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소설의 현대적 가치 ─ 레미제라블을 읽고학교 수업이라는 좋은 핑계가 아니었다면 5권이나 되는 이 대 서사시의 원작을 접할 기회가 있었을까. 빵 하나를 훔친 죄로 19년을 복역하고, 출소 후에 성당에서 다시 절도죄를 범하게 되지만, 좋은 신부님의 관용으로 새사람이 되어 새 삶을 살아가는 장발장과 그를 평생 쫓아다니는 자베르 경감의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각색되어 왔다. 때문에, 굳이 원작 소설을 보지 않더라도 그 이름은 우리에게 전혀 생소하지 않다. 이처럼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은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내포하고 있는 가치관과 교훈이 출판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현대에 이르러서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주제라는 것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장발장과 자베르의 대립구조를 통한 작품의 이해작품의 초반부터 중·후반부까지 이야기의 전반적인 줄기를 구성하는 것이 장발장과 자베르의 대립구조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이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에 그들의 캐릭터적인 특성의 차이가 한 몫을 한다. 먼저 장발장을 살펴보자면, 시작은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인한 생계형 범죄자였다. 그러나 행위에 비해 과한 형벌로 인해 세상에 대한 원망과 실망을 가득 안은 채 출소 후에도 연거푸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리엘 신부님에 의해 깨달음을 얻고 선행을 베푸는 존경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거듭난다. 이러한 점들을 보아 장발장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굉장히 입체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자베르는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같은 사고 방식과 가치관을 고수하며, 평면적인 인물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로,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악인이며, 한 번 악인이었던 사람은 그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자신의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매춘 행위를 했던 팡틴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경의 변화를 겪은 장발장을 인정하지 않고 평생 그를 악인는가’,’과연 법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수단으로 적절한가’ 등의 화두를 던지는 사건이기도 하다.표면적으로 장발장과 자베르를 내세웠으나, 그들의 대립을 통해 빅토르 위고가 정말로 나타내고 싶었던 것은 선과 악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법과 도덕적 법의 불화라고 할 수 있다. 사사건건 주인공을 위협하는 자베르를 과연 악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에게 있어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사회적 법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법에 의해 구제된 그 순간부터 자베르의 세계관은 바로 이 ‘법’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법을 지키는 자 선인이요, 법을 어기는 자 악인인 것이다. 어찌보면 법을 집행하는 그의 위치와 입장에서는 범법행위를 한 장발장을 쫓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한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사회적 규칙을 지켜야 한다. 사회 계약설의 기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것에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은 암묵적으로 이 규칙에 합의를 한다. 구성원들의 단위가 커지면서 이 사회적 규칙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법을 어기는 행위는 사회구성원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행위와도 같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자베르가 장발장에 대립하는 것은 사회 전체로 봤을 때에는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다. 자베르는 이를 맹신하며 법치주의의 현신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를 통해 법치주의의 허점을 찌른다. 여기서 그 ‘법’이 특정 계층의 이익과 특정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다면, 혹은 그 시대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면, 그 것은 더 이상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말이다. 그 때부터는 오히려 사회 구성원들을 핍박하는 족쇄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당시의 법은 분명 서민들의 생활과 괴리가 있었다. 연이어 정권을 잡은 지배 세력이 그들의 권력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국민들을 강하게 통제하 생각난다. 본래 모범생이었던 한 여자 중학생이 성폭행 사건을 겪게 되고, 이후 비행 청소년이 된다. 절도죄로 잡혀온 이 여학생에게 판사는 아주 특별한 형을 선고한다. 바로 ‘나는 소중한 사람입니다.’라고 외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눈물을 터트렸다는 그런 일화이다. 여기서 이 판사의 판결은 장발장의 행동과 흡사하다. 자베르의 논리에 의해 소년원으로 보내졌다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오지 않은 결말이지만 우리는 쉽게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논쟁은 과거 속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쉽사리 확언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발장의 사고 방식은 지극히 주관적인 논리에서 비롯된다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이유가 있다면 범법 행위를 선처해 주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할 수 있다. 