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감 상 문배 려 교 육 론(The challenge to Care in Schools by Nel Noddings)2005160094 수학과 진병철☞ 하나, 책을 고르기!!배려의 교육적 요구와 실천은 이번학기 내가 신청한 수업 중 가장 재미있게 듣고 있는 과목이다. 사실 나머지 수업들이 모두 전공수업이라서 좀 딱딱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교양과목을 선택해서 들었다고 하더라도 배려수업 이상의 흥미는 없었을 것이다. 이유인즉 그야말로 재미와 감동 그리고 배움이 모두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교육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교수님의 구수한 사투리를 통해 들으면서 수업에 흥미를 더하게 된 것 같다. 이번학기 선택한 배려의 교육적 요구와 실천 교양수업은 상당히 만족스러울 것 같다.학기의 개별 과제로 제시해주신 것에 대해 준비를 하기 위해 고민을 해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사실이 첫 조원들과의 토론이었다. 조원들과 첫 만남에 있어서 나는 분위기를 살릴려고 노력을 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Noddings의 배려론』에 관한 교수님의 수업과 자료에 대해 자유토론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어려운 주제라고 생각하며 토론을 하였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원들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교수님의 배려였던 것 같다.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우리는 『Noddings의 배려론』에 대한 주제를 스스로 설정하여 토론을 해보는 시간이었는데 우리조는 “배려자가 배려시도를 하였더라도 피배려자가 배려거부 또는 상대방의배려를 인지하지 못했을 경우에 배려가 이루어졌다고 즉 배려가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였다. 그런 토론을 거치는 동안에 우리는 배려의 이론에 대해 조금 더 알아야 원만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나누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였고 그리하여 이번 개별과제 첫 번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배려'와 관련된 이론을 조사한 후 정리하고, 그 이론에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건강하고 유능하며 도덕적인 사람의 성장을 촉진시켜 주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학생들이 학문적 기능에서 더욱 유능해지도록 만들기 위하여 아동들의 목적이나 불안, 그리고 관계를 무시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저자의 입장은 지적 발달 역지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 우선순위의 문제에 있어서 그것이 학교에서 최우선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저자는 또한 완전한 인간적 성장에 대한 헌신이 지적인 성취를 가로막는다고 할지라도, 타인들과 비폭력적으로 생활하고 자연환경과 민감하게 조화를 이루며 자기 자신에게 반성적이며 진지한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과감히 그 길을 택할 것이라고 한다. 교육에서의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지겹도록 똑딱거리는 사계추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는 학교의 최우선적인 과제가 지적 발달이라는 따분한 개념을 제쳐 두어야만 한다. 나아가 우리는 사회적 변화를 충분히 고려하여 건강하고 유능하며 행복한 아이들을 길러낼 공적인 책임을 지니고 있는 학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학교는 학생들을 위한 배려와 지속성을 제공해주지 않고서는 학문적인 목적들을 성취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필요성을 효과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배려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어떻게 인간의 삶 속에서 배려를 나타내고 배려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가?’ ‘우리는 배려가 교육적인 시도의 중핵이 되도록 만들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성이 있으며 그 질문데 대하여 스스로 책 속에서 답을 찾가고 있다.2. 배려저자는 먼저 독일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 1962)의 이론을 통하여 배려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일차적인 관심거리는 바로 관계적(relational)인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서의 배려관계는 배려자와 피배려자라는 두 인간의 연관성 혹은 만남이다. 배려자와 피배려자 가운데 어느 한쪽에서의 실패는 배려의 완수를 가로막게 된다. 또한 저자는 1984년 펴낸 『배·미술·수학·자연과학·역사·지리·공민)는 표준적인 자유교육 과정이 돠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든 아이들이 배울 수 있다."는 애들러의 일반적인 표현은 아주 순진하면서도 위험스러운 발상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모두를 위한 자유교육을 주장하는 것은 곧 동동자원과 개별적 재능을 낭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4. 