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자청비Ⅰ. 서론Ⅱ. 본론1. 의 내용 - 이용옥 심방 본풀이2. 에 나타난 주체적인 여성으로서의 모습Ⅲ. 결론Ⅳ. 참고문헌Ⅰ. 서론신화란 어디서나 그 지리적 환경을 민감하게 반영하는 법이다. 예로부터 제주도는 바람이 많고 돌이 많은 화산섬으로, 제주도의 신화들은 이런 제주의 독특한 자연환경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제주도라는 사회의 특정한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그대로 드러내는 역사적인 문화 산물이 되어왔다. ‘신의 출생에서 좌정에 이르기까지의 내력담이 되는 신화’를 뜻하는 본풀이는 다른 지방에 비해 제주도에 유달리 많다. 특히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제주도는 다른 지역과의 문화적 접변이 적었고, 그런 까닭에 제주도의 무속에는 신격화를 위해 지나치게 과장되지 않은, 비교적 원형 형태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제주도의 무가들 중 , , , , , , 등 7편 정도가 여성신이 신으로 좌정하게 된 내력을 풀고 있는 무가이다.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능동적인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다.이중에서도 눈에 띄는 여성신이 바로 의 주인공인 자청비이다. 는 농경신의 내력을 풀이하는 무가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전승되고 있는 농경기원신화이기도 하다. 자청비가 문도령과의 사랑을 완성하는 과정과 세경신-농경신-으로 좌정하게 되는 경위를 매우 드라마틱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이 작품은 서사 무가 중에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의 주인공들은 제주도 신화 사상 보기 드물게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들이다. 특히 이들 중에서 자청비는 남성신들보다 탁월한 능력으로 시종일관 신화를 이끌어가는 주체로써 활약하고 있다. 남성신들의 인물상이 선과 악의 전형성을 띤 평면적 인물이라면, 자청비는 이 두 특성을 두루 아우르는 보다 포괄적이고 입체적인 면모를 보인다. 본 보고서는 주체적인 여성으로서의 자청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를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본론1. 의 내용 - 이용옥 심방 본풀이옛날 김진국 대감 부부가 부자로 잘 살아도 자식이 없어 탄식하는 날을 보내다가, 절에 시주를 하고 불공을 드리면 자식이 있을 것이라는 말에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나 시주가 백 근에서 한 근이 모자라 딸을 얻게 되고, ‘자청비’라 이름 지었다.자청비의 나이 15세 되던 해, 빨래를 하러 나갔다가 거무선생에게 글공부 하러 가는 하늘의 문도령에게 반하여 남장을 하고 함께 글공부하러 떠나게 된다. 둘이 한 방에서 보냈지만 문도령은 자청비가 여자인 줄 모른 채 3년을 보낸다. 서당을 나오면서 비로소 자신이 여자임을 고백하고, 문도령과 남녀의 정을 나눈 뒤 재회를 약속하고 헤어진다.약속한 기한 내에 소식이 없자 초조해진 자청비는 굴미굴산에 문도령이 내려와 놀이를 벌인다는 정수남의 말에 유혹되어 산에 올랐다가 봉변을 당하고 결국 정수남을 죽인다. 집에 돌아와 부모에게 종을 죽였다는 질책을 듣고 서천꽃밭에 가서 환생꽃을 얻어 정수남을 살리지만,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한다고 꾸중을 듣고 쫓겨나게 된다.길을 가다 주모 할머니를 만나 수양딸이 되어 베 짜는 일을 돕는다. 그들이 만드는 비단옷은 하늘 문도령이 서수왕 따님에게 장가드는 데에 쓸 폐백이었다. 문도령은 자청비가 짠 비단임을 알고 자청비를 만나러 인간 세계에 내려온다. 하지만 자청비가 문도령의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바람에 문도령은 떠나고, 방정맞은 짓을 했다고 하여 자청비는 다시 주모 할머니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자청비는 다시 방랑하다가 하늘 옥황 궁녀를 만나 그들과 하늘에 올라가 꿈에 그리던 문도령을 만나 회포를 분다. 그리고 자청비는 문도령과의 혼사를 인정받기 위해 문도령의 부모가 내건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여 며느리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문도령과의 혼인이 파기되어 실망한 서수왕 따님아기는 죽어 새 몸으로 환생한다.한편 강남천자국에 큰 변란이 일어나자, 자청비가 나서서 난을 수습한다. 또 나쁜 무리들의 꾀임에 빠져 문도령이 죽자 서천꽃밭의 도환생꽃으로 남편을 살린다. 이후에 자청비는 문도령에게 자신과 보름을 살고, 또 서천꽃밭의 따님아기와도 각각 보름씩 살라고 하였다. 그런데 문도령은 서천꽃밭에서 잘 대접받고 살다보니 자청비를 깜박 잊어버렸고, 뒤늦게 깨달아 부랴부랴 달려왔지만 자청비는 신세를 한탄하며 인간 세상에 내려간다. 인간 세상에 내려와 오곡의 씨앗을 가지고 농사를 잘 되게 해주는 신으로 들어선다.2. 