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4
검색어 입력폼
  • 나당전쟁 - 신하의 나라가 주인의 나라를 이긴 전쟁
    신하의 나라가 주인의 나라를 이긴전쟁 -나당전쟁-‘신라는 당군을 어떻게 이겼는가’Ⅰ.머리말Ⅱ.본론1.신라의 승리요인ⅰ.정치적· 외교적요인ⅱ.군사적요인ⅲ.지리적요인2. 당의 국내외 정세상황ⅰ.국내정세ⅱ.국외정세Ⅲ.맺음말Ⅰ.머리말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등장하자 주로 중국의 한족과 패권을 다투는 전쟁을 벌이게 된다. 한반도의 동남부에서 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대당 외교를 강화하자 이를 계기로 하여 새로운 대립 정국이 형성되었다. 즉 신라와 당이 동서로 연합하고 백제와 고구려가 남북으로 연합하여 동서세력과 남북세력으로 대결하는 구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급기야 신라는 당과 연합군을 편성하였고 660년 7월에는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어 668년 9월에는 수도 평양성을 함락함으로써 고구려 왕조마저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백제땅에 웅진도독부를, 평양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에는 계림도독부를 두어 한반도와 만주 전체를 지배하려고 했다. 즉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는 물론 본래 신라가 가지고 있던 고유 영토마저도 송두리째 지배하려는 야욕을 노출시켰다. 이에 신라가 당이 한민족을 지배하려는 저의를 무력으로 분쇄하기 위해 당군과의 충돌도 불사함으로써 나당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즉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의 출병부대를 그대로 잔류시켜 한민족 모두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려는 야욕을 신라가 무력으로 압박하여 몰아낸 과정이 나당전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민족의 자존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국력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적대 관계에 있었던 고구려 부흥군과의 제휴도 마다하지 않았다. 신라는 특히 매소성 전투(674)나 기벌포 전투(676) 등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당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군사적인 압박을 가중시켰다. 10여 년 간 이민족의 지배 정책에 대항하는 민족적 차원의 대당 전쟁을 꾸준히 전개한 결과로 당군을 북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하였고, 신라는 5세기 중반까지 왕위 계승과 관련한 정쟁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정치적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안정을 되찾게 된 계기는 눌지왕대에 이르러서였다. 외세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대외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게 되면서부터 내부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동시에 왕위에 부자상속제도를 정착시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구현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신라는 6세기 법흥왕대부터 중앙집권적 귀족 국가 체제를 갖추고 농업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켜 국가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이는 곧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특히 병부는 법흥왕 즉위 직후에 설치되어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전담관서로서 역할을 했다.이후 진흥왕대에 이르러서는 551년 백제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당시 한강 유역에 진출해있던 고구려군을 몰아내고, 553년에는 백제가 분할 점령하고 있던 하류지역마저 점령함으로써 한강유역에 대한 신라의 독자적 지배권은 확고해지게 되었다. 이로부터 신라는 서해안을 통해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독자적인 대중교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같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이를 시점으로 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부단한 공격을 받아 국가의 존립마저 위협받는 중대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밀려드는 외압은 신라로 하여금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게 하는 외적인 요인이 된다. 특히 국가 존망의 위기 앞에서 국왕의 전제권마저 도전을 받는 상황이 전개되자 제 3세력의 영향력을 끌어들이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내란의 위기를 극복한 주도 세력인 김춘추와 김유신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결국 진골 출신의 김춘추가 국왕으로 즉위하자 정치적인 안정을 통해 내부의 결속을 강화한 다음 대당 외교를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당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연합군을 형성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이다.이들 진골 출신의 집권 세력들은 대당 외교를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고, 이 신라로 망명하자 문무왕은 그를 맞아 고구려왕에 봉했다. 