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윈도우를 쓰듯 달러를 쓴다.-달러의 비밀-크레이그 카민 지음, 맹정섭 옮김200404113 사학과박성규2010.04.08 제출외환이나 주식 이런 것들과는 생판 거리가 멀게 살아온 나로서는 투자실무의 수업을 들으면서 매일 돈 굴러가는 소리를 배웠다. 하지만, 눈으로는 돈이 굴러가는데 머리에는 돌이 굴러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아시는지 교수님은 달러에 관한 책을 읽어보라 하셨다. 틈틈이 짬을 내어 책 한권을 읽었을 때는, 화, 목요일 이른 아침9시. 매일 상과대학 강의실에서 돌 굴리는 놀이를 했던 나에게, 눈동자에 달러마크를 넣어주는 새로운 놀이로 전환하게 만들어주었다.비단 많은 용어들이 실질적인 사례들을 통해 다가와서만은 아니다. 애써, 이 수업을 듣기는 했고, 이제는 돈 돌아가는 현상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려고 시도하긴 했지만, 아침마다 나는 수많은 갈등 속에서 나 자신과의 싸움부터 이겨내야 했다.물론 책 한 권이 나를 무지랭이에서 초일류 펀드매니저로 돌변시켜주진 않는다. 사실 모르는 부분을 되내이면서 읽어보아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교수님의 말씀이 모두가 의구심으로 남아있던 나를, 아~ 돈돌아가는 것이 이거구나~라는 생각정도는 하게 해주었다.$달러$ 이 이름 하나만으로 어떻게 이해를 위한 한발자국 전진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달러$ 이놈 그 자체가 해답이었는지도 모른다.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달러의 변천사는 곧, 세계 경제의 흐름의 전체를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다. 더욱이 오늘날의 외환시장에서 가장 대표되는 것 또한 달러이기에, 달러의 역사는 곧, 비단 미국인들만의 자부심 있는 역사가 아닌, 격동의 시기를 보내온 모든 이들의 밥줄이요, 삶의 단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지어다.세계 최강국을 만들어 낸 가장 근본적인 힘이 되어버린 달러, 하지만, 사실 달러의 찬란한 역사만을 조명하고자 한 것이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달러가 극동의 아주 조그만 분단국가의 외환보유고로만으로도 휘청거리는 현실을 오히려 각인시키고, 부각하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다변화되는 오늘날의 경제 구조에서, 달러는 이미 그 절대군주와도 같던 지난날의 힘은 잃었을지도 모를 이 시점에서도, 우리가 피부로 와 닿든 와 닿지 않든, 이 종이 쪼가리 하나가 지닌 힘이 어떤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비록 책 한 권의 몇 개 안되는 사례들이었지만, 많은 부분에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투자실무 수업에서 배운 짧은 기초지식으로도 나의 눈은 마냥 소설책 읽듯 흥미의 도가니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찰나의 시간에 몇 십억이 왔다갔다하는 세계에 빠진 것은 판타지나 다름없었지만, 이는 현실이었다. 당장에 일어날지도 모를, 혹은 일어나고 있을 현실.이 책을 읽으면서, 아시아의 기축통화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책에서도 언급했듯, 언젠가는 위안화가 기축통화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 문구를 읽을 때, 가장 이기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지금 위안을 사재기 해두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었다. 비단, 이런 이야기뿐만 아니라, 당장 내 통장에 있는 전 재산 백만원으로 무궁무진한 이 시장에 뛰어든다면, 나는 얼마나 성공을 할 수 있을까라는 모두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들이었다.나의 뿌리는 인문학이다. 그렇기에, 비록 투자실무 수업이라고는 하지만, 독후감에서까지, 매도니 매입이니 스왑이니 하는 용어를 쓰기는 부담스럽다. 단지 책을 읽으면서 이런 경제적인 용어를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앞으로도 수업에 임하면서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욱이, 나는 무엇보다 돈 돌아가는 소리를 돌 굴러가는 소리로만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차별 없는 사회에서 살고 싶소이다-중인들의 문화생활과 지향의식-200404113 박성규목차서론 : 중인들의 사회적 위치본론1.가. 여항인은 누구?나. 여항인의 결정체 : 조희룡다. 위항문학의 정점 : 옥계시사본론2. 그들만의 이데올로기가. 시사 ? 위항문학운동나. 여항시다. 서얼통청운동라. 문명개화사상서론앞 선 발표에서 우리는 중인들이란 과연 무엇을 지칭하고 어떤 일들을 하였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 개념이 매우 중요한 바, 본론에 들어가기 전 한 번 더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또한, 중인들의 문화생활과 관련하여 시대를 거듭할수록 보다 방대해지고 범위도 넓어지는 바, 발표를 통해 다 다룰 수 없음을 감안하여 본론1을 통해 주요 예를 통해 그 단면을 살펴보도록 한다. 그리고, 본론2를 통해 그 흐름을 되짚으며 그들의 지향의식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실질적인 결론을 대신하도록 한다.중인의 사회적 위치조선조에는 원래 인적 계층관계가 확립되어 있어서 엄격하게 계층제가 준수되었다. 초기에 법제적 신분은 양인과 천인으로 규정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분화되어 16세기경에는 양반, 중인, 평민, 천인으로 계층이 형성되었다.