에 나타난 주체적인 여성으로서의 모습는 남녀의 결합 과정에 비유하여 농경신의 기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청비가 지닌 농경신으로서의 생산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농경신으로서의 좌정은 과업을 성취한 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신화에서 자청비가 보여주는 여신으로서의 중요한 자질은 개척과 성취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자청비는 다른 어떤 신화의 여성 주인공보다도 뚜렷한 양면적 특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보인다. 보편적으로 무속신화의 여성주인공들의 경우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의 능동성이 두드러지지만 자청비만큼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며 자신의 의지를 실천한 인물은 드물다. 자청비의 능동성은 남성을 찾아가는 세속적인 욕망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초월적인 능력이 서로 대칭적으로 맞물린다.자청비는 자신의 주체적 의지에 따라 문도령과의 사랑을 실현시켜 나간다. 자청비의 강한 자의식은 그의 이름에서부터 예견되고 있다. 부모의 간절한 바램으로 자청하여 태어난 아이, 이름에서 '自'의 의미는 특별하다. 물론 탄생과정에서부터 자청비의 의지가 반영되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성장하면서 '自'의 주체는 부모에게서 딸로 옮겨져 자청비는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열다섯이 되던 해에 문도령을 만나게 되면서 자청비의 삶의 목적은 문도령과의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되었고, 그 실현을 위해 적극적인 활약을 펼친다.그 시작은 남장이다. 자청비는 글공부를 떠나는 문도령과 함께 가기 위해 남장을 한다. 여주인공의 남장은 여성영웅소설에 반드시 등장하는 모티프이다. 남장을 함으로써 여주인공은 공적인 영역에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사회적 지위도 보장받을 뿐만 아니라 사랑까지 성취한다. 특히나 남장을 한 자청비는 모든 면에서 문도령에 비해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다. 글재주도 뛰어나 장원이 되고 급제를 하며, 남성의 놀이인 오줌내기에서도 문도령을 이긴다. 하지만 자청비는 이후 문도령을 기다리다가 집의 종인 정수남에게 겁탈 당할 위기에 처한다. 자청비는 죽음을 예감하고 먼저 정수남을 죽이는데, 부모는 종을 죽였다고 화를 낸다. 여성은 부모에게 있어 노동력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서천꽃밭에서 환생꽃을 얻어 죽은 정수남을 살려냈음에도 불구하고 자청비는 결국 집에서 쫓겨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잘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쫓겨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천상에서는 ‘며느리 자격 시험’을 통과하며 그녀의 능력을 인정받는다.문도령과의 첫 만남부터, 사랑의 성취를 위한 자청비의 행보는 욕망의 실현을 위한 모험이었다. 자청비는 이 과정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능력을 부정한 것으로 배척하는 남성 중심의 지배질서에 당당하게 맞섰고, 천상에 올라가 자신의 능력에 대한 평가를 받아 내고, 결국에는 신(神)직을 얻어내기까지 한다.사실 의 전체적인 구조 자체는 여성영웅소설의 구조와 매우 비슷하다. 남장을 한다던지, 남장을 한 채 다른 여성과 결혼한다든지 하는 것은 여성영웅소설의 기본적인 설정이다. 이는 자청비가 신으로 좌정하는 과정에서 더 두드러진다. 자청비가 농경신의 신직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강남천자국의 난리를 평정한 공과이다. 에서는 이 과정이 소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보상으로 땅과 물을 한조각씩 내어주려는 천지왕에게 자청비는 오곡을 달라 하여 오곡을 들고 신이 되어 지상으로 내려온다.곡물기원신화에서는 공통적으로 곡물은 하늘에서 훔쳐온 것이라는 씨앗도둑 내지는 곡물도둑의 모티프를 포함하고 있다. 얻기 힘든 것을 힘겹게 얻었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이다. 이것을 자청비는 전쟁에 승리해 보상으로 곡식을 받아오고, 당당히 농경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언제나 사적인 영역에서만 존재 의의를 지닐 수 있었다. 신화 속에서의 일반적인 여성의 모습은 ‘딸’, ‘어머니’로서의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자청비에게선 이런 모습을 찾기 힘들다. 자청비는 여성 억압을 뚫고 남성에게만 허용되어 왔던 공적 영역에서 인간으로써, 여성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주체적인 영웅으로서의 자기 완성을 이루어낸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 [2005]-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감독 : 미셸 공드리주연 : 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키얼스틴 던스트, 마크 러팔로,일라이저 우드, 톰 윌킨슨장르 : 드라마, 로맨스, SF수상 : 제 25회 런던 비평가 협회상-여우주연상, 작가상제 57회 미국 작가 조합상-각본상제 58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각본상, 편집상제 7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각본상상영시간 : 107분상영등급 : R1. 