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상절과 제 명 : 석보상절6권교 수 님 :학 부 :학 번 :< 釋譜詳節 第六 - 석보상절 6권>석보상절종목 : 보물 제523호분류 : 기록유산 / 전적류/ 활자본/ 금속활자본수량 : 7책지정일 : 1970.12.30소재지 :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외시대 : 조선시대소유자 : 국유,사유관리자 : 국유,사유1. 석보상절의 편찬 동기1447년(세종 29) 수양대군이 간행한 석가모니의 가계와 그 일대기를 기록한 책.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당시 김수온(金守溫) 등의 도움을 받아 편역한 책이다. 책의 명칭 및 편찬동기와 간행시기, 그리고 편자에 대해서는 ≪월인석보≫(별항) 권1에 있는 〈석보상절 서(序)〉와 〈어제월인석보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서명의 ‘석보’는 석가의 일대기, ‘상절’은 요긴한 것은 상세히, 요긴하지 않은 것은 생략한다는 뜻이고, 편찬동기는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고 대중을 불교에 귀의하게 하기 위한 데 있다.2. 석보상절의 내용내용에 관해서는 〈월인석보서〉에 승 우(祐)와 도선(道宣)의 ≪석가보≫·≪석가씨보≫를 참고로 한 책을 만들어 이를 번역하여 만들었다고 했으니, 번역에 앞서 한문으로 된 책(漢文抄稿)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석보상절≫을 보면, 위의 두 ≪석가보≫ 외에도 ≪법화경≫·≪아미타경≫ 등 여러 불경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편찬순서는 팔상도(八相圖)·도솔래의(兜率來儀 :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내려옴.)·비람강생(毘藍降生 : 룸비니 동산에서 이 세상에 태어남.)·사문유관(四門遊觀 : 사대문으로 나가 봄)·유성출가(踰城出家 : 성을 넘어 출가함.)·설산수도(雪山修道 : 설산에서 도를 닦음)·수하항마(樹下降魔 : 나무 아래에서 마군에게 항복을 받음.)·녹원전법(鹿苑轉法 : 녹야원에서 설법함.)·쌍림열반(雙林涅槃 : 쌍림에서 열반에 듦.)의 순서를 따랐다.3. 전본 및 소장처이 책의 분량은 현전하는 권24의 내용으로 미루어 모두 24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자는 갑인자로 된 활자본이다. 당시의 활자인쇄술구니가 되었다.?▶라후라 [羅?羅] :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아들. 어머니는 구이(俱夷). 석가(釋迦)가 성도(成道)한 뒤에 출가(出家)하여 제자가 됨. 석가의 큰 열 제자 가운데 한 사람. 밀행(密行)에 제일. 라호(羅?)라고도 함.▶목련(目連), 마우드갈리아야나 [Maudgalyayana] : 석가모니의 십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 마가다의 브라만 출신으로, 부처의 교화를 펼치고 신통(神通) 제일의 성예(聲譽)를 얻었다. ≒나복(羅卜)·목건련·목련(目連).▶구담 [瞿曇]??①사라드바트라고 하는 옛 선인의 이름으로, 석가족(釋迦族)의 조상(祖上) ②석가(釋迦) 종족의 성(姓) ③도를 닦아 이루기 전의 석가(釋迦)를 이르는 말▶전륜왕 [轉輪王]? 수미산(須彌山) 둘레의 사천하(四天下) 곧 사주(四洲)의 세계를 통솔하는 대왕. 윤왕(輪王). 금륜왕(金輪王)은 수미(須彌) 사주(四洲)를 다스리고, 은륜왕(銀輪王)은 동?남?서 삼주(三洲)를 다스리고, 동륜왕(銅輪王)은 동?남 이주(二洲)를 다스리고, 철륜왕(鐵輪王)은 남녘 염부제(閻浮提) 일주(一洲)를 다스린다고 함.?6. 원문 해석 및 주석世尊이 象頭山애 가샤 龍과 鬼神과 위?야 說法?더시다.≪龍鬼 위?야 說法?샤미 부텻 나히 셜흔 둘히러시니 穆王 여슷 찻 ?乙酉ㅣ라.≫세존이 상두산에 가시어서 용과 귀신을 위하여 설법하시었다. 용과 귀신을 위하여 설법하심이(하신 것이) 부처님의 나이가(연세가) 서른둘이시더니(둘이시었는데), 목왕 여섯째 해인 을유년이다.①世尊이: 주격조사 ‘이’②象頭山애(상두산)애: 인도 중부 가야산.모양이 코끼리 머리 비슷하다고 함.석가가 수행한 곳.‘애’-선행체언의 말음절 모음이 ‘이’ 혹은 ‘ㅣ’가 아닌 경우조 건예 문선행체언의 말음절 모음이 ‘이’ 혹은 ‘ㅣ’인 경우 : 예세세예,선행체언의 말음절 모음이 ‘이’ 혹은 ‘ㅣ’가 아닌 경우 : 애/에상두산애,속격조사와 같은 형태이나 처격을 나타내는 특수한 처격조사: ?/의얄?,▶ 처격조사龍과 鬼神과(용과 귀신과): ‘공동’의 의미를 지닌 보조?):대격조사 ‘?/을’ -체언 말음이 자음일 경우⑧ ?리라:?리라 → ? + 리 + 라. ‘-리’ : 미래시제어미, 추측의 의미가 강함目連이 그 말 듣?고 즉 자히 八定?야 펴엣던 ?? 구필 ??예 ≪?론 주를 니르니라≫ 迦毗羅國에 가아 淨飯王? 安否 ?더니 耶輸ㅣ 부텻 使者왯다 드르시고 ≪使者? 브리신 사?미라≫ 靑衣? 브려 긔별아라 오라?시니 羅?羅?려다가 沙彌 사모려 ??다 ?? ≪沙彌? 새 出家? 사?미니 世間앳 ?들 그치고 慈悲ㅅ ?뎌글 ?다?논 ?디니 처? 佛法에 드러 世俗앳 ?디 한 젼?로 모로매 모딘 ?들 그치고 慈悲ㅅ ?뎌글 ?야? ?릴? 沙彌라 ?니라≫목련이 그 말씀을 듣고 곧바로 선정에 들어 펴었던 팔을 구필 사이에 ≪빠른 것을 이르니라≫ 가비라국에 가 정반왕께 안부를 사뢰더니 야수가 부텨의 사자가 왔다들으시고 ≪사자는 부리신 사람이라.≫청의를 시켜 기별을 알아오라 하시니, 나후라를 데려다가 사미를 삼으려고 한다고 하므로 ≪사미는 새로 출가한 사람이니 세상의 뜻을 끊고 자비의 행적을 한다고 하는 뜻이니, 처음 불법에 들어 세속의 뜻이 많은 까닭에 마땅히 악한 뜻을 끊고 자비의 행적을 해야 할 것이므로 사미라고 하는 것이다.≫?? :?? → ?ㅎ +?.명사의 자동적 교체 ( ‘ㅎ’종성 체언)??예:사이에, 선행체언의 말음절 모음이 ‘이’ 혹은 ‘ㅣ’인 경우 처격조사 ‘예’주를:줄을.의존명사. 중기국어의 의존명사에는 ‘녁,덛,?,것,분,?,?,앛(바,까닭),이,?,즐,적,디’등이 있다.현대국어에서 ‘즐;은 오히려 현대어의 ’것‘에 가깝다.淨飯王?(정반왕?):정반왕께.왯다 드르시고: 와 있다 들으시고. ‘-아 잇다’는 완료상. 중기국어에서는 ①-아 잇다 ②-앳다 ③-앗다 의 세가지 어형이 다 나타나는데 15세기 말기로 가면서 점차 ‘-앗다’형이 많이 쓰임. ②는 ①과③ 어형의 과도기적 형태. 그러나 16세기에 가서도 이들 세 어형이 다 나타나며 과도형 ‘-앳다’가 없어지고 ① ③ 두 어형이 확립되는 것은 17세기에 가서의 일. ‘-앗-’이 오늘도라와 어마니? 濟渡?야 네가짓 受苦? 여희여 湟槃得호? 부텨 ??시긔?리?다. ≪네가짓 受苦? 生과 老와 病과 死왜라.≫목련이 사뢰되, “태자 나후라가 나이가 이미 아홉이매 출가하게 하여 성인의 도리를 배워야 할 것이니,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함은 잠깐이지만 하루 아침에 명종하여 ≪명종은 목숨을 마친다는 것이다.≫ 악한 길에 떨어지면, 은정과 애정을 멀리 떠나, 어지럽고 아득하여, 어미도 아들을 모르며 아들도 어미를 모를 것이니, 나후라가 도리를 깨달아야만 돌아와 어머님을 괴로움에서 건져내어, 네 가지의 괴로움을 떠나 열반을 얻기를 부처님 같으시게 할 것입니다.(부처님과 같이 열반을 얻을 것입니다.)” ≪네 가지의 괴로움은 생?노?병?사 이라.≫聖人ㅅ(성인ㅅ):속격조사,무정물 지칭, 유정물 지칭의 존칭 : ㅅ아니한 ??: 많지 않은 사이. 즉 잠깐 사이.得?야?: ‘?’(강조의 의미)耶輸ㅣ 나?샤? 如來 太子ㅅ 時節에 나? 겨집사?시니 내 太子? 셤기???하? 셤기???