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perations and Management report >>운영관리의 " The Goal "※ 내용을 순차적이고 핵심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나름대로 파트를 나누어 제목을 부여하고 이해하고자 한다. 쌍 따옴표 부분은 책에서 발췌한 문구이다.※ 더 골1. 기업의 목표 (part.1~part.5) - "Primary Goal"본격적인 내용 전에, 추천사를 읽었을 때 제목인 ‘더 골’이라는 의미를 어렴풋하게 추측할 수 있었다. 바로 정확히 기업의 목표를 아는 것이 가장 기본이 된다는 것이다. 주인공 알렉스 로고가 공장의 목표와 방향을 찾는 데에 90여 페이지가 할당된 것만 봐도 정확한 목표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업의 존재 목적은 이윤의 창출이라는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이를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지속적인 노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분석과 지표, 운영혁신을 통해서 기업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라고 생각한다.본격적인 내용을 들어가서, 3개월 안에 공장을 적자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내야 하는 알렉스 로고 공장장은 조립조차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주문번호 41427을 시작으로 공장의 고질적인 납기일 지연의 문제를 깨닫는다. 사실 나에게는 지연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업의 기본은 신뢰에서 시작되며 전체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지 않은 이상, 납기일 지연은 market share에 상당한 충격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일을 발단으로 하여 일회성으로 상황을 마무리 하지 않고 공장 전체 운영 변화가 절실함을 깨닫는다.결국 요나 교수님의 도움으로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할 목표를 깨닫는데, chapter 1~5에서 이를 가장 잘 표현하는 “제조공장의 목표는 오로지 돈을 버는 데 있다.”와 “돈을 버는 쪽으로 연결되는 모든 행위는 생산적인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는 비생산적인 것이 된다.”, 두 문장에 주목하고 싶다. 또의 지표들은 직접적으로 이윤 창출을 나타내지 않는다.덧붙여서 기억할 것은 각각의 단어들을 최적화 하거나 부분 부분의 공정들을 최적화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조직 전반에 대한 것으로 전체 시스템의 최적화를 추구한다. 따라서 “재고와 운영비용을 동시에 줄이면서 현금창출률을 증대”시켜야 한다.3. 사건의 종속성과 통계적 변동 (part.11~part.15) - “현금창출로 통하는 길”목표를 설정했다. 운영 방향에 대한 세 가지 지표도 구체화 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이를 적용시켜나가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조건 효율적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는 결코 달성하지 못한다. 도대체 이러한 목표와 지표들을 가지고 어떻게 생산과정에서 이익을 창출할 것인가? 이 때 이정표는 바로 ‘사건의 종속성과 통계적 변동’이다.알렉스 공장장은 아들과 함께한 하이킹에서 이 단어들을 이해하게 된다. 사실 나는 허비의 예가 없었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단어 각각의 의미보다는 통계적 변동이 결합된 종속적 사건들의 집합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 즉, 순차적인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동이 뒤의 과정으로 갈수록 축적되어 문제가 발생함을 뜻한다. 공장이 적자의 어려움을 겪은 것은 기계의 생산력이나 노동자들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재고량이 증가하면서 현금 창출이 되지 않고 재고를 공장에 쌓아두면서 운영비용이 증가하고 결과적으로 전체 시스템의 부조화 영향이 축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part.15에서 알렉스 공장장이 현금 창출의 장본인이 허비라고 깨달음과 같이,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허비’를 찾아야 한다.4. 병목자원(제약자원)과 비병목자원을 찾아라. (part.17~part.19) - “현금창출률과의 관계”이윤 창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체 시스템의 최적화’의 개념을 숙지하여야 한다. 그 의미는 생산능력과 수요의 균형이 아닌, “생산되는 제품의 흐름과 수용의 균형”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경제학 교재에서 가르치는 수요?공급의 법칙을 기본으로 생각해왔다. 이 진다.위의 부분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의 목표와 달성 기준을 가장 기본적으로 달성시킬 수 있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① 병목자원의 개념을 이해하고, ② 병목자원을 찾고, ③ 병목자원에서 해소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사용되지 않아 멈춰 있는 병목자원의 유휴시간을 절감하는 방법을 찾도록 했다.5. 병목자원의 활용 (part.20~part24) - “병목자원 과부하 덜어주기”결국 NCX-10와 열처리 버너가 병목자원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직원들이 함께 모여 여러 가지 제안을 했는데, 그 중에서 병목자원의 수요를 충족하는 방안이 굉장히 신선했다.난 처음에는 병목자원의 과부하를 덜어주기 위해 생산성을 높이려면 NCX-10을 더 구입하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계를 구입함에 따라 구매비용, 노동자들을 교육시키는 시간 등, 간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결국 이미 한참 구식인 기계를(즈메그마) 도입하여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 무조건 새롭고 기술적인 기계를 동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예전 것을 활용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하고 실질적으로 현금을 창출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예였다.