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서 주인공 '존큐'는 흑인 거주지역에 사는 한 가정의 아버지이다. 차를 담보로 잡히게 되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의 가족은 언제나 내색하지 않고 배려하며 행복하게 지낸다. 존큐의 하나뿐인 아들은 초등학생 나이정도인데 아버지와 매일 레슬링 선수들을 흉내내며 친구처럼 지낸다.그러던 어느날 아들이 야구시합을 하던 중 갑자기 쓰러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당황한 부부는 일단 병원으로 아들을 입원시키고 입원서류를 작성한 뒤 병원측으로부터 혈액행검사와 보험증을 첨부하란 요구를 받는다.심장과전문의와 원무과장은 아들의 심장상태를 부부에게 보여주며, 현재 아들의 심장이 보통보다 3배이상 커진 상태이고 심장박동이 약해서 혈액이 폐에 차게 되고 심장박동이 힘들어 질 것이라 설명한다.존은 수술이 필요하냐고 물어보고. 전문의는 시기가 늦었기 때문에 약물치료보다는 심장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수술 중에 죽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존은 전문의에게 의견을 구한다. 전문의는 우선 대기자 명단에 올리기를 권하고 이식수술은 상상을 초월할만큼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또 병원측에서 이미 존의 보험을 확인해보았지만 이식수술은 적용되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인다.존은 그럴리가 없다고 종합보험인데 왜 그런것이냐고 항의하지만 병원측은 존의 집소유권, 주식채권의 유무, 현재저금량 등을 따지며 보험회사와 상의해보란 말과 돈을 준비해란 말만 냉정히 남길 뿐이다.대기자 명단에 올리는 것조차 보증금이 필요하단 말에 화가 난 존은 그만 눈물이 나와버린다. 다른 주립병원으로 갈 거라는 존의 말에 한 의사가 심장 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은 여기뿐이니 자신이 가입한 보험회사와 상의하든지 회사복지기금이나 아동의료지원 뭐든 해보라 말을 던진다.자신이 가입한 보험회사를 찾아간 존은 자신의 보험약정이 변경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보험회사는 '보험료가 싼대신 적용제한이 있기때문에 당신처럼 계약직이나 파트타임직은 최상급 혜택을 받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존은 자신이 몇년째 매주 보험을 꼬박꼬박 냈었다고 항의한다. 자신은 파트타임직도 아니고 보험사 마음대로 약정을 바꾸곤 혜택이 없다니 이런법이 어딨냐며 따져보지만 보험사는 상부에 보고해보란 말만 남길뿐이다.막막한 존은 각종기관에 청원해보지만 모두 자격이 되지 않아 기각당하고 만다. 그러던 중 직장보험에 보냈던 항의서가 승인이 되지만 병원에서는 항의서일뿐이라며 진정서를 제출해라고 말하지만 그 과정은 30일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더이상 아들의 수술비를 구할 방도가 없자 존네 부부는 집의 가구를 다 팔고 교회에서도 약간의 기부금을 받지만 25만불의 반도 채 채우지 못했다.병원에서 존은 아들에게 책도 읽어주고 레슬링 얘기도 하며 힘이되어 주려고 노력하지만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아들의 건강에 마음이 무거워진다.존은 방송국의 기자를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사정을 설명한 후 방송에서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기자는 말을 애두르며 한 발 뒤로 물러서기만 한다.그러던 중 아내에게서 병원으로부터 퇴원하란 요구를 받았다는 전화를 받는다.막다른 길에 몰린 존은 선택을 내린다. 병원으로 찾아가 심장전문의에게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고 돈을 갚겠다고. 자신의 아들을 대기자 명단에 올려달라고 진심으로 부탁하지만 전문의는 존을 밀치며 냉정하게 돌아서고, 존은 그를 총으로 위협해 '인질'로 잡는다. 응급실을 포위한 후 문을 걸어잠그고 심장전문의와 그곳에있던 의사3명과 임산부, 차사고를 당한 연인, 중이염에 걸린 외국인 부인, 경비원, 손을 다친 거리의 부랑자를 인질로 잡아두게 된다. 응급실은 곧 경찰에게 포위되고 존은 인질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자기 아들을 수술 대기자명단에 올려달라 요구한다.그 상황속에서도 응급실에서 존은 임산부가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부랑자의 손을 치료하도록, 말이 통하지 않는 부인의 귀를 치료하도록 의사들에게 부탁한다.인질들도 존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고 그에게 점차 마음을 열게된다.존은 인질들과 얘기하면서 계속 검사를 받았는데 어떻게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는지 의문을 제시하고, 전문의는 아마 제대로 된 검진을 안 했을거라고 대답한다.