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인 서울역사문화와 관련된 문화재에 관한 보고서를 쓰려고 적당한 주제를 선정하기 위해 서울에 어떤 문화재가 있나 여기저기 찾아보던 중 문득 ‘삼전도비’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끝에 ‘비’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분명 비석인데, 같이 소개된 문화재들에 비해 생소한 이름이라 인터넷에서 검색을 시작했다. 꽤 많은 자료들이 올라와있었고 그 중에 하나를 골라 읽어보니 한 마디로 굴욕의 문화재란다. 굴욕의 문화재.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깔려있기에 그런 수치스러운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을까하는 호기심이 동하여 본격적으로 알아보았다.삼전도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병자호란과 관련된 문화재로써 병자호란에서 패한 인조가 한강가의 나루터인 삼전도(三田渡)에서 청을 군주(?)로서 받들겠다는 강화협정을 맺은 뒤에 청 태종의 요구에 의해 세워진 비석이다. 말이 좋아 요구지 분명 강압하면서 빨리 세우라고 종용했을 것이다. 그 시절, 우리는 약자였으니까. 또한 ‘삼전도’라는 곳은 원래 지명으로 한강상류지역인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의 이름이다. 다음의 글은 서울 문화재청에 올라와있는 삼전도비에 관한 설명문이다.「 이 비석이 세워지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광해군 때의 조선과 청나라 양국 관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조선에 대해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만주족)은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을 기화로 누르하치의 영도 아래 급속히 세력을 확장, 숙원이던 부족 통합에 성공하고 후금((後金), 뒤에 청(淸)으로 고침)을 건국하였다. 광해군 11년(1619)에 조선정부는 명의 군사동원 요청에 따라 병력을 만주 지방으로 파견, 후금의 군대와 사루 후 전투에서 대치했다가 곧바로 투항한 적이 있다.1623년 인조반정이 있은 뒤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인조 5년(1627)에는 후금의 군대가 조선에 쳐들어온 일이 있었다.(소위 정묘호란(丁卯胡亂)) 조선이 청과 화약(和約)을 맺은 뒤에도 양국 관계는 원만하게 진전되지 못했는데, 인조 1呂爾徵)이 썼다. 또한 비 머리의 이수(?首), 받침돌의 귀부(龜趺) 조각도 정교하여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정교한 조각의 하나로 꼽힌다. 원래 석촌호(石村湖) 주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나, 그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청일전쟁 때 매몰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다시 세워지고, 1956년 문교부(지금의 교육부)가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다시 땅 속에 묻었다가, 다시 지금의 위치에 세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설명문을 쭉 읽어보니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말을 국사책에서 봤던 기억이 났다. 또한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비석이 훼손되었던 사진을 보니 빨간색 락카로 크게 낙서를 해놓았던 영상을 뉴스를 통해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 삼전도가 이 삼전도였구나 하는 생각에 찾아가보려고 주소를 확인하니 석촌동. 우리 집에서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사전검색을 마친 뒤 석촌동으로 향했다.내가 뽑은 자료에서는 분명 석촌역 5번 출구로 나와서 어떤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온다고 했는데, 도통 찾을 수가 없어서 한참을 헤맸다. 주변에 삼전도비로 가는 길이라고 쓰인 팻말조차 없어 잘못 찾아간 줄 알았다. 급한대로 주변에 지나다니는 시민들에게 삼전도비에 대해 물었는데 3명 중 2명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고 나머지 1명 역시 모른다고 하며 지나가다가 확실하지는 않다며 나에게 어림짐작으로 길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확실하지 않은 것이어서 나는 결국 들어보기만 했었던, 서울시 다산콜센터에 직접 전화를 하기에 이르렀다. “석촌동에 있는 삼전도비로 가는 길을 알려주세요.” 라고 말했지만 직원분도 생소한 이름인지 나에게 재차 물어서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금방 찾아갈 수 있겠지 생각하며 기다렸는데 이게 웬걸, 금방 자료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며 조금 더 찾아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음료수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와 석촌역 6번 출구가 아닌 5번 출구로 나와서 100m정도귀부만을 먼저 만들어 청에 보였으나 청 쪽에서 그 크기가 너무 작다고 거부하여 더 큰 규모의 귀부를 만들어 그에 맞는 비석을 만든 뒤 남은 것이라 추측만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부조는 전두환 정권 때 만들어진 것으로 인조가 항전하던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이마에 