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I. 서론1. 방문 개요2 체험대상 선정 이유 및 목적- 이유- 목적Ⅱ 본론 (참고 사이트 각자료 하단표기)1. 수문장 교대식의 정의 및 유래- 정의- 유래2. 수문장 교대식의 임무3-1. 교대 의식의 절차 (1)3-2. 교대 의식의 절차 (2)4. 수문군의 복장5. 수문군의 의장기Ⅲ 결론1. 여행기 및 느낀 점2. 우리문화의 세계화 방안I. 서론1. 방문 개요① 문화재 명칭 :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② 일정 : 2012년 5월 6일③ 장소 : 덕수궁 정문 대한문④ 교통편 : 지하철(시청역 2번출구 직진 50m)2 체험대상 선정 이유 및 목적① 이유평소에 우리나라의 역사 및 문화재에 관심이 많아 시간 날 때 마다 유적지를 방문하였으나 무형문화재 및 민속문화에 대한 유적지는 많이 가지 못하였다. 한국민속과 전통문화의 레포트를 빌어 덕수궁의 수문장 교대식에 방문하기로 하였다. 덕수궁은 교통편 및 위치를 고려해 봤을 때 수도권 지역에 사는 사람들 이라면 데이트 및 산책으로도 적합한 장소이다. 또한 덕수궁뿐만 아니라 4대궁 + 종묘 견학 및 시청 주위의 미술관 또한 방문 할 수 있어 덕수궁을 선택하게 되었다.② 목적덕수궁 수문장교대식의 정의 및 유래에 관하여 알아보고 수문장 의식의 절차 및 수문군의 복장, 임무에 대하여 알아보았다.또한 더불어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세계화 및 국민의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의식 고취 방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Ⅱ 본론1. 수문장 교대식의 정의 및 유래① 정의수문장 교대식을 말 그대로 조선시대 왕궁에는 궁궐의 경비를 관장하고 대전(大殿)을 호위하는 군대인 금군(禁軍)아래 수문군이라는 군대가 있었는데 이 군의 수문장을 교대하는 의식이다. 수문군은 궁궐 문을 개폐, 경비, 순찰하는 업무 등을 수행하였다고 한다.② 유래덕수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1593년 10월 한성으로 돌아와 보니 한성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덕수궁에 행궁을 정하고 덕수궁을 정릉동행궁이라 흉내 내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수문장교대의식을 하였다는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수문장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단편적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는 '표신이 없다 하여 별감이 궁궐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수문장을 추국하게 하다'(성종 25년) '수문장에게 명하여 착모를 금한 자는 출입하지 못하게 하다'(영조 48년) 등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것도 많았다. 연산군과 광해군 때는 궁문 밖에 잡인들이 들끓었는지 수문장이 이들을 쫓아내지 못해 벌을 받은 기록도 있었다. 서울시와 문화재청 등은 수문장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떠한 형식으로는 교대식이 존재 했다고 추정한다고 한다.)덕수궁에서는 1996년 부터 하루 3회씩 수문장교대의식을 행하고 있다고 한다. 1996.6.16. 경향일보2. 수문장 교대식의 임무① 승정원 주서 : 왕명의 출납을 맡은 기관의 관리로 교대의식의 감독관② 액정서 사약 : 궁성문의 열쇠를 관리하며 교대 의식을 감독③ 수문장 : 궁성 문을 경비하는 수문군의 책임자④ 참하 : 수문장을 보좌하는 임무 수행⑤ 수문군 : 기수 4명과 군사 6명으로 구성되어 궁성문의 경비를 담당⑥ 엄고수 : 교대의식 중 북으로 교대 간 신호를 보내는 임무수행3-1. 교대 의식의 절차 (1)교대의식은 정해진 절차와 신호에 따라 이뤄지며 부대 간 교대 시 상호 예의를 갖춰 군례(軍禮)를 행한다.궁성 문을 지키는 것으로 경비임무를 수행하고 교대군이 도착하면 임무를 인수인계 한다.① 부대정렬 : 궁성 경계의 의식을 위한 절차로 감독관 두 명이 위치하며, 수문장의 인솔 하에 수문군들이 궁성 문 앞에 도열한다.