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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 조의선인과 신라 화랑도의 비교
    고구려 조의선인과 신라 화랑도의 비교①개 요 & 삼국시대의 교육사상의 배경삼국시대는 대략 1세기 초에서부터 7세기 중엽까지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정립한 시대를 말하며, 점차 국가적 체제를 완성하면서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여 새로운 민족 문화를 준비하는 시기이다.삼국시대는 전제적·군사적 성격이 뚜렷한 대내·외 전쟁에 활용될 힘세고 용감한 군인 양성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래서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장사와 병사 양성은 중요한 교육 목적의 하나가 되었다. 강력한 주권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관료적 정치체계와 엄격한 계급제도가 교육제도에 영향을 미친것이다. 즉, 교육의 실제적 목적은 피교육자의 인격함양이나 개인적 가치실현보다도 정치 내지 계급적 지위를 고수할 수 있는 지배계급적 능력의 육성에 있었다.삼국시대 한자의 수용은 곧 유교의 보급에 있어서 유교적 도덕, 사회질서를 함께 전파시켰다. 유교를 강조한 것은 지배질서를 합리화하여 사회의 질서를 종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는 이론과 사상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을 비롯한 지배계급이 지도 원리로 사용하였고 서민생활을 다스리는 도덕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교육의 원리로 삼아 학교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삼국시대의 사상적 기반으로 불교는 비형식적 교육 형태로 큰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 소수림 2년(372)에 처음 전래된 불교사상은 왕실과 귀족의 적극적인 보호로 국가적 신앙으로 발전되었으며, 일체의 재래 신앙을 초월하는 이념으로 숭배되어 삼국시대의 정치·사회·문화·교육 및 생활의 성격을 결정하는 요인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현실 생활에 대한 빈곤이나 공포에 대하여 종래의 자연적 신앙으로서 안심을 얻지 못하다가 불교의 인과응보, 평등사상 등으로 말미암아 현실 및 미래생활에 대해 광명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또한 불교의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은 우리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쳐 준다. 불교 사상의 비형식적 교육 전개는 대중교화의 길, 국민 도덕 기반 조성, 호국 정신을 일깨워주는 등 많은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선배"는 이두자로 "선(먼저 선) 인" 혹은 "선(신선 선) 인" 이라 쓰이며, 원래 신수두 교도의 보통명칭이니 태조대왕 때에 매년 3월과 10월에 신수두 대제에 모든 군중을 모아 칼춤을 추고 활도 쏘며, 씨름이나 격투기를 했다. 또한 물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노래와 춤도 추고 혹은 큰 사냥을 나가 그 수확의 많고 적음으로 모든 놀이에 승자를 뽑았으니 이들 승자를 "선배"라 하여 일 단 선배로 뽑힌 자는 국가에서 녹봉을 주어 그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가족에게 피해가 없게끔 한 후 선배로 뽑힌 자들은 한집에서 먹고 잠도 같이 잤다. 그리하여 공동생활을 통해 학예를 배우며 산이나 들로 사냥도 나가고, 행군을 통해 지리를 익히고 성과 도로를 만들기도 하는 등 몸을 바쳐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였다. 전시에는 이들이 자체부대를 조직하고 전장에 나가 정예군으로 활동했다.우리의 현재의 "택견"이나 고려시대의 "수박"이 곧 "선배"를 뽑는 경기의 일부이며 이들이 중국에 들어가 "당수"가 되며 일본에 건너가 "유도"가 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씨 조선이 무예를 천시한 연고로 그 자취가 사라지고 현재에 이르러서 다시 복원해 보려는 움직임이 있으나 예전과 같지 않다.조의선인의 체계성품과 행동이 뛰어나고 학문이 높고 기술이 뛰어난 자를 골라 "스승"으로 삼았는데 일반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흡백"(향기나는 비단) 을 허리에 두르고 그 우두머리 되는 "스승"은 "흡백"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이를 "흡의"라 한다.그 스승 중에서도 가장 우두머리 되는 사람을 "신크마리"-이두로 두대형 혹은 태대형이라 부르고 그 다음을 "마리"-이두로 대형이라 부르며 최하는 "소형"이라 칭하였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그 전부의 선배를 모아 스스로 일단을 조직하여 전쟁터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죽음을 각오하니 죽어서 돌아 온자는 인민들이 개선한 자와 같이 영광을 돌리고 패하여 죽지 못하고 후퇴한 자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하였다. "선배"들이 가장 전쟁에서 용감하여 을 배우지 못하여 조상의 옛 일을 갈수록 잊어 자기네의 내력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눈부신 활약눈부신 활약상이 남아 있는 기록은 안시성 전투이다. 당태종의 당군은 요동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많은 공성기구를 사용해 안시성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래서 당태종은 60일 동안 50만을 동원하여 성을 내려다보고 공격하기 위해 성의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게 했는데 토산이 무너져 안시성 성벽을 치는 바람에 성벽 일부가 붕괴되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이때 고구려군 결사대가 일제히 돌격하여 당군을 물리치고 토산을 점령해 버리고 주변을 깎아 나무를 쌓아 불을 놓고 지키니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기록은 이 장면을 '이때 성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백 명의 용사가 뛰어나와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듯 당나라 2만 기병을 산 아래로 팽개치고는 오히려 토산을 차지해 버렸다'고 적고 있다. 