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가져다 준 시인, 이장희―그의 시 를 중심으로목 차Ⅰ. 들어가며 ‥‥‥‥‥‥‥‥‥‥‥‥‥‥‥‥‥‥ 1Ⅱ. 이장희의 환경 ‥‥‥‥‥‥‥‥‥‥‥‥‥‥‥ 2Ⅲ. ‘봄은 고양이로다’ ‥‥‥‥‥‥‥‥‥‥‥‥‥‥ 3Ⅳ. 맺음말 ‥‥‥‥‥‥‥‥‥‥‥‥‥‥‥‥‥‥‥ 4Ⅰ. 들어가며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사조가 ‘문화 정치’로 전환되면서, 1920년대 우리문학은 , , 등의 동인지와 종합 잡지의 발간을 시작으로 문학적 저변을 넓히고 그 기반을 확립하였다. 이 시기의 문학사적 특징은 첫째, 근대에서 현대문학으로의 도약이 이루어진 것, 둘째, 예술로써의 문학의 독립적인 위상을 정립시킨 것, 셋째, ‘국민 문학파’나 ‘ 카프’ 같은 문학적 단체가 등장한 것으로 분류요약될 수 있다.근대문학에서 탈피하여 현대문학의 길에 접어드는 데에는 특히 현대시의 성장을 빼놓을 수 없다. 3.1운동의 실패는 민족의 가슴에 커다란 좌절감을 안겨주었지만, 그 이후 발생한 식민사조의 변화나 시대적 변화, 서구 문예사조의 영향 등은 많은 수의 동인지나 잡지의 발간으로 이어져 우리 시문학의 토대를 이루었다.문학 활동의 터전이 넓어짐에 따라 이 시기의 시 경향도 근대보다 다양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두드러진 집단적 현상으로는 첫째, 우울한 시대 의식과 개인의 절망을 노래한 낭만주의적 경향, 둘째, 사회적 모순에 대한 투쟁을 내세운 경향파-프로문학의 입장, 셋째, 한동안 소홀히 되었던 전통적 시 형식인 시조를 현대적으로 되살리자는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김흥규,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2005.그러나 이러한 운동에도 불구하고 1924년 동인지 에 발표된 이장희의 시 ‘봄은 고양이로다’는 1920년대 시풍에 두드러진 경향에서 자유롭다. 감상에 넘치는 낭만주의도 아니요, 사회이념에 충실한 투쟁의지의 시도 아니요, 특별히 민족 문학의 방향을 내세운 것도 아니다. 해석하기에 따라 민족적 바람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그 역시 단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봄은 고양이로다’의 밝고 생동감 넘치는 비유와 상징, 그리고 섬세한 묘사의 특색이 20년대 시들 중에서 돋보일 뿐이다.따라서 이 글은 낭만주의적 풍조와 길을 같이 하면서도 특유의 독자성을 유지한 ‘봄은 고양이로다’의 분석을 통해, 일제치하의 시대상황 속에서 이장희가 보여준 감각적 특성에 주목하여 우리 근대 문학에 미친 영향을 역사적 맥락에서 조명하고자 한다.Ⅱ. 이장희의 환경대구의 부호이던 이장희의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지낸 친일파였다. 세 번의 결혼을 하여 총 10남 8녀가 있는 복잡한 가계 속에서 이장희는 편의를 위해 친일하는 일만은 하지 않았다. 부친이 중추원 참의로서 일인과 교제가 빈번하여 시인에게 중간 통역을 맡기려 했으나, 시인은 한 번도 복종하지 않았고, 총독부 관리로 취직하라는 지시도 거역하여 부친은 시인을 버린 자식으로 아주 단념하였다 한다. 그래서 극도로 빈궁한 삶을 버리지 못하였다. 이장희는 1929년 11월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 장백일, , 『국어국문학』84권, 국어국문학회, 1980, 79~82쪽.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탓에 이장희에 대해서는 작품으로나 행적으로나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가정은 그다지 화목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장희는 친모와 사별한 뒤 두 계모와의 갈등, 배다른 형제와의 갈등, 일제 식민지 정책에 동조하여 항상 일본인과의 통역을 종용하던 아버지와의 갈등을 비일비재하게 겪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족으로부터 받는 냉대로 인해 그가 죽기 직전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고, 방바닥에 금붕어를 수없이 그려놓은 뒤 극약을 마셨더라는 일화는 한 섬세한 시인의 고독과 상실감이 시대상황과 맞물려 치달은 비극을 보여준다.자살하기 4년 전에 그가 쓴 라는 시는 예리한 통찰력과 직관, 가라앉은 듯한 덤덤한 어조와 우울 속에서 시인의 죽음을 향한 희미한 고갯짓을 가늠하게 한다.자빠진 청개구리의 불룩하고 하이얀 배를 보고야릇하고 은은한 죽음의 비린내를 맡는다.어두운 환경 속에서도 이장희가 시 창작에 대한 열의를 멈추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1924년 5월호에 5편의 시 작품과 번역소설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뒤 그는 3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며 약 5년 동안 비교적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독자적인 시풍으로 자기만의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낭만주의 풍조의 시처럼 현실도피적인 이유도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이장희는 정체된 시어와 은근한 상징적 수법으로써 불분명하고도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타개하려는 의지를 다졌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봄은 고양이로다’의 풍부한 감각적 향연은 실상 황폐한 그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려는 의도에서 불거져 나온 게 아니었을까? 시대상황의 극악함에 대항하고 불우한 환경에 몸서리친 결과가 이토록 아름다운 이유는, 그의 환경이 철저히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왜 하필 고월 이장희는 금붕어를 그렇게 많이 그렸을까? 어쩌면 그것은 어항처럼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는 무기력한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자방이 커지면 화판이 떨어지듯, 가을이 깊어지면 잎사귀가 흩어지듯이 이렇듯 그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아니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와 그의 고독과 그의 시가 완전히 합체되었을 뿐이다. 아아 그는 마침내 그 돌아갈 바에 돌아갔을 뿐이다. 나는 다시 무엇을 슬퍼하랴 그러면 그의 죽음은 무엇이냐? 그것은 그의 최후의 시였다. 그 최대의 걸작이었다. 김영진은 친구 고월을 추억하며 이런 글을 썼다. ( 1929. 11월 11. 중외일보 기재 )Ⅲ. ‘봄은 고양이로다’이장희의 전 시편에 나타난 시적 특색은 섬세한 감각과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시적 소재의 선택에 있다.