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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관계론_야스쿠니신사참배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Ⅰ. 머리말Ⅱ. 야스쿠니란?1.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2. 전후 일본의 야스쿠니Ⅲ. 야스쿠니 문제1. A급 전범의 합사 문제2. 한국인 합사문제3.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Ⅳ.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대한 일본의 논리1. 역사적 인식으로서의 야스쿠니신사참배2. 일본의 보수우익의 전략3. 고이즈미 수상의 신사참배Ⅴ. 한국의 반응1. 역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대한 한국의 반응2. 야스쿠니 반대 공동행동Ⅵ.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1. 기타 전몰자 추도 시설Ⅶ. 맺음말Ⅰ. 머리말ㅇ 총리가 신사 참배를 어떻게 설명하시더라도, 나와 우리 국민에게는 역시 과거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객관적 현실 (노무현 대통령)ㅇ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과거의 전쟁을 미화,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본의 아니게 전쟁에 참가한 많은 일본인을 추도하고 앞으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한 것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ㅇ 젓가락 들기도 ‘무거웠던’ 만찬, 충돌, 깊은 골만 남겼다. (언론 보도)2005년 6월 20일에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야스쿠니신사(靖?神社) 참배 문제에 대한 양국 정상의 주장과 이에 관한 언론 보도 내용이다. 회담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양국 정상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는 사실이 말해 주듯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북아 외교관계의 판도를 좌우할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문제이다.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이처럼 문제가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는 역사인식, 국가의 공적인 전몰자 추도 시설, 일본 국내의 정치적 이해관계, 동북아 외교관계의 변화, 종교, 문화 유족 감정 등 다양한 요소가 얽히고설켜 있어서 어느 한 부분만을 보아서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기 힘들다. 본고에서는 야스쿠니 신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와 한국과 일본 사이에 걸쳐 있는 측면을 중심으로 야스쿠니 문제에 대해 이해하고자 한다.Ⅱ. 야스쿠니 신사(靖?神社)란?야스쿠니 신사는 1869년 일본이 근대국 높이는 역할을 다했다. 일본군 장병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 영령들, 즉 자신들보다 앞서 전사한 군인들을 보고는 그들을 본받고, 자신들도 천황과 국가를 위해 앞장서서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들도 야스쿠니에 모셔지는 군인으로서의 최고 영예라고 생각하여 사기를 높여간 것이다. 그들이 전장에서 전사하면, 야스쿠니 신사는 전사자를 합사할 때 일본 전국에 있는 수많은 전몰자 유족들을 국비를 써서 합사제(임시 대제)로 초대하여 참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자신들의 자식을 잃은 어머니나 남편을 잃은 아내, 형제를 잃은 자매들, 가족 중에 전사자를 낸 유족들은 당연히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야스쿠니 신사의 합사제에 참례하게 되면 그 슬픔을 명예스런 유족으로서의 자랑스러움으로 바꾸어 나가게 된다. 전사하여 야스쿠니에 모셔진 가족을 위해 천황까지 참배하는 광경을 눈앞에서 보면서, 유족들은 전사를 명예스런 것으로 느끼고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전사자와 유족을 지키는 일반 국민은 자신들도 그들에 이어 제국 일본의 신민(臣民), 즉 천황의 신하로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들도 야스쿠니의 영령을 본받아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칠 것을 맹세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일본군 장병과 그 유족, 나아가 일반 국민 전체를 전쟁을 위해 정신적으로 동원해 가는 장치였다는 의미에서 야스쿠니 신사는 확실히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2. 전후 일본의 야스쿠니이상과 같이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적 신사로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 야스쿠니 신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는 연합국 사이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다. 일본을 점령한 GHQ(연합군 총사령부)는 우선 이른바 ‘신도 지령(神道指令)’을 발표하였고, 일본의 ‘국가 신도’를 해체하기 위해 신사를 국가로부터 분리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윽고 그것은 1946년 11월 3일에 교부되어 다음해 5월 3일에 시행된 일본국 헌법 제 20조에서는 신앙의 당 출신의 총리대신은 중국과 한국 정부의 이러한 비판을 항상 신경 쓰되 그들의 정치적 동기에 기초하여 공식 참배인지 사적 참배인지 분명히 하지 않는 애매한 형태로 자주 참배를 해왔다. 그리고 2001년 고이즈미 총리대신이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승리하여 내각총리대신이 되면 바로 8월 15일에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겠다고 발언한 이후, 실제로 참배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문제로 발전한 것이다.Ⅲ. 야스쿠니 문제1. A급 전범의 합사 문제‘A급 전범’이란 극동 국제 군사재판(이른바 도쿄재판)에서 ‘평화에 대한 죄’, 즉 침략 전쟁을 지도한 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를 뜻한다. A급 전범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모두 25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1978년 10월 17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자는 14명이다.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전사자’는 아니다. 전후에 재판을 받고 나서 사형에 처해지거나 옥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는 ‘전사자’라고는 말할 수 없는 B ? C급 전범에 대해서도 합사를 행한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에는 전시 중 교전 법규를 위반한 죄로 국내외에서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연합국에 의해 기소되고, 그 중 약 천명이 사형을 받는 B ? C급 전범 재판이 행해졌는데, 야스쿠니 신사는 이들 사형자를 모두 ‘쇼와 순난자(昭和殉難者)’라고 부르며, 1970년까지 그 합사를 마쳤던 것이다.총리대신의 야스쿠니 참배가 국제적 비판을 받게 된 것은 1985년 나카소네 총리대신이 참배할 때 도쿄 히테키 등 A급 전범을 모신 신사에 총리대신이 참배하는 것을 중국 정부가 문제시했기 때문이다. 