그리고 670년에는 고연무와 검모잠이 이끈 고구려 부흥군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또한 한때 당군이 백제 부흥군에게 밀렸던 것으로 보아 백제부흥군의 수가 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 부흥군이 가담함으로써 신라군은 아마도 10만은 족히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ⅱ.군사적요인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신라군제(新羅軍制)를 대표하는 것은 육정(六停)과 구서당(九誓幢)이다. 대체로 육정이 영토 확장과 함께 조직되고 발전되었다면, 구서당은 통일 후 신라인 3개 부대와 백제, 고구려, 말갈인으로 구성된 6개의 부대가 순차적으로 증설되면서 총9개의 부대로 대규모 증설과 함께 새롭게 개편·조직된 군단이다. 구서당의 9개 각 부대에는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라는 장창당(長槍幢)이 있는데 기록에서도 장창당은 당나라 군대를 무찌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때의 당나라의 군 조직은 기병양성에 주력하고 당 태종때 말의 수는 칠십만마리에 이른다고 한다. 이러한 당나라의 중무장한 기병을 막는역할을 한 것이 장창단 이다. 장창은 이름 그대로 긴 창을 말한다. 장창의 길이는 450cm로 자그마치 어른 키의 3배에 이른다. 길이가 이렇게 길다 보니 정교한 무술을 펼치기는 어렵다. 그 때문에 기병대의 돌격을 저지하는 용도로 널리 쓰였다. 장창 보병이 겨누는 것이 말위에 탄 사람이 아니라 말의 가슴이나 목이었다. 당나라의 기마병이 장창 보병에 걸려 첫 대열이 낙마를 하면 뒤에 오는 대열은 밀리게 되는데 차가 밀리듯이 기병의 속도가 없어졌을 때 이 보병들이 그들을 포위하게 된다.“신라의 장창당은 당나라 군사 3천여 명과 부딪쳐 그들을 모조리 잡아서 대장군의 병영으로 보냈다.”장창 부대의 역할은 수비를 담당하는 것이었다면 공격은 노(弩)병들 담당했다. 신라의 노는활에 기계적인 장치를 달아 화살을 발사하는 무기로 종류가 다양하며, 시위를 당기는 힘에 따라 그 위력도 다르다. 노는 시위를 걸고 나서 정확히 조준할 수 있기 때문군대를 사열했다. (···) 같은 해(9월)왕이 영묘사 앞길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설수진의 육진병법을 관람했다”전쟁 중에 신라는 대규모 군사훈련과 전시효과를 노린 군대 사열에 열중했다. 군사행렬과 왕이 참석하는 진법연습 행사는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종의 심리전이었다.ⅲ.지리적요인또한 나당전쟁 7년간 당나라의 군대는 한 번도 임진강 이남을 넘어오지 못했다. 신라는 당나라의 남하를 막기 위해 세 곳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제 1방어선은 임진강·한탄강 저지선이고 그다음은 양주·포천 중심의 임진강과 서울 사이의 분지들이다. 이곳에 제2방어선을 만들고 제1방어선을 지원하기도 하며 중간 거점 역할을 했다. 제3방어선은 한강 북쪽 북한산성으로 추정되는 아차산성과 남쪽의 이성산성(二聖山城)이었다. 당군이 한강까지 남하하려면 150개나 되는 신라의 성을 통과해야 했다. 수많은 산성은 임진강 저지선을 구축하며 당군의 남하를 막았다. 이러한 성을 축조하는 데는 막대한 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당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신라는 산성 축조에 공을 들이고 672년에서 673년 사이에 신라는 무려 열 곳에서 성을 쌓았다. 당나라와 전면전에 대비해서 지역 방어를 견고히 하기 위한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다. 신라는 짧은 기간에 많은 성을 쌓을 수 있던 이유는 성곽을 신속하게 축조할 수 있는 전문 기술자로 특수 부대를 편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장척당(大匠尺幢)이라는 축성 전문 기술자와 무기 제조 기술자로 구성된 부대였다. 신라는 특수한 기술을 가진 집단으로 구성된 부대를 잘 활용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쇠뇌를 쏘는 노당, 구름사다리를 운용하는 운제당, 성곽을 부수거나 성문을 파괴하는 데 이용되는 충차(衝車)를 다루는 충당, 투석기를 활용해 적의 인명을 살상하는 투석당 등으로, 전문적인 조작이 필요한 무기를 사용하는 이들 특수 부대가 활발하게 운용되었다. 그리고 나·당전쟁의 분수령이라 할 수있는 매소성은 성의 규모는 작지만 성 부근에 대군을 수용할 만큼의 주둔하고 있던 매소성은 지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것이다. 즉 매소성 전투는 당군의 규모나 전술적 위치로 보나 나당전쟁의 가장 핵심이 되는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나당전쟁은 7년을 끈 장기전이었고 특히 원정군인 당나라에게는 보급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당나라 군대는 기병이 주축이었다. 보병에 비해 기병에게는 보급의 어려움이 더 크다. 전쟁 중에 말은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한다. 그래서 기병에게 말은 끊임없이 보충해야 하는 보급품이자 무기였다. 말 7만 마리에게 필요한 하루치는 350t이고 당군 20만명의 하루 식사량은 60t이나 된다. 매소성 전투가 있기 전, 신라 수군은 천성 주위에 함대를 집결시키고 당의 보급선단과 전투를 벌였다. 천성전투로 매소성에 주둔한 20만 당군의 보급은 차단되었다. 이 후 매소성에는 겨울을 앞두고 있었고 보급품마저 끊긴 상황에서 당은 최후의 결전을 해야 했고 675년 당 기병대와 신라 보병은 정면 승부를 벌이고 신라는 승리한다. 신라의 매소성 전투 승리는 한반도에서 당을 완전히 몰아낸 승리였다. 『삼국사기』에서는 매소성 전투를 이렇게 적고 있다.“주둔한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노획물로 말 30,380필과 많은 무기를 얻었다.”매소성에서 참패한 후 불과 몇 달을 못 버티고 당은 결국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2.당의 국내외 정세상황ⅰ.국내정세당 왕조가 출범할 초기의 형세는 귀족집단과의 연합 정권적 성격이 농후하였다. 그 후 당이 동북아의 강국 고구려와 장기간 전쟁을 계속하면서 국력을 소모하게 되자 전쟁을 주도한 집권 귀족 세력들의 정치적 기반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은 7세기 중반에 즉위한 고종은 태종의 아들로서 태종의 후궁이었던 무조, 즉 훗날의 측천무후를 환속시킨 다음 궁궐로 데려와 자신의 후궁으로 삼은 사건에서 정치적 혼란이 시작되었다. 고종의 총애를 받은 무씨는 소의에 책봉되었고, 급기야 황후인 왕씨를 몰아내고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위해 노력한다. 이로 인하여 당이 조정은 고각된다.
