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논리의 절묘한 조합고대 한일 관계에 대한 고찰이 책을 읽고 나서 수업시간에 김현구 교수님의 강의를 처음 접했을 때의 신선함과 충격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 중,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임나일본부설의 대략적인 내용과 사실이 아닌 이유 몇 가지 만을 이해하지도 않은 채 암기하고 지나갔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임나일본부가 정확히 무엇인지, 일본은 왜 한반도 남부 경영을 주장하는지, 이 주장은 정확히 왜 사실인 아닌지에 대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나일본부가 무엇인지 대충 알고만 있고 무작정 ‘아니야.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을 리가 없어.’ 라는 공허한 주장만 하고 정확한 사실과 근거는 알고 있지 못하다. 또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달라질 것이다.이 책에서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의 출처인 일본서기와 송서, 광개토 대왕릉비 등의 기록을 상세히 인용하고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담았으며 지금까지 나온 학설들을 정리하고 자세하게 소개해 주어서 역사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고등학생이 알파벳을 배우듯이 쉽게 다가 왔다. 또한 저자의 주장은 논리정연하고 실증적인 근거에 바탕을 두었으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투자되었음을 책의 구석구석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읽는 내내 평생을 한일고대사에 전념했을 저자의 피와 땀이 눈앞에서 느껴질 정도 였다. 고대 일본인, 한반도인의 이름을 조사하고 연도를 하나하나 맞춰가면서 논리적으로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할 때는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마 일본인들이 이 책을 읽어도 나와 같이 동의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그리고 한국 역사학자이든 일본 역사학자이든 자신의 나라를 위해 어쩌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주장해야 할 때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일본학자들 중에서도 임나 일본부설의 주장이 정확하지 않고, 몇 가지의 조작도 드러났고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있음에도 애국을 위해 논리를 펴는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물론 다른 나라의 역사학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가치관이나 해석이 자의에 따라 마음대로 해석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아직 역사학계의 발전과 화합에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더욱 놀라운 것은 한국 역사학계와 역사책에도 많은 문제점과 모순이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에 대한 내용은 일본서기를 폄하하고 비하하면서 부정하는 반면에 일본서기에 나온 한국에 대한 유리한 내용은 버젓이 중, 고등학교 국사책에 실어 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은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생각했던 것보다 강력한 국가였다. 단순히 ‘왜’라는 용어로 치부되고 몇 번 신라나 고려에 침공했던 수준이 낮은 약탈자가 아니라 엄연한 국가를 지닌, 체계를 가진 나라가 침공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대 삼국은 일본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서로 파트너로 제휴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일본과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백제는 도일을 하는 것이 빈번했고, 교류가 활성화 되었었다.책을 읽으며 가장 섬뜩했던 부분은 도교제국대학에서 진구전기의 내용을 가르칠 때 이다. 물론 아무리 일본인이라고 해도 진구전기에 실린 모든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한국을 일본보다 못한 나라로 인식하고 임진왜란이나 한국식민지를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을 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최근에 논쟁이 되고 있는 초등학교 독도 관련 교과서 문제도 수수방관해서는 안 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무의식적으로 배운 내용이고 어렸을 때부터 배운 내용이기 때문에 3,40년 후에도 계속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생각하는 후손들이 자라날 것이다.
「 政 治 家 의 正 道 」展신라왕조 1000년, 고려왕조 500년, 조선왕조 500년. 한반도에서는 남북국 시대 이후에 잠깐의 후삼국 시대를 제외하면 오랜 기간 통일된 왕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특히, 조선왕조는 1392년에 건국되어 1910년 한일 합방 전까지 한반도를 지배하였고, 2010년 대한민국의 구조와 대한민국 국민의 정서와 사고 밑바탕에 살아남아 있다. 이런 역사를 바라보며 한반도 국가들은 통일만 하면 장기적인 통치가 가능한 상대적으로 반란이나 역적이 적은 유순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장기간의 국가 유지는 나름대로의 기반과 매뉴얼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인지는 정도전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어느 국가든 건국 초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할 수 밖에 없다. 조선 건국 초기나 대한제국, 대한민국 건국초기에도 국가의 정체성이나 지도자의 정당성 등에 대해 많은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혼란에서 일반적인 지배계층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재산과 이득을 지키는데 여념이 없다. 현재 우리나라인 대한민국 건국초기에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냉전 때문에 상당한 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당시에 대한민국을 제대로 이끌고 앞으로 민주주의 국가의 매뉴얼을 제공하고 기틀과 제도를 다질만한 인물이 부재했다는 것은 자명하다. 반면 정도전은 새로운 정치공동체에 필수적인 3가지 요소를 파악하고 실천으로 옮겼다. 그의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과 선견지명으로 인해 조선왕조는 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정도전에게도 많은 고민과 갈등이 존재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정도전은 주자주의 학자이다. 