대안적 비전가드너는 지능을 논리·수학적, 언어적, 음악적, 공간적, 신체·운동적, 대인관계적, 개인이해 지능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지능군들을 늘 기억하고 있으면, 아이들을 교육할 때 무엇을 강조하고, 그들에게 바람직한 직업을 위한 준비를 어떻게 시켜야 할지를 고려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저자의 주장은 아이들이 배울 필요성이 있는 것은 집단들을 전체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 우리의 교육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이들에게 사람들과 집단들을 옳거나 그르다는 것, 즉 훌륭한 아이 또는 나쁜 아이로 구분하게 하는 일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인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단순한 개념에 근거해서, 충성을 하기 위해서는 전적인 복종 또는 반대가 필요하다고 자주 믿게 된다. 그러므로 훌륭한 이유에 근거해서, 그 집단이 일반적으로 좋은 가치들을 나타낸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만약 집단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게 되면, 모든 집단 밖의 사람들에 대항해서 이 집단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경계 짓는 것을 배우고, 세계를 우리와 그들로 이분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학교가 갖는 가장 심각한 단점 중 하나는 학교가 끊임없이 경쟁자와 적대자를 창출하고 이를 지속한다는 점이라고 한다.저자의 일반적인 주장은 삶과 책임을 공유하는 것을 지지하고 통제 이데올로기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 첫번째 주장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고, 모든 아이들의 능력을 틀림없이 발달시킬 수 있는 배려와 관심의 중심들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교육은 반드시 모든 아이들의 특수한 인지적 능력이나 지능들을 함양시켜야 하고, 이러한 교육에서는 가드너가 제안했로 한다. 학생들은 2-3년 이상씩 한 학교에 다닐 수 있어야만 한다. 아이들에게는 정착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물리적인 환경을 책임질 수 있고 배려공동체의 유지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아주 한정된 연령대를 위하여 고도로 전문화된 프로그램과 장소의 연속성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 우리는 후자를 선택해야만 한다.③ 사람의 연속성 … 아이들은 장소의 연속성뿐만 아니라 사람의 연속성도 필요로 한다. 학생들은 1년보다는 3년 이상 함께 지낸 선생님과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다. 물론 배치하는 일은 교사와 학생간의 동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 오늘날 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들이 배려와 신뢰 관계를 발달시키기에 충분할만큼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 연속성의 모든 영역 중에서 이것이 가장 쉽고 아마 변화시켜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이다. 학생들과 교사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학생들은 자신들을 배려해줄 수 있는 유능한 성인들을 필요로 하고, 교사들은 자신들의 배려에 응답해줄 학생들을 필요로 한다.④ 교육과정의 연속성 … 만약 우리가 무(無)로부터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있다면, 나는 배려의 중심 또는 자신에 대한 배려, 친말한 타인들에 대한 배려, 낯선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 동물들에 대한 배려, 식물과 생명을 지닌 환경에 대한 배려, 물건과 도구에 대한 배려, 그리고 사상에 대한 배려 등과 같은 배려의 주제들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편성할 것을 제안할 것이다.6. 자아에 대한 배려① 육체적 삶(Physical Life) … 우리는 아이들이 민첩함과 지적인 활달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운동과 휴식, 그리고 적절한 영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학교에서 육체를 단순히 정신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우리는 육체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으로 다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영혼과 이상을 통해서 활력을 찾는 육체적 실체이다.② 정신적인 삶(Sp는 것을 의미한다. 배려하는 동안에 A의 의식은 ① 전념 또는 비선택적 주의, ② 동기적 전이 또는 도와주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A는 B가 표현한 관심 또는 필요를 진심으로 듣고, 느끼고, 걱정하면서 이에 응답한다. 'B가 인식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B가 A의 배려를 수용하고, 이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을 나타낸다. 배려 관계는 B가 배려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A가 주의를 기울여서 이해할 수 있을 때 완성된다. 만약 배려자 또는 피배려자 중 어느 한 쪽이라도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관계는 배려라고 하기 어렵다.본질상 불평등한 관계들도 많이 있다. 불평등한 관계에서는 한 사람이 대부분 배려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은 반드시 피배려자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친숙한 예로는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전문가와 고객 관계를 들 수 있다. 불평등 관계는 이따금 역전될 수도 있다. 의존적인 쪽에서 더 강력한 쪽을 배려하는 경우가 그 예이다. 그러나 대부분 이러한 관계들은 안정적이지만 불평등하다.8. 