방금 언급한 방법이외에도 어떤 방법이 있을까 고민해 보았는데, 사실 이 부분이 말은 하기 쉽지만 가장 어려웠다. 앞의 내용은 현금 창출로 이어지기 위한 문제 해결과 관련된 개념적인 부분이었지만, 여기서는 각각의 제조 현장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해야하기 때문이다. 위의 경우에는 부가적인 금전적 투자 없이 병목자원 능력을 향상시킨 것인데, 기존의 사용하던 기계를 폐기하지 않고 병행하여 사용하거나 굳이 병목자원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제품은 이 공정을 피하도록 조절할 수도 있다.6. 실행착오 그리고 오해와 편견 (part.25~part.26) - “작동은 가동과 다르다”알렉스 공장장과 그의 직원들이 납기일 지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안했던 ‘녹색과 적색 꼬리 결정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언제나, 언제나, 병목자원이 문제이자 해결책이었다!)따라서 비병목자원의 공정을 병목자원에 종속시켜 비병목자원의 여유능력을 유휴상태로 놔두어야 한다. 더 나아가 병목자원을 scheduling할 수 있다면, 공정 전체의 스케줄을 관리할 수 있게 된다.7. 작업량 변화 (part.28~part.30) - “총 생산시간 단축 효과”이 부분에서는 신선했던 것은 비병목자원의 작업량을 재분배하여 총 생산시간을 반으로 줄여 고객들의 주문에 빠르게 대처한다는 방법이다. 즉, 분할 납품을 하겠다는 말이다. 고객과의 계약 당시에 미리 합의만 되어 있다면, 각각의 공정을 신속하게 단계별로 행할 수 있고 급한 주문 시에는 유동적으로 조절 할 수 있는 여유도 가질 수 있다.또한 알렉스 공장장이 대량 주문을 받기 위해 부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소소한 비용에 대한 두려움으로 큰 이익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진리를 확인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비용이나 어려움을 피하고자 큰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나무를 넘어서 숲을 보자는 얘기이다.8. Management의 역할 (part.31~)결국 공장을 회생시킨 알렉스 공장장은 본사 임원들 앞에서 몇 가지 핵심을 언급한다. 요점을 정리하자면,① 기업의 목표 파악 ; 현금 창출(!!!)② 새로운 원칙들 ⅰ) 제품 생산의 흐름과 수요의 균형에 초점 맞추기.ⅱ) 병목자원 ⊃ 비병목자원ⅲ) 가동 ≠ 작동 ⇒ 가동의 효율성이 중요.ⅳ) 현금 창출과 관련된 작업성과 평가③ 5단계 시스템 ⅰ) 시스템의 병목자원을 찾아낸다.ⅱ) 병목자원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결정한다.ⅲ) 위 결정에 다른 모든 공정을 종속시킨다.ⅳ) 병목자원을 향상시킨다.ⅴ) 제 4단계에서 병목자원의 전체의 성과를 제약하지 않으면 다시 1단계로 돌아간다.ⅵ) 새로운 병목자원이 나타나지 않도록 한다.으로 표현할 수 있다.이 부분의 제목을 Management의 역할이라고 붙인 것은 위의 요점을 비롯해 위의 모든 내용을 관리자가일을 3주 정도로 요청되기 때문에 한 달 뒤의 수주 예측을 체계화 하는 데에도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하셨다. 주문 예측 정도에 따라서 부품 발주와 생산 스케줄이 결정되기 때문에 예측을 통해 앞으로의 계획이 세워진다.그냥 마구잡이로 부품을 구입하여 제품을 만들어 놓고 쌓아둔다면 결코 현금을 창출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제품의 생산 흐름과 수요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영업부서와 생산부서, 구매 및 자재부서가 함께 매 달 생산 판매 회의를 가진다. 처음에 회의를 시작했을 당시에는 25일을 회의 날짜로 정했었다. 그러나 추가 주문에 따라 수정을 할 시간이 여유롭지 않아 스케줄 구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20일로 회의 날짜를 변경했고 가장 안정적으로 예측하고 수정할 수 있는 15일로 회의시기를 결정했다.이 때 영업부서는 잠재적인 고객들과의 메일이나 전화 또는 직접 접촉을 통해 예측된 자료를 준비한다. 생산부서는 각 제품별 재고 현황을 파악하고, 구매부서는 부품재고와 발주 현황 리스트를 준비하여 다음 달 초까지의 생산을 회의를 통해 예측 한다. 부품 재고는 항상 정해진 minimum 수량을 기준으로 한다. 여기서 항상 관리자들은 각 부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2) 부품 발주와 입고아빠께서 언급하신 가장 큰 병목자원은 부품의 입고와 관련된 문제였다.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지만 알렉스의 공장에서 추구했던 것과 같이 잉여 재고가 없는 것이 특징인데, 재고는 minimum으로 보유하고 2주 안에 출하 될 주문만 생산하여 보관한다. 재고 창고가 따로 없을 정도로 최대 3일 내로 빠르게 출하한다. 그러나 부품을 관리하는 데에는 철저한 관리가 필요한데, 균일하게 주문이 들어오지 않고 보통 몰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품을 대량으로 비슷한 시기에 주문하게 되면 부품 조달부터 늦어지기 때문에 지체현상이 발생한다. 여기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첫 번째는 주 단위의 생산 스케줄 구성이다. 고객과의 계약으로
1. ‘굿바이 레닌’ 속에서의 시대적 배경-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부터 그 후 약 10년 간2.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1) 분단-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어 소련군이 동독, 서방 연합국이 서독을 나누어 분할 통치 → 냉전체제로 동서 양쪽에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 분단 공식화 → 1961년 8월에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세움(2) 전환기- 1969년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동방정책)을 추진하여 할슈타인원칙)을 포기 →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약 15년간 34차례의 협상을 통해 과학 기술, 문화, 환경 등에 관한 협력체계를 구축, 동 서독 간 민간인의 교류가 이루어짐 → 1982년 H.슈미트 서독 총리의 동독 방문, 1987년에는 E.