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종의 기원 - [ 지질학 원리 ] – 1830 년 라이엘 / “ 현재는 과거를 알 수 있는 열쇠“ - ‘ 동일과정설 ’ --- 창조와 홍수 심판 격변 사건에 도전 - [ 종의 기원 ] ㅡ 1859 년 찰스 다윈 / 동일과정설에 영향 받아 생물에 적용 --- 진화론의 탄생 / '오랜 세월 ’ 동안 점진적인 변화를 거쳐 지금의 생물로 까지 변화했다는 가설이며 , 이론이다 .진화론의 전제 시간 --- 장구한 시간의 요구 ( 뒷받침 ) / 동일과정설과 진화론은 ‘ 시간 ’ 을 신격화 함 . 진화 역사란 - 인간과 생물이 고생대 , 중생대 , 신생대 같은 지질시대를 격었다 . - 작위적 순환 지지 구조 ( 종의기원 1859, 생명나무 1866, 지질시대표 1872,)진화 메카니즘 - 변이 (variation) --- 한 종류 안에서 유전적인 조합에 의해 얼마든지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 . / 1866 년 완두콩 실험 - 멘델 --- 아무리 다양해도 종류가 변하지는 ( 바뀌지 ) 않는다 . - 돌연변이 --- DNA 정보의 추가 미 발견 , 일반적 기능 악화 . - 생존경쟁 --- 환경 적응력이 놓은 수록 살아남는다 . ( 적자생존 ) - 자연선택 ( 도태 ) --- 생존에 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이 살아남는다 . - 용불용설 --- 환경 적응 획득 형질의 유전 되어 진화 / 유전 안됨 . - 배아형태 --- 발생반복설 1874, Ernst Haeckel ( 위조논문 )진화론 증거들 / 거짓 화석 --- Missing link ( 시조새 , 유인원의 뼈 …) / 진화 중간단계 화석이 없다 . 연대 측정법 (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 ) --- Punctuated Equilibrium Theory ( 단속평형설 ) 어느 순간 빠른 진화로 인해 중간단계 화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 동물계통도 지질학적 시대 구분 --- 지질 시대표 , 지질 계통표 생명의 기원 --- 우연가설왜 , 창조과학 교육이 필요한가 ? 무신론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진화론 사상이 모든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어 현대인들의 사고를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 그 결과 우리의 사고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였을 뿐 아니라 , 각종 사회악 즉 , 성적타락 , 동성연애 , 마약 , 폭력 , 인공유산 , 생명경시 및 물질 만능주의를 초래하게 되었다 . 이러한 인본주의적 진화론은 심지어 신학까지 외곡시켜 성경과 교회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왜 , 창조과학 교육이 필요한가 ? 진화론이 과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라나는 새대들에게 오직 무신론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만 주입시키고 있다 . 진화론은 창조론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공격하고 있다 . 진화론의 반대는 성경이다 . 과학이라는 가면을 쓴 진화론의 거짓과 속임의 비 진리성을 밝히고 창조신앙을 심어주는 창조과학 사역은 오늘날 실로 중요하다 . - 이재만 교수 -Paradigm Uniformitarianism 동일과정설 Evolutionism 진화론 Long time 오랜 세월 Catastrophism 격변설 Creationism 창조론 Event 사건 늙은 지구론 젊은 지구론 “ 현재는 과거를 알 수 있는 열쇠 ” – Charles Lyell 1797-1875 “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 히 11:3) 우연성 필연성이론의 배경 지질시대표 (1872, Lyell) 후삼기 신생대 ( 제 3 기 ) 백악기 중생대 쥬라기 ( 제 2 층 ) 트라이아스기 페름기 고생대 석탄기 ( 원시층 ) 데본기 실루리아기 캄브리아기 “ 종의 기원 ” (1859, Darwin) 생명나무 (1866, Haeckel) 무신론 생명의 기원 - 자연 발생 생명의 종류 - 수직적 진화 자연 철학 역사 과학 계몽주의 제 4 기 신생대 제 3 기 백악기 중생대 쥬라기 ( 제 2 기 ) 트라이아스기 페름기 고생대 석탄기 데본기 실루리아기 오르도비스 기 캄브리아기 원생대 선캄브리아기 시생대 지질계통표 (1900 중엽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신앙이다 . 진화론은 믿음의 문제요 , 진실과 거짓의 선택 문제이다 .{nameOfApplication=Show}
묵상 - 최영선교사“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말씀을 깨달으려고 하고, 잘 깨달아서 나누어도 나 자신에게 비추어지지 않으면 소망이 없다.말씀을 이용하려고 하고, 무엇을 나누어야 할까를 포기할 수 없다.묵상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사역에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여호와로 기뻐하는 것이 힘이요, 그것이면 충분한 것이다.묵상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다.묵상이 나의 의가 되지 않도록, 말씀을 사모하는 심령을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들려져야 할 말씀이 심령에 들려지는 시간이 묵상 시간이다.그러기에 묵상은 기쁜 주제이다.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순종하면 기쁨이 있다.묵상에 압박이 있으면 태도가 다르다. 