그 중 ‘봄은 고양이로다’가 특히 비유의 아름다움과 감각미를 갖춘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봄’이라는 계절 자체를 동물인 ‘고양이’와 상치시켜 놓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통해 봄을 연상하는 과정이 아주 쉬울뿐더러 자연스럽고, 간단한 듯 보이지만 치밀한 관찰을 통해 봄의 생명력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香氣)가 어리우도다.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푸른 봄의 생기(生氣)가 뛰놀아라.봄이 곧 고양이이고, 고양이고 곧 봄이라는 시적 구상은 비유에 있어서 그 탁월함이 돋보인다. 첫째 연에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서 꽃가루는 곧 그것이 흩날리는 따뜻한 봄날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그것이 고양이의 털과 같다는 비유로 물 흐르듯 자연스레 넘어간다. 둘째 연에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서 금방울의 색채적인 느낌―따뜻함, 포근함, 온화함, 여유로움 등―이 봄이라는 배경에 잘 맞아 떨어지며 그것이 가진 모양이 고양이의 유쾌한 눈 모양을 떠오르게 한다. 셋째 연에 ‘고요히’와 ‘포근한’은 어두에서 서로 대치되면서도 나른하고도 푹 가라앉은 봄날의 오후를 표현하는 상호보완적인 꾸밈말임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넷째 연에 ‘날카롭게’가 주는 유동성은 ‘생기(生氣)’라는 단어가 주는 활동성에 부합하여 봄을 맞이한 푸른 들판의 활개가 느껴지게 한다.
김동인의 단편소설「거칠은 터」분석목 차Ⅰ. 들어가며 ‥‥‥‥‥‥‥‥‥‥‥‥‥‥‥‥‥‥ 1Ⅱ. 액자적 서술방법 ‥‥‥‥‥‥‥‥‥‥‥‥‥‥ 2Ⅲ. 작품 속에 드러난 여성상 ‥‥‥‥‥‥‥‥‥‥ 3Ⅳ. 맺음말 ‥‥‥‥‥‥‥‥‥‥‥‥‥‥‥‥‥‥‥ 7Ⅰ. 들어가며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시작된 우리 근대문학이 갖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상위 계층의 특권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문학 활동 전반을 일반 시민이 담당하게 되었다. 둘째, 암암리에 떠돌던 문학작품이 정식으로 출판되고 유통됨에 따라 본격적인 근대 산업문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셋째, 시대적·사회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꾀하였다. 넷째, 언어 사용에서 한자와의 과도한 공존을 청산하고 우리글로 쓰인 우리문학을 전면에 부상시켜, 우리글에 대한 어두운 인식을 걷어내는 데 일조하였다. 다섯째, 시와 산문에서 교술 문학의 몰락과 함께 서정시와 소설이 부흥하므로 문학의 새로운 갈래를 열게 되었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5』, 제 4판, 2008, 10쪽 참고.김동인의 「거칠은 터」는 위와 같은 근대문학의 발발에 합류하여 동인지 에 실린 단편소설이다. 작품이 발표된 1924년은 3.1운동을 거쳐 유관순 열사가 옥사(1920년)한 지 불과 4년이 지난 후이고, 만세 운동이 시작되기 2년 전인 격동의 시기이다. 그런데 일제치하의 시대상황은 여간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김동인이 문학에서 도덕의 가치와 교훈을 구현하려는 것이 작가의 분수를 망각한 위선 행위라 하고, 인생의 추악한 면을 그 자체로 탐구하는 것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 조동일, 『한국문학통사·5』, 제 4판, 2008, 110~111쪽.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일제에 항거하는 자세를 보여주기보다는 개개인이 지닌 내면의 어두운 단면들을 탐구하는 것에 무게를 두었다. 이 글에서 다룰 「거칠은 터」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적당하다.이 글은 그러한 내면세계를 고찰하여 한 여성의 신념이 예기치 않게 무너지게 된 원인을 역사적인 바탕에서 조명하려 한다. 그리고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근대적 서술방법 여기서는 특히 ‘액자적 서술방법’을 다룬다.과 반(反)근대적 여성상 사이의 괴리를 지적한다.Ⅱ. 액자적 서술방법액자적 서술방법은 근대 소설이 취할 수 있는 중요한 형식 장수익, 문학사와 비평학회,『김동인 문학의 재조명』,새미, 2001, 262쪽.이다. 김동인이 액자형 서술방식이 지닌 형식상 특징을 적극적인 차용하였으며 그것을 다수의 작품에서 효과적으로 드러낸 것은 근대문학사에 있어 주목할 만한 점이다.「거칠은 터」는 그러한 성과가 잘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영애의 죽음은 이미 소설 첫머리에서부터 밝혀지는데, 그녀의 죽음을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이는 정체가 불분명한 서술자 「거칠은 터」에서 서술자는 을 전하는 이와 영애 두 사람이지만, 편의상 이 글에서 ‘서술자’는 을 전하는 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한다.이다. 우리는 서술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얼마쯤 되며 영애와 무슨 관계였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다만 서술자는 영애가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미심장한 의문을 제기하며 그녀가 생전에 남긴 글을 발표하여 비밀을 들춰내겠다는 의지를 보일 뿐이다.서술자의 신원이 분명하지 않은 점, 서술자가 영애의 죽음을 미리 밝히고 그것에 어떤 비밀이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는 점, 그로부터 영애의 이야기로 흘러들어가는 도입부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점에 있어, 서술자의 위치는 행위자보다는 관찰자, 진술자에 더 가깝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있어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독자로 하여금 영애가 죽은 진짜 이유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면서 그녀에게 친밀감과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다소 특이한 점은, 서술자가 영애의 죽음을 앞서 밝혀놓았듯이 에서 영애 또한 남편 S의 죽음을 앞서 미리 밝혀놓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작법상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사건전개에 있어 흥미를 유발시키고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구성으로 보인다.