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 기념공연탈춤 처용무를 보고고전문학사노경희교수님2009.12.30사학과 200717041 황여진1. 처용무 유네스코 무형문화재 대표목록 등재처용무 등 세계무형유산 등재…"처용무 전승 당위성 높이는데 주력해야"newsis 고은희 기자 (gogo@newsis.com)| 기사입력 2009-09-30 17:2230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날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리는 제4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처용무를 비롯해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칠머리당영등굿 등 5건의 세계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처용무 및 종묘제례악 인간문화재인 김용 전 처용무보전회장은 처용무가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되는 것과 관련해 "우리 고유의 무형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감회가 깊지만, 앞으로 처용무를 전승하고 문화재로서 가치를 높여가야 하는 일에 훨씬 부담감을 갖게 된다"며 "천년의 시공을 넘어 처용무가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 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처용무 전승과정 교재 완성을 계기로 처용무 전승 당위성을 높이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인간문화재 김중섭 처용무보유자도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을 계기로 처용무 보존을 위해 매진해야할 책무를 느낀다"고 말했다.한편 세계무형유산은 90건(70개국)이 있고 우리나라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년), 판소리(2003년), 강릉단오제(2005년) 등 3건이 등재돼 있다. 이번에 5건(강강술래,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영산재, 남사당놀이, 처용무)이 추가 등재되면 모두 8건의 세계무형유산을 보유하게 된다.이번에 등재된 강강술래 등 5건은 인류 문화 다양성의 원천을 보여주었고, 인류의 창의성을 증명하는 데 기여했으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보존지원 정책을 펼쳤다는 점이 평가받았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강강술래(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는 노래, 무용, 음악이 삼위일체로 이뤄진 원시 종합예술이다.?남사886년) 때에는 서울(서라벌)에서 동해안까지 기와집이 총총히 들어서 서로 담장이 이어졌고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고 한다. 길가에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백성들의 살림이 부유하고 기후마저 순조로워 태평성대였다. 어느 날 헌강왕이 동해안의 개운포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가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로 인해 캄캄하게 되어 길을 잃게 되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천문을 맡은 관리가 말하기를,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하에게 명을 내려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도록 하라”고 하였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마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사라졌다. 이런 이유로 이곳을 개운포(구름이 걷힌 포구)라고 이름 하였다. 동해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데리고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칭송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와 춤을 추었다. 동해용의 아들 중 하나가 왕을 따라 서라벌로 갔는데 그 이름이 처용이었다. 