만주사변 이래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 그리고 태평양 전쟁을 지도한 일본 위정자들과 군인이 최고위의 전쟁 책임자로 재단 받는 이상, 그들을 신으로 모시로 영령으로 현창하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총리대신이 참배하는 것은 일본 정부가 전쟁 책임을 부인하는 것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 야스쿠니 신사가 A급 전범 합사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야스쿠니 신사는 그 후 오늘의 전몰자 관련 단체들이 자민당의 정치적 기반이었다는 점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기에, 국민으로서 숭경(崇敬)의 심정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1964년 일본사회당정책심의회의 견해와 1985년 나카소네 수상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앞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께 국민이 감사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그렇지 않다면 누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는가”라고 역설한 점은 야스쿠니 신사 문제가 국민국가 일반이 가지고 있는 추도 시설 문제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둘째, A급 전범이 합사된 후에도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계속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은 없었다는 점과 나카소네 수상이 “A급 전범 합사는 침략당한 상대방 국민의 감정을 자극한다”라는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지한 것이 아시아에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야스쿠니 신사 문제가 동북아 외교관계의 변화를 반영해 왔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셋째, 1975년 미키 수상이 ‘사적’인 참배임을 명시하기 전까지는 참배가 ‘사적’인가 ‘공적’인가 하는 점은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미키 수상이 사적 참배의 조건으로 ‘공용 차를 사용하지 않고’, ‘참배료를 사비로 지출하고’, ‘직함을 기입하지 않고’, ‘공직자(수행원)를 대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참배의 형식’이 중시되어 왔다. 그러나 현재 야스쿠니 참배 문제는 ‘공적’인가 ‘사적’인가 하는 문제를 떠나 수상의 참배라는 점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일국의 역사인식 문제가 일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관계 속에서 규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넷째,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일본 정부의 일국중심적인 편협한 정치인식과 역사인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일본 시민들이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후쿠오카(福岡) 지방재판소는 수상의 참배는 ‘위헌’ 천재일우의 기회를 반면교사로 삼아 두 번 다시는 권력을 뺏기지 않겠다는 각성을 하였다.94년 이들에게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자민당은 먼저 전후 50년 역사를 총괄하는 팀을 만들었고, 이들은 [자학적인] 좌파의 역사관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보수의 역사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이들의 역사의 총괄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고, 현재 문제되고 있는 새로운 역사교과서 팀이 당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교육현장의 일교조를 철저히 박살낼 전략이 필요하였으며, 일본국가의 국체를 근본적으로 지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이들은 야스쿠니를 다시 세우기 시작하였다. 야스쿠니신사를 국가에서 특별히 보호하고 국립시설화하려는 ‘야스쿠니신사법안’은 1969년에 처음으로 국회 상정되었다. 그러나 1973년까지 5회에 걸치는 상정이 무산되자 이를 주도하던 자민당 보수파는 방향을 선회해 수상이 야스쿠니신사를 공식참배하는 것으로 야스쿠니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했다.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국회의원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언론을 근본적으로 해체할 필요가 있었다. 이들은 진보적인 저널리스트들을 다 지방으로 보내버리거나 주요 포스트에서 해고시켰다. 다시는 권력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우익의 전략은 자민당 내부에서도 내부의 온건 보수파들을 잘라내는 역할을 하였다. 결국 덜 온건파인 모리파를 중심으로 전통 보수파들을 다 내몰았다. 또한 모리보다 더 효과가 있는 고이즈미를 등용시켰다.야스쿠니신사는 일본의 우경화와 더불어 천황제 군국주의 정체성을 부활시키기 위한 ‘기억장치’로 이용되고 있다.3. 고이즈미 수상의 신사참배고이즈미 수상은 2002년 4월 21일 춘계 예제(例祭)때 “내각총리대신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라고 서명하고 참배했다. 그때 고이즈미 수상이 밝힌 수상의 소감은 “본인의 참배 목적은 메이지유신 이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부득이 가족을 남기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 전체에 대해 진심으로 추도를 하는 일입니다”, “나라를 위해 고귀한 희생을 하신 분들에 대한 아왔다.
    인문/어학| 2020.12.23| 14페이지| 3,000원| 조회(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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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발수도회
    탁발수도회Ⅰ. 탁발수도회의 발생1. 탁발수도회의 어원2. 탁발수도회의 발생Ⅱ. 탁발수도회의 종류1. 프란체스코회2. 도미니크수도회3. 두 수도회의 차이점Ⅲ. 탁발수도회의 특징Ⅳ. 탁발수도회의 쇠퇴Ⅴ. 탁발수도회의 영향Ⅰ. 탁발수도회의 발생1. 탁발수도회의 어원탁발 수도회는 라틴어 'Fratre'에서 나온 ‘형제(brother)’라는 뜻의 말로 ‘후라이아(Friar Religious Order)’라 불러지는데, 그래서 이 탁발수도회는 ‘작은 형제회’라고도 한다. 또한 이들은 모두 소유를 버리고 유랑하면서 노동이나 기부를 받지 않고 음식은 구걸하여 먹으면서 복음과 자선을 하며 동냥한다고 해서 탁발(Mendicant) 수도회라 불린다. 'Monk'는 독수자, 은수자라는 말에서 나와 일정한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수도사를 이르는 말이다. 'Friar'는 'Monk'의 일원으로 일정한 집(수도원)에서 수련하는 사람과 달리 정주하지 않고 몇 년마다 자리를 옮기면서 설교하고 전도하는 수도사이다.2. 탁발수도회의 발생13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세 유럽의 수도회는 새로운 형태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대형화와 세속화로 인해서 더 이상 당시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매개해내지 못했던 클루니와 시토수도회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에 대항하여 이제 또 다시 그리스도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새로운 모습으로서의 집단들이 등장했는데, 이렇게 일어난 새로운 형태의 수도원 운동이 탁발수도회(Friars or mendicant orders)의 등장이다. 