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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oT 연계 비즈니스 모델(건강관리 어플리케이션 관련) 평가A+최고예요
    新건강관리 Application비즈니스 모델 보고서- IOT연계 비즈니스 모델 설계 조별과제1 보고서-학 기 : 2014년 2학기과목명 : 인터넷비즈니스모델교수님 :제출일 : 2014.10.15.조 장 :조 원 :목 차1. 사업개요- 사업명-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설명- 유사사업과의 비교2. 시장환경분석- 헬스케어시장의 성장- SWOT 분석3. 마케팅계획- 4P적 접근4. 정서적/정량적 기대효과5. 참고자료6. 기여도1. 사업개요- 사업명 : 新건강관리 어플리케이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설명본 어플리케이션 비즈니스 모델의 배경도는 위와 같다. 먼저 사용자가 스마트 체성분 측정 디바이스를 이용하여(스마트 체중계, 손목 착용 디바이스 등) 체성분 데이터를 업데이트하면, 디바이스는 Wifi 또는 블루투스를 이용하여 그 분석 정보를 휴대용 스마트 통신기기에 무선 자동 동기화한다. 이후 휴대용 스마트 통신기기 내부에서 측정할 수 있는 사용자의 기본 정보 및 위치정보를 앞서 동기화 된 체성분 분석정보와 함께 에 입력함으로써 이 비즈니스 모델의 역할은 시작 된다. 사용자는 어플리케이션 내에서 본인의 옵션을 선택하는데, 이는 식단관리, 운동관리, 트레이너 연계 서비스와 연결된다. 사용자가 자신의 건강관리 목적을 선택함으로써 (예: 근육증가, 체지방감소, 관절관리, 자세교정 등) 체성분 분석 정보와 함께 어플리케이션이 적절한 식단관리 정보, 운동관리 정보를 추천 랭킹으로 제공해주는 것이다. 즉, 위 어플리케이션은 자기관리와 웰빙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오늘날, 사용자의 데이터에 맞춰 건강관리 방법을 제안하는 소비자 맞춤형 어플리케이션이다.1) 온라인 건강식품 판매처 추천 부문 :소비자가 사전 선택한 알레르기 유무, 식이조절 강도 등의 옵션에 따라 판매처 정보와 상품에 대한 구성내용을 제공한다. 다이어트 도시락 판매사이트 또는 저염 식단 판매사이트, 건강 보조제 판매 사이트 등의카테고리로 나누어 가격비교 및 사용자 상태에 따른 판매처 추천순위를 제시한다.2) 주변 운동시설 추천분야에 진출한 ㈜인바디 (구 ㈜바이오스페이스)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기업공통점차이점비고Withings? 체중, 체지방률, BMI 측정? Wifi/블루투스 연동? 스마트앱? 자동무선동기화? 복수인원 측정가능20만원대. 심박수, 공기오염도 측정, Fitbit보다 호환 좋음, 강우측정, IFTTT사용 가능측정기록 8명까지Fitbit16만원대, 인터넷 정보 트래킹 (실시간 목표 달성률 모니터링, 칼로리 섭취량 모니터링), 친구와의 계정연결 가능측정기록 8명까지㈜ 인바디32만원, 맞춤문자상담, 인바디랭킹● WithingsWithings 사는 건강관련 웰빙 및 피트니스 전문 기기와 어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는 프랑스 기업이다. 심박계, 유아 모니터링 카메라, 유아체중계 등 스마트 체성분 분석계 외에도 많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대표제품 : < Smart body analyzer >Withings사의 스마트 체성분 분석계로 20만원 상당이다. 각종 체성분 데이터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것은 물론 본사의 강점 부분 중 하나인 심박수 측정과 공기오염도 측정 및 사용자의 야외활동을 돕는 강우량 측정 표시 기능등을 추가로 구성하여 주목받고 있다. 블루투스 또는 Wifi 연결로 무선 자동 동기화가 가능하며 경쟁사인 Fitbit사의 제품보다 Third party(RunKeeper, MyFitnessPal, Loselt과 같은 제 3자 기업 어플리케이션, 제품 등) 연동이 용이하여 사용자의 편리를 돕는다. 현재 사물인터넷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IFTTT(If this, then that-사용자의 설정에 따른 어플리케이션 간 조건부 연결 프로그램)와의 연결도 가능하여 더욱 유용하게 보인다.● Fitbit2007년 미국에서 설립된 Fitbit 사는 무선 연결 트래커, 무선 수면 모니터링 측정기, 체성분 트랙킹 체중계를 중심으로 우리의 몸에 착용하여 라이프 패턴을 변화시킬 수 있는 Life Styler를 개발하는 기업이다.대표 제품 : < Fitbiy Aria >Fitbi 효과를 고객이 얻을 수 있게 도와준다. 인바디 측정기를 통해 고객의 건강상태와 신체 부위별로 부족한 부분을 체크하여 체계적으로 운동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퍼스널 트레이너가 1대1로 고객의 운동 스케줄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운동 자세를 교정해줌으로써 최대의 운동 효과를 이끌어낸다. 또한 고객별로 맞춤형 식단 스케줄을 짜줌으로써 운동과 식이요법의 병행으로 건강한 몸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본 사업과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따로 시간을 내서 피트니스 센터를 방문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30회에 90만원에서 150만원에 이르는 비용 또한 부담스러운 편이다.● 합숙 다이어트 센터(FC 웰니스 센터)고객이 직접 합숙소에 들어가서 건강관리를 받는 시스템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피트니스 센터에서 제공하고 있는 PT 프로그램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피트니스 센터의 PT 프로그램에서 취할 수 있는 장점을 취하고 약점을 보완한 형태이다. 매일 매일 개인 트레이너와의 운동을 트레이너가 세워준 계획 아래 할 수 있다. 체계적인 운동 스케줄 뿐만 아니라 PT 프로그램보다 강화된 식단 관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PT 프로그램의 경우 식단을 추천해주기만 할 뿐 트레이너가 직접 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합숙 다이어트 센터에 입소할 경우 개개인에 맞는 정해진 식사가 제공이 됨으로써 체계적으로 식단을 조절하여 더 큰 다이어트 혹은 건강유지 효과를 나을 수 있다. 