왕은 처용에게 미모의 여자와 혼인하도록 허락하고 그에게 급간(級干) 벼슬을 주어 왕의 정사를 돕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너무도 고왔기 때문에 역병 귀신이 탐을 내어 사람으로 변신하여 밤에 몰래 그 집으로 들어가 같이 지내게 되었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누운 것을 보고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가 로 다음과 같다.“서라벌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다.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고?본래 내 것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오?”이때에 역신이 처용의 앞에 정체를 나타내고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아내가 탐이 나서 지금 그녀와 관계를 맺었소. 그런데도 당신은 노하지 않으니 감격스럽고 장하게 생각하여 이제부터는 맹세코 당신의 얼굴을 그려 붙여둔 곳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신라 사람들이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 나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스에 추던 무용으로, 대개는 와 에 맞추어 춤추었다. 에는 “섣달 그믐날 나례에 두 번씩 처용무를 추었다” 고 기록되어있다.5명의 무원이 5방위에 따른 청, 홍, 황, 백, 흑 색의 옷을 각각 입고 처용의 탈을 쓴 다음 한 사람씩 무대에 나가 한 줄로 선 채 ‘처용가’ 를 일제히 부르고, 노래가 끝나며너 선 자리에서 5명이 두 팔을 올렸다 내리고 서로 등지고 선다. 다음에는 발돋움춤으로 3보 전진하여 4방으로 흩어져 서로 등을 지고 추는 상배무, 왼쪽으로 돌며 추는 회무를 마친 뒤, 중무가 4방의 무원과 개별적으로 대무하는 오방수양수무를 춘다. 이 춤이 처용무의 절정을 이루는 부분이다. 이어서 일렬로 북향하고 을 제창한 다음 잔도드리 곡조에 따라 낙화유수무를 추면서 한 사람씩 차례차례 오른쪽으로 돌아 퇴장한다.2.3처용무의 발달처용무는 신라 말기에 시작된 이후 궁중 나례)(악귀를 쫓는 의식) 또는 중국 사신의 연회 등에 추어졌으며 그 뒤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더욱 세련된 예술 형태로 발전하였다. 처용무는 신라 때에는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추을 추는 일인무였다고 하나 고려 초기에 연등회나 팔관회 등의 행사에서 행해졌으며, 고려 말의 기록엔 두 사람이 추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조선 초기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붉은 색의 가면에 검정색 옷차림과 머리에 사모를 쓰고 한 사람이 추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 세종때에 와서 더욱 발전되고 세련되어져 지금과 같이 다섯 사람이 추는 오방 처용무로 확대되었고, 음악과 가사까지 개선되었다. 그리고 20여 년 후인 성종 때에는 더욱 발전하여 완전한 무용으로 정립되어 궁중 의식에 사용되었다.이후 궁중 나례 의식에서 학무와 연화대무와 합쳐져 악학궤범에 전해지는 학연화대처용무합설(처용무를 처음과 마지막에 추고 중간에 학무와 연화대무 넣어서 춤)로 발전되었는데, 악학궤범에는 처용의 얼굴 그림과 처용무를 추는 방법과 노래 가사, 처용탈 제작 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처용무는 조선 말까지 궁중의 행사 때마다 행해졌으나 일제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큰 의미가 담겨있는 전통 민속 가면이다. 처용탈은 이국적인 특색을 보이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서역인상(아랍인)으로 알려진 왕릉왕 석인상과 비교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얼굴 윤곽의 뚜렷함과 험상궂음 그리고 피부색의 다름 등이 공통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서는 처용 가면이 붉고 이가 희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처용탈의 바탕은 적색 면으로 줄곧 전승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사모는 주로 망을 삼아 만들며 종이를 발라 채색을 써서 꽃을 그리고 모란꽃, 복숭아꽃 가지를 꼽아 만든다.