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기능과 역할-비트겐슈타인에 관련하여목차.Ⅰ. 서론.Ⅱ. 본론.2-1. 모든 철학은 언어비판이다.1) 세계를 언어로써 이해하는 방법, 언어 논리의 이해.2) 원자론적 관점의 오류와 포기.3) 전환과 발전.2-2. 언어라는 수단을 통한 전투.1) 게임.2) 상자속의 딱정벌레.2-3. 인간에 대한 전문가적 판단Ⅲ. 결론Ⅰ.서론.“진리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등의 문제는 우리가 풀어낼 수 있는 것인가. 최초의 철학자에게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는 숫자의 철학자들이 도전했지만, 저 문제들을 풀어내기란 요원해 보인다. 인류가 두발로 걷기 시작한 이래로 풀어낸 적이 없는 저 문제들은 과연 풀리기는 풀리는 것인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문제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현재에 이르기까지 저 문제들에 도전한 많은 철학자들은 저 문제들에 대해서 각자가 나름대로 해답을 내놓고 있다.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서문에서 밝힌바, ‘종래의 철학자들은 사고할 수 있는 것과 사고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한계를 명확히 하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말하여 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철학은 저런 질문들과 그에 답하려는 시도가 왜 잘못된 것인가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논리에 주목하여 밝혀내고 철학자들이 다시는 그러한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존의 철학자들은 하나의 언어나 말에 대응하는 어떤 본질적인 단 하나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보아서 언어가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을 주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본질”이나 “존재”, 혹은 “통일”과 같은 단어에 대한 과도한 열망에 사로잡혀 모든 개별적인 낱말들과 문장들에 하나의 공통된 기능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무한정 작동하여 그릇된 가정과 그릇된 결론으로 철학적 혼란을 야기하였다.저런 오류를 범하여 기존의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잘못된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더 이상 명백히 하고 있다. 우리는 사물이 사실을 구성하지 않는 어떤 한 사물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말로써, “사과”라거나 “포도”와 같은 단어 하나로는 우리는 어떤 것도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사물은 사실 내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단어는 명제 내에서만 의미가 있다.) 따라서 세계의 최소 구성단위는 사실이며, 언어의 최소 구성단위는 명제이다.비트겐슈타인은 ‘명제는 현실의 그림이다. 명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은 현실의 모델이다’)라고 말했다. 명제는 구성요소는 원자명제이다. 원자 명제는 그 명제 자체로써 다른 명제를 더 이상 추출할 수 없는 명제로써 단 하나의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 명제이다. 또한 “비가 오거나 오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라는 문장은 “비가 온다”라는 명제는 “비가 오지 않는다”는 문장을 앞서서 설명한 것과 같으므로 동어반복인 명제다. “비가 오면서 오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언제나 거짓인 모순된 문장이다. 언제나 참인 동어반복이나 언제나 거짓인 모순은 뜻이 없으며, 진짜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어야 하므로 위와 같은 문장은 명제라고 볼 수 없다.명제는 원자명제의 복합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원자명제는 단어들로 구성되며,) 사실의 구성요소인 원자사실은 사물으로써 구성된다.) 명제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단어들은 아무렇게나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식으로 하나의 명제를 구성한다.) 일정한 방식이란 원자사실과 원자명제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는 원자명제는 원자사실의 모델로써 원자사실의 뎨신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러한 일이 가능하것이위해서는 원자사실의 모델인 원자명제가 원자사실 자체와 공유하는 무엇모델인것이다.이다. 결국 언어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단위인 원자명제와 원자사실은 서로 대응관계에 있는데, 이 대응관계에서 명제는 사실의 뎨신 나타내고 있다. 이때 명제는 사실의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것이다. 이사실이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구조적 형식만으로 뎨신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로, 철학적 명제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철학은 학설이 아니라 활동이다.2) 원자론적 관점의 오류와 포기.비트겐슈타인이 만들어낸 것은 전통적으로 제기되어온 철학적 문제 모두에 대한 일체의 대답을 회피하려는 책이었다. 