하지만 합숙소에 일정기간 입소해야하는 시스템 때문에 프로그램 참여가 부담스럽다는 단점이 있다.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4주까지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참여하기 위해 개인 스케줄을 정리할 수 있는 고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직장인의 경우 따로 장기간 시간을 할여해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또한 4주 프로그램의 경우 최소 290만원, 최대 1400만원에 육박하는 비용은 일반적인 고객 입장에서 상당히 큰 금액일 것으tified Self 트렌드 확산과 예방 중심의 의료 서비스 패러다임 변화 :스마트 기기와 센서 기술을 통해 일상에서 손쉽게 자신의 식사량이나 혈압, 운동량 등 건강상태 기록과 관리가 가능해 지면서 정량적 수치를 통해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려고 하는 Quantified self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Quantified Self 트렌드의 확산으로, 의료 서비스 패러다임이 질병이 발생하면 치료를 받는 치료/병원 중심에서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는 예방/소비자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헬스케어 서비스의 저변이 환자에서 일반인으로 확대되면서 스마트 헬스케어 시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4) 스마트 헬스케어 시대의 도래스마트 헬스케어 시장은 의료 소비자가 주체가 되는 의료 서비스 패러다임 변화, Wearable Computer와 같은 헬스케어에 적합한 Device의 발전, 고령화와 만성질환자 증가로 인한 사회적 니즈와 맞물려 유망한 신성장 동력 분야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의료+ICT의 융합이 해결책으로 부각되면서 주요 국가들은 정부 차원에서 지원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참고 자료3: 세계 주요국들의 헬스케어 관련 활성화 정책 현황]의료와 ICT의 융합은 e-헬스, u-헬스케어 등의 서비스로 병원과 진료 환경을 ICT 기술을 통해 개선하여 언제 어디서나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형태로 진화해 왔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스마트 헬스케어는 이에 더하여 의료와 복지, 안전 등이 복합화되고 지능화된 단계를 의미하며, 스마트 기기 보급 확산으로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운동량이나 식사한 칼로리, 스포츠 활동 기록 등을 관리 가능한 환경이 되면서 서비스와 제공자, 이용자의 범위도 확대되고 있다.국내·외의 각 종 헬스케어 관련 연구기관의 경우, u-헬스케어와 스마트 헬스케어, eHealth,Connected Health, Digital Healthcare 등을 혼용하고 있고, 의료+ICT 융합 시장의 규모 측정에 각기 다른 방법론과 기준을 제시하 따른 지속적 이용 가능성 :체성분은 이용자가 어떠한 노력을 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변화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용자는 변화하는 자신의 몸에 대한 측정치를 보며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이용을 계속 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2) Weakness① 디바이스 소유 필수 → 타겟 소비자의 폭 한정적② 디바이스의 가격이 높은 가격 :현재 대부분의 스마트 기기는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높은 디바이스의 가격은 서비스 이용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③ 고객들의 일회성소비 가능성 :많은 사람들이 건강관리를 결심했다가 금방 포기하곤 한다. 이처럼 서비스이용이 일회성으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있다.3) Threat① 디바이스 보편화시 기존 기업들의 사업 확장 가능성 :제시된 비즈니스 모델과 관련된 디바이스들이 보편화된다면, 기존에 관련 산업에 있는 기업들이 사업을 확장해 위협이 될 수 있다.4) Opportunity① 초기시장진출자 효과 :새로운 시장에 가장 먼저 진출한다면, 후에 새로이 시장에 진입하려는 기업에 대한 경우 우위를 가질 수 있다.② 헬스케어에 대한 관심증대 :최근에 헬스케어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헬스케어 관련 시장은 미래성장 가능 시장으로서 큰 가능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③ 구매력 높은 소비자들의 자기관리 욕구 증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1차적인 생리적 욕구보다 사회적 인정에 대한 욕구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자기관리 욕구 또한 증가하였다. 이는 헬스케어 관련 시장에는 이로운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④ 비만률 증가 추세최근 한국도 서구화된 식단에 의해 성인과 어린이 모두 비만률이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건강관리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3. 마케팅 계획- Product :나만의 헬스케어 매니저건강관리를 위한 운동이나 식단조절에 대한 관심은 누구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방대한 양의 정보를 검색하고 정보를 취사 선택하는 과정에서 많은 소비자들이 포기한다. 우리 App은 소비 한다.