처용의 옷은 조선시대 『악학궤범』에 다섯 처용의 옷이 자세하게 기록된 것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처용무의 옷은 오방의 빛깔에 따라서 청, 황, 홍, 백, 흑 으로 한다. 처용무를 추는 무원들은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홍색, 북쪽은 흑색, 중앙은 황색의 다섯 가지 색깔의 옷을 입는다. 옷은 앞자락이 짧고 뒷자락이 길다. 목의 깃은 둥글고 넓으며 가슴은 모나고 길고, 옷의 앞 뒤와 소매에는 덩굴꽃이 그려져 있다. 소매 끝에는 흑색 비단과 황색 비단등이 각 방에 따라 다르게 잇대에 꿰매져 있다.우리 민속에서 사용되는 색채는 크게 청·홍색으로 구분되는데 홍색의 민간적 개념은 대개 붉은 색의 팥으로 쓰인 부적을 지니는 일종의 주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음양의 구분으로 본다면 홍색은 양의 기운으로서 나쁜 일을 막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인다. 청색은 음의 기운으로서 혼례 시에 남자인 양에게 음인 청색을 사용함으로써 조화를 이루고, 신부 또한 음의 기운인 여자이므로 양의 기운인 홍색으로써 악을 막는, 이른바 음양의 조화로 빚어진 의식으로 사용되었다.2.5 처용무의 음악과 춤사위처용무에 쓰이는 음악을 봉황음이라 한다. 봉황음은 조선 왕조 세종 때 윤희가 고친 것으로 전한다. 3단계로 나누어 시작하는 음악은 봉황음 1기라고 하고 중간을 봉황음 중기, 마지막을 봉황음급기라고 한다. 현행 처용무 반주음악은 수제천(일명 빗가락정읍)과 향당교과 오방수양수무, 주선, 정읍무, 환장무, 제행이무 등의 춤사위로 엮어져 있다. 무릎 디피춤은 서로 방향을 바꿔가며 추는 춤을 말하고 발바딛춤은 발을 올려 걸으며 무릎을 굽히는 동작을 말한다. 도돔춤은 소매를 들어 안팎으로 끼거나 좌우로 끼며 손으로 추는 춤을 말한다. 발바닷작대무는 발을 들어 옮기며 다른 열을 만드는 춤을 가리키며 낙화유수춤은 전진하면서 한삼을 좌우 어깨에 차례로 매었다가 앞으로 뿌리는 동작을 말한다. 춤을 추며 뒤로 물러서는 춤사위를 무퇴라고 하고, 춤을 추며 앞으로 나아가는 춤사위를 무진이라고 부른다.처용무 전수자 인간문화재 김중섭씨5명의 무원이 추는 처용무는 중앙에 위치한 중무와 4명의 무원이 대무나 방향, 거리 등을 유지해야 하며, 특히 몸의 중심이 안정적이여야 하고 뿌릴 때의 곡선에 숙련을 요한다. 처용무를 출 때는 음악연주에 맞추워 무원 스스로 불러야 하는 두 번의 노래가 나오며, 여유로운 장단이나 비교적 빠른 템포의 장단에도 무게를 잃지 않고 유연하고 부드러운 동작의 춤사위를 보여야 한다.2.6처용문화제처용은 또한 춤 뿐만 아니라 뮤지컬, 연극, 문학작품의 소재로도 쓰이고 있고, 특히 울산시는 자신들의 지역이 처용의 발원지임을 삼아 매해 처용문화제라는 축제를 열어 성공적인 현대적 변용과 함께 한국 알리기에 힘쓰고 있다.처용문화제지역별 울산시 남구주최/주관기관 울산광역시/처용문화제추진위원회최초 개최년도 1967년▶유래1967년부터 국내 제1의 공업도시를 상징하는 공업축제로 개최되었으며, 1992년부터 처용가와 처용설화의 역사적 현장이 실존하는 지역특성을 살려 처용문화제로 이름을 바꾸고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의 아이템을 보강하여 축제를 개최해 오고 있으며, 2006년부터는 월드뮤직을 가미하였고, 금년부터는 본격적인 국제축제로 발돋움하고 있음.▶여는 까닭울산이 처용 설화의 발생지라 "처용 문화제"라 붙여졌다. 1962년 2월3일에 울산시는 조국근대화의 공업센타로 확정 선포되고 나서 우리 나라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 발전되어오고 있다. 지외
-심청전과 황석영의 비교목차Ⅰ 원작『심청전』Ⅱ 황석영의 『심청』1.작가 황석영2.작품의 줄거리3.역사적 배경 -19세기 동아시아①청나라②류큐왕국(유구왕국)③일본Ⅲ 원작과의 비교1.인물 비교2.서사구조 비교3.상징장치 비교Ⅳ『심청전』 모티프로 한 유사작, 희곡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와의 비교Ⅴ 작품의 의미와 의의Ⅰ 원작『심청전』심청전은 우리나라 고전소설 중 가장 대표적으로 효가 강조되는 작품이다. 심청전은 경판본과 완판본으로, 또 서사 구조가 약간씩 다른 수많은 이본들 갖고 있는데, 심청전의 경판본과 완판본은 동일 작품임에도 너무나 다른 작품이기도 하고, 다른 작품 같으면서도 동일한 작품일 수 밖에 없는 이중적인 구조적 양식을 병행하고 있다. 경판의 경우 거시구조적 측면에서 짜임새와 규율이 돋보이는 적강소설의 전형의 모습을 보이나, 완판의 경우는 다양한 갈등을 증폭시키고 해학과 골계미가 반영되었으나 서사체계상의 긴밀감은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판본 중에서 완판본을 기준으로 황석영의 작품과 비교해보고자 한다.Ⅱ 황석영의 『심청』1.