중인은 대체로 고려말 조선초에서부터 양반에서 도태되거나 양인에서 상승한 자들로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중엽에 이르러 하나의 계층으로서 확연히 모습을 드러낸 중간신분층이었다. 정3품까지 승진할 수 있는 역관(譯官), 의관, 산원, 율관 등 상급 기술관과 정7품이 한품(限品)인 천문관, 도류(道流), 화원(員畵) 등의 하급 기술관, 그리고 녹사, 서리들이 이에 속했다. 지방에는 관계에 들지 못한 향리, 군교 등이 있었다. 대체로 이들은 양반에는 미치지 못하나 양인보다는 우위에 있던 일련의 하층 지배계급이었다. )양반관료제 사회에서 상층 지배계급이었던 양반은 정책입안에만 관계했고, 번거로운 행정실무는 중인들이 도맡았다. 생산노동은 양인과 천민에게 책임지워 계층적인 지배구조가 완성되었다. 중인의 명칭이 유래된 데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현재 가장 유력한음에 공허한 문사를 꿰어 놓는 일을 면치 못하고 스스로 기저(機?)에 나와 홀로 성령(性靈)을 표방하는 자 몇 사람이나 되던가? 보는 안목은 일세를 보기에도 짧으면서 전인을 뛰어넘고자 하니 비유하건대 (중략) 재력(才力)이 있는 사람이 오히려 이와 같을진대 그 이하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시를 짓는 어려움이 대개 이와 같다.시를 짓는다는 사람이 ‘철습두정(?拾??)’)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제대로 하는 사람은 기저에서 출발하여 성령을 표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이 성령론이나 기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주장은 이전 사대부들이 주장하던 도문일치론과는 상치되는 것이다. 학문이나 도가 가슴에 쌓일 때 글이 되어 넘쳐나오고 도와 문은 일치된다는 도문일치론이 퇴색하고, 시나 글이란 그 사람의 영혼의 목소리이며 영감에서 나온다는 이론이며, 그 표현을 위해서는 기저를 충실하게 닦아야 한다는 것이니 영감과 습작의 중요성, 기예의 중요성을 논한 것이다.- 조희룡의 서론(書論)서론(書論)과 화론(畵論)은 서화론(書畵論)을 묶어 함께 논하는 것이 상례이다. 조희룡도 예외가 아니어서 서ㆍ화뿐만 아니라 시까지 포함시켜 시ㆍ서ㆍ화 일체를 표방하고 있다. 하나의 화폭에 제시(題詩)를 씀으로써 시와 서와 화는 한 폭의 그림 속에 담기고 혼연일체가 되어 완성된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림에 화제(畵題)가 있어야 문품과 서품이 어우러져 묘(妙)를 얻얼 수 있다 하였고, 그림에 제(題)를 붙이는 것은 원나라 이후부터라 하였다. 즉, 시ㆍ서ㆍ화가 합작되어서야 완결되는데 제시를 잘못했을 때 그림까지 망친다는 것이다.그의 서화론은 근본적으로 일종의 기예론(技藝論)이다.글씨와 그림은 모두 수예(手藝)에 속하니, 그 수예가 없으면 아무리 총명한 사람도 종신토록 배워도 할 수 없다. 때문에 손 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에 있는 것이 아니다.이러한 그의 기예우선론은 그의 스승인 김정희의 서화론과 대조된다. 김정희는,또, 예서(隸書)를 쓰는 법은 가슴속에 청고(淸高)하고 고아(古雅)한 뜻이 없고 문자향(文字香)모습은 그림으로 그려 이야깃거리로 삼는다. 열째, 동인 중 불선(不善)한 행동을 한 일이 있다면 경중을 헤아려 벌을 논한다.이하 조항들은 대부분 경조사에 대한 규정인데 특히 동인들이 상사를 당했을 때 문상하고 부의(賻儀)하는 규정이 상세하다.전반적으로 볼 때 향약의 정신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생각된다. 자신들의 모임이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일반인들이 하는 계모임과 다르다고 강조하고 있으나 상사 등 어려운 일에 서로 돕는다는 정신이나 잘못된 일을 경계하는 등의 항목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이 모임은 시사로서 문회(文會)라는 점에 그 정체성이 분명하다 할 것이고 상부상조하는 친목의 의미가 또한 적지 않다 할 것이다.1791년 12월의 옥계사 수계첩에는 최창규(崔昌圭), 이계(李溪), 임득명(林得明) 등 세 명의 자필 서문과 함께 11조의 범례가 있다.범례 11조를 살펴보면 1조에서는 장부의 의리를 강조하고 2조에서는 첫 결사한 13명 중 한 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도 세상일에 바빠서 시사의 일이 침체되고 흥하지 않아 지난번의 규약을 중수(重修)하여 폐단을 버리고 규범을 부연하니 각기 백전씩 내어 만뢰(挽?; 喪事)의 자금에 대비하고 또 1책을 꾸미려 하니 처음과 같이 옥계십경(玉溪十景)을 그려 하나의 경치에 따라 시 한편씩 부치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첫 결사 이후 이때 비로소 다시 옥계의 경치를 그리고 거기에 시를 부치는 행사를 갖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3조에서는 학문적 토론의 장을 마련하려는 시도가 보이고, 5장에서는 모임에 불참할 때는 미리 편지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6, 7조는 상을 당했을 때 문상하는 조항이고 8조는 금곡지벌(金谷之罰; 벌주)에 대한 규정이다. 9조는 회원 중 경사가 있을 때 물건을 갖고 가 치하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고유한 미속(美俗)이므로 면포 2필과 1필로 차등을 두어 축하하도록 하고 돈으로 대신하려면 1필을 200전으로 한다고 하였다.1786년 첫 결사 때의 범례가 22조항으로 산만하였는 데 비하여 5년 후인 1791년에는 11조왕산에서 흘러내리던 옥류계를 중심으로 모여 살던 이서계층을 주축으로 한 위항시인들이 1786년(정조 10년) 조직한 시사이다. 맹주인 천수경(千壽慶)의 송석원(松石園)이 그들 풍류의 중심처였으므로 송석원시사로 별칭되기도 한다. 이 시사의 주요 동인은 맹주 천수경 이외에 장혼(張混) · 왕태(王太) · 김낙서(金洛瑞) · 이경연(李景淵) 등이고 이외에 여기에 출입하던 위항시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들 시회(詩會)는 봄, 가을 두 번 열렸는데 백전(白氈-무기 없이 맨손으로 겨루는 글싸움)으로 표현되었고「世之解詩者」로 이 시회에 참가하지 못하면 수치로 여겼다 한다.