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은 몸나는 지금 쓰레기장에 시체로 누워 있다. 아니, 벌레인 채로 죽었으므로 사체라고 해야 올바른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숨을 쉰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내가 마지막 숨을 내쉴 때,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방문에는 내가 밖으로 나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자물쇠까지 걸려있었다. 아침이 되어 가정부가 나를 발견했을 때 그 여자는 내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빗자루로 나를 툭툭 건드리며 밀어내기까지 했다. 옆에 계시던, 나를 낳으신 어머니는 그 행위를 말리지 않으셨다. 심지어 가정부가 내 시신을 자루에 담아 지금 내가 누워있는 이곳 쓰레기장에 던져 버릴 때조차 나를 보러오지 않으셨다. 죽을 당시 납작하게 마른 몸과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박혀 썩어들어 가는 등을 가지고 있던 나는 버려지면서 다리가 떨어지고 몸의 체액이 터져 나와 더욱 흉물스럽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지금 내가 당신을 붙잡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껍데기만 남은 몸에 썩어버린 등딱지 때문도 아니고 몸을 지탱하기엔 너무나도 가느다랗던 다리가 이제는 더 이상 몸에 붙어있지 않기 때문도 아니며 배가 터진 채 체액이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내가 당신을 찾은 이유는 나에게 일어난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나는 원래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레고르라는 이름의 샐러리맨이었고 잠자씨 부부와 그레테라는 여자아이가 나의 가족이었다. 당시엔 매일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과도한 업무, 아버지의 부채로 인한 부담감과 가족부양의 의무 등으로 인해 차라리 악마가 모든 것을 가져갔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었다. 그 때문일까, (당신은 아무리 힘들더라도 악마의 이름을 떠올리는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나는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었다. 바라던 데로 나는 나를 누르던 모든 것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큰 구속을 받게 되었다. 원하는 데로 돌아누울 수도 없게 되어버린 나를 본 가족들은 내가 방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금하였다. 나는 그저 몇 시간이고 가죽 소파를 긁거나 창문 난간에 기대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던 날들을 추억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사실, 나는 가족들에게 이런 대우를 받을만한 일을 저지른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나는 매일매일 가족에 대한 걱정과 사랑으로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일했다. 내가 열성으로 일하여 벌은 돈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면 가족들은 놀라며 기뻐하였다. 나는 점점 더 많은 돈을 벌었고 덕분에 가족들은 걱정 없이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나는 행복했다. 가족들이 내가 벌어오는 돈에 익숙해져 더 이상 그에 대한 특별한 온정을 느끼지 못하게 될 때에도 나는 가족들을 사랑했고 행복했다.지금 나의 말을 듣는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묻고 싶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지금 이런 모습으로 버려져 있는 거요? 아무리 벌레로 변했다지만 자신들을 사랑하고 부양하던 당신을 이렇게 버린다는 게 말이나 된다는 거요? 나는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없소!” 그러나 당신은 나의 말을 믿어야 한다. 나는 오히려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가족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나? 당신을 향한 가족들의 애정이 정말 당신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벌어다 주는 생활비를 향한 것인가? 가정부의 말대로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버려진 나는 그 대답을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나는, 어쩌면 당신도, 때가되면 생활비를 벌어다주는 기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더 이상 내가 돈을 벌어오지 못하자 가족들은 나를 버려야 할 물건이나, 더러운 짐짝 취급을 하였고 나의 죽음에 슬픔은커녕 해방감을 느끼며 교외로 나가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기까지 했다!그러나 나는 너무나도 당연히 그런 물건이 아니다. 맹세하건데, 벌레로 변했을 때조차 한순간도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적이 없다. 비록 거동이 불편하고 원하는 말을 가족들에게 전달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가족들을 끊임없이 사랑했고 가족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깊이 매료되기도 했다. 그리고 끝까지 여동생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오히려 그 속이 벌레만도 못하게 변한 것은 인간성을 상실한 나의 가족들이다. 내가 그들을 안락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준 만큼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삶은 황폐해져 있었다. 그리고 분통하게도 나는 그저 그들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모습이었을 때 항상 성실하게 일하던 나를 당연하게 바라보던 가족들을 보며 깨달았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아무리 후회하고 화를 낸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이미 이곳에 누워 있고 이제 나에게 남은 일이라고는 이곳에 사는 벌레들이 내 몸을 먹어치우기만을 기다리는 일 뿐이다.당신이 나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기를 바란다. 과연 무엇이 나를 이 지경에 처하게 하고 어느 날인가 당신도 이렇게 만들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그냥 이끌리는 데로 살면 된다는 식으로 간단히 넘겨버리지 마라. 지금의 나의 모습은 가까운 미래의 당신의 모습일 수 있다. 