작가 황석영얼마 전 인기 TV프로그램에서 황석영 작가가 출연해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다. 이제껏 그가 누군지는 알지 못한 채 『삼포 가는 길』정도의 작품만을 알고 있던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소개되는 그의 인생 자체가 한국의 근현대사의 전부라고 해도 섭섭지 않을 만큼 다이나믹했고, 그의 수수하고 털털한, 거장의 권위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태도도 너무 보기 좋았다. 그의 생애는 이러하다. 그는 1943년 해방 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1945년 8.15 광복을 겪었다. 그의 가족들은 평양으로 이사를 갔다가 분단 직전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다. 이후 1950년,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더니 한국전쟁이 벌어진다. 피난을 내려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고등학교에 입학하니 4.19혁명, 연이어 5.16 군사 정변을 겪어야 했고 군대를 해병대에 가서 베트남전쟁에까지 참전했다. 전쟁을 겪고 돌아오니 유신 반대던 중 동생처럼 여기던 링링이 아이를 낳고 죽게 되고, 남풍의 주인인 아퉁도 잇달아 죽으며 청이는 단수이의 죽원반관이라는 곳으로 옮겨 간다. 그녀는 여기서 샹 부인과 후미코 이모 등 을 만나 다시 예기로서 비교적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어느 날 찾아온 동인도회사 직원인 제임스의 마음에 들어 그의 집에 월급을 받고 첩으로 가게 된다. 그녀는 싱가폴로 가서 제임스 외에 다른 양인 첩들과도 교류하며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보호소를 세운다. 제임스는 이런 청이의 매력에 계속 빠지게 되고, 결국 정처 자리를 제안하며 상하이로 갈 것을 권유하지만 청이는 이를 뿌리치고 다시 단수이로 돌아간다. 이후 청이는 링링의 딸 유자오와 후미코 이모의 고향인 류큐로 가서 요정 용궁을 차린다. 그녀는 여러 예기를 고용하였고, 단골 손님 중에는 미야코 섬의 우에즈인 도요토미오야 가즈토시가 있었는데, 그의 본처가 병환으로 인사불성이 3년이나 된 터라 청이를 첩으로 들여 혼인한다. 이후 청이는 사족의 부인이 되어 노인잔치를 여는 등 백성들을 굽어 살피고 인두세 세율을 조정하는 데 큰 몫을 한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개항과 함께 남편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다가 죽게 되고, 청이는 나가사키로 간다. 나가사키에서 린 대인의 도움을 받아 렌카야라는 요정을 다시 차린다. 또한 싱가폴에서처럼 기아, 고아 보호소를 운영한다.그녀는 여기서 센신 대사를 만나게 되어 또 한번 사랑에 빠지지만 그는 민란의 주동자였고, 결국 얼마 못 가 암살을 당하고 만다. 청이는 예순이 될 때까지 이 요정을 경영하다 쇼코에게 물려주고, 일하던 아이인 기리 부부와 함께 조선으로 떠난다. 그녀는 조선에 돌아와 인천에 정착하고, 그녀의 고향인 황주에 방문하는데, 거기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위패를 발견한다. 이후 심청은 일흔이 되고, 문학산 남쪽 골짜기에 암자 한 채를 짓고 연화암이라 이름을 붙였다. 자연스레 그녀는 연화보살이 되었다. 그녀는 거기서 얼마간 살다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생을 마감한다.3. 역사적 배경이 작품은 1남아시아 지역을 연결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구의 번영으로 일본열도의 권력자들의 간섭이 시작되었고, 1609년 일본 규수 남부 사쓰마번(사츠마번) 이 에도막부의 허락을 얻어 유구를 침공하였고, 유구는 일본과 중국 양쪽에 조공을 드리는 양속체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중국의 아편전쟁 패배와 잇다른 조약들로 인해 유구국에 접근하는 구미열강의 함선이 증가하게 되고, (이때 작품에 등장하는 페리 제독과의 장면이 이 부분에 해당한다) 유구국은 1854년 미국, 이듬해 프랑스 등과 함께 차례로 구미 열강과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메이지 정부는 유구 왕국을 배타적으로 일본에 귀속시키려는 조치를 하게 된다. 1871년 7월 메이지 정부가 왕정복고를 위해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메이지 정부는 이전의 막부 중심 정부가 아닌 천황 중심의 정부로,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이전의 번 체제를 현으로 변화시켰다. ) 기존의 사츠마번이 가고시마현이 되었고, 이로 인해 유구국은 자연히 가고시마 현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은 당시 유구국의 양속지배체제를 해소하기 위해 1872년 9월 유구 국을 폐지하고 유구 번을 설치한 뒤 유구번의 왕을 일본의 화족으로 임명하고, 주요관직 임명권과 외교권 등을 박탈하여 사실상 메이지 정부의 직할령으로 만들었다. 