초창기에 이들은 학자들과 제후들과 교황들에게 한결같이 호평을 받았으며, 비록 갈등이 없지 않았으나 대중으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광야로 들어가 수도원의 기도 장소에서 하나님을 찾는 은둔과 고행의 모습을 보였던 수도사들이 다시 세상으로 나와 현실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이들 수도회는 당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나타나면서 드러난 사회적 모순, 즉 가난의 문제가 기독교 신앙과 결의 소유를 완전히 포기하고 더욱 철저한 갈릴리 예수의 제자 공동체의 처음 모습으로의 복귀를 추구했는데, 그것은 곧 일체의 소유를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수도사 개인의 소유와 수도원의 소유에 대해서 인정했던 것과는 달리 수도원의 소유까지도 포기함으로 철저한 청빈화를 실천한 것이다. 이처럼 탁발 수도회 운동은 대중들을 위한 종교를 보존하고 전파하는데 힘씀으로써 본질적으로 평신도 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세속을 떠나는 수도 생활의 방향에서 벗어나 세속 속으로 들어가 대중과 평민들 속에 함께 동거 동락하는 포교 운동으로 바뀌었다.Ⅱ. 탁발수도회의 종류탁발수도회에는 네 종류가 있는데 프란체스코회(Franciscans), 도미니크회(Dominicans), 칼멜회(Carmelites), 어거스틴회(Augustinians) 들이다. 그들은 옷 색으로도 구별이 된다. 즉 프란체스코회는 회색, 도미니크회는 검은 색, 칼멜회와 어거스틴회는 흰색 옷을 입는다. 또 프란체스코회를 ‘작은 형제회(Frias minor)’라고 하며 도미니크회를 ‘설교 수도회(Preaching minor)’로 부르기도 한다. 이 중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수도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가 있다. 이들은 같은 탁발 수도회의 성격에 속하면서도 각기 다른 형식의 수도를 하였던 것이 주된 차이점이다.1. 프란체스코 수도회성 프란체스코는 1181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씨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직물 상인이었으며, 어머니는 프랑스 귀족 출신이었다. 청년기 시절 그의 조국 이탈리아 반도는 이웃 도시 와의 전투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전쟁을 위해 목적지로 가던 도중 그는 꿈속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심중의 변화를 겪고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모방하는 삶이 행복의 원천임을 깨닫게 된다. 특히 그리스도의 가난한 삶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부를 완전히 버리고 가난을 통해 회개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그가 복음의 선포자로서 순회설교를 시작하들로 구성된 통치기구를 세웠다. 하지만 여전히 청빈의 실천을 명령하고, 수사들이 게으르지 않도록 노동의 의무를 강조하였다. 노동으로 생산된 물품들은 병자들을 돕는 목적으로만 판매되었다. 그러나 1223년의 수도회 규율은 훨씬 노골적으로 프란체스코의 유언을 배척하였다. 수도회의 탁발적 성격은 유지되었으나 교황에게 순종을 바치고 추기경을 수도회의 보호자로 세우는 규정이 추가되었다. 또한 수도원의 규율이 성경적 자유를 대체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수도회가 초창기부터 힘썼던 자유를 역설하고 수도회 내의 수직적 질서에 반대하였으나 ‘수도회파’는 세력을 총동원하여 그의 주장을 묵살했다.이렇듯 수도회파는 프란체스코의 ‘자발적 청빈’을 실천하면서 현실적인 수도회의 유지를 위해 약간의 제도화에 동의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프란체스코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지키고자 했던 ‘청빈파’와 대립하면서 수도회를 운영하였다. 수도회파는 교황의 재산보유를 지지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대칙서를 발행하여 지역별로 선정된 신자들에게 돈을 모금하여 수도회 운영에 사용하거나 신탁금으로 보관할 수 있게 하였다. ‘청빈파’는 이러한 교황의 결정에 단호하게 저항했으며, 그 이유로 수도회파의 박해를 받았다.프란체스코는 총 세 가지의 수도회를 세웠다. 제 1회는 남자로 구성된 작은형제회(Minorites)이고, 제 2회는 여성들로 구성된 수녀회인 클라라회(the Clarisses), 제 3회는 속인들로 구성된 제3수도회(the Tertiaries)이다. 특히 제3회는 평신도들도 속세의 삶에서 간접적이나마 수도원 생활을 체험할 수 있게 하여 빠르게 성장하였다. 이후 여기에는 유럽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유명한 인물들이 소속되어 그 명성을 더하였다. 또한 프란체스코의 수사들은 도시에 정착하여 빈자들을 구휼하고 학문을 발전시켰다.그러나 그 후 프란체스코회는 초기에 누렸던 신망을 잃었다. 명예와 토지가 도덕적 부패를 가져와 ‘돈을 거두어 교황청에 바치는 자들’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영국의 에게 가난은 양심의 문제였기 때문에 프란체스코회와 같이 재산소유 문제를 둘러싼 내분을 겪지는 않았다.수도회의 주된 목표는 설교와 영혼구원이었다. 도미니크는 프란체스코와는 달리 수사들의 과업인 노동을 연구와 설교로 대체하였다. 수사들은 4년 과정의 철학과 신학 수업을 받아야만 설교할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도미니크회는 엄격한 이단처벌이라는 오점을 남겼다. 1232년 종교재판소의 업무를 넘겨받으면서 프랑스 북부와 스페인, 독일 지역에서 가혹한 방법으로 이단을 처벌하였다.도미니크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열정적으로 전도하다가 숨을 거두었고 교황 그레고리 9세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의 설교 탁발수사들은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영국·독일·헝가리에 수도원을 두고 있었으며, 각 지역은 해마다 자체적으로 대회를 열었다. 이러한 각 관구는 관구장이 관장했으며, 수도원은 소수도원장이 관장했다. 그리고 조직 전체는 총장이 주관했다. 교황청은 이 수도회에 모든 곳에서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포함한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했다. 그래서 이미 전 유럽에 확산되어있던 프란체스코회와 대등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13세기는 유럽에 대학이 탄생하고 학문연구에 중심이 되는 시기로, 이 탁발수도회들은 대학의 학문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중세의 스콜라 학문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1226-1274)는 도미니크회 수사로서 수도회에 최고의 영예를 안겨주었다.3. 두 수도회의 비교프란체스코와 도미니크 수도회는 당시 기성교회의 부패를 극복하려는 종교적 정화운동이었다. 기성교회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을 부여주지 못하자, 세속과 분리된 금욕적인 형태의 개인수도가 나타났다. 이에 따라 자연히 수도원 공동체가 생겨나고 이것이 조직적이고 경제적인 번영을 가져와 중세를 특징짓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두 수도회의 가장 큰 차이점은 프란체스코회가 감성적이었다면, 도미니크회는 이성적이었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사도의 면모를 보이며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고 인간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율화 했다. 탁발(托鉢, 구걸)이 그들의 주요 강령이었는데, 프란체스코회가 먼저 길을 닦았으나 두 수도회의 수도회칙들은 다 같이 재산 소유를 금지했다. 수사 개인뿐 아니라 집단이 가난하게 살기로 서약했다. 