서원시사의 중심지 일섭원(日涉園)은 옥계시사의 주요 동인이었던 김낙서의 전포(田圃)였는데 그의 아들 김희령(金羲齡)이 물려받아 경영하면서 시유(詩遊)하던 곳이다. 박윤묵이 옥계시사의 막내로 1849년까지 이들 사이에 내유(來遊) 함으로써 옥계시사의 정통을 계승하게 하는 데 교량 역할을 한다. 칠송정(七松亭) 역시 서원시사의 중추적 시유지였는데 동인 지석관(池錫觀) 소유로 육각현(六角峴) 위에 있었다 한다.비연시사(斐然詩社)는 옥계시사의 제2인자였던 장혼의 문하생들이 장지완(張之琬)을 맹주로 하여 조직한 모임으로 서원시사와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약간 후기에 결성된 것 같다. 맹주인 장지완, 장혼의 손자 장효무(張孝懋), 임유(林瑜), 고진원(高晋遠) 등이 장혼의 문하생이고 여기에 유기(柳起), 박사유(朴士有), 한백첨(韓伯瞻)이 가담하여 일곱 사람이 동인의 중심이었는데 스스로 죽림칠현(竹林七賢)에 자의(自擬)하면서 성회(盛會)하였다 한다. 이 시사에는 상리지가(象胥之家)에서 태어났으나 세업(世業)에 종사하지 않고 뛰어난 시재(詩才)와 기행(奇行)으로 당세를 주름잡았던 정지윤(鄭芝潤)이 동유(同遊)하였다.직하시사(稷下詩社)는 1853년 숙사(塾師)를 업으로 삼았던 최경흠(崔景欽)이 맹주가 되어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시사(蘭亭詩社)를 효방(效倣)하여 결사한 위항시사이다. 이 시사의 중요한 업적은 《풍다 안주 가득 늘어놓았네.行杯不用巡행배불용순순서 없이 술잔 돌리고手自斟酌之수자짐작지스스로 다라 마신다오玆會良未易자회량미이이런 모임 참으로 쉽지 않으니,不樂復何爲불락복하위즐기지 않고 또 무엇을 하리정례남. 「與諸友北麓避暑」부분)동인락과 산수 좋은 곳을 찾아 술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며 시를 짓는 유쾌한 시회(詩會)의 현장이다. 이런 시회 자체의 의미가 강조되어 유흥적 기분을 시로 나타내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이러한 것이 시사(詩社) 활동에서 쓰여진 시의 특징이다. 시사에서 지어진 시의 유흥적 성격은 18세기 초반 경아전의 시사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강화되고 송석원시사 시기에 오면 정점에 도달한다. 그러나 육가의 시는 이 방면으로 발달하지는 않았다. 육가 시에 이런 류의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육가 시의 특징적 면모로 볼 수는 없다. 육가는 후기의 경아전 시사, 특히 송석원시사처럼 시사 활동 자체에 최우선적 의미를 부여하는 시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육가잡영』은 기술직 중인의 형성기에 엮어진 것으로, 『육가잡영』과 최기남의 『귀곡집』은 형성기 기술직 중인, 나아가 당시 여항인의 의식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육가 시의 특징은 기술직 중인의 형성기에 상응하는 자의식의 생성과 그것을 시로 처리하는 방식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嗟爾凌雲姿차이릉운자아! 너는 구름을 찌를 듯한 자태로如何生路傍여하생로방어찌하여 길가에서 태어났는가?托根未得所탁근미득소뿌리내릴 곳 얻지 못하여幾年經風霜기년경풍상몇 해 동안 풍상을 겪었던가?病葉已凋殘병엽이조잔병든 잎 이미 시들었건만老幹猶昻藏노간유앙장늙은 가지 아직 꿋꿋하구나.倖免斧斤侵행면부근침다행히 도끼질 면했으나,顧非充棟梁고비충동량동량의 재목이 될 수는 없으리.庶可盡天年서가진천년아마도 천수는 누릴 수 있으리니,不才還無傷불재환무상재목 아니매 되레 다칠 것도 없구나.남응침. 「고송」 전문)늙은 소나무는 남응침 자신의 대리물이다. 구름을 찌를 듯 한 고고한 자태와 늙어서도 꿋꿋한 자태는 타고난 자질과 능력의 비범함을 다.
조선의 르네상스...18세기, 그리고 또 하나의 천재 茶山지도교수 : 김동철 선생님200404113 사학과 박성규제출일자 : 2008. 05. 29일까지목차들어가는 말본론1. 시대적 배경본론2. 정약용의 정치 교육 철학 사상맺음말들어가는 말조선을 생각하면 많은 인물들이 떠오르곤 한다. 다른 시대보다도 사료가 많고, 또한 사극열풍에 힘입어 더욱 관심이 가져지고는 한다. 하지만, 주로 다루는 혹은 접하는 인물들은 세종, 정조 등 왕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릴 적, 사극을 좋아하던 나로써는 왕이 모든 것을 다 하는 줄로만 알고, 잘되든 못 되든, 정치라는 것이 임금 하나면 다 되는 것으로 여겨왔었다. 그렇기에 이 번 한국 중세사(Ⅱ) 과제의 주제 선정에 있어서, 당연히 조선의 역대 왕들에 대해서만 떠올리고 있었다. 특히, 나라가 뒤숭숭한 이 시점에, 정치라는 것의 시초가 되는 것이 흔히 이야기 하는 1인자의 정치적 역량 내지 방향이기에, 어떤 정치가 正道라고 생각 할 수 있는 것일까? 라는 의구점이 생겼고, 세종이나 정조 혹은 태종 성종, 그리고 광해군이나 고종에서 이리저리 갈등되기도 하였다. 요즈음 TV 드라마에 더욱이 세종이나 정조를 다루는 사극이 열풍이기도 하여, 나의 마음이 확 끌리기도 하였으나, 무슨 계기였을까? 도서관에서 책을 찾던 나에게 문득 목민심서가 눈에 들어왔고, 민을 다스리는 마음가짐을 기록한 책(?)이라는 그 문구가 가슴에 와 닿아 꺼내들었다. 거기에 예전 한문 교양 과목 때 들었던 정조의 강연과 거기서 혜성처럼 등장했던 사나이 정약용의 이야기가 오버랩 되었고 그리하여 여차여차 나의 Report는 처음의 의도와는 다른, 당대의 절대적이면서도 학문적 지식 또한 절정에 달했던 천재 군주 정조가 아닌 그 후광에 가려 덜 주목받는다고 생각이 들긴 하지만, 역시 또 하나의 천재인 茶山 丁若鏞선생의 내면의 세계로 여행하고자 한다.본론1. 시대적 배경정약용을 기준으로 본 조선 후기 영ㆍ정조, 순조 時代 政局정조의 생애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정약용의 연관성에 있어서,내가 만약 邪學인 줄 알았으면 어찌 감히 믿겠는가. 그것이 大公至正하고 극히 진실된 道인 것을 알기 때문에 연전의 拜金 후에도 처음부터 개혁할 마음이 없었으며 비록 만 번 刑戮을 받더라도 조금도 悔悟치 않겠다.)