② 군호하부/순장패인계 : 승정원의 주서가 수문장에게 암호를 내려주고 순장패를 인계하며 액정서 사약은 궁성문의 열쇠가 담긴 약시함을 인계한다.③ 수문 : 근무자의 정위치를 말하는 것으로 수문장이 수문군을 인솔하여 군사와 기수들이 각각 구령과 악기소리에 맞추어 근무 위치에 선다.3-2. 교대 의식의 절차 (2)궁성 문을 경비하는 부대가 암호를 통한 신분확인 절차를 거친다.② 초엄 : 첫 번째 북신호로 북이 여섯 번 울리면 수문군의 참하가 교대군의 참하에게 열쇠 함을 인계한다. 이때 승정원의 주서와 액정서의 사약은 열쇠 함 인계를 감독한다.③ 중엄 : 두 번째 북신호로 북이 세 번 울리면 수문군의 수문장과 교대군의 수문장이 교대 명령의 진위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다음 순장패를 인수인계한다.④ 삼엄 : 세 번째 북신호로 북이 두 번 울리면 수문군과 교대군이 마주선 상태로 정렬하며 군례를 행하고 서로의 임무를 교대한다.⑤ 행순 : 교대한 부대는 궁궐의 외곽경비 임무를 수행하는 행렬을 실시한다.4. 수문군의 복장수문장수종장종사관갑사정병대졸전루군취타① 수문장 : 궁성 문 수호책임자로서 무관 4품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군청색 철릭위에 빨간 방령을 입은 모습으로 방령과 반수철릭의 차이는 길이와 단추라고 한다. 모자로는 방립을 썼으며 모자 가운데는 수장이라는 패가 있었다. 양쪽으로는 공작의 깃을 꽃아 노은 모습이다.② 수종장 : 대종고 관리감독으로서 무관 4에 해당한다. 복식으로는 빨간 요선철릭을 입고 있으며 여기서 요선은 허리부분에 파란색 선을 뜻한다. 역시 환도 한 자루에 등채 한 자루를 소지 하고 있다. 또한, 허리 부분에서 거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베이지색 주머니에 현대식으로 말하면 신분증인 수종장패를 보관한다고 한다.③ 종사관 : 수문장을 보좌하는 직책으로 무관7품이다. 오늘날로 따지만 수문장의 비서라고도 할 수 있다. 연 노란색 철릭 위에 자주색 방령을 입고 있으며 모자는 방립으로 한가운데에 한자로 종사관 이라고 쓰여 있는 패가 있다. 환도 한 자루에 ,등채(채찍의 일환)을 소지하고 있다.④ 갑사 : 궁성 문 수호가 목적이며 무관 5품~ 8품의 무관들이 맡는다. (같은 갑사라도 의복이 달랐다. 우리나라 군대처럼 호봉에 따라 복장도 약간씩 달라지나 보다) 허리에는 활과 활통을 차고 대도를 들고 있다. 복장은 빨간색 반수 철릭이다. 여기서 철릭이란 허리에 주름이 잡히고 넓은 소매가 달린 무관의 신기한 점은 수문군의 방립에는 그 당시 고가였던 공작 깃을 사용하였고 계급이 낮은 병사들은 꿩깃을 꽂았다는 것이다.⑥ 대졸 : 궁성문의 파수병이다. 옥색 반수 철릭을 입고 검을 차고 방패와 등장은 들고 있다. 역시 방립에는 꿩깃을 꽂고 있다.⑦ 전루군 : 궁성 내 시각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⑧ 취타대 : 여기서 취타는 불고치는 악기의 준말로 식을 거행하는 동안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말한다.5. 수문군의 의장기홍문대기주작기청룡기현무기전전대기고자기금자기군왕천세기천하태평기백호기① 홍문대기 : 적색 바탕에 청룡이 그려진 깃발로 청,적,황,백 등 4가지 색의 운기를 그렸으며 노랑색의 화염각,기각이 있는데 재료는 비단을 썻다.② 주작기 : 전군,전영에 세워 앞쪽을 지휘하던 깃발이다. 이는 대오방기의 하나로서 붉은 바탕에 3두의 주작과 청,적,황,백 4색의 운기가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재료는 명주를 사용 하였다.③ 청룡기 : 청룡이 그려져 있으며 재료는 비단이다. 좌측을 뜻하여 좌군,좌영을 지휘하던 청색의 4각기 이다.④ 현무기 : 진영의 후문에 세웠던 기로서 검은 바탕에 뱀이 거북을 감고 있는 모습을 그렸고 역시 청,적,황,백 4색의 운기와 화염각이있다.⑤ 전전대기 :대가(大駕)·법가(法駕)의 노부(鹵簿)와 어장(御葬) 때 사용한 흑색 바탕의 4각기로, 청룡과 4색의 운기가 그려 있고, 적색의 화염각이 달려 있는데, 재료는 명주를 사용하였다.⑥ 고자기 : 노란색 바탕에 한자로 鼓(북 고) 자가 쓰여져있는 깃발이다.⑦ 금자기 : 빨간색 바탕에 金(쇠 금) 자가 새겨진 기이다.