김동인은 인간의 내면을 조명하고자했기 때문에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방도가 필요하였다. 그게 바로 액자적 서술방법으로서 최시한, 문학사와 비평학회,『김동인 문학의 재조명』,새미, 2001, 45쪽.이 「거칠은 터」에 적용된 소설작법이기도 하다. 위와 같이 ‘OO의 죽음을 미리 밝혀놓는’ 식의 구성상 치밀함은 이러한 액자적 서술방법에 의해 훨씬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고 볼 수 있다.Ⅲ. 작품 속에 드러난 여성상1. 시대상황은 액자적 서술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도입부에 있으며, 회상적인 기록으로 시작된다. 액자적 서술방법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내부 이야기에는 편지, 일기, 기사, 유서, 수기, 대화 등의 양식이 흔히 차용 최시한, 문학사와 비평학회,『김동인 문학의 재조명』,새미, 2001, 45쪽.되는데, 특히 「거칠은 터」에서 ‘유서라 하여도 좋을 만한’ 영애의 글은 화자의 내면을 명명백백히 알 수 있는 자기고백이다.부모 형제 친척도 없는 주인공 영애는 지인의 도움으로 고등 여학교를 졸업한다. 고등 여학교는 일제 강점기에 중등 교육을 하던 4~5년제의 여학교로서, 일제치하에 가족도 재산도 없는 영애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를 짐작케 한다. 그녀가 정신적·물질적인 공허를 전적으로 S에게 의지하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두말없이 S에게 시집을 갔다고 하는 대목은 일제치하에서 가족이 없는 외로움, 돈이 없는 궁핍의 막막함이 그렇지 않은 시대에서보다 상대적으로 절박하였다는 것을 알게 한다.그러니 영애가 자신보다 나은 환경에 있는 S를 무의식중에 ‘나보다 높은 사람’으로 여기는 심리를 가지게 되는 까닭은, 그녀가 처한 환경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영애의 내면을 형성한 첫째는 이러한 시대상황이다.이 환경적인 요인이 S를 ‘나보다 높은 사람’으로 여기는 심리에 맞물려 영애로 하여금 신념―아내이자 주부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고취시키는 작용을 하게 된다. 그것은 S의 재산보다는 그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의무감에서 비롯된 관심이다.나는 한 쾌감과 불쾌를 깨달았다. 벌써부터 주부(主婦)로서의 한 권리를 맡겨 주는 그에게 대한 한 가벼운 쾌감과, 신혼이라 하는 (꿈과 같이 즐거운) 것을 온전히 염두에 두지 않는 듯한 그의 태도에 한 미움에 가까운 불쾌를 깨달았다.관심은 곧 S에 대한 지극한 존경으로 자라난다. S의 일거일동과 말 한마디가 모두 옳으며 훌륭하다고 여기는 태도를 더 확고히 지키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닐 일일는지도 모르나, S의 속 깊은 배려가 영애에게는 상당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당신이 설혹 안 가르쳐 주신다 해도 난 결코 당신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주부로서의 내 권한에 넘칠 일임을 깨달았으니까요. 그리고 또 당신이 가르쳐 주셔서 내가 깨닫지 못하였다 해도, 나는 결코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 안합니다. 당신은 나보다 썩 뛰어난 이인 줄을 난 잘 압니다.」안면 있는 지인의 소개로 결혼하여 남편의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서 영애는 사랑까지도 읽어낸 지 모른다. 그 기쁨을 당당하게 표출하는 대신, 아내의 본분을 지아비를 극진히 섬기겠다는 일념으로 나타낸 것은 첫째 요인―영애의 물질적·정신적 궁핍―으로 형성된 내면―남편은 나보다 높은 사람―과 연장선에 있다.2. 정조관념S의 실험실은 사건 전개에 있어 중요한 장소이다. S는 유독 실험실의 일을 영애에게 알려주지 않는데 이것 때문에 영애는 그가 하는 말에 상처를 받고 그가 하는 행동에 가슴을 졸인다. 이는 부부임에도 심리적인 부분에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준다. 남편의 비위를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집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떠는 소극적인―고전적인― 여성상의 전형이다. 여기서부터 여성과 남성사이의 고질적인 관념 문제가 드러날 기미를 보인다.나는 큰 죄라도 지은 것같이 후덕덕 놀랐다. 그는 자기가 실험실에 있을 동안은 남이 가까이 오는 것을 절대로 금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직껏 그에게 온 이래 이것을 지켜왔다. (중략) 내게는 그가 성난 것같이 무서운 일이 다시 없었다.영애의 내면을 형성한 둘째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요구되는 정조관념이다. 이는 김동인이 지닌 관념이나 가치관의 투영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그의 작품 속 여성상은 마치 근대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상에서 역행한 듯이 전통적·보수적이며 비계몽적임을 알 수 있다. 소설작법에 있어서 근대문학에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 장수익, 문학사와 비평학회,『김동인 문학의 재조명』,새미, 2001, 262쪽.했다는 평가를 받는 데 반해, 사건을 담당하는 전개해나가는 등장인물―여성―이 근대화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여성의 정절은 곧 남편에 대한 영원하고 헌신적인 사랑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백년해로해야 할 남편이 너무도 일찍, 그것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남겨진 여성의 정절은 과연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실험실 사고로 인해 뜻하지 않게 닥쳐온 S의 죽음은 둘째 요인―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요구되는 정조관념―으로 형성된 내면―남편 이외의 정신적·육체적 사랑을 부정하는 것―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 S의 죽음으로 인해 고통 받게 된 내면은 영애로 하여금 남편에 대한 정조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허무함을 불러와 결국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들의 봄―「운현궁의 봄」의 인물(중심) 분석목차1. 