프란체스코의 의도는 추종자들이 사유 재산 뿐 아니라 법인 재산까지도 영구히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2. 실천적 사회참여탁발수도회는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실천의 모습을 보였다. 과거에 성 안토니우스가 테베 광야로 물러나 은거할 때부터 수사가 되면 으레 사회를 등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탁발수도회는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물결에 뛰어들었다. 즉 그들은 사색과 명상에도 힘썼지만, 평민들을 찾아다니며 설교했고, 가난을 구제했고, 억눌린 자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3. 평신도 형제회탁발수도회는 평신도 형제회를 발전시켰다. 이 집단을 가리켜 제3수도회들(Tertiares)들 혹은 참회 수도회(fratres de poenitentia)라고 한다. 과거에도 히르샤우 같은 수도원들이 평신도들을 수사로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탁발수도회의 제3수도회는 자신들의 본업을 계속해서 수행하면서 복음의 주요 덕목들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에 매인 평신도집단이었다. 이로써 과거에는 반드시 수사가 되어야만 기대할 수 있었던 더 높은 차원의 공로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평신도들에게도 열렸다. 종교가 일상생활의 장으로 되돌려진 것이다.4. 교육활동탁발수도회는 대학교라는 새로운 교육중심들이 강력한 영향력의 중심임을 인식하고서 대학교들에 들어가 교육활동을 펼쳤다.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크회는 설립된 지 20년이 채 되지 않아 대학교들에서 두드러진 사역을 펼치고 있었다.도미니크 수도원은 처음부터 학문중심이었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변증을 위해 교리를 연구하였으므로 스콜라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알버투스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배출되었다. 특히 아퀴나스는 5세기 수도원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세에 도미니크 수도원에 가입하여 알버투스로부터 신학을 배워 중세 스콜라 신학체
    인문/어학| 2020.12.23| 8페이지| 3,000원| 조회(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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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 끝나지 않은 일본의 전후-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아직 끝나지 않은 일본의 전후목차Ⅰ. 머리말Ⅱ.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Ⅲ.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문제점1. 최대 피해국의 제외2. 전후 보상의 문제1) 전후보상의 법적근거⑴ 포츠담선언에서 나오는 보상⑵ 일본 헌법에 나타나는 보상⑶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의 배상2) 배상의 실상Ⅳ. 맺음말Ⅰ. 머리말일본의 전후는 연합국의 일본에 대한 항복 권고이며, 전후 대일 처리방침을 명시한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고 ‘전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였다. 이후 연합군의 대일점령이 개시되었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로 일본이 독립하면서 일본의 전후는 끝인 듯 보였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문제가 있으며, 일본의 전후 보상에도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그 문제점에 대해 알아보고, 전후 배상의 실상을 통해 실제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의 전후가 끝이 났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Ⅱ.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점령 초기 맥아더는 장기 점령이 아니라 3년 정도의 단기 점령을 얘기하기도 했으나, 강화의 절차 문제를 둘러싼 이견이 미소 사이에 노정되면서 계속 연장되어 갔다. 대일 점령정책의 마지막 단계가 강화문제였듯이, 일본의 ‘과거극복’의 마지막 계기 또한 강화조약의 내실에 달려 있었다.미국의 대일점령정책이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 구축이라는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던 연합국의 공동 점령관리는 와해되었다. 대일점령의 종결, 즉 강화를 실현하는 방법이 문제가 되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 미국 국무성에서는 소련과의 협조를 파기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일 강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독립된 일본을 서방 진영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더 이상 강화를 미룰 경우 일본 국민 일반의 지지를 얻기가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전해지자 11월 요시다 내각은 단독강화(소련과 공산권을 제외한 서방 진영과의 강화, 편면강화라고도골자로 하는 안이 일본정부 측에서도 받아들여졌다. 개정된 평화조약안은 9월 10일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얻었고 이후 각국별로 협의가 시작되었다.당시 수상이던 요시다는 앞에서 언급한 강화의 지체와 한국전쟁 발발 등의 국제정세의 변화가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여겼다. 즉 조건면에서도 훨씬 약화될 것이며, 무엇보다 연합국과의 절충 과정에서 미국이 일본의 대변자 역할을 해서 일본의 이익을 옹호해 줄 것이라 믿고 교섭에 응했다고 한다.1951년 1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델레스가 방일하여 요시다 수상과 최종적인 조절을 마쳤다. 맥아더의 해임(4.11)후에도 강화를 향한 미국의 절충은 계속되어, 일본의 재군비와 미군의 계속 주둔을 반대하던 소련을 물리치면서 단독강화는 거의 실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1951년 8월 미국은 영국과 공동제안으로 대일 강화조약의 초안을 결정, 발표했다. 9월 4일부터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회의가 개최되어 8일 조인식이 거행되었다. 조약에는 소련 등 사회주의권 국가를 제외한 48개국이 조인했다. 대일전쟁에 참전한 54개 연합국이 초청되었으나,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침략전쟁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한반도의 두 당사국과 중국은 초청되지 않았다. 더구나 미국이 대일강화를 서둔 목적이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를 위해 일본을 부흥 강화시킨다는 데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부담이 되는 배상책임문제는 관대한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미군의 계속 주둔을 허용하는 미일안정보장조약도 체결되었다.Ⅲ.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문제점1. 최대 피해국의 제외단독강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미 ‘과거극복’의 진지한 의지가 삽입될 여지가 거의 없었다는 점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최대 피해국인 한반도의 두 당사국과 중국(두 중국)이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먼저 중국이 제외된 이유는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와 냉전의 논리였다. 