영화 의 내러티브 분석한 남자, 조엘(짐 캐리)이 깨어나 무엇에 홀린 듯 그 날 하루 회사를 팽개치고 기차를 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처럼 무엇에 홀린 듯한 여자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계속 이끌리게 되어 만남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의 시작은 다른 어떤 사랑을 주제로 만든 영화와 다르지 않다.그러나 영화의 본래 시작 타이틀은 이렇게 사랑을 시작하게 된 남녀의 행복한 모습이 아닌 남자가 슬프게 눈물을 흘리며 운전을 하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영화의 처음에서 사랑을 시작했던 남녀는 벌써 헤어진 것일까. 그렇게 시작했던 사랑은 시작하자마자 빨리 끝난 것일까?다시 되돌아가 보자. 착하다 못해 지루하고 소심한 남자 조엘, 그리고 자유분방하며 충동적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둘은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자연스레 서로에게 빠져든다. 많은 부분이 상이할 정도로 다른 둘이지만 그들은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상대방이 가진 모습을 이해할 줄 아는 현명한 연인이다. 하지만 사귄지 2년이 지나 처음의 두근거림도 사라지고, 조금씩 서로에게 지쳐가기 시작하는 둘은 결국 헤어지게 된다. 그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다투고, 화해하는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연인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이별에 다쳤지만 클레멘타인과의 아름다웠던 추억에 다시금 그녀를 찾은 조엘. 하지만 그녀는 마치 그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한다. 알고 보니 클레멘타인은 선택된 기억만을 지워준다는 병원을 찾아 조엘의 기억을 깡그리 지워버린 것. 이에 격분한 조엘은 그 의사를 찾아 자신의 기억도 모두 지워 달라고 요청하고 닥터 하워드(존 윌킨슨)는 이를 승낙한다.이때부터 영화는 클레멘타인과 관련된 기억을 역순으로 지워나가는 조엘의 무의식을 따라 진행된다. 그녀와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 그녀와 함께 찾았던 겨울의 호수, 그리고 바닷가, 그리고 그들이 처음 만났던 기차 속 그녀의 웃음. 그 아름답던 기억 속에서 조엘은 문득, 그녀를 지우기 위해서는 둘이서 나누었던 행복했던 시간들도 함께 지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를 진정한 조엘로 있게 했던 그녀가 자신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없었던 사람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점점 희미해져가는 클레멘타인을 느끼며 조엘은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 “제발, 이 기억만은 남겨주세요!” 라고.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그녀와의 기억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조엘과 그는 그녀를 잃지 않기 위해 유년시절의 기억 속으로,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던 저 구석진 부끄러운 기억 속으로 도망치고 또 도망친다. 마지막 순간,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 둘이 처음 만났던 그 날의 기억이 지워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조엘은 결국 클레멘타인과의 모든 기억을 지운 그 다음 날의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바로 여기서 영화는 첫 부분에서 기차 안에서 조엘이 무엇에 홀린 듯 지웠던 기억 속 여자를 우연히 만나는 것으로 다시 연결된다. 그러나 둘은 예상치 못하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 상태에서 기억을 지우고 다시 만났다는 어색한 사실을 알게 된다. 첫 번째 선택에 있어서 괴로워했던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다시 시작된 이끌림에 두려움을 갖게 되나 결국 언제나 완전할 수 없는 그 사랑을 다시 시작하기로 하며 영화는 끝난다.영화의 내러티브는 사랑의 추억이라는 아주 큰 기억을 가운데에 두고 현실과 과거의 기억이 그 축에 함께 붙어졌다 떼어졌다 하는 방식을 통해 그것이 기억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얼마나 뗄 수 없는 인연의 끈인지를 이야기한다.중요한 것은 이것이 이렇게 단순히 차근차근 역순으로 그 기억을 지우는 것처럼 이야기가 평이하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남자 주인공이 과거의 여자 주인공에게 지워지는 기억의 아쉬움을 함께 이겨 나가고 잊지 않기를 바라는 데서 그 독특함이 나타난다. 물론 기억이 지워지는 방식은 감독의 영상적인 기법으로 비논리적인 모습으로 전개되며 영화의 처음은 영화 마지막의 바로 앞부분과 연결되면서 사랑의 기억이라는 것이 지워졌다 하여도 다시 운명처럼 회귀함을 보여준다.