이 검은 옷의 용사들이 조의선인이었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의 조의선인은 3만여 명에 달했고, 그 수장은 연개소문이었다고 한다.조의선인의 교육내용조의선인은 선비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문무겸전의 인재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유년의 어린 나이에 선발되어 신체발달에 부응하는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과 교양을 통하여 보다 완벽한 심신의 능력을 갖게 된다.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이 부딪치는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을 갖도록 조련한다. 을파소나 명림답부, 을지문덕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모두 조의선인들이다.고구려 제22대 안장왕때의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던 을밀선인 문하에는 조의선도 3,000명이 다물방지가를 부르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한다. (다물:"되물린다"라는 뜻으로 단군조선시대의 태평성국으로 복고하겠다는 의지를 뜻함) 단군조선의 국자랑 혹은 천지화랑제도가 고구려에 와서는 조의선인 제도로, 백제에서는 무절(일본의 사무라이로 이어짐)로 발전했으며, 신라상을 섭취하여 세속오계를 수양의 지침으로 삼고 국가에 보국 충사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여 우수한 자를 택해서 국가 관료로 등용하는 신라 고유의 독특한 교육단체이다. 그래서 평화시에는 사회적 지도자를 기르는 수양단으로, 유사시에는 전사단의 역할을 갖는 청년 단체였다. 이를 통해 지리적·정치적으로 불리는 여건을 극복해 나갔다.화랑의 기원은 삼한시대 소도를 지키던 선량한 무사에서 온 것으로서 그 때의 선이라 칭하던 자이다. 화랑은 상고시대 힘세고 순결한 젊은 소도지기로서의 ‘선인’과 고구려시대 학문과 덕망 그리고 인격을 갖춘 태학의 ‘조의선인’처럼 우리 선조들이 바라던 이상적 인간상 중의 하나였다. 이는 조선시대의 ‘선비’나 ‘군자’의 상으로 이어졌고 현대사회에서 기대하는 교육적 인간상으로 표현되는 ‘전인’에 해당한다.최남선은 화랑을 부루 교단이라 하였는데, 그는 “부루는 상고조선의 고유한 신앙인 태양숭배, 곧 ‘밝의 뉘’가 변한 말이다.”고 하였다. 또한 신채호는 “ 화랑은 본래 상고 소도제단의 무사, 곧 그때에 선비라 칭하던 자인데 고구려에서는 조의선인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미모를 취한 화랑이라 했다.”고 하였다.조직체계국 선- 최고 책임자, 총단장, 미륵을 상징/ - 동의어 : 원화, 화주, 풍월주 등화 랑- 각급단장 - 역할 : 인격교육, 군사교육, 도덕교육, 인재발굴/ - 조건 : 진골 귀족출신으로 준수한 용모를 가진 15-16세의 남성중 선발문 호- 국부/ -진골출신 이하의 귀족자제낭 도- 단원, 문도 -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 가능- 승려낭도 1명 (종교적 의식 집행)화랑은 그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이다. 그리하여 많은 낭도들로 하여금 이 모범적인 청년인 사범으로 하여 얼마동안 그를 수행하는 동안에 아름답고 선량하고 완미한 인격을 양성하려고 하였다.이념화랑도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화랑도 사상과 성격에 대해서는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에 잘 표현되어 있다. : "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 교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즐기며, 산수를 유람. (삼국사기, 권4 하, 진흥왕 37년)또한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와 임신서기석,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살펴본 화랑도의 교육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신라의 화랑들은 기본적으로 유학의 경전을 학습하였다. 화랑들이 국가를 위하여 맹세한 기록인 임신서기석의 내용 :"... 또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서하였다. 시경과 서경, 예기를 3년 안에 차례로 배워서 익히기를 맹세하였다.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중 사군이충과 사친이효, 교우이신 등은 오륜에서 강조한 부자유친, 군신유의, 붕우유신 등의 내용과 같다. 화랑들에게 충과 효, 신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국가에 대한 충성을 중요시하도록 하였다. 세속오계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사군이충이다. 임신서기석: " 하늘에 맹세하건대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확실히 가질 수 있도록 하며.” 화랑들은 효는 충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세속오계에 포함된 ‘임전무퇴’나 ‘살생유택’등은 무사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와 기본적인 도덕성에 관한 계율을 정해 무사 교육을 하였다.화랑들은 진골의 자제들이었고 성장하여 신라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층이었기 때문에, 화랑의 교육은 지적인 면보다 구체적인 생활에 필요한 활동을 중시하고 주로 도덕적·정서적·신체적·사회적·군사적 훈련을 교육의 면에서 강조하였다. 즉 생활교육과정을 중심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교육 방법화랑도의 교육방법은 대체로 집단적이며 실제적인 경험을 중요시 하였다.도의 연마를 통해 심신을 단련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화랑들이 서로 도의를 연마하는 데에서 상경하순의 풍습이 생기고, 또 오상육예와 삼사육정이 세상에 널리 행하여 나갔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한 가악이라 하여 시와 음악을 즐기면서 감정을 순화하고 세속적 물욕과 소리를 초월하는 인간도야 면의 교육내용을 가졌다.산수오유, 무원부지라 하여 집단으로 활동하면서 산천과 명승지를 찾아다니면서 무술을 익히고 가무를 통해 정서를 도야하고, 지리를 익히는 과정에서 심신 했다.
