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이 책이 내 책장 한편에 머무르게 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3년 전 쯤, 비영문권 문학에 흠뻑 빠졌던 때가 있었다. 나카가와 요이치, 칼릴 지브란이니 하는 소위 유명하지만 비영문권 작가가 아니기에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의 글을 읽을 때였다. 제 3세계의 문학도 읽었지만 우습게도 중국 문학은 재미가 없다는 평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삼국지와 서유기를 제외한 모든 중국 문학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 나를 지켜보신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께서 ‘변신인형’을 추천해주셨다. 하지만 그 때 당시의 나는 ‘니우청’에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나 자신을 지적해주는 이 책을 참으로 황망하고 지루한 소설로 치부해버렸다. 수년 후, 강의를 통해 다시 접하게 된 ‘변신인형’은 그 때와는 매우 다르게 다가왔다.2. 감상변신인형은 말 그대로 이리저리 변신을 한다. 작게는 세 부분, 크게는 다섯 부분으로 신체를 나누어 줄을 당기면 그 모습이 바뀐다. 꼭 마치 카지노에서 볼 수 있는 게임 머신에서처럼 말이다. 그 투입과 산출 과정도 게임 머신과 같다. 버튼을 누르면 게임머신은 여러 패가 임의적으로 선택되게 된다. ‘7, 7, 7’ 따위의 미리 정해놓은 좋은 패가 나오면 많은 돈을 벌게 된다. 이처럼 변신인형도 줄 따위를 당기면 나누어진 부분이 퍼즐처럼 맞추어진다. 만약 미리 정해놨던 대로 결합되면 그 일치성으로 인해 예쁜 모습을 즐길 수 있게 된다.니우청은 볼썽사나운 변신인형과 고장난 게임머신과 유사하다. 어떠한 상황이라는 투입이 일어나게 되면 그에 따라서 니우청은 변신을 한다. 심지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변모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상적인 변신인형과 게임머신과 다르게, 니우청에게는 나올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적은 경우의 수가 주어진다. 니우청은 확실히 대다수의 사람들보다는 많은 것을 접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니우청은 원초아)만을 강조하는 인물이란 사실이다. 니우청이 간유를 아이들에게 권하고 또 자신도 찾아서 마시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원초아를 중시하는 지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지 간유라는 서양적인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열망 혹은 본능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간유를 마시는 방법도 모른 채 간유를 예찬했다. 원초아에 대한 강조로 인해 자아)나 초자아)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그는 무지에 가깝다. 그는 현실에 타협할 줄도 모르며 게다가 정해놓은 이상이라는 것은 매우 허구적인 것이다. 도덕관념 또한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 이는 자아와 초자아의 부재 혹은 미비를 의미한다. 게다가 그는 냉철함, 기민성 따위가 배제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접했다 하더라도 그의 관심은 3가지 측면에 골고루 분배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는 사물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는 한계점이 주어진다.니우청의 부인인 쟝징이는 지주 출신의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이다. 그녀의 배경으로 보건데 그녀는 중상류 이상의 생활수준을 누렸었다. 또한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이전에는 총명하고 기민한 여성이었다고 추측된다. 하지만 그녀는 니우청의 멸시와 힐책으로 인해 그녀에게는 악다구니와 니우청에 대한 분노 그리고 증오만 남게 되어 버린다. 니우청이 신식문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열성을 보인다면, 그녀는 전통도 그렇다고 신식문물도 아닌 그 중간에 놓인 입장이었다. 지주라는 전통적인 계급에서 태어나 전족을 하려 했지만 곧 포기한다. 신식교육을 받았지만 그녀는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유지한다. 니우청을 그녀의 생활방식을 무지라고 힐난한다. 니우청의 이상주의와 징이의 현실주의의 대립은 사실 근거 없이 자신감에 찬 니우청의 서구만능주의와 생활고에 찌든 징이의 황금만능주의 간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징이의 황금만능주의는 니우청에 대한 징이의 모순된 감정으로 인해 결렬된다. 징이는 그를 미워하는 동시에 매우 애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살려내고 만다.어린 니자오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기민성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능으로 어렴풋이나마 아버지의 실체를 어렴풋이나마 파악한다. 이로 인해 아버지를 경멸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좋지만 아버지는 나쁘다.’라는 표현에서 익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애정과 함께 수반된다. 