나누어야 하는 부담이 있다. 깨달음과 나눔에 초점이 있으면 묵상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은 간과된다.성경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이요, 기적인가?아직도 미전도 종족이 많다. 성경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말씀이 깨달아지고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 간과된다면 어떻게 될까?묵상 나누는 것이 기쁨이요 감사인 반면 묵상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가 전달되면 누구에게나 동일할 수 없다. 각자에게 천차만별이다.묵상은 아웃리치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다. 출발점과 목적지가 있다. 나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께 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이르는 것이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께 듣는 시간이다. 나에게 초점이 가 있다면 아니다.예수 그리스도로 결론나지 않는 묵상은 또 다른 우상숭배이다.(골 3:5) 묵상이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나지 않게 나에게 집중되고 결론난다면 우상숭배인 것이다. 정직하게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끝난다. 정직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필요하지만 믿음은 아니다. 정직함을 통해서 나를 깨뜨렸다면 그런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원형의 생명으로 선포되는 것까지 선포해야 한다. 나는 안 죽은 것 같아요. 내가 안 되어진다고 해서 복음이의 교제” 이 일에 실패하면 모든 일에 실패한 것이고, 모든 일에 실패해도 묵상에 성공하면 성공한 것이다.보이는 내가 내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모습이 있다. 이것이 실재하는 모습이 진짜 모습이다.하나님이 보시는 경건의 척도가 있다. 이것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내가 넘어지고 약한 곳에 내가 있다. 일곱교회에 책망하시는 것 또한 동일하다. 죄, 겸손한 사람은 공동체에서 아무거나 시킬 수 있는 부담스럽지 않는 사람이다. 겸손은 실재한다. 복음이 실제되지 있는지 알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요함이 있다. 이러한 경건이 묵상으로부터 나온다.수 1:8 묵상 - 주야로 전쟁 앞에서 하나님이면 충분하냐? 승패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전부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고 있다. 우리는 지탱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거기에 순종했느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순종하려고 섰느냐? 각자에게 말씀 앞에 서는 것만 남는다. 묵상은 성경공부 시간이 아니다. 하루 묵상을 빼먹으면 다음날 묵상하면 들리지 않는다. 연결되어 있어서 빼먹지 말아야 한다. 정탐꾼을 보낸 이유는 믿는 사람 라합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심판은 구원에 목적이 있다. 므낫세지파는 왜 나누어졌을까? 믿음으로 싸우는 무리는 적은 무리였다.수 19:47 단 지파 - 더욱 경계가 확장됨수 23:6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말라 말씀 떠나면 죽는다.수 23:11 조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수 23:15 지금 하나님을 떠나면 더 멸절당한다.수 24:14~15 우상숭배가 시작된 그 때에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느헤미야, 엘리아십 어떠한 사역으로 우리를 증명할 수 없다.묵상과 기도의 자리가 하나님과 기쁨의 교제의 자리이다.묵상이 전부다. 기도가 불이라면 묵상은 석탄이다. 우리의 연약함이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한다.말씀이 없는 기도는 오래 타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남지 않는다.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도 기도할 수 같다.이와 눈 - 죽기까지 쉬지 않는다.코 - 감각해 낸다.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욱 놀랍다.시간 = 날로 제한해 놓으셨다. 창조 때 만듦. 어제는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다.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다. 오늘 하루만 살아라.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것처럼 살아라.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다. 어제도 잊어버려라. 한 평생에 일어날 일이 오늘 하루에도 그대로 이루어진다.말씀 앞에 서면 혼돈이 질서가 되고, 어둠이 빛이 된다. 진리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나를 십자가에 드리지 않으면 자연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묵상이 거룩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육체에 끌려다닌다. 