    경영/경제| 2014.12.11| 14페이지| 2,500원| 조회(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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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해고 해석
    『발해고』《발해고》(渤海考)는 조선 정조 8년(1784년)에 규장각검서로 일하던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에 관해 저술한 역사서이다. 유득공은 발해에 대한 전문 역사서가 없음을 통탄하고 조선과 중국 및 일본의 역사서 24종을 참고하여 직접 발해에 관한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1권본과 4권본의 두 종류가 있다.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으로 부른 최초의 역사서이자 최초의 발해 전문 역사서이다.1. 高麗不修渤海史하니 知高麗之不振也라.고려불수발해사 지고려지부진야고려는 발해사를 엮지 않았는데, 고려(의 세력)가 떨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2. 昔者에 高氏居于北하여 曰高句麗라 하고, 扶餘氏居于西南하여 曰百濟라 하고, 朴昔金氏 居于東南하여 曰新羅라.석자고씨거우북 왈고구려 부여씨거우서남 왈백제 박석김씨 거우동남 왈신라옛날에 고 씨가 북쪽에 거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 씨가 서남에 거하여 백제라 하였고, 박석김씨가 동남에 거하여 신라라 하였다.3. 是爲三國이니 宜其有三國史한데, 而高麗修之하니 是矣라.시위삼국 의기유삼국사 이고려수지시의이것이 삼국이니 마땅히 이에 삼국사가 있었고, 고려가 이를 엮어낸 것은 옳다.4. 及扶餘氏亡하고 高氏亡함에 金氏有其南하고 大氏有其北하여 曰渤海라.급부여씨망 고씨망 김씨유기남 대씨유기북 왈발해부여 씨가 망하고 고 씨가 망하여 김 씨가 그 남쪽에 영유하였고, 대 씨가 그 북쪽에 영유하였으니 발해라 하였다.5. 是謂南北國이니 宜其有南北國史한데 而高麗不修之하니 非矣라.시위남북국 의기유남북국사 이고려불수지비의이에 남북국이라 일컬으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엮어내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6. 夫大氏는 何人也오? 乃高句麗之人也라.부대씨 하인야。 내고구려지인야。(저) 대씨는 어떤 사람인가? 곧 고구려 사람이다.7. 其所有之地는 何地也오? 乃高句麗之地也라.기소유지지 하지야 내고구려지지야그가 소유한 땅은 어떤 땅인가? 곧 고구려 땅이다.8. 而斥其東하고 斥其西하고 斥其北하여 而大之耳러라.이척기동 척기서 척기북 이대지이그리고 그 동쪽을 개척하고, 그 서쪽을 개척하고, 그 북쪽을 개척해서 땅을 넓혔을 뿐이다.9. 及夫金氏亡하고 大氏亡하니 王氏統而有之曰高麗라.급부김씨망 대씨망 왕씨통이유지왈고려(저)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함에 이르니, 왕씨가 그 땅을 통일하고 소유하면서 고려라 하였다.10. 其南有金氏之地則全이나 而其北有大氏之地則不全이라.기남유김씨지지즉전 이기북유대씨지지즉불전그 남쪽에 있는 김씨의 땅은 (곧) 온전했으나, 그러나 그 북쪽에 있는 대씨의 땅은 (곧) 온전하지 못했다.(그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소유함은 온전하였지만 그 북쪽으로 대씨의 땅을 소유함은 온전하지 않았다.)11. 或入於女眞하고 或入於契丹이라.혹입어여진 혹입어거란어떤 곳은 여진으로 들어갔고, 어떤 곳은 거란으로 들어갔다.12. 當是時에 爲高麗計者면 宜急修渤海史라.당시시 위고려계자 의급수발해사이때를 당하여(이 때에) 고려를 위해 헤아려 보면, 마땅히 급히 발해사를 편찬했어야 했다.13. “인가! ”이라 하고서 으로 하였다면 은 이라.(발해의 역사를 편찬한 역사서를) 잡고 여진을 꾸짖으며 (말하기를),“어찌 우리 발해의 땅을 돌아가지 않았는가? 발해의 땅은 곧 고구려의 땅이다.”라고 말했다면 한 장수로 하여금 가서 그것을 가져오게 하면 토문 이북의 땅을 가질 수 있었다.14. “인가! ”이라 하고서 으로 하였다면 는 이라.(발해의 역사를 편찬한 역사서를) 잡고 거란을 꾸짖으며 “어찌 우리 발해의 땅을 돌아가지 않았는가? 발해의 땅은 곧 고구려의 땅이다.”라고 말했다면 한 장수로 하여금 가서 그것을 가져오게 하면 압록 이서의 땅을 가질 수 있었다.15. 하여 으로 하니 이나 요 이나 이라.결국 (고려는) 발해사를 닦지 않았고 토문강 이북과 압록강 서쪽으로 하여금 어느 성씨의 땅인가를 알지 못한다. 여진을 꾸짖고자 하나 그 (꾸짖을) 말이 없고 거란을 꾸짖고자 하나 그 (꾸짖을) 말이 없다.16.마침내 고려가 약한 국가가 된 것은 아직 발해의 땅을 얻지 못한 까닭이니 크게 한탄스럽구나!17. 或曰 渤海爲遼所滅이니 高麗何從而修其史乎아(혹왈, 발해위요소멸 고려하종이수기사호)혹은 말하길, 발해는 요나라에게 멸망 당했으니 고려가 무엇을 쫒아서 그 역사를 정리하겠는가?라 하였다.18. 此有不然者라(차유불연자)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19. 渤海憲象中國하니 必立史官이라(발해헌상중국 필입사관)발해제도는 중국을 본받아 반드시 사관을 세웠다.20. 其忽汗城之破也할 때 世子以下奔高麗者가 十餘萬人이니 無其官則必有其書矣라(기홀한성지파야 세자이하분고려자십여만인 무기관즉필유기서의)그 홀한성이 깨졌을 때, 세자 이하로 고려로 도망친 자가 십여만 인이니, 만약 그 관리(사관)가 없어도 반드시 그 책(역사서)은 가지고 있었으리라.