찰리 카우프만의 섬세한 각본과 미셸 공드리 감독의 수준 높은 연출이 두 사람의 대화와 각자의 독백 속에서 잘 정제된 다이아몬드처럼 조용한 빛으로 영화를 빛내고 있다.2. 영화 의 키워드, ‘기억’‘사랑했던’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과연 행복할까?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추억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대표적인 요소들 중 하나이다. 첫사랑의 기억 등 시간이 지날수로 기억은 미화되어 추억으로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추억이 항상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키우던 개가 죽어 밤새도록 펑펑 울었던 기억, 그리고 목숨 바쳐 사랑했던 연인과 함께 했던 추억까지.... 이처럼 추억은 가끔 자신을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새장 속에 가둬 놓고 기억을 잠식해 우울을 부른다. 누구나 하나쯤은 추억이란 가면을 쓴 잔인한 기억을 품은 채 살기 마련이다.은 사랑의 기억과 망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누구나 지난 기억들로 힘에 겨울 때, 그 기억을 지워버렸으면 하는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오랜 연인과의 이별은 더더욱 그렇다. 상대와 함께 했던 공간과 시간, 수많은 대화들이 갑자기 텅 빈 공허로 다가올 때의 슬픔과 허무, 이 영화는 그러한 ‘기억을 지우고자’하는 욕망이 실제화 됐을 때 ‘과연 우리는 행복할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스스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진심으로 살아했다면, 사랑했던 기억은 그 추억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함께 많은 것을 공유했던 한 존재의 소멸이란, 동시에 나의 소멸이기 때문이다.인생에 있어 사랑과 함께 연결된 기억은 매우 소중한 것이며 이것은 지워지기 힘들고, 또한 지워질 경우 결국 우리 삶 안에 다시 올 수 있다는 것을 영화가 표현했다고 생각된다. 단, 이것이 이 주제만으로 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가진 완벽하지 못함을 ‘기억의 삭제’라는 것과 연결시켜서 그 중요함을 나타냈다는 면에서 그 내용 표현 방식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알고 보니 영화의 처음은 단순히 두 사람의 사랑의 시작을 이야기했던 것이 아니라 기억의 끈이 끊어진 바로 그 다음 시점에서 다시 시작하게 된 두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다.3. 영화 에서의 영상미영화 은 그 제작자와 감독, 스탭, 배우들이 밝힌 바 있듯이 지극히 디지털을 반대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물론 디지털을 선택했을 때 의도한 바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을 거라고 제작자들은 동시에 말했다. 이렇게 제작된 이유는 미셸 공드리 감독이 가진 신념으로 대변되었다. 감독은 기억이 사라지는 느낌을 단순히 디지털로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감정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 역시 사람의 힘으로 최대한 진솔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영상을 표현하였다.은 무엇보다도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의 코드인 ‘기억’이라는 주제의 연관성을 선명하게 하기 위하여 여자 주인공의 옷 색깔과 머리 색깔을 그 어떤 소품이나 주제보다 선명하게 표현하여 우리의 기억 속에 색깔이라는 것, 즉 실제적인 영상의 기억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표현했다. 한 주인공둘의 감정의 최고조를 보여주는 장소인 꽁꽁 얼어붙은 호수 씬은 리얼리티를 오히려 감소시켜 새벽의 공기가 주는 파란 색의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고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공간은 연극 무대에서 조명을 받는 주인공처럼 표현하여 그 장소가 가진 기억 안에서의 중요성을 색채와 조명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추억. 클레멘타인은 오렌지 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클레멘타인이 술을 먹고 조엘의 차를 찌그러뜨린, 결국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말다툼 끝에 헤어지던 날 밤을 시작으로 둘 사이의 감정의 골을 역으로 추적하며 어떤 연인이라도 피해갈 수 없는, 서로에게 권태로웠던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렇게 하나, 둘씩 잊고 싶던 기억이 붕괴되어 가고 조엘은 사라져 버리는 기억 속에서 비로소 클레멘타인을 잊고 싶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게 무너져 가는 기억을 막기 위해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기억 속에서 함께 도망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 사이의 관련된 기억만 지우는 작업이기 때문에 둘은 전혀 상관없는 기억 속으로 숨고자 노력한다. 