피가 나도록 땅을 찧으며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을 당한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실제로 이마에 피가 날 정도로 머리를 땅에 찧었는가에 대해서 확인할 길을 없지만 일국의 왕이라는 사람이 타국의 왕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의 예를 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민족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씻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역사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쨌든 삼배구고두례가 새겨진 이 부조의 설립 발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삼전도의 수난 - 유구한 우리 겨레의 역사에는 만고에 길이 빛날 조상의 위업도 많고, 자랑스러운 선현의 발자취도 흔하거늘 어찌 여기 삼전도(三田渡)의 욕된 비석의 옆자리에 부조(浮彫)를 세워 무엇을 기리고자 함인가.조선 인조 14년(1636) 12월 9일 청나라 군사 10만이 압록강을 건너 우리의 국토를 침략하였으니 이 국란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약 40년 뒤요 정묘호란을 겪은 지 8년 뒤에 우리 겨레는 다시 국난을 맞아 적군의 날카로운 침입을 꺾지 못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진을 옮겨 항전하였으나 군량이 다하고 원군이 끊기어 45일간의 항전 끝에 마침내 성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 1월 30일 인조는 청군의 강요로 삼전도의 수항단(受降檀)에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다.오늘날 청의 여진족은 그 자취가 없어졌으나 우리 겨레는 민족사적 정통성을 면면히 이어 오고 있다. 수난의 역사가 서려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이 같은 오욕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민족적 자존을 드높이고 자주(自主) 자강(自强)의 의지를 굳게 다져야 할 것이다. 1982년 12월, 김창희 조각. 문화란의 배경은 조선을 형제국으로 생각했던 만주족의 국가 청나라를 철저히 배척한데서 비롯한다. 이는 잘못된 역사관과 정치적 관점에서 나온 그릇된 판단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 조정이나 유학자들은 명나라 즉, 중국의 한족을 조선의 기원으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이 한족의 지배를 당한 기자조선의 기자를 선조로 모시며 제사를 지낸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이처럼 사대주의에 푹빠져 있던 조선은 고구려(혹은 고조선)의 후손 중 하나로 추정되는 만주족(청)이 내민 손을 끝끝내 거부한다. 이에 앞서 임진왜란(1592) 당시 청은 조선에 '형제국 대우와 함께 지원군 파병'이라는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이 철저한 사대주의를 바탕으로 명나라를 섬겼기 때문이다.이런 조선의 태도에 격분해 있던 청나라는 결국 병자호란(1636)을 일으킨다. 그 결과 조선의 왕 인조는 청나라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한다.또한 전문에는 우리나라를 소국(小國)으로 칭하며 대국(大國)인 청에 죄를 많이 지었다고 나와 있는데, 물론 땅의 크기로만 보면 청에 비해 작은 나라이겠지만 그 기상과 긍지까지 작게 평가된 것 같아 -물론 철저하게 청 위주의 글이라 그런 것이겠지만- 조금 씁쓸했다.비석은 앞뒷면이 세월이 많이 흐른 탓인지 마모되어 윗부분을 제외한 대부분이 어떤 형태의 글씨가 쓰여 있었는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모두들 한 번 쯤은 듣고, 보았을 삼전도비 훼손사건 때문이었을까? 복구하는 과정에서 문자도 함께 흐릿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꼼꼼하게 살펴보니 앞면과 뒷면에 새겨져 있는 글씨의 모양이 달라 카메라로 줌인을 하여 보았더니 앞면에는 굉장히 구불구불한, 막 휘갈겨 쓴 듯한 글씨가 있었고 뒷면에는 큼지막하게 대청황제공덕비라는 한문이 있었다. 설명문을 살펴보니 삼전도비는 앞면의 왼쪽에는 몽고 문자, 오른쪽에는 만주 문자가 쓰여 있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쓰여 있는 한 비석 안에 3개다보면 만-몽-중 체제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몽골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임이 파악된다. 어쨌든, 그러한 것이 삼전도비에도 반영되어 만주문자와 몽골문자, 한자가 기록되어있다. 이 비의 비문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명필인 ‘오준’, 두전은 ‘여미징’이 썼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인조가 삼전도비의 비문과 글씨를 쓸 신하들을 뽑으면 그 자리에서 다들 사직을 했고 결국 나라를 위해 비문을 짓고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글씨를 쓴 '이경석과 오준' 은 죽어서도 두고두고 신하들의 탄핵을 받았다. 이경석은 정종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 이후생의 6대손이다. 대대로 명나라를 섬겨온 가문의 후손이다. 