    인문/어학| 2014.06.20| 5페이지| 1,000원| 조회(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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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전기의 유교사상
    조선 전기의 유교사상가. 여말선초의 유교사상의 도입과 성격1. 고려 말~조선 초 사이의 유교사상의 전개와 그 성격조선 초기의 유교의 학문경향은 위로 고려말기의 유학을 계승하고 아래로부터 조선중기 정주학 전성시대를 연결하는 중간시기가 되는 만큼 학문경향도 두 시대의 중간적인 색채를 보이고 있다. 고려 말기 유학의 학문적 경향은 유학의 요소 중에서 실제적인 정치 ,경제 ,법률과 문장을 학습의 대상으로 하는 한(漢),당(唐)나라의 학풍을 이어받은 반면에 조선 중기의 학문적 경향은 그 유학의 요소 중에서 주로 이론 방면이고 철학부분인 성리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중국 송(宋)나라의 학풍을 가졌던 것인데 즉 고려 말기까지 전래된 문장, 정치 중심의 한, 당 의 학풍을 답습하는 동시에 이론 중심인 리(理)학 중심의 성리학적 학풍이 혼합된 양상을 보인다.2. 고려 말의 사대부들이 조선유교에 끼친 영향안향(1243~1306),백이정(1247~1323)등에 의해서 수용되기 시작한 주자학은 고려 말에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던 신흥사대부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안향의 교육진흥책과 주자 존중의 정신, 백이정의 주자서 도입, 권보(1262~1346)가 추진한 사서집주의 보급, 그리고 사서를 초장 시험 과목에 포함시킨 충목왕 즉위년(1344)의 과거제도 개정 등은 주자학 확산의 주요한 계기들이었다. 나아가 1367년(공민왕 16)에 대사성에 임명된 이색(1328~1396)이 교육체계를 사서오경제로 개편하고 정몽주, 이숭인 등을 교관으로 삼아 경학을 강론한 것은 주자학의 이론적 심화에 계기였다. 이런 여러 가지 제도적 도입은 새로운 신진사대부의 등장을 위한 좋은 토대를 제공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 후기의 성리학자들에게 성리학의 중심개념이라고 불리는 이(理)와 기(氣)에 대한 심오한 관심과 이해가 깊다고 보기엔 힘들다. 주로 그들은 시와 문장 짓기를 즐겨하며 경세론적인 실천적 면모를 드러냈기 때문이다.3. 유학이 조선의 건국이념이 된 배경고려 말에 이에 대한 대응으로써 성리학은 구체성과 실천성을 부각시켰다. 즉 현실문제와 유리된 사장적 사조를 극복하고 유교적 민본주의를 구현하려는 실천성과 실용성이 그 특징이었고 경세의 정치적 실효성을 목적으로 하는 정주학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4. 조선 전기 성리학의 시대구분한상윤: 1. 이조 초기의 유학 2. 지치주의 유학 3. 성리학이병도: 1. 고려 후기의 유학 2. 과도기의 유학 3. 도학정치론의 대두 4. 화담과 희재의 성리학 5. 퇴계, 율곡 시대의 성리학차이는 한병윤이 신라?고려 유학에 포함시켰던 정도전?권근?길재가 김시습 및 세조?성종대의 훈구파?절의파?청담파 학자들과 더불어 ‘과도기 유학’에 포함되는 대신에 김종직과 그의 문도들이 ‘도학정치론의 대두’에 포함됐다는 점이다.이 전통적인 구분은 사림과 훈구의 대립을 통한 성리학의 발전을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나. 관학파의 유교사상1. 관학파란 15세기에 관학(성균관)을 거쳐 성장하여 집현전 등의 국가기관을 거쳐 중앙정치를 담당한 관료 유학자. 엄밀히 말하자면 훈구파는 계유정난, 중종반정 등에 참여한 후기 관학파의 일부를 가리킨다.2. 관학파의 사상적 배경1) 정치적, 사회적 상황: 창업기-관학파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인 혼란을 방지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즉, 개혁보다는 왕조의 수성을 우선시한 것이다. 이는 왕안석의 변법을 비판한 변계량, 양성지, 신숙주 등의 상소에서 확인된다. 더욱이 그들이 이상으로 삼은 성리학적 질서는 도덕을 매개로 한 신분적 위계질서의 전제를 요구했지만, 조선 초기에는 그러한 전제가 성립하지 않았다.2)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차이?: ‘이’ 범주의 약화-고려 말에 성리학이 한반도에 도입되기는 하였지만, 그 이해가 높은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관학파는 철저한 성리학자인 사림과는 다르다.3. 결과1: 관학파는 정치, 사회적으로 치도와 치법의 조화를 추구하였다.-치도(도덕에는 이기, 태극, 천리인욕 등 성리학의 핵심개념을 기초로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사회를 설명하였다. 우주만물의 근원인 태극이 동정하여 음양이 생기고 음양이 변합하여 오행이 생기며 음양오행과 태극이 묘합, 응취하여 우주만물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극과 음양오행의 기가 동정하는 과정에 차이가 생기고 이로써 인(人)과 물(物)의 차이가 생겨나며 기의 차이에 따라 인간이 되고 물이 되며 금수가 되고 초목이 된다고 하였다. 이때 인간은 기본적으로 통정한 기를 타고나지만 통정한 기 가운데 청탁 ,고저 ,장단 ,후박 등의 차이가 있어 이것이 인간내부의 차별을 가져오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심은 허령하고 심 가운데 만물의 리가 갖추어져 있으며 존심을 통하여 원래의 마음 상태를 유지하고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이치를 외부 사물을 통하여 밝히고 이를 기초로 사물의 완성을 이루도록 한다는 존심, 궁리의 주자학 방법론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초기 관학파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권근은 천인합일의 우주관을 제시하였으며 이는 퇴계의 이기호발설의 근거가 되었으며 사단칠정 논쟁의 초석이 되었다. 그는 사단은 리의 근원으로 곧 성의 발현이니 순선한 것이고 칠정은 기의 근원으로 심의 발현이니 선과 악이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리는 최고의 범주에 있으며 사람의 본성 역시 하늘로부터 천성을 부여받은 것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기질은 다르지만 부여받은 천성에 인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에 유교적 도덕정치와 예의 실현에 초점을 두었다,6. 치도와 치법의 조화를 추구한 예1) 관학파의 사상적인 중심인물인 정도전이나 후기 관학파들로부터도 찾아볼 수 있다.-제도나 형벌로써 백성을 인도하면 백성은 형벌을 피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을 모른다. 덕과 예로써 백성을 인도하면 백성은 부끄러운 일을 알고, 자발적으로 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현실을 바로잡는 수단으로서 형벌은 예치와 덕치를 보완…- 심은 통치의 근본이고 법은 통종 시기에 이루어졌던 대간들의 탄핵 활동 중 상당수가 세종에 의해 제지된 사례나 세조 시기의 관학파가 세조의 왕권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사례가 있다. 이는 관학파 스스로 ‘수성’을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과 중앙집권의 용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6. 결과2: 관학파는 후대의 사림파에 비해 사상적인 면에서 현실주의적인 특성이 나타난다.1) 관학파는 실용성의 차원에서 非성리학을 포섭하였다.-정도전은 성리학 외의 학문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대표적인 사례는 병학으로, 그는 팔진삼십육변도보, 태을칠십이국도 등의 병서를 저술하였다. 