    사회과학| 2011.08.02| 6페이지| 1,000원| 조회(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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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 및 표현하기 - 미술과 학습지도안
    지도시간장소미술실차 시1/2교육대상중 1-3학년생단원명감상 및 표현하기소단원명1-1.감상하기학습주제표현주의 그림의 재탄생학습목표1.표현주의의 대표주자인 뭉크의 작품을 감상하고 발표할 수 있다.2. 생각과 감정을 창의적으로 표현하고 이를 작가와의 생각과 비교 · 분석할 수 있다.3.뭉크와 그의 작품, 표현주의를 살펴보고 설명할 수 있다.교육자료교사표현주의 작품 및 뭉크의 작품 자료집, 프리젠테이션학생필기도구단계(시간)교 수 ? 학 습 활 동학습 형태지도시 유의점학습내용교 사학 생도 입(5분)학습 분위기 조성* 인사를 한다.* 출석을 확인한다.* 수업 진행에 대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한다.* 인사를 한다.* 수업 진행 방법을 제대로 이해한다.* 학습에 집중한다.* 소란하지 않도록 학생들을 집중시킨다.전 개(40분)감상하기(15분)* 뭉크의 여러 작품에 대해서 감상한다.(단, 작품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작품만을 제시.)- 불안- 절규(회화)- 절규(판화)- 병든 아이* 전체적인 색감과 분위기, 느낌이나 생각들에 대해 질문하고 발표시킨다.* 뭉크의 여러 작품에 대해서 감상한다.* 작품에 대해서 추측하고 새로운 제목을 붙이고 간단하게 감상문을 작성한다.* 작품에 대한 여러 생각이나 느낌을 발표해 본다.*프리젠테이션 자료 보여주기* 유인물 : 감상문 종이* 묻고 답하기* 교사는 학생들이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학생들의 여러 발표나 창의적 표현에 칭찬과 격려를 해준다.이론전개(20분)* 작가 소개 :뭉크- 성장 배경- 표현주의- 간단한 일화* 작품 설명- 불안- 절규(회화)- 절규(판화)- 병든 아이* 학생이 감상한 작품에 대해서 작가는 어떻게 표현했는지 다시 살펴본다.* 학습에 집중한다.* 작가나 작품에 관한 사항을 필기한다.* 설명식:프리젠테이션 및 간단한 판서.*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이 감상했던 부분들의 다른 점을 발견하면서 흥미를 가지고 수업할 수 있도록 전개해 나간다.형성평가(5분)* 형성평가 4문항을 학생들로 하여금 풀도록 유인물을 나누어 준다.* 학생들이 문제를 이해하고 풀고 있는지 살펴 본다.* 학생들은 문제를 풀어본다.* 궁금증이 있을 경우 질문한다.*유인물* 어떤 문제를 어려워하는지를 살피고, 이를 설명해 준다.정 리(5분)정리하기* 다음 시간에 진행할 수업과 준비물에 대해 설명한다.* 감상문을 정리하여 제출하도록 한다.*수업이 마쳤음을 알린다.* 다음 시간에 대한 준비물을 필기한다.* 감상문을 정리하여 제출한다.* 주변 정리를 깨끗이 한다.* 정리정돈을 깨끗이 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지도시간장소미술실차 시2/2교육대상중 1-3학년생단원명감상 및 표현하기소단원명1-2. 표현하기학습주제표현주의 그림의 재탄생학습목표1.뭉크 작품 중에서 하나의 작품을 선택하여 인물 및 배경을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2.재료를 다양하고 알맞게 사용함으로써 입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3.창의적이고 자신만의 개성을 살려 표현할 수 있다.교육자료교사표현주의 작품 프린트학생필기도구, 색연필, 물감, 파스텔, 나뭇잎, 쓰레기, 종이, 비닐, 돌,생활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들.단계(시간)교 수 ? 학 습 활 동학습 형태지도시 유의점학습내용교 사학 생도 입(5분)학습 분위기 조성* 수업 진행에 대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한다.* 재료가 잘 준비되었는지 확인한다.* 학습에 집중한다.* 수업 진행 방법을 제대로 이해하며 재료를 준비한다.* 소란하지 않도록 학생들을 집중시킨다.* 재료가 부족한지를 살피고 교사가 준비한 재료를 나누어준다.전 개(40분)배운 내용피드백(5분)* 뭉크의 여러 작품을 보여주며 간단히 설명한다.- 불안- 절규(회화)- 절규(판화)- 병든 아이* 학생들이 배경을 바꾸거나 그림 속 인물을 바꾸어 표현할 수 있도록 작품의 예시를 보여준다.* 뭉크의 여러 작품에 대해서 살펴본다.* 예시를 통해서 실습을 어떻게 해 나갈 것인지를 계획한다.*프리젠테이션 자료 및 예시 작품 보여주기.* 교사는 학생들이 잘 학습했는지를 확인한다.* 학생들이 창의적으로 실습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실기전개(30분)* 아이디어 스케치 및 작업을 진행시킨다.* 학생들이 여러 가지 각도로 아이디어 스케치를 전개하도록 조용히 돌아다니며 개인적으로 지도한다.* 재료의 사용이나 입체감이 잘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이를 보완해 준다.