    인문/어학| 2015.07.01| 6페이지| 1,000원| 조회(157)
    미리보기
  • 고조선의 제문제, 국가형성과 발전
    고조선사의 제(諸)문제목 차Ⅰ.고조선의 국가 형성과 발전에 대한 논쟁Ⅱ.고조선의 중심지와 그로 인한 강역에 대한 논쟁Ⅲ.기자조선설과 동북공정의 허구성Ⅰ.고조선의 국가 형성과 발전에 대한 논쟁고조선의 국가 형성 및 발전 과정에 대해서는 학계마다 의견이 분분한데, 이를 종합하고 정리하면 고조선사는 선고조선왕국 시대→고조선왕국 초기→고조선왕국 중기→고조선왕국 후기로 분류할 수 있다. 이에 여기에서는 고조선의 발전 과정을 각 시기별로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1.선고조선왕국 시대-BC.9세기 이전‘조선’이라는 국호가 나타난 시기를 하나의 획기로 보고 그러한 국호를 사용하거나 또는 그에 상응하는 정치체의 출현 이후를 고조선 왕국시기로 본다면 그 이전 시기는 선고조선(왕국)시기로 설정된다. 이 때의 국호는 초기 국가가 중심도시를 국명으로 삼는 예를 보아 ‘아사달’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조선사연구회·동북아역사재단, 『고조선사 연구 100년-고조선사 연구의 현황과 쟁점』, 학연문화사, 2009, p.34.아사달 사회는 하가점하층문화를 배경으로 성장한 환웅 등 외래 유이민 세력과 곰과 호랑이로 상징되는 토착인이 융합하여 요하유역의 특정한 지역, 즉 ‘아사달’을 중심으로 이른 시기부터 신정국가의 성격을 지닌 성읍국가를 형성하였다. 고조선사연구회·동북아역사재단, 『고조선의 역사를 찾아서-국가·문화·교역』, 학연문화사, 2007, p.30.『삼국유사』에 따르면, 아사달 사회를 다스린 단군왕검은 ‘하늘임금’을 뜻하는 제정일치시대의 군주 호칭으로 단군이 다스리던 아사달 사회는 신석기문화 전통을 지닌 청동기사회라고 할 수 있다. 세계속의한국편찬위원회, 『세계 속의 한국』, 단국대학교출판부, 2008, p.96.이후 BC. 1100년을 전후하여 상·주세력이 대릉하 유역에 등장함에 따라 이들과 대립·항쟁하면서 도읍을 옮기기도 하였으나, 은주세력의 동진을 요하선에서 저지하고 다시 고토인 아사달을 회복하고 존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아사달 사회는 성읍국가에서 성읍 연맹체국가로 발전하여 그 영되어 고조선 왕국에서 종결되는데 크게 BC.10세기를 경계로 조기 청동기문화와 후기 청동기문화로 구분된다. 조기 청동기문화는 요서의 하가점하층문화, 요하 중유역의 고태산 문화, 요동산지의 마성자문화, 요동반도의 쌍타자 문화로 크게 구분된다. BC.10세기를 전후하여 동북지역에는 북방 초원의 청동기문화(하가점상층문화, 옥황묘문화)와 중원에서 동진한 상·주 청동기문화와 요녕지역의 토착적인 비파형동검문화 등이 교차하여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며 여기에서 고조선은 초기 국가 단계를 지나 고대왕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때 조선의 영토는 서쪽으로 연과 동호, 동쪽은 임둔, 북쪽은 부여, 남쪽으로는 진국과 경계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 시기의 청동기 문화는 점차 확산되어 길림지구에서는 서단산 문화의 발생과 더불어 부여국 탄생의 기반이 형성되고, 한반도에서는 삼한사회의 형성이 촉진된다. 같은 책, p.43~46.3.고조선왕국 중기-BC.5~4세기중국에 철기문화가 확산되는 전국시대에 이르면 고조선도 발전을 거듭하여 전국 7웅 중 하나인 연나라와 대립하게 된다. 『사기』와 『위략』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은 이때에 이르러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연나라를 치려고 하였으나, 연나라 조왕(昭王) 대에 진개의 침입을 맞아 중심지를 대동강유역으로 옮기고 요동반도를 가르는 자연계선인 천산산맥의 부근의 만번한을 경계로 연나라와 대립하였다고 한다.4.고조선왕국 후기-BC.3~2세기BC.221년에 중국에서는 진(秦)나라가 전국을 통일하여 요동까지 진출하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고조선은 압록강선까지 후퇴하였다. 하지만 진·한 교체기에 흉노가 세력을 팽창하여 한과 대립하게 되자, 이를 틈타 한을 공격하여 요동 동부지역을 수복하고 패수(지금의 혼하)를 경계로 한나라와 대립하게 되었다.여기까지 고조선의 국가형성과 발전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아직까지 고조선의 국가 구조 및 성격에 대해 모든 것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고조선이 세계의 유수한 고대 문명국가와 마찬가지로 초리고 현재 남, 북으로 갈라져 정치적인 면이 반영되어 각기 다른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독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서 의견이 많은 것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국가이고 우리가 인식하는 우리 민족의 시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사학 성립 이후 고조선의 강역과 중심지에 대한 연구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와 중심지로 기록된 지명의 위치 비정이라는 문헌사적인 측면과 고고학 자료의 해석이라는 두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첫째는 수도로 기록된 아사달, 험독, 왕검성과 서쪽 경계로 나오는 만번한(滿藩汗), 패수(浿水), 갈석(碣石) 등을 어디로 비정하느냐이다. 