하루가 비밀이고 신비다. 전 인생이 하루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다(과거 완료).구원을 받으라는 것은 현재완료이다. 구원은 완성되었지만 날마다 감격을 새롭게 한다. 그래야 겸손해진다.롬 7장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주님의 말씀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사망의 몸을 입고 있다.요 8장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존재가 거듭나지 않으면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답을 통해 모두를 살려내셨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죄된 생명으로부터 떠나라. 주님이 말씀하여 주시지 않으면 나는 죽은 목숨이다.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같이 죽은 목숨이다. 내 삶의 일부분일 수 없다. 목마름과 가난한 맘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가 되게 하시고 말씀 한 절이면 충분한 자, 여인처럼 무슨 말씀을 하실지 귀를 기울이게 하소서.출 16:21, 30:7수 1:8, 느 8:18시 68:19 73:14사 33:2, 애 2:23, 겔 46:13눅 9:23, 11:3고전 15:31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 고백한다. 나도 매일 나는 죽고 말씀 앞에 사는 은혜가 필요하다. 아침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시기 원하신다. 선오늘 말씀하시는 주님의 응답이 있어야 한다.주님의 공로 + 주님의 말씀 = 묵상을 놓치면 만족함이 없는 하루가 된다.2. 묵상의 위치.묵상이 우리의 마음에서 되어 진다. 머리가 아니다. 깨달음과 동의가 아니다. 마음으로까지 새롭게 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시 51:10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엡 1:17~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마음의 사형선고 - 사람이 마음대로 행동하면 죄악대로 행한다.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지배하지 않으면 갈망하게 되는데 결코 무엇으로 만족할 수 없다.죄의 근원이 마음이다.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정욕=sinful desire 죄된(존재) 소망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몸의 사욕=it's evil 소속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지 않으면 죄된 존재로 살아감.롬 7:7~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온갖 탐심 = covetous (턱없이 탐내는)현상엡 4:22~2 서는 것으로 인식하라. 그리하면 엄청나게 부요롭게 된다.요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존재가 변화되지 않으면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복음 이후에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질문의 답이다.롬 11:33~3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골 1:15~16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고전 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요 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
기독교적 양육 -호레이스 부쉬넬(Horace Bushnell)- -차례- 제 1부 교리(Doctrine) Ⅰ. 무엇이 기독교적 양육인가 (1부) Ⅱ. 무엇이 기독교적 양육인가 (2부) Ⅲ. 타조의 양육 Ⅳ. 가정의 유기적 일치 Ⅴ. 유아 세례와 그 발전 Ⅵ. 유아 세례의 사도적 권위 Ⅶ. 교회 구성원으로서의 어린이 Ⅷ. 그리스도의 증식 제 2부 양육의 양식(Mode) Ⅰ. 양육의 시작 시기와 장소 Ⅱ. 부모의 자격 Ⅲ. 은혜의 수단이 되는 신체적 양육 Ⅳ. 경건을 저해하는 자녀 대우법 Ⅴ. 가정의 다스림(지배) Ⅵ. 여가와 휴일 그리고 주일 Ⅶ. 자녀를 위한 기독교적 가르침 Ⅷ. 가정 기도 역자 후기 들어가면서 세월이 화살같이 지난다는 말을 실감하며 2008년도 어김없이 가을을 맞이한다. 흔히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며 무엇인지 모를 넉넉함을 말하지만 그만큼 부족하고 비어있는 느낌을 떨 처내기가 쉽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무엇이 그리도 많이 필요하고 무엇으로 그렇게 고민할까? 생각해 보면 모든 질문에 의문에 답을 줄 수는 없겠지만 ‘사람’이 아닌가 싶다. 사람에게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 사람은 곧 또 다른 나의 만남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만남과 관계 이런 선문답 같은 단어를 들고 이토록 아름다운 계절에 조금은 서먹하고 낮선 책 한권을 통해 한 사람을 만나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기존에 갖는 사고의 틀을 넘어 생각을 묻고 답을 구하려 한다. 