    예체능| 2008.12.17| 4페이지| 1,000원| 조회(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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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명 감상문
    천명 감상문역사를 잇는 실, 민초 그리고 녹두 장군역사를 이루어가는 주체, 그리고 주인공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역사와 정치를 임금과 대통령, 관리와 국회의원이라는 지배층에 의해서 전개되어 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주체는 지배층이 아닌 민초이며, 맹목적인 복종과 순응이 아닌 개선하려는 의지와 노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사는 이 땅의 행복이 단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음악극을 반복해서 시청하게 되었습니다.제1부- 제 1장 프롤로그처음 장면부터 녹두 장군이 밧줄에 묶인 채 끌려가고, 많은 농민들은 이를 슬퍼하면서 음악극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녹두장군이 피 흘려 쓰러지던 백성들의 한을 풀었지만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지적+ 감상) 밧줄에 묶여 가마를 타고 끌려가는 부분에서 죄인을 태우고 가는 가마가 아니라 마치 상전을 태우고 가는 가마형태라는 것이 묶여진 밧줄과 동떨어진 느낌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처음부터가 녹두장군의 처형장면부터 그려졌기 때문에 왠지 결말이 실패와 비극, 그로 인한 부정적인 결말을 연상하게 했습니다.이어서 녹두장군 전봉준이 법관 앞에 서게 되고 농민혁명을 일으킨 이유와 정당성에 대해 설명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법관은 양반과 부자, 지배층의 입장에서 처벌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천명을 품었던 녹두장군은 죽음 앞에서도 담담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복례가 전봉준을 처음 만났던 날을 이야기하면서 그 날을 회상하면서 보은집회가 열리던 날로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생각해 볼 문제 + 감상) 아이러니컬하게도 법관과의 대화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영웅인 그가 양반과 부자, 지배층에게도 영웅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떠올리게 했고, 부자라는 지배자라는 양반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재물이 수탈되고, 살인되는 현상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부분 말입니다. 물메시지를 전하게 됩니다. 내용은 관리를 엄히 다스릴 명의를 두겠으니 양민들은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하여 대의를 어지럽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법헌께서도 아직은 때가 아님을 전하지만 녹두 장군을 비롯한 농민들은 이와는 다른 뜻을 품게 됩니다. 특히 전봉준은 혁명으로 개벽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감상) 고종의 말이 끝나고 법헌께서 때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해산하자고 했을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처지는 그대로이다."라는 부분이 번번히 속은 농민들의 심정을 잘 표현하는 듯했습니다. 번번히 눈속임 당하는 그들의 심정, 무능한 정치들, 변하지 않는 현실을 보게 했으며, 비단 그것이 그때 뿐 만 아니라 지금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제 3장 등소장두라는 백성을 통해서 조병갑의 비리와 부패를 고발하는 장면입니다. 조병갑은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쌀과 세금을 거두어 들이고 황무지 개간을 통해 무세경작을 주장하지만 이는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이유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또한 무분별하게 죄목을 씌워 이를 면제하는 의미에서 또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서 나라의 법이 있다 해도 소용이 없는 농민들의 신세를 보여주게 되었고, 백성들의 분노와 오욕의 세월, 그들의 봉기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게 됩니다.=> (미흡한 부분) 어떻게 보면 조병갑은 한 지방의 관리에 지나지 않았는데 전국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동학과의 연결이 좀 더 자연스럽게 전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지배 관리층의 무능함과 부패상이 전국단위로 일어나서 함께 뜻을 합쳐 동학이 만들어졌겠지만 조병갑의 비리의 사건으로 뜻을 모아 동학을 형성했다는 것은 전국적인 성격의 동학을 지역화 시키고 전개의 흐름에 있어서도 갑자기 무엇인가 지나가 버린 느낌을 줍니다. 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전국적으로 동학민이 생길 수 밖에 없었던 현실과 상황에 대한 원인의 미흡함으로 오는 오류 일 것입니다.하지만 그 당시 그러한 부패한 정치 가운히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조병갑을 처단하지 못했지만 억울하게 갇힌 백성들을 풀어주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라는 것이 모두가 행복하고 잘 사는 것의 그들의 목표임을 말해 주었습니다.하지만 법헌의 뜻을 저버리고 실행하는 단계라는 점과 이 과정이 다시 상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의 뜻을 실현하지만 실제로는 우두머리들의 뜻이 일치되지 않는 모순 말입니다.-제 6장 안핵사의 만행조병갑에 이어서 안핵사의 이용태에 대한 만행을 낱낱이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역적이 있다는 명목으로 마을을 습격하여 동학군이라는 명목으로 잡아가고, 재물을 빼앗았으며, 집 집마다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특히나 대사 중에서 값진 재물과 보물, 썩은 좁쌀 한 톨까지 빼앗으라는 대사와 아녀자들도 겁탈하는 행태는 백성들이 느꼈을 공포와 분노를 함께 느끼게 하였습니다.=> (감상) 이는 동학을 역 이용하여 백성들을 수탈하는 모습을 보게 하였습니다. 조병갑과 같은 관리들을 처단하면 관리들도 이를 본보기로 백성들을 돌보아 주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감과 동시에 백성들의 불안과 공포를 잘 나타내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가야만 했던 이유를, 가혹한 정치를 피해 산으로 들어가서 살아야 했던 한자 성어 가정맹어호를 떠올리게 했습니다.-제 7장 백산에서 전주까지이 부분에서는 동학의 강령을 잘 설명해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첫째 강령으로 함부로 죽이지 말것과 가축을 잡아먹지 말 것이며, 둘째는 충효를 바탕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왜놈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깨끗이 하라는 것이며, 넷째로 군사를 끌고 서울로 가서 권세 있는 권력자들을 박멸하는 것입니다.또한 복례와 복례의 아이를 통해서 온천지를 찾아 헤매고 다녀도 복례의 남편을 찾지 못한 안타까운 심정과 굶주린 상황을 잘 나타내 줍니다.=> (감상+ 좋았던 부분) 어떻게 보면 음악극의 전개가 복례라는 아녀자를 통해 사건이 유연하게 전개되어 마무리되는 과정을 주목해 볼 만을 때, 조금은 허탈해지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놓이게 되었습니다.하지만 시간성과 공간성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음악극이 사랑 받는 이유가 사건 하나 하나의 사실감과 현장감 있는 재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제 2부- 제 1장 외군입성청군이 들어오게 되고, 이를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군도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일본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조정에서는 동학 농민군의 진압과 전주성 회복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고 이를 위한 계책을 찾게 됩니다.