낯선 사람과 멀리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우리는 지금 사실상 우리와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물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여전히 낯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려고 할 때 수반되는 문제들을 고려하고 있다.왜 우리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을 중심으로 서클을 만들고, 나쁜 점들은 서클 밖에 있는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려고 할까? 우리는 배려받고 싶어한다. 즉 우리는 내적인 서클에서 사랑을 받고, 더 큰 서클에서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어하고, 거대한 비개인적인 서클에서 여기저기로 옮겨 다닐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을 원한다.문제는 서클 밖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도 역시 배려 관게를 소중히 여기고 자신들을 외적인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필요성을 느낀다. 왜 서클을 만들고, 장벽을 쳐야 하는지를 이해할 때, 우리는 친밀한 관계와 우연한 관계, 확립된 관계와 잠재적 관계 는다.
헤겔의 역사 철학은 오늘날 역사가에게 “이렇게 대담하게 철학적 종합을 감행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본보기처럼 인용되고 있지만 사실 역사 철학으로서는 가장 화려하고 다산적인 도식이었다.헤겔의 역사 철학이 역사 연구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그의 철학의 골격을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 역사의 원동력은 성령이라고 하였으나 헤겔은 역사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을 성령의 대용물격인 이성(Vernunft,reason)에서 찾았다.이성은 정신이요 자유다.이 같은 헤겔 역사 철학의 기본명제로부터 역사 발전의 여러 원리가 파생되고 있는 것이다.첫째,이성이 세계를 지배하므로 세계는 합리적으로 발전한다.역사는 이성의 자기발전이기 때문에 역사적 과정은 논리적 과정이다.말하자면 역사의 변천은 시간적 척도 위에 전개되고 있는 이론적 변천이다.역사는 일종의 논리이므로 논리적 전후관계가 시간적 전후관계로 되어 있는 것이다.뒤의 일은 앞의 일보다 풍부해지고 강화되는 것이다.역사적 발전은 따라서 우연적이 아니라 필연적이다.둘째,역사는‘이성의 간계’에 의해 진행된다.역사는 궁극적으로 인간 이성이 지배하고 움직이지만 역사의 실제적 표면을 보면 합리적이고 목적적인 과정은 전혀 보이지 않고 격정과 필요,이기적 목적과 욕망만 보인다.이 속에서 죄악이 생겨나고 민족의 행복,국가의 슬기,개인의 덕이 대거 살육당하는 도살장이다.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내면에도 꼭 이성이 움직이고 있다.그것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성이 속임수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또 헤겔은 인간 역사의 줄거리는 어디까지나 자유의 발전이라고 생각한다.자유는 인간이성의 본질이다.그런데 이성이 자기발전을 성취하기 위하여서는 감정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인간에게는 이성과 감성이 병존한다.인간의 역사는 그 자체 감정의 표현이다.그러나‘이성의 간계’로 인하여 맹목적이고 감정적인 인간의 행동은 결국 이성의 하수인이 되어 이성이 의도하는 바에 따라가기 마련이다.세계사는 자연사와 달라서 인간정신의 역사다.정신은 여기서 질서정연한 3단계의 발전을 전개한다.정신은 당초에 불완전한 존재(thesis)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 자기를 반대하는 또 하나의 존재(anti-thesis)를 갖는다.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모순이다.그러나 이 모순은 정립과 반정립간의 긴장을 해소하는 종합(synthesis)이라는 제3단계에 의하여 지양된다.이 종합은 반성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새롭고 보다 높은 단계의 정립이 되어 발전한다.그러니까 이 정반합의 3단계는 단순한 제자리 걸음이 아니다.헤겔은 이러한 긴장과 해소의 패턴을 이성의 메카니즘이라고 표현하였다.역사의 변증법적 이해는 역사의 단순한 인과론적 분석보다 더 깊이 역사의 운동을 이해시켜 준다고 그는 주장한다.예컨대 그리스와 로마는 정립과 반정립이다.그러나 중세 게르만은 그리스와 로마의 종합니다.“세계사는 동방에서 서방으로 진행된다.유럽이야말로 세계사의 종결이요,아시아는 그 단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의 태양은 동방에서 뜨나 정신적 태양은 서방에서 출현한다.”라는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헤겔은 서구 중심사관의 시작이었다.세계사는 다음과 같은 단계로 발전한다.첫째,동양의 세계는 오직 한 사람만이 자유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고,또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둘째,그리스로마의 세계는 약간의 사람이 자유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셋째,게르만의 세계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다는 것을 알았다.이제 마르크스의 물질주의적 역사관에 대해 알아보자.흔히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관념주의적 역사관을 거꾸로 세운 사람이라 일컬어진다. 라인강변의 트리에르라는 작은 읍에서 태어난 마르크스는 남달리 뛰어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마쳤고 그 후 본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법률학과 신학 강의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베를린 대학에서 헤겔의 철학강의에 심취했으며,유물론자 포이에르바하에게도 영향을 받았다.