⑧ 군왕천세기 : 조선 시대 왕실에서 사용하던 의장기의 하나로서 흰 바탕의 기폭 가운데에 이중으로 큰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군왕천세(君王千歲)라고 내려썼으며, 주위를 구름무늬로 채웠다. 가장 자리에는 청,적,황,백 4색 불꽃과 기각을 붙였다.⑨ 천하태평기 :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던 의장의 하나. 본래는 천자(天子)의 의장에 사용하는 것이나, 조선 시대에도 계속 의 오른쪽 문에 세워 우궁을 지휘하는 표식으로 쓰여 지거나 각종 궁중 의식의 의장기로 사용 되었다고 한다. 백색 바탕에 백호와 운기가 청,황,적백,의 4가지 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불꽃 모양의 꼬리가 달려있다.(본론 전 부분) 출처 : Ⅲ 결론1. 여행기 및 느낀점오랜 간만에 서울 나들이를 간다는 설레임에 전날 밤 잠을 설친 탓에 피곤하게 아침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덕수궁 뿐 아니라 4대궁 + 종묘 + 각 미술관을 돌아 봐야 하는 일정 이였기에 아침도 거르고 밖으로 나왔다. 덕수궁이 위치한 곳은 서울 시청 역으로 항상 교통체증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약 1시간10분 즈음 지하철을 타니 목적지인 시청 역 1호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10시에 덕수궁을 도착한 우리는 행사가 11시였기 때문에 1시간가량 덕수궁을 견학하였다. 수문장교대식이 시작하기 전 덕수궁의 수문장과 사진을 촬영하였다. 특히 일본인 관광객들이 수문장과 사진을 많이 찍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한국사람 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사진을 찍자고 먼저 말을 걸기가 어색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전통 무관의복을 입은 사람과 사진을 찍는데 왜 그리 쑥스러웠는지 모르겠다.11시에 수문장 교대식이 시작 하자 한 여자가 마이크를 잡았는데 이 여인을 4개국을 유창하게 하며 수문장 교대식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취업을 코앞에 두고 있고 어학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지금 그 여인이 너무 부러웠다. 그 후 취타병에 의한 북소리가 들렸고 이 북소리에 맞춰 병사들이 발을 맞추었다. 군을 이미 전역을 하였기 때문에 오와열을 맞추는 병사들이 현대 군대를 연상케 하였다. 이어 현대 군의 암구호 방식인 그날의 암호를 확인하는 ‘군호하부’ 절차를 거치고 궁성문의 열쇠가 담긴 함을 전달하는 인계 절차가 행해졌다. 이 모습에서 현대 군대의 모습과 굉장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대 군대에서도 암구호를 물어 보고 동초 근무 시 열쇠를 인계하기 때문이다. 이어 두 개의 수문군들이 교대하며 새로 도착한 수문군
미술 감상문 “월정 정근화 화백의 韓國의 山河展”학교: , 학과: , 학번: 이름 :관람 일시 : 5월 06일 (일) 12:00 ~ 01:00관람 장소 : 조선일보 미술관(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1가 61번지관람 시 교통편 : 1호선 시청역 하차 5분관람 동기 : 덕수궁 관람후 서울시립미술관을 거쳐 조선일보 미술관을 방문하였다.2012년 5월 2일부터 일주일간 전시되는 월정 정근화의 산수전은 동양화의 매력을 새롭게 알 수 있는 계기였다. 한국 자연의 미를 엿볼 수 있는 동양화는 다른 그림에 비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정근화 화백께서는 한 해에도 몇 번씩 설악산을 오르는 등 아름다운 계곡 및 우람한 바위 같은 자연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려왔다고 한다. 특히 작품은 폭포를 나타낸 만큼 종이가 굉장히 길었다. 폭포는 크게 4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단마다 방향과 속도감이 다른 느낌을 받았다. 