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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현실주의 르네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나는 나의 과거를 싫어하고 다른 누구의 과거도 싫어한다. 나는 체념, 인내, 직업적 영웅주의, 의무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감정을 혐오한다. 나는 또한 장식 미술, 민속학, 광고, 발표하는 목소리, 공기 역학, 보이 스카우트, 방충제 냄새, 순간의 사건, 술 취한 사람들도 싫어한다.-르네 마그리트소년에서 화가로 1898-1925마그리트는 1898년 벨기에에서 가장 '프랑스적'이고 국제적인 지역의 하나인 레신에서 삼 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르네-푸랑수아 기스랭 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마그리트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남아 있는 것도 모두 별스러운 것뿐이다. 일종의 환상처럼 특히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의 요람 가까이에 이상하게 서 있던 거대한 나무 상자였다. 또한 한 살 때 어떻게 그의 가족이 레신에서 질리로 이사하였는지를 기억했고, 어느 날 가죽옷을 입고 헬멧을 쓴 두 명의 풍선 탄 사람들이 갑자기 그의 집에 도착한 것도 기억했다. 그들은 타고 온 바람 빠진 풍선이 마그리트가 살던 집 지붕 위에 뒤얽히자 그것을 계단으로 끌어 내렸다.그의 가족은 얼마 후에 샤틀레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마그리트는 열 두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사탕 가게 1층에 임시로 만들어진 교실에서 낙화술(나무·가죽 등에 도안을 인두로 지져서 그리는 공예 기술)과 우산대의 장식을 연구하였다. 그는 할머니, 플로라 아주머니와 함께 수아니에서 방학을 보냈다. 그곳의 오래도록 버려진 공동묘지에서 한 소녀와 어울려 놀곤 했는데, 그들은 쇠로 만든 통풍문을 들어올리고 지하 납골당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어느 날 마그리트는 공동묘지의 부서진 돌기둥과 낙엽더미 사이에서 그림을 그리는 한 화가를 보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그림 그리기가 마술 행위처럼 느껴졌다고 훗날 공언했다. 어린 시절의 또 다른 놀이는 신부 복장을 해보는 것이었다. 마그리트는 직접 만든 작은 제단 앞에서 경건하고 엄숙하게 모의 미사를 열었고, 향 냄새 풍기는 어두컴컴하고 기억은 그러한 극적인 사건으로 주목을 받은 데 대한 일종의 자부심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로 하여금 '죽은 여인'의 아들로서 자신이 중요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했다.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는 르네와 그의 두 동생 폴과 레이몽을 데리고 샤를루아로 이사했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그는 샤를루아에 있는 아테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고전 문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열 다섯 살 때 마을의 회전목마에서 장차 아내가 될 조르제트 베르제를 처음으로 만난다. 샤를루아에서의 고전 문학 수업에 싫증이 난 마그리트는 1916년 브뤼셀의 아카데미 데 보자르에서 공부한다. 1918년 그의 모든 가족이 브뤼셀로 이주했고, 이 시기부터 마그리트의 '공식적' 경력과 평생에 걸친 친구들과의 우정이 시작된다. 1919년 그는 시인인 피에르 브르주아를 알게 되었고 동료 학생인 피에르 플루케와 함께 "Au Volant!"이라는 평론지를 발행했다. 그는 또한 첫 번째 작품 "세 여인"을 지루 화랑에서 전시했는데 이 작품은 피카소의 초기 입체주의 회화를 연상케 했다.1920년 마그리트는 시인이자 음악가이며 콜라주 작가인 E. L. T. 므장스를 만났고 수년 동안 교우관계를 유지했다. 같은 해 므장스와 브뤼셀의 식물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 마그리트는 조르제트와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 2년 후 마그리트와 조르제트는 결혼했다. 이 기간 중에 그는 안트베르펜 외곽의 주둔지에서 몇 달 동안 하기 싫은 국방의 의무를 하며 지냈고 후에는 벽지 공장에서 장미를 그리면서 가사를 돌봐야 했고 포스터 디자인과 광고일을 하면서 자유시간에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 동안 마그리트는 회화의 양식과 의미를 찾으려고 애썼다. 마그리트는 입체주의자와 마래주의자들의 작품에 관심이 있었고 그의 초기 작품은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미래주의는 결코 정통적인 것이 아니고 일종의 에로티시즘과 결부되어 있었다. 아그리트는 입체주의와 유사한 작품들을 1920년 르 상트르 다르 화랑에서 피에르 플루케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을 처음 본 것을 마그리트는 대단한 발견으로 여겼다. 1925년 마그리트는 므장스와 함께 "식도"라는 평론지를 창간한다. 이 잡지는 단 한 차례 발간되었고 '아름다운 젊은이들을 위한 격월간지'인 "Marie"가 뒤따라서 세 번 발행되었다.파리의 초현실주의자들의 대열에 참여한지 2년 후인 1929년 12월에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자들의 기관지로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가능케 해주었던 "초현실주의 혁명"에 초현실주의에 대한 그의 주요 공헌이라 할 만한 글을 발표하였다. 이 잡지에 발표한 "단어와 이미지"라는 글에서는 18개의 작은 컷으로 이루어진 경구적인 짧은 내용을 언급한 네모난 구획의 작품을 다루었다. 여기에서 "대상은 그 이름이나 이미지가 가지는 똑같은 기능을 결코 완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말과 똑같이 닮은 모습이 그림 안에 그려져 있고 한 사람이 '말'이라는 단어를 말하고 있다. "대상으로서의 말은 그 이름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사물을 잘 납득시킬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 말 그림에 이어 나뭇잎의 그림에 '대포'라는 단어가 연속되고 있다. '태양'이라고 말하고 있는 한 여자 그림 아래 "단어는 현실에서 그 대상이 대체될 수 있다"라는 문장의 주해가 달려있다.