머리말 ----------------------------------- 12. 인물의 특질 분석―성격, 욕망을 중심으로1) 이하응 -------------------------------- 1-32) 조대비 -------------------------------- 3-43) 조성하 -------------------------------- 4-64) 김병국 -------------------------------- 6-75) 철 종 --------------------------------- 7-83. 인물이 특질이 성취한 것―인물의 특질이 그들의 바람을 성취시켜주었는가1) 이하응 -------------------------------- 8-92) 조대비 ---------------------------------- 93) 조성하 ---------------------------------- 94) 김병국 ---------------------------------- 95) 철 종 ----------------------------------- 91. 머리말인물은 소설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소설은 사건의 연속, 연속된 사건의 결합이라 볼 수 있는데, 그 사건의 주체가 되는 게 바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인물은 사건 속에 살아 숨 쉬며 사건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건을 해결하기도 하고, 더욱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고, 마구잡이로 휘둘리기도 하면서 사건이란 것 자체를 이끌어나가는 역할을 한다. 인물의 이러한 행동이 하나의 사건을 발생시키고 전개시켜 결국에는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에, 인물은 그 자체를 소설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며 폭넓은 의미를 가진다.이 글은 김동인이 1933년부터 1934년까지 1년간 에 연재한 역사소설「운현궁의 봄」을 통해, 인물이 가지고 있는 성격과 욕망이 어떤 식으로 제시되고 구체화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하응, 조 대비, 조성하, 김병국, 철 사라지지만, 그 강렬했던 성정은 독자 입장에서 쉬이 잊히지 않는다. 서술자는 이렇듯 작품 초반부에 독자로 하여금 흥선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을 가지게 함으로써, 앞으로의 사건 전개에서 인물의 성격이 매력 없이 하강곡선을 그릴 때를 대비한다. 간단히 말해, 흥선의 성격이 제아무리 비굴의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나중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만드는 것이고, 이것은 사실이 된다.순간이었다. 취객은 몸을 비켰다. 자기가 몸을 비켰기 때문에 올라 뛰다가 도로 떨어지는 개에게 향하여 그의 호령이 내렸다.「요 망할 강아지!」놀랍게 우렁찬 음성이었다. 그 초라하게 왜소한 취객의 어디서 그런 우렁찬 소리가 나는가 의심할 만큼, 놀라운 소리였다. 대지가 울렸다. 하늘까지 울리는 듯하였다.그 우렁찬 소리에 놀란 것은 그를 물려고 달려들었던 개였다. 개는 이 우렁찬 소리에 위압되어 힐끗 그를 향하여 돌아는 섰지만, 잠시 멍하니 그 취객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42쪽.)이 장면은 흥선의 본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남과 동시에 장차 그가 어떠한 식으로 사람들을 휘두르게 될 지를 암시한다. 이것을 작품 후반부에 대입해보면, 흥선을 얕보다가 결국에는 꼬리를 내리게 된 김씨 일족과 그 외 권도가들이 개에 비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흥선의 ‘호령’은 곧 그의 성격을 표현하는 전부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호령은 첫째, 독자로 하여금 작품을 읽는 과정에서 그의 본 성격이 감춰져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게 하고, 둘째, 그의 잠재성을 예견하게 하는 구실을 한다.그러나 위의 추론을 바탕에 두고 이해하더라도 흥선은 참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한마디로, 이하응은 자신의 속을 잘 드러나지 않게끔 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자신의 의도가 상대방에게 파악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야기의 머리를 교묘히 돌려서 얼른 듣기에는 무심히 하는 말같이 하면서 부탁을 하거나 너털웃음으로 무마시키는 모습들, 그리고 내면과는 다른 비굴한 행동, 비굴한 말을 예사로이 하는 행동에서 이러될 일이다.이리하여, 그렇지 않아도 남이 손가락질하는 난행을 거듭하던 흥선은,, 이하전이 없어진 뒤에는 더욱 억지스럽고 거친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는 한편 혹은 조 대비가 자기를 부르는 날이 있지 않을까 하여, 그는 그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238~9쪽)이처럼 흥선은 자신에 목표 계획 수립에 있어서 치밀함을 보인다. 재황이의 책봉, 그것으로 얻게 될 ‘섭정의 권리’라는 욕망을 위하야, 흥선은 기꺼이 권도가들의 발밑을 길 수 있는 성격을 꾸며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욕망’은 흥선에게 있어 삶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흥선은 ‘욕망’으로서 성격이 형성되고 기질이 감춰지며 나중에 진정한 ‘봄’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2) 조 대비서술자는 조 대비를 궁실의 어른이며 종실의 가장으로 오십을 눈앞에 바라보는 초로(初老)라 소개한다.당시는 여자들이 쉽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권력이 있다 해도 직접 그 권력을 행사하기는 힘든 때였다. 조 대비 또한 상당한 위치에 있지만 자기주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억울한 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울분을 토할 수도, 그에 대한 복수를 감행할 수도 없다. 작품에서 서술자로 하여금 심경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한풀이에 가까운 심정을 가지고 복수책으로 이용했던 것이 바로 흥선이다. 실권을 흥선에게로 넘겨주게 되어도, 자신을 불행하게 했던 김씨 일문의 몰락과 조씨 집안의 신분 상승 정도에서 만족하는 것으로 보아 조 대비의 욕망은 흥선과는 달리 지극히 개인적인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성격이하전이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한 내역을 듣고 조 대비는 ‘잘들 한다!’