또한 메이지 정부는 원래 목적이었던 유구 왕국과 구미 열강들의 조약을 인계하였다. 이후 대만 사건 등의 사건을 매개로 일본 사족들의 관심을 돌리고, 외교적 주도권을 선점하여 1879년 유구번을 폐하고 오키나와현을 세워 유구를 일본에 완전히 편입시켰다.③일본또한 작품에서 나가사키가 등장하는데, 나가사키는 일본이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기 훨씬 이전부터 네덜란드와 교류하던 곳으로, 난학파가 등장할 만큼 네덜란드와 깊은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곳에는 또한 중국인도 정기적으로 왕래해 중국인은 도진야시키, 네덜란드인은데지마에 수용되었고, 일본은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화란풍설서라는 책을 전해 받으며 국제정세를 살피고 있었다.신을 희생하고 효를 실천한 인물로 나타난다. 하지만 ‘심청’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신체자본을 이용할 줄 아는 영리한 여자로, 때로는 현명한 현모양처로, 때로는 절색인 미모를 뽐내며 호걸녀인 예라이상으로, 때로는 수수한 마마 상으로 그려지며 심청이 보다 섬세하고 인간적으로 표현되었다.? 심봉사심봉사는 세속성을 강화하여 재창조되었다. 원본에서도 심봉사는 딸을 매매한 인물이라 는 부정적 비판이 있었지만 절대적 가치인 효에 의해 은폐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 안에 서는 뺑덕어미와 함께 청이의 매춘에 일조하는 세속적 인물로 그려진다..? 뺑덕어멈뺑덕어멈 또한 원작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었다. 그네는 심청이를 팔기로 결정하고 직접 몸도 씻어 주며 적극적으로 심청의 매춘에 참여한다.? 심청의 남자들①첸 대인②장토우 구앙③동유④제임스⑤가즈토시⑥센신 대사이들은 모두 작가가 새롭게 창조해 낸 인물들로, 첸 대인과 구앙에게는 심청이 자발적으로 사랑한 적이 없으나 구앙, 제임스, 가즈토시, 센신 대사는 모두 심청의 정인으로 등장한다. 특히 가즈토시는 류큐 왕국의 사족으로써, 원전 텍스트에서 심청이 왕비로 환생하는 모티프를 어느 정도 실현해주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심청은 이들과 모두 끝까지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재회도 없다.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독립적인 길을 걸어 나간다.? 친구, 동료심청은 보통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던 하녀들이나, 기루에서 함께 일을 하던 기녀들 중 유메이, 링링, 샹 부인, 후미코 등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던 린 대인과 허푸 아저씨 등 의 사람들과 , 링링의 딸 유자오 등과만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중에서도 고아인 심청에게는 단수이의 죽원반관 식구들과, 마지막을 함께 한 기리 부부가 가장 가족처럼 느껴지게 된다.2.서사구조 비교서사구조상에 있어서 황석영의 작품은 심청전 원전의 서사구조를 거의 따르지 않고 있다.작품의 처음부터 청이는 중국으로 팔려가는 배 안에서 등장하고, 청이가 갖은 곡절을 겪는 부분은 원이루어진다. 이것으로 매춘을 위한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이후 렌화과 된 심청은 자신의 육체를 사물화화는 과정을 거친다. 육체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일 수 있을 때에 심청은 청이 아닌 렌화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처음 마주친 서양식 거울 앞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향해 너는 누구냐고 묻는다. 이후 처음으로 늙은 남자의 손길을 받아들이면서도 심청은 거듭 묻는다. 이에 렌화는 심청에게 대답한다. “나는 렌화라니까, 너는 이미 귀신이야”청은 렌화의 이 대답을 받아들인다. 또한 심청을 동첩으로 받아들인 지 채 일년이 되지 않아 첸 노인은 복상사를 한다. 