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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과 서양, 그리고 오리엔탈리즘
    Term-End#Essay20XX 제 0학기Date00/00(요일)동양과 서양, 그리고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6)』을 토대로,서양이 왜곡하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을 살펴보고 그것의 극복 필요성을 고찰 -《동서 문화 교류사》대학교 학과학번 이름【 목차 】Ⅰ. 들어가며1. 오리엔탈리즘의 폐해2. 연구목적과 방법Ⅱ. 오리엔탈리즘이란?1. 오리엔탈리즘과 형성2. 오리엔탈리즘의 학문적 특징Ⅲ. 오리엔탈리즘에 영향을 준 것들1. 미셀 푸코의 담론2. 근대사상과 문화지배Ⅳ. 오리엔탈리즘의 극복 필요성1. 지배지식으로써의 오리엔탈리즘2. 문화정체성의 복구Ⅴ. 맺으며1. 정리2. 오리엔탈리즘을 해체할 의무Ⅵ. 참고문헌Ⅰ. 들어가며1. 오리엔탈리즘의 폐해현대사회에 이상적인 삶과 존재의 양태로 인식되는 합리성, 개인주의 또는 다원성 등과 같은 가치는 아직까지도 서구의 전형으로만 이해된다. 제국주의 침략 때 이루어진 서양 중심의 문화 교류가 아직까지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물론 근대 이전에도 동서양의 문화교류는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문화교류는 비평을 위한 합리적 성찰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거의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수용하게 되는 식민지식 교류와는 그 성격이 전적으로 달랐다. 동양의 전통을 단순히 근대화 과정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여기는 일이(중국에서 일어난 ‘공자 타도’와 같은 양상도 이에 해당한다) 이전까지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문화교류적인 측면을 보면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다. 근대 이전 유럽은 동양에 비해 정치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발전이 더디었기 때문에 많은 측면에서 동양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다. 그 당시 그들에게 동양은 지금의 오리엔탈리즘에서 말하는 “수동적이고 열등한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원래 문화교류 과정은 필연적으로 타자성의 인식과 함께 문화정체성의 문제를 수반한다. 타자를 규정하기 위해선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구분”이 생겨야만 하고, 그러한 구분은 자기문화에 회의와 비판을 즘의 폐해를 단순히 서양의 오만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서양뿐 아니라 동양 내부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쳐 동양의 고유한 문화정체성을 완전히 흔들어놓았다.그러므로 우리가 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외재적으로 드러나는 식민지적 관점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재생산되어 퍼진 오리엔탈리즘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기억을 할 때에 서구에서 만들어진 관점인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접근을 하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물론 동양의 근대화 과정이 서구화의 왜곡 속에서 발전한 것을 생각해볼 때 이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동양을 타자로 만들어버리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을 계속해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면, 우리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은 결국 서양이 규정한 틀 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2. 연구목적과 방법위에서 말했듯이 오리엔탈리즘이 남긴 폐해는 매우 심각하다. 게다가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무지보단 시대적 필요에 의해 생성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동양에 대한 왜곡과 편견이 매우 서양에 유리하게 조장되어 있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형성배경자체가 제국주의 침략시절 동양을 정신적으로 복속시키고, 도덕적 책임 없이 자유로이 착취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이 연구에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바탕으로 하여 오리엔탈리즘의 형성배경과 그것을 구성하는 개념을 살펴본 후,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구조적 모순점을 짚어볼 예정이다. 그리고 그 모순점을 토대로 오리엔탈리즘의 극복 필요성과 그걸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에 대해 논할 예정이다.Ⅱ. 오리엔탈리즘이란?오리엔탈리즘이란 위에도 말했듯이 서양이 동양과 관계하는 방식으로, 서양의 관점으로 동양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만들어진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사이드에 의하면 오리엔탈리즘은 식민과 정복의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동양에 대한 서양의 오만과 편견, 그리고 그러한 서구인의 의식 다고 봤다.그렇다면 오리엔탈리즘이 더욱 확실히 자리 매김을 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서양인들이 갖는 동양에 대한 관심이란, 앞서 말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처럼 동양의 착취가 가져다 줄 부에 전적으로 쏠려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불순한 관심이 발현되는 게 가능했던 시기가 있었고(제국주의 시대), 이 시기를 거치면서 서양인들은 동양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동양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접근동기가 워낙에 불순하다보니 연구 결과 역시 서양에게 유리한 쪽으로 편중되었고, 서양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동양을 일방적으로 깎아내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당시 이집트 식민지 관리였던 크로머를 예로 들어보면, 그가 “유럽인은 타고난 회의론자이고 어떠한 가정도 증명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리라고 인정하지 않는 데에 반해, 동양인의 정신은 동양의 길거리와 마찬가지로 현저히 균형을 결여하고 있고, 그들의 추론이란 감상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라는 말로 서양의 우월성만을 철저하게 강조했다는 걸 알 수 있다.