클레멘타인을 만나기 전, 조엘의 수치스러웠던 기억이나 어린 시절 조엘의 기억으로 돌아가 기억을 삭제하는 작업을 피하고자 한다. 하지만 기술자들의 끈질긴 추적을 따돌릴 수 없는 조엘은, 결국 처음 만났던 몬톡의 해변가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클레멘타인과 관련된 기억들을 완전히 잊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비극의 6요소를 중심으로-《시학》의 원제인 《Peri poi?tik?s》는 본래 ‘시 창작의 기술에 관하여’ 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두에서 시의 종류와 창작 기술, 그리고 창작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한 플롯 구성 등에 대해 다루겠다고 밝히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작의 본질은 모방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서두에 희극과 서사시와 비극을 비교하고 있지만, 희극은 보통보다 못난 사람들의 모방일 뿐이며, 비극의 형식이 서사시의 형식보다 위대하다고 언급하면서 비극에 대부분의 페이지를 할애해 서술하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6요소로 플롯, 성격, 언어표현, 사고력, 시각적 장치, 서정적 노래를 들고 있다. 앞의 두 요소는 모방의 수단이고, 세 번째는 방식이며, 후자 세 요소는 대상으로 이들이 비극 전체를 이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요소들 중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들의 조직, ‘플롯’이라고 이야기한다.플롯은 어느 하나의 행동의 모방이다. 그 크기가 너무 커져서도 안 되고 적절한 정도를 유지해야 하며, 개연성과 필연성을 탄탄히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어야지만 우수한 비극이 될 수 있다. 플롯에는 뒤바뀜과 깨달음이라는 요소가 존재하는데 이 두 요소를 잘 결합해서 사용해야 독자들에게 최대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훌륭한 플롯은 이중적이 아니라 단일해야 하며, 선한 사람이 저지른 중대한 착오나 실수 때문에 행복했던 상황이 불행해져야 뛰어난 비극이 될 수 있다.플롯 다음으로는 인물의 성격을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도덕적으로 선량하고, 극에는 적합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실제 인간성과 같아야 하며,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성격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 필연성과 개연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사고력은 말을 통해 나타낼 수 있는 모든 효과인데, 윤리적 선택의 성질로서 적합하고 적절한 주장을 펼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언어표현, 즉 문체에는 글자요소, 음절, 연결사, 명사, 동사, 접속사, 굴절, 문장 등이 있는데 표준어를 사용함으로써 명확성을 나타낼 수 있으나 진부할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낯선 말, 다시 말해서 은유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이러한 점들을 보완해야 한다. 이 외에도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 중에 가장 중요한 서정적 노래, 그리고 감정적 영향이 가장 크지만 가장 비본질적인 요소이기도 한 시각적 장치도 있다.
영화 를 보고제라르 드빠르디유 주연의 1982년작 을 감상하였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당시 재판을 맡았던 판사 쟝 드 코라스가 후세를 위하여 기록했던 을 기초로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자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역사학 연구의 주류, 혹은 대세라고 할 수 있는 거시사적 관점이 아니라, 찾아보기 힘든 미시사적 민중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높은 사료라고 볼 수 있다. 영화는 데이비스의 자문과 철저한 고증으로 인하여 그 자체로도 역사학, 의상학 등에서 뛰어난 사료로 평가받는다.1542년 4월, 툴루즈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 아르티갓트에서 부유한 두 농가의 12세 신부 베르뜨랑드와 13세 신랑 마르탱 게르의 결혼식이 마을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다. 하지만 결혼식 이후 5년 동안 마르탱은 부부 생활이 원만하지 못해 놀림거리가 된다. 그러다 이 부부에게 아들이 태어나 자연스럽고 가정적인 질서가 잡히는 듯 하지만, 마르탱은 성질이 고약해 일하기를 싫어하고, 여자들을 혐오하여 아내를 자주 무시했다. 옥수수 더미가 없어졌을 때, 그의 아버지가 그를 도둑으로 몰아세우자 마르탱은 고향을 떠난다. 