호네커 동독 공산당서기장이 서독을 방문함으로써 통일에 일대 전기 마련(3) 계기1) 독일 외부- 고르바초프의 소련 개방과 개혁정책 실시 →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와 개방화2) 독일 내부- 1989년 가을 동독인들의 집단적인 서독으로의 탈출 (그 해 9월부터 10월 초 사이 10만 명에 달하는 동독인들이 헝가리, 폴란드, 체코주재 서독대사관 또는 동서독 국경선을 통해 서독으로 도망쳐 나옴, 동독 국민의 탈출 수는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22만 5천명에 달함) → 서독으로의 탈출을 거부하며 1989년까지 동독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격렬하게 반체제 민주화 시위 (자유선거, 언론자유, 해외여행 자유화 요구) → 동독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는 민주화 데모와 고르바초프의 압력 등으로 호네커 서기장은 18년 동안의 권좌에서 물러남 → 반체제시위는 격렬해졌고 11월 4일 1백만 명의 시위 군중이 동베를린에 모임 (공산정권의 퇴진과 자유총선거 주장) → 크렌츠 동독 공산당서기장은 11월 9일 하오 7시를 기해 드디어 베를린 장벽을 전면 개방한다고 선언3.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1) 동독- 90년 3월 18일 동독 정부 총선 실시 → 서독으로의 조기편입을 내세운 보수정당 독일연합이 4백 개의 의석 중 192석을 차지 (공산당은 66석) → 동독정부는 5월 18일 서독과 통화·경제·사회동맹의 창설에 관한 국가조약을 조인, 그 해 7월 1일 부로 서독과 경제 통합을 결행키로 함 (동독이 서독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 흡수)→ 8월 23일, 동독 인민회의는 동독의 서독편입일자를 1990년 10월 3일로 결정한다는 결의안채택 → 동독은 1990년 10월 3일 0시를 기해 서독연방에 가입됨 → 이후 2개월만인 1990년 12월 2일 통일독일에서 총선이 실시(2) 외교- 2+4 회담 :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 4차 회담을 통해 동독 서독(2)과 전승국(4: 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은 최종적으로 독일통일에 합의 → 2차 대전 이후 전승국과의 점령문제에 관한 최종적 합의가 이루어져 완전한 주권 회복4. 통일 이후(1) 내적 갈등 -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음 / 서독인들 눈에 동독인들은 게으름만 피우며 공짜를 바라는 ‘오씨(Ossi)’, 동독 사람들의 눈에 서독 인들은 돈만 밝히고 거만만 떠는 ‘베씨(Wessi)’※ 오스탤지어 [ostalgia←Ost+nostalgia]- 구동독 사람이 독일이 통일되기 이전의 동독 시절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굿바이 레닌 영화 이후 이 신조어가 유행하게 됨. 또한 이후 동독산 식품들이 시장에 다시 등장했고, 통일 후 찬밥 취급을 받던 동독의 자동차에까지 그 관심이 이어졌다고 함.① 구동독인의 70% 이상이 통일초기에 자본주의에 적응이 어렵다는 판단. 일부계층은 서독이 자신을 정복하였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민사당PDS)이 약진하기를 원함.② 매우 높은 구동독의 실업률 : 1990년 동독의 실업률은 2.9% / 서독은 6.2% → 2004년 동독 실업률 18%로 거의 두 배 이상, 점점 서독과의 차이가 벌어지고 있음③ 구동독 지역의 소득은 서독의 70%까지 좁혀졌지만 여전히 구 동독인들은 격차를 느낌④ 서독 인들은 과도한 통일비용의 지출로 인한 세금증가와 경제침체로 고통 (서독인의 41%가 계속 동독 재건에 돈을 쏟아 붓는 데 반대한다는 통계)⑤ 동독 정권하에서 교조적이고 타율적인 생활 방식에 길들여진 동독 주민들이 새로운 민주주의 제도와 시장 경제 질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음 (2등 시민)→ 구 동독인들에게는 “아직도 서독과 격차가 벌어져 있다”는 실망과 불안감 / 서독인들에게는 “언제까지 돈을 더 퍼부어야 하는가”라는 피로감이 ‘보이지 않는 장벽’ 형성(2) 정치적, 경제적 문제1) 정치적 과거의 청산 문제- 과거 동독 공산 정권에 의한 피해자와 가해자에 관한 것. 피해자 10여만 명의 복권과 보상을 위해 신청을 접수하여 조사, 처리하고 있으며, 공산당과 정권 기관 등의 권력 남용자로 분류된 6천여 명에 대해서는 사법 처리를 원칙으로 규정2) 동독 지역에서 행정, 사법 체제 구축 문제- 행정 분야에 있어 새로운 통일 독일의 행정 체계에 적합한 지방 행정 인력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동독 공무원을 대상으로 자격 심사와 재교육을 거쳐 이들을 재임용하거나, 일부 서독 공무원들을 파견, 전보하여 해결. 사법 분야에 있어서는 동독 지역 주민들의 법률적 보호와 사법적 공백 현상을 방지하고 새로운 사법 체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구동독의 사법 요원들을 재교육시켜 자격 심사를 거쳐 선별, 재임용하는 조치.3) 동독 지역의 경제재건 문제- 붕괴 상태에 있는 동독의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 통일 정부는 신 연방 주 경제재건 정책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동서독 주민 간의 생활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보조금뿐만 아니라, 동독 재건을 위한 시설 현대화와 신규 투자에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였다.4) 소유권 등 재산권의 처리 문제- 소련군 점령 시 점령군에 의한 토지 개혁으로 몰수된 재산권에 대해서는 보상을 원칙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해 가고 있으나, 그 후의 동독 정부에 의해 몰수당한 재산권에 대하여는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주는 것을 원칙으로 함에 따라 200여만 건의 반환 청구 소송이 제기.