야 ?번도 디만? 일업수니 妻眷?외얀디 三年이 몯차이셔 世間 ?리시고 城 나마 逃亡?샤 車匿이 돌아보내샤 盟誓?샤? 道理 일워? 도라오리라 ?시고 鹿皮 옷 니브샤 미친 사??티 묏고래 수머 겨샤 여슷?? 苦行?샤 부텨 ?외야 나라해 도라오샤도 ?올아? 아니?샤 아랫 恩惠? 니저 ?리샤 길? 사?과 ?티 너기시니 나? 어버? 여희오 ??그? 브터사로? 우리 어? 아?리 외?고 입게 ?외야 人生 즐거? ?디 업고 주구믈 기드리노니 목수미 므거? 거실? 손? 죽디 몯?야 셟고 애왇븐 ?들 머거 갓가?로 사니노니 비록 사?? 무렛 사니고도 ??마도 몯호?다.야수가 말씀하시기를, “여래가(께서) 태자로 계시던 때에 나를 계집(아내) 삼으시니, 내가 태자를 섬기되 하늘을 섬기듯 하여 한번도 잘못을 범한 일이 없으니, 아내 권속이 된지 삼년 채 못 되어 세상을 버리시고 성을 넘어 도망하시어 차닉이를 돌려보내시어 맹세하시기를 ‘도리를 이루어야 돌아오리라’하시고, 녹비옷을 입으시어 미친 사람과 같이 산골에 물 지칭, 유정물 지칭의 존칭하는 속격조사)② 中에도:중에도.‘도’(역시의 의미를 나타냄)③ ??니 : 같은 것. ‘? + ? + 이’의 구조. 의존명사 ‘이’는 사물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중기국어에서 꽤 생산적으로 나타나나 현대어로 오면서 점차 ‘것’으로 대체됨.④ ? : 께. 존칭을 나타내는 격조사(여격조사) ‘ㅅ + 긔’로 분석할 수 있으나 결합되어 조사로 기능함. (관형격)(의존명사)그 ? 目連이 種種 方便으로 다시곰 ??도 耶輸ㅣ 잠?도 듣디 아니?실? 目連이 淨飯王? 도라가 이 辭緣을 ??대 王이 大愛道? 블러 니?샤? 耶輸는 겨지비라, 法을 모?? 즐급드리워 ?온 ?들 몯 ?러 ?리?니 그듸 가아 아라듣게 니르라.그 때 목련이는 갖가지 방편으로 다시금 말씀을 드려도 야수는 조금도 듣지 아니함으로 목련이는 정반왕께 돌아가 이 사연을 사뢰되 왕은 大愛道(대애도:마야 부인 형님)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야수는 여자라 법을 모름으로 마음이 세속에 집착하고 얽매여 사랑하는 뜻을 못 쓸어버리니 그대가 가서 알아듣도록 일러라. 하시니① 다시곰: ‘곰’(강세를 나타냄)② 즐급드리워 : 전착하여. 전은 묶을 전, 얽을 전.③ ?온 : 사랑하는. 기본형은 ‘?오다’.애틋하게 사랑하다. ‘?오-’와 수의적으로 교체된다. ?온?들 → ? + 오 + ㄴ( 관형절의 꾸밈을 받는 표제명사가 목적어).이처럼 의도법은 주어가 1인칭이 아닐 때도 나타난다. (조건 ; 관형절의 꾸밈을 받는 표제 명사가 목적어일 때)大愛道ㅣ 五百 靑衣 더브르시고 耶輸? 가아 種種 方便으로 두?번 니르시니 耶輸ㅣ ?? 듣디 아니?시고 大愛道? ??샤? 내 지븨 이?저긔 여듧 나랏 王이 난겻기로 ?토거늘 우리 父母 듣디 아니?샨 고? 釋迦 太子ㅣ ?죄 奇特?실??奇? 神奇?씨오, 特은 ?? 므리예 ?로 다?씨라? 우리 父母ㅣ 太子? 드리??시니 夫人이 며느리 어드샤? 溫和히 사라 千萬 뉘예 子孫이 니?가? 위?시니 太子ㅣ ?마 나가시고 ? 羅?羅? 出家?샤 나라 니?리? 긋게 ?시?니 엇더?니?고.大愛道(대 있다.
군사정권시대의 언론 보도-5.18 광주민중항쟁을 중심으로군사정권시대의 언론 보도-5.18 광주민중항쟁을 중심으로1. 서론우리 주위에서는 끊임없이 수많은 새로운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 수 많은 현상들 가운데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현상은 직접 접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언론이라는 매체의 정보전달과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따라서 언론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회 문제들의 진행과정에 줄곧 개입한다. 이를테면 날마다 일어나는 사건이나 문제들을 일정한 대중적인 틀 속에서 공식화하고 의미를 부여 한다. 만약 이러한 언론의 공식화 과정이 바르게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보도의 대상이 된 사회 문제 자체에 대한 왜곡은 물론, 그와 관련된 제반 사회관계들을 온통 어긋나게 만들고 만다. 그리고 언론은 나아가서 사회 통합과 유지의 기반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과 혼란의 주범이 되는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언론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어떻게 보도했는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총체적 위기에 대한 민중적 저항으로 대변되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는, 곧 우리 언론의 사회적 위치와 그 실체를 알아볼 중요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 광주와 전남일원에서 벌어졌던 5?18민중항쟁은 성공한 민중혁명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항쟁의 족적은 1980년대부터 2000년대를 관통하여 한국 현대사의 모든 분야에 끊임없이 큰 영향을 미쳐왔다. 그러나 언론은 당시 진실보도를 외면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는 언론기관이 시위대에 의해 불태워졌으며, 결국 광주에서는 언론의 보도기능을 저항세력의 홍보물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 왔다. 또한 5?18민중항쟁 당시 정치적으로는 계엄 상태 하에 있어 언론매체들은 보도검열을 받아야 할 상황에 있었으므로 자유스러운 보도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왜곡보도 실태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2.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언론 보도먼저 1980년 광주항쟁에 대한 보도를 양적으로 살펴보면 주로 항쟁 수습과 진압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동아일보」의 경우 광주항쟁 보도 88건 가운데 데모 내용 기사는 3건인 반면, 진압과 수습에 대한 기사는 54건이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모두 74건 가운데 데모 내용을 다룬 것은 4건, 진압과 수습에 대한 것은 46건, 「서울신문」은 3건과 70건이었다. 이처럼 데모 내용에 대한 세 신문의 기사 량이 모두 10건으로 간첩 및 북한 동태에 대한 기사 17건(동아일보 4건, 조선일보 9건, 서울신문 4건)에도 미치지 못했다.그렇다면 광주항쟁에 대한 사실 보도 내용은 어떠한가. 이 세 신문들은 항쟁이 치열했던 18일부터 21일까지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보도하지 못했다. 동아일보는 5월 21일자 신문에서 ‘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는 계엄사령부의 발표문을 짤막하게 실었다. 조선일보도 22일자 신문에 ‘광주 일원에 학생과 시민이 합세한 소요 사태가 나흘째 계속되고 있다’는 내용의 계엄사 발표문 기사와 함께, ‘고정 간첩이 광주에 침투하여 데모를 선동하고 있다’는 계엄사령관의 경고문을 함께 실었다. 