=> (감상 + 비평) 이러한 와중에도 청군을 불러들인 대신을 벌주라고 하면서 당파싸움에만 눈이 먼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능함과 함께 자신들의 눈앞의 이익과 잘잘못에 급급한 모습이 비단 옛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그리고 왜 청군이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전개가 미흡하게 짜여졌다는 점과 일본군을 견제하는 방법 또한 자세히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지적하고 싶은 부분입니다.-제 2장 전주 화약한양에 청나라 군사, 제물포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한나라에 다른 두 나라의 군대가 들어와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동학을 진압하기 위해서 홍계훈이라는 관리가 왔고, 일본군 철병을 위해 동학 농민들의 사항들을 들어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패전 개관 27개조와 동학 농민들의 안정과 생활 보장, 전라도에 53의 집강소를 설치하고 이를 동학에서 다스릴 수 있도록 합의를 보았습니다.=>(감상) 어떻게 보면 이것은 우리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견제를 위한 하나의 방패 임을 보고 지금 당장의 현실에만 급급한 당시 관리, 지배층 그리고 임금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동학의 조건들을 들어준다고 하는 모습이 조금은 억지스러운 느낌을 받게 하였습니다.-제 3장 집강소 시대집강소 설치로 인해서 백성들은 살 맛나는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부패한 탐관오리들이 쫓겨났으며, 부호들의 횡포를 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양반상놈 구별 없고, 노비 문서가 불 태워졌다는 것입니다.하지만 녹두 장군은 개벽의 세상은픔, 고난에 다져졌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더욱 의연해 질 수 있는 면모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제 5장 남북적 연합군남쪽. 북쪽에서 외군 진멸을 외치면서 보국 안민 제폭구민 큰 깃발 흔들면서 동학군이 논살벌로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환호하는 함성소리 하늘과 땅을 진도하게 되었고, 외군 진멸을 위해서 가자고 말합니다.9만이라는 동학농민들의 숫자에도 불구하고 일본군들은 연발총, 기관총 사격으로 적군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제 6장 우금치 전투전야밤이나 낮이나 가리지 않고 동학 농밀들은 싸웠습니다. 그리고 녹두 장군 전봉준은 하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이 시대가 지워준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소원함에도 농민군들은 일본의 신식무기에 쓰러지고, 사멸 당하고 전패하는 사태까지 오고야 말았습니다.=> (감상) 이제까지 노력과는 상관없이 결과는 비극적이고 낙관적이지 못하다라는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마저 없었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그리고 전봉준 장군의 대사에서 이 시대가 지워준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천명임을 말하는 장면에서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제 7장 아. 우금치여농민군들은 삶과 죽음을 잊은 듯이 하나 둘씩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깃발만은 쓰러뜨릴 수 없다며 끝까지 지키려는 농민의 마음이 간절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깃발은 농민들의 힘이었고, 결단코 쓰러뜨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총을 맞고도 안간힘 썼으나 결국에는 쓰러지고 맙니다.이때 그의 아내 복례가 등장하며, 모든 농민이 쓰러진 것을 보고 한탄하게 되고, 슬퍼하며 자살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나타나고, 모진 바람 몰아쳐도 눕지 않는 들풀처럼, 폭풍 한설 눈에 덮여도 다시 피는 들꽃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녀는 살기로 결심합니다. 이로써 살아남는 것이 백성들의 천명이며, 죽어가던 자들, 죽은 자들의니다.
    독후감/창작| 2008.12.12| 6페이지| 2,000원| 조회(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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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우하우스와 금속 공예 디자인
    ((장신구 공예론))바우하우스와 금속 공예 디자인서 론 ----------------------------------------------------------------■ 바우하우스의 이름과 의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고등 조형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합쳐서 창설했고 바이마르에서 학장으로 있으며 새로운 대학 수준의 고등 교육기관을 지칭한다.바우하우스라는 이름은 ‘집을 짓는다’는 뜻의 ‘하우스바우’를 구성하는 단어의 도치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분명하고 독자적인 실체를 가리킨다. 이 학교 시설은 건축을 위한 집으로 간주되고 목적은 그 건물에 속하는 공예업체를 다시 규합하고 구성원의 단결을 굳건히 하는 것이다. 기술의 견습과 각자가 맡은 부분을 가지고 총체가 되는 건축 작품의 관심으로 운영되는 전문학교인 것이다.중세 문화를 참고로 바우하우스는 당시에 더욱 풍부한 의미를 갖는다. 바우하우스는 물론 건축가들의 집이다. 그러나 그곳은 그 어떤 건축교육을 유도하기 위한 곳이 아니다. 염두에 둔 것은 바로 사고방식인 것이다. 대성당이 신앙이 머무는 장소이고 장인과 예술가 공동체의 손에서 나오는 걸작품인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건축되는 건물은 반드시 공동의 애정과 기쁨의 행위에서, 그리고 심미적인 감각의 공유 속에서 탄생하게 되어 있다. 예술가 혹은 장인 각자는 자기의 전공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기의 일을 통해 실행하고자 하는 공동의 대 작업에 합류해야 하는 것이다.본 론 ----------------------------------------------------------------■ 시대적 상황과 바우하우스 ■단지 십사 년에 걸쳐 지속되어 오는 동안 이 학교는 설립에서부터 외부적으로 모든 방면에서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적의와 열광이 이 학교의 사회적인 방향, 교육 방법, 경제계와의 관계 앞에서 맹위를 떨쳤다.당시 시대 상황에서의 이 학교는 당시의 움직임을 따르고, 당시의 위기를 받아들인다. 1919년, 이 학교는 일차세계대전에 이어 독일에서 혁명의 투쟁이 한전이 한창인 인구 칠만의 이 도시로 옮겨진다. 새로운 건물들, 예산, 상업적인 계약, 모든 것이 잘 진행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31년 가을 시의원 선거에서 나치당원과 민족주의자들이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고, 일 년 후 시의회에 의해 폐교가 표결된다.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시도, 다시 이전, 이번에는 베를린의 한 폐쇄된 공장으로 겨우 육개월 간의 집행유예를 위하여. 그리고 1933년 4월, 이제 권력의 최정상에 이른 나치들이 최종적인 폐교를 결정한다.그 짧은 기간 동안에 바우하우스가 독일 사회에 나타나는 모순에 끊임없이 종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전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사적인 한계에 포함되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가항력적인 정세급변에 상당히 밀착되어 있기까지 하다. 1924년까지의 인플레이션과 1930년까지 경제 안정 그리고 결국 반민주세력의 등장과 동시에 엄청난 실업의 증가, 물론 이런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바우하우스의 원칙적 기능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바우하우스와 인물 ■바우하우스의 역사는 취임 후 각각 이 년씩만 재직했던 한네스 마이어와 미스 반 데어 로에보다는 거의 십 년 동안 학장직을 수행한 발터그로피우스와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정치적인 변화가 학교를 점점 파멸로 이르게 하는 것을 화해와 양보로 존속시켜 보려고 애쓴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노력을 침묵 속에 간과해 버려서도 안 될 것이다.