결국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 시기의 형성된 독단과 독선은 그 뒤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오리엔탈리즘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동양에 대한 객관적 지식에서 오리엔탈리즘에 접근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상속되어오고, 세속화되고, 재배치되고, 나아가 문헌학과 같은 학문분야에 의해 변형된 한 세트의 구조물로서 이해한다.2. 오리엔탈리즘의 학문적 특징오리엔탈리즘은 위와 같은 배경에서 연구의 패러다임 및 독자적인 학회와 권력구조가 갖추어지게 된 덕에, 도저히 뿌리 뽑을 수 없는 단점 몇 가지를 갖게 되었다.첫째로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동양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연구대상인 동양도 거의 텍스트에 의존한 세계였기에, 오리엔탈리즘과 동양의 관계도 지극히 텍스트에 의존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오리엔탈리즘은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탄생됐기 때문에 그 자체가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이란 거리즘은 텍스트에 의존했던 종래의 관념을 버리고, 직면한 현실을 토대로 새롭게 변화해야만 했다. 하지만 현재의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에 관하여 진실을 말하는 측면보다, 동양을 지배하는 유럽적-대서양적인 권력의 표지라는 측면이 더 강한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를 거부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들은 동양을 서양에 의해 변화되는 수동적 공간으로, 비이성과 불합리가 어우러진 신비의 대륙으로 인식하고 있다.Ⅲ. 오리엔탈리즘에 영향을 준 것들오리엔탈리즘의 형성은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나타나는 일련의 과정들과 연관이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푸코의 주장, 즉 근대 이후 서양에서 이성이 광기를 억압하는 상황을 세계무대로 옮겨 놓았다. 제국주의 침략과 함께 동양이란 열등한 세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서양에 의해 철저하게 타자화 된 동양을. 그리고 이것은 서양의 정체성을 견고하게 하는 수단이 되었고, 우열한 서양은 식민지주의, 인종차별주의, 자민족중심주의와 결부되어 서양의 동양지배를 정당화했다. 때문에 동양은 서양에 의해 물질적으로 수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열등한 민족의 구원이라는 명목으로 정신적으로도 유린당했다. 그러므로 오리엔탈리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푸코의 담론이나 근대사상을 살펴봐야 한다.1. 미셀 푸코의 담론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이성과 광기의 이분법을 통해서 서구 근대 사회를 규율과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분석하고 있는 프랑스 사상가 미셀 푸코의 담론에 많은 것을 의존했다. 푸코에 의하면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인간 정신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한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것들을 이성의 경계 밖으로 몰아내게 만들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타자화(Otherization)”하고, 새로운 “광기”의 영역을 만들어 그것들을 통제하고 감금시키려 한 것이다. 따라서 광기는 감금이 지닌 근원적인 비이성을 상징할 뿐 아니라, 반드시 교정해야할 대상이 되었다.그러므로 광인은 죄인이자 이성의 통제 능력이 미숙한 미성년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성 동양이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다.덕분에 아직까지도 대중의 이미지와 사회과학적인 여러 표상을 보여주는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동양인은 호색한이거나 피에 굶주린 악한으로 묘사된다. 언제나 동양인은 성욕과다의 변태자이고, 부정한 음모에 능란하며 본질적으로 사디스트이고, 이성이라고는 없는 하등한 족속이다. 또한 언어적 측면에 있어서도 동양은 단순화되고 있다. 언어 및 문헌학적 측면에서 동양은 정적이고 거의 이념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유형의 이미지로 제시되나, 그것이 자기실현의 과정에 있는 잠재능력을 갖는 생명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그러므로 동양은 근대 사상 속에서 현재 진행 중인 역사의 주체가 아니며, 서양을 위해 존재하는 복종된 객체로써만 등장한다.Ⅳ. 오리엔탈리즘의 극복 필요성에드워드 사이드가 자신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이나 『문화의 제국주의』에서 특히 강조하고자 한 것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자본 축적이나 자원, 영토의 탈취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그는 오리엔트가 그보다 훨씬 강대한 힘의 원천이 된 담론의 체계와 결부되어있다는 걸 지적하며, 오리엔탈리즘을 바라볼 때에 결코 제국주의의 주체성이 위와 같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통해 구축된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동양을 찾기 위해선 서구를 보증하고, 동양의 자아를 배제하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우선 벗어나야 할 것이다.1. 지배지식으로써의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는 “공평무사하고 정치와는 무관한 문화적 규율로서 인정받고 있는 것이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식민지주의적인 실천의 비열한 역사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즉, 그는 서구와 오리엔트의 실체적인 비대칭성을 주장하며, 서구와 오리엔트의 중첩된 경험(식민지와 피식민지가 공존하면서 경쟁적인 지리나 이야기)을 통해 서구와 오리엔트가 사실은 상호의존 관계였다는 걸 증명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오리엔탈리즘을 지리적 폭력이라는 인지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이쪽과 저쪽, 우리와 그들 사이에 “인식론적이자 존재론있다.
    역사학| 2014.04.12| 8페이지| 3,000원| 조회(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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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상징천황제