철학은 오래된 물음에 대한 새로운 대답을 제시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런 오래된 물음에 대한 새로운 대답을 제시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런 오래된 물음들이 잘못 만들어 졌고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발생한데 지나지 않는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사라지고, 철학의 문제들은 단칼에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은 색채의 문제에서 커다란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논고에서는 “이것은 빨갛다”와 “이것은 초록이다”라는 문장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고 각각의 문장에서 서로를 도출해 낼 수 있기 때문에 이 두 문장은 원자명제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색이라는 것은, 특히 물감을 섞다보면 드러나는 색채현상은 물리적인 스펙트럼-파장의 장단에 따른-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의 고민은 아래의 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예를 들어, 특정한 시간 T에 특정한 장소 P에서 우리 시야 가운데 R이라는 색깔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명제를 생각해보라. 나는 이 명제를 'R P T'라 쓰고, 당분간은 그런 발언을 계속해서 어떤 식으로 분석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체 생각을 중단하겠다. 그렇다면 ‘B P T'는 시간 T에 장소 P에 있는 색깔 B라는 말이 되는데,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나 일상생활 속의 우리 모두에게 "R P T이며 B P T이다“는 일종의 모순(단지 거짓 명제가 아니라)이라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이제 정도에 관한 발언이 분석가능하다면--예전에 내가 그렇게 생각했듯이--우리는 색깔 R에 온갖 다양한 정도의 R이 포함되어 있지만 B는 하나도 없으며, B에는 온갖 다양한 정도의 B가 있고 R은 하나도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 모순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서 정한 공식에 따르면 그 어떤 분석도 정도에 관한 발언을 배제할 수 없다. 그델이 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하였으나, 이는 결국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세계에 대해 의미 있게 말할 수 있게 되는데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된다.“이책은 파랗다”라는 문장이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을 반영하되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체계 내에서 그 의미를 보장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색채어의 의미를 알게 될 때 파란색만 따로 떼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색채어들과 더불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의 문장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체계로서의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원자 명제가 모여서 복합명제가 되고 복합명제가 모여서 하나의 언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로서의 언어가 먼저이고 그 구성요소인 명제들은 체계 내에서 일부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논리는 문법으로 발전하였다. 문법이라는 표현은 논리 외에도 다양한 언어의 요소들, 구성원자들이 맺고 있는 관계들을 제어하는 규칙들을 의미하고 있다. 결국 어떤 표현이 문장 내에서 어떤 문법의 지배를 받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써, 언어가 원자론적 관점에서의 단일하고 정적인 논리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법적 규칙의 지배를 받는 동적인 체계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는 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무엇으로 보지 않고 규칙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활동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2-2. 언어라는 수단을 통한 전투.1) 게임.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이제까지의 철학적 문제들이 언어의 논리를 오해한데서 생긴다고 하였다. 그래서 시도한 해결책은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지만 이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완전히 방향을 틀어 언어 특유의 논리라는 것이 도대체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해 알아보려 하였다. 그는 ‘일반성에 대한 갈망’ 때문에 철학자들이 혼란에 빠진다고 하였는데, 이 ‘일반성에 대한 갈망’은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논리-철학 논고』에서 모든 명제에 공통되는 단일한 형식이 있을것는 없다. 빨강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상 속에 색상표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상상속의 색상표를 단어와 연결되는 대상에 비교하는 것이다. 숫자에 관해서는, 1이나 5라는 말이 실제로 갖고 있는 의미를 가지려면 정수의 전 체계가 필요하다. 만약 셈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공동체에서는 1이나 5라는 단어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또 다른 형태의 언어게임은 보다 더 원시적인 것으로써 건축가 A와 조수 B를 상정한다. A는 건축용 석재들을 가지고 건물을 짓는데, B는 각종 석재들을 A에게 순서대로 건네주어야 하며 그들은 어떤 한 언어를 사용한다. A가 석재를 가리키는 낱말들을 외친다.) 이러한 단순히 낱말들로 이루어져 있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언어들은 각각 하나의 완전한 의사소통의 체계이다. 