▷ 용산 전쟁 박물관을 다녀와서 ◀◎ 전쟁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곳, 전쟁 기념관.“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PEOPLE THEY NEVER MET.”전쟁전시관에 가서 나를 제일 먼저 숙연한 마음이 들게 한 문구이다. 이것은 한국 전쟁에서 우리나라를 위해 싸운 여러 나라들의 연합군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위에 쓰여 있었다. 이미 내게는 천천히 전시관 건물 입구로 걸어오면서 빽빽하게 쓰여 있는 이름들을 보며 복잡한 생각들이 떠오르던 참이었다. 우리나라 국군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정말 많은 분들이 전혀 본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동양의 작은 나라를 위해 싸워주셨다는 것을 몸소 확인하고 있었다. 은은한 감동과 함께 우리나라의 슬픈 현실 또한 내게 다가왔다. 그 전까지는 단지 머릿속으로 만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 국가들과 이름들을 보니 마음에 느껴지는 정도가 달라졌다. 그런데 이 문구를 보니 정도가 심해져서 한 동안 이 문구를 보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마음이 찡~해지면서, 조용한 곳에 혼자 들어가서 이 기분을 더 느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그리고 외국인들이 지나가면서 자신의 나라가 한국 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국기가 새겨진 부분을 찾고, 그 밑에 참가했던 자국 국군들의 이름들을 훑어 볼 때, 왠지 모르게 그들을 의식했다. 또한 기본적으로 미국, 영국, 터키 등의 나라들이 참가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태국, 이디오피아, 인도,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스 등의 나라들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기둥들을 하나하나 지나면서 이 분들의 대한 감사함보다는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부담감이 생겼다. 이런 많은 희생을 뒤로 하고, 나는 단지 감사해 하는 것만으로 한국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이런 마음 상태로 인해 전시관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곳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관람을 시작하게 되었다. 넓은 홀을 지나서 여러 전쟁 당시 공을 세운 분들의 두상이 있는 호국 추모실에 먼저 들어갔다. 제일 먼저 마주친 분은 이달의 호국인물로 정해지신 ‘이상득 육군하사’의 흉상이었다. 이분께서 했던 일을 읽었는데, 그 일이 굉장히 충격적이면서도 감동적이었다. 당시 베트남 전장에서 날아오는 수류탄을 온몸으로 막아 다른 동료들은 구하고 자신은 장렬하게 산화하신 공적으로 을지무공훈장을 하사 받은 분이었다. 원래 ‘희생’과 관련하여 감동적인 실화에 매우 민감한 나로서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분이었다. 그래서 이분과 비슷한 일로 공을 세운 분들을 더 유심히 보게 되었다. 비슷한 공적을 세우신 분들로 강재구 소령과 이인호 소령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참 동안을 그 분들의 흉상과 공적을 읽고 서 있었다.그 다음은 전쟁 역사실이었다. 사실 이곳은 전쟁에 관해서 전시 했다기보다는 보통 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을 듯한 유물들이 많았다. 선사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유물들이 있었는데, 국사 교과서에서만 보던 간석기들을 비롯해서 청동기 시대에 우리나라의 독자적 특성을 보여주는 거푸집과 칠지도, 천마도, 기마 인물형 토기 등이 눈길을 끌었다. 밑에 설명되어 있는 짧은 설명을 보니 모형인 것들도 있어서 조금 아쉬웠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나로서는 절대 구분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임신서기석도 있었는데 생각보다 매우 작아서 커다란 비석을 생각하고 있던 나는 다시 한 번 빤히 쳐다보았다.두 번째 전쟁 역사실로 가기 전에 우리나라의 전쟁 역사 가운데서 유명하신 위인들의 흉상이 있는 곳이 있었는데, 직접 모형을 만져보며 내가 어떤 분들을 알고 있는지 되씹어 보았다. 이쯤에서부터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 전쟁 전시관에 대한 뿌듯함이 아니라, 스스로 느껴지는 관람 자세에 관한 뿌듯함이었다. 어릴 적부터 박물관이나 전시관에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가더라도 단체로 갔던 적이 대부분이었고 관람하면서도 특별한 생각 없이 훑고 지나갔었다. 그러나 확실히 오늘은 모든 것들을 다 자세히 보진 못했어도, 눈길을 끄는 것들은 자세히 확인하고 설명을 읽었으며, 멈춰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대부분의 한국 관람자와는 달리, 웃으며 휙휙 가볍게 보고 지나가는 외국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전쟁 역사실 두 번째 전시실에서도 계속해서 삼국시대, 고려, 조선, 일제 강점기 당시의 유물들이 있었다. 여기서는 첫 번째 전시실보다는 전쟁에 관련되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황산대첩비 탁본과 명랑 대첩비 탁본이 나름대로의 우리나라에 대한 나의 자부심을 불러 일으켰고, 난중일기를 보며 - 과연 진짜일까라는 생각을 강하게 해보았다. - 얼마 전에 방송되었던 ‘불멸의 이순신’ 이라는 드라마를 떠올렸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이용해 쌓아올린 수원 화성의 모형에 직접 올라가서 성을 확인했는데, 굉장히 잘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거중기를 어떻게 사용하여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방어하기에 굉장히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했고 반달모양으로 되어있던 성문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점점 전시실의 시대는 조선후기와 일제 강점기로 이어졌고, 결국 6?25 전쟁실까지 오게 되었을 때,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누군가 전쟁전시관을 제대로 둘러보려면 하루를 잡고 봐야 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직 이 전시관의 반도 보지 못했는데, 그 넓이에 지쳐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의 전시물들은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6?25 때의 유물은 왠지 모르게 나를 자극했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 전시 상황이 온전히 끝나지 않은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특히 이곳에 있는 북한의 유물들은 다른 것들과는 달리 편한 마음으로 관람할 수가 없었다. 