응급실 당담의사는 "보험회사가 검사하지 말라고 의사들에게 돈을 준다. 그래야 보험료가 싸지니 추가 검사가 필요하다해도 보험회사가 안된다면 의사는 입을 다문다'며 의료제도의 부당성을 시인한다. 인질들 중 한명이 그러면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왜하는거냐며 콧방귀를 끼자 응급실 담당의사는 다시 "의료진들은 환자가 와도 돈이 없으면 다시 내쫓는다. 법은 있지만 구멍이 많다. 결국 그들을 얼러서는 나몰라라하는것"이라고 답변한다.경찰이 자신을 속이고 병원안으로 저격수를 투입하자 존은 의사를 제외하고 인질들을 내보내며 자신의 심장을 아들에게 주기로 결심한다. 그런던 차에 방송국에서 병원 카메라 해킹해 방송에 내보냄으로써 시민들은 존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낸다.경찰도 여론의 이러한 반응때문에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지만 결국 존의 요구대로 아들을 응급실로 보내주고 때마침 도착한 심장으로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게 된다.그 사건 후 존은 법원으로 불려가고 인질유괴죄로 3-5년형을 선고받을 것을 암시하며 경찰차로 이송된다.영화의 마지막은 환호하는 시민들 사이에 아들이, 아버지와 항상하던 레슬링 선수의 포즈를 취하며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으로 끝난다.'존큐'는 사실 그리 잘만든 영화는 아니다. 난 사실 이 영화보다는 를 더 추천하고싶다. 의료민영화. 나는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최대 쟁점이라고 아니 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존큐'는 현재 우리나라가 슬슬 시동을 걸고 있는 의료민영화시행국인 미국의 사실상 실패한 의료제도를 가장 극단적인 모습으로 보여주는 영화이다.2009년 8월13일 뉴욕타임즈 신문은 '로스앤젤레스의 한 체육관에서 제공되는 무료 진료를 받기 위해 수천명의 미국이들이 새벽3시부터 줄을 섰으며, 당일 진료 대기표는 1시간 30분만에 마감됐다고 보도했다. 무료의 진료의 대성황. 이것이 어찌된 일일까.국내총생산의 16%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민의료비를 사용하면서도 의료제도의 성과는 선진국 중 꼴찌이고, 의료보험을 각지 못한 인구가 4600만명이나 되는 나라가 미국이다. 이는 국민의 의료보장제도가 없기 때문인데,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존'도 보험회사에 정기적으로 돈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주의적 의료행위에 의해 값이 싼 보험에 가입한 이유로 수술비에 1/10밖에 받지 못한다.그런데 이런 일이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다.지난해 초여름부터 제주도 당국은 영리법인 병원을 허용하기 위해 관제반상회 등 모든 관권을 다 동원하여 영리병원을 일방적으로 홍보하였다고 한다.도민들의 반대여론이 일자 잠깐 주춤하는 듯 하더니 '투자개방형 병원'으로 개명하여 영리병원을 다시 추진하겠다는 제주지사의 발표가 있었고, 이번 9월 국회에 영리법인 병원을 허용하는 '제주특별자치도법 개정안'이 제출될 것이라 한다.그런데 이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민영화인지 우리는 반드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국민들의 기초생활과 연결되고 또 공공성을 유지함으로써 국민 전체에 이익이 돌아가는 부분들을 민영화하게되면, 특정재벌이나 소수의 주주들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결국 우리같은 서민들은 다시 부담을 지는 형태가 될 것이 아닌가.제주도의 제한적 영리병원 허용을 우리가 경계해야하는 이유는 초기 이명박 정권에 선거공약이었던 '당연지정제 폐지'의 우회로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당연지제정 폐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당연지정제가 모든병원 100% 강제계약에서 벗어나면 일단 병원들이 건강보험 말고 다른 민간보험 회사들과도 계약을 할 수가 있게 된다. 그렇게되면 민간보험 병원들이 생기게 되고 지불능력이 되는 부자들은 필연적으로 이런 고급병원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시장원리에 따라(혹은 민간보험시장을 만들어주기 위해) 정부에서도 민간보험에 들면 건강보험을 들지않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게 될 것이다.이렇게 상위 약 5%의 부자들이 기존의 건강보험에서 탈퇴하고나면 보험에서 지원해주던 병들이 하나씩 빠지고 보험지급범위가 축소되면서 국민건강보험은 자꾸만 부실해 질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탈퇴하지 못했던 기존의 중상위층이 의료의 질에 불만을 가지고 민간보험으로 빠져나가게 될 것이고 결국은 가난한 사람들만이 남는 허울뿐인 건강보험이 될 것이다.