병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후대의 관학파도 마찬가지이며, 변계량의 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세종 대의 집현전에서 이루어졌던 산학, 역학, 의학, 자학, 농학, 천문학 등의 실용학문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저술 활동도 현실주의적인 특성을 보여준다.2) 관학파는 경학에 근본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장도 중시하였다.- 대표적으로 양촌 권근은 경학에 능통하여 을 비롯한 성리학 저서를 썼지만, 동시에 사장에 밝았던 사람이다. 예를 들어 권근은 태종대에 을 지어 태종으로 하여금 문과 초장을 제술로 정하도록 하였다. 이는 외교적 사안에 있어서, 사장의 능력이 현실적으로 필요함을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한나라 시대의 문장은 사대의 요무이니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나라의 사대, 교린에는 사명이 막중하니 단청보불로 나라의 아름다움을 선양하고 국체를 유지하는 것은 실로 문사들의 덕택입니다. ?최항3) 관학파의 사상에는 중국과 조선의 현실적 차이를 인정한 민족주의적 경향이 나타난다.-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에 의해 혁파될 때까지 소격서가 유지되었고, 각지에도 도관이 남아있었다. 이는 조선 건국의 천명에도 나타나는데, 권근의 건원릉(태조의 릉) 비문에서는 천명에 따른 창업이 강조되고, 명의 승인은 부차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관학파 집권 시기에 많은 민족적 성향의 역사서가 편찬되었다는 사실도 관학파의 그러한이 비로소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을 제창하여 후진들을 인도하고 바른 마음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사장(詞章/辭章)을 중시했던 사장파의 견해와 달리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사장에 치우쳐져 있다는 것이 지배적이다.그의 사상을 집약하자면, 아버지 김숙자의 영향으로 소학 중시했고 사서오경 등 경전공부를 할 때에 주돈이, 주희 등의 학문을 통해 공명의 근원을 공부했으며 예의 실천과 예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즉 유교적 의례의 강조를 처음 주창했다.김굉필의 도학은 마찬가지로 소학을 중시하고 실천하였다. 그가 사장학 중심에서 도학 중심으로 넘어가게 된 계기가 소학을 중시하면서부터이다.-“문장에 힘썼는데도 천기天機를 알지 못했는데, 소학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네.”또한 경전을 통한 궁리(窮理) 중시했고 수기(修己), 안인(安人), 치인(治人)을 실천하는 유교적 실천정신을 강조했다. 하학(下學)과 의리(義理)의 교육에 힘썼고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는 계신(戒身)을 중시하고 그 바탕으로 도덕적 마음을 보호한다는 성(誠)과 경(敬)의 발현을 주창했다.정여창의 도학에 대표적인 것으로는 성정발현론이 있다. 성정발현론은 성정을 갈고 닦으면 자연스러운 표현의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성종시대만 하더라도 유생들이 경전공부는 차치하고 사장학에만 힘쓰는 모습을 보이는데, 정여창은 시는 성정의 발현이므로 억지로 공부할 필요 없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성정을 다스리는 공부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굉필 정여창은 이러한 면에서 문학에 지나치게 치우쳤던 김종직을 비판하며 그의 도학을 보완하였다. 이로써 후대 문학자들은 ‘도로써 문을 하는’ 자세를 계승한다. 또한 그는 성동기이를 주창했다. 성동기이는 선과 악은 성(性)이 같으나 기(氣)가 다르며 유교와 불교는 도가 같으나 행적이 다름을 설명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리선기후론을 강조했다. 리는 기보다 선행하고 있다. 리가 가장 근본적인 것이고 기는 이에 따라오는 것이라는 학설로, 주희의 이기설을 계승한 것이다.도학파는 당시에 완결된 했다.
    인문/어학| 2014.06.20| 8페이지| 2,000원| 조회(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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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중기의 유교사상
    조선 중기의 유교 사상Ⅰ. 조선 유학 사상의 흐름1. 조선 유학 사상의 흐름조선 유학 사상은 서경덕, 이황, 이이 대에 이르러 꽃을 피우기까지 크게 세 단계를 거쳐 왔다. 첫 번째가 건국 초기 관학파가 주도한 통치 이념으로서의 유학 단계이고, 두 번째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젊은 사림파들의 지치주의 유학 단계, 마지막이 이황, 이이로 대표되는 조선 성리학의 전성시대인 것이다. 즉, 조선 유학 사상의 흐름은 주자학을 계승 발전한 성리학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성리학은 일명 리학(理學)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유교철학을 의미한 것이다. 조선 유학은 이 성리학을 연구하고 토론해 비로소 절정에 이른 것이다. 즉, 경학에 통달하고 역사에 밝은 학문[通經明史]을 그 ‘물의 발원지’라고 보며, 문장의 학문을 ‘물줄기의 시기’라고 보고, 지치주의로 향하는 정치와 교화의 실천을 ‘강의 시기’라고 보면, 이 성리학의 이론유학은 바야흐로 ‘해양의 시기’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시기야 말로 중국 주자학이 조선에 와서 만개한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조선의 사상이 적지 않게 동양 또는 세계 사상사에 공헌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그 후 유학은 본래의 의미가 퇴색, 진로를 바꾸어 예학 중심으로 변하여 예송(禮訟)문제를 자아냈고, 모화(募華)사상의 고취로 병자호란 때에 화(和)·전(戰) 양파로 갈려 삼학사(三學士)의 순절(殉節)을 야기한 반면, 유자의 거의 모두가 모화사상에 도취한 결과를 나타내었으니 선조대 이후의 유학사상은 서서히 정점에서 내려오는 흐름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2. 성리학이 융성하게 된 요인인조, 명종 양 시대와 선조 때는 성리학 연구의 전성기였다. 묘하게도 조선 성리학계의 태두인 서경덕, 이황, 이이가 차례로 이 시기에 나와 한 시대를 풍미했다. 사적으로 보면 우연한 일 같기도 하나, 그 유래에는 자못 이유가 있다. 조선에서 성리학이 융성하게 된 요인으로 크게 두 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먼저, 성리학은 조선의 건국이념이라는 점이다. 조선은 국을 대표하여 가장 대담하게 학자 정치를 실행한 일을 제외하면 그가 조선 유학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즉, 조광조를 비롯해 지치주의를 주장했던 젊은 유학자들은 유학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보다는 “하은주 시대를 이 시대에 재현해 보이겠다”는 혈기와 신념아래 하나로 뭉쳤고 급진개혁을 추구했던 것이지 이기론 같은 형이상학적 이해가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이다.