홍콩을 비롯한 식민지적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이 절실했던 영국이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만약 한국이 서명국이 되면 대부분이 공산주의자인 100만 명에 이르는 재일코리안이 연합국 국민으로서 재산권과 보상청구권을 행사하게 된다면서 반대에 나섰다. 특히 식민지였던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많은 배상 및 보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보고 한국의 참가를 저지하고자 했다. 결국 일본은 강화조약의 혜택을 재일코리아에게는 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국의 참가를 허용하지만, 이번에는 영국이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영국은 중국의 대표권 문제로 비화해서 중국을 자극할 지도 모르는 한국의 참가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제외되었다.2. 전후 보상의 문제1) 전후보상의 법적근거⑴ 포츠담선언에서 나오는 보상전후 일본은 1945년 8월 15일의 포츠담선언 수락에서 출발한다. 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함에 따라 일본은 연합국과의 전투를 무조건 항복으로 끝낼 수 있었으며, 일본 정부가 수락한 이 포츠담선언의 내용이야말로 일본의 전후 책무와 진로를 규정하는 것이었다.이 포츠담 선언은 45년 7월 26일 연합국인 미합중국, 중화민국, 영국의 대표가 협의하여 작성한 것이지만, 그 제8항에는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라고 되어 있다. 즉 43년 11월 27일의 카이로선언 내용까지도 일본정부는 전면적으로 수락한 것이다.이 카이로선언은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 처칠 영국 수상에 의하여 이루어진 성명이지만, 거기에는 “3대 동맹국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고 또 이를 벌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맹국은 자국을 위하여 하등의 이득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며, 또 영토 확장에 대해서도 하등의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라고 하여 일본과의 전쟁은 그야말로 정의의 회복을 위한 전쟁이라면서 이를 통해 일본이 일으킨 부정의를 단죄하고 있다. 그러면서 일본이 침략에 의하여 획득한 영토 등에 대하여서는 그 원상회복을 요구하고 있다.더욱 특기할 것은 “전기 3대국은 조선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머지않아 조선을 자유 독립국가로 하로 동원된 사람들에 대해 일본은 다만 해방만 할 것이 아니라, 당연히 연행한 사람들은 데려다 주고 사망한 사람은 그 유골을 반환하고 또 그러한 행위에 의한 피해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이와 같이 포츠담선언의 수락이란 그야말로 일본이 조선을 위시하여 아시아를 침략하였으며 인도에 대한 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였다는 사실을 일본이 인정하고 그 피해로부터의 회복조치를 취하도록 연합국이 요구한 것에 대해 일본이 이것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해야 했다. 전쟁책임이란 것은 아시아에 대한 침략, 억압의 죄를 묻는 것이다. 전후배상 혹은 전후보상이라 함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원상회복조치를 의미한다. 이 전쟁책임과 전후보상이야말로 일본의 출발점이라는 것이 포츠담선언의 수락으로 명확히 확인된 것이다.따라서 일본의 전후 출발점은, 즉 일본이 최초로 하지 않으면 안 될 작업은 이들 아시아의 피해자에 대한 보상행위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거의 부정의를 바로잡는 작업을 통하여 일본이 다시는 전쟁과 침략을 되풀이하지 않는 평화적이며 민주적 성격의 국가를 창조하는 그러한 결의가 전후 일본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어야 했다.⑵ 일본 헌법에 나타나는 보상전술한 포츠담선언에 의하여 확정된 전후 일본의 출발점인 보상의 책무에 대해서는 일본 헌법에서도 재확인되고 있다.이 헌법 전문의 처음에는 정부의 행위에 의하여 다시는 전쟁의 참화가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결의되어 두 번 다시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며, 다시는 침략에 의한 피해, 희생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결의하는 문언(文言)이 적혀 있다. 이 결의를 효과 있게 하려면 일본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전쟁의 전말이 해명되고 정부의 행위의 실태를 정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 따르는 책임을 올바르게 이행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이다.헌법은 일본이 범한 이 ‘전제와 예종, 압박과 편협’에 따른 피해의 회복(보상)에 일본이 진지하게 대처해나가는 것만이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명예로운”, ⓑ“연합국은 연합국의 모든 배상청구권, 전쟁 수행중의 일본 및 국민이 취한 행동에서 발생한 연합국과 그 국민의 다른 청구권 및 점령의 직접군사비에 관한 연합국의 청구권을 포기한다”라는 규정은 국제법위반 경우의 피해자에 발생하는 보상청구권의 존재를 명확히 전제로 두고 있다. 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문제는 그와 같은 피해자 개인의 보상청구권을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냉전구조에서의 미국의 정책에 따라 피해자의 권리구제에 대하여 배려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14조 ⓐ항 단서에 나타나고 있다.“그러나 또 존립가능한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자원은 일본의 그러한 모든 손해 및 고통에 대하여 완전한 배상을 하며, 동시에 다른 채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현재로서는 충분하지 못한다는 것이 승인되었다.”즉 전쟁범죄의 피해자 개인에 대해서도 보상을 해야 할 책무는 있지만 지금 돈이 없기 때문에 연합국은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여 받아내지는 않겠다는 자세였다. 그러나 연합국이 포기한 것은 장래까지 구속하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현재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장래 ‘충분한 상태’로 회복되면 채무를 이행하기로 예정될 수는 있다. 이는 1차 대전 후의 독일에 대한 배상, 보상책임은 문자 그대로 모든 채무를 곧 지불케 함으로써 나치의 발흥을 허용해버린 역사의 교훈을 배려한 것이며, 일본이 부담할 국가 책임이 모두 해제된 것은 아니다. 연합국 소속정부가 갖는 국가의 채권은 정치적 이유에 따라 포기할 수는 있겠지만 피해자 개인이 갖는 보상청구권은 기본적 인권이라고 할 수 있어 국가라 해도 빼앗을 수는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2) 배상의 실상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점령 초기의 비군사화?민주화의 원칙이 변질되고 난 뒤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반공의 교두보’로서 일본경제의 조속한 부흥과 재건이었다. 당연히 이는 전쟁책임배상의 향방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니, 미국은 조약 체결이 구체화되기도 전인 1949년부터 노골적으로 무배상의 원칙을 강요하고 나왔다.그러나 각국과의 개별 다.