실제로 A가 낱말 하나를 외치는 것만으로도 B는 A가 원하는 바를 알 수 있으며 그의 지시에 따를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언어게임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복잡한 형태의 언어도 사실은 이런 단순한 형태의 언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개별적인 대상들을 지칭하는 단어들로만 이루어진 언어에 또 다른 요소들이 덧붙여짐으로써 언어는 그 복잡성이 증가함을 보여준다.)언어게임이라는 개념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신이 주장했던, 명제의 논리적 형식을 조사함으로써 언어 전체의 구조를 조사한다고 한 생각을 비판한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언어 형식은 단언문, 의문문, 명령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고 단어의 용도도 수도 없이 다양하다. 또한 그 다양성은 고정되어 딱 잘라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새로운 유형들이 생기면 다른 것들은 낡은 것이 되어 사라진다.) 또한 다양한 언어의 사용, 다양한 언어게임들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적인 무엇을 찾으려하지 말고 각각의 언어게임에서 볼 수 있는 유사성에 주목하라고 한다. 이러한 유사성을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발견되는 유사성에 비유하여 가족유사성이라고 부른다.) 같은 논리로써
*석굴암-천년의 신비**석굴암-천년의 신비*● 목 차1석굴암의 역사석굴암의 구성과 배치, 사상2석굴암에 담긴 지혜3석굴암의 수난4석굴암 해석5*석굴암-천년의 신비*1. 석굴암의 역사다른 나라의 여느 사원에 있는 조각보다 강도가 높은 화강암을 사용.인공 석굴로서 고대 인도나 중국의 석굴과는 큰 차이.경도가 높아 섬세한 조각을 하기 힘든 재질임에도 불구, 모든 불상은 그야말로 완벽할 정도로 섬세하고 우아함.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보 제24호*석굴암-천년의 신비*(1) 석굴암의 유래『삼국유사』에 의하면 석불사 라고 불리던 석굴암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이 전생의 어머니를 위해 건립한 절이다.설화에 의하면 그는 전생에 가난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홍륜사에 땅을 보시하고 재상 김문량의 집에 환생하였다. 그는 다시 태어나서도 대성이라 불리웠으며 전생의 어머니까지 모신 드문 효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생의 어머니를 위해서 석불사를 세웠다고 한다.1. 석굴암의 역사*석굴암-천년의 신비*(2) 석굴암의 의미석굴암은 석가모니가 정각. 즉,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가시적인 건축과 조각으로 재현한 것.※ 석굴암의 조성자와 조성동기 등에 대해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상세한 것으로 보이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그대로 적용하여 김대성이 효성에 의해서 발원하여 조성한 것. 사회적 측면에서는 동쪽을 방어하며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의 차원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1. 석굴암의 역사*석굴암-천년의 신비*1. 석굴암의 구성2. 석굴암의 구성과 배치석굴암 들여다 보기전실비도주실*석굴암-천년의 신비*석굴암 배치도2. 석굴암의 구성과 배치2. 석굴암의 배치도10대 제자상사천왕상감실상 (2개 도난)금강역사팔부중십일면관음보살보살상, 천부상전실비도주실본존불*석굴암-천년의 신비*팔 부 중2. 석굴암의 구성과 배치천가루라건달바마후라가아수라긴나라야 차용*석굴암-천년의 신비*금강역사역사금강2. 석굴암의 구성과 배치*석굴암-천년의 신비*사천왕상증장천광목천다문천지국천2. 석굴암의 구성과 배치*석굴암-천년의 신비*10대 제자상2. 석굴암의 구성과 배치아난탄우바리가전연수보리목건련사리불가 섭부루나아나율라후라*석굴암-천년의 신비*보살상의 머리를 잘 살펴보세요 !!십일면관음보살상2. 석굴암의 구성과 배치*석굴암-천년의 신비*보현보살문수보살범천제석천보살상, 천부상2. 석굴암의 구성과 배치*석굴암-천년의 신비*감 실2. 석굴암의 구성과 배치*석굴암-천년의 신비*본존불좌상2. 구성과 배치에 담긴 사상전실과 비도는 네모꼴로 땅과 세속세계를 상징 팔각기둥은 하늘. 즉, 법계로 들어가는 일주문을 상징. 주실은 원의 꼴로 하늘과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 원형의 주실에 둥근대좌로 원속의 원을 의도적으로 나타냄*석굴암-천년의 신비**석굴암-천년의 신비*3. 석굴암에 담긴 지혜1.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석굴암의 본존불이 바라보는 방향은 동남 30도이며 동짓날의 일출선과 일치한다.*석굴암-천년의 신비*2. 석굴암의 통풍구1) 감 실감실과 감실을 받치고 있는 벽석 사이에는 틈이 생긴다. 이러한 틈은 석굴암 내부의 정체층의 공기순환을 위한 통풍구감실 틈을 이용한 통풍구3. 석굴암에 담긴 지혜*석굴암-천년의 신비*2) 광 창광창 석굴의 원형은 본래 개방구조 였으며, 출입구의 아치형 천장 바로 위의 제1단 천장석의 자리에 광창이 있었다고 추측한다 .3. 석굴암에 담긴 지혜*석굴암-천년의 신비*3. 석굴 밑으로 흐르는 샘물석굴암 바닥 밑에 흐르는 감로수는 석굴암 바닥을 12℃ 정도로 항상 유지. 내부로 들어가는 공기는 상온(대략 20℃)보다 낮은 바닥쪽으로 끌려가게 되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바닥에 정체하면서, 바닥의 모든 습기를 빼앗아 결로현상 방지.3. 석굴에 담긴 지혜*석굴암-천년의 신비*4. 석굴의 외벽흙과 잘 다듬어지지 않은 돌들로 이루어져 석굴암의 내부와 외부의 공기순환이 원활.3. 석굴암에 담긴 지혜석굴암 외벽을 통한 공기순환*석굴암-천년의 신비*4. 석굴암의 수난1913.10∼1915.9 - 두께 2m 콘크리트 외벽으로 발라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와 칼슘의 해독으로 치명상. 샘물을 다른 곳으로 방출되도록 구조 변경. 광창, 감실 뒤의 환기창 사라짐. 1917년과 1920년 - 누수 현상을 막기 위해 2~3년 보수 공사를 하였으나, 푸른 이끼가 끼어 1927년 증기세척. 1961년∼64년 - 콘크리트 이중 돔을 씌우고 석굴 전실에 목조건축물을 세우고, 결로로 인한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냉각장치를 설치.*석굴암-천년의 신비*4. 석굴암의 수난*석굴암-천년의 신비*4. 석굴암의 수난*석굴암-천년의 신비*5. 석굴암의 해석석굴암의 해석여지 석굴암은 석가모니가 정각. 즉,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가시적인 건축과 조각으로 재현한 것. 