    Term-End#자유주제소논문20XX 제 0학기Date00/00(요일)일본의 상징천황제《일본 사회 문화사》대학교 학과학번 이름【 목차 】Ⅰ. 들어가며Ⅱ. 상징천황제의 성립1. 상징천황제의 성립배경2. 상징천황제의 지위Ⅲ. 상징천황제의 정치적 역할과 기능1. 긍정적 역할과 기능2. 부정적인 역할과 기능Ⅳ. 상징천황제를 강화해선 안 되는 이유1. 역사 왜곡과 과거 청산의 부재2. 반(反)민주적 의식의 확산Ⅴ. 맺으며※ 참고문헌서현섭『일본인과 천황』고려원, 1997가리야 데쓰 외(김원식 역)『천황을 알아야 일본이 보인다』세계원, 2002사이카와 마코토(조양욱 역)『천황을 알면 일본이 보인다』다락원, 2001아미노 요시히꼬(박훈 역)『일본이란 무엇인가』창작과 비평사, 2003정인문『일본과 일본인』학문사, 1999이규배『누가 일본의 얼굴을 보았는가』푸른역사, 1999Ⅰ. 들어가며미군정이 주도한 전후의 일본사회의 가장 주요한 변화는 ‘상징천황제’로의 이전이다. 메이지헌법이 제정된 이후 일본의 주권자이자 통치권자로써 군림하던 천황은,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상징천황으로 변모했다. 물론 연합군은 일본 군국주의의 구심점이자, 전범이 확실한 천황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인 천황제를 폐지할 순 없었기에 천황의 정치적인 권한을 전부 박탈하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그러나 수정헌법 제1조에서 규정된 것과 달리 천황은 결코 일본에서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다. 일본의 국가체제는 의회민주제임과 동시에 입헌군주제이기 때문에, 그는 일본의 이념적·실질적 지주로써 헌법에 명시된 것보다 훨씬 많은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정치가 점차 보수화되고 신보수주의 경향이 확대됨에 따라, 천황의 권한은 점점 상징천황을 넘어서고 있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런지 요즘 들어 일본은 우려를 자아낼 정도로 新국가주의적 경향을 강화시키고, 평화헌법 9조의 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수정헌법을 무효화시키고, 천황을 다시 국가 원수로 삼아 전전(戰前) 일본사회로 회귀하 있지 않다”는 조건하에 이를 수락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일본국민의 여론도 절대적으로 천황제 존속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945년 12월 23일자 에 의하면, 천황제를 지지하는 사람이 95%에 달했으며, 혁신계인 사회당의 헌법개정안조차도 “주권은 국가(천황을 포함한 국민협동체)에 있다. 통치권은 분할하여 주요부를 의회에, 일부를 천황에 귀속시킨다.”라고 할 정도였다.하지만 국제여론은 천황 및 천황제에 대해 점점 비판적으로 흘러갔다. 1945년 6월 미국에서 조사된 갤럽 여론조사에 의하면, 어떤 형태로든 천황을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60%에 달했고, 재판에 회부하여 유죄일 경우 처벌한다는 의견이 10%를 차지했다. 중국에서도 천황은 전범이며 천황제는 일본군국주의의 기반이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고, 그 외의 연합국 정부 및 그 국민들의 입장도 천황은 군의 통수권자이자 국가원수로서 전쟁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일본과 미군정으로써는 천황제를 그대로 유지할 수도, 완전히 폐지할 수도 없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결국 위와 같은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타협이 이뤄졌고, 일본의 정치체제는 신권천황제에서 상징천황제로 변모했다. 이 같은 변모에는 일본의 혼란을 원치 않던 미군정의 역할도 컸다.미국은 종전과정에서 이미 천황의 위력을 실감했었다. 천황의 항복명령을 받은 군대는 순순히 무장해제에 응했고, 천황이 종전조칙을 발표하자마자 국민들은 저항을 포기했다. 맥아더가 “천황은 백만 명의 군대에 필적한다.”라고 보고할 정도로, 천황이 일본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했다. 때문에 미국은 천황제를 폐지하여 반발을 사느니 천황제를 이용해 수월한 통치를 하는 걸 선택했다. 물론 극심한 국제여론을 고려하여 미국은 천황 히로히토로 하여금 ‘인간선언(1946.01.01)’을 하게 했다. 천황 스스로 천황의 신격을 부정함으로써 근대천황제를 근본적으로 갈아엎으려 한 것이다.그러나 천황의 신성은 선언 하나만으로 뒤엎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일본인 및 정당은 국체호지의 틀을 유지하고자 했다. 때문에 일본인에게 상징천황제는 단지 천황제의 형태가 바뀌는 것에 불과했다. 즉, 이들은 국제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정치적 타협을 했을 뿐, 국체호지를 포기할 마음도, 천황숭배를 멈출 의사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외에 모두가 바랐던 천황제의 단절은 조금도 이뤄지지 못했다.2. 상징천황제의 지위명분만 남겨둔 천황제다 보니,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천황의 지위는 신권천황과 달리 매우 미미하다. 육해군을 통수하는 권한과 전쟁을 선포하는 권한 등 입법, 사법, 행정, 군권을 넘나드는 최고 주권자로서의 강력한 권한을 다 빼앗기고,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써의 지위만을 갖게 됐다. 그런데 수정헌법에선 이 지위마저도 “국민의 총의”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 있다고 기재하여, 천황을 놀이동산을 대표하는 마스코트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렸다.또한 천황을 헌법과 법률을 초월한 지존의 존재로 보는 것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거론될 수 있으나, 실정법상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고 천황의 신성을 완벽히 부정했다. 천황의 정당성은 천손강림의 신화에 근거한 게 아니라 국민의 총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이를 공론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천황은 수정헌법 내에서 주권은 물론 신성까지도 잃은 그저 상징적일뿐인 존재로 전락했다.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수정헌법에서 천황의 지위를 축소했다고 하여, 일본사회 내에서 천황의 지위가 축소된 건 아니었다. 수정헌법의 인정이 없어도 일본인들에게 천황은 여전히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통치자였다. 실례로 일본의 공산당은 당세 위축을 막기 위해 천황제와 자위대의 존재를 인정했고, 일본의 좌파 세력도 당의 생존 전략 차원에서 천황제의 존속이 필수적이란 걸 인정했다. 또한 천황의 ‘인간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황실의 정보는 강력히 통제됐고, 천황 주변은 신성한 영역으로 포장되었다. 결국 일본 사회에선 천황의 막강한 권위를 부정하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다.그러다보니 헌표권을 지닌 존재이기에 천황의 권리가 확대되는 건 문제로 삼을 일이 아니었다.Ⅲ. 상징천황제의 정치적 역할일본사회 내에서 천황의 지위가 막강하다보니, 헌법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천황의 모든 행위는 그 자체로 효력을 갖게 됐다.1. 긍정적인 역할과 기능긍정적인 역할 중에는 첫째로 대외적 대표기능이 있다. 대외적 대표기능은 상징천황제의 천황이 비정치적인 헌법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입헌군주로서의 지위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걸 말한다. 