라고 말한다. 그 후에, 철종을 찾아가서도 했던 말은 혼잣말에 다름 아닌 ‘참 잘허시우!’, ‘참 잘하셨소!’에 그친다. 그녀는 심한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도 입을 닫은 채 말을 아낀다. 계속해서 얼굴을 찌푸리는 것과 입을 봉하는 것, 눈에는 노염이 서려있다는 묘사는 어지러운 상황에서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그녀의 처지를 대변하는 한편다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조 대비는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고자 흥선을 이용한다. 조 대비는 적극적으로 행할 수 없었던 일을 흥선과 더불어 의논하여 결정의 방향을 잡고, 종실의 가장이라는 최종 권력으로 대신들의 반발을 마음 편히―간단히― 물리친다. 감히 홀로 거행할 수 없었던 일을, 조 대비는 흥선을 곁에 두는 것으로 비교적 쉽게 거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욕망의 달성을 위하야 조 대비가 흥선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어보에 관한 태도에서, 흥선에 대한 조 대비의 의지가 불러온 대담함을 엿볼 수 있다.「너무도 창황중의 일이라, 나도 미리 생각한 바가 없고 대신들도 역시 그럴 터이니, 닷새 동안을 잘 생각해서 닷새 뒤에 의논을 하도록 합시다. 그동안은 무식하나마 이 노파가 대리를 보리다.」무법한 하교였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이 나라를 대표하는 국모(國母)의 한마디―뉘라서 감히 반대할 수가 없었다.(353쪽.)종실의 가장이라는 조 대비 자신의 권력이 욕망을 향하야 본격적으로 꽃 피운 순간이다.3) 조성하조 대비의 조카로, 흥선에게 있어서 협력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흥선의 욕망이 달성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성격초반에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흥선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인물이다. 따라서 흥선의 협력자로서의 면모를 그다지 보여주지 않다가 중후반에 이르면서 확실한 협력자로 자리매김한다. 조성하는 흥선의 옆에 상주함으로써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서 나아가 장인 이호준의 말이 사실인지, 자신의 미래를 내걸만한 사람인지 확인해 보고 싶어 하고 이것이 모두 확인되었을 때 자신의 안위와 지위상승에 대하여 안도하고 기대하는 일면을 보인다.성격→욕망조성하의 성격은 자칫하면 흥선군에 대한 충애의 해석으로만 그칠 수가 있는데, 보다 적절한 이해를 위해서는 그의 욕망을 알 필요가 있다.욕망조성하의 욕망은 사실 다른 인물들에 비하면 너무도 약소하고 흐릿하게 지나가는 면이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조성하가 흥선의 득세를 확신했을 때, 자신의 안위와 지위상승연민을 가지게 된다. 그럴 때에 대제학 김병학이 행차한다. 대제학 김병학은 훈련대장 김병국의 형으로써, 초반부에는 등장하지 않은 영어가 앞으로의 사건 전개에서 어떤 인물상을 보일 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것이 흥선이 팽과 그 일행으로부터 치욕적인 대우를 받고 홀로 길을 걸을 때에, 김병학의 행차와 맞닥뜨리게 되는 장면에 축약되어 있다. 이 장면은 첫째, 김병학이 흥선에게 계산적인 호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구실을 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아우 영어도 같은 맥락에 든 인물로 이해하게 하며 둘째, 흥선의 가문과 대립되는 김문의 인물을 명확히 그의 편에 내세움으로써 사건 구조를 안정적으로 양분화 하는 효과를 거두는 역할을 한다.성격영어는 일족에서 흥선을 내려 대하는 것과는 달리 흥선에게 대하여 인간적인 배려를 베푼다. 거기에는 아무런 조건도, 이유도 없다. 그 이유를 김병학은 후반부에서 이렇게 술회한다. 은퇴한 흥선의 행동거지가 볼썽사나워도, 흥선이 유혹에 이기지 못하여 타락될 인물은 결코 아님을 넉넉히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어는 오히려 흥선의 타락이 그에게는 눈물겹고, 흥선이 타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지금의 세태에서 찾아 오히려 그 세태를 밉게 바라본다. 그는 흥선이 가는 곳마다 수모를 받으며 다니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그것을 막아보고자 노력한다. 영어에게는 흥선을 향한 연민이 있다. 그의 연민은 비록 어릴 적 친구에 대한 우애에 기반하고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순수하며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성격→욕망그러나 작품이 후반에 가면서, 흥선과 조 대비의 밀담의 이유를 추론하고 거기서 답을 찾게 되는 과정에서 영어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바로 그의 욕망이 불러온 변화에 다름 아니다.욕망다음의 발췌를 보면 영어 김병국이 어떠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여기서 영어의 취할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하나는 자기네의 일족에게 흥선의 가면을 폭로시켜서, 흥선도 또한 이하전과 같이 처치하여 버릴까 하는 길이었다..
「시지프 신화」 감상문감상문 제목 : 시지프의 나들이기만당한 신들은 노여워했다. 신이라면, 정녕 신다운 신이라면, 내 기만의 정당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노여움은 바위덩어리를 산꼭대기까지 올려놓아야하는 형벌을 낳았다. 젠장맞을! 신들이란 도대체가 뭐하는 작자들이란 말인가.(이 대목이 그 작자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시지프란 놈이 이번에는 신을 모독했다며 이를 갈겠군.) 지상으로 올라간 나의 임종만을 기다리며 어떤 형벌을 내릴지에 대해 지치지 않고 묘안을 강구했을 그들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할 일이 그렇게도 없었느냐고 따져 묻고 싶을 정도다.(제우스는 할 일이 없는 작자임이 분명하고.) 바위덩어리는 산꼭대기에 도달할 즈음에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했다. 계속해서. 육신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나아가 정신의 고통에 무뎌져야만 했다. 영원히 이 짓거리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왜! 참담한 인정과 순응. 