아미타불이 아닌 석가모니로 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석굴암의 보존문제 현재 석굴암은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의 보수공사로 인해 본래의 모습과 많은 차이를 두고 있다. 따라서 주실의 아치형 돌을 치우는 등 원형을 보전하는 노력이 요구 된다.*석굴암-천년의 신비*참 고 문 헌『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유홍준, 창작과 비평사, 1994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이종호, 영신사, 2001 『천상이 천하에 내려 깃든 석굴암』신영훈, 조선일보사, 2003 http://rus1917.new21.net/ http://blog.naver.com/kmbira?Redirect=Log logNo=150004479888 http://blog.naver.com/hansedong?Redirect=Log logNo=80015531141 http://blog.naver.com/himammo?Redirect=Log logNo=90007203942 http://www.seokjae.com/ http://cafe.naver.com/talkhouse.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60 http://www.cha.go.kr/cultural_info/infoMainList.action*석굴암-천년의 신비*{nameOfApplication=Show}
남한 산성Ⅰ. 서론Ⅱ. 본론2-1. 남한산성의 역사적 배경1) 남한산성의 기원2) 남한산성의 수축과 개축2-2. 남한산성에 얽힌 설화1) 벽력성의 정기가 얽힌 벌봉3) 매바위 설화2-3. 남한산성의 시설 및 건축물1) 성곽2) 옹성3) 암문4) 장대Ⅲ. 결론Ⅰ. 서론성이란 외적의 침입이나 습격에 대비하여 흙이나 돌로 구축한 방어시설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성은 적이나 해로운 짐승을 막는 원시적 방어물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후 농경·목축 등의 경제활동을 하면서 일정한 토지에 정주(定住)하게 되자 주거를 지키는 주거방어의 형태를 낳았고 주거의 집합체인 취락(聚落) 방위로 발달하였다. 목책(木柵))이나 해자등이 발전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성곽(城廓)은 내성(內城)을 의미하는 성(城)과 외성(外城)을 의미하는 곽(廓)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 즉 성곽은 일정한 영역안의 생활인들이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재해로부터 평안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받기 위하여 만든 인위적인 시설물을 말한다.성은 시대가 발전하고 그 위치에 따라 목적이나 기능, 형태가 달라졌다. 최초에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던 성은 성읍국가(城邑國家)의 단계에서는 희미하게나마 나라(國)의 의미를 띄었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본래의 방어기능에 더하여 왕권의 상징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러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본래의 목적보다는 오히려 왕권과 국가의 상징으로써의 성격이 더 강해졌다. 또한 토성(土城)보다 목책이 우선하였고,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무기가 발달하면서 돌을 쌓아 만든 성벽이 출현하였다.삼국시대 초기에는 토성이 주를 이루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석성(石城)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후 고구려가 북방의 민족들과 대립하며 쌓았던 견고한 성곽의 축성기법이 백제 신라로 전파되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보다 효과적인 축성기법이 정착되었다.우리나라의 성은 산성(山城)이 평지의 도성(都城)을 유사시에 대비하는 성으로 발달한 특징을 보인다. 평시에는 평지에서 생업에 동쪽으로 벌봉,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성의 내부는 완만하고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룬 까닭에 성을 공격하기는 어렵지만 방어하기는 쉬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성내에는 10여석의 쌀을 거둘 수 있는 논과 45개의 연못, 80여개의 샘이 있어 물이 끊이지 않아 많은 인원이 장기간 농성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다. 뿐만 아니라 남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내륙수운을 장악할 수 있는 위치이다. 따라서 남과 북을 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주요길목의 하나이며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반드시 선점해야 하는 지점이 되기 때문에 삼국시대를 남한산성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남한산성의 기원은 백제의 하남위례성이 기원이라는 설과 신라의 주장성이 기원이라는 설이 있다. 남한산성이 백제의 하남위례성이었다는 견해는 조선초기부터 있어왔는데, 남한산성의 입지조건과 백제의 여러 번에 걸친 천도로 인해 남한산성을 어느 샌가 백제의 왕도중 하나일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홍경모(洪敬謨))가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서 말하기를,애초부터 한산 위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없건만 세상 사람들이 사실을 살피지 아니하고 곧장 이르기를 백제의 고도는 남한산에 있으며 남한산성은 온조가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백제사는 기록이 소략하여 문헌에 근거할 것이 없으니 어떻게 온조왕의 고성임을 정확히 알겠는가? 그래서 특히 첫머리에 써서 의심스러운 바를 알리고 성은 산 아래에 있었고, 그 산위에 있지 않았음을 밝힌다.홍경모는 백제 도읍이 지금의 검단산 아래인 광주의 고읍이라고 하여 온조의 고성은 이산산성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의 행궁 뒤편에서 백제토기편이 출토되었으나 그 수량과 질적인 측면이 소략하여 오늘날, 백제의 하남위례성이 남한산성이라는 설은 힘을 잃고 있다.