폭포 물줄기의 속도감이 그대로 다가 왔기 때문에 마치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작품은 물줄기와 바위 이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무언가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동식물이 나타나 있지 않아 약간 삭막한 느낌이 들었고 무척 가파르게 보이는 폭포는 어둡게 느껴졌다. 작품도 역시 폭포를 그린 그림이다. 이 폭포는 한줄기로 되어 있으며 좁은 폭포입구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엔 웅장하게 물이 흩어진다. 한 가지 신기 했던 점은 물줄기를 채색하지 않고 흑색으로 선만 그어 줌으로써 폭포를 표현 했다는 점이다. 멋지게 꾸미지는 않았지만 단조로운 멋이 있었다. 바위 또한 섬세하게 그리지 않고 흑색으로 마구잡이로 칠해져 있었다. 원근감을 주기위해 멀리 있는 바위를 섬세하게 표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왼쪽 하단의 나무 또한 나무의 종류를 알 수 없을 만큼 정확하게 나타내지 않았다. 자연을 그림으로만 즐기지 말고 직접 와서 확인해 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 했다.은 소나무에 폭설이 내린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 자연은 계절 마다 다른 모습이고 그 느낌 또한 다르다. 앞서 말한 작품과 같이 소나무에 쌓인 눈에 채색을 하지 않은 체 선만 나타냄으로써 표현하였다. 소나무를 오른쪽에 치우쳐 위치해 있어 대칭이 맞지 않아 보이지만 충분히 가득차보였다. 가장 놀란 것은 나무의 질감까지 명암의 차로 인해 나타냈다는 점이었다.
미술 감상문 “천경자의 혼”학교: 학과: 학번: 이름 :관람 일시 : 5월 06일 (일) 10:00 ~ 11:00관람 장소 :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 37관람 시 교통편 : 1호선 시청역 하차 도보 10분관람 동기 : 덕수궁 관람 후 덕수궁 미술관을 가려했으나 휴관인 관계로 서울 시립미술관을 관람하였다.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마침 한국 채색화에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어 온 천경자 화백의 작품이 전시 중이였습니다. 3년 전 즈음 인터넷을 통해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두고 국립 현대미술관 과의 위작 시비에 관한 기사 및 글을 본 적 이 있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 전시회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자화상, 세계여행을 통해 제작된 풍물화, 인물화 등 1940년대부터 1990년대에 그려진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전시 되어있었다. 특히 ,, 이 세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작품은 날카로운 칼날이 꽂힌 믹서 속에 꽃이 위태롭게 들어가 있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제목이 암시하듯 칼날 위에 선듯한 위태로움과 슬픔이 느껴졌다. 또한 색상도 파란색으로 불안한 기분이 감도는 듯 했다. 청소년 자살 문제에 관해 많은 뉴스가 나오는 요즘 다시금 우리사회의 문제를 짚어 볼 수 있던 기회였다. 작품은 천경자 화백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준 작품인 동시에 가장 애착을 가지는 작품이라고 한다. 1951년 작품으로 벌써 61년이나 된 작품이다. 뱀이 한곳에 뭉쳐 뒤 섞어 있는 것을 표현한 작품으로 처음에는 이해를 하지 못한 작품이었으나 설명을 보니 이 그림을 그리며 당시 한꺼번에 밀려온 생활고와 혈육의 죽음, 순탄치 못한 결혼과 연애등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61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그 때의 작가의 심정이 느껴질 만큼 설레 이는 그림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담겨 있는 모티브와 전개가 화백 자신에게서 비롯된 작품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대표적으로 이 있다. 