고조선사연구회·동북아역사재단, 『고조선사 연구 100년-고조선사 연구의 현황과 쟁점』, 학연문화사, 2009, p.84.둘, 한반도 서북부와 중국 동북부에서 발달한 비파형동검문화의 주인공과 기원전 3~2세기에 형성된 화폐유적의 담당자를 누구로 보느냐이다.이에 대한 해석은 대동강중심설, 요동 중심설, 중심지 이동설로 대분하게 된다.1. 대동강 중심설대동강 중심설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처음부터 멸망할 때까지 대동강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삼국유사』,『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한서』등에 고조선의 위치가 한반도 안으로 비정되어 있다. 근대 이후에는 이병도가 이 설을 체계화 하고, 송호정 등의 학자가 이와 같은 논지를 발전 시켰다. 대표적으로, 이병도는 “대동강을 중심으로 성립, 강성할 때는 요하를 경계로 동호연과 인접하였다.(浿水=청천강, 列水=대동강)” 라고 주장하였고, 송호정은 “고조선의 중심지는 처음부터 대동강이었다.(浿水=청천강)”라고 주장하였다. 세계속의한국편찬위원회, 『세계 속의 한국』, 단국대학교출판부, 2008, p.98.이러한 견해들에 따르면 왕검성과 패수는 각각 현재의 평양과 청천강이 된다. 또한 평양지역에서 발견되는 중국계 유물은 낙랑군, 중국계 문화로 파악한다. 최근에 송호정은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이를 보강하였는데 비파형동검문화를 공유하는 요동 지역과 한반도 서북지역을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명도전이 특정한 정차집단 혹은 국가의 경계로 삼을만한 표지적 유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보수성과 전통이 강한 분묘 등의 고고학 자료와 달리 화폐는 교역이나 인구 이동 등에 따른 지리적 유동성이 큰 유물이다. 특히 교환수단으로 사용되는 특성으로 인하여, 사용자가 고정되어 있는 여타의 유물과는 달리 화폐를 사용한 주인공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같은 종류의 화폐가 한 집단이나 사회, 국가를 초월하여 사용된다고 본다. 고조선 시기, 한반도 서북부와 중국 동북부에 걸쳐 분포하는 화폐유적의 경우도 유물갖춤새와 유구 등에서 여러 집단에 의해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2. 요동 중심설요동 중심설은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이 요동에 있었고, 서쪽 경계 에 다소 변동이 있었으나 강역은 대체로 지금의 요령성과 한반도 서북부를 아울렀던 것으로 본는 견해이다. 고조선사연구회·동북아역사재단, 『고조선사 연구 100년-고조선사 연구의 현황과 쟁점』, 학연문화사, 2009, p.86.주로 북한학계의 학설이다. 북한 학계에선 1950년대 후반의 치열한 토론을 거쳐 1960년대 초 재요녕성설이 정설로 되었다. 이후 북한 학계는 만주 지역에서 진행된 청동기 시대 유적 ·유물의 발굴 성과를 원용하여 재요녕성설의 논거를 확충하는 등 3O여 년 간 재요녕성설을 정설로 견지해 왔다. 그러다가 돌연히 1993년 이른바 ‘단군릉' 발굴을 경계로 재평양설을 취하게 된다. 현재 북한학계에서는 재요녕성설을 정설로 하고 있고 남한학계에서는 재평양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논란의 이유는 고대사에 대한 문헌자료의 절대적인 부족과 함께 단편적인 기록이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함에 일차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여기에 앞서 고대의 지명은 오늘날의 고유 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패수’라는 단어의 경우 고대에 강이라는 의미의 보통 명사로 쏘여 곳곳에 패수(浿水)라는 지명이 사용되었을 경우도 있다. 이처럼 문헌상에 보이는 지명의 위치에사재단, 『고조선사 연구 100년-고조선사 연구의 현황과 쟁점』, 학연문화사, 2009, p.88.중심지 이동설은 사기, 후한서, 삼국지 등에 기록된 고조선과 연나라의 전쟁기사 및 서쪽경계의 변동 기사를 주목하고 있다. 대체로 고조선의 초기의 중심지를 요하유역으로,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공을 받은 후의 중심지를 평양으로 본다는 점과, 평양을 위만조선의 왕검성이자 낙랑군으로 비정한다는 점에서 공통하다. 중심지 이동설은 중심지를 요동에 두면서 전성기에는 서쪽으로 대릉하 유역, 남쪽으로 대동강 유역을 경계로 하였다고 보고 있다. 