그러한 자신이 명나라를 부정하고 청나라를 칭송하는 비문을 남겨야 한다니 도무지 붓을 잡을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그는 목욕재계하고 사당에 들어가 조상께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붓을 잡은 그는 통석을 삼키며 미친 듯이 써 내려갔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붓을 놓은 그는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 며 통곡했다. 그리고 "수치스런 마음 등에 업고 백길 어계강(語溪江)에 몸을 던지고 싶다"는 시를 남겼다고 한다.다시 답사로 돌아와서, 비석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문득 우리에게 치욕을 준 이런 문화재를 이렇게 보존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도 이런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철거되거나 그 잔재를 없애고자 노력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왜 삼전도비는 보존되었던 것일까. 왜 지금까지 멀쩡한 -완벽하지는 않지만-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이 의문은 조사 결과 없애고자 노력했지만 없앨 수 없었고 결국 똑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말자는 취지에서 남겨두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자세하게 설명하면 본시 삼전도비는 청일전쟁까지 세워져 있다가 청일전쟁 후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치욕스럽다하여 고종 32년(1895)에 이 비를 강물 속에 빠뜨렸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 후(1913)에 일제가 우리 민족이 원래 힘이 없작했다.
◈ 명주짜기명주짜기는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제87호로써 누에를 이용해서 실을 뽑아내는 방법이다. 명주짜기의 첫 과정은 누에를 치는 것인데 그냥 뽕잎만 먹이면 되는 것인 줄 알았던 누에치기에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심혈을 기울여 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개미누에를 온돌방에 놓고 온도와 습도를 맞추어 치는 것은 마치 메주를 띄우는 것과 비슷해보였는데 굉장히 손이 많이 갈 것 같았다.누에는 허물을 벗기 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을 자다가 허물을 벗는 데 이것이 신기해서 그 이유를 알고자 검색을 해보았지만 명쾌한 해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어 결국 모르고 지나가게 되었다. 누에가 허물을 벗으면 크기가 눈에 띄게 커진다. 그 작은 모습에서 순식간에 몸집이 커지는 것 역시 놀라운 일이었다. 자연의 신비랄까, 왠지 그런 느낌을 받았다.누에가 4령잠을 자고 5령이 되면 나방이 되기 위해 누에고치를 만들어 번데기가 되는데 바로 그 번데기가 되기 전의 누에고치가 명주의 주원료이다. 누에가 고치를 완성하는 데에 드는 실은 약 1500m로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누에치기가 끝나면 실을 뽑기 위해 솥에 많은 물과 누에고치를 넣고 끓인다. 이 과정은 칠석으로 불린다. 젓가락으로 물 안에 있는 누에고치를 저어 고치의 실 끝이 젓가락에 감기면 두 대롱에 위 아래로 나누어 걸고 엄지와 검지를 이용하여 열 번 꼬는데 그 방법과 순서가 일정해야만 좋은 실을 뽑을 수가 있다고 한다. 뽑은 것을 몇 번 돌리니까 거짓말처럼 실타래가 완성이 되었고 딱 보니 할머니의 흰 머리 같았다. 그 정도로 가늘고 하얗다는 뜻이겠지.그 실타래를 돌것에 걸고 가락에도 꽂고 물레를 돌리면 그 동력에 의해 가락이 돌아가고 돌것도 함께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돌것에 있던 실타래가 가락으로 넘어가는데 세 가지의 기구가 일정한 모양으로 돌아가며 실이 가락에 모이는 것이 과학적이었다. 이것뿐만 아니라 실날기 후 고무대를 이용하여 실을 풀고 바디에 실을 꿰는 것, 베틀 역시 우리 조상들의 과학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기구들이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구성되어진 기구들을 통과하면서 얇은 실이었던 것이 어느새 하나의 천으로 완성되는 과정이 정말 신기했다.지금은 기계를 이용해서 짧은 시간에 딱딱 찍어내는데 옛날 우리 조상들은 보름 밤낮을 꼬박 할애하며 만들었다는 사실에 그 인내심과 끈기가 놀라울 따름이다. 만약 나였다면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분명히 하루도 못가서 도저히 못하겠다며 항복 선언을 할지도.그리고 그 섬세한 손놀림 또한 감히 따라할 수 없는 어려운 기술이다. 요리조리 실이 서로 엉키지 않도록 팽팽하게 당기면서 감고 바디에 실을 두 올씩 꿰고 잉아걸이를 할 때 8자로 돌리는 것 등 영상을 보는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웬만큼 집중하지 않고서야 그렇게 할 수 없는데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에게 하라고 하면 모두들 손사래치며 거부할텐데.. ‘괜히 무형문화재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해 준 명주짜기 영상이었다.◈ 무명짜기(나주샛골나이)나주샛골나이는 무명짜기 기술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뽑히는 기술이다. 이 기술을 쓰면 비단보다 더 고운 무명을 얻을 수 있다.무명은 목화로부터 실을 얻는데 이 목화는 알려진 것처럼 문익점이 원나라로부터 새로운 면 종자를 들여오면서부터 우리나라에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나라 남방의 기후와도 잘 맞아서 단기간 내에 많이 퍼지게 되었다.