지구를 수없이 돌며 각 나라, 각 지역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을 즐겼던 천경자 화백은 1970년대에 이탈리아를 다녀 온 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유럽과 남태평양 여행에서 얻은 낭만적이면서 화려한 우울함의 감수성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 작품은 이탈리아 미술에서 받은 깊은 감흥을 간직 한 채 3년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고 하니 그림에 작가의 숨결이 아직 까지도 살아있는 것 같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열었던 보티첼리의 그림과 멋진 건축물이 찍힌 사진, 여인의 장갑 그리고 양주병과 꽃으로 이루어진 그림은 약간 매혹적인 느낌이 느껴졌다. 그 외에도 ,, 등 수 많은 작품이 여행 중 감명 깊었던 기억을 되살려 그린 그림이었다.
미술 감상문 “쁘띠 프랑스 (인형갤러리)”학교: 인천대, 학과: 학번: 250 이름 :관람 일시 : 3월 18일 (월) 13:00 ~ 15:00관람 장소 : 경기도 가평균 청평면 고성리 616-1 번지관람 시 교통편 : 청평댐 입구에서 고성리, 호명리 방향으로 10km (서울에서 50분소요)관람 동기 : 가평 1박2일 여행 중, 쁘띠 프랑스마을을 들려 프랑스에 관한 갤러리를 관람 하였습니다.어린왕자작가 쌩떽쥐베리의 국가 프랑스의 마을을 그대로 재현시켜 논 쁘띠 프랑스에는 쌩떽쥐베리 전시관, 오르골하우스, 인형극장, 오르골체험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특히, 인형은 귀엽고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 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인형의 또 다른 의미을 알게 해준 ‘프랑스 인형’ 갤러리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프랑스 인형의 시초는 14세기 초 파리의 이상점에서 아름다운 봉제인형을 고안하여 패션모델 대신 외국에 보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인형들은 동물이 아닌 사람의 형상을 띈 인형들이 였다. 또한 대부분의 인형들이 드레스나 프랑스 전통의상을 입은 인형들이였다. 그러나 한가지 놀란 것은 일부 인형들은 표정이 밝고 웃고 있는 모습이 아닌 어둡거나 무섭게 생겼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슨, 그 인형들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이 아닌 주술이나 특별한 뜻을 기리기 위해 쓰이는 인형이라고 한다.또한 한 가지 놀란 것은 쉽게 접할 수 없는 밀랍인형이다. 밀랍인형은 정말 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밀랍인형은 프랑스 혁명당시 단두대식의 처형 방식 때문에 신체가 훼손되어 유족들이 항의를 함에 따라 그 사람과 같은 얼굴 형식으로 복원을 하면서부터 시작 되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읽으며 정말 사람과 똑같았기 때문에 조금 밀랍인형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인형들은 19세기에 들어 어른의 얼굴 모습을 한 인형에서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인형으로 바뀜으로써 인형의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한다.조금안쪽으로 들어서니, 인형극을 하기 위한 인형들도 보였다. 이러한 인형들은 각각의 인형 얼굴만 봐도 성격을 알정도로 특징들이 잘 드러나 보였다. 왕 옆에 있는 왕비로 보이는 인형은 매섭고 날카롭게 생겨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 인형들은 수작업으로 제작되어 대부분이 20 만원이 넘었다는 것이다. 왜 인형들을 프랑스 귀족들만 가지고 있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