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중국 역사와 문학담당교수이유진 교수님제출일자2008. 6. 11학교경희대학과동아시아어학과군학번2003201991이름강현우전화번호“신산을 찾아 동쪽으로 향하네.”를 읽고-내 마음 큐피드의 화살 피할 길 없는데-이 책은 청일전쟁(1894)이후 신해혁명(1910) 때까지 중국과 일본 사회,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간 젊은 중국유학생들의 내면에 넘쳐흐르던 문화적 정신적 긴장과 그들의 이상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저자 옌안성 역시 문화혁명 이후 사회주의 신 국가 건설의 꿈에 청춘을 불사른 세대다. 젊은 시절 그는 “사랑하는 조국에 붉은 피를 바치리.”라는 루쉰의 시를 가장 애송했다. 중국 근대 문호 루쉰은 일본유학생출신이었고, 동서양 문화를 녹여 하나로 만들고 싶었던 젊은 날의 꿈을 아로새긴 것이다. 루쉰의 정열은 문화혁명 기를 관통해 마침내 저자가 이 책을 쓰도록 했다. 중국 근대사에서 일본 유학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고 왜 중국은 중국 유학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1.그들은 왜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나?동아시아 문명의 대국이었던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들에게 차례차례 영토의 일부를 침식당하고 마침내 동아시아의 작은 섬나라로 치부하던 일본에게까지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문화의 주체 자가 문화 수용자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서양에게 패배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고 치부해 버리기도 했던 중국이지만 같은 아시아 문화권에서 거들떠도 보지도 않던 소국에게 패배한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흥학의 중요성은 더욱 중요해지고 기존의 양무운동의 실패는 중국에게 더욱 뼈아프게 느껴지는 것이다. 중국 내부에서는 변법자강의 기운이 최고조에 이르러 모두 서양의 신학문을 배우려 했다. 청일전쟁 후 서구 열강들은 일본에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대륙 진출을 간섭하려 하고 마음이 급해진 일본은 서구 열강의 음모를 강조하고 청일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청국의 일본 유학을 적극 권장하게 된다. 청국 입장에서도 다른 서구 열강에 비해 유학비가 저렴하고 또 룬 일본은 좋은 모델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일본 유학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된다.2.중국 유학생의 세대별 변화(청일전쟁~러일전쟁 전후)일본 유학은 크게 나누면 1세기와 2세기로 크게 나뉘는데 이 책은 1세기 때의 상황을 거의 묘사하고 있다. 1세기 유학 그 안에서 내가 크게 분류를 해본다면 러일전쟁 전과 후로 일본 유학을 나눠보면 괜찮을 듯싶었다. 우선 일본에 떠나는 중국인 유학생의 수가 급증을 하면서 유학의 양과 질이 달라진다. 처음의 큰 뜻을 품고 국가를 위해 조국을 위해 떠나는 유학에서 자신의 입신양명의 성격으로 바뀌는 양상이 더 크게 보이고 중국을 대하는 일본의 태도도 문화 종주국을 존중해 주는 태도에서 점차 망해가는 나라의 인종이라는 경멸조로 바뀌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이후 일본은 군국주의가 극대화 되어 온 백성은 군인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되며 주변의 약소국은 정복의 대상이라는 식의 역사관을 소학교부터 교육을 시키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약소국의 유학 생활은 얼마나 고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단 중국뿐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 보다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장지동의 「권학편」으로 인해 물꼬가 텄던 초기 유학은 반청혁명과 그를 저지하려는 청국이 두 세력의 구도가 가장 컸다. 망해가는 청국에서는 실학은 중요하지만 현 정부를 무너뜨리는 불순분자를 막으려 애 쓰고 그에 반대 세력은 선진화된 기술을 배워 청나라를 무너트리고 한족의 정부를 새우려 노력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역사 어디에서 보나 그 현상을 다 똑같은 것 같다 지키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의 경쟁, 그 큰 틀 속에서 자신의 이권을 챙기려고 유학을 넘어오는 무리들. “요즘 세상에 유학을 해야지 한자를 꿰찰 수 있다”는 말이 대변하듯 지금 우리 한국사회나 그때 당시나 따지고 보면 어느 시대에나 유학생이 대접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3. 일본 내에서의 중국인의 모욕유학을 온 일본 현지에서 중국인 들은 여러 가지 약자의 설움을 당한다.배에서 내리자마자 변발을 한 머리를 아이들이 지나인은 멍청하다 게으르다 더럽다 식의 인격적 모독을 당했다. 특히 변발은 한족인 자신들이 만주족에 굴복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일본인에게 느끼는 수치심과 한족 자신이 받는 자괴감 까지 이중의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또 중국의 두 가지 후진 문화라 일컬어지는 전족과 아편쟁이로 대변되는 것이 오사카 박람회 등에 전시되어 조선이나 인도 등의 국가와 같이 전시 된다는 점은 참을 수 없는 치욕 이였을 것이다. 물론 유학생들이 단합하여 주최 측에 항의하여 철회는 하였지만 일본이 얼마나 지나라는 민족을 생각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단편적인 예일 것이다.1902년 개설된 고분학원 원장 가노 지고로와 중국 교육 문제로 대 논쟁을 벌인 양두.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해결방식을 주문한 가노에 대항, “굴욕적인 평화로 망해 가느니 궐기에 기대해 보자.” 비장한 긴장감을 표현했다. 양두는 후난 성 제1기 속성 사범생이었다. 