그러나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지치주의자들은 지방에서 학문에 열중하는 수많은 유자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때문에 유학자들이 심도 있는 이기론, 사단칠정론 등을 연구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언젠가는 다시 세상에 나가 그의 뜻대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고, 실제로 선조 대 이후 사림이 재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정리하자면 기묘사화 이전까지 통치 이념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그래서 이론적 측면에서는 심도가 얕았던 성리학이 기묘사화를 거치면서 이기론을 중심으로 우주론, 심성론, 윤리학 등 형이상학적 영역으로 확장하게 되었다.우리나라의 학문은 어느 시대에 시작한 것인가? 전조(고려)의 말엽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권근의 “입학도설”은 모순된 것 같고, 정포은(정몽주)은 리학의 시조라 불리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직을 편안케 한 신하이지 유자는 아니다. 그러하니 도학은 조정암(조광조)에서 비로소 일어나 퇴도(이황) 선생에 이르러서야 유자의 모습이 이루어졌다. -“율곡전서”율곡 이이도 자신의 저서인 “율곡전서”에서 위와 같이 서술하였다. 그 또한 조광조를 기점으로 조선의 유학이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조선 성리학은 기묘사화를 기점으로 정치적 도구에서 하나의 학문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종교로 바뀌어 나갔다.Ⅱ. 이기론1. 이기론의 정의이기론(理氣論)은 우주와 인간의 존재 구조와 그 생성근원을 유기적으로 해명한 신유학(성리학)의 이론이다. 이기론은 이학(理學)·기학(氣學)이라고도 부르며, 우주론보다 심성론에 치중했기 때문에 심학(心學)이라고도 일컫는다.2 것이지 그 본원으로 돌아가는 이치는 없다"는 말에 따라 태허-만물-태허라는 기의 순환을 인정하지 않고 기가 큰 본원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것으로 본다. 특히 인간 형체의 생성과 소멸은 불교의 윤회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기의 순환을 더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왜 주희는 기의 법칙 내지는 존재의 원리 정도로 간주하면 별문제가 없을 이에 존재의 성격을 부여하여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주희가 단순한 자연 철학자가 아니라 유학자, 즉 윤리사상가이고 경세가였기 때문이다. 주희의 학문하는 목적은 자연의 질서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유교적 윤리규범의 절대성을 밝히고 그것을 스스로 체현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에서 그것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자연 세계의 사물은 존재하기만 하면 예외 없이 그것의 법칙을 따라 운동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양상을 보이기까지 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연 상태 즉 기의 차원에서는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영위하는 데 필수적이고 또 주희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인 삶의 법칙인 윤리 규범이 확보될 수 없었다. 여기서 이는 기의 조리로서의 이가 아닌 성즉리의 이가 되고, 소이연의 이와 더불어 소당연의 이가 되는 것이다.주희는 유가의 전통적 인간관에 바탕하여 인간의 기질에서 발현되는 본성이 아닌 인의예지라는 사회적 규범을 성으로 삼고 이것을 확보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이는 자연히 기로부터 독립된, 더 나아가서는 기 ? 인간의 개인적, 육체적 존재 ? 를 제어하는 보다 상위의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로 이러한 주희의 목적의식 때문에 주희의 이는 인의예지이면서 동시에 태극이 되는 것이다. 법칙이면서 존재이고 윤리적 규범이면서 기의 조리라는 이중성을 지닌 주희의 이 개념은 강조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Ⅲ. 조선중기 유학자1-1. 서경덕의 생애일찍이 진사가 되었으나 과거에 응하지 아니하고, 정치에 관심을 끊고 학문 연구와 신념- 가치론적 관점퇴계의 생애는 대부분이 사화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퇴계는 이러한 시대를 맞아 윤리강상의 재건과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이 시대적 과제라고 생각했다. 인간 개체로는 天理가 곧 人性이므로 그 선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회적, 정치적으로는 사회정의가 실현되고 의리가 구현되는 도덕사회의 건설이 주된 관심사였다. 이처럼 그의 일차적 관심은 윤리문제요 가치의 문제였다. 도덕적 인간이 되고, 도덕적 가정을 이루고, 도덕적 사회, 도덕적 국가를 만드는 것이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 이기 이원론퇴계 이황은 태극생음양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태극이 움직여 양을 낳고, 고요하여 음을 낳았다는 원리이다. 태극은 음양의 능생자로서 음양인의 기 생성원인 및 생성원리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태극과 음양의 관계로부터, 理[태극]과 氣[음양]의 관계도 리선기후(理先氣後)라고 주장한다. 윤리적 입장에서 그는 理와 氣의 가치적 구별을 강조하고 理氣의 혼동을 경계하였다. 퇴계는 理를 선한 것, 氣를 악의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또 理는 귀한 것이라면 氣는 천한 것이요, 理는 높은 것이라면 氣는 낮은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가치론적 理氣의 구별은 그의 윤리중심, 가치 중심의 철학적 입장에서 연유한 것이다.4-1. 이이의 생애율곡은 퇴계 철학을 보완하여 한국 성리학을 발전시킨 유학자이다. 그는 조선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관직은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스스로 옳지 못함을 깨닫고 돌아와 정학에 전념하였다.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분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 뒤 그를 문묘에 제향하는 문제허엽 박순 등이 화담의 학설을 잇고 또 퇴계와 율곡의 화담 비판에 대해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학파로서의 성격을 유지했으나 학문적으로는 화담의 학설이 지닌 주정적인 성격과 도덕성을 형이상학적차원에까지 끌어올리지 못한 기일원론의 한계 때문에, 또 정치적으로는 허엽 등은 동인에, 박순 등은 서인에 가담함으로써 단일학파로서의 성격을 계속 지니지 못하고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에 흡수되었다.3. 남명학파남명학파는 경상우도에서 처사적 삶을 지킨 조식(1501~1572)의 학풍을 계승한 학자군으로서 남명학파에서 배출된 주요 인물로는 정인홍, 오건, 최영경, 곽재우, 김우옹, 정구 등을 꼽을 수 있다. 남명학파는 남명이 강학의 중심지로 삼았던 김해의 산해정이나 합천의 뇌용정, 지리산 덕산의 산천재 등지에서 남명과 학문적 인연을 맺은 학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남명의 학문은 ‘치용실천’ ‘반궁체험’ ‘반구자득’ 등의 표현에서 보이듯 실천성에 무엇보다 중점을 두었다. 