천황은 국교회복을 추진하기 위한 외국사절과의 회식, 즉 일본정부의 초대에 의한 이른바 ‘황실외교’(1955년 12월 이후)를 하며 이러한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황실외교를 열렬히 지지하던 자민당은 이로써 더욱 득을 봤다. ‘상징천황 원수화론’을 주장하던 자민당으로썬 천황이 힘을 얻으면 얻을수록 좋았다. 하지만 황실외교는 집권세력의 정책으로만 치부하기엔 너무 효과가 좋았다. 전후 1년에 10여건에 불과하던 외국국빈의 방일횟수가 1970년에는 25건에 이르게 될 정도로 늘어났고, 전범국인 일본에 대한 국제반감도 상당히 누그러졌다. 게다가 1971년 유럽 7개국 방문과 1975년 미국방문의 대대적인 환영인파를 생각해보면, 천황의 대외적 대표기능은 두말할 것도 없이 긍정적이다. 1989년 히로히토의 뒤를 이어 천황의 자리에 오른 아키히토(명인)가 계속 이 정책을 추진하는 것만 봐도 이는 명백하다.긍정적인 역할 두 번째는 국민통합기능이다. 전시에 일본은 천황의 이름 아래 ‘완벽하게 통일된 일본국민의 의사’를 보였다. 일본국민의 총의는 천황의 절대성을 빌리면 손쉽게 얻어졌다. 물론 전후 헌법은 개정되어 천황은 국민통합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게만 기능하게 됐다. 하지만 “만세일계”로 대표되는 천황의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힘은 여전히 신성불가침대상이어서, 천황은 여전히 손쉽게 국민통합을 이끌어낸다. 모든 국민에게 공통된 가치를 의식시키는 실질적 통합이나 정치활동에 의해 국민의 일체성을 의식시키는 기능적 통합보다 천황의 힘이 훨씬 대단하다.2. 부정부의 수장이 정이대장군직(쇼군)의 서임을 받아 막부의 권력을 정당화시키고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한 것처럼 말이다.그런데 일본국헌법 제3조엔 천황의 구사에 관한 모든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이 필요하고, 내각이 그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천황이 지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내각의 실권자뿐이라는 듯이 말이다. 때문에 천황이 가지고 있는 권위성과 천황에 대한 충심은 대부분 악용되어 현(現)지배정권을 장기화하는데 쓰였다. 처음부터 보수지배세력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국가주의, 일본 민족주의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참고로 천황의 힘은 원유회, 서훈제도, 각종 수상식을 통해 지배 엘리트를 차별화 하여 서열을 부과하는 것에도 쓰였다. 헌법구조 자체가 보수를 지지하는 이상, 정치에 다양성을 가져오는 건 안타깝게도 불가능했다.부정적인 면은 더 있다. 천황의 힘은 보수 세력의 힘을 공고히 하는 데만 쓰인 게 아니라, 대중조작 및 대중의 비정치화를 이루는 데도 쓰였다. 정책의 계급성을 약화시키거나, 중요한 정치적 사안에 대한 반발·비판을 무마하기 위해서 악용된 것이다.앞서 언급한 천황부처의 유럽 7개국 순방을 예로 들어보면, 이 순방은 대외적 대표기능뿐 아니라 비정치화의 기능도 수행했다. 방문이 이루어진 1971년 10월은 사토내각이 오키나와 협정을 둘러싼 비판에 직면하고 있을 때, 천황부처가 외무대신을 동반하고 유럽을 방문함으로써 오키나와 문제에 대한 매스컴과 국민의 관심을 돌렸다. 이외에도 천황은 일본경제의 고도 성장기에 나타난 계급분열을 국민통합 이데올로기로 완화시켰고, 지배세력(독점자본)의 노-사 협조노선의 확립에도 역할을 하여 해외진출을 지지하는 내셔널리즘 확립했다.Ⅳ. 상징천황제를 강화해선 안 되는 이유1. 역사 왜곡과 과거 청산의 부재1988년 9월 21일, 런던의 대중지 「선(SUN)」은 “지옥에는 반드시 그를 위한 특별한 장소가 준비되어 있으리라!”라며 병상에 누워있는 히로히토를 저주했다. “20세
    역사학| 2014.04.12| 6페이지| 3,000원| 조회(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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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이사르가 제정을 꿈꾼 이유 분석
    0000학년도 제 0학기과목명자유주제 소논문카이사르는 왜 황제가 되려했을까- 카이사르가 제정을 꿈꾼 이유 분석Ⅰ. 서론 - 카이사르는 왜 황제가 되려했을까Ⅱ. 본론1. 시대상황 - 승자의 혼미⑴ 원로원의 통치력 상실⑵ 소규모 자작농의 몰락2. 공화정 체제 내 개혁의 실패⑴ 그라쿠스 개혁의 실패⑵ 술라 개혁의 실패3. 카이사르의 체제 자체 개혁⑴ 삼두정치의 시작⑵ 내전 평정, 제정의 준비⑶ 카이사르 사후, 제정의 시작Ⅲ. 결론 - 카이사르=황제담당교수 :학생이름 :학과 :학번 :제출일 :Ⅰ. 서론 - 카이사르는 왜 황제가 되려했을까카이사르가 판단한 로마의 문제점은 원로원을 정점으로 하는 공화정 자체였다). 포에니 전쟁 이후 승자의 혼미에 빠진 로마는, 로마를 승자의 주역으로 이끈 기반들을 하나씩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원로원의 대책이란 항상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에 지나지 않았다. 핵심을 파헤쳐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그저 문제를 가시화시키지 않도록 노력할 뿐이었다. 게다가 원로원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처럼 로마에 병폐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려는 핵심적인 개혁들을 기득권층인 원로원의 이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번번이 저지시켰다. 전쟁의 거듭된 승리로 인해 광대한 토지와 값싼 노동력인 노예의 수가 늘어나면서 빈부격차가 증대되어 로마의 기반인 자작농들이 점차 몰락하기 시작했는데도), 원로원은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토지가 집중화됨에 따라 중산층들이 병역을 지지 않는 무산계급으로 몰락하고 사회는 점차 불안정해졌는데도, 원로원들은 민중들에게 인기가 있는 몇 개의 법안만을 체결했을 뿐이었다. 결국 원로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로마를 지배하는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더 많은 관심을 쏟았으며, 당면한 문제들은 유연하게 대처해나가는 능력을 점차 상실해가면서 로마에 대한 지배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사실 포에니 전쟁 당시에 원로원이 주도하는 로마 특유의 공화정은, 군사의 천재 한니발과 강대국 카르타고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게 한 핵심이었다. 승리의 주역이 바로 로마 원로원 권고를 그대로 정책화함으로써 이 비상시국을 극복했다. 하지만 비상사태가 끝난 뒤에도 이 방식은 이어졌다. 때문에 원래는 권고할 권한밖에 갖지 않은 원로원에 권력이 점차 집중되어갔다. 게다가 그것이 로마의 패권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지중해 전역으로 확대되는 기간과 겹치면서 원로원에 집중된 권력은 엄청난 것이 되었다.전쟁 이후 원로원에게 주어진 권력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원로원에겐 외교권이 있었다. 로마의 패권 하에 있는 속주나 동맹국의 사절은 원로원에 초대되었다. 때문에 지방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조사단이 나가서 해결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둘째로 인사권이 있었다. 주요 공직은 여전히 민회에서 선출되었지만, 거기에 출마할 것을 허락하는 것은 원로원이었다. 결국 원로원에 줄이 닿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공직에 진출이 불가능했다. 