니자오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스프강 앞에서 당한 치욕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스프강을 찾아간다. 세계전집이나 목욕탕 같은 것들은 아버지와의 애정을 의미한다. 이는 매우 모순적이다. 스프강과의 만남을 시도하는 것은 추억을 되살리는 것과 동시에 치욕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과하고 니자오는 스프강도 아닌 그의 부인을 만나기 위해 약속을 취소하고 길을 떠난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아버지에 대한 모순된 감정을 잘 나타낸다.이처럼 ‘변신인형’은 곳곳에 모순되는 것을 심어두었다. 감정의 모순부터 시작하여 니우청의 존재 자체에 대한 모순 등, 환경으로 인해 생겨난 모든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것들을 나열하고 있다. 이러한 끝없는 대비로 당시 사회상을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화자의 개입과 더불어서 더욱 강력한 흡입력을 구사하고 있다.
1. 머리말‘꼬마 푸세의 가출’은 샤를로 페로의 ‘꼬마 푸세(꼬마 엄지)’를 재창조한 작품이다. ‘꼬마 푸세’, 이 동화는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어린이라면 한번쯤은 접해봤으리라 생각한다. 등장인물 중 가장 약한 주인공이 다른 이들을 구해내는 이야기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꽤나 있을 법하고 자극적이다. 게다가 이러한 종류의 작품답게 으레 교훈까지 준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자극성, 교훈뿐만 아니라 잔혹함도 가지고 있다. 샤를로 페로에 의해 쓰인 푸른 수염, 상드리용, 빨간 두건 따위의 모든 작품들은 동화라고 하기에는 조금 잔혹한 장면을 아주 가볍게 다루고 있다. 작년 즈음 하여 나는 샤를로 페로의 이러한 동화답지 않은 잔혹함에 푸욱 빠져있었고, 그 중 ‘꼬마 푸세’는 나에게 작지 않은 충격을 준 작품이었다. 그러한 작품을 재창조한 ‘꼬마 푸세의 가출’에 대한 나의 기대감은 지대했다. 다행히도 ‘꼬마 푸세의 가출’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생각의 숲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과제의 대상을 ‘꼬마 푸세의 가출’로 정하게 되었다.2. 비평투르니에의 꼬마 푸세는 벌목꾼 아버지로부터 장화 대신 고층 아파트로의 이사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결국 푸세는 ‘네앙 조명도 싫고요, 정화된 공기도 싫어요. 나무와 장화가 더 좋아요. 영원히 안녕.’ 라는 편지를 남기고 스스로 집을 떠난다. 이는 원작인 ‘꼬마 푸세’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페로의 꼬마 푸세는 물질적인 곤궁으로 인해 부모에 의해 버려진다. 하지만 투르니에의 푸세에게는 물질적 풍요가 주어진다. 하지만 푸세는 이를 거부하고 스스로 집을 나간다. 여기서 투르니에는 과거, 페로가 살던 시대와는 다른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벌목꾼 아버지는 나무를 베어 물질적인 곤궁을 해결해주고,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준다. 물질적 풍요를 만들어내지만 그는 자연의 훼손자이다. 푸세는 자연에 대해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아버지에 반발한다. 하지만 이는 소극적인 반발에 그친다. 아버지의 행동을 막으려 하지 않고, 그저 그 모습을 회피하기 위해 떠나갈 뿐이다.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현대인의 모습을 정확히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은 사회가 다각화, 다변화됨에 따라 더 많은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가지게 된다. 또 많아진 사회적 지위와 역할만큼 그에 따른 의무 또한 많아지게 된다. 의무가 많아진 만큼 각각의 의무가 상충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문제를 겪게 될 확률 또한 높아진다. 현대인은 이런 경우에 문제를 해결하려들기보다는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푸세는 이러한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그저 그러한 모습을 피해 달아날 뿐이다.) 이는 분명한 해결이 되지 않음으로써 문제 현상의 지속 혹은 재발을 방관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 된다. 하지만 이 단편에서는 문제 현상이 언젠가 풀릴 것처럼 표현하며 끝을 맺는다. 꼬마 푸세가 꾼 꿈의 내용이 그러하다. 이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방법을 알 수 없는 막연한 것이 지나지 않는다. 결국 투르니에는 자연 파괴와 현대인의 문제 회피 경향, 이 두 문제 모두 해결 방안을 제공하지 못했다.로르그 가족과의 만남에서는 투르니에가 제공했던 단 하나의 실마리가 가진 모순이 드러난다. 로르그 가족은 쉽게 말해 히피족이다. 억압과 배제를 벗어나 자연의 본능으로 돌아가서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하는 이들이 히피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로르그 가족은 ‘담배’를 피운다. 이 처음 보는 ‘담배’는 뒤의 내용으로 추측해 보건데, 마약인 것을 알 수 있다. 마약은 살인 따위의 것과 같이 세계 어디에서나 수용되지 않는 비상식적인 것이다. 