목화씨를 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싹이 나고 꽃이 핀다. 영상에서 잠깐 나온 꽃은 마치 팬지꽃처럼 보였다. 형형색색의 꽃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꽃이 진 뒤 열매에서 목화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그 하얀 뭉치가 더 고와보였다.하지만 목화씨와 목화가 같이 섞여있기 때문에 씨아틀이라는 장치를 이용, 솜과 씨를 분리해내는데 신기하게도 정말 씨가 쏙쏙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직접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디 없을까? 한 번 쯤 해보면 굉장히 기억에 남을텐데 말이다.씨아틀을 통과하고 씨껍질을 털어내기 위해 대나무에 쳐서 뭉개진 솜은 활을 튕기면서 솜타기를 하는데 이 때 솜이 뭉게구름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솜사탕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하고 두어 번 탁탁 튕겼더니 금세 커지는 것이 보기에 즐거웠다.다음의 과정은 고치말이로 솜을 고치모양으로 만드는 것이다. 돌 위에서 대나무로 문지르니 누에고치를 길게 늘려놓은 모양으로 말렸다. 대충 어림잡아 솜을 마는 것 같았는데 꽤 일정한 양이 되는 것을 보고 경험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느꼈다. 그 뒤에는 실을 잣고 베를 뽑고, 날고, 매고, 짜는 순서에 따라 하늘하늘하고 고운 무명이 완성된다.실잣기를 할 때엔 장치 중 하나라도 이상하거나 실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제대로 된 무명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항상 신중하게 하여야하고 작업이 부드럽게 잘 이어지게 하기 위해 물레에 참기름을 칠하기도 한다. 베뽑기는 날상이라는 틀을 이용하는데 이 것의 솝개는 명주짜기의 고무대와 비슷한 형태를 가진 듯 보였다. 10개의 구멍에 실을 넣어 빼면서 일정한 힘을 주어 빼는 것이 말이다. 이 외에도 몇 가지 부분들이 명주짜기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고 나오는 천은 다르지만 그 방식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베날기를 할 때에 사침을 하며 실을 길게 뽑는 것이나 새쫓기 등이 그것이다. 베매기도 비슷한데 눈에 띄게 다른 과정이 하나 있다. 날실을 익히는 과정인데 날실에 약한 풀을 먹이기 위해 묽은 풀을 사용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날실은 더욱 단단하고 견고해져서 잘 끊어지지 않게 된다. 또한 다음에 풀칠을 또 하는데 이 때 밑에 왕겨를 불에 붙여서 그 열기가 실에 전해지게 한다.마지막으로 대망의 베 짜기. 발을 앞뒤로 하며 동력을 이용한 베짜기는 보기엔 꽤 쉬워보였지만 실제로는 어렵다고 들었다. 순서를 헷갈리지 않고 차분하게 해야하기 때문에 고도의 작업이라고 한다. 바디에 실을 끼우는 것 또한 엄청난 체력과 시간을 소모해야만 꼼꼼하게 잘 할 수 있다고하는데 영상만 봐도 ‘저걸 어떻게 해.’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대단한 장인정신이라고밖에 표현이 되질 않는다. 초반에 그리고 중간중간에 나오는 교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도 지루할 수 있는 영상을 조금이나마 즐겁게 해 주었던 것 같다.◈ 한산모시짜기한산모시는 한산에서 만드는 모시로 예로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서 품질이 우수하며 섬세하고 단아하여 모시의 대명사로 불리어 왔다고 한다. 우선 재배하여 수확한 모시를 훑고 겉껍질을 벗겨 태모시를 만든 다음 하루쯤 물에 담가 말린 후 이를 다시 물에 적셔 실의 올을 하나하나 쪼갠다. 이것을 모시째기라고 하는데 더 가늘고 얇게 쪼개는 것이 관건이다. 모시칼로 긁어내고 모시빗으로 정돈해주면 실이 점점 가늘어져서 째기 전보다 꽤 많은 양이 나온다. 모시 칼이라고 해서 잘라내는 것인 줄 알았는데 실이 끊기지도 않고 계속 늘어나기만 하는 것이 신기했다. 칼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그 다음에 쪼갠 모시올을 이어 실을 만드는 것을 모시삼기라고 한다. 이 과정은 실의 균일도가 판가름되는 것으로 절대 빼놓아서 안되는 것이 바로 가금밥(실마리)을 만드는 것이다. 실의 처음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삼는 과정에서 실을 입에 넣어 불필요한 부분을 없애는 것이 있는데 왠지 입술이 많이 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실이라고 해도 반복적으로 하면 상처가 날 텐데 이러한 고통을 참아내고 작업을 하는 장인들의 모습에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무의식의 발견과 근대성무의식의 발견무의식이란? 일반적으로 각성(覺醒)되지 않은 심적 상태, 즉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자각이 없는 상태 무의식의 발견자, 프로이트 1856년 모라비아(현재 체코) 프라이베르크 출생으로 대학 졸업 후 파리의 정신병원에서 샤르코의 지도 아래 히스테리 환자를 관찰하였다. 그 후 프랑스의 베르넴과 레보 밑에서 최면술을 보게 되어 인간의 마음에 는 본인이 의식하는 못하는 과정, 즉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굳게 믿게 되었다. 이어 최면술을 통해 히스테리를 치료한 브로이어와 함께 카타르시 스법을 확립하였으나 이 치유법에 결함이 있음을 깨닫고 최면술 대신 자유 연상법을 사용하여 히스테리를 치료,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프로이트의 지형학적모델히스테리와 여러 가지 치료요법히스테리 : 무의식적 기억으로 보존되어 있는 관념이나 언어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증상. 