이텐, 클레, 칸딘스키, 모호이 나지와 같은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초빙된 명망 높은 예술가들의 후광은 마침내 바우하우스의 실제 성격의 이해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유동적인 환경 속에서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발명인 대담한 건축의 실현과 실용적인 오브제들로 바우하우스는 근본적인 모더니즘의 모태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학교는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낸다는 명성을 획득한다. 그것은 기념할 만한 실용미의 장소, 엄격한 선과 기하학적인 상상력의 성역으로 받아들여졌다.역사적인 사실성은 더욱 멀어졌고, 이상한 사건들은 더욱 불분명해졌으며, 오류와 시시한 너무 폭넓게 감염된 확신들을 몹시 통탄스러워 했었다. 이 점에 관해서 1971년에 루시아 모호이 나지는 가장 널리 유포되어 있는 오류에 대해서 인상적인 종합 평가를 내렸다. 그녀는 바우하우스에 걸려 있는 판단이 좀처럼 정열이나 감정으로부터, 때로는 신비주의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만일 객관적인 가치 판단을 내리고 싶다면 당신을 조르고 있는 이 우주 전체로부터 조금씩 떨어져 나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원으로의 복귀 ■19세기까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그 시기에 유렵에서는 일상용품의 대량생산을 정확하게 보장해 주는 도구로서 기계의 전환이 인간의 모든 물질문명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결과 현상을 유지하려는 수공업 분야는 기계공업과의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경제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제품의 품질에 대해서도 경쟁이 붙였다.장인과는 달리 실업가는 사실상 기계가 만들어낸 물건들 하나하나의 품질을 관리할 수가 없다. 수공업적인 생산에서는 수공 작업과 그 결과 사이, 즉 재료에 형태를 주려는 의지와 거기서 생겨나온 형태 사이에 확립되는 통일성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획일화된 제품에는 결여되어 있다. 제품의 가격을 낮춰 주는 대량생산은 제품의 미적인 질을 희생해서 얻어진다.약 1850년경부터 수공업과 기계공업간의 대립은 이렇게 해서 기교와 미, 기술과 예술 간의 갈등의 길을 가게 된다. 인간과 환경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모든 분야는 이러한 갈등에 영향을 받는다. 굉장한 토론이 그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해 보려고 시작된다.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연속된 오랜 경험 위에서 바우하우스는 다만 하나의 단계를 구현할 뿐이다. 그리고 이 단계는 보다 이전의 다른 단계와의 관련하여서만 분명하게 그 진상을 잘 드러내게 된다.■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 ■건축은 그에게 거대한 장식의 총체를 실현하게 해 주기 때문에 ‘전형적인 미술’로 보였다. 그러나 그가 건축에서 붙들고 싶었던 것은 모든 미술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이룰 수 있는 총체고 제안했다.이러한 생각들은 1894년까지 윌리엄 모리스의 수많은 글속에서 되풀이 주장된다. 더불어 그는 그의 아틀리에에서 중세의 명장처럼 가구, 채색유리, 철과 금은 세공품, 대중들이 사용할 값싼 벽지 등을 생산한다. 그는 북 디자인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위해 인쇄소를 연다. 마침내 그는 새로운 것을 고안해내고 직접 작업도 하면서 교조적인 예술의 서열을 실증적으로 무너뜨린다.영국에서 윌리엄 모리스는 이렇게 장식 미술을 고찰하는 방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의 생각은 미술가와 장인간의 융합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고, 미술가의 대열 속에서 장인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며, 거꾸로 미술가에게 장인의 모든 지식을 다시 되살리도록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혁명의 움직임과 동시에 일차세계대전 직후에 꽃을 피우고, 바우하우스의 초기 몇 년을 뚜렷하게 인상짓는 예술의 개혁운동에 늘 붙어 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산업미술의 형편없는 조잡성에 대한 구제책을 모색하면서 그는 사회주의를 알게 되었다. 그는 대중들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노동자들의 조건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그는 사용된 재료 각각의 특유한 효력을 재발견하게 하면서 소위 말하는 실용미술에 중대한 공헌을 한다. 그에게 있어서 재료는 작품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목재를 모방한 벽지라든가 인조 대리석을 만들기 위해 목재를 쓰는 것은 부적합하다. 달리 말하면 제작된 물건들은 소재와 형태가 사용목적이나 기능과 조화 되어야 한다. 예컨대 일상적인 물건에는 지나친 장식도 하지 말고 값비싼 재료도 쓰지 말아야 한다. 왜냐면 그 사용 목적의 의미마저 상실될 수 있기 때문이다.예술과 미의 관점에서는 필연적으로 불가피한 인간 노동의 기계화를 거부하지 않았다. 또한 중세의 경제 구조로 되돌아가자고 권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현재에 과감하게 합류하고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도록 과거의 관념화된 시각과 관계를 끊는다. 그는 이러한 미래가 인간 해방의 의지에 의해 뚜렷이 알려지기를 바란다.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전문적이고 사회적인 행동을 끌어냈던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역사 ■바이마르에서 출발한 바우하우스에서는 요하네스 이텐, 라이오넬 파이닝거, 폴 클레, 오스카 슐레머, 바실리 칸딘스키 등이 교육을 담당하였다.초기에는 공예학교 성격을 띠다가 1923년에 이르러서야 예술과 기술의 통일이라는 연구성과를 평가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로피우스와 이텐 사이에 대립이 생겨 이텐이 바우하우스를 떠난 뒤에는 모호이너지가 후임으로 참가하였다. 이 때부터 비로소 교육방침이 정착되어 바우하우스의 특색으로 자리 잡았는데, 교육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예비과정에서 반년 간 기초 조형훈련을 받고 토목·목석조각·금속·도자기·벽화·글라스그림·직물·인쇄의 각 공방으로 진급한다. 거기서 형태교사에게 조형 이념을 배우면서 공작교사에게 실제적인 기술을 배워 익히는 것이다.1925년에는 경제적 불황과 우파의 출현, 정부의 압박 등으로 폐쇄 위기에 처했으나 데사우시의 주선으로 시립 바우하우스로 재출발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데사우기로 부른다. 이 시기부터는 이미 종합적 안목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였기 때문에 각 공방에서 3년의 과정을 마친 다음에는 모든 것을 통괄하는 건축과정으로 넘어갔다. 바이마르 시절의 졸업생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하면서 바우하우스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생산방식에 따른 디자인 방식의 도입은 물론, 공업화를 추구해 실제로 산업계와 제휴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26년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교사로, 공업시대 특유의 구조와 기능미가 잘 나타난다. 그리고 1925년부터 《바우하우스 총서》 14권을 간행하여 디자인 사고의 형성에도 기여한다.1928년 그로피우스가 떠난 뒤에는 스위스 건축가 한네스 마이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바우하우스는 다시 한 번 그 성격을 바꾸게 된다. 마이어는 바우하우스의 형식주의적인 면을 공격하고, 민중에 대한 봉사야말로 디자인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건축이 모든 의미의다.