두 가지의 암담한 협조만이 필요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구역질났다. 바위덩어리가 아니라, 지독한 형벌이 아니라, 이 부당하고도 잔혹한 운명의 굴레를 직시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너무나 쉽게 간파해버린 나 시지프가……! 한계를 깨닫길 헤아릴 수 없는 별바다에서 헤엄치는 만큼이나 했다. 이보다 확실한 것은, 내가 이이상 하늘을 뒤적거린대도 ‘한계’ 이상의 그 어떤 지표도 찾을 수 없을 거란 사실이다. 나 시지프의 한계는 쌓이고 쌓여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빌어먹을 돌덩이는, 마모될 의지조차 없어 보인다.(슬슬 숨이 찬다. 몇 걸음 더 옮기면 정상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제는 돌덩이를 따라 부리나케 달려 내려갈 때가 왔겠지!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시간이 되었나보다. 내 온 몸이 빛줄기에 감싸이기 시작하는 걸로 봐서는.(웅성거리는 신들의 목소리가 오늘만큼은 듣기 좋구나.) 나는 떠오른다.“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상으로의 나들이다! 신기한 거울이 있지. 넌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신들의 합창이 들린다.나는 어느 공간 한 복판에 앉아있다. 사방은 어두우나 한없이 아늑하다. 바위덩어리를 굴려 올릴 때의 그 후덥지근하고 뜨거운 열기가 아니다. 어디선가 미노타우로스가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곳은 미로인가? 동시에 주위가 환해진다. 눈부신 자극이 나를 움츠리게 만든다. 눈앞에 가득 펼쳐진, 저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신들이 나를 가지고 무슨 시험을 하는 것인가? 저건 바로 나 시지프가 아닌가! 저기의 내 앞으로 바위덩어리가 떨어진다. 그 엄청난 것을 정상까지 굴려가라는 신들의 목소리를 저기의 나는 듣고 있다. 신들의 말대로 나는 지금 신기한 거울을 보고 있는가? 오호라. 저 거울은, 과거를 보여주는 거울인 모양이다. 그렇군……. 하지만 무슨 속셈이지? 생각하는 동안, 신기하게도 나는 그 거대한 거울 속에 빠져든다. 편안하게 의자에 등을 기댄다. 힘에 겨워 토해내는 나 시지프의 숨소리가 귓가를 생생하게 맴돌다 스며든다. 그러나 이상하다. 그는 과거의 나인데, 더불어 미래의 나인데, 아예 다른 공간에서 마치 타인처럼 나를 관찰하는 기분이 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턱을 괴고 저기의 시지프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신기한 일이다…….시간이 흐른다. 아아, 시지프! 너는 참으로 운 없는 죄인이로다! 나는 저기의 시지프에게 동정―동정? 동정이라고?―을 느끼기에 이른다. 맹렬하게 흐르는 땀, 근육의 움직임, 빨라지는 심장 박동에서 눈과 귀를 떼지 못하다가 울상을 짓는다. 한계에 다다라가는 그의 육체적 고통에 마음으로 전율한다. 그가 가엾다. 이봐, 난 너의 기분을 잘 알아. 아주 잘 안단 말이야. 힘겹게 굴려 올린 돌덩이가 다시 저 아래로 순식간에 굴러 내려갈 때, 나는 눈물이 왈칵 솟구쳐 오름을 느낀다. 시지프는 한달음에 내려가 돌덩이를 밀기 시작한다. 정상까지 올려놓자 다시 돌덩이가 다시 굴러 내린다. 나는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문다. 시지프, 가련한 인간이여! 눈물을 참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것이 반복되고, 반복된다.그러다가, 뭔가가 달라진다.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돌덩이가 족히 백번 이상은 굴러 내리고 난 뒤다.고통에 겨워 울고 있던 시지프의 얼굴이 웃고 있음을 본 것이다. 잘못 보았나? 아니다. 분명하다. 저기의 시지프가 웃고 있다! 내가, 내가 웃고 있다! 왜 웃고 있는 것인가. 저럴 수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몸에서는 더 이상 형벌을 견뎌내는 처절함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천만에! 곱씹어 봐도 그런 일이란 아예 있지를 않았다. 있었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무한으로 반복되는 저 형벌 속에서,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오아시스의 시간을 내가 잊어버릴쏘냐. 그런데 나는 왜 웃는가?“오, 신들이시여! 나는 왜 웃고 있는 겁니까! 저 거울이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맞습니까! 저 거울 속의 시지프가 진실로 지금의 나 시지프가 가졌던 과거가 맞습니까! 만일 거기 시지프를 혹시 제우스 신이시여, 당신이 둔갑하여 흉내 내는 것이라면, 모든 신들의 목소리를 모아 대답을 해주십시오! 이다지도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또 무슨 종류의 형벌이란 말입니까……!”“네가 웃는 이유 말이냐?”신들이 말한다.“그게 궁금하다면, 자리를 옮길 때가 된 모양이로군.”울부짖던 나는 처음과 같이 빛줄기에 둘러싸인다. 그리고 눈을 뜨자, 얼떨떨해진 나는 눈물을 훔쳐낼 새도 없이 출발점에 선다. 내 옆으로 누군가가 바람처럼 지나간다. 나는 멋모르고 그를 따라 뜀박질을 하기 시작한다. 앞서나가는 그의 머리통에는 내가 정상까지 굴려 올리던 돌덩이의 축소판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괴물이다! 계속 쫓아가야 하는가? 나는 왜 별안간 괴물과 달리기 경주를 하고 있는가? 아무튼 나는 그것에 맞서 달리기 시작한다. 달려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조금 있자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이 솟아오른다. 이렇게 된 바에야, 신들의 놀음에 기꺼이 장단을 맞춰주자는 생각이다. 어디에서 숨어 나를 지켜보고 있을 신 따위야 보이지 않으니 상관없다. 지금 내 눈앞에는 저 놈 뿐이지 않은가. 이기고야 말리라! 간격이 많이 벌어져 있다. 그러나 나는, 굴하지 않으리라. 아까는 눈앞에 펼쳐진 거울에서 눈을 못 떼고, 이제는 이 갑작스러운 경주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재빠르군!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리라! 그래, 널 따라잡으면. 머리 대신 돌덩이를 얹고 날 따돌리려는 널 마침내 따라잡으면. 행복―행복? 갑자기 이 단어는 왜 튀어나오는 거지?―을 알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든다. 죽을힘을 다해 달린다. 조금씩 거리가 좁혀진다. 이봐! 나 시지프의 악력을, 지구력을, 네가 상상도 못할 시간동안 다져온 이 체력을 우습게보지 마라! 돌덩이가 머리인 괴물아! 난 인간이다. 