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어느 역사가는, “파시즘은 1922~23년에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당에서 출발해…유럽 전역에 ‘파시스트’ 정당이 출현하는 1930년에 이르면 무르익게 되고…(그리고) 전쟁의 패배와 독재자 두 명의 죽음과 더불어 끝난다.”)라고 파시즘을 정의했다. 파시즘은 당시 유럽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이 명확한 이데올로기나 체제는 아니었다. 파시즘은 하나의 운동이었으며,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부에 걸친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파시즘은 1930년대에 정점에 이른 후 점차 쇠퇴하여 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주위엔 그 잔재와 영향이 남아있으며, 부활의 조짐까지 보이고 있는 경우도 있어 이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군국주의 부활 논란이 일고 있는 일본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파시즘 국가 중 하나로 분류되는 일본의 과거로의 회귀 문제는 그 문제의 특성상, 그리고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라도 역사적인 접근과 분석이 필요하다). 따라서 파시즘의 근원과 그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20세기 초, 유럽에 나타난 파시즘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 결과 얻을 수 있는 역사적 경험과 교훈, 즉 Analogy를) 통해 우리는 보다 현명한 판단과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이다.파시즘의 공통적인 특징은 크게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반공산주의(anti-marxism), 반보수주의(anti-conservatism)), 반자유민주주의(anti-liberalism), 민족주의가 그것이다. 적대적인 개념들이 혼재해 있으며 이들을 묶어주는 고정점으로서 민족주의가 있다). 이 리포트는 이 4가지 특성으로부터 파시즘에 접근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파시즘 자체에 대한 탐구와 함께 그 배경까지 아우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에 대해 생각해본 후, 조원끼리의 토론을 거쳐 파시즘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한 결론을 나름대로 내려 보았다.2. 본론2.1. 반자유주의(Anti-Liberal 강화시켰다. 독일의 파시스트(나치)들을 이끈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전체 조직 내에서는 책임과 명령, 복종만이 지켜지고 있다”, “(나치당은) 독일의 유일한 정당으로 기능할 것이다.” 이는 히틀러 스스로가 나치즘이 독재체제임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과 다름없다.파시즘에서 개인의 의사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개인은 그저 사회적 임무만 수행하면 되었고, 어떠한 의문도, 의심도 가져서는 안 되었다. 그저 국민은 ‘모든 것이 조국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지도자는 그 위대성을 창조하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알고 따르면 되는 군중이었다. 청년 파시스트들의 슬로건인 “믿고, 복종하고, 투쟁하자”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의 의무는 믿고 따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저항은 반민족적으로 여겨 민족의 이름으로 처벌되었다.2.1.3. 반자유민주주의적 성향 2-폭력성과 통제의 정치파시스트 정당은 비교적 정당한 방법으로 정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그 후 파시스트의 통치를 보면, 이들의 통치가 결코 자유민주주의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히틀러의 연설의 한 부분을 보면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청소년을 단련시킬 것이며 국가 방위의 의지를 강화시킬 것이다. 국토와 민족에 대한 배반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다. 가장 엄격한 권위주의적 국가를 확립할 것이며, 민주주의라는 못된 암적 요소를 제거할 것이고….” 위 연설에서 알 수 있는 파시즘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은 국민에게 권위를 바탕으로 충성을 요구를 했으며 이에 불응하고 저항했을 때는 사형에 처하는 등 폭력적인 수단으로 국민을 통제했다. 비판과 발언의 자유는 고사하고 사형을 통해 국민을 통제하는 점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게다가 스스로 민주주의를 암적인 요소라고 칭할 정도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이와 같이 파시즘은 국민 개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 전체를 강조했으며, 그 과정에서 폭력성과 독단적인 정치 행태를 보였다. “개인은 국가의 일부인 한의 무기력함을 폭로했다. 