먼저 오늘 만날 호레이스 부쉬넬을 알아보면, 호레이스 부쉬넬(Horace Bushnell, 1802-1876)은 미국의 기독교 종교교육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저서 『기독교적 양육』은 그의 명성을 확립해 주었다. 19세기 초 그 당시 부쉬넬의 관점은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현대 종교교육 발전의 기초를 놓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쉬넬은 17-18세기의 칼뱅주의와 20세기 새로운 신학 운동을 중재하는 신학자 이었다. 또한 현대 기독교 신앙이 맞닥뜨리는 중요 문제들을 제기하는 능력으로갖고 있는 기존 사고를 재정립하는 기회로써의 『기독교적 양육』과의 만남은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기대와 경각의 마음을 앉고 본론으로는 『기독교적 양육』본서의 제 2부 양육의 양식(Mode)을 정리 하려 한다. 제 2부 양육의 양식(Mode) Ⅰ. 양육의 시작 시기와 장소 탄생이전의 양육이 존재하며 그 양육은 유년기의 종교적 준비와 귀납적 자비에 관련이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부모가 될 남성과 여성들이 종교적 경험에 의해 오직 영혼에만 감화를 받고 신체에는 감화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다. 정신이 그 상태와 변화에 따라 신체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항상 신체를 통해 작동하기 때문에 신체가 성령의 전이 되면 성경이 가르친 대로 신체는 영혼과 함께 그 기질과 심정에서 치유의 과정을 거치게 되며, 영혼이 성하듯이 신체도 하늘의 질서 안에서 성하게 될 것이다. 경건한 양육의 참된 시작은 여기에 있다. 어린이는 사랑과 평화, 질서, 절제, 거룩한 용기와 유산이 어린이의 것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경박하고 세속적이며 야욕적인 부모들이 태아에서부터 어린이에게 대한 여러 가지 기대로 인해 어린이가 도덕적으로 쇠약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기도에 의해서 근면한 부모의 일관성 있고 선한 목적과 위대한 신앙의 충동에 의해 부모의 소망의 지혜로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종교적으로 순결한 부모의 사랑이 갖는 절제에 의해서 자녀의 친화력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탄생 이전의 양육에 의해 어린이는 그가 이 세상에 와서 수행할 숭고한 실험에서 안전과 성공에 관한 고귀한 유익의 길로 출발할 것이다. 기독교적 양육은 신체의 양육이 시작될 때 시작되어야 한다. 처음 시작하는 것이 유아의 양육이며 그 다음이 소아의 양육이며, 그리고 청소년의 양육이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양육이다. 어린 시절 각인되고 주입된 것이 앞으로의 성품 발전에 있어서 심오한 중요성이 있다는 사실은 그 각인과 형성의 시기의 어린이들에게 행해지거나 행해질 수 있는 일들에 초월적 중요성이이가 그 기조를 유지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혜로운 신체적 양육에서 규칙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규칙적 식사는 질서의식을 생기게 하며, 이러한 의식은 자기 통제의 습관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아이들에게 식사예절에 대한 훈련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이 식탁에서 감사하고 축복한 것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지속적으로 인정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그 가정에 내려진 감사의 의무가 된다는 이 간단한 형식은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실천적 자비에 대한 주제, 정서, 계획을 식탁의 축복과 즐거움에 연결시킴으로써 어린이들에게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신체의 건강함 위에 서게 하며 신체의 열정과 기질을 종속시키며 강건하고 당당한 건강 상태를 준비해 준다. 진리에 대한 명료한 지성과 고귀한 감성을 주는 그러한 신체적 양육을 제공하는데 부모의 책임이 있다 하겠다. 이 섭생의 양육은 선한 친화력과 선한 가능성 안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며 인간을 만드는 선한 자료를 형성하거나 아니면 그릇된 재료를 형성하는 것이다. 신체 양육과 관리에 대한 견해를 더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언급 되어야 할 것은 개인 청결과 의복에 관한 것이다. 자녀를 그리스도인으로 기른다면 누구나 시작부터 하나님의 모드와 치수에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의복을 입혀야 한다. 신체에 대한 모든 훈련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 됨에 있다. Ⅳ. 경건을 저해하는 자녀 대우법 어린이의 경건에 저해하는 방법과 그 치명적인 실수를 피하는 주의 점을 살펴보자.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자라는 기후를 맑은 날이 아닌 폭풍전야 혹은 폭풍후의 기후로 만들고 있음이 사실이다. 심술과 성화의 환경을 만들며 유아기부터 성장기 까지 자녀들과 일종의 싸움을 유지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양육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녀의 선하고 고귀한 본성이 지쳐버리며 결국 위축상태로 빠진다. 무관심에 달콤하고 쓰며 신 것을 만드시고, 하나님은 영적인 모든 것을 나타내기 위해 본성적인 모든 것을 창조 하셨다. 