외부로 가장 다양하고도 가시적인 방법으로 표현됨으로서 무의식의 불가해한 속성을 잘 드러내주는 질병 최면요법 : 환자들에게 최면을 걸어 잠재의식 속에 있는 히스테리의 원인을 알아내는 방법. 정화법 : 신경증 환자들의 증세가 과거와 관련되있다는 것을 알게 된 브루이어는 환자에게 최면을 걸어 과거에 얻은 상처를 상기시키면서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히스테리가 치유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타르시스요법 : 인간은 공격을 표현함으로써 분노의 감정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이론. 자유연상법 : 어떤 말을 주고 곧 생각나는 말을 반응시키는 방법. 카타르시스법의 결함 보완.무의식의 실제뭉크 '절규' 프리다 '두 명의 프리다'자아-초자아-이드ego(자아) :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자기개발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이러한 자아는 id(이드)의 욕구를 누르고 있어서 id(이드)가 함부로 방출될 수 없도록 한다. 그런데 id(이드)의 욕구를 계속 누르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더 이상 방출할 수 없을 때 폭발하게 된다. Super ego(초자아) : 이데아와 관련이 되어 있으며 현실의 세계에서 추구할 수 없는 이상을 쫒는 것이다. 종교적 선각자들은 초자아가 발달된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초자아의 세계에까지 도달하려면 평범한 인간의 가치기준 가지고는 이룰 수가 없다. Id(심층심리, 욕구) : 인간의 심층심리 속에 존재되어 있다. 성욕, 식욕 등등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필수적인 욕구들과 관련이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욕구가 어느 정도 통제되지 않는다면 사회에 악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데 불편하므로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다.자크 라캉의 언어학 이론라캉은 당시 프로이트에 의한 정신 분석학적인 문학해석 의 한계를 넘어 심리구조에서 소쉬르 언어학의 개념을 도입 하여 새로운 문학 해석 방법을 연구한 사람이다. 그는 사유 의 체계에 언어의 구조를 끌어들였다. 소쉬르는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는 기표와 지칭당하는 대 상인 기의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언어는 차이(혹 은 관계)에 의해 변별의 기능을 갖는 자의적 체계라고 했다. 라캉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적용하여 주체와 욕망을 해석한 다.근대성근대성이란? 근대성(modernité)'이란 용어는 유럽의 문화와 철학과는 뗄 수 없는 인류의 문명, 개념, 시대를 동시에 지칭 근대성의 특징 형이상학의 거부, 정치의 독립, 문화의 자율성 강조, 표준화와 제도화고중세 시대와의 대비고대 개인은 공동체에 속할 때에만 존재의 의미를 보장받음 중세 기독교공동체와 촌락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삶의 의미가 보존 근대 공동체보다는 개인 그 자체가 더 중요함.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홉스와 마키아벨리의 근대성홉스 : 성악설을 따르는 홉스는 개인들은 자신의 생 명을 보존하기 위해 정치질서를 재구성하게 된다고 주장. 즉 개인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는 계약을 맺고, 이 계약을 보장할 주권자를 내세움으로써 자연상태에서 벗 어난다. 데카르트와의 유사점 존재. 마키아벨리 : 정치를 종교와 윤리로부터 분리시킴. 정치의 고유영역 발견.근대성의 문제설정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가 변혁운동의 이념적 지주 로서 극대화하고 있던 시점에서 서구의 사회주의가 몰 락됐기 때문에 한국의 변혁 지향성 자체가 퇴조했다. 한편 자유방임의 신념 역시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 앞에서 그 기반인 합리적이고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는 시민이 감소하고 오히려 대중 미디어 공간으로 용해되는 점 에서 약화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뿐 아니라 사회주의의 문제까지도 포괄하는 새로운 문제설정이 필요하다. 요컨대 양 체제에 공통되는 집합적 무의식과 습속의 체계 혹은 양자를 아우르 는 특정한 생활양식을 상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nameOfApplication=Show}