요즘 주위의 남자 친구들이 군대에 가기 위한 신체검사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군대 문제가 사실은 지금 북한과의 대치 상황으로 인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시물 중에 민사심리전에 대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들을 통해서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전쟁 전단지들이며 귀순증 통행증들이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이것들이 매우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리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꼼꼼히 읽어보았다.그런데 나는 6?25 전쟁과 관련하여 각각 남, 북한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의 숫자에 놀랐고, 그 사람들 중에서 단 2명이 제 3국으로 보내지기를 원했다는 자료를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최인훈의 ‘광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더불어, 북한의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여 포로가 되기 전에 스스로 자결한 사람의 얘기를 보며, 당시의 어두운 분위기와 공포감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1953년, 김문길 소령이 조종사로서 북한 지역을 순찰하다가 다시 남한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승 장교가 권총으로 위협하며 월북을 강요했지만 끝까지 설득하다 결국 순직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이런 일들로 순직하신 분들의 나이가 대부분 20대 초반에서 20대 중반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감히 스스로를 그분들과 비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나도 당시의 상황에 닥쳤더라면 과연 어찌했을까 라는 의문을 품었다.이 용산 전쟁 전시실에는 독특하게도 모형들이 많았는데, 직접 들어가서 간단하게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들이 여럿 있었다. 70년대에 북한이 남한 기습 남침 준비를 위해 파 놓은 땅굴을 짧게 재현한 장소도 있었고 화성을 비롯해 그나마 가장 재미있었던 6?25 전쟁 피난 당시의 생활 모습을 재현한 거리도 있었다. 사실 즐겁게 체험하는 공간은 아니지만 바닥도 흙바닥처럼 재현했고, TV에서 볼 수 있는 당시 모습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기에 신기하면서도 웃으며 볼 수 있었다. 모형들 중에서 가장 사실적이었던 것은 해군 구축함이었다. 해병들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이 식당, 침실, 조종실 등이 있었고 특히 식당 의자에 앉아보고 침대에 누워보면서 해군에 대해 조금이나마 친근한 생각이 들었던 시간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오랫동안 걸었던 탓에 다리가 아팠던 나는 어린애처럼 침대에 계속 누워 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걸프 전쟁 연구 논문< 개요 >>1장. 문제제기“걸프전은 왜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가?”2장. 걸프전의 발생원인1절. 대내적1. 쿠웨이트의 역사적 상황2. 당시 이라크의 상황2절. 대외적1.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관계2. 당시 아랍권의 외교 관계3장. 걸프전 발발과 진행 과정1절. 이라크의 침공2절. 유엔 다국적군의 참전4장. 걸프전의 종식과 그 결과1절. 전쟁으로 인한 피해2절. 전쟁 이후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관계5장. 걸프전의 영향 및 의미1절. 쿠웨이트의 외교관계 변화2절. 의미6장. 결론? 주요일지? 그림< 출처 >>1장. 문제제기“걸프전은 왜 발생 할 수밖에 없었는가?”1980년대 후반, 미국과 소련이 주축이 되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냉전체제가 평화롭게 끝났다. 다행히 세계인들의 우려와 달리 제 3차 세계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동서간의 이념대립이 아닌 문화적인 요소와 국익 때문에 국제적인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걸프전은 냉전이 종식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함으로써 발생했다. 걸프전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대내적, 대외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왜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이해하고자 한다.2장. 걸프전의 발생원인1절. 대내적1. 쿠웨이트의 역사적 상황쿠웨이트는 최초 1756년 아라비아반도의 걸프지역에 국가체제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유목민들이 경계 없이 분산되어 생활)에서 왕국으로 탄생하였다. 당시 유목민의 실력파였던 앗 사바하 족이 주변의 부족을 통합하여 군주제를 채택하고 '쿠웨이트 왕국'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쿠웨이트는 당시 중동지역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걸프지역의 지배권을 추구하고 있던 오스만 터키에게 1829년 종주권을 인정하고 1852년에는 그 보호 하에 들어가기로 하였으며, 오스만 터키 바스라주의 한 지방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면서도 쿠웨이트는 내정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그 후 19세기 말 쿠웨이트는 영국을 보호자로 선택하였다. 당시 쿠웨이트 왕국을 수립한 사바하가와 이븐 라시도 가가 이 지역에서의 크 내 정세 변화와 연계되어 다시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국내정치가 점차 악화되자 걸프지역에서 세력판도가 변동되는 상황을 틈타 쿠웨이트와의 국경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후세인은 이와 같은 복합적 배경에서 쿠웨이트를 희생양으로 선택하였다. 