남명이 이론논쟁에 별다른 중점을 두지 않고 ‘학자들은 모름지기 배운 것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한 것은 그의 사상의 핵심이 ‘경의’에 있기 때문이다. 남명이 경의를 강조한 것은 창벽 간에 ‘경의’ 두 글자를 붙여 놓고 ‘이 두 글자가 천지에 일월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한 것, 경의검에 ‘내명자경 외단자의’라고 새긴 것, 죽음에 이르러서도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으로 ‘경의’를 선택한 것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경의 두 글자는 지극히 긴요하고 절실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공부가 익고 익으면 가슴 속에 일물의 가리움이 없게 되는 것인데 내가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 수양을 강조하는 ‘경’은 성리학의 정착과 함께 사림파 학자들이 체득한 개념이지만, 실천성을 강조하는 ‘의’와 함께 ‘경의’를 해석하고 경과 의를 동시적으로 해석한 것은 남명 사상의 핵심이다. ‘의’를 중시한 학풍은 남명학파의 지역적 기반인 경상우도의 학풍을 특징짓는 용어가 되기도 하였다. 남명학파는 인조반정으로 북인세력이 몰락하면서 퇴계학파에 흡수되었지만,다.
    인문/어학| 2014.06.20| 11페이지| 2,000원| 조회(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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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의 실학사상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서론Ⅰ. 실학사상에 대한 논의들1. 실학 개념의 시대에 따른 변화2. 실학 사상의 특성3. 실학이 나타나게 된 배경가. 내재적 요인나. 외재적 요인4. 실학의 연구방법과 분야Ⅱ. 실학사상의 정치론1. 실학적 왕도정치론2. 정치제도 개혁론가. 권력구조 개편론나. 관료제도 개혁론다. 과거제도 개혁론라. 군사제도 개혁론Ⅲ. 대외인식과 역사관의 변화1. 대외인식의 변화2. 역사관의 발전Ⅳ. 경제, 사회사상1. 토지개혁론2. 상공업진흥론3. 사회개혁론결론서론조선 후기의 학문들 중 주목받고 있는 것 하나는 실학사상이다. 실학사상은 한국이 근대식민지 시기를 넘어왔을 때부터 주목받았으며, 그만큼 많이 연구되었으며 상당한 논의가 이루어진 연구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실학사상에 대한 논의를 약간 언급한 뒤에, 실학사상이 일어나게 된 여러 가지 배경들을 확인한 후, 실학사상에서 다루어졌던 것들을 들을 각각의 논의별로 나누어서 서술할 것이다.Ⅰ. 실학사상에 대한 논의들보통 실학은 조선 후기인 17세기 이후의 여러 사회개혁 논의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또 널리 알려진 의견으로는 “‘근대(지향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조선 후기에 등장한 일군의 집단적 사상”이라는 것이 있다. 최근에는 이에 대한 비판으로써 실학이 근대지향적인 학문 이였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반대되는 학설들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의 많은 연구들이 실학이 근대성과 연결되며 주자학과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최근에는 실학을 조선 유교 전체 진행과정의 맥락 속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실학 연구에서 말하는 ‘실학’, ‘근대성’에 대한 성찰들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실학사상에 대한 여러 가지 논쟁을 다루기보다는, 기존의 유력했던 논의에 따라서 실학사상들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만 좀 더 주목하려고 한다.1. 실학 개념의 시대에 따른 변화실학이라는 용어는 17세기 후반에만 쓰인 것이 아닌 조선시대 전반적으로 쓰였던 말이다. 실학이라는고, 이를 통해서 실학이 발생 가능한 환경이 마련되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후기로 들어갈수록 통치질서가 경직화 되고 소수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조선은 변화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실학이 나타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나. 외재적 요인병자호란의 참패와 명의 멸망으로 조선 사상계도 변동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정통론과 화이론에서 벋어나 조선중심주의에 입각한 소중화론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 학자들은 조선만이 중화의 전통을 보전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을 보전해야 하며, 심지어는 중국에 다시 전해주어야 한다고 까지 보았다. 또한 그 당시 중국을 통해 서구의 여러 학문들이 조선으로 흘러들어왔다. 수학, 천문학, 농학 등의 서적들과 천주교 관련 서적들도 들어왔다. 천주교 사상들은 실학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서구의 과학기술들도 실학에 영향을 주었다. 거중기 같은 실용적인 기구를 제작하거나 천문학, 지리학, 기하학들의 연구가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청의 고증학도 실학에 영향을 주기는 하였으나, 고증학적 전통은 백과사전적인 연구 이외에는 제한적이었다. 이는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 중 일부는 고증학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을 근거로 들 수가 있다.4. 실학의 연구방법과 분야실학자들은 연구방법으로써 박학(博學)을 중시하였다. 박학은 원시유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졌지만, 성리학자들은 경학(經學)을 중시하면서 중요도가 떨어지던 방법이었다. 실학자들은 이와 달리 원초유학에서의 박학 방법론을 중요시했다. 실학자들은 광범위한 현실을 파악하여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경학을 상대화시키려 한 것이다. 박학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연구는 백과사전식 형태를 띠게 되었다. 또한 실학은 성리학과는 다른 왕도정치론을 기본으로 삼아 각 분야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전통에 대한 연구를 통해 화이관을 탈피하려고 노력한 것이나, 정치분야의 개혁, 수취체계와 군사제도의 개혁을 논하기도 하였다. 또한 사회경제적 독점하여 왕권과 재상권에 대해서 제한을 가해 중앙정부의 정책집행을 방해했던 상황을 막기 위해서 간관제를 확대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새로운 왕도론을 주장했다. 이는 기존의 주자학적 왕도론과는 다른 것으로, 형정(刑政)과 같은 강력한 규율을 통치 수단으로 하는 패도까지 인정하는 왕패병용론(王覇竝用論)을 주장하였다. 이는 반복되는 환국의 결과로 국정 운영을 독점했던 노론의 전횡을 바로잡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상한 것이다.