셋째로 재정권도 있었다. 속주의 조세제도를 결정하는 것도 원로원이고, 국고 지불을 결정하는 것도 원로원 의원을 겸한 재무관이었다. 심지어 재무관은 5년마다 시민들의 재산 상태를 조사하는 책임자, 일종의 국세청 같은 역할도 했다. 또한 공공사업 발주권도 재무관이 쥐고 있었다. 한마디로 전쟁 이후, 로마가 쌓은 엄청난 부는 전부 원로원에 의해 가로막혀있었다. 게다가 넷째로 원로원은 사법권도 있었다. 로마 시민에게는 항소권이 있고, 속주민에게도 고발할 권리가 보장되어있지만, 그것을 재판하는 기관의 장은 원로원 의원인 법무관이었고, 평결을 내리는 배심원단은 원로원 의원들이었다. 때문에 로마를 재판하는 사법권은 원로원에게 독점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끝으로 권사권도 실제로 원로원에 있었다. 집정관 선출권은 민회에 있었지만, 선출된 두 집정관의 임지를 결정하는 것은 원로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직 집정관에게 어느 속주의 통치를 맡길 것인가에 대한 판단도 원로원이 내렸다.이렇게 거대한 제국이 된 로마의 가장 핵심적인 삼권)이 모두 원로원이 가지고 있었기에, 이러한 권력 집중 현상으로 로마가 제 기능을 상오래였다. 그리하여 결국 소규모 자작농인 중산층은 대규모 노예 농장과 경쟁에서 참패하여 실업자로 전락하게 되었고, 로마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2. 공화정 체제 내 개혁의 실패이 소논문에서 설명하는 공화정 체제 내 개혁(그라쿠스와 술라의 개혁)은 서로 상반되는 개혁이다. 둘 다 로마의 통치능력을 정비하려는 것에는 목적을 같이 하지만, 그라쿠스의 개혁은 민회를 통한 개혁이고 술라의 개혁은 원로원을 통한 개혁이다. 때문에 개혁이 실패되는 이유도 서로 상반된다. 그라쿠스의 개혁은 당면해있는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려했지만 원로원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단죄되었고, 술라의 개혁은 원로원에 보다 많은 권력을 가져다주었지만 시대에 알맞지 않다는 이유로 술라 사후에 술라파였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에 의해 폐지되었다.⑴ 그라쿠스 개혁의 실패① 티베리우스의 농지법(렉스 아그라리아) 개혁 실패티베이우스 그라쿠스의 농지법)은 오늘날의 농지개혁법과는 다르다. 로마인에게 사유재산의 보호는 자명한 기본권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광대한 토지라도 사유지는 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그라쿠스 가문이 속해있는 셈프로니우스 일족의 이름을 따서 ‘셈프로니우스 농지법(렉스 아르라리아 셈프로니아)’이라고 불리는 이 법은, 국유지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법안은 평등을 겨냥한 개혁안이 아니라 공정을 겨냥한 개혁안이었다. 왜냐하면 대다수 농민의 임타지 면적은 30유겔룸(7.5헥타르)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것이 시행될 시, 부유층이 친척이나 해방노예의 명의로 땅을 마구 빌리는 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국유지를 임의로 임차하고 있는 자들로부터 그 토지를 몰수하여 농지를 잃고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된 자들에게 빌려주어 자작농으로 복귀시킴으로써, 로마 시민층의 기반을 건전하게 하고 실업자를 구제하는 동시에 사회불안을 해소하게 만드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농지를 분배하는 것만으로는 자작농이 농가로서 자립하도록 육성하는데 성공했다고는 말할 를 우선했고, 동시에 이 법으로 이익을 얻는 도시 무산자 계급의 표가 계속 ‘민중파’의 기반으로 작용하는 것을 저지하고자 했다.술라는 통치력도 강대국이 된 로마의 실정에 맞게 확립)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와는 다르게 그는 원로원이 주도하는 과두정, 로마 특유의 소수 지도 체제인 공화정에는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원로원 체제가 원활히 작동하도록 행정개혁으로 연공서열)을 재정비했다. 왜냐하면 소수 지도 체제는 그 ‘소수’가 균등하게 ‘지도’할 기회를 부여받아야만 비로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체제이기 때문이었다. 실력을 중시하는 특례는 결코 인정되어서는 안됐다.그리고 ‘로마 진전’으로 독재관이 된 술라가 이런 정책을 펴는 것은 우습긴 하지만, 그는 로마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정치력과 군사력의 분리가 필수 불가결하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일이 또다시 되풀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때문에 그는 군단을 움직일 경우에는 반드시 원로원의 사전허가를 받게 만들었고, 루비콘 강 이하로 군대를 이끌고 오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고 군단의 ‘사병화’를 막기 위해, 군무가 끝나자마자 군단을 해산해야할 의무를 부과했다.술라의 개혁 중에서 호민관 제도의 개혁만큼 술라의 생각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은 없다. 술라는 그라쿠스 형제가 노출시킨 로마의 혼미가 통치력을 쇠퇴한 원로원과 지나치게 강대해진 호민관 권력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절대로 호민관 권력의 강대화가 로마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평등 현상의 분화구에 불과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꿈꾸는 원로원의 질적, 양적 강화를 위해서 호민관의 약체화를 꾀하였다. 물론 술라는 호민관 제도를 폐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호민관 경력자는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지만, 다른 관직에는 선출될 수 없다고 규정한 법안을 제출하였다. 그는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이 정계 진출을 위해 호민관을 노리는 것을 원천봉쇄함으로써, 호민관이 평민층을 등에 업고 원로원에 대항하는 세력이 되지 못하게 만들었다두었다. 그는 술라와는 달리 낡은 가죽부대를 과감히 버려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종래의 정치체제와 어울리지 않은 실질적인 체제를 고안했다. 그것이 삼두정치였다.⑵ 내전 평정, 제정의 준비삼두정치가 막을 내리고 기원전 49년 1월 10일, 주사위가 던져져) 시작된 내전은 탑수스 회전에서 승리하여 폼페이우스 파의 잔당을 소탕하고 아프리카를 떠난 기원전 46년 4월에 끝이 났다. 이 투쟁은 원로원 체제를 고수하려는 ‘보수파’와 거기에 반대하는 ‘개혁파’의 다툼이었고, 이 투쟁에서 승리한 것은 시대가 원한대로 ‘개혁파’였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카이사르는 드디어 과거의 술라와 마찬가지로, 거부권 행사에 방해받지 않고 체제의 개혁을 정책화할 수 있는 독재관(딕타토르))의 절대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드디어 본격적인 제정의 길이 열린 것이다.카이사르는 국가는 이념이 아니라 실제이고, 중요한 문제는 국가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느냐 아니냐에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독재관이 된 후, 그가 시작한 개혁들은 매우 실질적이었다. 