쿠웨이트는 해묵은 국경문제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얻을 것이 많은데다 안보, 군사능력이 취약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1990년 7월 23일부터 쿠웨이트 국경부근의 유전지대에 전차와 장갑차로 무장한 최고 정예 부대인 공화국수비대 2개 사단 약 3만 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쿠웨이트도 전군에 비상사태를 발령하고 국경지역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가중시키면서 ① 루마일라 유전을 이라크 영토로 인정할 것, ② 이라크의 유전을 도굴한 배상금으로 24억불을 지불할 것, ③ 이라크가 쿠웨이트에게 진 부채 100억불을 탕감할 것, ④ 부비얀과 와르바 두 개 도서를 이라크에 할양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쿠웨이트로서는 이러한 이라크의 일방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2. 당시 아랍권의 외교 관계이란 대 이라크 전 당시 대다수의 아랍국은 이란의 강경 시아파가 공공연하게 아랍권회교혁명을 추구하려하였기에 그 방패막이로 이라크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8년 전쟁)이 종결되자 아랍국들은 더 이상 위협을 느낄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며 발을 빼기 시작하였고, 후세인은 이에 매우 분노하였다. 그러나 이라크에 더 치명적이었던 것은 전후 서방투자가들의국영기업투자가 무산되었다는 것이었다. 전후복구는 물론 전쟁부채를 갚을 길이 막막해진 후세인은 정치적 활로를 찾기 시작하였고, 가시적인 행보가 ACC(아랍공동협력평의회))결성이었다.또한, 이라크, 요르단, 이집트, 북예멘 등이 가입한 이 기구는 GCC(걸프공동협력평의회))의를 겨냥하고 부유한 나라가 아랍 형제 국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실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겨냥한 행보였다. 사우디단을 선봉으로 병력 10만 명, 구 소련제 전차 300대 이상, 헬기 300대 등이 사막의 경계선을 넘어 쿠웨이트를 순식간에 점령하였다. 이라크는 6시간 만에 수도 쿠웨이트시티를 장악했고, 이라크의 침공 직후 쿠웨이트 왕가는 사우디아라비아에 피신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2절. 유엔 다국적군의 참전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지 나흘 뒤인 1990년 8월 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라크에 대해 무역제재조치를 취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이라크로 하여금 쿠웨이트로부터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라크는 이를 거부하였다.이에 따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각 국은 유엔안보리의 12개 결의안을 통해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쿠웨이트로부터의 즉각 철수와 쿠웨이트 왕정복고, 대 이라크 무역제재를 요구하고 이라크에 대해 90년 11월 29일부터 91년 1월 15일까지 철군하지 않을 경우 무력을 사용할 것을 결의했다.유엔안보이사회는 이를 전후하여 미국이 대 이라크 전에 대비한 다국적군의 결성을 주도함으로써 43만의 미군을 포함한 33개국의 다국적군 68만 명이 페르시아 만 일대에 집결하였다. 이에 대해 이라크도 50여 만의 정규군과 50여 만의 예비군을 동원하고, 그들이 자랑하는 정예 공화국 수비대 15만을 쿠웨이트 및 이라크 남부 지역에 집중시켜 대치하였다.다국적군 군대는 이라크 및 쿠웨이트와 접경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에 집결하여 대대적인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를 일컬어 "사막의 방패(Desert Shield)" 작전과 "사막의 태풍(Desert Storm)"작전이라고 불렀으며, 군인들은 전력이 막강한 이라크 군대와의 전투 및 생물학전, 화학전에 대비하여 여러 달에 걸쳐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이들 작전은 미국정부의 막강한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고, 군대를 파견하지 않은 국가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일본 등은 모두 530억불에 이르는 지원금을 기부하여 군 작전 비용의 상당부분을 지원하였다.미국은 43만 명의 미 병력을 포함, 33개국으로부터 68만 다만 전쟁을 종결함에 있어서 이라크의 책임과 의무만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분쟁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국경분쟁은 당사자 간의 협상과 합의에 의해 진정된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감독과 응징에 의해 억제되고 있는 것이다.양국 간에는 전쟁의 종결에도 불구하고 국경 인정과 준수에 관한 아무런 협정과 합의도 없다. 다만 유엔의 이름 하에서 미국이 주도하여 이라크의 침략 행동을 봉쇄 내지 차단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양국 간의 국경분쟁은 언젠가는 다시 문제화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라크는 자신에 대한 국제사회의 감독과 통제력이 이완되고 쿠웨이트의 자체 방위능력이 미흡하다고 판단할 경우 언제든지 쿠웨이트를 다시 침범할 가능성이 있다. 실례로 걸프전 종전 후인 1994년 이라크는 쿠웨이트 국경부근에 다시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켜 긴장을 고조시킨 바 있다.게다가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은 쿠웨이트에 대한 호전적인 태도를 지속적으로 보여줬다. 2000년 8월에는 쿠웨이트 침공 10주년을 기념하여 후세인 대통령은 "침공은 정당하였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밝힌 데 이어 2001년에도 쿠웨이트 침공의 정당성을 거듭 주장한 바 있다. 2001년 3월,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 처음 열린 아랍정상회담에서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침공 방지 서약을 원한 반면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자국의 영토임을 거듭 주장하였다. 이외에도 이라크는 사우디 국경을 침범하여 (2001년 3월-6월까지 총 11차례) 사우디 초소를 향해 발포하는 등 호전적 행동을 지속하고 있다.