지금 당신이 선한 마음으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현재 당신이 속해있는 사회, 회사, 가정 안에는 이미 물질만을 삶의 목적으로 하는 현상이 팽배해 있다. 따라서 당신이 성실하게 맺고 있는 대부분의 관계들은 사회, 경제적 활동에 의한 물질적 관계일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당신은 그 관계 속에서 당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이런 삶은 사회,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에 이끌려 당신 자신의 본연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별다른 거부감 없이 소비하고 생산하는데 일생을 보낸다면 언젠간 당신은 벌레로 변할 것이고 더욱 억압받을 것이며 철저히 소외된 채 끝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 - 꿈과 현실은 어디까지 함께 할 수 있을까내가 이 영화를 접한 건 10년 전 고3때였다. 고3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비디오를 본다며 어머니께 한참이나 꾸중을 들은 후 거실에 혼자 남아 VCR에 테입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두 시간 내내 빨려 들어가듯이 영화에 몰입했고 결국 마지막엔 엉엉 울어버렸다. 내가 그렇게 운 것은 아마 고3이라는 상황이 나를 영화 속 닐, 토드 등 학생들의 삶에 완전히 몰입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삶은 당시에 내가 보내고 있었던 고3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규율과 규칙, 복종, 훈육이 강요되는 엄격한 시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10년 후 고3을 벗어난 뒤 보다 현실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이 영화는 나에게 다른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이 영화에서 학교와 학부모들은 영화의 한 축을 이루는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 그들은 주입식 교육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며 학생들을 이미 짜놓은 틀에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다른 축은 키팅 선생님이다. 극단적인 낭만주의자인 키팅 선생님은 첫 수업시간부터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이며 학생들에게 꿈과 낭만을 심어주기위해 수업 내내 노력하는 그 모습은 10년 전에 볼 때는 매우 감동적이었다.그러나 이 영화가 실제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는 현실 감각이 부족하고 갈등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는 등 교육자로서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보임으로 인해 두 축의 사이에 서 있는 학생들을 가장 큰 피해자로 만들게 된다. 결국 학교, 키팅 선생님, 학생들 간의 팽팽한 갈등은 닐의 자살로까지 이어진다. 과연 이들의 행동이 이렇게 까지 극으로 치달을 필요가 있었을까? 학교는 어째서 그렇게나 완강해야만 했고 키팅 선생님은 그저 저질러 놓고 바라만 할 뿐이며 학생들은 그다지도 약해야만 했을까?이 같은 극단적인 사건의 전개는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용납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현실에서라면 학교와 학부모들은 대학진학이라는 교육목표를 세웠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공부하는 기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공부를 하는 중에도 학생들의 열정을 발산할 수 있는 공식적인 장을 마련해 주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또한 키팅 선생님 - 영화에서 가장 문제적 인물이다. 만약 이런 사람이 실제 있다면 그는 절대로 선생님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은 먼저 그가 어떤 학교의 선생님인지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펠튼 고등학교는 열린교육 시범학교도 아니고 숲속의 자연학교도 아니다. 본인의 교육관이 그 학교의 것과 대치되는 상황에서 근본적인 해결책 없이 일방적으로 학생들에게 자신의 교육관을 주입시키는 행위는 위험하다. 결국 스스로도 교육의 펼칠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닐에게도 현실과 이상의 부조화 속에서 자신을 포기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만약 현실속의 진정한 교육자라면 꿈을 가르치기 전에 꿈과 현실을 적절하게 다룰 줄 아는 능력을 먼저 가르쳤을 것이다. 또한 키팅 선생님은 직면한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판단하지도 못했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학생의 떨리는 음성만을 믿고 그를 지지한다는 행동을 보였을 뿐이다. 진정 학생을 생각한다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노력과 함께 부모님과의 상담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취했어야 했다.
어린왕자.. 관계의 중요성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그 속에 변치 않는 진리가 담겨있어 세월을 초월한 감동을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어린왕자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 칭할 만하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짧은 글을 읽을 때마다 글이 주는 느낌과 감동이 달라진다는 점이다.어릴 적 처음으로 어린왕자를 접했을 때는, 우주에서 지구로 여행을 온 어린왕자가 마치 친구처럼 느껴졌었다. 그가 사막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매우 신비로웠고 우주를 여행하면서 만난 어른들의 모습이 너무나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나도 장미와 여우같은 친구를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며 내 인형에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린왕자가 여행 중에 만난 어른들의 모습은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다. 오히려 서글프게 느껴진다.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작은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소우주라고 할까. 개인이 만들어가는 작은 우주에는 그 사람의 삶의 모든 것들이 담겨있다. 