그리고 서울신문도 22일자 신문에 ‘광주에 소요가 발생해 유언비어와 지역감정이 겹쳐 사태가 악화되고 있으며, 이 사태로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하고, 공공건물 13동과 차량 7대가 파손됐다’는 계엄사 제공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니까 5월 18일부터 22일까지의 광주항쟁 보도 기사는 이것이 전부였다. 이어 나온 광주항쟁 보도들 또한 광주 데모가 18일부터 닷새째 계속되고 있다면서도 모두가 데모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 계엄사 제공 내용을 취재 형식으로 바꾸어 쓴 기사뿐이었다.“동아일보 5월 22일자 기사 제목-광주 데모사태 닷새째,인접 시군 번져, 군경 시민 사상자 발생, 파출소, 세무서, 방송국 등 불타, 행정 완전 공백 상태, 도청 시청 등 비어...데모대가 공포 쏘자 시민은 귀가, 18일 전남대생 시위 군경 충돌하며 과격해져, 기관총 소총 수류탄 장갑차 실탄 등 다수 탈취.조선일보 5월 23일자 기사 제목-폐허 같은 광주데모 6일째,.. 파출소 방송국 등 불타, 군경 시민 사상자 발생, 자극적인 소문이 기폭제, 상가 철시.......곳곳서 불탄 차, 시민들은 쌀 연탄 못 사 불편.서울신문 5월 24일자 기사 제목-공포의 광주 유혈소요 6일, 파출소 5곳 파손, 차량 3대 불타-18일, 시청에 난입 일부 방송국도 전소-19, 20일,무기고서 총기 꺼내...도청을 점거-21일, 화순서 파괴, 벌교 고흥지서 피습-22일 ”광주의 민주화 운동 기간 동안 신문들은 계엄 당국의 발표는 글자 하나 빠뜨리지 않고 보도하면서도 현장사태를 다루면서는 ‘폭도’, ‘약탈’, ‘무정부사태’ 등으로 묘사했다. 기사의 표제만 보아도 진실의 증언은 고사하고 진상을 오히려 왜곡하는 보도를 했다. 폭도들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 신문들의 광주항쟁 보도는 조선일보와 서울신문의 ‘현장 리포트’ 기사에서 극치를 이룬다. 조선일보는 5월 25일자 신문에 ‘광주 화정동’에서 김대중 기자(당시 사회부장)가 취재해 보냈다는 사태 1주일 후의 황량하고 어지러운 광주 시가지의 모습을 담은 기사를 내 보냈다. 서울신문도 5월 26일자 신문에 ‘군인을 잡아 낫으로 찔러 죽이고 껍질을 벗기는 만행을 저질렀는가 하면...한국방송은 못 믿으니 이북 방송을 들어라...광주 교도소를 7차례나 습격하면서 어린이 중학생을 앞세우고...’ 등의 내용이 들어있는 기사를 김진규 기자(당시 사회부장)의 취재 기사로 내보냈다. 그러나 이들 두 기자의 기사는 허구이거나 계엄사가 제공한 내용을 각색한 것이었다. 광주항쟁의 중심이었던 ‘금남로’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거기에서 4, 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화정동 언저리에서 취재한 것이었다.그리고 광주 시민들이 국민에게 보낸 호소문은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군부의 폭력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고 부상하여 피바다를 이루고 있으니 살려달라’는 5월 22일자 ‘전국 민주시민에게 드리는 글’과, 같은 날에 전남대학교 교수들이 내놓은 ‘6.25에서도 베트남 전쟁에서도 볼 수 없었던 참혹한 현실을 눈앞에 두고 여러분들은 어찌 침묵하고 모른 체 하고 있느냐’는 내용의 ‘대한민국 모든 지성인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호소문 등이 이어졌지만 당시 신문의 지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중앙지들은 22일 이후 엄청난 량의 기사를 지면에 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도의 문제점은 광주를 ‘폭도의 도시’로 고착화 시켰다는 점이다. 중앙지는 계엄사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해 사태 초기의 피해자를 축소 발표했고, 이어 시민폭발의 원인인 공수부대의 과잉진압문제를 회피한 채 복면과 무장, 강도, 시민들의 불안, 간첩과 연계성 등을 집중적으로 다룸으로써 국민들에게 사태를 오도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사태가 마무리된 뒤에도 시민을 ‘적’으로 간주한 공수부대 진압방법의 문제점이나 계엄군의 무리한 작전계획, 수준 낮은 선무작전 등에 대해서도 침묵함으로써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민들이 ‘진실’을 믿지 않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매서운 검열의 바람을 지방지들도 피할 수 없었다. 19일자 20일자 석간신문(지방신문)에 5,18 광주민중항쟁의 사실이 게재되지 않은 채 배포되면서 시민들의 언론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지방의 TV?라디오방송 역시 계엄군의 잔학상은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물론 검열당국이 가차 없이 삭제했기 때문이었다. 지방신문은 검열관실의 강경한 지침 때문에 여전히 ‘조용한 광주’의 모습만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금남로 차량통행 통제 / 1가 - 한일은행지점, 시내버스 9개 노선 우회 광주시 금남로1가부터 한일은행 앞까지의 모든 차량통행이 일시 중단됨에 따라 18일부터 이 지역을 통과하는 1, 2, 5, 9, 15, 17, 20번 버스 등 9개 노선의 버스도 시민관 앞- 동명로 로타리쪽으로 우회, 운영하고 있다.광주시는 18일 밤부터 돌연 시내전역에 통금시간이 연장되자 35개 시내버스 노선 중 중심지 10개 노선의 기점지 마지막 출발시간을 밤 8시로 단축 운행키로 했으며 시외나 변두리를 운행하는 시내버스의 시내운행시간도 재조정하기로 했다.한편 일요일인 18일부터 일부 시내버스가 운행코스를 갑자기 바꿔 우회운행하자 승객들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우회하는 이유를 듣고는 걸어서 귀가하거나 바꿔진 승강장을 찾기도 했다.간접적으로 광주의 상황을 전한 기사의 경우도 있었다. 19일자 전남일보 사회면 5단 ‘금남로 차량통행 통제’제하의 기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기사는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벌어진 금남로의 현장모습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 채 ‘시내버스가 통행되지 않았다’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금남로가 시위상태에 있음을 표시했다.