진개의 침략 이후에 중심지가 대동강유역으로 이동하였으나 진·한 교체기를 틈타 패수 이동의 요동고토 일부를 회복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패수(浿水)를 현재의 혼하(渾河)로, 열수(列水)를 대동강으로, 만번한(滿藩汗)을 천산산맥(千山山脈)서남부로 비정하였다. 고조선사연구회·동북아역사재단, 『고조선사 연구 100년-고조선사 연구의 현황과 쟁점』, 학연문화사, 2009, p.91.고고학 자료 가운데 요동 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를 고조선의 전기 문화로,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에서 발견되는 명도전유적을 위만조선의 문화로 본다. 또 다른 학설은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령성 해성현의 개평현과 개평형을 포괄하는 지역의 어느 곳에 있었는데 연의 침략으로 중심지를 평양에 옮긴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 견해에 따르면 패수(浿水)는 압록강, 열수(列水)는 대동강, 만번한(滿藩汗)은 어니하·청하 하류와 성수산을 잇는 일대가 되는데 패수(浿水)가 압록강이 된다면 동북공정의 빌미가 된다 생각하므로 전자의 중심지 이동설이 좀 더 유력하다고 본다.Ⅲ.기자조선설과 동북공정의 허구성cf)패수의 논란이동설의 여러 논문을 보면서 동북공정의 빌미를 줄 수 있는 한 부분을 찾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동설 중 패수의 자리를 보는 두 학자의 관점이다. 패수(浿水)를 정의를 중국의 혼하(渾河)가 아닌 압록강으로 본다면 현재 남북한을 합쳐 영토를 보았을 때 동북공정이 주장하는 이론을 도와주는 꼴다.
    인문/어학| 2014.10.20| 7페이지| 1,500원| 조회(214)
    미리보기
  • [독후감] 선비의 배반 서평
    “끊임없이 수행하고, 청렴 청빈 절제 검약의 정신으로 삶 자체를 이상화한 특별한 캐릭터 조선 선비.”“불같은 정신으로 시대를 호령했고 깊이 있는 사색으로 시대를 떠받쳤던 선비들의 생애.”조선 시대 선비들을 형용한 신문기사의 일부이다.보통 ‘선비’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것은 ‘고고함, 절개’등의 단어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개를 굽히지 않고 소신을 지켰던 사람. 혹은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나왔던 그렇게 곧은, 너무 곧아서 차라리 융통성이 없고, 물욕 없는 딸깍발이를 떠올린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선비의 배반’이란 책의 제목부터 모순인 듯 하다. 과연 대쪽같은 선비들도 배반이란 걸 할까싶다.이 책에서는 선비들에 얽힌 일화들과 정책, 당시의 사회적 배경등 여러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먼저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첫 번째로 광해군의 이야기이다. 난폭하고 사나운 성품과 자신의 야망을 위해 형제를 죽인 폭군으로 알려져 있는 광해군, 실제로는 그의 형제들이 모반을 꾸민다거나 다른 이의 옹립설이 나돈다는 이유로 형제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고, 반대하더라도 대신들의 간청에 밀려 결국은 대신들의 뜻대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는 이러한 일을 트집 잡아 ‘폐모살제’를 저지른 부도덕한 왕이라 몰아붙이고 결국 광해군은 서인들에 의해 축출 당한다. 형제를 죽여야한다고 말한 것도, 또 그리했다고 광해군을 축출한 것도 다 조선의 선비였다.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사실 광해군은 허준의 동의보감 편찬을 후원하고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민생의 안정을 꾀하고 현실적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왕이었다. 어쩌면 광해군은 선비들의 정권다툼 속에서 폭군이라는 오명을 쓰고 세상에게서 등 돌려진 피해자 아니었을까두 번째는 비운의 소현 세자 이야기이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후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타국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타국에서 국제 정세와 새로운 사상을 익힌 그는 고국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의욕을 불태웠지만 돌아온 고국은 그에게 냉담했다. 