    인문/어학| 2020.12.23| 7페이지| 3,000원| 조회(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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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북공정 -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동북공정(東北工程)-고구려사를 중심으로-Ⅰ. 머리말Ⅱ. 동북공정의 추진배경1. 동북아 전략의 차원2. 동북지역 개발의 차원 : ‘동북진흥’ 전략3. 한반도의 정세변화4. 한반도 역사연구로 인한 계기적 차원Ⅲ. 동북공정의 목적Ⅳ. 한국과 중국의 고구려 인식1. 중국사서의 고구려 인식2. 한국사서의 고구려 인식3. 교과서 상의 고구려 서술Ⅴ. 동북공정의 내용1. 중국의 ‘민족’ 개념2. 고구려의 기원3. 조공과 책봉의 문제4. 지방정권과 속국인식5. 고구려대 수?당과의 전쟁6. 고구려와 고려의 관계Ⅵ.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1. 한국의 현상2. 한국의 대응방안Ⅶ. 맺음말Ⅰ. 머리말최근 다시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시작으로, 우리의 역사 왜곡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현재 우리역사에 대해 고대사는 중국이, 근?현대사는 일본이 역사왜곡을 위한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하 동북공정)은 중국 동북 3성(省)(랴오닝성(遼寧省)?지린성(吉林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역사와 현실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중국정부의 연구프로젝트이다. 동북 3성이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중국의 역사와 영토에 속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것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2002년 2월 28일부터 시작하여 약 3조원을 투입, 5개년 계획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 핵심적인 연구기관이다. 동북공정은 2007년 1월 31일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동북공정의 한국 고대사에 대한 연구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그에 관련된 주제는 ‘고구려 민족과 국가의 연변’, ‘고구려 족원(族源)과 강역’ 등이 있다.따라서 이글에서도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동북공정을 다루되, 중국 측의 주장과 그에 대한 우리 측의 주장을 비교하여 다루고자 한다.Ⅱ. 동북공정의 추진배경1. 동북아 전략의 차원동북공정을 추진하게 된 정치적 배경은 중국이 동북공정의 연구목적으로 설정한 이른바 중국의 장기적 전략과 관련하여 동북공정의 직지 있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이는, 역사관(歷史觀), 민족관(民族觀), 조국관(祖國觀)의 분리 현상과, 조선족의 한국행과, 한국 선호의식, 그리고 한국인들이 ‘만주는 우리 땅’이라는 언행을 서슴지 않고 있다는 등 불안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넷째, 소수 민족의 분열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중국에 거주하는 여러 소수민족은 중국의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면 쉽게 분리 독립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를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다섯 번째, 중국은 역사적으로 다민족(多民族)으로 이루어진 통일 국가라는 개념을 깊숙이 심어주기 위해서 이미 중국은 서남변경지역과 서북변경지역에 대한 역사 및 지리 연구를 진행하고, 마지막으로 동북부 지역의 확고한 영토화를 역사적으로 공고히 하기 위하여 동북공정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이러한 목적 외에도 최근에 중국의 시안(西安)부근과 만주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유적과 유물의 주인이 한족의 선조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 이를 중국의 역사로 끌어들이기 위한 역사 조작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반도 통일 후, 간도지역에 대한 영유권 분쟁을 사전에 차단하고 유사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역사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숨은 계략이 저변에 깔려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Ⅳ. 한국과 중국의 고구려 인식1. 중국사서의 고구려 인식위(魏), 촉(蜀), 오(吳) 등 중국의 삼국사를 기록한 진(晋)나라의 사학자 진수(陳壽)는《삼국지》위지(魏志) 동이전에서, 동이(東夷)의 역사를 위, 촉, 오 등 중국사가 아닌 다른 나라의 역사로 인식했다. 그리고 동이전에는 부여, 고구려, 동옥저, 예, 마한, 진변, 왜에 대해 기록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와서, 동이의 역사인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라고 한다면, 당시 동이에 속한 마한, 진변 등 한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왜(倭) 곧 일본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삼국지》동이전의 서술방식은 그 후의 중국사서에 계승되어 역대 중국사서에 고었음을 내포하고 있으며 고구려와 신라, 발해로 이어지는 민족사적 동일성을 부각하는 인상을 준다.반면, 북한이 경우는 고구려 유민들과 신라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다. 이것은 북한이 통일신라에 대해 ‘후기 신라’로 명명하면서, 그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고구려 유민에 대한 서술에 있어 남한과 북한 교과서의 공통점은 발해의 건국 과정에 고구려 유민의 역할을 부각시킴으로써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강조하여 발해사를 한국사 속에 편입시키는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Ⅴ. 동북공정의 내용1. 중국의 ‘민족’ 개념중국은 기본적으로 다수의 민족이 단결·융합하면서 통일적인 국가를 형성해 왔다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관’을 견지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현재 중국의 강역 안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모든 민족은 ‘중국’이라는 역사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이다. 중국은 한족과 여러 소수민족이 오랜 역사과정을 통해 통일적으로 형성된 국가라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의 관점에 기반 해 역사와 민족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 최근 중화문명의 유구함과 중화민족의 위대함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려는 목적을 내포한 신중화주의 문명사관이 투영되어 있음도 사실이다.따라서 통일적 다민족 국가인 중국을 형성하는데 공헌한, 현재 중국의 국경 내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모든 민족은 중국민족이다. 특히 민족 개념과 관련해서 중국은 ‘중화민족(Chinese Nation)’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일반화 하고 있다. ‘중화민족’이란 다원일체(多元一體)의 틀 속에서 다민족 상호간의 이주와 융합을 거쳐 각 민족이 다른 민족의 문화전통을 받아들여 축적하고, 더불어 변강을 개발하고 중국 문화를 풍부하게 하고 외침(外侵)에 공동으로 대적하면서 생겨난 민족 응집력의 결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중화민족은 엄밀히 말해 역사적 실체로 존재 했다기보다는 근대 이후, 특히 현대 중국의 현재적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중국은 이러한 역사관을 동북지역에 적용하여 기존의 동북지역 고대갔어야 했다. 하지만 모든 사서에 열전으로만 들어갔지 세기나 본기에는 없다. 만일 열전에 들어간 것으로 중국의 역사라고 친다면 아시아의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가 될 것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를 한국 역사로 쓴《삼국사기》와《삼국유사》는 이미 국제적으로 공인된 사서이며 그 안에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가 들어있다. 이것은 고구려사가 한국사라는 확고한 증거이다.