    예체능| 2008.10.26| 7페이지| 1,500원| 조회(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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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현대 장신구 디자인의 흐름
    한국 현대 장신구 디자인의 흐름? 개 요①-①현대에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생활에 여유가 생김에 따라 미적인 면을 더욱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장신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으며 과거 의복의 보조역할이었던 장신구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미를 추구하는 장신구, 그 자체로서의 주체적인 존재로 부각되고 있습니다.보석을 이용한 장신구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로써 일반서민들에게는 사용을 금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경제적, 사회적 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이러한 금지법은 사라지게 되어 일반 대중들에게도 사용이 일반화되었습니다. 그 예로 목걸이에 있어서 보식류의 대중화 경향은 신분과 권력의 표시가 아닌 단순히 장신구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현대 추상예술의 영향으로 20c 중반을 넘어서면서 디자인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장신구의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목걸이는 순수한 미의 추구로 인해 장신구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①-②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거의 50여 년 간의 공예를 일반적으로 현대공예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지 하에서 근대 공예와의 연계성이 결여된 채로 현대 공예가 이행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곧이어 발발한 6.25 전쟁과 6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개발에 의하여 한국의 공예도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습니다. 대학에서 정규 공예 교육을 받은 공예가가 배출되고 60-70년대 외국에서 유학한 교육자들에 의해 서구식 공예교육이 도입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는 현대공예에서 실험적이고 서구화된 경향의 작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기점이며 전통성과 현대성이라는 두 분야가 서로 상치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전통적인 공예의 가장 특징적인 경향인 실용성이 현대공예에서는 약화되면서 전통적인 영역과 디자인의 영역, 그리고 예술의 영역이 상호 공존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곧 이것은 오늘날 조형예술 작업들이 점점 더 개념화되고 있는 추세임을 의미합니다. 그 중 디자인은 멀티미디어와 과 단절되었습니다. 그리고 70년대 중반부터 대학에서 강의한 많은 공예가들은 유학파로서 서양의 공예, 디자인 경향을 직접적으로 전파하였다. 그래서 공예교육이 우리의 전통 계승에 치중하기 보다는 점점 더 서구화되는 데 일조하였습니다.60년대와 70년대 중반에 진행된 급격한 공업화 과정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은 제기되어 디자인 교육기관, 디자인 단체, 디자인 진흥기관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기능과 다량생산을 충족시키는 공업디자인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가 6.25이후 중흥을 위한 디자인 제품 개발의 일환으로 공예가 교육됨으로써 또 다른 측면에서 한국 공예의 위상 정립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1970년대 이전은 ‘장신구의 부재시대’ 시기라고 표현됩니다.70년대 이후로는 수출을 위한 디자인 개발에 학계, 기업, 정부 등 각계에서 각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반면 전통·전승공예 영역은 대부분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데 그치고 있으며, 현실적으로도 실용공예로서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통·전승 공예는 실용화된 공예품이라 할지라도 그 생산구조가 매우 취약한 편이며 가격 또한 대중적이지 못하여 호응을 별로 얻지 못하고 대부분이 감상용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80년대 이후에는 순수미술 지향적인 경향을 보이며 실용성보다는 감상적·예술적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순수미술의 개념과 역사를 공예 자체가 수용하기에는 그 과정이 현저히 달랐음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한국 공예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공예의 예술적 경향은 고도의 기술과 조형감각, 작가의 창조성 등에 근거한 자연스런 현상으로 파악됩니다. 그러나 전통의 맥을 잇기 위한 노력이 전승 공예계에 필요하듯이 현대 공예 또한 작가 의식과 조형관에 대한 연구가 요구됩니다. 또한 공예의 오브제적 표현에 대한 관심이 활기를 띠었습니다. 오브제 예술이 공예계에 적지 않은 창작 열의를 제공하였으나 공예가들 스스로의 문제의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서구 미술의 표현경향을 답습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비약적인 세계화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으며, 이것은 컬러 TV방영과 브랜드 도입의 자유화와 함께 일반 국민들의 보석장신구에 대한 안목을 크게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수입 완제품이 급증하고, 저물가, 저금리, 저환율의 3저 시대로 접어들면서 수출이 어려워지자 내수 기반이 중시되었습니다. 