열여섯 살의 심청은 노인의 시신과 나란히 누워 환상 속에서 한 생애를 편력한다. 첸이 태어나 소년이 되고, 아름다운 청년기를 거쳐 백발 노인이 되는 전 과정을 목도하는 것이다. 또한 뒤이어 자신의 지나온 삶이 또 하나의 환상으로 펼쳐진다. 이를 통해 심청은 삶을 전체로서 조망케 하는 새의 시선을 확보하게 된다. 그 시선으로 보자면 죽은 첸씨의 몸과 그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렌화의 몸은 등가하며, 이로써 심청과렌화의 분리, 즉 영혼과 육체의 분리는 완벽히 객관적인 것이 된다. 이로써 심청은 죽음의 경험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능동적인 주체가 된다. 심청은 이후 진장의 기루로 가게 된다. 진장의 기루는 『심청』전체를 통하여 가장 활기 있게 묘사되는 부분인데, 여기서부터 심청은 적극적인 주체로 변신한다. 그녀는 구앙의 정부 노릇을 하면서도 기루의 풍속을 배우고, 스스로 화지아가 되며 새로운 삶을 얻는다. 청은 “하지만 청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상권, 58쪽)라는 말을 하며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또한 고향 조선의 황주 복사골에 대해 심청은 어떤 절실한 그리움도 내보이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진장의 기루가 진짜 고향이 되는 것이다. 황석영의 『심청』은 시청의 운명을 바라보는 그 어떤 죄의식의 주체 (누이 콤플렉스에 입각해 순결한 여성의 희생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남성의 .
대만의 역사-목차-Ⅰ 서론Ⅱ 본론1.근대 이전의 대만①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식민통치② 명정시대③ 청조통치시기2.동아시아 근대의 중심, 대만①아편전쟁과 대만의 대외교역②일본의 대만 침략③청일전쟁의 영향과 정권교체④일제의 통치3.대만 현대사①대만의 광복과 국민당의 접수공작② 2.28사건③ 권위주의 통치체제와 정치의 민주화④ 양안관계Ⅲ 결론Ⅰ 서론대만이 역사시대로 진입하기 이전부터 많은 원주민들은 이 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초기 대만인’은 3~5만년 전에 출현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점차 발전해 나가며 자신들만의 생활형식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한인 이전에 대만에 있던 토착민족이 있었던 것이다.유럽인이 대만을 발견하기 전 대만은 원주민 사회였다. 그러던 중 16세기 포르투갈 선박이 대만을 지나며 대만 섬을 ‘아름다운 섬(Ilha Formosa)’ 이라고 불렀고, 이 때문에 지금도 유럽인들은 대만을 Formosa 부른다. 이 아름다운 섬 대만은 그 나름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대만은 서양열강과 중국, 일본 사이에서 긴 기간, 수없이 많은 지배를 받으며 지내왔다. 그러나 이는 바꿔서 말하면 대만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고, 여러 나라가 이권다툼을 할 만큼 가치가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근대부터 현대, 지금 이 시점까지 동아시아 무대에서 항상 주목을 받고 있는 대만의 역사에 대해 집중적으로 알아보자.타이완 [Taiwan]위치 동북 아시아경위도 동경 121° 00", 북위 23° 30"면적(㎢) 35980수도 타이베이종족구성 타이완인(84%), 본토중국인(14%) 원주민(2%)공용어 중국어종교 불교·유교·도교 혼합 (93%), 그리스도교 (4.5%)공식국호는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다. 그러나 중국의 압력으로 인하여 국제사회에서보통 대만이나 타이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1912년 건국되어 중국 대륙을 지배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에 쫓겨 타이완 섬으로 밀려났다. 행정구역은 2개 직할시, 22개 현(縣)·시(市)로 구성된다명 왕실의 유민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그러나 1645년 청군이 남경을 함락시키고 당왕이 즉위하여 청조가 시작되었고, 정성공은 당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의 부친과 뜻이 달라 결국 모친이 청군에 의해 살해되며 본격적으로 반청복명의 기치를 내걸게 되었다. 