성리학이 유일사상이었던 조선에서 소현세자의 개방적인 현실인식은 인조와 반정정권의 불만을 사게 된 것이다. ‘세자가 본국에 돌아온 지 수개월 만에 병이 들었는데 의관들도 소현세자의 치료를 함부로 했다’는 기사를 보면 소현세자가 얼마나 심한 냉대를 받았을지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시체가 새까맣다는 것을 보아서 그가 독살 당했을 것이라는 설도 무리는 아닌 듯 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사건에 아버지 인조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을 것이라는 거다. 물론 소현세자를 독살하는데 인조가 직접 관여 했는지에 대해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렇지만 인조가 청나라에서 돌아온 세자를 무척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의 얼굴을 벼루로 내리치면서 학대했었다는 점 등을 보면 소현세자의 독살에 최소한 인조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소현세자가 자신을 폐위하고 즉위하지 않을까하고 두려워하던 인조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아들마저 버려버린 것이다. 먼 타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그런 식으로 외면해버렸던 비정한 아버지. 어찌 보면 보험금을 타기 위해 아들을 죽여 버린 현대의 비정한 아버지와 같지 않을까.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특히 선비들의 권력다툼과 조선시대 의 정치적 의미에 초점을 맞춰보았다먼저 ‘선비’의 정확한 뜻을 알아보자면 사대부를 일컫는 말로 관리가 될 자격이 있는 독서 계급을 통칭하는 말이다. 선비는 고려 말의 신흥 사대부들이나 조선 중기 이후의 사림파를 모두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사림파의 후예들은 조선 왕조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나라의 원리인 성리학을 지키는 파수꾼임을 자임하였다. 즉 조선의 지도층이 선비였던 것이다. 이러한 선비들이 이념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물질이 아니라 도의적 명분, 즉 도덕과 의리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선비들의 목표는 당시 의 실정권을 잡는데 있었던 듯하다. 조선이 건국되는 그 순간, 그 이전부터 사람들은 온건파와 급진파, 두 파로 나누어져 권력을 잡으려고 으르렁거렸다. 그 과정에서 다른 입장의 선비를 자신의 편으로 돌리려고 달래고 회유하다 잘 되지 않자 마지막 방편으로 습격하고 죽여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정몽주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노론 소론, 동인 서인, 게다가 남인 북인등 왜 이리 많이 나뉘어져 있는지. 서로 헐뜯고 모함하는 등 자신의 이익에 방해되는 자들을 축출해 내려는 비열한 모습도 선비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준다. “충신, 열사가 제명에 죽지 못함을 잘 알고 있다.” 이 말은 곽재우가 당시국정현안은 도외시한 채 정파의 이익에만 몰두하여 자신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정치 현실과 세상을 향해 던진 말이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국가와 민족을 구하고도 모함을 당해야 했던 이순신, “이순신에게 북인들이 죄를 물을 이유는 그를 천거한 유성룡을 잡기 위한 것” 이라는 기록 등을 봤을 때 . 자신의 정당을 지키기 위한 처절함이 서려 있다. 이러한 선비들의 권력다툼은 현대 정치인들의 그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권력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기득권층이다. 권력에 가깝고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든 이상세계를 건설하고, 자신들의 이상이 담긴 국가 사회를 만드는 데 몰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대의명분과 달리 속으로 정치적 이해득실을 고려함으로써 정작 중요한 민생 안정을 등한시 한다. 지은이는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오늘의 정치 현실을 바라보는 위기의식의 소산으로 이 책을 지었다고 했다. “나는 이 책을 정부의 주도적 인사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들은 왠지 기묘사화의 희생양이 된 조광조 일파로 보이기 때문이다.청신성을 장점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미숙함과 이에 못지않은 정치적 야망이 혼합된 이중적 인격체로 파악되는 것이다.”라는 지은이의 말이 와 닿는다. 근시안적인 ‘정치적 고려’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야하겠다.다음으로 조선 후기를 다룬 이야기 속에서 빠지지 않고 나온 것이 이다. 왜 유독 이 책이 조선 정치에서 그토록 중시되고 중기 이후 항상 논쟁의 중심에 있었을까.