전쟁 발발 후, 사회주의 정당 및 조직의 붕괴와 계급해방 투쟁의 쇠퇴는 이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사회주의의 계급 개념과 민족주의의 민족 개념의 대립이 시작된 순간이며, 무솔리니는 민족을 계급의 우위에 둔 파시즘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 영국 제일의 파시스트 오스왈드 모슬리의 말은 당시의 변화한 상황을 잘 보여주며, 나치즘이 표방한 국가사회주의를 간단하게 정의해주고 있다. “당신의 나라를 사랑한다면 당신은 민족주의자이고, 당신의 인민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사회주의자이다. 둘 다 같이 하려면 당신은 국가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2.2.2. 파시즘과 사회주의 2-민족과 대치되는 사회주의파시즘은 인민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와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와는 달리 사적 소유관계의 철폐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적 소유권이 사회정의의 기초를 제공함으로써 민족적 틀 속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무솔리니만큼이나 대표적인 파시스트인 히틀러가 보기에, 사회주의는 국제주의를 표방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계급혁명을 통해 민족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히틀러는 대중을 민족화해서 역으로 계급을 민족에 통합하려 했다. 계급은 민족통일체라는 공동의 틀 속에 통합되어, 국가사회주의 내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민족과 인종의 우월성을 내세운 파시즘은 이를 통해 계급 문제 자체를 사회 안에서 해소함으로써 계급투쟁을 종식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혈통에 만족을 느끼고, 더 위대한 사회적 풍요를 위해 투쟁을 포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2.2.3. 파시즘의 반사회주의적 특성-사회주의의 역이용과 억압파시스트당의 전신인 파시 디 콤바티멘토는 반자유주의, 국수주의, 사회주의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사회주의를 자칭하며 좌익의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자들을 그들의 지지자로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은 자본주의를 옹호하며 노동계급의 혁명을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파시스트가 금융, 은행, 화폐자본을 공서 전체 투표수의 66%를 차지하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게 됨으로써 356개의 의석을 차지, 파시스트 정당은 이탈리아 제 1의 정당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이 같은 결과가 민족주의자들의 포섭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24년에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이 전체 투표수의 1/4 이상을 획득한 경우, 자동적으로 전체 의석의 2/3을 차지한다는 내용의 아체트보 법안)이 통과되어 파시스트당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전의 파시스트당이 1919년에는 단 하나의 의석도 확보하지 못했었고, 1922년 4월 선거에서는 35명의 의원을 당선시키는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괄목할만한 성장이었다.2.3.2. 민족주의가 강조되는 이유파시즘은 민족을 개인의 총합이 아닌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간주한다. 민족이란 어떠한 인위적인 조직이 아니라 혈연적 유대로 맺어진 유기체인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분열이란 그들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평등주의와 만국주의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계급의 단결은 민족을 분열하는 일이며, 민족 간의 평등은 이탈리아의 통합에 해가 되는 장애물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파시즘은 민족이 불평등하게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무솔리니의 “인류가 불평등한 것은 불변의 진리이며, 또한 그런 편이 인류에게는 행복한 것이다.”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파시스트가 주장하는 불평등은 경제적 차이에 의한 계급적 불평등이 아닌, 민족 우월성에 의한 민족적 불평등이었다. 파시스트당으로서는, 민족적 단결과 통합이 국가의 통합과 안정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그들이 내세운 것이 민족의 우월성이며, 그는 곧 다른 민족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파시즘에 의한 전쟁은 이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2.3.3. 