베르뜨랑드는 집나간 남편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채, 수절을 하며 8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러다가 남편 마르탱 게르가 돌아오고,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것에 대해 용서를 빈다. 돌아온 마르탱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더욱 인간적이며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실히 일하던 어느 날, 그의 삼촌 피에르에게 그가 부재했었던 동안 자신의 땅에서 거둔 이익을 요구한다. 이에 피에르는 분노하고 이를 갚을 기회를 노린다. 얼마 후 스페인으로 가던 한 병사가 그 마을에 들려, 마르탱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그에 의하면 그는 전쟁 중 마르탱 게르를 만났는데 마르탱은 폭탄에 맞아 다리가 잘려 나갔으며, 지금의 마르탱 게르는 아르노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피에르는 이를 이용해 마르탱이 자기 조카가 아니라고 나서서 사건은 법정으로까지 간다. 가족, 친척들 마을 사람들이 다 동원되어 증언을 한다. 진짜 마르탱이라는 사람과, 아니라는 사람이 나뉘어져 법정은 최종의 판단을 그의 아내에게 내리게 하고, 베르뜨랑드는 자기 남편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법정에서 마르탱이 무죄라는 판결이 나려는 마지막 순간에 진짜 마르탱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가짜 마르탱이었던 아르노는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진짜와 가짜 판별하기, 이러한 진실게임은 상당히 재미있는 소재이다. 가짜 마르탱인 아르노는 끝까지 자신이 마르탱임을 주장하지만 결국은 ‘진짜’ 마르탱에 의해 그 정체가 밝혀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짜 마르탱을 탓할 수 있는 것인가? 난 모든 일의 원흉은 진짜 마르탱 게르였다고 본다. 영화 마지막에 베르뜨랑드가 마르탱이 가짜였다는걸 암시하는 장면에서도 나왔듯이, 진짜 마르탱은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인물이 아닐까 싶다. 당대의 잣대로는 물론 아르노와 베르뜨랑드가 ‘죽일 놈들’이지만 그들을 쉽사리 비난할 수는 없다. 베르뜨랑드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게 아무 죄도 묻지 않은 판사처럼.
영화 를 보고리들리 스콧 감독의 1992년작 는 아메리카 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영화이다. 이 영화는 대표적인 ‘콜럼버스 신화 만들기’에 동참한 영화이기도 하다. 남미 등지에서 콜럼버스를 학살자라고 비난하는 것과는 달리 미국 등지에서는 ‘콜럼버스의 날’을 지정하기까지 하여서 콜럼버스를 기념하고 있다.콜럼버스는 미국의 탐험가로 유명하다. 하지만 미국을 가리키는 America는 콜럼버스가 지은 이름이 아니고 ‘아메리고 베스풋치’라는 항해사로부터 지어졌다. 콜럼버스는 미국을 찾았기보다 서인도제도를 발견했고, 그곳에서 생활을 한 것이다. 그에 비해 ‘아메리고 베스풋치’는 미국 본토를 발견한 것으로 인정을 받았다.신대륙의 탐험 배경에는 종교적인 동기가 있었다. 종교적 동기는 기독교를 세상의 종교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또한 유럽에는 없었던 향신료에 대한 무역로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인도 항로를 찾고 싶어 하는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조금씩 화폐경제가 시작되었는데 화폐로 사용될 금과 은을 얻기 위한 걸음으로서도 신대륙 탐험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갔다 오면서 쓴 ‘동방견문록’이 유럽에 퍼지면서 동양에 대한 호기심이 증가하고, 탐구하기 위해서 신대륙 탐험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종교적인 동기나, 새로운 항로 개척, 금과 은 발견, 동방에의 호기심과 같은 사례는 ‘신대륙 발견’의 충분조건에 지나지 않았다. 신대륙 탐험의 필요조건으로 항해에 필요한 과학과 기술이 발전 되어서 그 여건이 좋아졌다는 점과 장원제도가 무너지면서 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국왕의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여러 동기들에는 유럽 중심주의 혹은 우월주의가 섞여있었다.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영화인데, 콜럼버스 기념사업회의 정식 인가는 받지 못하였다. 인가를 받은 영화는 존 글렌 감독의 라는 영화인데 두 영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는 것도 쏠쏠하다. 후자는 좀더 노골적으로 콜럼버스 신화를 재구성하고 있으며,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아 항해를 출발하기까지의 과정에 중점을 두었다. 거기에 비해 전자는 항해 이후 원주민들과 만나는 과정과 그 이후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 대해 주요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사실과 다른 부분도 많이 나타나는 데, ‘지동설’이 그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