그는 계속되는 항청운동에서 장기항전에 필요한 새로한 기지를 구해야 했고, 원래 아버지인 정자룡의 본거지였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가 점령한 이후 다수의 한족이 거주하던 대만을 여러 조건에서 좋은 곳으로 판명되었다. 이후 1년간의 항전 끝에 1662년 정성공은 네덜란드인을 쫓아내고 대만을 반청복명의 기지로 삼았다. 이 나라가 바로 한인이 대만에 설립한 최초의 정권인 정씨왕국이었다. 그러나 정성공은 네덜란드를 격퇴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인 정경, 손자인 정극상이 그 뒤를 이어서 1683년 청조에 패할 때까지 대만을 경영하였다.③ 청조통치시기정씨왕국에 비해 해군력이 빈약한 청조는 갖가지 우대조건을 내세우며 설득하기도 하는 등 정성공이 죽고 난 뒤에도 여러 차례 교섭을 시도하고, 정벌을 나서는 등 정씨 왕국의 세력을 소멸코자 하였다. 그러던 중 정씨왕국에 내분이 폭발하게 되고,1683년 7월 혼란을 틈타 청의 강희제는 해전에 능한 시랑을 보내 총공세를 펼쳐 정씨왕국의 수비대장 유국현과 정극상이 모두 투항하여 청조의 통치 시기가 시작되었다. 청조는 213년간 대만을 통치하였는데, 1684년 타이완을 본토인 푸젠성에 예속시키고 타이난에 타이완부(府)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청조는 대만에 행정기구를 신설, 조정하는 과정에서 계획적인 준비 없이 대만의 내 외부적 환경변화에 따라 임기응변식의 시책을 펼쳤다. 청조는 특히 1875년부터 대륙인의 이주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쳐 대륙으로부터 이민이 격증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신천지를 개척하였다. 또한 인구의 증가와 동시에 관원의 부패 등으로 인해 사회 문제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청조통치시기 대만에서는 크고 자은 73차례의 크고 작은 민란이 발생하여 사회가 극히어서며 근대화의 첫발을 내딛었다.그러던 중 ‘로버 호 사건’이 벌어진다. 1867년 3월 12일 우장으로 향하던 미국 상선 로버호가 풍랑을 만나 대만 부근 해상에서 침몰하였다.17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간신히 대만에 도착한 선장 헌트 부부를 포함한 14명의 선원은, 불행히도 중국인 선원 한 명만을 제외하고 모두 원주민에 의해 피살되었다. 유일한 생존자인 중국인 선원이 타구에 도착하여 관청에 사실을 알리자,이 사실은 즉시 영국 영사와 미국 공사에게 전해졌고, 주하문영사 르 젠더는 대만에 파견되어 이후의 항해안전을 위해 원주민부락의 지도자와의 회동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대만의 관리들은 ‘생번’(원주민 거주지)은 흉폭하여 말이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거주지역은 청조의 관할 밖이라는 이유로 협조를 거절하였다. 이런 지방관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분개한 미국정부는 그해 6월 대만에 군대를 출병시키고, 결국 원주민과의 협상에 성공하고, 이후 그는 장뇌분규를 해결하는 등 대만에 관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②일본의 대만 침략그러던 중 1871년 풍랑에 표류한 유구인이 대만 원주민에 의해 피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대만에 대해 야심을 불태우던 일본은 르 젠더 주하문영사에게 정보를 입수하고, 그는 일본 외무성의 고문으로 초빙된다. 이후 일본은 1874년 대만에 출병하는데 이것이 일본의 대만 침략이다. 일본이 대만에 출병하자 당시 청조의 외교를 관장하고 있던 이홍장은 철병을 권유하는 조회를 권유하였고, 그들은 처음에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원정군이 남부 대만의 무더위와 전염병에 시달리게 되자 뒷받침할 재정적 여유가 없던 일본은 철병을 조건으로 배상금을 요구하였고, 미국공사 웨이드의 알선으로 1874년 양국은 「북경전약」을 체결하였다. 그 후 1879년에는 종래 청·일 양국이 종주권을 주장해 오던 류큐를 병합하여 오키나와현 을 설치하였고, 중국의 용인을 받아냈다.③청일전쟁의 영향과 정권교체그러나 양국간의 보다 큰 분쟁은 조선문제를 둘러싼 양국간의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의 뒤처리를 하였다. 일본은 승전 대가로 거액(청나라 1년 예산의 2.5배)의 배상금과 중국의 영토인 랴오둥반도, 타이완, 펑후섬을 할양받았다(그러나 이후 삼국간섭에 의해 랴오둥반도는 반환하게 된다.) 이리하여 대만은 213년간 계속되었던 청나라의 통치를 벗어나 대만은 일본의 최초 해외 식민지가 되었다. 