홍대용의 관료제 개편론은 왕권강화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는 국왕이 최정점에 있는 피라미드적인 통치 구조를 주장하였고 국왕의 명령이 효율적으로 각 지방에 전달될 수 있도록 중앙뿐만 아니라 명령을 하달 받고 실행하는 지방관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홍대용은 왕권의 강화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는 국왕이 법제상의 지배자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조정의 관리에 대한 임명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왕권을 견제하던 간관제도의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해 왕위는 장자상속의 원칙에 따라 계승되어야 하며 특히 국왕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심을 중요시하였다.19세기에 이르면 정치운영의 형태가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바뀌면서 국가기강의 문란과 관료체제의 부패, 극심한 사회경제의 혼란이 심화되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정약용은 관료기구의 개혁에 주력했다. 그는 6조에 속한 아문들을 다시 정비하고 승정원 및 왕실관련 아문들을 모두 이조에 예속시켰다. 군영의 아문의 경우도 각 부서 흩어져 있던 것을 병조에 소속시켜 명령의 전달체계를 일원화시켰다. 정약용은 각 기능이 집결된 권력기관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각 권력기관들의 상위에 의정부를 두고자 하였다. 그는 비변사의 중추부를 혁파하여 변경의 임무만을 담당하게 하고 비변사가 장악하던 군국기무에 대한 처리를 의정부에 회복시켰으며 또한 의정부에 고위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부여하였다. 따라서 의정부가 명실상부한 관료기구의 최정상이자 중심이 되는 행정체계를 주장한 것이다. 그을 배양하게 하려는 의도였다.라. 군사제도 개혁론실학자들은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군사제도를 개혁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군사제도가 중앙집권적 왕도정치의 유지를 보장해 줄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이 개혁의 배경에는 군역의 부담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인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두 번의 전란을 겪었는데도 전쟁에 대한 대비가 소홀한 국가의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작용했으며 국가와 국토에 다한 방위 의식을 크게 자각하고 있었다.실학자들은 국가의 상비군사력을 강화하고 민인들을 수탈하는 제도로 전락해버린 군정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정약용과 홍대용은 병농일치적 군정을 주장했다. 이는 농업 생산력에 의존하여 군사제도를 개편하려는 시도로 농업, 토지제도와 군사 분야를 통합 운영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종래의 오위제(五衛制)의 병농일치적인 군정과는 구별되는데, 이전은 징병제를 통한 강제동원을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실학자들의 개혁안은 토지소유권의 보장에 따른 의무로서 의무병역을 주장한 것이다.또한 수포제(收布制)에 기반을 둔 오군영제(五軍營制)를 반대했으며 민중의 군포 부담을 줄이려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홍대용은 지방 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중앙을 정점으로 하는 지휘체계가 일원화된 8도의 국방을 담당할 백만 대군의 양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홍대용은 특수적 군대의 창설과 이 특수 병과를 담당하는 참모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는데 이 생각은 근대적인 형태의 것이었다. 홍대용 이외에도 실학자들은 대체적으로 향촌 제도와 토지 제도의 개혁과 함께 군사 조직의 개혁을 실시하고자 하였다.그리고 실학자들은 양역의 폐해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들은 양인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군역을 지우는 연령층을 좁히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양인들만이 군포를 부담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들은 군포를 호포제나 구전제(口錢制) 로 바꾸어 신분의 차별이 없이 모두가 군사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양인과 천인 가리지 않고 군역을 부담해야본을 연구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화폐의 전국적 유통과 해외통상의 현황 등 실용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고 일본 문물의 선별적 수용론을 개진하였다. 정약용 또한 유배지 강진에서 주자학을 비판하는 일본의 고학파(古學派) 유학자들의 문집을 본 것을 계기로 일본 사회제도와 문화 발전상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2. 역사관의 발전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역사를 성리학과 구별되는 독자적 학문체제로 인식했다. 그들은 주자의 학문적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지만 송학 위주의 윤리 도덕적 역사인식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고 있었다. 이는 사학을 경학으로 인식하던 단계를 벗어나 독자적 학문으로 인식해가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조선 초·중기에 비해서는 진전된 것이지만 완벽한 역사의 독자성 인식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실학자들은 중국사와 구별되는 자국사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을 강화시켜 나갈 뿐만 아니라 정통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기반으로 조선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익의 은 단군-기자-마한-로 연결되는 정통론을 주장했으며, 안정복은 이를 계승하여 단군-기자-마한-삼국-신라로 연결되는 정통성을 주장했다. 홍대용은 공자는 주나라 사람이므로 주나라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에 가 중국의 역사인 것이지 내외의 구분이 없다는 역외(域外)춘추론을 주장하며 역외의 역사도 존재한다는 자주적 역사관을 보였다. 이는 조선의 역사가 중국사와 대등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정통론이 적용되는 한 역사서술이 명분적 사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실학자들은 실제의 역사서술에 있어서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관의 객관적 인식을 존중하고 사실에 정치적·윤리적 해석이 가해짐으로써 왜곡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익의 의 에서 그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역사란 용이한 것이 아니어서 어떤 사실의 진가(眞假)를 판별하는 인식은 어렵다고 하였다. 이익은 역사에 있어서 실증적인 점을 중시하여 문헌 취급에 비판적이다.
    인문/어학| 2014.06.20| 13페이지| 2,000원| 조회(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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