歸.그런데 지금까지는 이 사료를 이용하여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주장하였다.그 이유는1. 맨 처음 ‘肇行佛法(조행불법)’ 이라는 구절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肇行佛法’을 불교가 공인된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뒤에 기록된 이차돈의 순교기사와 아울러 불교의 공식적 허용이라는 해석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차돈이 순교했다는 사실은 불교가 공인되기는 커녕 오히려 불교가 핍박받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2. ‘肇行佛法’의 해석을 다른 사료와 비교 검토- 고구려 불교 수용 : ‘海東佛法之始(해동불법지시)’라고 기록.따라서, ‘肇行佛法’이나 ‘佛法之始(불법지시)’는 불교의 공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백제의 불교 전래 : ‘佛法始於此’-마라난타가 백제가 불교를 전래해 준 것에서 ‘高麗佛法之始’-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하고 아도와 순도를 각각 있게 한 것. 그리고 이 기사가 실려 있는 조목의 명칭이 ‘順道肇麗’따라서, ‘始(시)’와 ‘肇(조)’-불교 전래와 수용을 의미그렇기 때문에, 신라의 ‘肇行佛法’을 불교의 공인으로 이해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를 불교의 수용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며 특히 왕실의 불교수용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5. 신라의 불교 공인불교의 공인은 법흥왕의 다음왕인 진흥왕 때 가서 이루어지게 된다. 진흥왕 5년(544년)에 그동안 미루어졌던 흥륜사의 창건이 이루어졌고, 출가하여 승려가 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따라서 이 이후에야 비로써 왕실이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하게 된다. 진흥왕 10년에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불사리를 보내주었다.6. 신라에서의 불교수용과 그것의 정치사회적인 의미신라의 불교공인은 백제나 고구려의 그것보다는 상당히 늦은 것이고, 그 진척의 속도도 상당히 느리다. 그러면 무엇이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을 막고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신라사회의 사회정치적인 구조와 종교사상적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