졸업 후 의 주필로 활약했으나 그의 신랄한 현실비판은 마침내 신문의 발행금지와 그의 파리행을 초래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관심은 정치와 경제로 집중되었으며,변증법적 유물사관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철학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파리에서도 추방당한 마르크스는 브뤼셀에서 1848년 그의 놀랍고도 준엄한 역사 해설서 《공산당선언》(Das Kommunist Manifesto)을 집필하였다.“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란 유명한 구절로 시작되는 이 선언은 오늘까지도 가장 효과적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팜플렛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마르크스의 물질주의적 역사관을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본명제가 있다.첫째 명제는 물질생활에 있어서의 생산양식이 모든 인간생활의 사회적·정치적·정신적 과정의 일반적 성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이 명제는 마르크스의 《경제학비판》서설에 잘 요약되어 있다.그의 둘째 명제는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는 것인데 이 이론을 물질적 환경의 여러 조건은 특수한 제도적·이데올로기적 형태를 발생시킨다는 첫째 이론에 접목시켰던 것이다.마르크스에 의하면 생산관계는 그 자체 이정한 생산력의 발전단계에 대응하는 것이므로 생산력이 한층 더 발전하면 생산관계의 변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인하여 사회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사회혁명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물질적 변혁에서 고찰되어야지 상부구조인 사회의식의 변동에서 고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그러나 사회발전과 그 구조적 변혁을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모순에서 고찰한다고 하더라도 생산력의 발전이 더 이상 나아갈 여지가 없어질때까지 충분히 발전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의 사회구조체가 몰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그러니까 아무리 사람들이 혁명을 바란다 하더라도 혁명의 ‘물질적인 실존조건’이 성숙되지 않으면 헛수고라는 것이다.
용산의 역사용산구의 역사에서 용산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에 최초로 정치 세력이 등장한 것은 초기 백제였으며 마한을 정복하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초기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역사의 흐름속에 용산 지역도 자연적으로 백제의 정치권에 포함되었습니다.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내주고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어 용산지역도 77년간 고구려에 편입되었습니다.이후 삼국이 통일되어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면서 용산지역은 한산주, 한양군 등으로 관할을 바꾸게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정종때까지 양주, 문종 이후 충열왕까지는 남경, 충선왕 이후 고려말까지 한양부로 불리었습니다.조선시대 용산지역은 초기는 한성부에 속했으며 후기에는 용산방 지역이 되었습니다. 용산구는 1896년 4월 한성부 용산방으로 시작하여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면서 경기도에 편입되었습니다. 다음해인 1911년 4월 경성부내에 5부 8면제를 실시하면서 용산방이 용산면이 되었습니다.그 후 경성부의 인구가 100만명에 이르고 주거지역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경성부 본청 행정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43년 6월 '구제'를 실시, 행정기관으로 용산구역소를 설치하고 '구장'이 관할하게 되었습니다.광복 후 1945년 10월 용산구역소의 명칭이 용산구로 개칭되고 1946년 10월 18일부터 '서울특별시 용산구'가 되었으며 당시에는 35개 법정동을 관할했습니다. 그 후 경제발전과 인구변동 등으로 인해 여러차례 관할 구역의 조정을 거치다가 1995년 7월 1일 민선 제1기 출범을 계기로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로 접어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조선시대부터 용산은 한강을 끼고 있다는 지리학적인 이점으로 전국의 조운선(화물선 일종)이 몰려드는 포구로 발전하였으며 한강에서 활약하는 대규모 경강상인의 본거지가 됨으로써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의 시발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위성도시로 발전했습니다.용산은 1884년 10월(고종 21년)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개시장(었으며 1900년 1월 서계동~청파동~원효로4가에 이르는 전차가 개통되는 등 개항기를 맞은 용산에도 근대화의 물결이 시작되었습니다.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용산 일대에 군사기지와 철도기지를 세워 한반도 통치와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교통의 요지, 한양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이점은 근대에 들어서 오히려 용산 발전을 저해하는 군사지역, 그서도 외국군주둔지라는 멍에가 되었습니다.용산이 본격적인 외국군의 주둔지가 된 것은 조선말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한 군사기지로 용산을 정하면서부터입니다. 도심과 곧바로 이어진데다가 한강의 물길을 이용할 수 있고 항구인 인천과 철도를 잇기에 유리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일본군이 주둔했던 자리에는 자연스레 한국군과 미국군의 사령탑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용산의 지명은 산의 모양이 용의 형태 같다는데서 얻어진 이름이라 합니다.