그렇기에 당연지정제 예외를 인정해주는 순간부터 사실상 건강보험 붕괴는 기정된 사실이나 다름없다.물론 이 제도가 반드시,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의료산업쪽에 많은 고용이 창출될 것이고, 대기업들은 큰 이윤을 거두게 될 것이고, 부자들은 예전과 같거나 적은 돈을 내고도 미국드라마 '닥터하우스'에서 볼 수 있던 그런 크고 깔끔한 병원에서 여러의사들에게 둘러싸여 양질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예전부터 미국이 가려던, 또 이명박정부가 말하던 '의료산업화를 통한 경제활성화'가 아니겠는가.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1. 내용요약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을 지행하는 운동에서 급선회하여, 만인에게 해당되는 부르주아적 삶이라는 이상을 수립하는 세력으로 변했다. 우선 모든 사람이 부와 안락한 생활을 누리면, 이어서 누구나 무한히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이에서다.모두가 믿었던 위대한 약속이 실현되지 못한 근거로는 경제적 모순 이외에도 심리학적 전제가 있었다. 삶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최대치의 쾌락이라는 전제말이다. 행복이라는 것을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모든 소망 또는 주관적 욕구의 충족으로 이해한 점, 이런 극단적 쾌락주의는 부유한 계층만이 누리며 발전한 것이었다. 예를들어 로마의 특권층,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특권층, 18,19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엘리트 계급처럼 무한한 자력을 좌지우지했던 사람들은 끝없는 쾌락을 추구하는 데에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였다.오늘날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겪는 불행으로 악명이 높다. 그들은 끊임없이 고독과 불안에 시달리며, 의기소침해 있고, 파괴적이며, 의존적이다. 요컨대 그들이 끊임없이 절약하려드는 바로 그 시간을 성공적으로 '죽일때' 쾌락을 맛보는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소수 특권층뿐만 아니라 적어도 산업국가에 사는 인구 절반이 그들이 추구하는 쾌락을 실제적으로 충족할 수 있게 되었다.산업시대의 두번째 심리학적 전제, 즉 개인적 이기주의를 배제하면 조화, 평화, 만인의 복지를 가져오리라는 전제는 그 이론적 발단부터 오류고 기만이었다.이기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태도의 한 측면일뿐만 아니라 나의 성격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 이기주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나는 나를 위한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 공유가 아닌 점유만이 내게 즐거움을 준다; 소유가 나의 목표일진대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의 존재가 커지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탐욕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 나는 모든 타인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나의 고객들에 대해서 속임수를 쓰로 나의 는 기업연합의 팽창으로 인해서 점점 더 잦아지는 소규모 기업들의 도산과 노동자들의 곤경은 유감스럽기는 하되 자연법칙의 영향처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 필연으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경제체계의 발달은 인간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보다는 그체계의 성장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에 의해서 결정되었다.이 명제를 뒷받침해준 것은 경제체계가 필요로 하는 인간적 자질(이기주의,자기중심주의,소유욕 등)이야말로 바로 인간이 타고난 속성이라는 것, 그러니까 그 자질들은 체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본성에서 조장된 것이라는 일종의 견강부회식의 논리이다.오늘날 정작 공공복지를 담당한 책임자들은 실제적으로 아무 대책도 강구하지 않을 뿐더러, 그들에게 의탁하고 있는 국민들도 그들의 무대책을 수수방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을 설명해주는 가장 명백한 요인 중의 하나는 정치가들이 번잡스러운 제스처를 통해 재난을 모면할 무슨 효과적인 조처를 취하는 듯이 호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끝도 없는 회담, 결의안, 군축회의 등 그들은 마치 스스로 문제의 핵심을 인식하고 그 해결방안에 따라서 무엇인가 실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 도움이 될 대책은 사실상 아무것도 진행된 것이 없다. 