< 한식의 세계화 >한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거의 식문화는 시각적으로 보기 좋은 음식이나 맛있는 음식을 찾기보다는 배고픔을 해결하기위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선호했다. 그러나 요즘은 ‘웰빙’ 붐이 일면서 배를 채우는 음식보다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음식을 먹는데 관심이 쏠리고 있다.이러한 경향은 한식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한식의 세계화가 필요한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요즘은 우리의 주식이었던 밥과 국 대신 토스트와 피자로 한 끼를 해결하고 있다. 이러한 음식 대부분이 고칼로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비만의 원인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서양음식에 비해 한식은 상대적으로 건강식이며, 육류 중심에 기름에 튀기는 조리법이 대부분인 서양음식에 비해 해산물과 어류, 채소류 중심의 저칼로리 식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웰빙 시대에 걸맞은 음식이며, 현대인의 비만을 막을 수 있는 식단이다.또한 한식의 세계화가 더욱 필요한 이유는 음식은 그 나라의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좋은 수단이며, 그 나라 사람들의 정체성을 확고히 다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보통 피자를 먹으면서 이탈리아를 떠올리게 되고, 쌀국수를 먹으면서는 베트남을 떠올리며 초밥을 먹으면서는 일본을 떠올린다. 이처럼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 나라 사람들의 식습관이나 해당 나라를 떠올리면서 그 나라에 대해 많이 알게 된다. 가령 초밥을 예로 들면, 초밥은 이미 세계에서 고급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초밥은 가격도 비싸고 고급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음식을 먹는 일본도 수준이 높은 국가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 이처럼 잘 알려진 식문화는 그 나라의 홍보대사 역할도 톡톡히 한다. 이렇듯 세계 어디서나 초밥을 보는 일본인들은 자신의 나라에 대해 한번 생각하게 되고, 자신들의 식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한식을 우리 고유의 문화라는 생각으로 우리나라 안에서만 공유하지 말고, 세계의 음식 시장에 자신 있게 내놓고 평가를 받아야 한다.그렇다면 한식의 세계화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까? 우선,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한식은 ‘웰빙’음식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한다. 한식은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인 만큼 우리와 같은 식생활을 가지지 않은 외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맛있으니까 먹어보라는 식의 홍보보다는 기름기가 적고, 야채 위주이면서 필수 영양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는 한식의 이점을 부각시키면서,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따라서 음식점의 메뉴판이나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안내 책자에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는데 치중하기 보다는 그 음식의 조리법은 무엇이고, 어떠한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어디에 효능이 있다는 식의 부연설명을 자세히 써 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겠다.두 번째로, 한식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한식의 메뉴를 재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음식은 일식처럼 바로 앞에서 조리법을 보여주며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기 때문에 조리시간도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한상차림위주기 때문에 서양처럼 디저트, 메인요리 이렇게 나누기가 어렵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이 메뉴를 선택할 때 어려운 점이 많다. 따라서 한식이 한상차림이라는 특징을 이용해 세트 메뉴개발에 힘써야 한다. 밥과 국으로 된 메인 메뉴를 먹기 이전에 입맛을 돋우기 위한 것으로 떡볶이를 디저트로 묶는다든지, 불고기를 먹고 난 다음에는 우리가 보통 먹는 것처럼 냉면을 세트메뉴로 만들거나, 비빔밥을 먹기 전에 식혜를 음료로 마실 수 있는 메뉴를 개발한다면 외국 사람들이 메뉴 고르는 재미도 있고, 쉽게 선택하지 못했던 다른 음식들도 먹어 봄으로써 한식을 접할 수 있는 기회의 폭을 넓혀줄 수 있다.셋째, 한식을 꼭 한국 사람이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한식을 그 나라에 알리기 위해서는 그 나라에 사는 사람, 현지인이 식당을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식은 한국인이 만들고 직접 식당을 운영하며,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 또한 우리 교포이거나 유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한식의 ‘세계화’라는 것은 말 그대로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식을 많이 먹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식을 한국의 것이라고 못 박아 두는 것보다, 햄버거 가게의 주인이 미국인이 아닌 것처럼 한국 식당의 주인도 외국인일수록 그만큼 한식이 세계에 많이 알려졌다는 것이고 익숙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위와 같은 계획들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부차원의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한식의 세계화에 대한 필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그에 따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식이 많이 알려지지 못한 것은 정부 차원에서의 지원 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현재 해외에서 운영하는 한식당들의 성공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가족경영이거나 한국의 관광객이나 교포들이 주 이용고객이기 때문에 한식을 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정부 차원에서 한식의 요리법을 표준화하여 각 식당들이나 요리사들에게 알려주는 노력이나 우리 음식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 고급 상품화하는 등의 전략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한식을 알리기 위해 해외 박람회에 자주 참가하거나 한식 해외 진출 업체의 지원 등의 구체적인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겠다.