하며 천주교를 시인하였으나, 이 후 무슨 연유에서인지 형들과의 함께 하는 마음을 돌린 채 천주교도들의 세례명이라든지 그 외 여러 가지를 실토하였고, 벽파에 협력하는 자세까지 보이게 된다.) 그는 이러한 것과 결정적으로 정약종에 보낸 편지가 계기가 되어 사형을 모면하였다고 본다.禍色이 박두하니 邪學을 믿으라고 慫 하면 내가 장차 손수 칼로 찌르겠다.정약용 시대의 경제 및 향촌 사정농업조선왕조의 농촌사회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크게 황폐했으나 17?18세기에 걸친 복구과정을 통해 그 영농법을 개선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여 갔다. 이앙법 및 광작농업, 상업적 농업의 발달은 조선왕조 후기 영농법 발달의 두드러진 점이라 볼 수 있다.조선왕조의 전기에도 경상도지방의 일부에서는 이앙법이 나타나고 있었지만, 후기, 특히 18세기에 와서는 거의 일반화 되고 있었다.벼농사에서의 이앙법 발달은 농민들에게 크게 두 가지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첫째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었고, 둘째 생산성이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종래의 직파법에 의한 벼농사는 세 번 내지 네 번의 제초작업을 해야 했지만 이앙법에 의한 농사에서는 두 번 내지 세 번만 제초하면 되어 노동력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른바 광작을 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농가마다의 경작가능 면적이 늘어난 것이다.18세기 말엽에는 付種法으로는 10斗落)도 농사짓지 못했던 농가에서 이앙법으로는 족히 1~2石落이나 농사지을 수 있으니 광작하는 농가가 많아졌고 이 때문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매양 농토 얻기가 어렵다고 한다.조선 후기 농업경영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여 역시 농가의 소득을 높여 간 점이다. 주요 작물로는 쌀, 직물류의 원료), 채소, 약제, 국내의 낙후한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있었고 또한 농촌에서 성장하고 있는 자영수공업의 발전문제에 있었다.향촌사회의 권력구조 변동조선왕조의 지배계급은 그들의 정치?사회경제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각종의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장치는 지주제와 신분제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었는바, 향촌사회에 있어서 그것은 在地土族과 官과의 상호견제 보완 하에서 운영되었다.조선후기에 들어와 전반적인 사회변동이 야기되었을 때 기존 장치는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지주제 전개에 따른 경제구조의 변동과 그로 말미암은 상?하 신분질서의 동요는 향촌사회를 커다란 혼란 속으로 내몰았다. 여기서 기존 지배층이라 할 재지토족은 간단없이 그 안정책을 강구하고 있었으나, 이미 자체분열과 힘의 한계로 인해 향촌사회의 주도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이에 봉건정부는 더 이상 지방 지배를 사족의 손에 맡길 수만은 없었으며, 관권에 밀착된 세력과는 계속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그 특권을 보장해 주는 한편, 새로이 성장하는 세력을 적절히 포섭하면서 이들에게도 일정한 특권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새로이 성장하는 세력으로 보면 그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수탈이 되는 것이었지만 관권을 배제할 수 있는 힘의 축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에 적절히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 과정에서 자연 신?구세력간의 마찰이 야기되고 있었던 바, 왕권강화의 시기에 표면화된 鄕戰은 새로이 鄕權에 참여하고 있던 세력에 대한 기존세력의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在地勢力간의 갈등과 신?구 교체는 어느 시기에도 존재하는 것이겠으나, 과거에 문제시되지 않던 사실이 18세기 이후에 들어와 중앙정부에서까지 거론되게 되는 것은 조선후기 사회 발전의 한 단모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본론2. 정약용의 정치. 교육. 철학 사상목민심서를 통해 본 정치관목민심서는 정약용이 귀양살이가 끝나던 순조18년에 완성된 책이다. 이는 목민관 즉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기록한 책으로써, 그가 경험했었던, 지방 인사들을 만나게 되면 거기에는 사사로운 정이 이루어지게 되고 청탁을 받아들이게 되어 정사가 공정을 잃게 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방의 유력한 인사가 일없이 관부를 찾아오는 것은 물론, 친척이나 옛 친구까지도 가까이 하지 말며 조정 권귀의 청탁이라도 이를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관기가 엄숙하고 청탁이 행하여지지 않는 공정하고도 밝은 행정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현 이명박 대통령 정권 준비기간에 각종 언론에서 보도되는 뉴스를 보면, 아무리 뜻을 같이 하는 것을 보여주는 의도는 좋으나, 그 구성체계가 같은 종교적 그리고 출신지방 내지 출신학벌에 치중되었다는 것은, 비단 이명박 정부뿐만이 아니겠지만 국민을 다스리는 입장에서 보다 어디 하나에 치우치기 보다는 인재를 볼 줄 아는 시각과, 이럴 때 일수록, 토사구팽이 아닌, 좀 더 넓은 의미에 국민들에게 자신의 인재관을 내비춰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기에 이글을 인용하였다.