그는 귀국을 늦추면서까지 교육방침에 관해 가노와 논전을 벌였다. 중국 유학생들은 “중국 대신 교육을 일으켜 준다.”는 가노의 발언에 모욕을 참기 어려웠다. 양두는 그것이 외교적인 전략이라고 몰아붙였다. 가노 씨의 교육은 노예교육이라고 비난했다.또 나도 알고 있으나 깊이 알지 못했던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난 솔직히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왜 그리 나쁜 것인지를 몰랐었다. 하지만 이번에 책을 읽고 신사참배는 결국 우리 패전국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모욕적이고 굴욕적인 일임을 알았다. 개화에 성공해 모든 정치 경제 교육이 발달된 일본을 보며 감탄하고 존경하게 되지만 이러한 자기 과시적이고 주변국을 배려해 주지 않는 일본의 어쩌면 편협하다고 까지 할 수 있는 국민성 때문에 많은 괄시를 받으며 유학생활을 하였다. 전에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중국문화를 숭배하다 시피 했던 우리나라가 현제 중국인을 멸시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그때 당시의 일본인들이 했던 행동에서 유래 됐다고 한 점도 나름 일리가 있는 행동일 듯싶다.하지만 그중에서도 와신상담을 하며 배워 자국민을 계몽 시키고 신식 문명을 양성 하려 노력한 유학생들의 의기도 본받을 점이다.4.문화적 충돌로 발생한 어려움일본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더라도 도착하는 직후부터 이국이기 때문에 느끼는 문화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의식주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다. 그중 식을 엄청나게 중요시하는 중국의 입장에서 일본식의 음식 문화는 너무나도 큰 이질감을 가지게 한 것이다. 날고기와 생선요리 본국에서는 고양이가 먹는 음식을 먹으라고 주는 것은 어쩌면 모욕에 가까울 것이다. 거기에 전혀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은 먹은 것 같지도 않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속된말로 “이 모든 일도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인데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일 듯싶다 그래서 결국은 중국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도시락을 먹으려고 하다가 젓가락을 하나 밖에 주지 않았다고 투덜 되던 부분에서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잠자리 또한 침대문화에 익숙하고 큼지막한 주거 문화의 중국 입장에서는 작은 다다미방은 창고에서 자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유학의 특성상 부유하게 살수 없는 형편을 생각하면 정말 좁은 방에서 부대끼는 일이 많았을 듯싶다. 마지막으로 목욕문화는 나조차도 생소했던 부분이다. 샤워라는 개념의 중국 문화와 탕이라는 일본은 2년간의 중국 유학생활에서 불편함을 느낀 점은 없냐는 질문에 굳이 꼽자면 목욕을 못 한 것이라고 답한 일본 유학생의 농담에서 볼 수 있듯이 큰 차이가 있을 듯싶다. 거기에 원채 있는 것을 크게 중요하지 않는 민족과 가뜩이나 청결을 중요시 하는 민족이 만난 것이니 그 이질감은 국민 정서와 또 상대방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 왔을 것 같다. 문화의 상대성은 서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나도 일본식 욕조에서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것을 반기지는 않을 것 같아 문화적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5. 근대 중국지식인들의 유학 정신사책을 읽어 보다 느낀 가장 큰 부분은 정말 얼핏 이나 들어 인물들이 정말 많이 일본 유학을 떠났다는 것이다.혁명파 쑨원, 유신파 캉유웨이, 입헌군주파 량치차오 등이 모두 일본으로 망명했다.위안스카이의 제정복고를 좌절시킨 중화민국사의 영웅 차이어, 혁명가적 문호 루쉰, 반만 언론의 대가 장빙린, 마오쩌둥의 장인 양창지, 여걸 추근, 청말의 석학 우루룬, 원수의 나라 일본에게 배워 조국을 구하겠다던 진천화. 이들 모두 조국을 위해 신학문의 수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중국의 근대화에 결적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다. 이러한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패전 후에도 다시 일어나서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 같다.이들 중 중국 근대 문화 사상에 큰 족적을 남긴 부류를 호삼학파라 했는데 루쉰, 양정치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이들이 특징은 운동을 일과로 삼는 지사파와도 다르고 학교수업에 얽매이는 공부 벌래도 아니었으며 학교나 학과 안팎에서 널리 지식을 구해 전파하기 위한 공부를 했다, 즉 민지계몽, 문명수입에 힘쓰는 태도를 보였다. 그 때문에 루쉰 세대가 책에 대한 정열과 애착을 남달랐으며 유학생황의 가장 큰 즐거움, 기념할 만한 수확은 일본에서의 팩 편력이라고 할 정도였다. 나도 책을 좋아 하는 편이지만 이시대의 유학생들의 비하면 말 그대로 세발의 피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삶이 책을 읽는 것에서 시작이 되고 또한 놀러가는 것이 책방 순찰이라니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부분이다.또 다른 특징은 사색과 추구하는 바가 진지하고 깊다는 점이다. 국민성 개조야 말로 중국 개조의 근본문제라 인정하고 문학의 힘으로 정신 개조를 하고자 하였다. -내 마음의 큐피트 화살 피할 길 없는데 비바람이 검은 장막처럼 고국을 뒤덮었네. 찬별에 부치는 나의 뜻 전혀 몰라주어도 사랑하는 조국에 붉은 피를 바치리―는 그 의 심성을 엿볼 수 있는 유명한 시이다. 조국에 대한 자신의 무한한 사랑과 국인의 정신개조를 위해 그의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국민의 길을 비추는 횃불로 태워 버린 것이다. 이 글의 부재로 사용했듯이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