신라의 주장성(晝長城)이 기원이라는 견해는 성의 규모에 근거한 것인데, 삼국사기에서는 주장성의 둘레를 4360보라고 기록하고 있다. 1보를 6척으로 보고 송낮으로 수리하고 방비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전략적인 필요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축(修築)과 개축(改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조선시대에는 전략적 거점으로써의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초기부터 부각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남한산성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남한산성을 이용하기 위해 현황을 파악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를 통해 당시 개축이나 수리는 안했어도 군사기지로 이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중인 1596년에 서애 유성룡이 남한산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으나 실제 남한산성이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광해군 13년으로, 이때에서야 한양을 방어하는 ‘보장지지(保障之地)‘로 삼아 성을 쌓았다고 하였다.남한산성이 본격적으로 축조하기 시작한 것은 인조대에 이르러서이다. 이때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왕이 공주로 옮겨가는 급박한 사정에 직면하였다. 이에 따라 도성을 방어하고 유사시 왕실의 피난처로써 남한산성의 수축이 본격화 되었다. 인조 2년 7월에 시작된 공사는 인조 4년 11월에 완공되었다.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농성하였는데 청군은 봉암과 한봉, 검단산 등을 장악하고 홍의포 등으로 화포 공격을 하여 조선은 화포라는 공성무기의 위력을 실감하였다.) 이에 따라 이후의 축성은 대포를 쏠수 있는 시설이 기본적으로 구비되었으며, 축성기법도 화포의 공격에 견딜수 있는 형태, 또는 적이 화포공격을 할 수 없도록 한다는 전술에 입각해서 축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옹성을 구축하고 포혈을 설치하였으며 성들도 크고 다양한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하여 남한산성은 인조대에서 정조대에 이르기까지 150여년간 10여차례의 증개축이 이루어졌다.2-2. 남한산성에 얽힌 설화.1) 벽력성의 정기가 깃든 벌봉.남한산성 동장대지 동북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가 포개어져 가파르게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나있다. 이 다."고 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크게 화를 내면서 꾸짖기를, "네 말과 같이 강과 도성이 서편에 있으면, 남한산성의 산세가 응당 남북이 길고 서북이 짧을 것이거늘, 네 어찌 반대로 서를 길게 하고 남북을 짧게 그려왔는가. 빨리 다시 그려 오라. 만약 명대로 하지 않으면, 네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이에 용골대가 겁을 먹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서 남한산성의 성곽, 바위, 골짜기, 언덕 등을 빠짐없이 살피고 지도에 그렸다.청 태종은 용골대가 그려온 지도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벌봉이라는 바위가 있는 곳이다. 이 바위는 천상 벽력성의 정기가 깃든 바위이다. 이 벽력성은 남극성이 범하게 되면 망하고 만다. 그런데 나의 주성이 곧 남극성이니, 만일 조선 국왕이 벌봉을 안에다 두고 성을 쌓았더라면, 우리 청나라가 쉽게 남한산성을 공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벌봉이 성 밖에 있다. 장래에 우리가 조선을 공격하면 조선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 청나라 군사가 산성 밖에 있는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먼저 깨트리고, 벽력성의 정기를 말하면 산성을 쉽게 함락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조선 침략을 결정하였다. 마침내 청 태종은 조선을 침략하였고, 그의 예상대로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군사를 이끌고 먼저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깨뜨렸다. 그랬더니 바위 위로 연기가 나면서 벌봉에 깃들었던 벽력성의 정기가 흩어져 마치 벌떼와 같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한달 후 청 태종은 남한산성을 공략하여, 마침내 인조의 항복을 받아 냈다.후일에 나라에서 이 벌봉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는 다시는 임금이 무릎 꿇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벌봉 밖에다 성을 재차 쌓았다고 한다. 지금의 벌봉이 마치 쪼개진 것처럼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은,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벌봉에 어린 정기를 날려 버리려고 깨트렸던 자국이라고 한다.2) 매바위 전설남한산성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회 장군이 책임을 맡았던 지역의 성곽을 살펴보니, 아주 견고하게 쌓아져서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곽 공사를 함에 있어서 부정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심혈을 다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회 장군의 목에서 나왔던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기 시작했다.원래 이 매바위에는 실제로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남한산성을 둘러보다가, 바위 위의 매 발자국을 보고 신기한 일이라 여겨서 그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일본 관리가 떼어갔음을 말해주는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2-3. 