봉공육조 -2장 守法법이라는 것은 임금의 명령이니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라 할 수 있다. 굳게 지켜서 흔들리지도 말고 빼앗기지도 말며 무릇 인욕이거든 물러가 천리의 유행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중략...) 해가 없는 법은 지켜서 변경하지 말아야 하며 관례의 이치에 맞는 것은 준수하여 잃지 말라. 읍례라는 것은 한 고을의 법이니 그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은 고쳐서 지켜야 한다.봉공육조는 명을 얼마나 잘 받들고 이행하느냐를 언급한 부분이다. 아쉽게도 2장에서 보이는 수법에서 다산선생 역시 이 부분에서는 한계를 보이는 것은 法者君命也. 즉 ‘법이라는 것은 곧 임금의 명령이다’ 라는 말이 나오는 부분에서 보시다시피 이 는 군주 전제 제도하의 법 이론으로서 오늘날의 입법정신과는 거리가 먼 것을 느낄 수 있다.4장 文報공용문서의 문안은 마땅히 정밀하게 생각하여 자신이 지을 것이며 아전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된다.(중략) 폐단을 말하는 서장, 청구하는 서장, 방색하는 서장, 변송하는 서장 등은 반드시 그 문사가 사리에 맞고 정수 있다. 과년하도록 혼취하지 못한 사람은 관에서 마땅히 서둘러 주어야만 한다. 혼인을 권장하는 정사는 列聖의 遺法이니 令長은 마땅히 힘써 따라야 한다. 해마다 맹춘이면 과년하여도 혼인하지 못한 자를 가려내어 중춘에는 성혼시키도록 한다. 합독하는 정사도 또한 행하여야 할 것이다.환과고독. 즉 홀아비, 과부, 아버지나 어미를 여읜 사람들에 대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책을 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결혼을 중재하여 국가의 기반이 되도록 마련하여야 함을 뜻하는데, 이는 독신율이 증가하고 반면 이혼율이 팽배해지고 있는 현실을 국가가 나서서 회복해야 한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4장 哀喪喪事가 있으면 요역을 면해 주는 것이 옛 도리이다. 스스로 전결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면제해 주어도 좋다. 백성 중에는 지극히 곤궁해서 죽어도 염하지 못하고 구덩이에 버리는 자가 있는데 이럴 때에는 관에서 돈을 주어 장사지내도록 해야 한다. 혹 기근과 전염병의 유행으로 사망자가 속출할 때에는 거두어 묻는 정책과 진휼을 병행하여야 한다. 혹 눈에 뜨이는 것이 마음을 슬프게 하여 측은함을 견딜 수 없거든 곧 마땅히 구휼할 것이며 더 이상 뒷일을 생각하지 말라. 혹시 먼 객지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사람의 널이 고을을 지나게 되면 그 운구를 돕고 비용을 돕는 것을 충후하게 하도록 힘써야 한다. 향승이나 이교가 상사를 당했거나 본인이 죽었을 때에는 마땅히 부의를 주고 조문하여 온정을 남기도록 하여야 한다.옛날에는 여러 가지 행사 중에서 무엇보다도 사람이 죽었을 때 장사지내는 일을 가장 큰 일로 생각하고 또 소중히 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만일 동네에서 극빈한 사람이 죽어서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처지라면 관에서 보조해주고 이웃 사람들이 서로 협조해서 장례를 치러 주는 실정이었고, 행려의 사망이라든지 무연고자의 사망 따위는 관에서 거두어 묻어주고 있다.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이를 슬퍼하며 최대의 성의를 베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이 다음 장부터는 이. 호 .예. 병. 형다.
중국사회의 지속과 변화- 1550 ~ 1949 -담당교수 : 최덕경 교수님200404113 사학과박성규처음 교수님께서 ‘중국사회의 지속과 변화’라는 책을 읽고 서평을 써오라는 말을 듣고 책을 사서 펼쳐 보았을 때, 말 그대로 눈 앞 은 절망감이 가득 하였다. 책을 아무리 읽으려 해도 딱딱함 그 자체였고, 내용 역시 누구의 말을 빌리자면 ‘그래프’를 보는 듯한 기분 이였다. 나름대로 내용을 전체는 아니더라도 무엇을 말하는지 혹은 미흡하지만 나의 관점과는 무엇이 다른지를 비교해 보려 하였고 이렇게 서평을 쓴다. 서평을 써 본적이 없어 양식에 들어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사학과 04학번들을 몇 주간 괴롭혔던 ‘중국사회의 지속과 변화’에 들어가 보기로 한다.교수님께서 책을 읽으면서 서양인이 바라보는 ‘아시아’(나는 여기서 중국이라고 말하고 싶다.)의 관점과 전통을 변화시키는 요인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유심히 보길 바란다고 하셨다. 보통 내가 아는 서양인의 관점은 ‘제국주의’혹은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그래서 아시아라는 동방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자신들보다 저하된 문화를 영위해 나가는 걸로 보아왔다. 세계 여러 국가들이 몇 안 되는 두려움을 가지게 만드는 국가인 ‘중국’ (수 천년을 함께 해온 우리나라가 보았을 때도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겨온) 또한 자신들의(유럽 혹은 서방의) 문화보다는 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이것들은 책의 곳곳에서 인용된 글들을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고 본다. 내용들을 봐도 ‘중국’이란 나라에 대해 명?청 시대 이후로 정체된 국가로만 보아오고 내적인 수많은 움직임들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기까지 한다. 