평화주의와 자연에의 회귀, 그리고 자유로운 사랑을 주장하는 히피족은 마약이라는 인공적인 것을 통해 잠시나마 위에서 언급한 평화, 자연 따위를 환상으로나마 즐길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공의 것으로 자연을 추구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게다가 그것은 사실이 아닌 환상, 즉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 꼬마 푸세가 그들에게서 얻은 꿈과 희망의 근원은 환상이다. 허구적인 것을 토대로 만들어진 꿈과 희망은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 허구적이지 않다고 할지라도 마약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명확한 사실이다. 로르그 가족은 비상식과 인공성, 자연으로의 회귀로 한데 뒤섞여있다. 그 것이 온전히 억압과 배제를 벗어난 본능으로의 회귀에서 나온 것이면 어느 정도의 타당성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적이고 타당하지 않은 것과 혼합된 것이라면 그 타당성은 신뢰를 잃는다. 결국 투르니에가 제공했던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밑도 끝도 없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서두에 나오는 세장의 사진에 대한 언급은 요조의 일생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사진에서의 요조는 해학적인 웃음을 짓고 있다. 찡그리며 웃고 있는 얼굴은 개구쟁이처럼 보인다. 청년 시절 사진에서는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미남자이다. 마지막 사진에서의 요조는 앞선 인물과 도저히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추하고 늙수레하다. 언뜻 보면 성장과 노화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나타내고 있는 이 세장의 사진은 무언가 억지스러움을 가지고 있다.주인공 요조는 부유한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다. 풍족한 삶, 다정한 형제와 누이 그리고 본받을 만한 부모님. 모든 것을 타고난 듯 했지만 요조에게는 궁극적으로 결핍된 것이 있다. 요조는 무엇을 어떻게 느껴야할 지, 또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 요조는 알 수 없다. 너무나 순진했기 때문에 요조는 사람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조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지각한다.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요조는 감정을 꾸며내기 시작한다. 사진 속 개구쟁이 소년의 표정은 이렇게 만들어진 익살이다. 유년시절이 지나고 요조는 또 어딘가에 속하기 위해 공산주의에 빠지게 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죄와 벌'에서 죄와 벌을 유사어가 아닌 반의어로 수용하는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진 공산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호리키 같은 위선적이고 사회에 있을 만하고 또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주위 인물들로 인해 혹은 자승자박이었을 지도 모를 갖은 고초를 겪게 된다. 그 후, 요조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게 된다. 융화되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 30대 전후의 요조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다. 추하고 늙수레한 마지막 사진의 남자는 수많은 여자문제, 마약문제를 겪은 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모습이다. 이 모든 것은 방향성을 잃은 주인공 요조가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보인 모습과 그 결과이다.전쟁은 사람을 혼돈상태(Chaos)로 몰아넣는다. 신체와 정신, 모든 면에서 인간은 혼돈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혼돈상태는 인체의 본능,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본능에 의해 어느 정도 통제된다. 인간은 이전의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잠재되어 있던 능력을 발휘해, 신체적으로 강인해 질뿐만 아니라 잠과 같은 생리적 욕구조차도 통제한다. 하지만 이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또 다른 문제는 전쟁 기간 동안 혼돈상태를 벗어나려 했던 항상성이 갑작스럽게 필요가 없어지면서 인간이 또 다른 형태의 혼란은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허탈, 허무를 느끼게 된 인간은 곧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된다. 즉, 인간은 평온을 되찾아야할 시기에 또 다른 형태의 심각한 혼돈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혼돈이 난무하는 시기에 다자이 오사무는 작가활동을 펼쳤다. 그의 이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이 한 인간이 혼돈으로 인해 어떻게까지 망가질 수 있는가를 이토록 잘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그 시대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전후세대에게 그의 작품이 그토록 각광받는 이유도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