어린왕자는 이렇게 작은 우주, 즉 작은 별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을 만나고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주변의, 혹은 나의 모습일 수도 있는 현대인의 실상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어린왕자가 여행한 작은 별들에는 지배욕, 물욕, 허영심, 좌절 등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삶의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채 의미 없이 명령을 내리거나 오로지 숭배만 받기를 원하며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별들을 가지려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좌절 속에서 삶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본질을 묻는 어린왕자에게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하지 못한다. 어린왕자가 지구에서 만난 어른들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열차를 타고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자신이 진실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어린왕자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에 나는 서글퍼졌고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나는 과연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일들이 의미가 있는지, 정말로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고 살아왔을까? 진정한 삶의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어린왕자는 그 해답을 관계에서 찾았다. 우리의 삶은 너와 나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어린왕자 식으로 말하자면, 지구에는 65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것은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내가 그 중 한 사람과 서로 좋아하고 길들여지게 된다면 나는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들에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지구의 사진만 봐도 행복을 느낄지도 모른다. 비행사가 어린왕자를 떠올리며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듯이 말이다.
을 읽고풀이 서로 기댈 수 있는 것처럼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선생님의 편지는 각박한 생활에 구부러져 있던 등허리를 펴고 먼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하기에 늘 기다려집니다.이곳 보다는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기에는 선생님이 계신 곳의 그 밀도가 더 심할 것이지만 옥살이 중에 느끼셨던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언어와 사고의 차이만큼이나 확연한 차이가 이곳에도 존재합니다. 바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삶의 방식의 차이입니다. 사실 그 둘을 구분한다는 게 어찌 보면 의미가 없을 듯도 합니다. 배웠다는 것도 배우기 위해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들어간다는 점 말고도 자신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구분 지으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가지려고 한다는 점에서 소유의 개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회에서는 그 모든 것을 포괄하여―사실 다른 것보다도 돈이 만들어내는 차이가 가장 크긴 하지만―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또한 선생님이 계신 곳에서의 배운 자와 못 배운 자들은 그 나름대로의 언어와 사고를 가지고 자기의 작풍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이 곳 밖에서 가진 자들은 계속 자기의 것을 지키려 하고 못 가진 자들은 가진 자가 되기 위해 바쁘게들 살아갑니다. 따라서 이곳은 비록 휘달리는 산맥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발로 느끼고 돌아볼 여유가 없이 산다는 점에서 15척 벽돌 벼랑으로 둘린 외따른 섬과 다름이 없습니다.이 사회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들의 상반된 삶의 태도는 어느 곳에나 항상 존재하고 한 개인이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만들어내는 태도의 차이는 점점 더 확연해 지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때의 친구를 만나면 대학 친구들을 대할 때와는 다른 분위기가 조성되고 나 스스로도 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은 대학에 와서 만난 친구들처럼 학교에서 좋은 성적 받아 좋은 대학에 들어와서 학점 관리하고 방학 때는 인턴과 영어 학원 등에 시간을 투자하고 때가 되면 영어연수와 교환학생을 위해 기웃거리며 대기업, 전문직, 공무원, 대학원 정도의 범위에서 진로가 결정되는 규격화, 표준화, 제도화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그들은 아버지가 80년 당시 광주에 군인으로서 계셨던 일 때문에 를 보기 싫어하거나,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고 대뜸 사업을 하겠다고 나서거나,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서 생각지도 못하던 서울의 작은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방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있는 친구는 학교에 까만 차도 몰고 오고 콩쿠르도 나가서 상도 타고 유학도 가는 좋은 대학의 음대생을 제치고 한국 대표의 성악가가 될 수 있을지 걱정스럽게 만듭니다.이런 친구들 사이에서 저는 운이 좋았는지 소위 명문대라는 것을 나오고도 모자라 이렇게 또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양쪽 모두에 속한 사람으로서 둘의 간격을 매우 자주 느끼게 됩니다.그리고 이런 대조되는 사이에서 나의 관심은 어떤 삶의 방식이 옳고 어떤 모습이 더 멋지냐 라던가 혹은 어떤 쪽에 속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것 보다는 왜 어떤 쪽은 저렇게 살 수밖에 없게 되었고, 어떤 쪽은 이렇게 지내도록 유도되었는가, 어떤 방식이 이 사회에서 더 살아남기 쉽도록 하는가, 어째서 어떤 쪽은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가에 더 쏠리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누구는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게 이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반전의 드라마 『나목』작가의 경험과 소설의 내용은 얼마만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읽는 소설들은 진정한 의미의 fiction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알베르 까뮈는 ‘당신은 경험을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 말에 따르면 우리에게 진정으로 순수한 창조적 경험은 없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가상의 세계 속 가공의 인물들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만큼 작가의 경험은 중요하고 그 경험에 따라 작품의 깊이와 폭이 달라진다.