이 책을 쓰신 저자까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처음부터 글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역시도 겉핧기 식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기본적인(중국의 변화는 서양의 영향으로 인하여 변화한)관점을 벗어나 중국 내적 요인들부터 면밀히 다져본 후 서양의 영향으로 더 가속화 된 것이라고 본다. ‘인간’즉 ‘인구’라는 작지만 큰 소재로 시작하여 장(part)이 거듭 될수록 이러한 변화의 원인들 즉. 농업, 상업, 수공업 등에 관하여 다루면서 인과를 찾고 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중요한점은 가장 기본적인 시점은 중국인. 다시 말해 중국사회 자체의 흐름속에서 원인을 찾고 차츰 개방되어 가는 17~19세기로 넘어오면서 서양의 영향으로 인한 변화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책의 내용에서 보면 놀랍도록 중국은 살아남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저자가 중국을 표현하기엔 비참함 이였다. 하지만 중국은 학자들이 ‘원인’이란 것들을 알아내려 매달리게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생명력이 유지 된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역시 ‘인구’ : 17세기보다 분명 19세기는 내?외적으로 더 힘겨운 상황이였고 조사 자료를 보아도 인구가 증가할 만한 요인은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더 감소할거라고 생각 하였지만 ‘중국인’은 살아남은 것이다.2~3장에는 중국 사회를 알아볼 계기를 마련해준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중국 사회를 너무 ‘비관적’인 자세로만 본다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인지도는 동?서양 모두 낮았었지만 유독 중국의 문화풍토에 대해서만 꼬집는 듯하여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성’뿐만이 아니다. 분명 공시적으로 본다면 18~19세기까지는 동?서양 모두 대중(중국에서는 대다수의 농민이 되겠고 서양에서 보자면 무산계급(proletariat))의 삶은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산업혁명 이후의 노동자들의 투쟁 등을 통해서 서양 역시 대중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장 보다 유독 2,3장에서 안타까움들을 많이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동질성을 느끼지 못하는데 따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국이나 우리나라 같은 경우엔 유교적 영향이 매우 큰 나라이며 과학의 중요성보다는 전통 등을 생각해 왔기 때문에 주술적(미신적)잔재도 많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비록 책에서 제사나 조상에 관하여 언급은 하지만 그것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또한 1인당 필요한 경지면적에 있어서도 1930년대 전후의 잘나가는 미국과 비교한다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나 싶다.하지만 그래도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중국의 변화에 대한 시선이다. (비록 몇몇의 오류가 있다고 여겨지지만) 중국의 정치적 혹은 사회적 요인에서 그 시발점을 찾고 서양의 영향을 가미하는 방식을 고수해온다.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여태껏 생각해왔던 ‘중국은 정체되어 있는 국가’이며 중국을 깨운 것은 ‘서양’이다. 라는 틀을 깰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책의 내용을 따르듯이) 중국은 근대, 현대로 넘어 오면서 많은 도전적이고 새로운 물결들이 일어났었다. 자신들이 유지해오던 전통을 조금씩 깨부수는 것도 있었고 1차적인 원인은 ‘살기위해’서 이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에 맞게 바꾸어 왔고 이러한 변화는 확실히 서구의 요소가 많이 개입되게 된다는 것을 느낀다. 9장의 청년문화의 등장이나 개인주의, 그리고 여성해방운동은 서구적 지식이 유입되거나 서구적 문물에 대항하기 위해 교육이 발달하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지식인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것이 더욱 발전하여 중국인이 몇 천년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전통’에 대해 도전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중국을 있게한 혹은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가로막았던 양면성의 ‘가족주의’에 대한 도전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교수님께서는 전통을 변화시키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눈 여겨 보라고 하셨다. 처음 생각하기엔 나 역시 중국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편전쟁을 전후한 서양문물 이라고 생각 하였지만 그것은 훗날 더욱 가속화 시켜주는 ‘촉매’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서양이 아닌 중국인이 되어 본다면 하나는 ‘사람’인 셈이다. 여러 다른 나라들 보다 많은 인구를 보유했고 그것자체가 중국을 역동적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나는 그 커다란 나라가 연방이 아닌 ‘국가’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커다란 바위하나가 굴러가는 것은 무수히 많은 돌맹이들이 구르는 것보다 Power가 있을 것이다.