    독후감/창작| 2014.10.20| 4페이지| 1,500원| 조회(218)
    미리보기
  • 블랙아테나 서평요약
    블랙아테나 서평1. 다원적이고 혼혈적인 유럽 문명정체성은 타인에 의해서 규정지어진다. 아버지로 남편으로 선생님으로 때로는 아들로, 타인에 비취진 자신의 모습으로 정체성을 획득한다. 물론, 이러한 인간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은 우리가 유럽문명의 시조로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나타난다. 그리스인은 외침에 의한 결속력 강화의 필요성에서, 선진 문명의 유입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의 이미지를 왜곡시키기 시작한다. 유럽의 역사는 이러한 ‘왜곡’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즉, 유럽인은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비유럽문명을 열등하다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유럽인만의 ‘기준’은 모순점을 가지고 있다. 매우 복잡한 문명을 가지고 있던 ‘야만인’은 그리스 고대 문화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고, 유럽문명의 핵심적 요소인 그리스도교는 사실 동쪽의 신비주의적 경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후기에는 정치적·지적 통제수단으로 변질해 갔다. 그리고 자신 보다 열등하다고 여겼던 중국, 이슬람, 혹은 잉카 사회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식은 매우 불완전했었고, 중세문화 형성에는 이슬람의 공헌이, 근대 과학 발전에는 자연 마술이나 연금술의 공헌이 컸다.그동안 우리 의식을 파고든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은 동방을 지배하고 억누르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일그러진 세계사를 다시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역사학이 ‘생산적’이지 않은 학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나름의 ‘과거를 살펴 현재를 발견하고 미래에 대비하는’ 시대적 요구를 무시할 순 없다. 또, 정보화 사회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밝혀주는 역사학의 역할은 넘쳐나는 지식을 재구성하는데 구심점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과거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 본문에서는 ‘전통적이고 일반적’이라고 믿어왔던 유럽중심의 역사관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2. 그리스 문명에 대한 고대 서양인들의 인식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인이 어쩌다가 펠로폰네소스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곳에서 스스로 왕이 되었는지는 이미 다른 작가들의 이트/아테나는 성 카타리나로 통합되었고, 호루스/페르세우스는 성 게오르기우스로, 아누비스/헤르메스는 성 크리스토포루스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토트-아누비스/ 헤르메스가 이집트와 오리엔트 지혜의 현인이자 전형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로서 교회 외부에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프셀로스 의 저서들 가운데 일부가 15세기에 이탈리아로 유입되었다는 사실은,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400년 동안이 혼란 속에서도 그 저서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보존되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신플라톤주의와 헤르메스주의가 그곳에서 지닌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1419년에는 상형 문자에 관한 5세기 후반의 저서인 의 사본이 이탈리아로 유입되어 번역되었다. 호라폴로는 수많은 기호들을 정확하게 해석하였다.조르다노 브루노는 이러한 르네상스를 회상하며 그 다음 세기에 ‘우리 그리스인은 문자와 고귀함을 지닌 웅대한 군주국인 이집트를 우리의 우화와 은유, 그리고 신조의 부모로 인정한다’고 언급하며 이집트를 비전과 전수가 처음으로 확립된 모습으로 보았다.또, 과학자인 코페르니쿠스도 이러한 주류를 따랐는데, 그는 태양 중심설이라는 생각을 156세기 중엽의 학자 레기오몬타누스에게/서 태양 중심설에서 이끌어냈다는데서 알 수 있다.4. 17,8세기의 이집트주의17세기 초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마랭 메르센이 카조봉의 연대 추정을 이용하여 엘리자베스 시대의 마법사인 로버트 플러드의 헤르메스적 신비주의를 공격한 것은 사실이고, 헤르메스의 전집이 기원전 1천년 경 어느 한 사람이 쓴 작품이라는 견해에 대한 카조봉의 비판도 통렬한 것이었다. 그러나 커드워스의 의견에 따르면, 후기에 속하는 요소가 있다고 해서 헤르메스 원문이 이집트 지혜의 근원이라는 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헤르메스 원문은 이집트의 이교주의와 사제들의 전통이 아직 단절되기 전에 씌어졌기 때문이다.카조봉의 비평은 17세기 헤르메스주의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아타나시우스 키르허 같은 경우는 카조봉을 완전히 무시했지만, 케임프리지 플라톤극도로 변화 되었다. 이는 당시 급진적 계몽주의가 유럽의 기존체제에 위협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신학적 정치적 함의에 위협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뉴턴의 사상을 옹호 하면서 그리스연구는 그리스도교와 제휴하게 되었다. 또한 1963년 급진적 계몽주의는 뉴턴의 친구였던 리처드 벤틀리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이는 그의 학식에 의해 이집트의 고대성 및 지혜에 관한 그리스 사료의 신뢰성을 훼손시키므로 급진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정당성의 원천을 박탈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르네상스기 내내 지속된 그리스도교와 이집트 종교 및 철학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이 붕괴됨을 의미한다. 18세기 유럽은 보다 진보적인 대륙으로 인식되어져 가고 있었다. 