남한산성의 시설 및 건축물.1) 성곽성곽은 기본적으로 원성과 외성으로 구분된다. 원성은 1624년(인조 2년)에 수축(修築)한 한산성의 영역으로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본성을 의미한다. 이외에 외성으로는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이 있고, 남쪽에 신남성이 있는데 이곳에는 동·서 두 개의 돈대가 구축되어 있다.2) 옹성(甕城).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겹의 성벽을 둘러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만 하고,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지만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옹성이라기보다는 치(雉)나 용도(用道)), 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록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지지자료(地誌資料)에 이것들을 옹성이라고 명명하고 있음을 볼 때, 옹성의 개념은 단순히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이라기보다는 체성벽의 보호를 위하여 이중으로 성벽을 구축한 시설을 의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남한산성의 옹성은 모두 능선으로 연결되어 방어에 취약한 지점에 축조되어 있다. 옹성은 치성과는 달리 모두 체성(體性))과 직접적인
현대문학작품론 8조개밥바라기 별목차Ⅰ. 서론Ⅱ. 본론1. 자화상.2.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3. 변한다는 것.Ⅲ. 결론Ⅰ.서론70~80년대 황석영이 이뤘던 문학적 성과는 빛나는 것이었다. 신춘문예에 소설과 희곡이 동시 당선되는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등단했던 황석영은 1974년 첫 창작집 『객지』를 펴내면서 단숨에 70년대 리얼리즘의 대표작가로 떠올랐다. 이 소설집에 포함된 「객지」, 「한씨 연대기」, 「삼포 가는 길」 등은 지금도 리얼리즘 미학의 정점에 이른 걸작으로 인정받는다. 같은 해 신진작가로서는 파격적으로 한국일보에 「장길산」 연재를 시작했다. 장장 10년간 연재가 이어지면서 해방 이후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 받았던 이 작품은, 조선시대의 의적 두목을 주인공 삼아 70~80년대의 억압적 분위기에 작지만 시원스런 문학적 숨통을 틔워주었다.「객지」와 「장길산」에서 보여준, 서민 대중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그의 삶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유신 시절 공장 견습공으로, 노가다 꾼으로, 문화운동가로,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농민운동가로 뛰어다니며 민중의 삶을 배우던 그는, 1980년 5월을 광주에서 겪고, 80년대 내내 진보적 문화운동에 앞장섰다. 급기야 1989년에는 통일운동 차원에서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 수차례 면담했으며,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제목의 방북기를 발표하여 그 편집자가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다. 황석영 역시 독일과 미국을 유랑하다 1993년 귀국과 함께 체포·수감 되었다. 하고 싶은 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거침없이 실천하며 살아온 황석영은 명문고교를 중퇴하고 머리를 깎겠다고 산사를 찾아들어갔을 때부터 그 생각이 분명했다. 해병대에 입대하여 베트남전에 뛰어든 것도 그렇고, 그 베트남 전장에서 방금 터진 포탄 구덩이 속으로 몸을 처박으면서 `이번에 살아남기만 한다면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온몸을 바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는 것도 황석영다운 일이었다.2008년 2월, 황석영은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서 「개밥바라기 별」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정보의 물결의 시대에 ‘블로그 문학’으로써 인터넷으로 진출한 것이다. 『개밥바라기 별』은 6개월 동안 인터넷에 연재되면서 많은 네티즌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으며 인터넷 매체는 가벼워서 본격문학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통념을 깨트렸다. 『개밥바라기 별』은 이러한 의미에서 책 만으로서의 문학, 그리고 종이로 인쇄된 문학을 읽는 독자만이 아닌 네티즌으로서의 독자에게까지 한 발짝 다가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으며 황석영의 문학적 힘인 건강한 한국적 문학, 특히 누구나 한 번씩 겪어내는 고통인 성장기를 담은 건강함이 잘 드러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황석영으로써는 새로운 시도인, 인터넷 연재에 대해 네티즌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쪽에서는 황석영이 이외수가 부러운 것이 아니냐고 부정적인 내용의 말을 떠들었지만 연재가 종료될 즈음 블로그의 누적 방문자수는 180만을 넘어섰으며 현재 200만의 누적 방문자수를 자랑하고 있다.본고에서는 황석영의 최근작이며 본인 스스로 자전적 성장소설이라고 규정한 개밥바라기별 을 위주로 황석영의 문학을 살펴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오늘을 사는 것이라 말하는 작가의 말처럼 자전적 성장소설인 『개밥바라기 별』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청춘을 되새겨 보도록 하자.Ⅱ. 본론1. 자화상.개밥바라기 별이란, 금성이 새벽녘 동쪽에 나타날 때에는 ‘샛별’이라고 하지만 저녁에 나타날 때는 ‘개밥바라기 별’이라고 한다. 식구들이 저녁밥을 먹고 개가 밥을 줬으면 하는 그 즈음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책에서는 이른 시간에 뜬 별이라 방황하는 사춘기, 그 때를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개밥바라기 별』은 주인공이 어렸을 때부터 스물이 넘어서까지 방황과 성장과 사색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영길, 인호, 상진, 정수, 선이, 미아의 이야기와 유준의 이야기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그들 각각의 눈으로 묘사되고 그려진다. 