위와 같은 계획을 토대로 한식을 알리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먼저, 요즘 각광받고 있는 한국의 전통 술 ‘막걸리’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예전부터 서양 사람들도 음식을 먹기 전에 와인 한잔을 하듯이, 술과 음식은 떨어져서 생각할 수가 없을 만큼 가깝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막걸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막걸리 공장들은 영세했고 몇몇 지역의 소수 공장들만 남아있어 품질표시 기준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일본에서 막걸리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신세대의 입맛에 맞게 막걸리의 맛을 다양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외국 사람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막걸리의 수요가 과거에 비해 많이 늘었다. 그런데 점점 늘어날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체계적인 공장도 적고 위생관리나 품질 표시기준이 없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막걸 리가 체계적으로 관리되기가 힘들다. 프랑스의 와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해 진 것도 잘 정비된 품질 관리제도 덕분이라고 하니 우리나라도 프랑스의 사례를 본받아 품질관리 제도를 마련해야 하겠다. 그래야 다른 나라 사람들도 믿고 마실 뿐만 아니라 와인처럼 품질 등급이 매겨짐으로써 고급화 전략에도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막걸리는 술이기 때문에 그와 어울리는 음식들을 개발한다면 더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막걸리를 고급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포장용기의 개발도 필요하다. 맥주나 소주는 작은 용기부터 대용량 까지 다양하지만 보통 막걸리의 용기는 비슷비슷하다. 물론 유통기한의 문제 때문에 큰 용기를 만들었겠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이끌기 위해서는 마시기 편한 작은 용량의 막걸리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 같이 마실 수 있는 큰 용기까지 개발하는 것이 막걸리의 세계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커피의 역사- 커피의 기원을 찾아서과목명:교수님:학번:학과:이름:제출일:식생활의 문화적 이해커피의 역사- 커피의 기원을 찾아서1. 서론한가로운 오후를 즐길 때, 밤늦게까지 일에 매달려 있을 때, 언제 어디서나 부담 없이 찾게 되는 음료 중의 하나가 바로 커피다.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듯, 우리나라 도심에 나가보면 다양한 커피 전문점들이 자리 잡고 있다. 불과 십년 전만 해도 커피전문점은 특별한 약속이 있을 때만 가는 곳으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장소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주로 커피는 다방에서 마시는 인스턴트 커피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원두커피를 너무 익숙하게 마시고 있으며, 눈을 돌리는 곳마다 조그만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다.우리 생활 속에 너무나도 친근하게 자리 잡고 있는 커피, 그러나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까지 전해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특권층에 의해서 향유되던 커피가 이제 일반 대중의 기호식품으로 자리 잡은 지금, 한 잔의 커피는 친구나 연인, 직장인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없어서는 안 될 음료로 각광받고 있다. 이러한 대중적인 기호 식품으로서의 커피는 어떻게 시작 되었으며, 언제부터 자리 잡게 되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2. 커피의 역사2.1 커피의 발견지구상에서 오늘날 문화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나라는 근대 문명을 발전시킨 서양 유럽이다. 커피 역시 유럽 여러 국가에서 도약했고, 국제 무역상품으로 발전 했으며 마침내 전 세계인이 즐기는 기호음료가 되었다.16세기 말 터키로부터 커피가 유럽에 소개되자 유럽인들은 이 검은 음료를 ‘술타나’라고 부르며 매료되기 시작했다. 커피가 전래된 초기 유럽에서는 커피의 원산지가 아라비아라고 생각했고 음용방법도 터키 식으로 만들어서 마셨다. 그러나 커피의 원산지가 ‘이디오피아’이며 그곳으로부터 아라비아 인에게 전해졌다는 것을 샤를 폰스라는 프랑스 의사가 1698년에 밝혔다.커피의 발견에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 오고 있으나,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얘기로는 서기 575년경 아비시니아(이디오피아의 옛 이름)의 한 지방인 ‘카파’(Kaffa)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목동 칼디는 자신의 염소들이 어떤 나무의 잎과 열매를 뜯어먹은 후 주변을 날뛰는 모양을 보게 되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칼디는 자신도 그 열매를 따서 먹어 보았는데 그 열매가 기운을 돋우고 오랫동안 깨어 있게 하는 각성 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마침 근처 이슬람 사원의 한 수행자가 이곳을 지나다 칼디를 보았고 칼디는 자신이 경험한 바를 그에게 설명하며 그 식물을 보여 주었다. 수행자는 직접 경험해 보기를 원해서 얼마간의 열매를 빻은 다음 끓은 후 물을 부어 마셨는데, 각성의 효과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수행을 위한 오랜 기도 시간에 먹으면 잠을 쫓는데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사원에서 동료들과 나누워 마시기 시작했다. 이 음료는 곧 사원에서 사원으로 퍼져 나갔다고 전해진다.이처럼 커피의 원산지가 이디오피아임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커피가 지금처럼 음료로 발전한 곳은 아라비아 지역이다. 이디오피아를 발원지로 하여,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지역에 뿌리를 내린 다음, 중앙아시아의 북쪽에 있는 터키에 이르러 비로써 음료로서 탄탄하게 자리를 매김 한 후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었다고 한다.