리먼 브라더스와 포드, 그들의 파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리먼 브라더스미국의 초대형 투자은행기존 은행업무+증권관련업무 등 거의 종합적인 금융회사기업, 단체, 정부, 전세계의 투자가 등의 재정적 요구에 부응하는 전세계적인 투자금융회사리먼 브라더스의 파산파산이유 ; 서브프라임 모기지이자의 상승과 집값의 하락 - 변동금리로 산 사람들의 대출상환능력이 더욱더 떨어짐 - 대출금 대신 주택상환 - 가치가 떨어진 주택 - 손해 본 리먼은행돈 없고 신용도 낮은 사람집 가격 5억5억은행대출 5억주요국 증시 반응리먼 브라더스의 파산리먼 브라더스의 주 역할 ; 투자서브 프라임 대출 파생상품의 판매대출의 상환문제 발생파생상품 투자 회사들의 자금 회수부족한 현금세계 각지에 투자한 주식에 대한 현금 회수세계 주가 폭락경제침체,해당나라 실물경제에 영향파산이란?정의 ; 채무가 갚지 못할 정도로 불어나서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법원에서 파산 절차를 걸쳐서 빚을 면제해주는 등의 감면기업 사람들의 수요와 공급의 주체 Or 물자기업이 클수록 유통하는 자금의 양이 커지기 때문에 기업이 커질수록 파산의 영향이 커짐구분투자은행상업은행주업무- 주식,채권 인수 - 인수합병(M A)등 기업구조조정 자문 - 파생금융상품 판매 및 투자- 예금 및 대출수익률고위험 고수익저위험 저수익규제큰 규제 받지않음규제 강함대표회사- 골드먼 삭스 - 모건스탠리 - 메릴린치 - 리먼 브라더스- 뱅크오브아메리카 - 씨티그룹 - JP 모건체이스파산에서 살아남은 골드만 삭스, 모건 스탠리파산에서 살아남은 골드만 삭스, 모건 스탠리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은행. 고객에게 예금을 받아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대출해주면서 이익을 얻는 게 주 업무.상업은행주식이나 채권 발행을 돕거나 거래를 중개하고, 기업 인수합병에 관여하여 수수료 수입을 얻는다. 자금을 빌려 복잡한 파생금융상품이나 부동산 등에 직접 투자해 이익을 올리기도 한다.투자은행* 투자업무를 통해 수입을 얻기 때문에 투자은행이라 이름 붙음파산에서 살아남은 골드만 삭스, 모건 스탠리은행지주회사 ; 예금을 받는 상업은행을 휘하에 둘 수 있는 곳지주회사로의 전환으로 두 회사는 미국의 중앙은행으로부터 긴급 자금도 대출 받을 수 있게 되지만 FRB로부터 다양한 규제를 받게 된다.서브 프라임 모기지▶신용조건이 가장 낮은 사람들을 상대로 집 시세와 비슷한 수준으로 대출을 해주는 대신 금리가 높은 미국의 대출 프로그램* 서브 프라임 대출은 주택 가격이 계속 추세대로 오른다면 다른 대부 업체에서 재융자를 받아 기존 대출금을 상환하면 됐다. 그러나 주택 가격이 하락한다면 재융자는 불가능하며 높은 금리의 영향을 받게 된다.전개과정치솟는 물가로 인한 경제 혼란미 정부의 금리 조정과 동시에 거품이 빠지게 되고 집값 폭락서브 프라임 등급의 사람들, 집을 팔아도 빚 완전 상환 불가서브 프라임 모기지 회사의 손해가 막중해짐전 세계적으로 영향 끼침비이성적 과열'비이성적인 과열 (irrational exuberance)'은 금융위기에 꼭 나타나. 무리하게 돈을 빌려 무차별적으로 투자하다 보면 주가나 부동산 등 자산 가치에 거품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거품이 급격하게 빠지면서 위기가 불거진다. 그리고 금융위기는 실물경제의 악화로 이어진다. 1920년대 후반 미국의 대공황이 그랬고 이번 서브프라임 사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도 국내 은행과 기업들이 과도하게 단기 외채를 끌어다 쓴 것이 화근이었다. '비이성적 과열'은 돈이 넘쳐날 때 나타나기 쉽다. 경제활동과 성장에 필요한 것보다 많은 돈이 풀리면 적은 비용(이자)으로 돈을 빌려 쓸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위험에 둔감해지고 싸게 빌린 돈을 이용해 高위험-高수익 자산에 투자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흥청망청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은행에서 연 4%의 돈을 빌려 주식시장에서 연 10%의 수익률을 낼 것으로 기대한다면 은행대출을 받아 주식을 사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특정자산에 돈이 몰리면 자산 가격이 급등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투자자들이 '이게 아니다' 싶어 일제히 내다팔기 시작하면 자산가치가 급락한다. 이 경우 돈을 빌려주거나 스스로 위험자산에 투자한 금융회사들이 먼저 타격을 입는다.파산과 실물경제투자은행은 주로 단기로 자금을 빌려 투자하는데, 신용도가 추락하면 빚 독촉에 시달리고 다른 금융사로부터 돈을 빌리기 어렵게 된다. 위기를 맞으면 그대로 망하거나 다른 금융회사에 인수 당하는 선택만 남는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전염효과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염효과란? 전염이론(contagion theory)은 원래 개인이 집단에 동화되는 군중심리를 설명하는 사회심리학 용어인데, 최근에는 한 지역의 금융위기가 주로 심리적 요인에 의해 다른 지역으로 파급된다는 '전염효과'라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위기를 맞은 국가와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미약한 경우에도 경제상황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다른 국가에서 위기가 현재화될 때 이를 전염효과라고 한다.전염효과의 발생 경로전염효과의 발생 경로금융경로실물 경로전염효과 ; 실물경로▶ 두 나라(A국가와 B국가)가 무역과 직접투자 등 실물경제 측면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 A국가에서 발생한 금융위기가 B국가의 무역수지를 악화시키고 이에 따라 통화가치가 절하되어 실물경제가 위축되는 것전염효과 ; 금융경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두 나라를 하나의 그룹으로 인식해 A국가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B국가에서도 금융위기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투자자금을 유출함으로써 금융위기가 전염된다는 것이다. ▶ 금융위기가 발생한 국가의 금융기관이 여타 국가의 금융시장에 투자한 자금을 단기간에 회수하여 여타 국가에서는 주식가격이 하락하고 시장금리가 급등하는 형태로 금융위기가 전이되기도 한다.