특히 그것은 그의 개혁의 첫 번째가 달력 개정이었다는 것을 통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는 개혁을 시작할 때, 우선 ‘로마 세계’의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척도를 만들려했다. 그것은 달력 개정, 통화개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안정된 로마의 방위선을 확립했고, 드디어 그라쿠스 형제가 하려했던 토지개혁을 실행했다. 또한 그것 외에도 금융개혁, 사법개혁, 효율적인 속주 통치, 사회개혁, 복지문제, 수도 재개발 등을 통하여 강대해진 로마에 걸맞은 내장을 주고자 했다. 그는 제국 로마를 고도 성장기에서 안정 성장기로 이끌어가려고 했던 것이다.물론 이러한 그의 개혁의 핵심은 정치개혁에 있었다. 공화정의 잃어버린 통치능력을 회복하지 못하는 한, 로마는 개혁될 수 없었다. 우선 그는 원로원을 900명으로 늘렸다. 물론 이것은 술라처럼 원로원에 새로운 피를 수혈해서 원로원을 강화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원로원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원로원의 수를 늘렸다. 그》
    인문/어학| 2009.12.14| 13페이지| 2,500원| 조회(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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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 `해리포터` 성공원인 분석 평가A+최고예요
    0000학년도 제 0학기과목명소논문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소설 의 성공원인 분석Ⅰ. 서론 - 성공원인이 있다.Ⅱ. 본론 - 성공원인 분석1. 구조적 특징① 치밀한 플룻② 시점을 이용한 반전2. 주제적 특징① 판타지적 특성② 교훈적 내용3. 인물적 특징① 해리포터② 주변 인물들Ⅲ. 결론 - 성공원인 정리담당교수 :학생이름 :학과 :학번 :제출일 :Ⅰ. 서론 - ‘해리포터’에는 성공요인이 있다.활자의 시대를 보내고 영상의 시대를 맞은 21세기에서, 소설이 팔리기란 무척 어렵다. 소설 100권을 시장에 내놓으면 단 한 권 정도만이 주인을 찾아간다고 할 정도이다.그런데 ‘해리포터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믿기 어려운 판매부수를 기록하며, 무명이던 JK Rowling)을 단숨에 신데렐라로 만들어주었다. 게다가‘해리포터 시리즈’는 단순한 희대의 베스트셀러로만 남지 않고, ‘해리포터 신드롬)’이라는 열풍을 일으켜, 책 속 해리포터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했다. 그래서 영화 및 다양한 캐릭터 상품으로 해리포터는 우리의 주변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마법 아이템과 마법 주문 외우기 게임조차도 일상 속에 들어왔다.도대체 ‘해리포터’의 무엇이 이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만든 것인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 경이적인 성공을 거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소설‘해리포터’를 분석해서 그 비밀을 파헤쳐보려 한다. 분석할 때는, 오로지 소설적 측면에서만 분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구조와 주제와 인물로 나누어 연구해보려 한다. 우선 구조적 측면에서는 플롯과 반전(역발상)을 살펴볼 것이고, 주제적 측면에서는 해리포터가 판타지소설 및 아동소설이기 때문에, 판타지적 특징과 교훈을 중점으로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물을 분석할 때는 주인공 해리와 기타 주변인물로 크게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이제 성공한 소설 ‘해리포터’가 갖는 특징에 위와 같은 방법으로 좀 더 세밀히 알아보자.Ⅱ. 본론 - ‘해리포터’의 성공요인 분석.1. 구조적 특징우리가 단순히 시간적 경과에 의한 줄거리의 전개를 뜻하는 것이라면, 플롯은 작품의 주제를 증명하기 위해 소설의 각 요소들 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전개되기 때문에, 소설의 흥미와 재미에 대한 정도는 플롯에 따라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혼혈왕자 책 말미에 실은 조앤 롤링의 인터뷰)에서 작가가 밝혔듯이, ‘해리포터 시리즈’는 전체 시리즈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꽤나 오랜 시간동안 플롯을 짜왔기 때문에 언제 무슨 사건이 일어나야할지 정확하게 정해져 있다고 한다. 덕분에 이 소설은 ‘좋은 플롯의 여덟 가지 원칙’)을 모두 따르고 있다. 즉, 매 권마다 펼쳐지는 숙적 볼드모트와의 대립, 조금씩 성장하는 볼드모트의 어둠의 세력, 어른이 되는 해리, 매 년 새로운 사건, 해리의 출생이야기 및 감춰졌던 진실들, 주변사람들의 도움과 죽음, 그리고 홀로 남은 해리의 승리 등등이 모두가 좋은 플롯이라면 갖춰야할 조건을 만족시킨 것이다.이러한 치밀한 구조 덕분에 ‘해리포터’는 한번 손에 들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어 흡입력 있는 책이라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치밀한 사건구성과 복선을 가진 ‘해리포터’의 플롯이야말로 소설의 흡입력을 불어넣어준 1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또한 이 플롯 덕분에 ‘해리포터’ 시리즈는 긴 장편의 연재에도 불구하고 모순점을 찾아 볼 수 없는 완벽한 완성도를 갖추게 되어, ‘해리포터 시리즈’는 단순한 시리즈에 머물러 각각의 개별적인 책들로 남지 않고, 시리즈 전체를 한 권의 ‘해리포터’로 다시 엮을 수 있게 되었다.②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이용한 반전‘해리포터’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해리포터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즉 주인공인 해리의 관점(1인칭 주인공 시점)을 통해 서술되는 소설인 것이다. 때문에 독자들은 주인공의 내부에 있는 사고 및 감정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있지만, 주인공의 시점)은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그가 바라볼 수 없는 미지의 부분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그러므로 이러한 시점의 한계를 극복 못한다면,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전지적 작가 시점)을 도입하여 미지의 부분을 없애는데, 이 소설은 오히려 미지의 부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더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작가는 처음엔 소설을 보는 내내 해리의 시각에 한정을 시켜, 독자가 벌어진 사건의 이면을 볼 수 없도록 해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마지막이 되면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본 것들을 해리가 알 수 있도록 해주어, 결국 책을 덮을 때가 되면 독자가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화들짝 놀람과 동시에 왜 사건이 이렇게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있도록 해 주었다.