커피가 유럽에 전파된 것은 17세기경으로 그 당시 유럽의 상류 계층은 터키의 풍습을 즐겼으며 이들은 커피의 맛에 열광하게 되었고 차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수도생활에 큰 역할을 차지하였다 한다.2.2 커피를 이끌어낸 아라비아 인이슬람 순례자들과 아랍 무역상들에 의해 아라비아 반도에 상륙한 커피는 초기에는 수피교도(이슬람 신부주의)들 사이에서 밤 기도 시간에 졸음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커피 씨를 볶아서 끓인 커피를 마시는 풍습’이 시작된 곳은 아라비아 남단 예멘의 ‘알마카’라는 곳이다. 이때가 1260년경으로 알마카의 이슬람교 단체의 수장인 ‘알리 샤들리’이 마시는 음료로 만들기 위해 커피 씨에 물을 붓고 끓이는 방법을 고안했다고 한다. 샤들리는 씨에 달라붙은 과육을 벗겨내기 위해 살짝 볶은 후 끓여서 마셨다고 하는데, 지금도 예맨 사람들은 이렇게 만든 커피를 ‘키쉬르’라고 부르며 마시고 있다.에멘의 북서부 산악지역에서 커피나무가 재배되며 커피 음용이 확산되어 나갔고,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오스만투르크가 남부 아라비아 까지 지배하게 되면서부터는 성도 메카와 메디나까지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이슬람교 성직자들은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 저녁 예배 때가 되면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들었고 곧 일반 신도를 사이에까지 전파되었다. 예멘 인들의 ‘키쉬르’를 아라비아 인들은 ‘카흐와’라고 부르며 그들의 생활 문화로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이다.2.3 최초로 금지된 커피의 음용초창기 이슬람 사회에서 커피를 마시는 풍습은 사원의 상층 계급에서부터 확산되어 나갔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드는 커피하우스의 확산은 곧 공론이 형성되는 곳으로 정치적으로는 우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커피의 역사에는 수많은 금지와 억압의 이야기로 넘쳐나는데, 최초로 커피 음용이 금지된 사건은 1511년 메카에서 발생했다. 당시 메카의 부패한 행정관이었던 ‘카이르 베그’는 자신의 통치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조장될 것을 염려하여 커피 음용 금지령을 내렸다. 커피 하우스는 모두 문을 닫았고, 커피 상들의 창고는 수색을 받았으며, 압수한 커피는 모두 불에 태워 버렸다. 사람들은 감시를 피해 집에서 몰래 커피를 마셔야 했다. 이후에 카이로가 민중을 억압했다는 이유로 처형되면서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커피는 이제 아라비아 인들의 생활필수품이 되었다.2.4 17 ∼ 18세기의 커피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유럽과 인디아 그리고 지금의 인도네시아 등지로 퍼져 나간 시기는 17세기에서 18세기 초에 걸쳐서 였다. 17세기를 전후해 동방의 여행자들과 이탈리아 상인들을 통해서 커피를 된 유럽인들은 상당한 호기심을 보였다. 서유럽의 국가들은 대규모 커피산업의 실질적인 기반을 닦아놓았는데, 라틴아메리카와 서인도 제도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해서 대규모 커피 경작을 했는가 하면 커피를 볶고 추출하는 다양한 기구들과 방식을 개발하여 커피를 만드는 방법을 향상 시키고 커피를 이용해 새로운 것을 점진적으로 창출해냈다. 또한 17∼18세기 유럽의 다양한 문화와 정치적 격변기의 중심에 생활 문화 공간으로서의 커피하우스가 있었다.활발한 베니스 인들은 그린빈)을 처음 유럽으로 들여왔고, 실리적인 런던 시민들은 커피하우스를 사회적으로 필연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파리의 카페는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의 중심에 있었으며 예술을 알려면 카페로 가야한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예술적인 분위기가 충만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커피에 크로와상을 곁들여 먹는 새로운 습관과 ‘비엔나커피’라는 달콤한 커피를 창출해냈다. 커피 열풍은 18세기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 과정이 순탄치 만은 않아서 정치적 이해관계나 새로운 습관의 도래에 따른 사회적인 부작용 등 커피 음용에 대한 박해도 있었다.2.5 19세기,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커피 재배17세기 이래 유럽 대륙은 세기마다 영토 분쟁으로 다퉈오다 19세기 후반에서야 판도가 정해졌다. 유럽 내에서 질서가 잡히자 식민지 개척에 분주하던 유럽 열강들은 본격적으로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 들었다. 18세기부터 유럽인들에게는 커피를 확보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아랍 인들의 뒤를 이어 세게 최대의 커피 공급자로 등장한 사람들은 네덜란드 인들이었다. 모카 항에서 최초로 커피묘목을 몰래 빼내온 사람들은 네덜란드 인이었고 암스테르담 식물원에 이식된 묘목은 후에 네덜란드령의 실론에서 재배되었다. 네덜란드 인들은 상업적으로 커피경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인도네시아 바타비아, 자바 등으로 이식해 재배하며 ‘동인도커피무역회사’를 차렸고 커피 경작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경에는 스페인의 선교사들이 필리핀, 중앙아메리카, 콜롬비아 등 커피 재배를 시작했고, 자메이카에서는 영국인들에 의해 커피가 재배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커피는 식민지 노예를 양산해 내고 있었다.18세기 내내 드넓은 남미의 식민 개척자들은 노예들을 거느리고 원시림을 커피 플랜테이션으로 건설하는 작업에 열중했다. 가혹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커피 플랜테이션이 증가함에 따라 아프리카로부터 노예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수입되었다. 그러나 농장주들은 값싼 흑인 노동자들 보다는 비싸지만 효율성이 높은 유럽의 하층 이주민들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점차 커피 재배의 노하우를 익히게 된 농장주들은 보다 섬세하게 일을 잘 할 수 있는 노동력이 필요했고 또 세계 커피 생산량이 증가하자 다른 지역의 커피ㅗ다 양질의 커피를 생산하려는 목적과 효율을 높이기 위함이었다.2.6 20세기의 커피산업커피를 마시는 일은 세기마다 사람들에게 다른 의미로 작동하며 널리 퍼져 나갔다. 16∼17세기에 약제로써 치료나 효능에 이끌려 음용되기 시작한 커피가 18세기에는 유럽 인들이 지성을 자극하는 음료로 숭배하며 카페 라이프를 창출해냈고, 산업사회가 발달하기 시작한 19세기에 와서는 모든 사람의 에너지원으로서 광범위하게 음용되며 전 세계로 확산되어 갔다. 초창기 이슬람 사회에서 잠을 쫓으며 종교적 수행 정진을 위해 마시기 시작한 커피를 산업 사회가 되면서 공장에서 굶주림을 잊고 일을 하기 위해서도 마실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커피 재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커피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 커피는 인류를 정복했다. 20세기의 커피는 이제 방대한 커피 무역 시장으로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커피 자체의 발달 과정에서도 육종과 재배, 기구 등 생산에서 소비 부문에까지 나올 것은 다 나오는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 졌다. 또한 커피를 이용한 다양한 디저트 음식은 물론 커피목욕이라든가 세제로서의 효과 등 커피를 활용할 수 있는 생활의 지혜가 총동원되었다. 그 중에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는 역시 인스턴트커피와 디카페인 커피의이다.