전염효과전염효과는 국가 간 금융시장에서 발생할 뿐 아니라 한 국가 내 금융시장의 금융기관 간에도 발생한다.2) 이 은핸의 다른 금융기관에 대한 채무를 불이행4) 금융기관들 유동성 확보 x은행의 파산 Or 지급 불이행3) 신용 경색전염효과의 실례1997년 한국 외환위기2008년 미국 發 금융위기외국인 투자금이 빠지고 금융기관 달러차입금리 급등 → 외환이 부족하자 원·달러 환율도 치솟음 → 한국의 금융기관들은 뉴욕·런던·도쿄 등 국제 금융 시장으로 달러를 구하러 다녔지만 빌려준다는 곳은 없었음작년부터 미국 집값이 하향세 → 신용도가 낮은 주민 대상으로 빌려준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를 갚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부실화되기 시작 → 금융거래가 부실화되면서 베어스턴스, 리먼 브러더스 등 여러 금융기관이 큰 손실을 입으며 금융위기로 확산 → 미국 정부가 7000억 달러의 자금을 조성해 구제에 나서고 있지만 시장의 신뢰가 바닥이라 회복이 어려움 → 전세계로 금융위기가 확산되는 과정이 진행중바젤Ⅰ과 바젤Ⅱ은행의 자기자본 규제에 관한 새로운 협약 1988년부터 시행해온 현행 제도가 은행의 위험을 제대로 반영 하지 못함에 따라 효율적인 자기자본 관리와 위험관리기법 개발 에 제약이 되는 등 실효성이 크게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도입 현행 제도에서는 은행이 보유한 자산의 종류가 같으면 위험도에 관계없이 동일한 자기자본 보유의무를 부과 바젤Ⅱ에서는 동일한 자산이더라도 대출자의 위험에 따라 보유 자기자본 규모를 달리함바젤Ⅱ바젤Ⅰ국제결제은행(BIS)의 바젤 은행감독위원회가 은행시스템의 건전성과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1988년 6월에 BIS자기자본규제제도를 도입바젤Ⅱ의 세 가지 축현행 제도와 마찬가지로 최저자기자본 규제(PillaⅠ)에서는 은행이 스스로 신용위험과 운영위험을 측정하고 그에 따른 최저 자기자본을 산정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부여바젤Ⅱ에서 새로 추가된 금융감독당국의 점검(PillaⅡ)에서는 은행이 측정한 위험과 그에 따라 자율적으로 산정한 최저자기자본 보유가 적정했는지를 감시토록 함시장규율(Pilla Ⅲ)에서는 은행이 처한 위험에 상응하는 최저자기자본을 제대로 적립했는지를 공시토록 해 투명성을 제고함바젤Ⅱ도입 시 논란의 우려점자기자본 보유부담 증가경기변동의 진폭 확대안전자산 선호경향 심화해외자금 조달 시 가산금리 증가 가능성 높음미국 내 포드 파산의 파장1. 포드 파산은 미국 내 자동차업계3사 지엠과 크라이슬러 파산으로 이어질게 자명 2. 포드, 지엠, 크라이슬러 자동차 3사의파산은 미국 실업률을 9.5%까지 끌어올림 3. 빅3파산은 24만명(미국 자동차 산업 노동자의 70%을 실업으로 내몸 4. 실업노동자들은 임금과 함께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게 됨 5. 의료보험산업 종사자 2백만 명의 일자리가 자동차산업에 영향을 받게 됨 6. 딜러샵, 서비스회사와 연관된 5백만 명의 일자리도 위태 7. 자동차 부품산업에 1560억불 자금이 끊김 8. CAR연구보고서는 자동차 산업 1.1백만 명, 연관산업 1.4백만 명, 도합 2백5십만 명이 실업하게 됨 9. 파산첫해 1251억불의 가계소득 감소, 그 후 3년간 2575억불의 가계소득 감소 예상 -블룸버그 닷컴포드 파산의 파장회사 사원들의 실업 - 소비위축 - 생산위축 - 자본이 묶임- 투자 감소 - 경기침제 But 포드는 많은 회사들 중 하나일 뿐 대체회사들은 많음포드와 관련된 회사들의 연계적 파산가능성 투자자들의 자금회수 어려움 포드처럼 한나라를 대표하는 커다란 기업일 경우 수출입의 어려움으로 한나라의 경상이익에 영향리먼과 포드의 파산 차이일반 제조 기업이 부도가 나더라도 거래관계에 있는 몇몇 기업들에게 영향을 미칠 뿐 파급효과는 크지 않음 건물, 공장, 기술력 등의 유, 무형의 자산을 남기 때문에 매각이 가능. 은행, 증권회사, 보험사 등과 같은 금융회사의 파산은 다른 금융회사들에게 빠르게 확산(propagation)/전염(contagion) 파산한 금융회사의 주식/채권 가치 폭락{nameOfApplication=Show}
* 히트상품 : 태왕사신기* 태왕사신기?⇒ 쥬신이라는 가상의 존재와 광개토대왕이라는 실존 인물을 접목시키고 전설 속의 사신들을 의인화하여 제작된 국내 최초 판타지드라마로써 MBC에서 9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총 24회로 방영되었다.* 선정이유?⇒ 방영 전부터 표절시비 및 역사왜곡으로 큰 이슈가 되었고 방영시작과 동시에 20%대의 시청률이 나왔으며 수목드라마 3개월 연속 1위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실제로 2007년의 10대 히트상품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종영 후에도 꾸준히 DVD와 여러 상품들로 그 여세를 몰아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즐겨보았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히트의 원인① 화려한 출연진2002년 겨울연가 이후로 영화 한 편과 CF외에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았던 배용준이 무려 5년 만에 안방극장에 돌아온 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태왕사신기를 위해 머리를 기르고 시상식과 CF등에 나온 그의 모습은 태왕사신기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그리고 단 한 번도 드라마에 출연한 적 없는 영화배우 문소리. 말 그대로 영화배우인 그녀가 드라마를 한다는 것은 굉장한 화젯거리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동안의 영화를 통해 검증된 연기력을 가졌다는 점이 태왕사신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크고 작은 비중의 조연들도 태왕사신기를 탄탄하게 만들어주었다. 