또한 고구려는 스스로를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칭하였다. 424년 세워진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를 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처음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셨도다. (추모왕은) 북부여 출신이시니, 천제(天帝)의 아들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광개토대왕비를 세운 장수왕대가 조공과 책봉이 가장 빈번했던 시기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조공과 책봉이 신속과 관련이 없으며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일개 지방정권이었다면 그들이 모시는 중국의 제왕조와 같이 스스로를 천자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황제(皇帝)가 하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를 제외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을 엄격히 금하였는데 고구려에는 ‘동맹(東盟)’이라는 이름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로 미루어 봐도 고구려는 독자적인 천하관(天下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구려가 그들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연호에서도 드러난다. 중원의 각 왕조는 천자 국가만이 연호를 쓰고, 주변의 제후국(諸侯國)들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신라 이후 사대주의사관(事大主義史觀)에 의해 사가(史家)들이 스스로 연호를 빼버렸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사료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보다 앞선 시대의 비문(碑文)과 불상(佛像)들에서 영락(永樂), 연가(延嘉), 영강(永康), 건흥(建興)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5. 고구려대 수(隋)·당(唐)과의 전쟁1) 중국 측의 입장위에서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따라서 고려의 통치 지역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시대 통치 지역과 큰 차이는 없으며, 이는 곧 고려와 고구려 통치 지역은 서로 따로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고 보고 있다. 비록 고려의 북부 지역은 부분적으로 고구려의 남부와 겹칠 수 있지만 이 지역은 왕건이 영유하기 180여년 전에 이미 신라에 속했던 지역이므로 이 지역은 신라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지방은 원래부터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었고 고구려가 4세기부터 5세기의 영토를 확장하는 기간에 말갈과 낙랑 지역을 침략하여 얻은 곳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2) 한국 측의 입장중국이 고구려를 자국(自國)의 역사로 편입시키면서 주장하는 또 하나의 논리는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므로 현재 한반도(韓半島)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고구려를 조상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주장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사(正史)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였다.(1) 중국의 기록들이 인정한 고려의 고구려 계승고려에 사신으로 다녀간 후,《계림유사(鷄林類事)》를 저술한 손목은 “고려 왕건은 고씨이며 고구려를 대신하여 임금이 되었다.”고 하였다. 또 서긍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구려의 정치가 쇠퇴하자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왕씨의 선조가 고려의 대족(大族)이었다.”고 하였다. 또한 송나라대의 역사를 기록한 송사(宋史)의 고려 열전은 “고려는 본래 고구려라고 한다.”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이렇듯 당시의 중국인들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송사(宋史)》를 비롯한 25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나라의 5대에서부터 명나라에 이르는 사이에 나온 구·신《5대사》,《송사》,《요사(遼史)》《금사(金史)》,《원사(元史)》,《명사(明史)》에는 모두 「고려전(高麗傳)」,「조선전(朝鮮傳)」을 설치하고 고씨 고려 역사를 그 앞에다 간단하게 서술하였다. 여러 역사 전기들의
    인문/어학| 2020.12.23| 23페이지| 3,000원| 조회(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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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
    -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足利尊氏 -Ⅰ. 머리말Ⅱ. 시대적 사실1.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와 멸망1)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⑴ 고케닌(御家人)의 궁핍⑵ 호조씨(北條氏)의 독재와 정치의 동요2)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멸망2. 겐무의 신정(建武の新政)3. 신정의 붕괴와 무가정치의 부활4. 남북조 시대1) 남북조 대립과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Ⅲ. 足利尊氏(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일생Ⅳ. 足利尊氏에 대한 평가1. 『太平記(태평기)』에 나타난 足利尊氏像2. 明治時代(명치시대)에서의 足利尊氏3. 태평양전쟁 후 ~ 현대에서의 足利尊氏Ⅴ. 맺음말Ⅰ. 머리말어떠한 인물이든 당시대의 평가와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진다. 이것은 그 시대가 중시하는 이념,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그 인물을 재평가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객관적인 입장이 되어 그 시대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과거 군국주의가 득세하던 일본(日本)의 황실이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자랑하던 것을 떠올리면,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두 명의 천황이 공존했다는 것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대를 끝내고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를 열었던 인물이 足利尊氏(아시카가 다카우지)이다. 아시카가 다카우지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재평가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이는 그의 행동이 각 시대의 사람들이 각자 나름의 관점에 의해 받아들여져, 그를 그 시대의 영웅으로, 조정에 반기를 든 인물 등으로 다양하게 평가한다.따라서 여기에서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살았던 시대적 사실을 알아보고, 이를 통해 그의 일생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사료를 통해 그가 어떻게 평가되었는지를 알아보고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Ⅱ. 시대적 사실1.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쇠퇴와 멸망1)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⑴ 고케닌(御家人)의 궁핍2차례에 걸친 원(元)의 침입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막부의 권력이 강화된 것처럼 보였으나, 고케닌 제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고케닌들은 원의 침입으로 막대한 고다이고 천황을 오키(?岐)에 유배시켜버렸다.그런데 천황이 체포된 후에도 가와치(河內)의 악당인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는 막부에 반기를 들고 고군분투했다. 마사시게는 이즈미(和泉)와 가와치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전개, 막부 수뇌부를 계속 괴롭혔다. 이 사이 고다이고 천황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여 유배지를 탈출, 반 막부세력을 모아 교토를 공격했다.이런 정세 하에서 막부에 결정적 타격을 안긴 것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와 그에 동조한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의 반란이었다. 다카우지는 1333년 막부 측 대장으로 병력을 이끌고 교토에 진입했는데, 천황의 밀칙(密勅)을 받고 천황편이 되어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에 난입했다. 요시사다는 치하야 성을 공격하던 중 역시 고다이고 천황 측의 밀서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막부 타도를 위한 병사를 일으켜 가마쿠라로 진군해 함락시켰다. 드디어 1세기 반에 걸친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하고 말았다.2. 