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있어서의 사고듀이는 자신이 말한 교육을 하기 위한 방법으로, 또 학교에서 할 수 있고 해야 할 유일한 방법은 사고의 습성을 길러주는 일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고는 경험이라는 것을 통해서 길러지는데, 이때 이 경험이라는 것이, 그것을 학습하는 학생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이어야 한다고 듀이는 말한다. 듀이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학생 자신의 문제인가, 아니면 원래 교사의 문제 또는 교과서의 문제였던 것이 오직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점수를 딸 수 없거나 진급을 못한다거나의 이유에서 억지로 학생의 문제로 만들어진 것인가를 물으며, 오직 문제의 상황에 직접 부딪쳐 씨름하고 자기 자신의 해결책을 모색, 발견할 때에만 우리는 사고를 하고, 그것이 바로 교육이라고 말하고 있다.학교 교육에 있어서 사고만이 유일한 교육이라는 듀이의 생각에 동의한다. 우리나라의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교육을 기술의 습득(읽기, 글씨, 작문, 그리기, 외우기), 정보의 획득(역사와 지리), 사고의 훈련 등과 같은 것으로 보며, 학생들을 정해진 방향으로 이끌며, 정해진 것을 습득하도록 한다. 또 자신의 경험이 아닌 타인의 경험을 통제나 규율에 의해 답습하거나 모방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은 타율적이고 기계적인 지식 암기에 불과하다. 습득되는 지식, 정보, 기술의 획득은 그것을 배우는 학생에게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죽어있는 것이 될 것이다. 자신의 경험, 자신이 처한 문제 상황이 아니라, 타인의 경험을, 타인이 만들어낸 문제 상황에서 받아들인 지식이므로 그 문제에 대한 흥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으며 또한 그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높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개인에게 의미를 가지지도 못하는 것이다. 학습을 하는 이유가 단지 시험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 교사나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의 외재적 가치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수동적이고 타율적인 학습에 불과하다. 자신의 문제 상황에 스스로가 그 문제의 상황 안에 빠져들어 탐구하고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 능동적으로 그 문제를 풀고자 할 때, 거기에 자신의 경험이라는 요소가 더해져 그것이야 말로 학생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 될 수 있다.한 개인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그것을 해결하면서 나아간다. 학교는 사회에 나가기 전단계이다. 학교는 사회에 나가기 전인 학생들을 한 개인으로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도 교육이란 자신의 문제에, 자신의 경험으로 사고하고 터득해가는 능동적인 것이어야 한다. 즉, 교육이라는 것은 단순한 지식 암기나 기술의 습득이 아닌, 한 개인이 자신 만의 의미를 찾게 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다. 어떠한 기준이나 습득해야한다고 정해진 지식, 혹은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는 이를 위해 학생들이 경험에 의한 사고를 풍부하게 하여 확장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조성해 주어야 하며, 학생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문제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연구함으로써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함으로써 학생들은 자신의 학습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그럴 때, 진정한 교육이 될 것이다. 또한 어떤 일이든 그 시작단계는 시행착오적인 성격을 띤다. 따라서 교사들은 비록 시행착오가 있다할 지라도 그것을 교육의 일부분으로 여기며 학생들이 스스로 경험하고 해결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했을 때, 어른이 되어 사회에 나아갔을 때 자신의 앞에 닥친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문제 상황 안에 들어가 사고할 때, 학생들은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성년식으로서의 교육피터스에게 있어 교육이란, 사회에서 요구되는 공적 전통으로 학생들을 입문시키는 것, 말하자면 공적 전통에 학생들을 물들이는 것을 말한다. 공적 전통을 인지하고, 활동의 이면에 들어있는 신념 내지 사고체계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피터스의 교육은 성년식에 비유되며, 이 성년식으로서의 교육의 의미는 지식에 무지한 아이들이 반드시 습득되어야만 하는 공적 전통, 가치 있는 것, 그러한 것들을 습득하게 한다는 즉 성역으로의 입문을 뜻한다. 누구나 받아야 하는, 공통적으로 갖추어야 할 공통분모라고 교육을 본 것이다. 피터스는 이러한 누구나 들어가야 할 성역이라는 공적 전통을 배경으로 해서 개인의 독자적인, 독창적인 것이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피터스는 기존의 두 이론, ‘주형이론’과 ‘성장이론’을 ‘성역’이라 할 만한 것이 올바르게 취급되지 않다고 비판한다. 또한 주형이론은 미리 설정된 형태에 개인을 동화되도록 조형한다고, 교사의 사고형식을 그대로 찍어낼 뿐이라고 비판하며, 성장이론에서의 교사를 관망자적 조작자로 보며 아동을 그 자신의 발달 법칙에 따라 ‘성장’하도록 한다며 성장이론 역시 비판한다. 그러니까 두 이론은 ‘교육’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일정한 형태로 조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개인이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두 이론 모두 교육의 ‘비인칭적인 성격’을 도외시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즉 교육은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간에 교육의 기준이나 방법이 양자 간에 공유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피터스는 미리 설정된 형태에 개인이 동화되도록 주형하는 것뿐이라고 주형이론을 비판했지만, 그러나 피터스가 말한 교육이 공적전통에의 입문이라는 것에서 피터스 역시도 그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다. 피터스는 공적 전통을 아이들이 입문되어야 하는 성역으로 보고 있는데, 피터스가 말한 대로 교육이 공적 전통에 입문하는 것이라면, 공적전통은 사회에서 받아들여진, 사회의 유산, 즉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정해진, 이미 설정된, 구성된 형태의 지식, 사고 형식으로 아이들을 입문시키는 것, 물들게 한다는 것을 교육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공적 전통에로의 입문, 이러한 것 역시 어떠한 정해진 방향으로 아이들을 만들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피터스가 말하고자 한 교육이 주형교육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는가? 피터스는 교육을 공적 전통에의 입문,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보면서 공적 전통을 절대시하는, 그래서 자신이 비판한 주형이론 그러니까 미리 설정된 형태에 개인을 동화시키는 형태의 교육을 주장하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교육이 과연 옳은 것인가? 피터스식의 교육을 받은 아동은 그 아동이 속한 사회의 틀에 따라 사고하고 그 틀에 따라 살아가게 될 확률이 크다. 이미 정해진 사고의 틀에 따라 사고를 하고, 그 사회의 체계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자라는 것이다. 피터스는 그 사회의 전통, 다시 말해 기존의 지식, 사고 형식을 우선 배우고, 그 이후에 그러한 사고 형식을 바탕으로 그것을 비판, 수정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이미 그 사회에서 주어진 대로 사고하게 된, 순응하게 된 개인이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인식이 존재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실은 문제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그것을 옳은 것이라 생각하며 주어진 것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거대한 사회라는 집합의, 사회에서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사는 하나의 개인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주형이론처럼 이미 통용되는 사고형식을 하는, 똑같은 개인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인 것이다. 또한 교육이라는 것은 한 사회에서 한 개인이 살아가기 위한 것이지 학습,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교육이라는 것은 한 개인이 자신 만의 의미를 찾게 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인 것이다. 이미 구성된 것으로 사고의 형식을 맞추거나 그것에 입문한다거나 거기에 물들여지는 것을 교육이라고 보는 피터스식의 교육은 이러한 부분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피터스식의 교육을 받은 아동은 자신만의, 의미 있는 삶,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도 모른 채, 사회가 정한, 주체적이지 못한,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