< 감상문 >‘학교가 달려져야 한다’루이스 거스너 作지도자가 깨어야 학교가 산다.“심야 학원 10시까지, 사교육을 때려잡자!…법제화 추진”교육과학기술부가 사교육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학원 교습시간을 10시까지 규제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학원 교습시간의 제한을 통해서, 늘어만 가는 사교육을 줄이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물이 새는 곳은 막지 않고 그 자리에다 양동이만 갖다놓은 격이다. 사교육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학부모나 학생의 수요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요는 공교육의 부실함에서 시작된 것이며, 또한 공교육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그런데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은 이러한 공교육에 문제점을 인정하고 무엇인가 개혁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 이 법의 추진만 보아도 그렇다. 사교육이 증가하는 실질적인 문제를 개선하려고 하지 않고, 그 문제점으로 인한 결과를 감추기에만 급급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교육은 이러한 도피행동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이스 거스너는 학교체제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론에서 끝나지 않고 몸소 실천으로 행해졌다. 공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 21세기학교라는 학교지원 재단을 만들어 학교의 변화를 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가가 우리 한국에 없다는 것이 아쉬운 상황이지만, 그만큼의 열정을 가진 교육행정가, 교장, 교사, 학부모가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교육 개혁의 시기도 아직 늦지 않았다.학교교육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여기서 지도자라 함은 교육 행정가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교육행정가, 교장, 교사, 학부모 모두 각 테두리 안에서 지도자에 해당한다. 교육행정가는 교육행정을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지도자이며, 교장은 교사와 학생들을 이끄는 지도자이다. 또한 교사는 학생들의 지도자이며, 학부모는 가정 안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이다. 이처럼 학교교육 안에서 한 직책만 딱히 ‘지도자’라고 규정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역할의 범위는 각기 다르므로, 그 범위 안에서 각각의 지도자들의 태도가 바뀌어야만이 우리 학교교육이 발전할 수 있다.우선, 교장은 한 학교를 대표하는 지도자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우리나라의 교장들은 교사들에게 많은 권한을 내어주지 않았다. 학교 정책 결정이나 예산조정, 직원을 채용하는 모든 행정 과정들은 교장이 도맡아 하는 분야였다. 교사들은 수업에만 집중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사들에게 학교의 규칙이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시켜야만 학교에 더욱 애착을 갖고 생활할 수 있으며, 학교에 주인의식을 갖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교장들은 교사들을 무조건 수업만 하는 존재로 인식하지 말고, 학교 운영과정을 이끌어가는 주도자로 보아야 한다.이러한 교사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장들이 먼저 교사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능력은 곧 교장과 교사의 활발한 의사소통으로 이어진다. 과거의 학교행정은 무조건 교장의 지휘 하에 교사들이 따르는 방식이었다. 이제 교장은 권위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거에 교장들은 교사의 의견을 묻지도 않았으며, 교사의 의견은 교육행정 과정에서 아예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정황에 따라서 교사들은 교장을 어려운 존재로 여기게 되었으며, 교장은 교사를 명령을 전달받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교사는 교장이 되기 이전에, 평교사를 거친 경험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장들은 ‘교장’이라는 직책에 오르게 되면, 과거의 교사의 경험은 다 잊는 듯하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칠 때, 학생의 특성이나, 개인의 배경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교장도 교사와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통해 교사의 고충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활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때, 교장과 교사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러한 공감대가 학교 정책에도 반영되어, 학교 관리에 기대이상의 효과를 창출 할 수 있다. 또한 전문가 집단인 교사들에게 교장의 수업내용이나 방법에 대해 일방적인 지적은 자존감을 저하시킬 수 있으므로, 원활한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함께 마련하도록 한다.다음으로, 교장은 지역사회 인사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지역사회 인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학교의 울타리를 낮춰야 한다. 학교의 도서관 개방이라든지, 컴퓨터실 개방, 학교 강당을 개방하여 방과 후 주민에게 제공하도록 한다. 