작가의 경험과 작품의 연관성에 대해 말한다면 박완서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의 작품은 경험과 따로 떨어뜨려서는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박완서의 소설이 작가의 체험에 의해 자전적 요소를 가지고 창작되어 왔다는 것은 이미 그녀를 통해 밝혀진 바 있고 그녀만큼 훌륭하게 자기 경험을 소설로 전환시킨 작가 또한 드물 것이다. 그녀가 경험한 6.25전쟁과 분단, 전후의 생활상은『나목』으로부터 시작하여 『엄마의 말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등등 그녀의 많은 소설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박완서의 처녀작인 『나목』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이 이후 소설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게 하고 더 나아가 이후의 소설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나목』의 여주인공인 이경은 바로 작가 자신이 투영된 인물이다. 작가는 자신이 살아왔던 시대의 고통과 본인이 겪어야 했던 혼란과 방황의 실존적 삶을 소설 속에서 재창조해냈다. 또한 옥희도라는 화가의 삶을 통해 전쟁 상황에서 예술가의 삶, 더 나아가 지식인의 삶의 모습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일제와 전쟁이 이경과 옥희도, 그 외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나가는지를 박완서 특유의 송곳 같은 표현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나목』에는 네 명의 중심인물들이 등장한다. 작가 자신이기도 한 주인공 이경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전쟁 중에 오빠들을 잃고 자신이 그들을 죽게 했다는 자책감과 오빠들을 잊지 못하는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들들의 죽음으로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채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이경이 일하는 미군부대 안 초상화부에서 돈을 받고 그림을 그려주는 옥희도라는 화가가 있다. 그는 예술가이지만 전쟁으로 인해 예술가로서 살아갈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싸구려 초상화를 그려 돈을 번다. 마지막으로 이경을 사랑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가진 황태수라는 인물이 있다. 이경은 이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전쟁의 아픔과 아버지와 오빠들의 죽음으로 황폐해진 삶, 어머니와의 갈등들을 극복하며 성장해 나간다.이경의 성장과정에서 장애가 되는 주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아버지와 오빠들의 죽음, 즉 가장의 부재이고 또 하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어머니와의 갈등이다. 먼저 가장의 부재는 이경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고 이경이 어린 나이에 돈을 벌도록 만든다. 그리고 올바른 성역할을 깨달아 사회적, 정서적으로 안정된 성장을 하는데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또한 집안의 모든 남자가 죽어버림으로 인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어머니는 살아남은 딸을 거부하게 되고 회색의 고가에서 회색빛 부연 눈으로 목적 없이 살아간다.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인해 이경은 자아 정체성과 자기 존중감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이런 이경의 성장장애들은 세 단계를 통해 극복되어지는 구조를 보인다. 가장의 부재 상황에서 이경은 전쟁이 준 황폐함 삶과 아버지와 두 오빠의 죽음으로 인한 빈자리를 옥희도를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그리고 미군병사 조와의 만남을 통해서 이경은 어머니의 인습에 대한 반항과 멀어진 옥희도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일탈을 꿈꾼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 그것이 결국은 오빠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원인이 된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었음을 깨닫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현실에서 도피하듯이 황태수와 결혼함으로써 완전한 성장을 완성하게 된다.위에서 보듯이 『나목』은 이경이 성장장애를 극복하고 고목에서 나목으로 변화되는 과정이 단계별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이경은 성장의 장애들을 극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회피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다. 이경은 옥희도가 사준 장난감을 부셔버림으로써 유년기의 행복했던 시절과 너무도 대비되는 현실의 괴로움, 그리고 황량한 자신의 모습을 떨치고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거기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옥희도의 집에 찾아가거나 태수와 삼자대면을 시키는 등 옥희도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가장의 부재로 인한 혼란과 전쟁이 가져다준 황폐한 삶을 극복해나가는 긍정적인 모습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 옥희도를 통한 더 이상의 성장은 없다.또한 미군병사 조와 호텔에서 일어난 일도 그녀의 성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설정으로는 무리가 있다. 이경은 마지막 순간에 오빠들의 죽음을 환영처럼 보게 되고 성과 죽음을 연결하는 무섭고도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그것은 오히려 올바른 성정체성을 확립하고 긍정적인 성관계를 만들어나가는데 트라우마로 작용할 뿐이다. 그런 일을 겪은 여성이 다른 누군가와 긍정적이고 즐거운 성관계를 만들어 나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은 쉽게 믿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