더불어 우리는 그 타당한 이유의 기준과, 그를 결정하는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며, 논쟁은 끝없이 되풀이 된다. 장발장과 자베르의 대립 구조는 작품을 읽는 사람들을 이 논쟁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주인공 장발장의 행복한 결말과 자베르의 극단적인 결말을 통해서, 작가 빅토르 위고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의 의견은 사회적 법과 도덕적 규범에 대한 대립을 통해 사회적 규칙만으로 지킬 수 없는 것들을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지켜내며 인간다움을 구현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빅토르 위고의 인간에 대한 애정 그리고 휴머니즘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신문에 난 작은 기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의 신문에 빵 하나를 훔친 죄로 감옥에 가게 된 한 기구한 남자의 이야기가 실렸고, 위고는 이를 보고 사회상에 대한 탄식과 연민에 사로 잡힌다. 부유한 집안의 출신이었지만, 빅토르 위고는 마음 속 깊이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탈고한 작품들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사회의 하층민들 혹은 사회적 부조리의 희생양들이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향한 애정 어린 세밀한 묘사와 표현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라는 본연의 질문에 대한 풀이를 해나간다.이는 비단 동시대의 사람들뿐만이 아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소설의 역사적인 배경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40여 년 간의 정치, 경제적 격동기이다.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프랑스는 4번의 정권 교체와 수도 없는 전쟁을 겪었으며, 그 가운데서 일반 서민들의 삶은 점점 정치와 경제에서 고립 되어 갔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인간의 존엄성을 고귀하게 여기며, 민주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한지가 어언 몇 세기가 지났다. 그리고 과학 기술의 발전은 나날이 빨라져,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식·정보 그리고 기술적 격동기를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토록 원해 마지 않던 자유를 얻었고, 또한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발명되며 인간의 삶의 수준은 계속해서 높아졌다. 하지만 더욱 발전을 거듭할수록 ‘인간다움’은 점점 사라져 간다.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함으로써 인간은 일자리를 빼앗겨 거리로 내몰리고, 사람들은 작고 네모난 물체를 통해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편하고, 쉬워지면 쉬워질수록 타인을 위해, 혹은 무엇인가를 위해 수고 한다는 것 자체를 불필요한 행위라 치부하게 되었다. 자신의 옆 집에 누가 사는 지에도 관심이 없고, 거리의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모른 척하며,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없더라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지금, 과연 인류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토록 어렵게 얻었던 인간의 존엄성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가 경시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때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우리 사회에 필요한 가치들여러 가지 중에서도 다양한 콘텐츠로서 각색되면서 절대 빠지지 않을 만큼 상징적인 두 가지미덕을 꼽자면, 바로 미리엘 교주로부터 시작해 마들렌 시장으로 이어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쥬 ─Noblesse Oblige :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사회의 상위 계층인 자신들의 의무이자 책임이기 때문이다.’ 라는 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서 이 개념은 정치·사회 및 경제적인 의미로 확장되어 그 의미를 이어가고 있으며, 이미 워렌 버핏, 빌 게이츠 등 사회 각계 각층의 저명한 인사들이 이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의 솔선수범은 아래로는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며, 위로는 미래 사회 공동체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의 표본을 형성한다.다음으로, 이야기의 판도를 바꿀 만한,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으리라 여길 수 있을 만큼 아주 중요한 미덕이 하나 있다. 바로 ‘용서’이다. 이야기 속에서 미리엘 교주로부터 시작 된 용서의 미덕은 악으로 가득 차 있던 장발장의 영혼을 선한 의지로 순식간에 바꾸어 줄 만큼 강력한 위력을 가진 것으로 나온다. 감옥에 갇힌 그 순간부터 미리엘 주교를 만나기 전까지의 장발장은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한 존재였기에 어디를 가든 내쫓기고 배척당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하지 않았던가. 출소 후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된 그는 점점 세상과의 유대관계에서 멀어지며 반 사회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다.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도, 자신이 이해해야 할 사람도 없는 그런 그에게 미리엘 주교의 용서는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미리엘 주교의 입장에서는 친절을 베풀었던 자가 뒤통수를 친 격이니 배신감이 클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을 이해했던 주교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용서하며, 그 용서의 힘은 장발장, 그 자신 뿐 아니라 이후에 그를 거쳐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 된다. 이를 보면 ‘용서’라는 이름의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은 이 가치가 한 순간에만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연속성과 주위 사람들에게도 전달되는 전염성이 있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에서 빈번하게 접할 수 있는 사건, 사고들이 바로 이 용서의 부재에서 비롯 된 것들이다. 마음 속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서, 혹은 타인에 대한 이해의 결여 4 -