영혼의 성숙된 것으로서는 우리 뒤에 있는 본성의 낙원이며 선의 달성은 우리 앞에 있는 은혜의 낙원이다. 본성의 낙원에 대한 기억은 우리에게 은혜의 낙원을 그려주고 그 낙원을 추구 하도록 한다. 놀이에 대한 개념, 놀이가 갖는 중요성을 생각할 때, 놀이는 종교의 전조이므로 종교는 놀이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놀이의 자유로운 행동 행복한 장면 기쁨의 목소리를 사랑해야 하며 불필요하고 엄격한 통제로 인해 놀이의 기쁨을 방해하거나 줄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부모의 첫째 의무는 자녀의 놀이에 대한 관대한 공감을 보이는 것이다. 같은 원리에서 자녀들의 생일이나 축하할일을 중요시 하는 것도 뛰어난 효과가 있다. 기쁨의 날을 관대히 여기는 것은 자녀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우리를 제약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여 선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것임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여기서 도덕적 질서 훈련의 과정이 시작이 되며 놀이에 대한 제약이나 질서를 스스로 섬기게 되는 습관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주일을 바르게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주일은 어린이의 영혼을 위한 날이며 사용이 그릇되거나 결함이 있을 때에는 다른 6일을 지혜롭고 선하게 사용한다고 해도 그것을 보상할 수 없다. 주일을 지키는 문제에서도 지나친 엄격함이나 방종 보다는 영적 훈련의 기초 단계로 생각하고 자녀에게 맞는 수준을 설정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주일을 준수하는데 있어서는 하나의 제약으로 느껴야 하고 주일에 하나님의 온화함을 느끼고 주일이 즐거운 것임을 알도록 제약의 엄격함을 완화 시키고 주일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도록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한다. Ⅶ. 자녀를 위한 기독교적 가르침 자녀를 위한 기독교적 가르침을 살펴보면, 첫째, 의무는 아니되 어머니의 가르침이 중요하다. 둘째, 성경의 가르침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 셋째, 참되고 유일한 가르침을 살아있는 예로 것이다. 모든 것을 감싸 앉으며 모든 것을 고취 시키는 참된 가정의 종교훈련은 가정을 작은 교회로 만든다. 고귀한 생명으로 태어난 자녀들이 은혜로운 훈련으로 하나님에 대한 실존의 확장으로 인도된다. 자녀들이 장래에 의무와 과실과 슬픔의 장면을 지나게 될 때 그들은 은혜의 보급을 여기서 받고 하나님이 주신 확신의 방패로 삶의 승리를 얻을 때 까지 모든 짐을 서로 지며 모든 일을 훌륭히 유지할 것임을 알 것이다. 그리스도 인 부모로서 참된 가정이 종교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가정의 종교가 가정의 모든 방법들과 모든 관심들을 포함하고 조화 시키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는 조건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우리의 일들이 조화를 이루게 하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만을 성취하여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한다. 마무리 하며 부쉬넬은 대각성 운동이 한창이던 당시에 기독교적 양육을 주장하며 어린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물론 부쉬넬은 교육학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독교적 양육은 기독교교육학자의 관철보다 앞선 것이라 평가된다. 그의 사상과 철학은 기독교적 바탕에서 성경을 떠나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찾아볼 수 있게 하고, 그의 신학은 신의 내재성과 초월성 사이에 위치한 신학이라 할 수 있겠다. 당신 신앙의 중심에 ‘회심’이라는 거대한 기둥이 버티고 있었음에도 아이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던 시기에 부쉬넬은 이것에 반하여 기독교적 가정에서 기독교적 문화와 분위기 안에서 양육되어지고 성장한 어린이들도 회심이라는 거대한 벽을 뛰어넘어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한 것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반격이었음을 짐작해 본다. 부쉬넬은 본서의 전반에 걸쳐 가정을 통한 양육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가정을 중요시 여긴 것은 가정을 단순한 생리적 공동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공동체이며 성소로 이해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부모는 하나님과 아이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부모의 모습에서 하나님을다.