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권2) 산천조에 의하면, 도성의 서산인 인왕산이 서쪽으로 뻗어 나가 추모현이 되고 무악이 되며 거기서 다시 한 산 줄기가 남쪽으로 약현과 만리현이 되어 용산에 이른다.」 고 하였으며, 이것은 용산의 내맥을 말하는 것이지만 만리재 고개를 지나 용산이 된 산맥은 다시 구불구불 서쪽을 향하여 나오면서 좌우로 여기 저기 산록과 구릉을 이루고 효창원을 지나 한강변의 독서당 옛터에 까지 와서 강산의 절경을 이루고 있습니다.이 용산 주맥의 지진두(地盡頭)에 올라서면 절벽 아래에 유유히 흘러 내려가는 강류는 멀리 서해로 들어가는 곳까지 넓게 트이고 율섬(밤섬, 지금은 없음)과 여의도 등 섬이 멀고 가깝게 점철하여 있는 강상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며, 멀리는 관악 · 청계산의 구름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한폭의 화면을 이루는곳이기도 합니다.따라서 이곳 용산은 한양 천도 이전 고려시대부터 이미 명승지로 알려졌으며, 고려 숙종 때(1096∼1105) 왕명을 받아 남경의 새 도읍터를 찾아 나섰던 대신 최사추(崔思諏) 등이 지금 서울 부근의 산수 지 내려다 보이는 곳에 별장과 정자를 마련하고 수시로 와서 휴양하였던 것이니 그 명승지로서의 위치와 역사를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었다.이러한 명승지였던 만큼 용산에서 보는 아름다운 경치로 「용산팔경」으로 손꼽기도 하였다. 그 중 만천은 원효로 4가를 흐르는 개천을 말함이요 사촌은 노량진 북쪽 강변의 이촌동을 말함인데 가을 저녁의 한 풍경이던 만천의 게잡는 불빛 같은 것은 상전벽해를 실감케 하는 한 예이다. 시대 변천에 따라 용산 명승지의 모습도 많이 변하였다.강류와 강변 풍경이 전과 같이 조용하지 않음은 물로 맞은 편 여의도는 영등포로 이어지고 비행장이 설치되었다. 용산의 제일 명소인 전의 독서당 터 부근에는 조선말기에 세관감시소가 세워졌다가 후에는 영국인 「부라운」의 별장이 되더니 다시 총독부의 정무총감 별장으로 탈바꿈을 하여 오가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또 용산 남록 일대에는 청일 ·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상륙 주둔한 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일본인들의 주택과 시설이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효창원(孝昌園)을 중심으로 한 일대의 우거진 수림, 그윽한 풍치도 전과 많이 변하였다. 1924년 6월에는 효창원 묘소의 동북쪽지역에 공원을 설치하였으며 1929년 2월에는 다시 원묘(園墓) 지역을 합하여 공원을 확장하고 도로와 일반시설을 갖추니 왕가의 원묘를 중심으로 그윽한 풍치로 손꼽히던 효창원 일대는 현대적 공원으로 바뀌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위성도시, 용산조선시대부터 용산은 한강을 끼고 있다는 지리학적인 이점으로 전국의 조운선(화물선 일종)이 몰려드는 포구로 발전하였으며 한강에서 활약하는 대규모 경강상인의 본거지가 됨으로써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의 시발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위성도시로 발전했습니다.▶ 개항기의 용산용산은 1884년 10월(고종 21년)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된 후 1887년 선교의 자유가 인정되자 원효로를 중심으로 프랑스인, 중국인, 일본인 등이 들어와 종교활동과 상업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1888년 8월 일제는 용산 일대에 군사기지와 철도기지를 세워 한반도 통치와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근대의 용산교통의 요지, 한양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이점은 근대에 들어서 오히려 용산 발전을 저해하는 군사지역, 그서도 외국군주둔지라는 멍에가 되었습니다.용산이 본격적인 외국군의 주둔지가 된 것은 조선말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한 군사기지로 용산을 정하면서부터입니다. 도심과 곧바로 이어진데다가 한강의 물길을 이용할 수 있고 항구인 인천과 철도를 잇기에 유리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일본군이 주둔했던 자리에는 자연스레 한국군과 미국군의 사령탑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122년 전부터 용산엔 외국군대가 주둔....용산지역은 한강을 끼고 선박이 쉽게 정박할수 있을뿐아니라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마포나루와는 달리 민가가 별로 없고 수목이 남산까지 이어져 있었으며 조선시대 한양을 지키는 군대가 주둔하여 왔고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 및 군대의 훈련장과 연병장등 군용시설이 있었다.용산일대는 122년전 1882년 임오군란 청나라 오장경군대가 조선에 주둔하면서 외국군인이 주둔해왔다. 이후 청일, 러일전쟁때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주둔하였고 일본이 1884년 개항을 요구, 용산을 내어주면서 일본의 교두보가 되었다. 후에 일제 강점기에 용산일대 및 필동을 위시한 남산기슭 전지역이 일본인들이 집단거주하는 게기가 되었다.일본이 1906년경 용산일대를 군용지로 만들면서 용산에 있던 민가 모두를 이태원으로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새로이 사격장을 건설하였다. 2년후인 1908년 조선군사령부를 설립하고 총독 관저, 사단사령부, 소속일본장교 및 가족 숙소, 군악대, 보병연대, 연병장, 위수감옥등등을 설립하여 한일합방의 전초기지화 되었다.한편, 미군은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1945년 9월에 승전군의 자격으로 미제 42군단 7만여명이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후 일본군사령부가 있던 용산에 주둔해왔으며 1949년 미군 철수가 되면서 500여명만 남겼으나 에 이르는 한강로변 경제권이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된 후 개발을 이어오면서 이른바 한강변의 기적이 상징된 지역이다. 