민족주의적 특성 1-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고정점파시스트들은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이는 곧 자유주의 경제체제와 자본가에 대atism)파시즘의 가장 큰 특성 중에 하나가 반보수주의적 성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은 여러 학자들로부터 보수혁명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어떻게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나오게 되었는지는 보수주의와 파시즘, 둘의 관계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2.4.1. 보수주의적 성향의 파시즘파시스트들은 그들이 ‘혁명’에 대해 공공연하게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회?경제적인 혁명은 원하지 않았다). 또한 파시즘은 권위주의적 체제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 했으며, 사회주의혁명에 의한 사회 변화를 억지하기 위해 공산세력을 억압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그들의 행보는 그들의 보수적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보수적 성향은 많은 학자들이 파시즘을 보수혁명이라 주장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2.4.2. 혁명으로서의 파시즘파시즘이 보수적 성향을 가졌음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파시즘을 보수혁명으로만 치부한다면, 그것의 성향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 파시즘은 혁명적 성향 역시 상당히 강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의 혁명적 특성이라 함은 1789~1917년 사이에 통용되던 혁명)의 의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파시스트들은 다른 의미의 혁명으로서, 몇몇의 큰 변화를 추진했다. 먼저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크게 줄이는 한편, ‘시민권의 행사’를 헌법상의 권리와 의무의 이행에서 ‘대규모 기념행사 참석’)으로 바꾸어버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여러 계층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혁명적 개혁을 단행했다. 혁명적 개혁은 크게 파시즘 정권의 유태인 억압책과 파시즘 독재체제를 위한 ‘권력 강탈’적 혁명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적 어려움과 유태인의 독점적 재산 축적으로 인한 절대적, 상대적 빈곤에 대한 반감과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자는 공산주의 ‘테러’ 공포를 이용해 의회를 협박함으로써 파시스트정당이 실권을 장악하는 데에 사용되었다.)2.4.3. 반보수주의적 성향의 파시즘파시즘이 보수적 성향을 가졌음에도 파시스트와 보수주의자들은 이다.
1. 서론세계화, 정보화, 지역화를 트렌드로 복잡다양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행정의 역할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현재는 참여정부라는 모토에서 알 수 있듯이 IT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국정운영에 관한 국민들의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행정 개혁은 보다 나은 정부 운영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최근과 같이 경기가 침체되고 국가 경제가 긍정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행정 개혁에 대한 담론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행정개혁은 현재의 행정체제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혁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을 말하며, 단순한 행정기구의 변혁만이 아니라 인력이나 재정의 효율적 활용을 비롯하여 행정가의 행태교정이나 행정기술의 개선까지를 포함한 광범위한 뜻도 지니고 있다. 물론 행정 개혁은 그 시행에 있어 관료제의 조직적 저항1 등 반대기제들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성공적인 개혁 사례는 다른 나라에게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한편, 세계를 주도하는 흐름은 경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경제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가히 지배적이다. 