등장인물이 이렇게 여럿이면서 또 모두가 1인칭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 또한 이 책의 특기할 만한 것들 중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나’인 유준은 황석영 자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점의 순간순간의 교체는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었고, 급변하는 그 시대의 현실을 더욱 잘 반영해주고 있다. 소설『개밥바라기 별』은 주인공 준이 겪는 길고 긴 방황은 실제 작가 자신의 청춘의 기록이기도 하다. 황석영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일용직 노동자와 선원으로서의 생활, 입산, 베트남전 참전에 이르는 자신의 ‘가슴 속에 묻어둔 상처’를 헤집어 그 시절과 다시 대면한다. 주인공 준이 겪는 길고 긴 방황은 실제 작가 자신의 청춘의 기록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간 가슴속에 묻어둔 상처를 헤집어 그 시절과 다시 대면 한다. 고등학교 자퇴, 방랑, 일용직 노동자와 선원으로서의 생활, 입산, 베트남전 참전, 방북, 망명, 투옥에 이르는 황석영의 실제 행보는 한 개인사로는 버거운 불행이었다.그는 고교시절 4.19의 현장에서 총 맞아 죽은 친구를 껴안았고, 한일회담 반대시위의 현장에 있었고, 그로 인해 구금된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일용직 노동자를 만나 그를 따라 전국을 떠돌았다. 공사판에서 뒹굴며 함바 밥을 먹고,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밤새 오징어를 잡고 격랑에 흔들리는 갑판에서 소주와 함께 밥을 먹었다. 빵공장에서 일하고, 입산한다고 행자생활도 했다. 19세의 어린 나이에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입선하여 등단했지만, 생과 세계에 대한 그의 갈증과 허기는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지나간 시간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상처를 남겨놓기 마련이다. 늘 현재에 충실하려 애쓰지만, 돌아본 자리에는 늘 크고 작은 흉터가 남아 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간다. 어쩌면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더 아프고 곪아터진 후에 아물었어야 할 상처들을, 두렵고 겁이 나 서둘러 그렇게 묻어버렸던 상처들을 품에 안고서.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상처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렇게 서둘러 닫아버린 상처 안에, 사실은 잃어버린 꿈들과 붙잡지 못한 희망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도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개밥바라기별』은 성장소설이다. 작가의 말에서 그는 『바리데기』를 내놓고 나서 전혀 새로운 젊고 어린 독자들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작품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자전적 일대기에서 비롯하는 한 권의 성장소설을 탄생시킨다. 요컨대 『개밥바라기별』은 황석영 자신의 십대 시절의 방황기가 녹아있는 바로 그 시대, 그 젊은이들의 자화상이다.‘내게는 사춘기가 그런 것 같았어. 감기약 먹고 자다 깨다 하는 그런 나날. 막연하고 종잡을 수 없고 그러면서도 바라는 것들은 손에 잡히지 않아 언제나 충족되지 않는 미열의 나날.’)유준이는 비좁고 옹색했을 자신의 다락방을 잠수함이라고 부른다. 일상에서 종종 세상 사람들과 절연하면서 자신만의 '잠수함' 속에서 선장이 되어 깊은 침잠 속에 빠지고 싶었을 것이다. 미아의 방도 ‘윗목에 앉은뱅이책상 하나 놓였고 벽 주위에는 책이 일렬로 빙 둘러 세워져 있는 다락방’)이다. 두 사람은 이 공간에서 일상의 비루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2.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앙드레 지드는 이제 책을 던져 버리고 젊은이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미지의 세상도 좀 보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황석영은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한다. 공부를 잘 해야 하는 우리 사회, 돈을 잘 벌어야 출세를 했다고 하고, 돈이 최고인 이 세상에서 정답은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 모두에겐 얼마든지 각자에 맞는 해답이 있는데도 이 사회는 우리에게 그 정답만을 강요한다. 이 소설은 이에 대한 대답이다.소설의 시점은 시종 1인칭으로 일관된다. 하지만 시점을 추동하는 '나'라는 화자는 수시로 이동 교체되면서 다양한 시각을 만들어낸다. 전체적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더욱이 황석영 자신으로 투영된 유준이 서사의 큰 흐름을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준이의 친구 영길, 인호, 상진, 정수, 선이, 미아는 각기 또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각 인물들의 시점 교체가 반복되면서 동년배들의 사춘기 시절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더욱이 준이를 위시한 그들의 삶의 방식은 기존의 전통과 제도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함으로써 일탈을 꿈꾸는 데 있다. 무엇이 되는가보다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삶의 철학을 기치로 하는 그들의 방황은 바로 그 시절의 내 모습과 우리 모습을 담아냈기에 공감적이다.황석영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낸 유준이라는 인물의 존재성은 특별하다. 유준은 그만이 갖고 있는 방향성이 있다. 그것은 우정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도 아니며, 꿈과 희망을 향한 목적도 아니다. 그 방향성의 본질은 바로 나 자신이다. 항상 자기 자신으로 열려있는 유준의 머리와 가슴은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방황 시절의 자아상을 잘 보여준다. 이야기의 뒷부분, 대위 장씨를 통해 겪는 수많은 사람들과 경험들은 나 자신만을 향했던 방향성의 특질이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화하며 보다 높은 단계로의 '성숙'을 이뤄내는 계기가 된다.