「Mad City」1. 샘 베일리는 무엇을 모르고 당했나?먼저, 영화의 주인공 ‘샘 베일리’는 여론에 대해 무지했다. 샘은 처음에 여론의 힘 자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을 총과 폭탄 등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진정한 힘은 당사자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 진정한 힘은 여론이나 언론을 이른다. 샘은 맥스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여론의 ‘힘’에 대해 깨닫게 되어 그 것을 이용해 자신의 상황을 모면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하지만 결국 여론의 ‘특성’에 대한 무지 때문에 결국 파멸하게 된다. 이는 그가 한 번 형성된 여론이 영원할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한번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형성된 여론이 계속해서 자신을 도와줄 거라는 생각 말이다. 여론은 흥미가 떨어지면 그 사건에 대해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다. 또한 여론은 이슈가 되는 사건에 대한 다른 신빙성 있는 -혹은 신빙성 있게 조작된- 자료나 의견이 나오면 바로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바꾼다.뿐만 아니라 샘은 사건 속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에 대해서도 간과하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상황이 아니라, 밖에서 조작되고 있는 자신의 상황이 어떤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지에 대해 전무했다. 그저 자신이 미디어를 이용해 여론의 힘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실제로는 박물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디어가 외부 현실을 알지 못하는 샘을 역이용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종을 위해 샘의 이미지를 재창조해낸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샘은 한명이지만 박물관 안의 샘과 밖의 샘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볼록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거울 속의 부풀려진 나는 실제 그대로의 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니라고는 확언할 수 없다-. 여기서 샘을 있는 그대로의 샘이지 못하게 만드는 거울은 바로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가 진보하면서 사람들의 오감은 미디어에 맞춰지고, 점점 ‘역치’에 다다르며 익숙해진다. 즉, 웬만한 이슈에는 대중이 크게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미디어는 사람들을 자극해서 그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특히 요즘 같은 미디어의 바다 속에서 사회적인 이슈를 만들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매체들은 ‘특종’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그 과정에서 매체들은 가령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말을 진실로 만드는 것도 불사한다.이러한 미디어의 활성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참여도이다. 여론을 구성하는 것 역시 다수의 ‘인간’이기 때문에 매체들은 인간의 심리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용한다. 그 중 하나가 ‘군중심리’이다. 이러한 심리는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호모 폴리티쿠스’라는 개념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평생을 타인과 함께 살아가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외로움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세, 즉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은 자신 혼자서 무리에서 도태되어 고립되기 싫은 이유에서이다. 예컨대, 모두가 'No'라고 할 때 'Yes'라고 하는 사람이 CF의 콘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것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이 행동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대중이 보이는 반응은 동경 혹은 경멸이다. 그리고 그 둘의 차이는 상황이 있을 당시의 ‘대세’의 차이와 같다. 그러므로 샘이 미디어와의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주위에서, 그와 함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2. 왜 제목이 「Mad City」일까?Mad의 사전적 의미에는 7가지가 있다. 그리고 각 의미는 빠짐없이 교묘하게 영화 속에 얽히고 얽혀 있다. 즉, 'Mad'가 가리키는 대상은 단순히 영화 속에 나오는 어느 한 집단이나 사람이 아니라 영화 내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이 모두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사전에서 ‘Mad’를 찾아보면 ①번 의미에 ‘ⓐ 미친, ⓑ 무분별한, 무모한, 어리석은’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사전에서 ①번에 나오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의미이다. 그런데 의미들을 새로운 번호로 달리 나누지 않고 같은 범주로 구분한 것은 그 의미들의 중요성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Mad’가 단순히 ‘시민들’만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목을 Mad City라고 한 것은 미디어의 쓰나미에 이성을 잃은 미친 도시와 미친 도시에서 희생된 무모한, 그리고 어리석은 샘을 우열없이 함께 조명하기 위한 의도라고 보인다.