앨런 그린스펀의 말 한 마디가 주가변동을 좌지우지 하고, 산유국들의 카르텔, 조지 소로스 등의 해지펀드, 각종 무역 규제들에 의한 각국의 경제변화는 이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현상이 되어버렸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을 고려해볼 때, 행정 개혁과 경제의 공통분모를 통해 리포트를 전개해 나가는 것도 보다 현실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 이에 우리 조는 경제적인 행정개혁에 성공한 나라를 중심으로 각 나라의 행정 개혁 사례를 비교, 분석 및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려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을 생각해 본 후, 토론과 인터뷰를 거쳐 현재 한국이 처한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해 보았다. 인터뷰는 직접 방문을 통한 담화 형식이었으며 현 재정경제부 신제윤 국장님과 6월 7일 오후 3시 경에 이루어졌다.1. p- 개혁에 대한 회의가 들 때마다 다시 한번 각오를 다져라. ‘왜 내가 개혁을 시작했는가.’를 상기하라.3) 추진 과정과 성과1984년에 집권한 노동당은 국민의 여망과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대규모 경제 사회 개혁 작업을 추진하였다. 선거 전 누구도 노동당이 집권 후 이 같은 정책을 들고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으나 이들은 집권 시에 대비해 수면 하에서 개혁 프로그램을 준비해오고 있었다.이 같은 사전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외환시장, 자본시장, 상품시장을 개방하고, 행정개혁을 통해 정부부문의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복지 수준을 축소하여 정부의 재정적자를 축소시키는 등의 그간의 정책과 정반대되는 정책을 거침없이 추진할 수 있었다. 개혁은 전광석화와도 같이 일순에 다방면에 걸쳐 짧은 기간에 추진되었다.경제 개방과 자율화 조치로 외환 거래가 자유화되고 자본시장이 개방되고 수입물량에 대한 규제가 철폐되고 관세율이 대폭 인하되었다. 가격 정책이 폐지되어 물가와 임금 동결 조치가 농업과 다른 산업에 대한 각종 보조금이 폐지되었다. 일반소비세를 도입하여 소비세제를 단순화 시켰고 소득세를 비롯한 주된 세목의 세율을 낮추고 과세되는 대상 소득을 확대하는 세제개혁을 추진하였다. 또 행정개혁을 통해 생산성이 낮던 정부부문에도 대대적인 변화를 추구하였다.‘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개혁 초기 많은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뉴질랜드 경제는 전보다 더 나쁜 상태로까지 떨어졌다. 개혁 후 3년이 경과한 1987년은 실업율의 증가, 인플레이션, 정부채무 증가, 부동산 거품경제 형성 등 개혁에 따른 반작용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개혁 후 10년이 경과한 1993년 이후 거시 경제지표의 놀라운 호전으로 개혁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간의 개혁조치로 기업, 가계, 정부 등 경제 주체들은 바뀐 경제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으로 인해 단기적으로는 어려움을 느끼지만, 일정기간이 지나 바뀐 구조가 정착되면서 이들 경제주체 내, 경제주체간의 거래비용을 크게 낮달하며 570억 달러인 중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더불어 국내 총생산의 35% 수출 총액의 75%를 아일랜드에 투자한 외국계 기업이 담당하고 있다. 인구 390만의 소국이 이룬 성과로 볼 때 실로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외자유치의 놀라운 성과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현재 1200여개의 첨단 외국 기업이 유치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우선은 타 유럽국에 비해서 절반 정도에 불과한 10%정도의 법인세, 자국으로의 송금보장, R&D기업의 특허 수입료 무관세, 토지와 같은 고정자산의 무관세, 연구개발비와 종업원 훈련비의 지원 등을 국가차원에서 보장해주는 등의 적극적 외자유치 마케팅을 펼쳤던 것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겠다. 더불어 IDA의 설치와 전 세계적 IDA지사의 확립은 외국자본의 아일랜드 유입에 있어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외자유치 이후에도 꾸준한 경영관리와 각종 투자회사의 고충처리를 통해 아일랜드를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성과를 통해 현재 IDA는 세계 각국의 벤치마킹 대상으로서 공무원들의 적극적 기업지원기관의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3) 사회경제협약(Partner Ship 2000)을 통한 동반성장- 아일랜드의 눈부신 발전 뒤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토대가 있다. 그것은 바로 1987년 이후 3년 간격으로 노사정 간에 맺어진 사회협약이다. 