겐무의 신정(建武の新政)1333년에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자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로 돌아와 막부가 세운 고곤(光?)천황을 폐하고 천황 친정을 이상으로 삼아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독재정치를 실시했다. 무가정권이 성립된 이해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공가(公家)가 정치 일선에 나섰다. 고다이고는 조정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 중앙?지방의 정치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러한 고다이고의 신정을 겐무의 중흥이라고 한다.고다이고 천황은 무가사회의 지도자가 막부를 개설하여 정치를 관장하던 전통을 부정하였다. 호조씨의 영지를 몰수하여 주로 천황의 일족에게 분배하였다. 사원의 영지를 원래대로 회복하고, 고쿠시(國司)제도를 부활하였다. 공가과 사원을 중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신정부 내부에서조차 공가과 무가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신정부는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무사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였다. 특히 은상이 귀족이나 사원에게는 후하였으나 정작 무사에게는 그렇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신정부에 기대를 락을 취하면서 평화 협상을 추진하였다. 1369년에 마사노리가 막부에 투항하였다. 마사노리의 투항은 남조에 큰 타격이었다. 남조 세력은 급격하게 쇠퇴하여 명목상의 정부로 존속하는 모양이 되었다.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압도적인 실력을 배경으로 남조와 평화협상을 시도하였다. 요시미쓰가 내건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남조의 고카메야마(後龜山) 천황은 세가지 신기를 교토에 돌려주고, 막부가 옹립한 고코마쓰(後小松) 천황에게 선양하는 형식으로 양위한다. 둘 때, 장래 다이카쿠지 계통과 지묘인 계통이 서로 번갈아 가며 천황에 즉위한다. 셋째, 전국의 장원은 다이카쿠지 계통과 지묘인 계통이 각각 전례에 따라서 관할한다. 쇼군 요시미쓰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검토해 보면 남조와 북조의 주장을 다 포용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특히 남조 측의 체면을 존중한 흔적이 역력하다. 제1항 고카메야마 천황이 북조의 고코마쓰 천황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양위한다는 것은 남조의 정통성을 인정한 것이다. 제2항은 남북조 시대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인데, 북조 측에서 보았을 때 이미 기정사실화된 사안을 뒤집는 것으로 불만의 여지가 있는 내용이다. 그런 만큼 쇼군 요시미쓰가 정치적으로 결단을 내린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인 문제인 제3항은 남조의 체면을 생각한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요컨대, 쇼군 요시미쓰가 강화의 조건은 남북조 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북조의 불만을 누르고 남조의 체면을 세우는 모양으로 정리한 것이었다.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은 쇼군 요시미쓰의 제안을 수용하였다. 1392년 10월, 고카메야마 천황은 교토로 가서 북조의 고코마쓰 천황에게 양위하였다. 그리하여 남조와 북조는 통합되었다. 그러나 쇼군 요시미쓰가 강화의 조건으로 내건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강화의 조건조차도 요시미쓰의 책략이었던 것이다.Ⅲ. 足利尊氏(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일생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변화무쌍한 시대에 무로마치막부를 세운 쇼군이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와 같은 미나모 모로나오가 살해되고 이어서 다다요시마저 다카우지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리하여 형제가 함께 정치를 하는 이원정치의 구상은 좌절되고 말았지만 동생에 대한 다카우지의 배려는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막부의 내부 대립의 기운을 타고 남조 세력이 재정비되어 전국은 대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남조군에 의해 자주 교토가 점령되었고, 다다요시가 죽은 후 그의 추종자들은 양자인 다다후유(直冬)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하여 사이고국(西國)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이 혼란 중에 다카우지는 남조에 잠시 항복하기도 했지만 여러 지방의 슈고에게 반제급여권(半濟給與權) 등의 권한을 주고 그들을 중심으로 체제를 정비하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아들인 요시아키라(義詮)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사태를 서서히 수습하도록 이끌어놓은 뒤 세상을 떠났다.Ⅳ. 足利尊氏에 대한 평가1.『太平記』에 나타난 足利尊氏像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실제로 두 번이나 배반을 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가마쿠라막부에, 그 다음은 고다이고천황에게 반역을 일으켜 무로마치막부를 열고 쇼군이 되었으나, 그러한 다카우지에 대해 『太平記』는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지 않다.『太平記』제1부에서는, 가마쿠라막부 토벌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고다이고천황을 토벌하기 위해 다카우지가 막부 측 대장으로 지명되어 출전 명령을 받는 단계부터 등장한다. 『太平記』제1부에는 호조 다카도키(北條高時)의 악정이 크게 부각되어 있기 때문에, 고다이고천황의 막부타도 음모의 명분이 인정되는 만큼, 다카우지의 막부에 대한 반역행위도 명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제 1부에서는 다카도키의 악정과 포악함과는 반대로, 고다이고천황(後醍?天皇)은 성군, 명군으로 칭하여 그의 치세야말로 하늘의 뜻에 합당하고 정당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제2부가 시작되어 고다이고천황에 의한 신정부가 발족되자마자 그 악정과 그에 따른 전도의 불안함이 폭로되기 시작한다. 고다이고천황의 악정이 그처럼 강조되어 있는 것은 다카우지의 봉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로 판단된다. 단 제2부는 황실과 만세일계를 유지해온「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現人神)」이었다는 것이다. 명치정부는 이 천황을 중심으로 한 역사관으로 정치?경제?교육 등의 분야를 재편성하였으며 그것을 구미의 압박으로부터 일본을 근대국가로서 독립시키는 원동력으로 하려고 하였다.이러한 역사관은 에도말기에서부터 주창된 남조정통론설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때까지의 일본에는 남조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채 북조의 전통을 서술한 것이 많았다. 명치정부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親房, 1293-1354)가『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1339)에서 삼종의 신기가 있는 곳이 정통하다는 남조정통론을 채택하여, 정치적 선전슬로건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일본역사상, 가장 격동기라 할 수 있는 가마쿠라말기에 태어난 지카후사는 남조의 충신으로 다이카쿠지계통인 고다이고천황이 지묘인계통인 북조에 대한 정통하다는『신황정통기』를 저술한 인물이다. 남조편에서 싸운 지카후사는 동국의 무사를 고다이고천황 측으로 결집시키는 한편, 고다이고와 고무라가미(後村上)가 진정한 천황이며, 다카우지가 옹립한 고곤, 고니죠(後二條)는 정통한 천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남조정통론은 다카우지가 이끄는 북조의 승리로 북조정통론을 주장하는 무로마치막부의 영향 하에서는 부정되었다. 그러나 에도 말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한『신황정통기』는 명치시대, 신국으로서의 일본 및 ‘신성불가침’한 존재로서의 천황상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신국이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황위 계승의 정통성과 신국으로서의 일본의 우월론을 주장한 지카후사의 견해는 천황을 중핵으로 국가체제를 형성한 명치국가의 역사관이 되었고, 명치이후의 남조정통론과 결부되어 지배를 위한 사상통제의 하나로서 황국사관의 기틀이 되었다. 남조 정통론은 명치 이후 천황이 절대적 신성한 존재라는 근거를 마련하며 국가적 통치권이라는 세속적 권력을 가진 천황을 가진 천황으로 거듭나게 하였다.그로 인해 천황가의 국가와 남조의 정통성, 이상적인 천황제에 대하여 서술한 지카후사의『신황정통기』에 관다.
    인문/어학| 2020.12.23| 12페이지| 3,000원| 조회(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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