마그리트의 작품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확실하게 믿고 있는 대상들과 그것들의 이름과 의미와 기능에 있어서, 그 관계는 실제로 우리가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미약하다는 인식 위에 기초하고 있다. 마그리트가 그의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본질적인 가치를 가진 현실의 여러 다른 조직체를 시적인 은유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색, 질감, 또는 그림자와 빛의 대비와 같은 것이 본질적인 가치로 인식되던 전통회화와는 구별되는 개념적 회화이다. 마그리트의 목적은 정신의 자유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현실의 신성하고 체계 잡힌 질서를 반박하는 계시적이고 비평적인 예술 창작에 있다. 비록 다른 초현실부터 벨기에의 초현실주의가 시작된다.중산모를 쓴 남자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이 일부러 스캔들을 만들어 낼 때 마그리트는 오히려 눈에 띠지 않는 생활을 하며 지내려고 했다. 1930년 파리를 떠나면서 마그리트의 예술적 이력은 끝났다. 브뤼셀로 돌아온 마그리트의 삶은 점점 브르주아의 생활이 되었다. 그는 여행을 싫어했고 오직 변화와 맞물린 자신의 상상력과 더불어 살았다. 그는 마치 관습이라는 보호색을 띤 세속적인 성공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심지어 경력이나 스타일도 없이 살고자 한 그의 욕망은 그 자신을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계산된 선택이었다. 이는 아마도 팡토마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의 외모에는 유별난 요소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중산모를 쓴 정체 모를 남자처럼 어느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았다.주목받는 것을 싫어한 마그리트 자신의 특성은 대체로 그의 말년에 전개된 중산모를 쓴 남자의 익명성에 반영되었으며, 이는 후에 그 자신으로 여겨졌다. 중산모를 쓴 남자는 로버트 뮤질의 장편 소설인 "특성 없는 남자"에 나오는 세상을 포기하듯이 개인적 '특성'을 포기한 울리히라는 인물과 다소 비슷하다. 마그리트의 중산모를 쓴 남자는 인간 자체보다 책 속의 인물과 더욱 비슷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요소는 모두 무시된 인물이다. 울리히 뿐만 아니라 마그리트 자신과도 비슷한 그는 세상의 역사보다는 관념의 역사를 실천하는 듯하다. 그는 비록 어떤 구속도 받지 않고 떠돌며 살지만 그 자신의 성질에 맞지 않게 살아야만 하는 사람을 암시한다. 무감각하고 냉담하게 세상을 응시하지만 그의 얼굴은 마치 다른 부수적인 경향은 없고 보편적인 혐오감만을 표현하는 것처럼 오브제로 인해 밀려나거나 감추어지거나 지워져서 시야에서 사라진다. 중산모를 쓴 남자는 배출할 데 없는 재능을 타고난 것처럼, 정신적이고 금욕적인 형이상학적인 고독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이것은 차갑게 성내는 일종의 오만한 배타성을 띠고 그를 경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또한 어떤 면에서 보면 거부를 통해 이 쓴 남자는 우리 자신을 투영하는 완벽한 매개물이다. 그는 점차로 신화적 양상을 띠면서 모든 남자들을 표현하기에 이른다.그는 현상의 관찰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개체가 아니라 근대 물리학의 철학 구조를 반영하는 불확실성의 관계인 듯하다. 물리적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관찰자와 관련이 있고 물리적 사건의 공간적, 시간적 특성이 대부분 관찰자에 의하여 좌우된다는 것이 우리 시대에 밝혀졌다. 게다가 상대성 이론은 공간과 시간의 철학적 관념, 사물과 그 관념과의 연관 관계를 근원적으로 변화시켰다. 마그리트의 이미지는 뉴턴의 역학에서 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 공식으로 전이된 후 현실 개념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한 특별한 감성을 보여준다. 그의 회화 작품에서는 시간상 분리된 사건들이 동시에 발생하고 물리적 세계의 모든 독단적인 시각을 문제 삼음으로써 물리 법칙에 도전한다.마그리트에게 물리 법칙은 가능성의 한계점으로 형성된 것, 즉 그가 끊임없이 도전했던 불변의 사건 전개 과정이었다. 근대 물리학은 지금까지 보편타당한 법칙이 더이상 효력이 없고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새로운 규정을 찾아낼 필요가 있음을 제시했다. 우리의 관념에 따라 사실 자체가 통제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우리의 예상만이 관념에 의하여 통제될 뿐이다. 마그리트는 마치 단호하게 확립된 세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물리 법칙의 절대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한다. 마그리트의 의 경우를 보면, 바위의 위치를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위가 고정되어 있는지 혹은 움직이고 있는지도 규정할 수 없다. 고전 물리학은 우리와는 관계없이 객관적인 방법으로 고착된 불변의 세계를 가정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상과 자신의 분열은 자유 의지와 결정론 사이에 충돌을 야기했고,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통제하거나 혹은 전혀 그렇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모순된 상태를 초래했다. 게다가 이전의 물리 개념은 자연의 법칙에 정확히 부합하지는 않았다. 양자 이론에 의해 물리학에 도입된 확률 함수는 단지 사건의이다.
    예체능| 2011.12.17| 5페이지| 1,000원| 조회(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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