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논설을 모은 것'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의 도덕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원 뤼케이온을 열어 강의할 때의 강의 원고이기도 하다.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기한 세 가지 삶의 방식을 사용하여 행복이 무엇인지를 증명해 나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향락적 삶, 정치적 삶, 관조적 삶은 각각 플라톤의 생산자 계급, 수호자 계급, 통치자 계급에 해당하며 그들에게는 각각 절제, 용기, 지혜의 덕목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감각의 세계를 초월한 곳에 있는 이데아를 참된 존재로 여겼던 데 반해, 현실 속에서 참다운 존재를 찾고자 하였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사물의 이치를 인식하는 이론적 덕과 그것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실천적 덕을 통해 인간 최고의 목적인 행복을 구현하는 방법에 대하여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악은 무지에서 나오고 모든 덕은 참된 앎에서 나온다.'라고 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주지주의적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성의 역할과 함께 실천 및 습관화의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주지주의적 태도와 주의주의적 태도를 함께 강조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란 단순히 지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를 실천하려는 선의지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인간은 선악을 알면서도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서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며, 행복이야말로 궁극적이고 다른 모든 행위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이성에 따라 행동하고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습관이 필요한데, 이 습관이 '덕'이라고 한다. 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고귀한 것을 취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고 그러한 것을 행동으로 실천할 것이 요구되는데,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중용'이다. 중용은 지나침과 부족함이 없이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해서, 마땅한 사람들에게,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지나침과 부족함이 없는 중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산술적 의미의 중간은 아니다. 예를 들어 두려움과 태연함이란 감정 사이의 중용은 용기이다. 또한 쾌락과 고통의 중용은 절제이며, 그 지나침은 방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긍지'를 그러한 중용의 덕 가운데 최상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 긍지를 갖지 않고서는 덕에 이를 수 없고, 덕에 이른 사람들은 마땅히 긍지를 가지고 있으며, 긍지는 덕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삶의 본질을 관조의 대상으로 삼고, 사유함으로써 선에 다다르기 위한 덕, 즉 탁월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고귀하고 풍요롭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자애'에서 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생물들은 각각의 종에 따라 각각 다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여도, 또 각 개인들이 저마다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연 전체를 포함하는 질서 안에서 자신 안에 있는 '신적인 어떤 것'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였다.솔직히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심오한 철학적 사유를 담은 책이라는 인식 때문에 처음에는 읽기가 쉽지 않았지만 읽다보니 점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지켜야 할 도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자신을 절제하고 자제하는 삶이란 무엇인지, 또한 인간으로서의 행복한 삶이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행복, 도덕, 선, 용기, 중용 등을 면밀하게 탐구해 나가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그는 현실세계를 부정적으로 보고 먼 곳에서 이상세계를 찾았던, 뜬 구름을 잡는 것 같았던 그리스 철학을, 우리의 옆으로 옮겨놓은 철학자가 아니었다 싶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을 '이데아'같은 이상세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탐구함으로써 더욱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에 대해 사고할 수 있도록 만든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적인 행복은 이성적 관조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지만, 인간적인 행복은 현실 속에서 중용을 실천함으로써 습득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아리스토텔레스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신적인 행복이었고, 이것을 인간 생활 속에서의 실천을 통해 구현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에 대해 반성한 점도 있다. 이 책의 구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우리가 정작 준 것이 아니고 빌려주었을 따름이라 생각하여, 자기가 준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받을 것을 기대한다.'는 부분이었다. 정말 가슴을 쿡쿡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인간의 부끄러운 본성을 날카롭게 꼬집는 듯 하였고 그동안 나의 행동거지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접해왔고 그것에 대해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고등학생이 되고 윤리와 사상 과목을 공부함에 따라 서양 철학사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사진으로 보는 서양 철학 기행』은 이런 내 흥미를 동시에 만족시켜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이 책은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아가멤논의 전투로 유명한 트로이에서부터 크세노파네스의 도시인 콜로폰까지의 기행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는 트로이 전쟁의 시초가 된 파리스의 황금사과에 대한 전설과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아가멤논의 비참한 최후, 테세우스가 무찌른 괴물인 미노타우루스 등 신화적 내용도 알기 쉽게 서술하며 고대 그리스인들의 운명관인 '모이라'를 설명한다. 모이라는 자신에게 할당된 것이라는 의미로 신마저 어길 수 없는 법칙이다. 이 모이라에 대한 인식은 사물의 필연성에 관한 생각, 즉 로고스에 대한 생각에 까지 이를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저자는 각 지역과 관련된 철학가도 설명하고 있다. 밀레토스 지방에서는 탈레스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되는데 그는 만물의 존재 원리에 대해 물은 최초의 사람이며 그것을 물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철학의 2인자로 알려진 아낙시만드로스는 그 이론을 반박하며 만물의 아르케가 무한한 본성을 가진 아페아로 구성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탈레스가 설명하지 못한 운동 원리와 발전 원리를 최초로 설명하였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에 대해 밀레토스의 마지막 철학가인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아르케는 공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반박한다. 이어 사모스 지역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피타고라스에 대해 설명한다.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질서가 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으며 조화와 질서를 가진 음악을 반복해서 들음으로서 영혼을 정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에페소스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를 설명한다. 그는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과 달리 '판타레이론-모든 것은 흐른다'을 제시하며 모든 것에 공통적이고 모든 사물의 변화와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인 로고스를 제시하였다. 사물의 운동과 변화는 대립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그의 주장은 후에 헤겔, 마르크스, 니체 등 후대의 철학가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이 책에서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헬라클레이토스 파트였다. 특히 지은이가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대화를 상상해서 서술해 놓은 장면이 흥미로웠다. 모든 것이 변한다고 설명한 헤라클레이토스에게 파르메니데스는 그것이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이 옳다면 그의 주장 또한 변화하고 흘러가야 하며 그렇다면 그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신이 주장이 변화하고 흘러간다면, 그것은 모든 것은 흐르고 변화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하며 변화와 더불어 그 속의 영구불변한 로고스를 설명한다. 나는 왠지 헬라클레이토스의 사상과 불교의 사상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에서는 '색즉시공공즉시색', 즉 만물은 공(空)이고 불변하는 것은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속에서 진리를 찾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 또한 변화속의 영구불변함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대중에 대한 독설과 질타를 내뱉었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세계에 꼭 필요한 인물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