너는 결코 나를 좌절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내가 그를 따라잡고, 내가 그보다 힘차게 가슴을 내밀고 팔다리를 저어 한 발 성큼 앞서 나아갔을 때다. 나는 빛줄기에 둘러싸인다. 다리가 공중에서 부유한다. 내려다보니, 놈은 여전히 달리기를 계속하고 있다. 나는 버둥거린다. 신들에게 소리친다.“억울합니다! 난 이길 수 있다고요! 저놈을 이길 수 있단 말입니다……!”그러다 오싹 소름이 돋는다. 휘어진 나의 입가가 그 때문에 경련한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나의 입가를 어루만진다.……웃고 있다.이 웃음이, 나는 익숙하다. 이것은 거울 속에서 돌덩이를 굴리던 내가 떠올린 웃음이다. 대항에서 희열과, 웃음에서 기쁨을!대항자의 웃음! 나 시지프는 내게 주어진 운명에 대항하면서 행복을 느꼈던 것이다.아……!신들의 수군대는 목소리! 합창!“영특한 시지프. 우리는 네게 지워진 운명의 굴레를 벗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신에 굴레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도록 용이한 도움을 주기로 결정했다. 다른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게끔, 네 가슴을 가득 채웠던 쓸데없는 암흑덩어리들을 몰아낼 수 있는 용기를 주기로 결정했다. 시지프! 깨달았느냐? 눈물을 거두어라. 너는 다시 무거운 돌덩이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미리부터 기운을 소진해서야 되겠느냐?(누군가가 호탕하게 웃었다. 제우스의 목소리다.) 나들이는 끝났다! 돌아가라, 시지프!”
서간(書簡)이 지니는 문학사적 의의―수필, 일기, 기행을 중심으로목 차Ⅰ. 들어가며 ‥‥‥‥‥‥‥‥‥‥‥‥‥‥‥‥‥‥ 1Ⅱ. ‘서간’과 ‘서간체’의 구분1. 서간 ‥‥‥‥‥‥‥‥‥‥‥‥‥‥‥‥‥‥‥ 23. 서간체 ‥‥‥‥‥‥‥‥‥‥‥‥‥‥‥‥‥‥‥ 3-4Ⅲ. 교술의 하위갈래―수필, 일기, 기행, 서간1. 수필 ‥‥‥‥‥‥‥‥‥‥‥‥‥‥‥‥‥ 42. 일기 기행 ‥‥‥‥‥‥‥‥‥‥‥‥‥‥‥‥‥ 5Ⅳ. 문학으로서 인정될 수 있는 서간의 범위 ‥‥‥‥‥ 5Ⅴ. 서간이 지니는 가능성 ‥‥‥‥‥‥‥‥‥‥‥‥‥ 6-7Ⅵ. 맺음말 ‥‥‥‥‥‥‥‥‥‥‥‥‥‥‥‥‥‥‥‥ 7Ⅰ. 들어가며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기틀이 확립 된 근대문학은, 인쇄 기술의 발달로 대표되는 매체 환경의 변화 속에서 암암리에 떠돌던 문학작품이 정식으로 출판되고 유통됨에 따라 본격적인 산업문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1920년대는 동인지와 신경향파, 프로 문학이 새로운 문학 경향으로 떠오르면서 ‘서간체 소설’의 등장이 이루어진 시기로 여겨진다. 서간체 소설은 ‘서간’을 소설형식에 차용한 것으로, 이 시기에 가장 활발한 문학적 활동을 꾀하였다. 서간체 소설의 최초라 할 수 있는 이광수의 「어린 벗에게」를 시작으로 1920년대에만 1945년까지 발표된 60여 편의 서간체 소설 중 30여 편 이상의 소설이 발표되었다. 이것만 보아도 당시 유행처럼 번진 서간과 서간체가 문학에서 얼마나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1920년대 서간은 멀리 있는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매체였으며, 동시에 시?소설?수필 등의 형식으로 차용되었고 문학작품 속에서는 사건의 소재가 되었)던 다용(多用)적 수단)이었다. 그러나 서간의 변용이 불러온 문학적 범위의 확장이 막강한 수용과 파급력으로 인해 가속화를 더하면서, 본래 서간이 가지는 문학적 위상은 그 저변이 축소되고 인식도가 빈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문학형식의 새로운 방식을 창조하는 데 일조하였지만, 서간은 서간체가 문학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확고히 다지는 과 서간체를 문학으로 인정하고는 있으나 이 둘을 엄밀히 분리할 만한 잣대가 없어, 서간과 서간체 문학을 서로 혼동하거나 오해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서간체는 서간의 사회적 존재양태에 의거해 서사의 진실성을 보다 용이하게 확보하게 해주는 형식이다.) 즉 갈래적 개념에서 서간체는 ‘서사’에 포함되며,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이 둘의 위치는 전연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간이 서간체와 그 의미가 중첩되고 혼동되는 이유는 첫째, 서문에서 밝혔듯이 서간의 변용이 불러온 문학적 범위의 확장으로 인한 수용과 파급력이 가속화를 더하면서, 본래 서간의 자리를 상대적으로 축소시킨 것에 있고, 둘째, 이와 같은 급속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간이 문학 장르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하지 못한 채, 그 형식적 측면의 동질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 인식된 데에 있다. 서간이라는 하나의 문학과, 서간을 빌어 파생한 서간체라는 문학의 변용이 단순히 ‘서간’이라는 범주적 특성에 묶여버린 것이다. 또한 자기 고백적 서사 양식이자 발신자에게 읽혀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서간이 소설적 성격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는 서간의 특징은 그 자체로 서간과 서간체(소설)의 구분을 명료히 하기 어려운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그러나 서간체는 서간이라는 문학 장르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장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서간체의 의의가 서간 형식의 차용 속에서 이루어는 창작과 변용임을 주지해야 한다. 갈래를 정의)하는 맥락에서 보면, 서간과 서간체가 가지는 유사성이 범례적 일반형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그 둘이 지니는 차별적 특성이 각각 독립된 문학으로 정의된 바, 서간과 서간체를 혼동하는 일은 재고해야 할 문제이다.1. 서간이태준은 『문장강화』에서 서간문을 언급하는 한 대목에, ‘서간은 편지다.’라는 서문으로 간결한 정의를 시도한다.서간은 편지다.편지는 하고 싶은 말을 만날 수 없으니까 글로 써보내는 것이다.)위 대목에서 언급한 그대로 서간은 편지다. 편지는 서간(書簡), 척독, 서한이라는 명칭 있는 서간의 범위에 대해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기본적으로 서간의 문학적 의의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간은 교술의 하위갈래로, 넓게는 문학의 한 갈래로 그 타당성을 인정받아왔다. 