삼각지로터리에 이웃한 문배동에 동양제과 제일제당 등 제가 및 식료품업체가 입지한 것이 효시였다. 롯데 해태 등 국내 굴지의 제가업체들이 이 일대에 입지한다. 1953년 이래로 용산구 후암동에 입지하기 시작한 우리나라 화장품업계의 대표기업인 태평양화학이 용산우체국 바로 남쪽인 한강로2가 181번지에 지하 3층 지상 10층의 새 사옥을 준공 개설한 것은 1976년 7월이다. 그리고 80년에 들면서 이곳에서 도보 5분거리의 남쪽에 국제센터 빌딩이 들어선다. 이 대형건물 안에는 국제상사와 그 계열회사들 외에 3개의 시중은행지점, 한국소비자보호원같은 반관반민 단체들, 그리고 존슨앤존슨 같은 다국적 기업 여러개가 들어가 80~90년대에 이르는 번영을 과시하고 있었다. 국제기업은 1985년 2월 중앙정부에 의한 부실기업 정리시책의 대상이 되어 그룹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에 되고, 후에 한일 합섬 그룹으로 흡수되게 되는데 이마저 1998년 6월에 부도가 나게 된다.현재 국제센터빌딩서울 용산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빌딩으로 꼽히는 국제센터빌딩(사진)이 준공된 지 24년 만에 리모델링에 들어갔다.LS네트웍스(전 국제상사)는 용산권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국제센터빌딩의 상징성과 기능 보강을 위해 최근 건물 리모델링에 착수했다고 17일 밝혔다.이 건물의 이름도 리모델링이 끝나면 'LS네트웍스빌딩'으로 바뀔 예정이다.리모델링 공사는 GS건설이 맡아 총 238억원을 들여 2009년 12월까지 공사를 완료하게 된다.GS건설은 입주사들의 불편을 최소화 하기 위해 22~28층까지 7개층 공사를 상반기 중 완료한 뒤,3~21층은 2단계로 리모델링할 방침이다.다만 독특한 형태의 건물 외관은 현재의 모양으로 그대로 보존된다.LS네트웍스 관계자는 "건물이 지어진지 24년이 지나 노후화된 데다 용산국제업무지구 등 인근 지역 개발로 그동안 입주사들의 빌딩 개선 요구가 많았다"며 "리모델링이있다.
용산구없는 것 빼고 다 있는 구(區)/ 미래 서울의 핵역사(국립중앙박물관), 문화(각종 박물관, 공원), 상업(용산전자상가), 관광(이태원), 군사(전쟁기념관, 구 미군기지, 육군본부 위치), 부(한남동)와 빈(용산참사, 용산철거민사태), 서울 대표성(서울의 한가운데 위치, 남산), 풍수(배산임수:북쪽에 남산 남쪽에 한강) 등 수많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용산.-자작-유래용산의 지명이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백제 기루왕 21년(A.D 97) 4월에 한강에 두 마리 龍이 나타났다는 기록이이다. 한편 산세가 용이 서려 있는 것 같은 형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서울지방의 용산으로 대명사가 된 곳은 한강의 용산강안 용산으로, 이는 오늘날 용산구가 있게 된 자연지세인 것이다. 즉 한성부 산천조에 보면 한강의 원류를 서술하는 가운데, 강릉 오대산에서 발원한 한강은 서울 남쪽에 이으러 한강도가 되고 이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노량, 용산강, 서강이 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어 노량과 서강 사이에 용산강이 있음을 말하였다. 그런데 용산강의 명칭은 한강이나 노량, 서강 등 명칭과 같이 독자적인 명칭이 아니라 용산이라는 산 아래 위치하였음으로 그 명칭이 붙은 것이다. 즉, 용산은 와우산과 함께 한강변에 있는 산으로서, 그것은 인왕산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초모현, 우악이 되고 거기서 한 산줄기가 다시 남쪽으로 나아가 약현, 만리현을 거쳐 서쪽으로 뻗어 내렸다. 즉 만리현 고개에서 효창공원을 촤측에 두고 서남쪽으로 달려 한강에 임박하여 그 뻗어 내려간 산세가 용의 모양과 같아 용산으로 부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길게 뻗어 내린 산발의 모양이 한강변에 이르러 약간 머리를 든 곳이 있어 이를 용의 머리 즉 용두 봉으로 볼 수 있다.한편 용산의 지명은 구려 숙종 6년(1101) 남경 후보지의 하나로 거론되기도 하였고, 충렬왕 10년(1284)에는 과주의 용산처를 승격하여 부원현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고려시대 이전에 용산은 한 고을 명으로 존재하였음을 알 용산 원자라 하였다. 그러나 왕비는 얼마 안 되어 행궁에서 세상을 떠낫고 그 후 용산 원자도 17세에 죽고 말았다. 이렇게 충숙왕이 왕비와 함께 용산에 와서 행궁을 마련한 것은 지리적 조건이 승지 풍경이며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라는데 있다고 보아지며 다른 한편으로는 궁중의 복잡한 관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공민왕과 사평도용산구의 이촌동 한남동의 한강변 연안은 고려시대 사평리진 사평도라는 나루가 있었고 그 일대 마을을 사평리 사리 사촌이라 불렀으며 조선시대에는 한강도라 불리웠다. 동국여지비고 여지고 산천조에 보면 도성 남쪽 10리 즉 목면산 남쪽에 있으며 옛날엔 한산하라 칭하였고 신라 때에는 북독이 되어 중사에 해당되었으며 고려 때는 사평도라 칭하였으며 속칭 사평리진이라하였다라고 기록하고있어 용산구의 한강 연안은 고대로부터 교통의 요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한편 공민왕 10년 10만 여명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침략해오자 고려군은 중과부적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이때의 피난 경로로서 사평도를 이용하였다.조선시대의 용산지역한성부 용산방용산구 일대는 고려시대 남경의 관할에서 광주목 과주에 속해 있었으며 충렬왕 10년에 부원현으로 개칭되었고 조선초에 한성부 성저 십리내 지역으로 한성부에 속하게 되었으며 조선 후기 용산방 지역이 되었다.오늘날 용산구의 대부분이 한성부 관할 하에 있었는데 4대문과 4소문을 잇는 도성의 밖에 위치하여 주민이 적고 한적한 강촌을 이루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는 세종 8년 한성부 인구조사 통계를 보면 도성내가 103328명인데 성저십리지역은 통틀어 6044명으로 그것도 동대문과 동소문 밖 서대문과 서소문 밖 등 교통요지에 거주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용산구 지역은 인구가 극히 적은 고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성저 10리로부터 영조때의 5부 46방제의 서부 용산방에 속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증종 이후 영조 이전 사이에 관할 구역이 정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임란과 호란 이후 서울에 많은 인구가 모여 들었는데 이 때 도성내에 정착하지 못50년 새남터로 추정되는 인근의 땅을 매입하여 순교기념지로 지정하는 동시에 1956년에 ‘카톨릭 순교성지’ 기념탑을 세웠다.