사회협약의 큰 골자는 노조가 임금 인상률이 물가상승률 이하로 완만하게 되도록 양보하는 대신 정부는 세금을 낮추어 노동자들의 실질 소득을 높이고, 경영자는 생산력을 높여 고용을 늘린다는 내용이다. 1980년대 강성노조로 이름을 날렸던 아일랜드 노조가 매년 인상률 2.5%미만의 임금 동결을 받아들인 데에는 1980년대 말 아일랜드의 위기에 모두가 공감을 했었고 파업보다는 노사 간의 파트너십을 유지하는 게 낫다는 현실적인 인식을 노사 모두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은 정부의 역할이다. 위기의식을 느끼고.61.30.7-0.10.11.7주가지수(닛케이)1)23,84922,98416,92517,41719,72319,86819,36115,259지가지수 변동률30.03.0-15.5-17.9-11.5-13.4-11.2-7.6엔/달러 환율1)35.40125.35124.65111.8899.83102.90116.0129.94그렇다면 이렇게 일본이 불황이라는 경제위기를 맞이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직접적으로는 거품경제의 붕괴를 들 수 있고, 간접적으로는 정부의 대처와 대책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위기의 치명적인 원인을 제공한 거품경제의 붕괴는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여기서 거품이란 실제 가치를 상회하는 가치를 말하며, 이것이 지나치게 높았던 일본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거품경제의 발생 경로를 보면 ‘제조업을 통한 경제발전→경제력의 주식·부동산 집중→기업의 은행 의존 감소 및 주식 투자 증가→주가 호황·부동산 가격 폭등→금융기관의 부동산업체에 대한 대출 증대 및 유가 증권에 대한 투자 확대→부동산 시장의 거품 증가로 부동산 가격 인상→악순환’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와중에 정부의 금리 인상정책은 거품 경제를 터뜨리게 되고 그 결과 야마이치 증권 등의 일본 내 세계 유수의 금융기관이 파산위기를 맞았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장기 침체 국면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 후 일본 경제는 ‘경기침체의 지속으로 불확실성 증대→실업 증가&가계소득 감소&수요 부진&재고누적→제조업 가동률 하락→투자와 소비 위축’의 악순환을 겪게 된다. 게다가 무리한 재정개혁 추진과 소비 및 투자 수요의 위축, 아시아 위기가 겹치면서 누적되어 온 불안요소들이 한꺼번에 분출되어 경제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이처럼 일본은 거품경제가 붕괴하고 정부의 정책 실패와 해외 악재까지 겹치면서 금융위기를 겪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재정정책 뿐 아니라 행정의 개혁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행정의 개혁은 작은 정부를 만들어 행정의 효율화와 효과성, 경제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인데, 일본은 이를 있었지만 일시적인 효과였다. 분명 이들 경제개혁 정책은 90년대에 계속해서 실패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일본의 불황은 구조적인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대책은 경기순환적인 불황에 대한 대책이었다. 재정지출의 증대, 감세, 금융 지원책 등을 통해 경기를 부양시켜보려는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시적인 경기회복세라는 효과 몇 차례로 나타났지만, 참된 경기회복세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불황이 장기화되었다.그러나 2002년 10월 시작된 경제개혁을 시발점으로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그 금융개혁은 다케나카 헤이조라는 경제재정 및 금융장관이 주가 되어 시행되었다. 그는 당시 8%대였던 금융 부실채권을 절반으로 낮추기 위한 금융재생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다케나카 장관은 언제라도 부실 금융기관을 퇴출시킬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은행의 자구책 마련을 촉구했다. 그 결과 두세 개씩 병합하여 몸집이 커진 은행들이 직원 수와 점포를 줄이고 부실 자산을 매각하는 등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했다. 그리고 행정개혁을 통해 수상의 리더십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동시에 했다.고이즈미 수상은 파벌정치를 어느 정도 타파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고, 금융부실 문제가 반은 해결됨에 따라 상당한 리더십을 갖게 되었다. 고이즈미 정부의 성과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규제 개혁을 함으로써 경쟁을 도입했다. 공기업과 민영기업의 경쟁 등 통제경제부문을 시장경제화 시킴으로써 국민들에게 스스로 바뀌어야한다는 의식을 심어주었다. 일본정부의 노력과 기업 및 개인들의 노력들이 결국 일본경제를 불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C. 시사점1) 주력 산업 - 일본이 10년간의 불황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탄탄한 내수시장과 세계 제일의 제조업, 특히 전자 산업의 공이 컸다. 내수시장이 침체되어 있으면서도 수출에서는 줄곧 흑자를 내왔기에 회생이 가능했을 것이다.2) 정책 결정 과정에 있어서의 판단력 - 그들의 장기불황은 정부의 안이한 대처와 부정확한 원인 파악에 상당 부분 기하였다.