전통의 재구성-만들어진 전통 : The Invention of Tradition-에릭 홉스봄 외 지음과목 : 서양 근대사교수 : 곽 차섭 교수님학번 : 200404113 사학과이름 : 박 성규① 들어가기전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한마디 하셨었다. “책의 제목이나 차트의 제목만 봐도 그 내용을 짐작 할 수 있다.”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제목만큼이나 묘한 매력으로 눈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친구와 함께 과감히 2학년 수업을 듣고 있는 나에게 이왕 하는 공부인 만큼 해보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서양근대사와 대조해서 듣기가 가장 좋았던 수업이 사학개론이고 사학개론의 수업 내용도 어느덧 객관적 인식을 지나 ‘사관’ 이란 것에 접하게 되었다. ‘사관’중에서도 내가 관심이 있었던 부분이 민족주의이고 근대적 인식으로 인한 고대나 여타 시대의 관점을 잘못 잡고 있는 오류들을 나름대로 고쳐나가고 싶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그런 것들이 근대에 생겨나게 된 민족주의나 이 외의 원인으로 의해 발생되었다는 점에서 나의 두 번째 서평은 그 쪽으로 초첨이 맞추어 나가게 되었다.사실 이 책은 민족주의랑 그렇게 관련되어 있지도 않다. 다만 우리가 무심코 넘어갔던, 오래되었다고 생각하였던 그런 것들(흔히들 말하는 전통)에 대해 과감한 일침을 놓아버린 책이라 볼 수 있다. 에릭 홉스봄의 ‘민족주의란 무엇인가’와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배낙청 중에서 책을 선택하려 했던 나에게 아직은 이해하기 힘든 사상보다, 한편의 이야기와도 같은, 그런 것에 더 호감이 가서 ‘만들어진 전통’을 읽고 쓰기에 이른 듯 하다. 그리고 이 책의 구성은 크게 7가지로 되어있다. 서장부터 1장~6장 까지이다. 또한 이 책을 쓴 작가들도 총 6명인데, 서장을 제외하고 한 학자분에 한편의 주제를 가지고 장이 마련되었다. 나는 여기서 가장 흥미가 있었던 3장과 나의 옛된 경험과 맞물러진 1장, 그리고 6장과 더불어 결론을 매듭짓고 글을 마치기로 한다.② 서장우리는 주위에서 간혹 이런 말들을 대표적인 예들로 국가(國歌), 국기(國旗), 라든지 아니면 스코틀랜드의 전통이라고 하는, 우리가 옛날 스카치 캔디에 흔히 등장했던 격자무늬의 치마 킬트까지도 그 예는 상당수에 이른다. 그리고 더욱 중요시 할 것은 이런 전통들은 18~19세기에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홉스봄은 이런 ‘급조된 전통’들의 영속적이라고는 보지 않으며 전통들의 미래 영위성보다는 ‘만들어진’ 이것들이 어떻게 출현하고 확립되었는가에 대해 논하는 것이었다.사실 새로운 전통이 역사적으로 장구한 것일 필요까진 없다. 하지만 ‘만들어진’ 전통의 특수성은 대체로 과거와의 연속성을 인위적으로 내세우려 든다는 데에 있다. 또한 어떤 사회적 관행은, 반복적으로 수행될 필요가 있는 한, 그 편의성과 효율성 때문이라도 일련의 인습과 관례를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신참자들에게 그런 관행을 부여하기 위해 인습과 관례를 사실상 혹은 법률상 공식화하기까지 한다.그러나 여기서 또다시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전통’과 ‘인습.관습’의 차이이다. 인습이나 관습은 그것이 생겨나고 필요로 하는 것에 있어서 (그 기능이) 유래하는 정당화 양식이 이데올로기적이라기보다는 기술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사항을 제외한 근대에 탄생하게된 ‘만들어진 전통’은 영어로된 제목-invention(발명)이란 단어가 들어간 이 책에서 말하는 정의란? 혹은 전통을 말 그대로 발명해낸다는 것은?에릭 홉스봄은 이것을 과거에 준거함을 특징으로 하면서 다만 반복되는 것만으로도 공식화되고 의례화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전통이 발명되는 과정은 아마도 ‘전통’이 한 명의 주창자에 의해 의도적이고 발명되고 구성되었던 곳으로 베이든-파월(Baden-Powell)이 만들어낸 보이스카우트의 경우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모름지기 역사가들의 관심을 끄는 때와 장소치고 전통의 ‘발명’이 없었던 때와 장소는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전통의 발명이 더 자주 일어나리라 예상할 수 있는 경우는, 사회가 급속디 광고였다. 금박으로 둘러쌓인 사탕인 스카치 캔디가 광고할 때 보면 무슨 음악과 함께 서양인이 화려하다고 해야될지 그런 옷들과 백파이프를 입에 물고선 치마를 입은 채 앞으로 전진하는 그런 장면이다. 거기서 입고 있던 치마는 당시 남자가 입고 있어서 신기하여 그 장면이 기억될 뿐이지만, 차츰 내 머릿속에 정신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격자무늬치마 킬트임을 알았다. 그리고 킬트마다 같은 것이 아니고 부족을 상징하는 무늬가 다 다르다는 것에 대해 왠지 중국 무협지에서 각 문파들만의 고유 무술을 지니고 있는 듯한 그런 경외감이 느껴지곤 했다.유구한 역사를 지녔을 듯한 킬트. 하지만 짧은 200여년 전의 영국 왕의 스코틀랜드 방문에 맞추어진 씨족장, 직제공업자, 그 이외의 사람들 간의 모종의 거래와 그 이상의 것들이 오가여 탄생한 ‘전통’이란 것은 재미있기만 하다.17세기 말 이전 스코틀랜드 고지대인들은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바다 건너 아일랜드의 범람물이었을 뿐이다.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스코틀랜드 서부는 확실히 아일랜드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켈트 사회인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서부 고지대는 심지어 정치적으로도 서로 결합되어 있었고 맥도널드 씨족의 영주들은 서부 스코틀랜드와 북부 아일랜드 곳곳에서 명목상의 왕들보다 더 피부에 와닿는 실질적은 지배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헤브리디스의 문화(맥도날드 씨족 치하의 서부 제도 : hebrides)는 순수하게 아일랜드 적이기도 하다. 