개항기의 용산개시장이 되고 난 후의 용산개시장이란? 오랜 쇄국하에 있던 동양제국이 외국과 통상하고 외국인의 국내 거주를 허용하기 시작한 것을 개국이라 하고 이 때에 국내 제 지역에 중에서 “조약 협정 또는 황제 선언 정부 선언의 방식에 의하여 특별히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위해 개방하였거나 개방키로 약속한 항 시를 개항장 개시장이라고 한다.원래는 양화진 개시장 이었는데 선교사 묄렌도로프가 지적하여 일본 자체 조사 결과에 따라일본공사가 주도하여 용산으로 개시장이 옮겨 가게 되었다.거류지 결정 문제에 있어서 여러 역사적 문제 (갑신 정변, 거문도 사건) 등으로 인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처음 용산으로 입주한 외국인은 프랑스인 신부들이었다. 그들은 조-프 수호 통상 조약이 비준될 때 그 조약 내용에 선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조문을 삽입하는데 성공하게 되자 공동 거류지의 6000평이 넘는 땅을 매입하고 신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함벽정이라는 정자가 서있던 남향 언덕바지인 이곳은 수 많은 외국인 성직자들이 참수된 새남터와, 기해년 이래 천주교도들이 피를 흘린 당고개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다.이어 여러 외국인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세력은 미약했으나 수는 일본인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또한 용산에서 선박 물자가 자주 왕래하게 되었으며, 용산에서 하적한 콩류는 오사카 상인간에 용산대두라는 이름으로 거래되어 용산이라는 이름이 일본에 까지 알려졌다.군자감은 후에 전환국으로 바뀌게 되고, 백동화가 압인되고 지폐발행을 위한 제지소도 부설되었다. 광무 8년에는 전환국이 폐지되자 이곳은 인쇄부로 바뀌가 되었고 한일합방 후에는 총독부 인쇄국이 되어 총독부의 각종 인쇄기능을 전담하는 공장이 되었다.용산에 전차가 개통된 것은 1900년 1월 9일이었으며 궤도는 현 남대문로 5가에서 서계동 청파동을 거쳐 원효로로 들어가 4가에 이르는 구간이었다.일본의 시정은 이 헌장에 의하여 시행되었다. 따라서 시청은 물론 각 구청도 이 서울시 헌장에 의하여 조직 , 인사, 시정 등 모든 것이 시행되었다.1948년 8월 15일의 정부수립 후 동년 11월 17일에는 “지방행정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공포되었고 49년 8월 15일부터는 지방자치법이 시행되기 시작했으나 용산구의 지위와 기능, 행정구역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북위 38도선 이북에 주둔해 있던 소련군이 철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은 1948년 9월 19일이었고 그 해 12월 26일에는 철병을 완료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소련군이 이북에서 철병을 해 버렸으니 이남에 주둔해 있던 미군도 계속 주둔할 명분을 잃어버린다. 미 국방성이 미군고문단을 제외한 미군병력을 철수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은 49년 5월 20일이었고 6월 29일에 철수 완료하였다.6.25전쟁과 용산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일어난 6.25전쟁은 이 땅 안 전역에 걸쳐 형언할 수 없을 만치 많은 전화를 남겼고 6월 28일 이후 국군의 서울후퇴, 9월 15일의 UN군 인천상륙으로 9월 28일의 서울수복, 51년 1월 4일의 서울 재후퇴, 정부의 부산이동, 3월 15일 서울 재탈환,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수립까지 3년여의 세월에 걸쳐 서울과 서울 시민, 용산구와 구민들의 생활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여러 가지 애화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6.25전쟁기 서울과 용산이 격은 우여곡절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으며 여기는 두 가지 사건만 소개하기로 한다.그 첫째는 인도교 폭파사건이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1시경에 북쪽의 전차가 시내에 진입하기 시작하였으나 전차에 대항할 장비가 없었던 아군은 서울 포기의 결정적인 단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시흥으로부터 용산으로 복귀하였던 육군본부는 다시 철수에 따른 비상조치를 서둘렀는데 이 때 참모총장은 한강교의 폭파를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폭파반은 6월 28일 오전 2시 15분에 예고도 없이 한강 인도교와 3개의 철교를 폭파하였에 세워졌으며, 두 건물 모두 프랑스인 코스트 신부가 설계·감독 했다.용산신학교는 반지하 1층·지상 2층의 벽돌건물로서 한국 최초의 신학교 건물이며, 중앙에 현관과 지하층 출입구를 두고 좌우에 1층 현관에 이르는 계단을 설치했다. 오늘날의 용산신학교는 학교가 혜화동으로 이전하여 성모병원분원으로 사용하다가, 성심회에서 수녀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본래의 건물 일부에 증축이 이루어졌으나 대부분 본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원효로성당은 언덕을 이용하여 지었기 때문에, 남쪽 언덕 아래는 3층이고 수녀원쪽은 2층이 된다. 주로 이용하는 출입구가 중앙이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쳐있어 비대칭의 모습을 이루었다. 