그 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에 복귀할 때까지 대만은 51년 간 일본 치하에 놓여 있었다.④일제의 통치대만은 이로써 일본 최초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정부는 대만의 역사와 문화, 언어, 풍속습관 및 사회상황이 일본과 다르다는 이유로 열강의 식민지 통치책을 원용하여 대만에 사용하였다. 대만인들은 초기에 대만민주국을 성립하고, 항일유격대를 결성하여 무장시위를 벌이는 등 대대적인 항일운동을 펼쳤으나, 대만총독부는 군정을 실시하여 무력탄압으로 맞섰고, 무방침주의에서 내지연장주의를 거쳐 황민화정책을 펼쳤다. 대만은 결론적으로 일본통치 하에서 식민지화와 근대화라는 이중적 역사과정을 겪었다. 일본은 유일한 아시아 식민 국가였다. 그들은 메이지유신 성공 후 전통적인 봉건사회에서 세계 강대국의 대열로 들어섰고, 그 후 대만과 한국을 차례로 식민지 삼으면서 ‘작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해 근대화를 일으켰다.전세계적으로 근대화는 서구와 북미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그를 모델로 한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아주 많은 면에서 서양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당국은 복색에 관한 풍속개혁과 근대식 교육을 실시하였고, 건물도 서구적인 양식으로 지었다. 그러나 반면 일본은 대만에 좋은 영향만을 가져다 준 것은 분명 아니었다. 식민지화란 식민모국이 제도와 정책을 통해 피 식민자를 차등의 지위를 두고 모국의 이익을 꾀하는 도구로 삼는 것으로, 일본은 대만에 대해 심한 경제적 착취와 민족 구별, 차별대우 등의 양상을 보였다. 일본은 대만을 점령한 다음 토지조사사업, 화폐와 도량형의 통일, 은행 설립 등과 같은 현대 경제 발전에 유리한 각종 조치를 만의 광복과 국민당의 접수공작제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5년, 점점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중,영, 미 3국은 포츠담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였다. 카이로선언으로 전후 대만 수복의 확실한 보증을 얻게 된 중화민국정부는 내부적으로 대만 접수 준비를 진행하였다. 1944년 3월, 국민정부주석 장개석은 중앙 설계국 내에 대만조사위원회 설립을 지시하여 설립하였다. 그러나 애초 임명된 조사위원회의 위원 6인 가운데는, 단 한 사람도 대만 출신이 포함되지 않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계획수립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조사위원회는 1년 반 정도 존속하며 대만의 현황을 조사하고 행정인원, 금융인재 등 인재를 양성하였다. 드디어 8월 15일 일본의 패망에 따라 대만은 독립하게 되고, 조사단은 계속된 조사의 진행과 동시에 터져나온 민중의 불만을 잠재우고 민심을 수렴하기 위해 행정장관공서는 각 지역 대표를 뽑게 하였고, 그 중 30명이 대만성 참의원 의회로 선출되었다. 당시 참의원선거의 경쟁률이 40대 1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광복 후 대만인들이 얼마나 공공사무와 지방정치에 깊은 관심을 보여줬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② 2.28사건대만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2.28 사건은 대만이 일본 지배에서 해방돼 국민당 군이 진주한 지 2년 뒤인 1947년 2월 28일. 타이베이 시내에서 밀수 담배를 팔던 대만 여인이 본토 출신 단속원한테서 구타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대개의 폭동이나 혁명이 그렇듯 이 사소한 충돌은 곧 대규모 사태로 확대된다. 흥분한 수천명의 대만인들이 타이베이 시내 전매청으로 쳐들어갔고, 이를 막던 경찰이 발포를 하면서 사태는 유혈사태로 번졌다. 도화선은 강압적 단속 과정에서 빚어진 폭력 행위였지만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데에는 부패한 정치기풍과, 대륙 출신들의 정권독점, 경제적 독점, 민생의 곤란 등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으며, 행정효율이 없는 사회주의에 가까울 정도의 엄격한 통제경제의 시행 등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 작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