책 제목: 군주론(출판사: 해누리)책을 선택하는 과정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고르기가 쉽지 않다. 일단, 서점에 들어가면 읽어보고 싶은 책이 상당히 많다. 모두 사서 읽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이번에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꼭 읽어보고 싶었지만, 분량이나 그것의 형식 때문에 다음을 기약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군주론이라는 책이었다. 그 책은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굉장히 읽어보고 싶어 했던 책이었기 때문에(게다가 분량도 적당했다) 바로 그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이 책의 저자는 유명한 마키아벨리이다. 나는 그가 잔인하고 사악하고 음흉한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 말만 앞세운 이론가일 것이라고도 생각했지만, 이러한 선입견들은 책을 읽다가 깨져버렸다.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인 피렌체의 정치가, 외교관, 군사 전략가, 문학가, 저술가였다고 한다. 그는 항상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는 군주의 출현을 원했는데, 이것에는 이웃의 프랑스의 강한 왕정을 체험한 것과 체사레 보르지아라는 지배자를 본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의 인간관은 성악설에 근거했다. 그가 문제의 발생 원인으로 꼽는 것의 상당수가 인간이 가진 악한 본성이다. 때문에 군주에게는 그러한 인간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잔인한 조치가 필요함을 역설하곤 한다. 이러한 글로 인해 그에 대한 선입견이 나온 것 같다. 하지만, 군주론을 직접 읽어보니 그런 면이 없지는 않지만 생각처럼 사악하다거나 잔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잔인한 조치가 많을 경우 서민의 지지를 잃게 될 것이라면서 충고한다. 그는 서민의 지지를 중시했고, 특권층의 지지보다 서민의 지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생각은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요새는 국민의 지지와 사랑’이라고 하는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잔인한 수단은 필요할 때, 즉 질서의 어지럽혀져 유지해야 할 때를 위해 써야하며 그것을 남용하다가는 자신이 망할 것이라고 당부한다. 이런 점에서 나의 생각이 상당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는 말만 앞세운 이론가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경계하였고, 말만 앞세운 예언자는 항상 망하기 마련이라고 비판하였다. 실제로 그는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언제나 관리가 되어 활동하기를 원했다. 실제로 직접 군대를 지휘하기도 했고 외교관이 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런 활동에서 그는 자신의 소신대로 활동하였고, 그것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또 한 가지 나의 선입견은 군주론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군주론의 군주는 피의 군주, 냉정하고 전쟁을 좋아하는 군주, 목적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군주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그러한 군주를 말했다기보다 삼국지의 조조와 같은 군주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인재를 중요하게 여기고 내 사람을 만드는 점, 덕을 갖춘 것처럼 행동하는 점, 연회나 잔치 등을 통해 인간미를 보여주는 점, 현명한 조언자들을 통해 조언을 받는 점, 법률을 존중하고 힘의 사용을 적절하게 하는 점 등 그가 말하는 군주가 갖추어야 할 것을 조조는 거의 지니고 있어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이상적인 군주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조조는 인재를 상당히 중시하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였고, 연회를 베풀어 사기를 진작시키고 상을 주기도 하였으며, 법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수염을 자르기도 하였다. 또한 끝까지 황제의 자리를 거절하고 한의 신하로 남으며 자신의 덕을 세상에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참모들의 말을 존중하고 자신의 생각과 비교한 후 결론을 내리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요즘 조조가 삼국지에 나오는 지배자 중에서도 최고로 꼽힌다는 점으로 보아 마키아벨리가 어느 정도 현대적인 감각을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군주가 갖춰야 할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 변화에 맞추는 것이나 위기에 타인에게 기대기보다 자신의 실력을 길러서 맞서는 자세, 음모나 돈으로 권력을 잡지 않고 정당한 수단으로 권력을 얻으려는 생각, 대중을 무시하지 말고 존중할 줄 아는 것 등 많이 있다. 