통치자도 피통치자도 마치 대책을 알고 그것을 진척시키는 듯이 호도함으로써, 자신들의 양심과 아울러 생존의 소망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해주는 요인은 정치지도자들로 하여금 사회에 대한 책임보다 그들 개인의 성공에 더 큰 비중을 두게끔 만드는 현실이다. 설령 정부나 기업 운영자들이 그들 개인에게는 이득이 되겠지만 공동사회에는 위해한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아무도 그 결정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자기 목숨이 걸려있든, 처자의 생존이 걸려있든간에, 탐욕은 자신의 참관심사를 쫓아 갈 수 없게끔 인간을 맹목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아울러 보통 사람의 경우에도 자기 개인사에 이기적으로 몰입하는 나머지 그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체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실'능동적 여가활동'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그러나 더 적절한 표현은 '수동적 여가활동'일 것이다.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다. 아마도 현대 '잉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소유형태일 것이다. 소비는 이중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써버린 것은 빼앗길 염려가 없으므로 일단 불안을 감소시켜준다. 그런 한편, 점점 더 많은 소비를 조장한다. 왜냐하면 일단 써버린 것은 곧 충족감을 주기를 중단해버리기 때문이다.일상적 경험에서의 소유와 존재? 학습사실상 '소유형' 인간은 자신의 주제에 관한 새로운 사상이나 관념에 맞닥뜨리면 불안해한다.‘존재양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학생들은 학습과정에서 전혀 다른 특질을 보인다. 그 강의가 다루는 주제를 미리 고찰하고 특정한 문제와 의문에 대해서 골몰한다. 그들은 강의주제를 놓고 이미 씨름한 바가 있어 그것에 흥미를 느낀다.모든 학생들은 자기 나름대로 충격을 받고 변화한다. 강의를 들은 후에는 다른 사람이 된다. 이런 종류의 학습은 물론 고무적인 소재를 제공하는 강의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대화토론을 염두에 두지 않은 대화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달라진다. 기대를 품고 상대를 만나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 상황에 처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조와 불안을 느끼며 그 중대한 만남에 대비를 한다. 상대방의 관심을 끌 만한 주제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무엇으로 말문을 열까를 미리 계획한다. 또 어떤이들은 자기가 획득한 모든 것, 지난날 성공했던 사례, 자신이 지닌 매력적 성품, 사회적 지위, 연고관계, 외모와 차림새 등을 떠올림으로써 용기를 다잡기도 한다. 이런 면에 능통한 사람은 사실상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상당 부분 그의 허세와, 그보다 더욱 대부분 인간의 판단력 결함에서 나온 것이지만 말이다.미리 대비하거나 무장하지 않고 자발적이고 생산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의 태도는 이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망각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자신의 지위를 잊어버린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연유로닌지를 궁금해한다. 절정을 이루는 결말을 알고났을때 독자는 마치 자기의 기억과 같이 현실감있게 이야기를 소유한다.그러나 그가 획득한 지식은 무엇인가? 소설 주인공을 파악하여 인간의 본성을 통찰하는 능력고 심화시키지 못했고, 스스로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깨우친 바도 없다.? 사랑사랑한다는 것은 생산적인 활동이다. 사랑이란 (그 대상이 인간이든 나무든 그림이든 어떤 이념이든 간에) 누구인가를 배려하고 알고자 하며, 그에게 몰입하고 그 존재를 입증하며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모든 것을 내포한다.구애를 하는 기간에는 그 어느 편이나 상대방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다. 연인들은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고 부심한다. 