결국 ‘해리포터’는 시점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과 동시에 반전의 즐거움, 사건을 입체적으로 재해석할 여지마저 주어, 한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 놓을 수 없는 책이 된 것이다.2. 주제적 특징그럼 이제 어떻게 뼈대를 만들었는지 그 자세한 주제 설정에 대해 알아보자.① 현실 속 판타지‘금세기 최고의 마법소설’로 불리는 이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설정은 역시 판타지다. 판타지 소설)(fantasy novel)은 원래 그 소설의 배경이 현실과는 확연히 분리되는 새로운 가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질만한 이야기를 상상하여 만들어낸 소설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마법과 모험, 신비로움이 가득 찬 마법 세계를 그린 작품을 묶어 판타지 소설이라 부른다.판타지 소설의 정착은 톨킨(Tolkien, John Ronald Reuel, 1892.1.3 ~ 1973.9.2, 「반지의 제왕」의 작가)을 기점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근 100년 정도 되었을 뿐이지만, 근래에 컴퓨터가 생활화되면서 매우 관심도가 높아진 장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해리포터’의 성공이 판타지적 설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렇지만 ‘해리포터’의 인기를 판타지 설정 덕분이라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해리포터’의 인기는 판타지가 아닌 현실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절대로 우리 세계와 다른 마법세계가 있어서 거기서 이러이러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이 소설은 매우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스토리로 세상엔 누구나람들에게 평범한 당신들도 마법세계에서는 중요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꿈을 안겨준다. 마치 주인공 해리 포터처럼 현실세계인 머글들의 세계에선 고아로 이모 밑에서 자라는 천덕꾸러기지만, 마법세계에선 영웅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결국 이러한 현실 속 판타지로 인해, 독자들은 현실과 닮은 꿈을 보면서 높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애꿎은 10과 3/4정거장만, 거길 통과하려는 아이들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지만 말이다.② 교훈적 내용피터팬이나 신데렐라에서는 주인공이 남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반해, 해리는 스스로 마법이라는 기술을 익혀 악당을 물리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마법을 배우는 과정은 어린이들에게 충분한 교육적 효과가 있으며, 이를 교육에 활용할 수 있다)고 임세규 박사는 말한다.뿐만 아니라 해리포터는 판타지 판‘다윗과 골리앗’을 통해 권선징악)이라는 전형적인 논리를 식상하다는 느낌 없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전한다. 거대한 권력과 힘을 갖춘 볼드모트를, 힘도 권력도 없는 해리가 선한 마음과 용기를 가지고 물리치는 권선징악을 말이다. 물론 이 교훈은 극히 전형적이지만,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고전에 이 구도가 내재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시 여겨왔던 내용이므로, 교육상 매우 중요한 부분임은 틀림없다.그리고 해리포터에는 여태껏 아동소설에서 다루길 기피했던 현실의 부조리도 담겨있다. 예를 들면 머글과 잡종(mudblood)이란 단어를 통해 혈통과 인종주의를 알 수 있으며, 가난한 론과 돈 많은 말포이의 대립을 통해 빈부격차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또한 완벽히 노예로 통제받는 집요정을 통하여, 현실에서 뿌리뽑아야할 노예제도를 말한다. 따라서 독자는 해리포터를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계급, 혈통, 인종, 성차, 빈부격차 등 모두가 진정으로 강력히 반대해야 하는 문제를 내재하고 있어 읽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생각하도록 만든다.해리포터가 아동소설이라 어린이들이 주요 독자층 중 하나인 점을 감안하면, 해리포터가 권장도서로 살을 붙인 인물들에 대해 알아보자.① 해리포터‘해리포터 시리즈’의 가장 사랑받는 인물은 역시 주인공인 해리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해리는 영웅소설)의 주인공답지 않게,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그 상황에서 비슷한 시각으로 고민을 한다. 때문에 대중은 그에게 공감하고, 그를 자기와 일체화시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만일 그가 매우 영웅다워 주어진 상황에 고민하지 않았다면, 범인인 대중들은 그를 이해할 수도 친숙하게 느낄 수도 없었을 것이다.게다가 주인공 해리는 절대적인 선을 대표하지 않는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선과 악, 충성과 배반 사이에서 그 나름대로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선택을 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개입할 여지가 있는, 그 안에 내포된 자유를 보며 만족감을 느낀다.또한 해리는 성장소설의 특성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변화를 겪고 변해가는 걸 보여준다. 해리가 아이였을 때 나타났던 질투심, 시기심, 자만감 등등의 아이다운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른이 되면서 매끄럽게 다듬어져간다. 이러한 변화들을 보며 우리는 그라는 인물의 사실성과 입체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이렇게 그에게 더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만든 장치들을 통하여, 대중들은 그의 고통에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그리고 대중이 그를 사랑할수록 ‘해리포터’의 성공신화는 더더욱 커졌다.② 다른 인물들물론 ‘해리포터 시리즈’성공의 공이 전적으로 해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해리가 영웅적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인물은 아니므로, 사건의 중심에 다른 주변인물들이 같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주변인물들이 해리와 같이 사건을 이끌어가고 사건의 입체성을 부여하지 않았더라면, 성공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특히 스네이프의 경우가 조연의 성격을 통해 입체적인 사건을 만들어나간 것에 대표적인 예이다. 스네이프는 시리즈 내내 볼드모트의 추종자의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해리를 미워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와 동시에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같이 보여진다. 따라서 독자들.