그러다 17세기 중반 잉글랜드 인들이 얼스터에 식민지를 세우고 캠벨 씨족이 서부 고지대의 패권을 장악하고 나서야 양자간의 잠재적인 정치적 통일성이 깨졌다. 그러나 문화적 통일성만은, 비록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지속되었다. 문화적으로는 아일랜드에 종속되어 있고 정치적으로는 다소간 비효율적인 ‘이민족’ 스코틀랜드 왕권의 통치 아래에 있으면서, 고지대와 스코틀랜드의 섬들은 문화적 침체를 경험했다.스코틀랜드에 독자적인 고지대 전통이 인위적으로 창출되는 과정이 있었다. 셋째, 이러한 새로운 전통들이 독자적인 역사를 따로 갖고 잇던 저지대 스코틀랜드, 즉 픽트 족과 색슨 족과 노르만 족으로 이루어진 동부 스코틀랜드에 소개되고 재차 적응되는 과정이 있었다.스코틀랜드의 오랜 전통으로만 생각하는 ‘킬트’의 등장은 18세기 이전엔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킬트처럼 격자무늬천으로 된 옷은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치마는 아니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전통적 킬트는 켈트 전설에 등장하는 유명한 음유시인 ‘어시안’과 관련이 깊다. 여기서 두명의 맥퍼슨(제임스 맥퍼슨, 존 맥퍼슨)의 활약은 Good!이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대담한 위조를 감행함으로써 켈트 스코틀랜드를 위한 토속문학을 만들어내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새로운 역사 또한 창조해냈다. 이 문학과 역사는, 실제 역사적 현실과 어느 정도 관련성이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아일랜드로부터 훔친 것이었을 뿐이다.이런 맥퍼슨들의 후안무치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이들의 활약은 서로의 논문을 이용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사실로 만들어내는 경지를 보였으며, 이것은 고대의 대 서사시‘호메로스’와도 버금갈 정도의 ‘켈트 족의 호메로스’ 차원으로 승화시켜 버렸다. 이 두 맥퍼슨의 성공은 당대의 에드워드 기번조차 초기 스코틀랜드의 역사에 대해서는 저 “두 명의 학식 높은 고지대분들”인 제임스 맥퍼슨과 존 맥퍼슨 목사를 길잡이로 삼았다고 인정한 사실에서, 또한 그 결과로서 “스코틀랜드 역사 서술에서 일련의 오류들”이라고 지적된 전설을 영속화시켰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 두명의 맥퍼슨의 업적이 지워지기 까지 온전히 한 세기가 걸렸다는 점은 정말이지 놀랍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스코틀랜드 고지대는 별도의 고대 문화를 획득하게 되었고, 그와 같은 독립성을 독특한 전통을 통해 상징화할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킬트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킬트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스코틀랜드에게로 다가갔다. 킬트의 등장은 엉뚱한 곳에했다. 그것이 가지는 기능(?)면에서 최고의 전투복이였고, 한때 폐지의 논란도 있었지만 강경한 반대에 전승되기까지도 했다.킬트의 등장은 여러 가지 해프닝을 낳게 하였다. 그것을 믿게끔 만들어낸 사람들의 위대한 업적(?)은 가히 통탄할만 하다. 1707년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병합되고 수십년이 지난 뒤 잉글랜드 랭커셔 출신 제철업자 토머스 로린슨이 연료용 목재를 얻기 위해 스코틀랜드 고지대 삼림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을 인부로 고용하면서 일하기 편한 옷으로 만든 것이 바로 킬트였음에도 말이다. 또한 지금에서야 억지로 느껴지는 주장들이라 보지만 당대에서는 얼마나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였을지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지난 2002년 눈 앞에서 ‘킬트’를 입은 스코틀랜드 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2002년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물론 월드컵이고, 월드컵 개막 이전에 부산에서 한국과 스코틀랜드의 친선경기가 있었었는데, 국가대표경기를 처음 보러 가는 나에게 경기장 근처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입고 있던 치맛자락을 앞으로 내밀며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는 듯 하였다. 그리고 나 역시 와~하는 생각에 친구들과 구경하고 있었다. 바로 앞에서 나를 보고 머라고 이야기를 하는 듯 하였지만, 당시 영어에 대한 귀머거리에 가까워(지금도 그렇지만) 무슨 말인진 몰랐지만 대충 행동을 봤을땐 옷에 대해 상당한 자랑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와서 킬트의 역사에 대해 알고 나니 묘한 웃음과 함께 씁쓸함 까지도 같이 공유하였다. 절때 남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제3장 전통의 발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1장과 2장은 약과에 불과 했다. 이제 결정타를 날릴 때가 온 것이다. 지금에 있어 ‘왕’이란 존재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국가가 어디 있을까? 아마도 영국 일 것이다. 메스컴에 가장 많이 오르락 거릴 왕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서 접한 왕실 이야기만 해도 영국이 주를 이루었다. 찰스 왕세자, 그리고 잘생기기로 소문난 그의 큰아들, 옆길로 빠진 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