몽테스키외가 기록한 사실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는데 ‘1721년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유럽의 경제와 산업이 진보하여 다른 대륙으로 팽창하면서 유럽이 우월하다는 생각이 증가 했다’라고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보적 주장이 유럽이 독자적으로 이룩한 것이라고 여겨지진 않았다. 즉 이집트와 다른 문화의 영향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튀르고와 그의 동시대인은 ‘진보’ 라는 새로운 시각을 선언하고 명료화 하면서도 여전히 이집트인과 페니키아인에 대한 존경을 유지했으며 이들이 그리스를 식민화하고 문명화했다는 전설에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진보적 패러다임의 수용은 후에 이집트의 명성에 치명적이었고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이러한 진보적 패러다임을 이용해 그리스를 높이고 이집트를 낮추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된다. 또한 이러한 경향은 인종주의 및 낭만주의와 곧바로 융합 되면서 더욱 심해져 갔다.고대 모델을 전복시킨 배후영향이라 여겨지는 것이 바로 인종주의와 낭만주의이다. 먼저 ‘유럽의 인종주의는 1650년 이후에 성장하여 북아메리카 식민화의 진전으로 인해 크게 강화되었다’라고 한다. 원주민의 말살과 아프리카인의 노예화라는 정책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제도를 지지하였다. 주장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모든 주장들이 낭만주의에서 나온 언어학 즉 낭만주의 언어학인 것이다. 19세기 초 계몽주의 시대에 주된 관심사였던 중국이 몰락했다. 아편을 앞세운 영국은 중국의 무역수지를 적자로 돌려 세웠고 이러한 유럽의 상업이익은 군사주도권으로 이어졌다. 영국은 자신의 아편무역 보호와 더 많은 이권을 따내기 위해 1839년부터 19세기 말까지 중국에 대한 잇따른 공격을 한다. 이러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서구인이 지닌 중국의 이미지는 변모하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몰락은 언어학에서도 나타나는데 ‘슐라이허는 고립어인 중국어에서 교착어인 우랄알타이어를 거쳐 굴절어인 셈어와 인도 유럽어에서 최고점에 달하는 3단계의 진화 체계를 상정하였다.’ 19세기 초에는 이집트와 중국은 선사시대에 갇힌 채 우월한 인종인 아리안과 셈족의 역동적 발전에 종사하는 무기력한 발판으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중국과 이집트의 몰락은 당시 인종주의의 놀라운 성장도 한목하고 있다. 19세기 인종주의에 여러 인종주의자에 각기 다른 주장에 따르면 이집트인은 흑인으로 간주 되었는데 이는 당시 고대 이집트인의 모습을 접할 수 있는 그림 자료가 증가하고 그들이 다양한 인종의 혼합체라는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사람들은 이집트인을 점점 더 흑인이라고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19세기 중엽 고비노와 웰스에 의해 주장 되어져 왔다. 고비노는 이집트가 인도 아리안의 문명을 이식 받았다는 이론을 받아 들였는데,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본래 순수한 이집트인은 백인이었지만 타인종과의 혼합으로 쇠락을 초래 했다는 것이다. 또한 웰스는 이집트인은 원래 흑인종 이었으며 문명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근대에는 이집트인의 피부색이 희게 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고대그리스에 이집트 문명에 영향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1818년에는 이집트에는 국가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이집트의 국가 부흥에 힘입어 이집트는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나 1830년대에는 시리아를 지배했고 1839년에는 터키를 침입하기에 까지없었다. 7장의 후반부에는 친(親)인도 성향 및 인도유럽어 연구가 그리스 애호주의 및 고대학과 조화를 이루는 과정을 다루게 된다. 19세기 낭만주의 운동의 ‘급진파’ 라고 불릴 수 있는 그리스 애호주의자들은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하면서 등장했다. 여기에는 이태리, 프랑스, 미국(북아메리카인), 영국, 독일 등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리스에 열광하였는데, 독일 민족이 가장 깊이 몰두했다. 그리스 독립전쟁과 함께 인종주의적 정서가 팽배해졌다. 처음 그리스 애호주의자들은 그리스가 오리엔트의 퇴폐로 얼룩지기 이전에 지닌 순수한 본질을 추구했으나, 이러한 생각은 새로이 고양된 기준에 미달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인종적인’ 순수성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종주의적인 정서는 고대 모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와 발칸에 대한 터키의 지배는 열등한 인종이 우월한 인종을 정복한 부자연스러운 결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엽, 이집트인이, 다음으로 페니키아인이 점차 ‘인종적으로’ 열등하게 인식 되었으며, 그들이 ‘신성한 헬라스’를 식민화했을 뿐 아니라 문명화 했다는 그리스의 전설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헤겔은 당대 독일 철학의 중심이었고, 낭만주의 역사가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정신세계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서쪽에 가까운 이집트가 동쪽의 인도보다 더욱 진보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에 ‘그리스인의 종교와 문화의 실질적인 단초는 아시아와 시리아, 이집트에서 얻었으나, 그리스인들은 그것의 이국적 본성을 제거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그것들은 그리스인 자신의 것 이다’ 라고 저술했다. 또한 마르크스는 그리스 문명의 모든 측면이 선행한 모든 것과 달랐고, 우월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니부어는 근대 고대사의 창시자로 인정된다. 그는 역사학에 인종을 도입했고, 민족적?인종적 순수성이 바람직하다고 굳게 믿었다. 인종이야말로 모든 역사가 자라나는 첫 번째 토대이자 역사가 반드시 따르게 되는 제 1원리라 하였다. 그래서 그는 였다.
    독후감/창작| 2013.06.26| 6페이지| 2,000원| 조회(326)
    미리보기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21일 화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2:21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