또한 합리적인 가격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종로3가와 예지동 시장이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1990년대 세계의 귀금속 장신구 업계에 3색 칼라와 합금과 유색보석의 조화라는 최첨단시대가 도래하면서 모든 세미나, 정보, 브랜드 발표회 등에서 귀금속 장신구의 선과 색조가 유행의 가장 중심적인 개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청담동에 로데오 거리라는 말이 생겨나고 과소비 억제라는 말에는 지금까지 재래시장에서 파는 상품으로 여기던 악세서리가 전개되기 시작하여 토탈패션의 바람이 일반 시민들한테도 서서히 뿌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14K를 주재료로 하는 큐빅 지르코니아 합성석과 다양한 유색보석류를 소재로 한 준보석 코너가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1991년의 많은 성장세를 반영하듯 원석 판매 전문업체들이 속속 생겨났습니다. 귀금속 장신구 업계에서는 공격경영, 물량위주경영이 최우선정책이 되었습니다.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은 앞으로 시장경제원리에 충실한 자유경쟁체제가 기본적인 경쟁원칙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또한 유통시장의 개방을 예고하여 유통업계가 교육을 강화하고, 개방에 대비하여 준비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었습니다. 1994년 ‘세계화’라는 단어가 크게 부각되면서 백화점이나 장신구 업계에서는 유럽, 홍콩 등의 여러 외국 브랜드를 한 이미지로 묶어서 매장으로 만드는 매장의 구성이 유행하였습니다. 1995년에는 합리적인 가격대의 브랜드가 많이 수입되며, 원석시장의 확산과 신세대 지향의 신규 브랜드의 참여와 함께 귀금속 장신구 시장이 확산되어갔습니다.1990년대 후반기를문제가 없다면 원산지가 후진국이라도 이제는 거부감을 갖지 않습니다. 감성적으로 차별화를 하고 합리적인 소비형태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넷째, 모든 연령층은 평준화입니다. 나이로 소비대상을 구분하던 시대가 지나고 있습니다. 결혼한 주부라도 미혼여성 못지않은 감각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연령보다는 좋아하는 컨셉의 브랜드를 선택하는 소비자가 많아지면서 연령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다섯째, 에콜로지의 지향입니다. 지구의 환경문제는 선진국, 후진국을 막론하고 갈수록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모든 상품의 방향이 이런 사회적인 요구를 반영할 것이고 앞으로 에콜로지는 영원한 테마가 될 것입니다.?-?디자인의 현황생활 여건에 따라 그리고 시기에 맞는 장신구의 제작으로 많은 제품을 만들었고 사용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디자인 형태는 온화하면서도 그 조형성이 대담하고 아울러 우아함을 볼 수 있는 형태입니다.각종 금속 장신구에 나타나는 조화된 형태의 아름다움이나 고도로 발달된 기술의 발휘는 사회적이면서 시대적인 것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적 감각에 대한 자신들의 감수성이나 발달된 기술의 도입과 그것을 구사 할 수 있는 역량이 나타나 당시의 문화 발달상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즉 금속 장신구는 사회적인 여건의 추세, 종교적인 양상의 차이, 전반적인 문화수준의 변화 등이 작용하여 시대에 따라 생산 대상품이 달라지고 표현 역량에 차이가 생기며 또한 같은 물건이라도 표현에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이것이 곧 시대적인 양식이고 또 시대적인 특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금속 장신구에 대한 미의식은 우리나라 혼란기에서 갑작스런 외국 문화 도입의 영향으로 민족 고유의 전통을 망각한 채, 특산품을 가장한 각종 제품은 외국의 것을 모방하는데 지나지 않은 제품들이 나오므로 상실되어 가고 있다. 즉 한국의 현대 장신구 디자인의 대부분은 외국의 디자인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 작품에 대한 모방 작품들이 대부분 나타났으며 기하학적적 사대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디자인 사대주의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외국 디자인 업체에 대한 선호를 불러 일으켰고, 그로 인해 한국 디자인업계의 위축, 외국 디자인의 무분별한 모방과 그에 따른 표절시비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디자인의 정체성과 독창성이 결여되었음을 의미합니다.이러한 문제점들은 디자인 철학의 부재와 문화에 바탕을 두지 않은 생산성 위주의 경제성장에만 힘을 집중시켜 왔던 결과이며, 이 면에 감춰져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문화중심 산업으로의 전환과 시장 경제의 자유화 속에서 많은 변화가 요구되고 있습니다.1) 디자인의 정체성과 독창성사회는 그 사회의 독특한 전통적인 가치를 수립하게 되며 새로운 과학기술에 의한 사회의 변화는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게 됩니다. 즉 전통 없는 혁신은 존재할 수 없고 혁신 없는 전통은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정지된 상태로 머무르게 됩니다. 디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이 없는 디자인은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혁신이 없는 디자인은 시대에 뒤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디자인의 전통과 혁신의 적절한 조화에 의해서만 보다 가치 있게 창출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국가에서 진행되는 디자인의 정체성, 또는 독자성, 주체성 등이 내포되고 있으며 이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독특한 특성의 정체성은 경쟁력과도 직결됩니다. 상품을 고를 때 이미지가 좋은 나라의 것을 선호하게 되는 것처럼 특정 브랜드와 이미지가 선택을 좌우하게 됩니다. 그만큼 정체성의 확립은 이미지 재고와 마케팅 효과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렇지만 하루아침에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한 나라가 갖고 있는 총체적인 역량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집적됐을 때 비로소 가시화 할 수 있습니다.아쉽게도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디자인의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산업화 과정에서는 주로 기술경쟁력 확보에 주력하느라 디자인에 니다.
    예체능| 2008.10.26| 7페이지| 2,000원| 조회(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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