그러나 2002년, 이라크는 쿠웨이트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3월 레바논에서 개최된 아랍 정상회의에서 이라크는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쿠웨이트의 영토권을 포기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라크의 태도는 미국의 대이라크 공격을 피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추정된다. 사실, 이라크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 쿠웨이트는 97년 12월 쿠웨이트에서 주최한 GCC 정상회의에서 GCC + 2(이집트, 시리아) 체제를 구축 안보강화를 도모했다.걸프전 당시 친 이라크 입장에 섰던 요르단, 예멘등과 외교관계 정상화 노력을 하고 있으며, 이라크에 대해서는 친미성향의 신정부 수립을 지원하고 있고 정부구성 이후 과거 청산 및 미래지향적 협조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입장이다.GCC 협력이사회의 일원으로 경제, 통상 협력관계 확대 및 공동시장 구축에 적극적이며, 중동평화 로드맵에 대한 쿠웨이트 입장은 미국의 중재로 이?팔 갈등이 조속 해결 되도록 적극 지원한다는 입장이며 GCC 회원국과 공동보조를 취하는 입장이다.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랍의 정서를 고려, 관계개선을 미루고 있으며 통상관계도 이스라엘과의 직교역 및 대이스라엘 보이콧은 중동평화 협상 진전 상황을 보아가며 입장을 결정하겠다는 정책이다. 특히, 대이라크 공격 시 미국, 영국에 적극 협조한 쿠웨이트로서는 아랍의 비난을 의식, 아랍연맹이 취하고 있는 대이스라엘 외교적 압력에 동참하고 공동보조를 취한다는 입장이다.2. 의미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국경분쟁은 과거 열강에 의한 식민통치가 남긴 전형적 영토분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열강들은 식민지를 통치하면서 자신의 편의에 의해 경계를 확정하였는데, 이라크가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그 유산이다. 이라크는 냉전 종식과 더불어 초강대국의 지역문제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자신의 패권적 야망을 충족시키고자 쿠웨이트를 군사적으로 침공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탈냉전시대에 분출될 수 있는 지역분쟁의 전형적 양상을 보여주었다.그리고 걸프전의 발발로 중동 지역은 지금까지의 전통적 대결(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의 원인이었던 인종, 종교, 국경, 사회 갈등 이외에 아랍인 간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갈등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아랍인 간의 갈등이 연출된 근본 배경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그 원인으로 존었다.
6번째 배우 - 관객‘관객모독’▷ 총평긍정적인 단어로 표현하자면 ‘신선함’, 그 반대로 표현하자면 ‘황당함’, 내가 이 연극을 보고 느낀 생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단어이다. 연극에서 연출된 연기보다는 내용 자체가 주는 충격이 엄청났다. 기존의 박혀있던 연극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개념들은 순간 정지했고 혼란스러웠다. ‘연극’이란 단어를 뒤틀 만큼, 말 그대로 ‘혁신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고, 기존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가 잘 들어난 공연이었다.1. 본 공연은 동시대와 호흡(내용, 참여도 등)을 하고 있는가? (현 사회에서 본 공연이 의의를 가지는지?)- 지금 현 시대의 모습이나 상황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내용이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만한 눈에 띄는 대사는 없지만, 사회 전체에 대해서 뭔가 말하고자 하는 느낌을 받았다. 사회에 영합해서 조화롭게 어울리기 보다는 현재의 그 틀을 벗어나 새로운 모습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이 공연은 현실에 그대로 안주하지 않고 현재 사회가 추구하는 모습이 각각 다르지만 지금 시대와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또한, 이 공연이 처음 독일에서 공연됐을 때의 의도처럼 현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비판하고 연극의 모든 기본 요소에서 벗어나 새롭게 재창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단지 기존의 모습을 파괴하고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개혁적이라는 점에서 가지는 의의이다. 초연 된지 올해로 정확히 40년이 되었지만 이런 연극 형식은 많은 관객에게 낯설고 어색하다. 그래서 새로운 시도를 많이 보여 주는 이 공연을 봄으로써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극에 대한 관객들의 기본적인 시각이 넓혀질 수 있다고 본다.2. 공연예술은 시간과 공간의 예술이라 한다. 본 공연에서 사용하는 시간과 공간의 표현(미학적 부분)법을 발견하여 기록해보자.- 공연 중, ‘무대 위에 시간은 여러분의 시간입니다.’, ‘여기서는 시간이 여러분에게 순응합니다.’ 라는 대사가 있다. 처음에는 이것들이 무슨 뜻인지조차 몰랐고 특별한 의미들을 지니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공연의 주제, 의미와 더불어 공간을 연결시켜 생각하니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이 공연은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기존 연극의 기본 개념을 ‘파괴’하는 ‘낯설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극의 3요소인 시간, 공간, 사건을 철저히 무시하고, 관객이 연극을 진행시키는 또 다른 배우가 된다. 대본에 의지하여 그대로 재연함으로써 다른 변화요소 없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관객의 반응과 대답에 의해 연극 내용과 대사, 행동 등이 변하기 때문에 공연의 작품 속 시간인 ‘정지된 시간과 공간’과 그 과정은 파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반대로 현재의 ‘지속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이 공연에 나타났다.또한 관객과 배우가 구별되지 않고 같이 공연을 이끌어 가기 때문에 무대와 관객석이라는 의미는 필요 없어졌다. 