    인문/어학| 2009.12.14| 7페이지| 2,000원| 조회(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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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감상문
    'La Vita e Bella' 감상문이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는 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Leon Trotskii)가 암살당하기 직전에 남긴 글,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가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1. 예술성과 상업성이 영화의 예술성은 영화 초반 귀도의 로맨틱한 장면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여러 극적인 장면을 통해 보이는 별나고 우스꽝스러운 귀도의 행동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인생의 미’를 제시한다. 우연이 겹쳐 이뤄지는 필연적인 로맨틱함은 우리에게 ‘아아, 인생은 아름답구나!’라고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런데 이 로맨틱함은 우리에게 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한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앞으로 이어질 복선이 숨겨져 있다. 슬픔 가운데 기쁨이, 기쁨 가운데 슬픔이 존재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듯, 유쾌한 귀도의 행보 속에서 불운의 그림자를 짙게 깔아놓았다. 아래는 그것에 대한 설명이다.우선 귀도가 등장할 때, 그가 황태자의 차를 앞질러 도착해서 받은 환대는 사실 파시즘의 열렬한 지지자들의 환영이었다. 그것은 앞으로 이탈리아 땅에 파시즘의 초래를 말한다. 귀도가 삼촌네 집에 도착한 후, 삼촌과의 첫 대면에서 그 당시 유태인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현실을 보여준다. 아무런 이유 없이 공격받은 삼촌의 입에서는 체념이 섞인 말들을 통하여 유대인의 비극을 암시한다. 특히 이것은 말에 낙서를 한 것으로 가장 극명히 드러나는데, 유태인의 말이라는 그 낙인은 앞으로의 경고(귀도의 죽음)를 담고 있다.또한 이 영화의 예술성은 영화 중반부터 나타나는 영화의 진정한 목적을 통해 극대화된다. 이 영화는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비극적 삶을 이 영화의 특유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비참함 가운데서도 유쾌함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유대인 수용소의 생활을 ‘점수 따기 게임’이라고 속이고, 수용소의 비참함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아버지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또한 수용소에서 쫒기는 상황에서도 아내 도라에게 확성기로 안부를 전하거나, 또는 식당에서 도라에게 오페라 ‘오펜바흐의 호프만 이야기’ 중 뱃노래(Barcarolle)를 틀어준다거나 하는 등에서도 매우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결말에서 그가 독일인에게 발각되어 죽으러갈 때, 아들 앞에서 전쟁놀이의 한 부분을 연출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이렇게 이 영화에서는 글에서 제시한 것 외에도 수많은 복선과 이면들을 통해 예술성을 확보하였다. 이어 상업성을 살펴보면, 상업성은 초반 부분에 잘 드러난다. 상업성은 영화의 몰입도를 증가시키기 위한 장치들에서 찾을 수 있다. 초반의 유쾌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은 후반과 대비를 이루며 예술성을 부각시키긴 하지만, 로맨틱하지만 거의 억지에 가까운 이 필연적 장면들은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기 때문이다.이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우선 늘 다니던 길에 ‘마리아 열쇠!’라고 외치면 하늘에서 열쇠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중에 하늘에서 열쇠를 떨어뜨리는 방법을 차용했다. 또 친분이 있는 의사를 이용하여 적절한 타이밍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러가는 시간을 듣는다. 그리고 비에 젖은 모자를 쓰고 있을 때, 그 옆을 지나가던 삼촌이 모자를 바꿔가거나 한다는 등 여러 장치를 통하여 웃음을 자아내어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증가시킨다.2. 이상과 현실이 영화의 이상을 귀도가 죠슈아에게 했던 말에서 찾고 싶다. ‘이 비참한 삶이 탱크를 얻기 위한 1,000점짜리 게임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영화의 이상일 것이다.영화는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침입과 이에 대한 영국·프랑스의 대독선전에서부터, 1941년의 독일·소련 개전,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거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에 이르는 기간 중에서 이탈리아에 1930대 극우파시즘이 대두하던 암울한 시기를 그리고 있다. 유태인 개개인의 인권은 말살되고 비극적 삶이 연출이 될 수밖에 없던 바로 그 때, 영화는 귀도를 통하여 아들에게 하나의 이상을 제시한다. ‘비록 현실이 고달플지라도 그의 아들, 죠슈아만큼은 하나의 게임으로 이 비극적 현실을 인식했으면…’하는 바람을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아픈 현실에 대한 귀도의 이상은 모든 사람들의 이상으로 제시된다.3. 줄거리파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1930년대 말의 이탈리아. 약혼자가 있는 초등학교 교사 도라(니콜레타 브라스키)를 사랑하게 된 귀도(로베르토 베니니)는 그녀와 함께 마을에서 도망친다. 5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귀도는 작은 책방을 운영하며 도라와 아들 조슈아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간다.그러나 나치가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귀도와 조슈아는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고, 도라는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가족을 따라나선다. 귀도는 조슈아에게 자신들이 게임을 위해 특별히 선발된 사람이라며 1,000점을 제일 먼저 따는 사람이 1등상으로 진짜 탱크를 받게 된다고 거짓말을 한다.수용소의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귀도는 자신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는 아들을 지키려고 눈물겨운 사투를 한다. 마침내 독일이 패망하자 귀도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독일군에게 사살당하고 게임에 이기기 위해서는 독일군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믿는 조슈아는 나무 궤짝에 숨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린다. 다음날, 누가 1등상을 받게 될지 궁금하여 텅 빈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조슈아 앞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연합군의 탱크가 다가온다.4.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의 갈등여기서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을 가르자면, 유태인을 대표하는 귀도와 그를 둘러싼 극우 파시즘에 가담자라고 할 수 있겠다. 파시즘 가담자보다는 귀도와 1930년대 극우 파시즘자체가 더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는 사람은 없다. 흐름에 맞춰서 사람들도, 사람들의 인식도 점차 변해가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감독이 보는 관점에서도 잘 들어난다. 수용소에 있을 때 한 부인이 한 독일인을 가리키며 ‘예전에는 가장 착했는데, 지금은 여기에서 가장 악독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도, 시대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09.12.14| 3페이지| 1,000원| 조회(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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