또한 군주는 자비롭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좋지만 그 때문에 질서가 어지럽혀진다면 오히려 해가 되므로 때에 따라서 잔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결론적으로 그의 군주 모델은 강한 카리스마와 실력을 갖추고, 이성적이며 철저하고 자기관리가 뛰어난 군주라고 생각한다. 그를 통해 강한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과 실력을 바탕으로 강한 제국을 건설하기를 바랄 것이다.
10 조 독일 프랑스 일본 정보기관 비교분석 독일 프랑스 일본 정보기관 비교분석목 차 프랑스 정보기관 일본 정보기관 결론 : 각국 정보기관 비교 분석 독일 정보기관 서 론서 론 프랑스 독 일 일 본 군사→경제안보 (1970 년대 ) 뮌헨 테러 독일 통일 비군사영역 : 경제첩보 유지 약화 강화 냉 전 탈 냉 전 9.11 Impact독 일 정보 기관 분석 냉전시기 안보환경 냉전의 중심지 , ‘ 냉전시대 = 독일 분단기 ’ 1940 년대 말 2 차 대전 이후 전개된 경제부문 최초이자 최대의 동서 냉전 안보 환경독 일 정보 기관 분석 독일 기본법의 유래 1948 년 서독정부 수립 후 헌법제정회의 헌법 초안은 통일 이후에 영구적인 헌법을 제정할 경우 효력 상실된다는 이유로 기본법이라 함 현재까지도 헌법 대신 기본법이라는 용어 사용 ♧ 독일어 교실 ~ ♬ 헌법 ( Verfassung ) 기본법 ( Grundgesetz ) cf. 동독정부 : 1949 년 수립 안보 환경독 일 정보 기관 분석 냉전 종식과 독일의 통일 1972 년 12 월 ‘ 동∙서독 기본조약 ’ 동독 인구 서독 도피 극심 ( 종전 이후 약 300 만 명 ) 관계정상화 통한 평화공존체계 인도주의적 차원의 상호방문 , 이산가족 상봉 경제적 협력 문화적 교류 안보 환경독 일 정보 기관 분석 독일의 통일 (1990 년 10 월 3 일 ) 소련 고르바초프 perestroika( 개혁 ), glasnost( 개방 ) 동독 정치지도부의 수용 거부 → 주민 저항 운동 1989 년 10 월 드레스덴에서 대규모 시위 발생 대규모 국경 탈출 발생 → 동독 정부 통제기능 마비 1989 년 12 월 동독정부 베를린 장벽 공식 개방 주위 국가의 우려 , 불신 → 서독의 콜 정부 설득 작업 동∙서독과 4 대 전승국 ( 미 , 영 , 프 , 소 ) 간 ‘ 2+4 조약 ’ 안보 환경독 일 분석 정보 기관 안보 환경 연 방 정 부 수 상 실 내 무 부 국 방 부 BfV ( 연방헌법수호청 ) BND ( 연방정보국 ) MAD ( 군사안보국 수호청 ) 특징 연방정부 내무부 소속 수사권과 집행권 갖지 않음 → 역사적 이유 ( 나치 정권 시대의 정보 기구 ) 역사 냉전기간 : 동독의 두더지 색출 1972 년 뮌헨 올림픽 테러 사건 이후 , BfV 법 강화 ( 외국인 과격단체에 대한 동향 감시 ) 냉전 이후 : 국내 극렬분자 동향 감시 정보 기관 안보 환경독 일 분석 BfV 특징 연방정부 내무부 소속 수사권과 집행권 갖지 않음 → 역사적 이유 ( 나치 정권 시대의 정보 기구 ) 역사 냉전기간 : 동독의 두더지 색출 1972 년 뮌헨 올림픽 테러 사건 이후 , BfV 법 강화 ( 외국인 과격단체에 대한 동향 감시 ) 냉전 이후 : 국내 극렬분자 동향 감시 정보 기관 안보 환경독 일 분석 BfV 조직 감시와 통제 정보 기관 안보 환경독 일 분석 정보 기관 안보 환경독 일 분석 정보 기관 안보 환경독 일 독일 정보기구의 변화 세계대전 후 냉전 도래 동서독 간 경쟁적 정보기구의 활용 1972 년 뮌헨 올림픽 테러 사건 테러 위협 인식 → 정보기구 관련 영역 개편 냉전의 종식과 독일의 통일 통일 이후 군사 , 안보분야 예산 감축 탈냉전기 진전 → 안보위협 요인 증가 새로운 위협에 대한 주변국과의 공동 대응 강화 2001 년 미국 9. 11 테러 사건 연방 정보국 내 전담부서 설치 / 전문성 강화 안보 환경 정보 기관 분석프 랑 스 정보 기관 분석 유럽의 상황으로 본 프랑스 안보환경 냉전시기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출범 (1951 년 ) 전통적 군사안보 → 비군사안보 대체 냉전의 종식과 독일의 통일 군사적 적대국 부재 , 집단안보체제 강화 세계화와 함께 변화된 국제정치의 위상 9. 11 테러 ; 테러 , 난민 , 환경 , 금융자본투기 등 한 국가의 힘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발생 국제정치상에서 정치와 외교 위상 향상 안보 환경프 랑 스 정보 기관 분석 국방백서를 통해 본 프랑스 안보환경 1972 년 국방백서 : 자주방위능력 확보 자주방위에 대한 의지 NATO 의 국제군사기구 탈퇴 1994 년 국방백서 : 탈냉전 국GPN UCLAT DCRG DST DNRED TRACFIN SGDN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국방부 DGSE( 해외안보총국 ) 프랑스 안보에 유리한 정보를 추구하고 , 이용하며 , 국토 전역에 걸쳐 프랑스의 이익에 반대되는 간첩활동을 탐지하고 분석 해외의 정보수집만을 담당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국방부 DGSE( 해외안보총국 ) 역사 군사정찰과 첩보국 (SR) 치안국 , 육군 일반참모부의 ‘ 제 2 부 ’ 제 2 부에서 첩보국 (SR) 분리 망명정부 BCRA + 지로파 SR → DGSS 로 통합 DGSS → DGER( 개칭 ) → SDECE → DGSE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국방부 DGSE( 