감칠맛 나는 연기와 독특한 말투로 조연배우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오광록과 드라마, 연극, CF를 넘나들며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베테랑 연기자 장항선, 독고영재, 박상원, 최민수 등의 출연 역시 태왕사신기의 인기의 원동력이었다. 특히 그동안 깔끔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알려졌던 박상원의 냉혹하고 치밀한 전략가로의 변신과 엄청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배용준과 적대적 구도를 형성했던 최민수의 열연이 눈길을 끌었다.또한 배용준과 극 초반부터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며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던 윤태영의 이유 있는 악역 역할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배우 윤태영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② 신인배우의 발견태왕사신기의 최대 수혜자라고 말할 수 있는 배우 이지아. 태왕사신기 이전에 출연작이 전무한 상태의 그녀가 배용준의 상대역으로 파격 캐스팅된 것은 많은 루머들을 양산해냈고 그와 동시에 큰 주목을 받았다. 신인답지 않은 안정적인 연기력과 해외 유명 대학을 다니다 연기를 위해 휴학했다는 사실도 이지아를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데에 한 몫을 했다. 드라마 종영 후 화장품, 청바지 브랜드, 패스트푸드 등 각종 CF와 지면광고에 등장하면서 태왕사신기의 인기를 입증했다.청룡의 현신 처로 역을 맡은 이필립도 태왕사신기를 통해 주목받은 신인이다. 큰 키와 혼혈 같은 외모, 그리고 긴 머리를 가진 그는 신비스러운 이미지로 시청자들에게 어필했다. 태왕사신기 이후 청바지 브랜드의 모델로 발탁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백호의 현신 주무치 역을 맡은 박성웅 역시 태왕사신기로 빛을 본 배우 중 하나이다. 갓 데뷔한 신인은 아니지만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서 신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태왕사신기에서 우직하고 순수한 인물로 나온 그는 태왕사신기의 인기에 힘입어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③ 김종학 감독과 송지나 작가의 만남‘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히트작들을 함께 작업한 그들이 재회하여 한 작품을 만든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상품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연출자와 작가인 두 사람은④ 거대한 스케일과 CG, 그리고 히사이시 조총 제작비 550억 중 순 제작비만 300억을 넘기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태왕사신기는 더욱 생동감 있고 실감나는 장면을 위해 몽골과 키르키스스탄까지 가서 촬영을 했다. 수백 명의 엑스트라와 200억을 웃도는 오픈 세트 건립비용은 국내 드라마치고는 굉장한 투자가 아닐 수 없다.판타지 드라마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화려한 CG 또한 태왕사신기의 인기를 올려준 이유 중 하나이다. 1,2회가 방영되었을 때 외국 영화 ‘반지의 제왕’과 흡사하다는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CG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과 , 등의 영화 음악을 맡았던 영화 음악계의 거장 히사이시 조의 OST 참여소식도 태왕사신기의 완성도를 한층 더 높이 평가할 수 있게 해주었다.⑤ 이상적 지도자상김종학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태왕 담덕의 모습은 훌륭한 CEO였다. 교역로를 만들어서 백성들이 풍요롭게 살아가게 하는 그런 모습의 CEO. 전쟁터에서도 하찮은 병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며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전략을 짤 때에도 부하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며 최대한 희생을 줄이고자 하는 백성을 자신보다 더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는 몸을 낮추는 지도자. 연일 뉴스에서 나오는 국회의원들의 헐뜯기와 만족스럽지 못한 정치를 하는 대통령의 모습만 보던 사람들은 이러한 태왕에게서 자신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지도자상을 찾게 되었다.* 제품수명주기매출① ② ③ ④ ⑤ 시 간(개발기) (도입기) (성장기) (성숙기) (쇠퇴기)* PLC의 특징① 개발기(제작 전) : 태왕사신기는 제작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배용준의 출연 확정에 힘입어 아시아 국가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그 중 가장 적극적으로 접촉해온 것은 배용준의 인기가 가장 높은 일본이었다. 제작사는 일본에 있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DVD, 쥬얼리, 게임, 출판, 모바일 등에 대한 선판매를 통해 이미 200여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 예고편 DVD만 15세트를 팔아 십 수억 원을 받았고, 본편 DVD 판권료로 50억 원을 받았다. 아직 제작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러한 매출을 올렸기 때문에 태왕사신기의 PLC는 일반적인 것보다 시작이 높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