건물의 내부는 제단과 예배석만 있는 단순한 교회형식이지만, 뾰족아치로 된 창문이나 지붕위의 작은 뾰족탑은 전체적으로 약식화된 고딕풍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용산신학교는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건물로서, 원효로 성당은 19세기 말의 성당 건축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건축사적 의의를 갖는다.2)효창공원종 목 사적 제330호지 정 일 1989.06.08소 재 지 서울 용산구 효창동 청파동2가 및 마포구 신공덕동, 공덕동시 대 조선시대1989년 6월 8일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12만 3,307㎡이다. 조선 22대 왕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이 있어 효창원(孝昌園)이라고 불렸다. 정조의 후궁이자 문효세자의 어머니인 의빈 성씨와 순조의 후궁 박숙의(朴淑儀)의 무덤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묘역이 광활하고 송림이 우거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구용산고지(舊龍山高地)라고 불렸으며, 일본군이 한때 야영지로 삼기도 했었다. 일제강점기의 경성부(京城府)가 효창원의 일부인 8만 1460평을 공원용지로 책정한 것은 1924년 6월의 일이며, 순환도로 ·공중변소 등을 갖추어 일반에게 공개한 것은 같은 해 8월부터였다.오늘날 공원의 북쪽 높은 동산 위에는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동쪽 다른 동산에는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료이다.
어머니, 그 사라져가는 세대에 받치는 한 작가의 참회록(이청준의 소설 「눈길」을 읽고)2005160094 진병철지난 2008년 7월 31일 타계한 소설가 이청준은 한국 문단의 대표적인 지성파 작가로 꼽힌다. 장편 ‘당신들의 천국’, 단편 ‘벌레이야기’ 등의 작품에서 보듯 그는 40여년 문단생활 동안 인간 존재의 의미를 특유의 성찰적 시선으로 천착해왔다. 문학평론가 우찬제(서강대 국문과) 교수는 한국 현대소설사를 가장 빛낸 대표적인 ‘지성 작가’로 이청준 선생을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가 이청준은 전남 장흥에서 5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지만, 그가 여섯 살 때 막내 동생과 맏형은 홍역과 폐결핵을 앓다 차례로 세상을 떴다. 그 후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며 생계는 고스란히 어머니가 떠맡게 되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게 된다. “궁색스런 게자루와 거기 함께 담겨 버려진 어머니의 정한(情恨)은 두고두고 이청준의 삶과 문학의 숨은 씨앗이 됐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깊은 삶의 비의(悲意)와 문학의 자양(滋養)을 얻었고 당신의 삶을 빌린 글들을 쓰면서 많은 것을 깨우쳤다"고 했다. 이청준 문학의 출발점은 고향, 어머니, 불우한 유년이 뭉쳐진 원죄의식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입은 듯 남루한 원죄의식, 그 모든 것을 끌어안은 상징이 어머니였다.”) 이러한 주제는 그의 문학에 고스란히 뭍어나게 되며, 특히 소설 ‘눈길’은 그의 가난했던 시절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문학적 언어로 나타내어 한국 현대소설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설로 꼽힌다.소설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먼저 소설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은 계속 이어져 어느 정도 긴장감이 유지된다. 그 거리는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호칭. 즉, 어머니를 노인이라 부른데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데, 아들은 지나치게 어머니의 사랑을 애써 피하고 너무나 이기적으로 자기 자신이 어머니에 대한 이 소설에서 말한 것처럼 빚이 없다고만 생각한다. 만약 아내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여느 방문처럼 어머니와 아들은 겉만 맴돌고 또 형식적으로 서로의 안위만을 묻다가 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가 그 문을 열어준다. 아내는 아들에 대한 집착과 사랑 그리고 옛 자부심과 집안의 비애 그 모든 것을 떠올리게 하는 옷궤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어머니에게서 옛 그 눈길에 얽힌 아들에 대한 애틋함을 이야기로 이끌어 낸다. 그것을 듣게 된 아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런 모습이 우리 사회의 아니 우리 문화의 어머니 모습이 아닌가 한다. 즉, 자식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하기 싫은 일도 또 먹고 싶은 것도 모두 ‘괜찮다’고 말하시는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포기하시고 자식, 남편을 위해 사는 모습이 그동안 우리 어머니의 모습인 것이다.실제로 작가 이청준의 어머니는 가난에 치여 집까지 팔았지만 그 사실을 고향에 온 고교생 이청준에게 숨겼다. 어머니는 주인 허락을 얻어 내 집인 양 아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하룻밤 잠까지 재워 보냈다. 어머니는 신새벽 눈 쌓인 산길을 걸어 아들을 읍내까지 배웅하고 돌아섰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들의 목소리와 온기가 밴 아들의 발자국만 밟고 온다. 마을 어귀에 선 어머니는 갈 곳이 없었다. 이청준은 그 황망한 어머니의 사연을 십몇 년 뒤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 내용은 작가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그리하였기에 “오목오목 딛어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하게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받고 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을 빌고 왔제......”) 와 같은 심금을 울리며 눈시울을 붉게 만드는 구절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