해외안보총국 ) 조직 : 총국장 밑으로 5 개의 국으로 구성 전략기획국 정보운영국 정보활동국 관리국 기술장비지원국 행동부대 (Action Division) : 비밀공작 계획 , 수행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국방부 DGSE( 해외안보총국 ) 공작사례 레인보우 워리어 (Rainbow Warrior) 호 사건 레드 핸드 (Red Hand) 공작 대 ( 對 ) 미 회담 전 첩보수집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국방부 DPSD( 국방보안국 ) 한국의 보안사령부와 같은 군 정보기관 군 내부첩자 적발 , 병영 내 정치적 동향 감지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국방부 DAS( 전략사무처 ) 위기관리 전략적 의견제시 국제협상 준비 및 점검 무기 수출 통괄 조직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국방부 EMA( 군사일반참모 ) 프랑스 안보 , 국방상 중요 관료와 장관으로 구성 육 , 해 , 공 3 군 참모총장의 지휘도구 내각 , 국방 , 국제이슈 등 모든 사안에 관여 조직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국방부 DRM( 군사정보부 ) 위성 , 각종 전자사진 분석 ( 영상정보 ) BGRE 의 첩보에 의존 경향 조직 조사과 분석과경찰청을 주기구로 하여 , 다방면 임무 수행 국민 , 재화 , 기관 안전보장 불법 이주 , 불법 노동 규제 조직범죄 , 주요 범죄 , 마약과의 싸움 국외 위협과 테러리즘으로부터의 국가보호 공공질서 유지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내무부 UCLAT( 대테러 조정 통제실 ) 테러에 대한 모든 국립경찰청 활동 포괄 1984 년 설립 , DGNP 직속 편성 임무수행기구 (Operation Service) 아님 임무 : 테러정보 수집 , 테러 예방 , 테러 억제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내무부 DCRG( 통합정보부 ) 통합정보부 중앙총국 : 정부에게 보고할 정보의 중앙화 , 연구 담당 국익 근본적 방어에 참여 , 국내 보안업무 지원 경찰영역과 경찰총국의 완벽한 이중권한 → 전국토에 걸쳐 임무 수행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내무부 DST( 국토감시국 ) 1944 년 창설 : 프랑스령 내의 정찰활동과 외부 권력의 활동에 대항하기 위해 창설 1970 년대 말부터 정찰활동 다양화 : 군사부문 → 경제 , 과학 , 기술부문 테러 위험의 형태와 안보 위협 요소 다양화 다각화되는 불확실한 안보위협 패턴의 변화를 읽어내는 것을 주기능으로 하는 국내보안기구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분석 내무부 DST( 국토감시국 ) 공식업무 :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는 외부 세력의 교사 , 기도 , 지원에 의해 자행되는 공작활동이 프랑스 영토 내에서 전개되는 것을 조사 , 예방 , 진압하는 것 (1982. 12. 22 법령 ) 방첩활동과 테러방지 이외에도 ‘ 경제안보 ’, ‘ 국가자산 보호 ’ 를 위한 임무 수행 산하기관 : 경제안보와 국가자산 보호과 (22 개 지역조직 ) 정보 기관프 랑 스 안보 환경 정보 기관 분석 분석 국가위상 회복 과 新 국제경제질서 신중상주의 : 공격적 경제안보 활동 산업 , 과학기술 , 경제분야 첩보 증가 탈냉전과 9. 11 테러 경제의 세계화 : 경제안보 중요도 증가 다원화 → 포괄적 안보개념 ( 다차원적 안보 ) 가시적 위협 → 비가시 : 식민지 특화 안보 환경일 본 정보 기관 분석 냉전시기 안보환경 제 2 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기 좁은 의미의 자위라는 제한 하에서 점진적 방위력 증강 자위를 넘는 분야의 미일동맹 의존 1950~60 년대 전수방위 : 억제된 방위태세 유지 경제 선진화 : 해외상사원 , 대기업 간부 , 종합상사 1970 년대 : 자체방위정책 체계적 확립 ‘1976 년 체제 ’ 등장 종합안전보장전략 안보 환경일 본 정보 기관 분석 탈냉전시기 안보환경 국내 : 한신 대지진 국외 걸프전 1998 년 8 월 31 일 북한 대포동 미사일 발사 2001 년 9 월 11 일 미국 테러 미일간 위협인식 공유 → 적극방위 전환 촉진 미일동맹 : 자발적 동맹으로 전환 안보 환경일 본 안보 환경 분석 내각합동정보회의 내각정보조사실 공안조사청 정보본부 국제정보총괄 경비국 내각관방 법무성 방위청 외무성 경찰청 정보 기관일 본 안보 환경 분석 내각 정보조사실 풍부한 자금 → 외곽 민간 연구기관 활용 공개자료 중시 , 높은 뉴스매체 의존율 내각정보집약센터 신설 내조실의 제한과 한계점 내조실의 향후 발전 정보 기관일 본 안보 환경 분석 내각정보관 차 장 총무부 국내 1 부 국내 2 부 국내부 국제부 경제부 내각정보집약센터 자료부 내각위성정보센터 국제 1 부 국제 2 부 정보 기관일 본 안보 환경 분석 공안청 독자적 국내 첩보원 양성기관 ( 경찰 운영 ) 자위대의 스파이 조직 : 일본 공산혁명 방지 일본 정보활동의 수족 역할 , HUMINT 적극적 오옴진리교 가스테러 사건 독립적 방첩활동 임무변화 : 공산권의 대일공작 , 일본주재 기관들의 동향 정보 수집 중국 , 북한 관련 정보수집 능력 우수 정보 기관일 본 안보 환경 분석 방위청 정보본부 군사정보 통합필요성 제기 ( 방위계획대강 개정 ) 업무 : 방위청 , 자위대의 전략정보 작성 공개정보 , 전파정보 , 영상정보 등 수집한 정보 방위청 제공 정보 타부서로부터의 정보 집약 , 종합 처리 , 분석 방대한 업무에도 불구 , 비밀공작 하지 않음 기본적으로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