그들은 생기에 넘치고 매력적이며 관심을 돋우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생동감은 항상 아름다운 얼굴을 만드는 법이니까.?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안식일은 기쁨의 날이다. 이날은 인간이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의 일요일은 즐기는 날, 소비의 날,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날이 되어버렸다.? 연대감, 적대감소유적 실존양식에 근거한 인간관계는 경쟁심, 적대감, 두려움으로 특징지어진다. "나의 소유는 곧 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소유가 나의 주체의식의 근거가 되는 경우,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필연적으로 많이, 더 많이, 최대한으로 소유하려는 욕구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탐욕은 소유지향의 당연한 결과이다. 설령 절대적 과잉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해도, 이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천부적인 건강이나 매력, 재능을 남보다 덜 타고난 사람은 그 방면에서 "보다 많이" 가진 타인들을 여전히 극렬히 시기할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평화의 시기도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조화를 이룬 상태로서의 평화와 근본적으로 휴전상태에 불과한 평화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탐욕의 정신으로 만연된 세계 속에서 이른바 사회주의적인 계급없는 사회를 바라는 것은 탐욕스러운 민족간의 영속적 평화라는 관념과 마찬가지로, 한낱 환상이며-또한 위험한 환상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삶이 소유물로 성장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일환이어야 한다.우리 경제의 병적 측면의 하나는 거대한 군수산업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인 미국이 오늘날까지도 군비를 감당하느라고 보건, 복지, 교육을 위한 예산을 삭감해야 하는 실정이다. 대기업의 막강한 힘, 대다수 국민의 무기력과 무관심, 거의 모든 국가의 주도적인 정치가들의 무능력, 핵전쟁의 위험, 생태학적 적체현상. 우리에게 구원받을 기회는 있을까? 장사꾼이라면 이런 기회를 부인할 것이다. 확률이 단 2퍼센트밖에 없는데 누가 자신의 재산을 걸 것이며, 별 승산 없는 장사에 누가 자신의 재산을 걸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면 가능성의 유무를 떠나야 한다.우리 사회에서 탐욕과 시기심이 강하게 노출되는 현상은 천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늑대들 틈에서 늑대가 되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압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일단 사회적 풍조가 바뀌면, 즉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가치관이 바뀌면, 이기심으로부터 이타심으로의 이행도 용이해질 것이다.2. 나의 의견오랜만에 집에 내려갔다가 광주로 올라오는 버스 속에서 시간을 때울겸 가지고다니던 주간지를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일본의 정권교체에 관한 이야기, 한국의 개신교를 비판하는 기사, 용산문제에 관한 기사 그리고 뉴타운 막개발로 인한 '전세대란'에 대한 기사까지. 평소같으면 그저 흥미롭게-지식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서 혹은 현실에 대한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훑어보았을 기사들이였겠지만, 이 날은 조금 달랐다.소유냐 존재냐. 내 머릿속에는 한가지 이 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던 것이다.나는 이제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좀더 근원적이고 철학적(아직도 이 말의 뜻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인 질문을 품고서.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뉴타운 막개발이 전세대란 부른다'.요즘 전셋값이 심상찮게 오르고 있다는 보도가 잇다르고 있다고 서두를 연 이 기사는, 서울전셋값 인상의 원인에 대해 분석하고 대책마련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다.기사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