문학이란 작자와 독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니, 비록 독자가 특정된 것이 아니라도 문학의 내용이 작자의 호소인 만큼, 독자라는 대상이 반드시 전제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문학은 서간문(書簡文)의 성격을 더욱 농후하게 띠는 것이며, 따라서 문학(文學)의 원형(原型)(archetype)은 대체로 서간문이라 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문학적 의의를 바탕으로 서간은 현재까지 대표적인 문학 갈래로 주지되는 서정, 서사, 교술, 희곡 중 수필, 일기, 기행 등과 같이 하위갈래에 포함되어 있다. 이 글에서 서간의 위치나 인식이 모호한 것에 대한 지적과 문학으로서 인정될 수 있는 서간의 범위에 대한 논의는 Ⅲ으로 미루기로 한다.2. 서간체)서간의 형식을 차용한 문학 작품에는 서간체 문학에 포함되는 ‘서간체 시’―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나 유치환이 연인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와 ‘서간체 소설’이 있다.서간체 소설은 자기 고백적 서사 양식으로서 자기감정을 투사하여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소설 속에 한두 편의 편지가 수록된 것은 서간체 소설로 부르지 않으며, 사건의 제시와 전개가 주로 작중 인물 간에 주고받는 편지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소설만을 가리킨다.) 서간체 소설의 사전적 정의는 ‘편지 형식을 빌려 쓴 소설’로, 작품에는 이광수의 「어린 벗에게」, 최서해의 「탈출기」, 서간집 『사랑의 불꽃』등이 있다.서간체, 즉 서간체 소설은 그 변용의 기원이 확실한 만큼 내용이나 구성, 형식상의 특징이 뚜렷하고, 서간의 형식을 차용했다는 점에서 범위의 축소나 확대가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 서간은 그 범위가 무척 넓어 문학으로서 인정될 수 있는 폭이 고르지 못한 반면, 서간체는 그 발발이 서간보다 뒤늦었어도 이미 서정?서사서 삼았는지 비교하는 일이다.1. 수필수필은 문학적 성격이 교술에 속하면서 교술이라는 명칭보다 의미 포괄의 가능성이 깊고 명료하여 문학의 상위 갈래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제는 걷어두고, 이 글에서는 일반적인 수필의 정의를 시작으로 논제를 심화하기로 한다.일반적으로 수필은 글쓴이의 개인적인 경험과 견해의 기록을 지칭한다.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는 않으며 중수필과 경수필로 그 종류가 나뉘고, 각각의 특징도 뚜렷하다. 그 성격이 비허구적이고, 산문형식이며, 형상성이 적어 제재?주제 중심적이라 한다. 소논문이나 르포, 기고문 등 객관적 성격을 지니는 글이 중수필에 속하며 이 외에 감상적?주관적?개인적?정서적 특성을 지니는 글이 경수필로 분류된다.1910년대에는 수필류의 글에도 '수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다가 2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수필'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폐허(廢墟)》2호(1921. 1)에 염상섭(廉想涉)의 글 가 수필이란 이름으로 발표되었고,《신천지(新天地)》복간 2호(1924. 4)에서 낙락송(落落松)의 란 글이 수필이란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다가 《영대(靈臺)》(1924. 8. 창간)지에서 '수필'이란 명칭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는데, 춘원(春園)의 라는 수필이 창간호에서부터 5호 폐간호(1925. 1)까지 연재되기도 했다《조선문단(朝鮮文壇)》 3호(1924. 12)에서는 춘원의 이 '에세이'라는 명칭으로 발표되었고, 1925년 1월에 창간된 《생장(生長)》지에서는 4호에서부터 '감상(感想)'이란 용어 대신 '수필'이란 용어를 사용했다.)2. 일기, 기행일기(日記)는 개인이 일상에서 체험하는 경험, 생각, 감상 등의 제반사항을 하루 단위로 기록하는 비공식적, 사적 기록이다. 보통 일일 단위로 기록하지만, 작성하는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특별한 목적 하에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보통 일지(日誌)라고 하나, 과거의 일기는 오늘날과 달리 일지와 일기의 성격을 함께 갖는 경우가 많았다. 일소설의 특성에 비견할만한 하위갈래로 볼 수 있다. 서간체 소설이 서간의 형식적 특성을 차용하였던 것처럼, 기행이 수필이나 일기와 결합하면 기행수필, 기행일기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대체로 기행문에 요구되는 공적인 형식이 없기 때문에 기행은 일기체, 편지 형식, 수필, 보고 형식 같은 교술의 다양한 문학적 형식을 차용하여 새로이 발생된다. 그러나 기행이 서간체 소설과 다른 점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기행’을 목적으로 한 데에 있다는 것이며, 다양한 형식상의 차용이 있더라도 그 자체로 기행이 가지는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수필, 일기, 기행은 기본적으로 작품 밖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과 사건을 작품에 나타내며, 교훈적·이념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는 교술의 요약적 특징이기도 하다. 범위에 있어서는 수필은 글의 논조가 지니는 무게로 중경(重輕)을 가려 종류를 나눠 범위를 세분화하였고, 일기는 특히 다른 장르보다 사적인 특성에 중점을 둬 ‘과거 실재했던 일들의 기록이나 보고가 후대에 와 역사적으로 진실 된 가치를 지닌 것’을 문학작품의 범주에 들게끔 기틀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기행은 그 장르적 성격이 수필이나 일기에 부합하여 자유로이 변용이 가능한 바,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내용이나 감상을 독자적인 관찰이나 표현으로 기술한 문학이라는 정의를 바탕으로 작가가 지니는 전문성이 문학작품의 당락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수필이 1926년에 이르러서야 그 문학적 명칭이 확고히 정착되어 문학적 특성이 명료해지고 문학 갈래로서 차지하는 비중과 인식이 높아진 사실은, ‘서간’이라는 명칭이 조선 후기부터 사용되어왔어도 여태껏 그 기반을 공고히 하지 못하였음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양태는 갈래의 정체성 확립과 고정적 정착이, 민중들로 입맛에 달렸음을 주지하게 한다. 즉 특정 문학 장르에 대한 ‘수용’의 많고 적음이 갈래를 만들고 그것에 정체성을 부여하며, 그 문학을 시대의 위시적 갈래로 정착하게 만드는 것이다.Ⅳ. 문학으로서 인정될 수 있는 서간의 범위그렇다면 서간이 문학의 갈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