이러한 방안이 처음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발생하겠지만, 주민들에게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따라서 지역사회 인사들의 학교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나, 방과 후 특별활동 수업을 해주는 자원봉사 인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교장은 수요자 원칙에 따라 학생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학생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의 인권을 중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학생들이 학교생활에서 일으킬 수 있는 문제, 즉 학교폭력 문제나, 성폭력 문제 등을 숨기지 말고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다.얼마 전 진주의 한 중학교 교장이 학교 내 폭력사건 발생에 대해 “학교폭력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면 비겁한 학생"이라며 학생들의 입막음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러한 사건 말고도 교장들이 학교문제를 숨기고 그냥 넘어가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현재 교장들은 학교에 학교폭력 문제가 발생했거나, 집단 따돌림이 발생했을 때에 학교 이미지만을 생각한다. 그러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학교 이미지를 실추 시킬 것을 우려하여, 경찰에 조사를 의뢰하지도 않으며, 교사나 학생들의 입단속 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이렇게 학교 내에서 발생한 일은 교장의 책임져야 할 일이며, 그 문제를 발생시킨 피의자 학생을 찾아내어 징계조치를 하는 것이 우선이다. 또한 피해자 학생에 대해서 보호를 해야 할 의무가 교장에게는 있다. 그런데 학교 내에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교장이 이러한 문제를 당장 눈앞에 이미지만 생각하여 무시한다면,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학교 폭력 문제를 내부에서 무마하려는 교장의 태도는 교사에게 까지 영향이 전해지며, 따라서 학교 전체로 전해져, 학생은 어느 곳에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교장, 즉 훌륭한 학교의 지도자가 되려면 바로 눈앞의 이익만 보고 문제점을 덮어버리지 않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선견지명이 필요하다.교사는 교실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존재이다. 수업 내에서 교사의 행동이나 태도는 학생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무엇보다도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수업방식은 교사 중심이고, 교사의 일방적인 수업을 학생이 경청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수업방식에 대해서 루이스 거스너는 “ 고도로 구조화된 조건들이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편안하고 친숙한 것이기는 하지만, 구조화된 여건은 학생들의 호기심과 이해력을 자극하고 신장시키는 데에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구조화된 교육방식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따라서 교사들은 교과서만 수업도구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교육내용과 관련된 놀이나 게임 등을 이용하여 학생들의 참여도를 높여야 할 의무가 있다.다음으로 교사는 학생, 학부모 교장과 수시로 피드백 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우리나라는 예전부터 ‘교원 평가제’에 대한 교원노조의 반발로, 의견만 무성할 뿐 실시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부터 교원평가제가 실시되는데, 처음으로 시도되는 것인 만큼 그로 인한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욱 많을 것이다.이러한 제도가 시행되기 전에 교사는 자신의 수업내용에 대한 결점을 보완하려는 자세가 먼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수업에 대해 학생들이나 학부모, 교장의 평가를 들어봐야 한다. 한 예로, 높은 교육환경으로 유명한 핀란드에서는 이미 학교장이나 부모, 학생들이 평가하는 시스템이 갖춰줘 있다. 인터넷을 통하여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수업내용에 대한 설문지를 보내면, 응답해 주는 방식으로 피드백을 한다. 또한 교장과 교사는 1년에 한 번씩 1대1로 길게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와 같은 토론을 통해서, 1년 동안의 교육활동 중에서 성공적이었던 점과 개선할 수 있었던 점에 대해서 깊이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교사는 처음에는 자신의 전문적인 영역에 대해 간섭을 받는 것 같아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교사라는 직업이 학생들을 교육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하여 수정해주는 역할인 만큼, 교사 또한 자신의 수업과정에 대한 타자의 평가를 겸허히 받아 들여야 한다.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교사와 학생간의 예의범절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제관계가 교사와 학생간의 적정선을 마련해준다는 장점도 있지만, 무언가 모를 벽이 존재하게 한 단점도 있다. 교사는 지식의 전달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가정이 아닌 교실이라는 공간 안에서 학생들의 인성을 책임지는 또 하나의 부모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학생들의 가정환경과 성격이나 학교생활의 어려움을 알고 있어야 그에 따른 적절한 조언도 할 수 있다.이렇게 학생들의 속마음을 제대로 알기위해서는 ‘대화’밖에 그 해결책이 없는데, 현재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상담 제도처럼 40명의 학생을 한 선생님이 며칠에 몰아서 대화하는 것은 형식적인 상담에 불과하다. 그것은 학생기록부에 적기위한 용도로 밖에 쓰이지 않는다. 따라서 ‘21세기 학교’에서 시도했던 ‘학교속의 작은 학교들’이라는 방법을 우리 교육과정에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교사와 학생이 교수-학습 단위를 만들거나, 한 교사가 동일한 아동들을 수년간 담당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