가르침의 본질 - 권위 있는 가르침을 위한 탐구(‘장신 논단’ 2002년 18집: 701p-726p)김도일 / 조교수. 기독교교육학여는 말. 왜 가르침(teaching)에 대하여 논의하는가?“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3:1)고 야고보는 따갑게 말하였다. 아마도 선생들은 가르치는 직을 수행하기 위해 가르침의 말은 많이 하지만 행동은 적게 하기 때문에 그런 경고를 했을 것이다. 한 시인의 조심스런 싯구가 우리의 두려운 속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였다.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 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중략)-“마음위한 기도” 중에서-가르침에 임하는 사람들은 대개 무심코 말을 던지기보다는 어떤 주제에 대하여 의도를 갖고 말을 한다. 그러기에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또한 많은 가르침보다는 권위 있는 가르침 혹은 삶을 변화시키는 가르침을 수행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자주 가르치고 많이 가르치지만 정작 가르침의 본질적 이해는 충분히 하고 있을까? 이 글은 이런 두려움과 바람 가운데에서 쓰여 졌다.성경 기자는 가르치심과 관련된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표현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 7:28-29)예수님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다는 감동을 자아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어떤 가르침이 권위 있는 가르침일까? 이런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은 모든 교사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Ⅰ. 현대인의 학습을 방해하는 도전들1. 다원화 시대: 불신풍조예일대학 법학 교수인 스티븐 카터가 진단한대로 현대인들은 불신의 문화에 빠져 있다. 현대인들은 모든 사회현상과 종교현상을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하며 절s)과 과할동성(hyperactivity)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현대의 삶은 한편으로 너무 비인간적이며, 다른 한편 지나친 활동으로 점철되어 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과 교류는 하면서도 진정한 교제는 없다. 길고도 고된 작업에 매달려야만 생존할 수 있고, 일과 함께 살다 보니 현대인들은 대개가 일중독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피교육자가 우울한 감정의 늪에 빠져 있을 때 진정한 학습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하여 보르그만은 현대인들에게 삶을 의미 있게 즐기며, 바쁜 일상생활 가운데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것을 제안한다.3. 왜곡된 개인주의: 찢겨진 자아프린스턴 대학 사회학교수인 로버트 벨라는 현대인들의 학습을 방해하는 또 다른 도전을 찢겨진 자아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자아의 찢겨짐은 왜곡된 개인주의의 만연으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은 한 개인 자신의 사적인 영역에만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하는 공적인 영역을 무시하는 경향이 농후해 진다. 그렇게 될 때 그 개인주의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오늘날 현대인들은 개인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주장한 나머지 사회 속에서 다른 이들과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삶에 익숙지 않게 되었다. 현대인들은 혼자서 제대로 설 수 없는 찢겨진 자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영향이 크다. 이 두 매체는 개인들을 연결시켜 주기보다는 분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결국 현대는 분리의 문화로 치닫게 되었고, 그 안에서 현대인들은 찢겨진 자아를 가진 병든 자신을 발견하기에 이른 것이다.4. 평신도 자유주의: 무관심기독교교육학자인 엘리스 넬슨에 의하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활동적인 장로교인들 중 68%나 되는 이들이 더 이상 인습적인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는 통계를 제시하였다. 예컨대 그들은 기본적인 성경지식도 없이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이다. 개신교에서 설교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은 곧 신앙생활의 무기력화로 연결될 수 있다. 무지는 무관심으로 이어지게 되고 무‘가르치다’라는 말은 ‘배우다’라는 말의 상대어로서, 가르치다 라는 말은 본래 ‘가르다’, ‘갈다’라는 말과 ‘치다’라는 말의 합성어라고 한다. ‘갈다’라는 말에는 녹슨 것을 갈아서 빛을 내고, 무딘 것을 갈아서 날선 것이 되게 하고, 묵힌 땅을 갈아서 씨 뿌릴 준비를 하고, 헌 것을 치워 새 것으로 바꾸어 놓는 일들을 포함한다. 또한 ‘치다’라는 말은 강한 힘을 나타낸다. 짐승을 기르는 일, 즉 ‘돼지를 치다’와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치다’라는 말은 영양을 주고 기르는 수고를 통해 많은 것을 획득해 내는 일들처럼 생산적인 활동을 말하며 장성, 성장, 북돋움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이처럼 가르침은 ①피교육자로부터 잠재력을 계발할 수 있음을 가정함으로서 시작되는 것이고, ②교육자는 가르침을 통하여 피교육자를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지식과 인격, 그리고 고도로 훈련된 기술을 갖고 있어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③가르침이란 교육자가 밖에서 피교육자 안으로 주는 일이라기보다는 피교육자 속에 잠재되어 있는 발전하려는 힘을 도와 이끌어 내고 이를 현실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살게 하는 데에 있다.2. 