한국사의 시대구분시대구분은 역사진행 전체를 어떤 시대적 특성이나 사건을 계기로 하여 발전관계들을 그 형식과 성격에 따라서 시기적으로 구분해 보는 작업이다. "역사 연구의 모든 노력은 시대 구분에 귀착한다."는 트뤨치(E. Troeltch, 1865∼1923)의 언급이나 "역사를 사유하는 것은 시대 구분을 하는 것이다."라는 크로체(B. Croce, 1866∼1952)의 주장은 시대구분의 중요성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는 블로흐(M. Bloch, 1886∼1956)의 저서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인생이란 너무나 짧고 지식은 획득하기에 너무나 방대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인류의 전체적 경험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역사학에는 석기 시대라든지 이집트학의 전문가가 있기 마련이다."라는 말에서도 비추어 볼 수 있다. 역사라는 학문은 매우 방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누어 연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곧 시대구분은 역사의 발전관계들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해 보기 위함이며, 학문적으로는 객관적 사실을 보다 더 깊이 역사적으로 인식하기 위함인 것이다.지금을 기준으로 먼 시대부터 가까운 시대까지, 즉 더욱 오래된 지점부터 덜 오래된 지점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면서 각 시대의 기준을 문명의 발전 단계에 맞추는 방법은 시대 구분이 처음 등장한 이래로 줄곧 유지된 방법으로, 지금도 주류를 이루는 방법이다. 이러한 구분법은 대개 고대와 중세, 근대의 삼분법으로 대표된다. 이에 덧붙여 고대 이전에 원시 시대 또는 선사 시대를 설정하기도 하며, 중세와 근대 사이에 근세를 설정하기도 한다. 또는 근대를 근대와 현대로 양분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법은 대개 시간에 따른 구분에 경제의 발전단계를 결합한 것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특히 랑케 사학에 바탕을 둔 근대적 사학이 정착하면서 삼분법은 기본적인 역사 서술의 체계로 자리 잡았고, 이후 현대라는 시기를 설정하면서 사분법으로도 사용된다.또 다른 방법으로는 국가에 따라 구분하는 방법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많은 국가는 긴 시간동안 유지되었으며, 조선이나 고려의 경우 같은 시대 중국의 국가와 비교하면 매우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따라서 한민족 또는 한반도에서 성립되어 유지된 국가나 정치 체제를 기준으로 역사를 구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각 시대의 특징이 정치 체제에 따라 상당부분 변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이에 한국사의 시대구분을 하며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한반도 내외로 세워졌던 국가에 따른 분류의 경향을 따르느냐, 시간의 흐름과 문명의 발전 단계에 따른 분류의 경향을 따르느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많은 의견이 있었으나 어느 한 가지 방법을 무시할만큼 사소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를 복합적으로 택하기로 하였다. 비록 이렇게 택한 방법이 이도저도 아닌 쪽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시도해보기로 하였다.두 번째로는 역사기록 이전의 시대, 즉 선사시대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느냐 하는 문제이다. 비록 그 비중이 약하다고 말할 수 없으나 한반도의 선사시대가 시간적 차이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세계사에서 말하는 선사시대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보고 한국사만을 다루는 것인만큼,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한국사를 고대, 중세, 근세, 근대(현대)로 크게 구분짓고, 국가의 흥망을 최대한 반영하기로 하였다.고대고대(古代)는 고조선의 건국 이후부터 고려가 건국되기 이전의 남북국 시대까지를 지칭한다.중세중세(中世)는 고려의 건국으로부터 조선의 건국까지를 지칭한다.근세근세(近世)는 조선의 건국으로부터 대한제국 성립까지를 지칭한다.근대(현대)근대(近代)는 대한제국 성립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하고 1945년 8월 15일을 현대의 시작지점으로 하였다.대체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나 근세의 종점을 구분 짓는 것에서 의견을 좁히기 매우 힘이 들었다. 근세의 개념은 근세의 개념은 서양의 근대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중세라고도 하기 어려운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시기를 편의상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고 근세의 개념을 넣지 않고서는 시대구분을 하는데에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근세를 사용하기로 하였으나 근세의 종점이 어디냐는 문제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원래의 의도대로라면 간단하게 한일합방 또는 8월15일 광복까지로 하면 되겠지만, 그 이전에 있었던 1876년의 개항, 사회·제도적으로 큰 변화가 가해진 갑오 개혁과 을미 개혁, 또는 동학농민운동 전후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문명의 발전단계와 국가에 따르는 분류 모두를 만족시키는 대한제국 성립을 기준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