배우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벗어나 관객에게 다가오고 반응을 유도하며 그 반응을 그대로 연극에 반영한다. 물론 배우가 지시한 것이었지만 관객도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고 소리 지르기까지 한다. 철저하게 극장에서의 무대를 기준으로 한 공간 구별은 의미가 없었고 모두가 함께 있는 광장 같은 느낌을 받았다.그리고 이 공연에서는 발단, 전개, 절정 등의 과정을 가지는 사건이 없다. 공연 후에 우리의 질문을 통한 배우의 답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연극의 대본은 배우들의 대화나 딱히 사건이라고 할 말한 이야기가 없다. 어떠한 논문, 사설 같은 어려운 문장들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연극에서 긴장감을 느끼고 감탄을 자아낼 만한 부분이 없다. 즉, 연극의 3요소 중에 하나인 사건이 철저하게 빠져있다. 물론 극중극에서는 배우들의 행동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추론할 수는 있지만, 거기서도 주가 되는 것은 그 연기가 아니라 대사다. 대사는 여전히 그 이야기와는 정말 전혀 상관없이 연극의 틀을 벗어나려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상황들이 처음에는 난해하고 이 공연에 익숙해지는 것에 어렵게 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이 공연을 재밌고 신선하다고 느끼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그러나 나는 이러한 시간의 탈피와 사건의 무시보다는 객석과 무대의 구별 무시가 더 실감나게 느껴졌고 그 충격도 컸다. 콘서트도 아니고, 연극에서 관객이 무대로 올라가 참여하고 배우가 관객을 의식하며 다가오고 관객의 호응에 배우가 반응하고... 또한 그나마 배우들이 대사를 하는 곳-사실 무대이지만-에는 스크린이나 어떠한 무대 장치도 없이 달랑 의자 4개만 놓여있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연극 무대가 아닌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이 공연 연출의 핵심이자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가장 중요한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한다.3. 본 공연은 수업 중에 언급된 표현 양식 중 어떠한 방법을 활용하고 있으며 새로운 것이 있다면? (플롯(텍스트구성), 연기, 조명, 의상 등 공연을 이루는 모든 요소를 포함하여)- 이 공연에는 관객이 보고 자연스럽게 말할만한 줄거리가 없다. 배우들의 대사는 대화가 아닌 어떤 문장과 문장들의 조합으로만 느껴지고, 갈등이나 절정을 찾을 수 없다. 주제가 있다면 ‘기존 연극의 형식을 탈피하는 새로운 공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딱히 어떤 형식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은 극중극밖에 없었지만, 형식만 극중극일 뿐, 그 안에서의 내용도 줄거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또 다른 문장들-연극론-의 조합일 뿐이었다. 더욱이 극중극에서는 행동과 대사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행동만 보면 어떤 이야기를 추론할 수 있지만 대사와는 전혀 상관없다. 게다가 대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 이 공연을 따라갈 수가 없게 된다.우리가 생각하는 연기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극중극에서의 배우의 행동일 것이다. 그 외의 배우의 연기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던 연기가 아닌, 대중 앞에서 연설문을 읊는 어떤 연설가의 모습 같았다. 그리고 이 공연에서는 관객의 대답과 참여가 공연의 흐름을 바꾸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는 즉석에서 그 상황에 맞게 바뀐다. 딱히 ‘연기 잘 한다.’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던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특별히 조명이 화려하거나 신기하지는 않았다. 단지 당황스러웠던 것은 배우와 무대를 향해 비춰져야 할 조명이 관객을 비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공연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에도 조명이 비춰지고 관객의 자리에도 불이 들어왔다. 공연이 시작하면 절대 객석에는 불이 켜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배우가 있던 무대와 같은 조명이 켜지고 무대 뒤에서도 배우가 나타났다. 게다가 나중에는 아예 무대의 불은 꺼지고 관객의 자리에만 조명이 켜지는 상황도 발생했다. 배우가 관객-나-을 관찰한 것이었다.그리고 평소에는 전체적으로 무대를 다 비춰주다가, 어떤 독백하는 상황에서 배우 한, 두 명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줬을 때는 시선을 그 한곳으로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조명의 힘을 느꼈다.무대는 전혀 공연 무대 같지 않았다. 단지 공연 마무리에 한 번 사용되는 커튼 막 앞으로 네 개의 의자만 있을 뿐이었다. 어떠한 스크린이나 배경 그림도 없었다. 그러나 그 네 개의 의자는 공원의 벤치, 침대 등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다.음향에서는 극중극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쓰였다고 할 만한 배경음악은 없었다. 극중극에서는 그 상황에 맞게-물론 대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배경음악과 음향효과가 쓰였으며, 기억나는 것은 ‘찰싹’하고 들리는 뺨 맞는 소리가 정말 절묘하게 배우의 행동과 딱 들어맞았던 일이다.본래 공연 의상의 역할과는 달리 눈에 띄고 그 역할을 암시할 만한 의상을 입은 배우는 없었다. 모두 정장 차림이었으며 극 중에 갈아입은 적도 없었다. 단지 관객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차렸다고 밖에 생각이 안 들었다.공연의 모든 요소들이 기존의 공연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모두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볼만했다.4. 연출의 의도가 잘 표현 되어있는가. 즉 배우의 연기와 각 스텝의 역할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