정의(definition)시라큐스 대학의 철학교수인 토마스 F. 그린은 가르침은 ‘행위를 가꾸는 것’과 ‘지식을 전달하는 것과 신념을 가꾸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가르침은 피교육자의 행위를 바꾸어 나갈 목적으로 조건화와 훈련을 포함하며, 또한 신념과 지식을 가꾸는 목적으로서 행하는 교수와 주입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린이 정의하는 “가르침이란 가르치는 주제 혹은 내용을 다루는 데 있어서 학생들이 희망하는 결과를 위한 주제의 유용성과 타당성, 그리고 진실성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도적인 행위가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가리킨다.” 가르침의 초점은 학습자로 하여금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 스스로가 주제를 비판적으로 숙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교육학자 창의적이며 비판적인 숙고를 함으로써 자신의 교사와 함께 배우는 교육주제의 유용성과 타당성과 진실성을 분석 판단케 해주는 것이라 하겠다.Ⅲ. 현대의 도전에 응전하는 네 가지 접근의 가르침1. 응전 하나: 다원화시대와 가르침앤드오버-뉴튼신학교의 종교교육학 교수인 로버터 W. 파즈미뇨는 그의 저서『권위 있는 가르침』에서 다원화시대에 어떻게 가르침에 임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파즈미뇨가 역설하는 다원화시대에 교사가 품어야 할 자세에서 학습자의 정체성 강조는 다원화시대에 중요하다. 그러나 정체성에는 배타성을 전제하며 또한 개방성이 중요하다. 그러나 개방성의 필요는 포용성을 전제로 한다.가르침에서 배타성과 포용성 모두가 필요하다는 것은 예수님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이 자신의 병 고치는 일을 반대하는 바리새인과의 만남에서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기독교 복음을 가르치는 사역은 정체성을 확신시키는 배타성의 요소와 , 개방성을 확신시키는 포용성의 두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다원화시대에 교사가 학습자를 위해 가르침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체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배타성과 포용성 사이의 적당한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학습자를 인도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 하면 유일성을 강조하면서도 획일성을 강요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통일성을 추구하는 가르침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2.응전 둘: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와 가르침교육학자인 파울로 프레이리는 그의 저서『억눌린 자를 위한 교육』에서 가르침의 진정한 목표는 인간화이며 인간화를 위해서는 의식화의 과정을 거쳐야 함을 역설하였다.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다룬 그것은 다원화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약점이 정체성 상실이었다면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체성의 결여이다.프레이리에 있어서 교육, 특히 가르침은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다. 프레 줄 수 있는 가르침이다.3. 응전 셋: 왜곡된 개인주의와 가르침한 사람 한 사람을 연결시켜주어 왜곡된 개인주의를 벗어나 진정으로 건강한 개인들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며, 부쉬넬이 일찍이 말한 것처럼 “모두가 함께 흘러가는” 것을 체험케 해 주는 매개체는 이야기이다. 무어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이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전달되는 과정’으로 이해하여 전통화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기도 하였다.가르침은 가장 의도적이고 계획적이며 목표 지향적이면서 동시에 그런 의도성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함을 암시해 준다. 때로 우리가 경험하는 바와 같이 교육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교사 자신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습자와 가르침의 주제 사이에서 학습을 방해하는 방해꾼이 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교사는 학습자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마음을 열게 하고 학습자 자신이 진리를 찾아 갈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하는 가르침은 현대의 병적인 현상인 왜곡된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지름길일 것이다.4. 