또한, 'Mad'에는 ‘화가 난’이라는 뜻도 있다. 영화 내에서 단순히 표면적으로 보이는 분노는 유아인질범이자 테러리스트인 샘에 대한 정의로운 시민의 분노이다. 물론 이는 외부 요인에 의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방향을 잃은 분노이다. 정작 시민이 분노해야할 대상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샘은 물론 시민들, 그 자신마저 이용하고 있는 미디어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미디어의 장난에 의해 희생양이 된 개인의 세상에 대한 분노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의 일을 되찾고 행복한 가정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던 한 소시민의 단순한 소망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노력은 교묘하게 이용당하고,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침해당할 수 없는 ‘인권’이라는 가치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보장받지 못한다.샘이 범죄자가 되고 죽기까지의 과정 중 사회 속에서 휴머니티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인간성이 사라진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정말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mad city'는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미친 개'에서 ‘미친’은 ‘광포한’ 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관점에서, 'mad city'는 자신의 이익에 눈이 멀어 타인의 인권을 파괴하는 ‘비인간적인’ 도시라는 의미를 추가하게 된다.더 나아가, 'mad'는 ‘눈이 뒤집힌’, ‘몹시 심한’과 같은 의미에서는 ‘일시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눈이 뒤집힐 정도의 화나 태풍 같은 것들은 한 때, 한 철 잠시 지나가버리는 ‘해프닝’과도 같다. 때문에 이는 여론의 일시성을 의미한다. 미디어가 창조한 환상에 휩쓸려, 샘은 소시민의 권리를 위해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영웅이 되기도 하고, 유아를 인질로 잡고 있는 흉악한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한다. 이 가운데 시민들은 무분별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조작된 표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사건은 점점 본질을 잃게 된다. 즉, 'Mad City'란 개인의 무분별한 사고로는 이겨낼 수 없는, 태풍 같은 여론에 휩쓸린, 개인의 인권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비인간적인 도시를 뜻 한다.3. 표현의 자유, 알권리, 휴머니티(인간성)표현의 자유와 알권리에 대한 논쟁은 미디어가 보편화되면서부터 주목받아 왔다. 먼저, 표현의 자유란 인간 내면의 정신작용을 외부를 향해 공표하는 정신활동의 자유를 총칭하는 말이다.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이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 알권리란 모든 종류의 정보와 사상을 방해받지 않고 요구하고 또한 그것들을 받을 권리를 뜻한다. 이는 1945년 미국 한 통신사의 전무였던 켄트 쿠퍼가 뉴욕의 한 강연에서 “시민은 완전하고 정확하게 제시되는 뉴스에 접할 권리를 갖고 있다. 알 권리에 대한 존중 없이는 어느 한 국가나 또 세계적으로나 정치적 자유란 있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처음 사용된 단어이다. 우리가 표현의 자유와 알권리를 사수하려 하는 것은 강력한 권력같은 외부 압력에 얽매여 다양한 표현과 창작을 억압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가 표현의 자유와 알권리를 보장하고 있는데, 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이념과 맥락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 내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이름의 의미 그대로 ‘국민주권’이다. 즉 국민들이 주체가 되어 나라를 이끌어나간다는 뜻이며, 그렇기에 국민들의 의사 표현-사실에 대해 알아야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서 의사 표현에는 알권리 역시 포함된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때문에 위의 두 권리의 허용과 제제에 관한 논쟁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아닐 수 없다.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지나치게 되면 다양한 시각의 ‘표현’이 아닌, 이익을 위해 새로운 사실을 ‘조작’하거나 타인을 공격하기 위한 최고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표현의 자유에 대한 허용 범위가 불분명하고,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와 같은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는 다수가 개인을 억압하기에 가장 좋은 구조가 형성된다. 표현자는 ‘다양한 의견의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하고 싶은 사실에 관해 관련자에게 유도심문을 하거나 사건을 파편화시켜 짜깁기를 하거나 어느 한 부분만을 받아들인다. 결과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대상에 대한 이미지는 표현자가 원하는 대로 조작된다. 마치 ‘샘’처럼. 가까운 예를 들자면, 얼마 전까지 인터넷 상에서 핫이슈였던 ‘타블로 학력’에 대한 진실공방이 있다. 결과적으로 타블로의 학력은 진실이었지만, 그 동안 반대 세력, 일명 ‘타진요’의 논리에 놀아난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를 들어보면 정말 진실 같아 일반인은 쉽사리 판단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인권의 파괴는 물론이고, 문제의 진정한 본질에서도 벗어나기가 쉽다.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랐던 한 단순한 실직자의 해프닝이 종국엔 백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인권단체까지 등장하게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극단적이기까지 한 이 영화의 결말은 과도한 표현의 자유 추구에서 비롯된 인간성의 공중분해와 언제 태어날지 모르는 또 다른 소크라테스들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