응전 넷: 평신도 자유주의와 가르침평신도 자유주의는 교회에 아직 출석하는 신도들로 하여금 신앙공동체의 역할을 해야 하는 교회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만들고 결국 교회와 그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관계가 되게 만든다. 그들은 서서히 교회를 떠날 채비를 하게 한다. 평신도 자유주의는 신앙공동체 내에서의 상호교류와 친교, 그리고 집중적인 가르침을 통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는 성인교인들을 체계적으로 양육하는 가르침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평신도 자유주의를 조장하는 신앙문맹 문제를 풀 수 있다.Ⅳ. 권위 있는 가르침의 본질1. 권위와 가르침파즈미뇨에 의하면 하나님은 생명과 믿음의 저자이시며 원천적인 권위자이시다. 성경은 기독교 신앙과 생명에 대한 모든 권위는 원천적인 권위자이자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본다. 바울도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했다.(롬 13:1)교육적 권위는 강압이 없이도 나타다.
다문화가정을 품고신4 200710108 김 병 철1950년대 이후 주한미군으로부터 시작된 ‘1세대 혼혈인’ 탄생 이후 최근까지 1세대 혼혈인은 감소하는 대신 동남아인과 국제결혼을 통해 태어난 2세대, 3세대 혼혈인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최근 한국인과 동남아시아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코시안(Kosian=Korea+Asian)’이라고 일컫는 경우도 있으나, 이러한 단어도 부적절한 표현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혼혈인 단체인 ‘국제가족 한국총연합회’는 ‘국제가족’ 이라는 표현을 제안하고 있다. 국제결혼이 증가함에 따라 함께 혼혈 아이들이 우리 사회 한 구성원이 되고 있지만 몇 년 전까지 이들을 지칭하는 공식적인 명칭조차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가 교육인적자원부에 의해 ‘다문화가정’으로 통일하여 부르게 된 것이다. 다문화가정을 정의해 보면 국제결혼이나 입양에 의해서 가족 구성원 간에 여러 문화가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즉, 우리와 다른 민족 또는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국제결혼 가정, 외국인 근로자 가정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다.오는 2020년이면 우리나라 인구의 5%에 해당하는 외국인이 국내에 상거주할 것으로 예상된다. 급 증가하는 우리나라의 다문화가정 1세대나 2세대들이 학교나 사회에 적응하는데 겪는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를 더 이상 방관한다면 결국 사회전반에 문제를 불러올 것이다. 다문화가정이 증가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으로는 혼인적령기의 남성과 여성 성비가 비정상적인 현실에 있다. 성비 불균형의 뿌리는 과거 우리나라가 가졌던 남아선호사상 과 더불어 독신여성이 급증하고 있고, 여성의 사회활동이 보편화 되면서 경제적 독립이 원인으로 들어났다. 물론 현실이 앉고 있는 사회적 요인이 국제결혼 증가를 낳게 된 큰 원인이지만, 무엇보다도 국제결혼에 대한 우리 사회가 가진 시대적 요구와 인식변화가 있었기에 오늘날 이처럼 많은 다문화가정이 뿌리를 내리고,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다문화가정이 주는 긍정적 측면을 뒤로 하고라도 이들이 격고 있는 아픔과 사회적 문제점들을 우리사회가 적극적으로 발 벋고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다문화가정만이 겪는 고통이아니라 머지않아 우리사회전반으로 이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다문화가정 형성과정에서 들어난 문제점들로는 결혼 이주자들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겪는 언어와 문화적 갈등이다. 언어나 문화적 갈등에서 오는 이질감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소외감으로 굳어진다. 다문화라는 전통이 없는 우리 사회에서 국제결혼 여성이민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커다란 문제이다. 이 외에도 가정폭력문제, 다문화가정 자녀의 정체성문제, 교육문제, 교육과정에서 또래 자녀들 간 따돌림문제이다. 그리고 열악한 가정환경으로 이어지는 빈곤세습 문제와 사회전반에서 죄어오는 문화적 고립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2005년 이후 정부는 각 부처별로 유형별 실태조사를 통해 다문화가정을 위한 구체적인 종합대책과 문제해결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문화가정 문제는 크게 해소의 실마리를 얻지 못하고 계속되는 과제를 앉고 있다. 정부가 정책추진으로 법적인 구제책들을 내 놓았지만 실질적으로 다문화가정이 구제되거나 해택을 받기에는 여전히 그 문턱이 높고 장애요소들이 많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련 하여도 그 제도에 접근이 쉽지 않고 그런 제도가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는 가정이 대부분이니 명분만 있고 실제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