하지만 조선의 건국은 주자주의의 도통이나 성인 군주와는 전혀 거리가 먼 찬탈과 무력에 의한 역성혁명이었다. 여기에서 정도전은 갈등을 했을 것이다. 다른 학자들처럼 주자주의와 멀어진 현실에 거리를 두고 서원에서 제자들을 후학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정계에 진출하여 세상을 도통의 세계로 만들 것인가. 정도전도 전자를 선택 할 수 있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하고 이성계가 왕위에 즉위하는 과정에서 주자주의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어긋나 있는 정치에 발을 담구는 것은 학자로써, 선비로써 용납되지 않는 행동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후자를 선택했다. 주희가 말하는 도통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직접 행동을 하고 실천해야지 만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이러한 측면에서 정도전은 현대 정치가와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선 정치인들은 ―정도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수준 높은 학문 도야와 인격 수양이 결여 되어있다. 2010년에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력을 바탕으로 공천을 받으면 된다. 아니면 인맥이나 학연, 지연 등을 통해 정계에 진출해서 소위 말하는 줄타기를 잘 하면 된다. 참고로 조선 시대에 주자주의가 공고화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부분의 선비나 정치계 인물들 ―현재로 따지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 공고화를 위해 힘을 쓰고 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정치가 개인의 안위만 생각하는 정치 환경에서는 대한민국 정치의 발전을 논하기 힘들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봐도 분명하다. 국민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진정한 주인은 선거를 할 수 있는 국민들 자신이다. 하지만 국민들도 발등에 떨어진 일만 생각하고 미래를 위한 지속 가능한 세상이나 복지세계에 대한 관심이 부재하다. 정치인만큼의 높은 수준은 아니더라도 공동체를 위해 앞을 내다보는 행동을 하려 하지 않는다. 국민들은 단지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면 앞뒤를 따지지 않고 지지해준다. 따라서 해당 정치인의 정치철학이나 건설적인 공약, 과거행적과 도덕성 등은 자연스럽게 점점 후순위로 밀려나게 된다.정도전은 당시의 사상과 환경을 고려해 보았을 때 가히 혁명적으로 위민정치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시행하려고 노력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정도전은 주자주의 학자이기 때문에 주자주의와 전혀 동떨어진 조선건국 초기 정치에 뛰어드는 데에는 많은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자신을 위해서 또는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서 정치에 힘을 쏟았다. 성리학의 기본 개념인 천리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본인이 제대로 천리에 대해 알고 정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천리의 도와 성을 따르고 수기와 성리를 통해 천리를 구현하자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현대사회에서 중요시 여기는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이나 복지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지 않는다. 하지만 정도전은 이런 패러다임의 시대에도 인간과 개인 특히, 대다수이고 피지배계층인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뜻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정전제 도입 등을 통해 드러난다. 500여 년 전에 지금과 같은 이상을 지닌 정치가가 있었다는 점에서 정치가 정도전은 단순히 조선을 위했던 정치가 였다기 보다 백성을 위했던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계승과 명분의 중요성은 정도전도 뛰어넘을 수 없었던 한계였던 것 같다. 현대에도 전통, 정통이나 주류를 운운하며 자신이 진정한 정치가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1400년대의 한반도도 명분을 무시하고 조선왕조를 세울 수 는 없었다. 우선 정도전 자신도 초야의 재야에 남지 않고 사회와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도통과 정통의 이론을 들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시켰다. 정계 재 입문 이후에도 무력의 혁명과 찬탈의 색깔을 희석시키고 고려와 다른 조선을 만들기 위해 불교와 도교 등의 이단을 탄압하고, 「조선경국전」, 「불씨잡변」, 「고려사」등을 집필하여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명나라에게 사신을 보내어 조선의 건국을 인정받고 소국주의를 제창하며 명나라와 쌍무적인 관계를 위해 힘썼다. 이런 노력은 조선 건국의 부당성과 부정적인 견해를 희석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고 여겨지지만 완전한 명분과 정당성을 얻지는 못하였다. 한편에서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의 정계 진출에는 약간의 유연한 사고방식과 신념의 흔들림이 간헐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도통론의 완성을 위해 정통론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로 정계에 복귀하여 주자학자적인 마인드와 명분으로 돌아왔으나 본인의 이런 의구심은 명확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깨끗이 지울 수 없었다.정치가 정도전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는 Aristotle의 실천이성에 부합하는 인재라고 생각된다. Ari.는 정치 또는 정치학은 이념 뿐 만이 아니라 실천과 관련되는 학문이라고 제시하며 Phronesis를 제창했다. Good를 알기만 하면 안 되고 행위까지 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모든 사람 특히, 백성의 Eudaimonia(잘 사는 것, 좋은 삶)를 실천하기 위해 고뇌인이나 수행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하고 습관화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도전은 Ari.의 중용의 덕을 실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주자주의의 이상과 신생국가 조선의 현실을 과도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가장 좋은 환경으로 만들었다. 원리를 신봉하면서도 그에 맹목적으로 집착하지 않았고, 현실의 제약 속에서 자신의 논리를 세워 그에 따라 실천하였다. 그가 조금만 주자주의로 치우쳤다면 그는 주자주의 학자의 급진적이고 현실에 타협을 하지 않는 일반적인 특징 때문에 조선왕조의 역사를 10년 이내로 끝내버렸을지도 모른다. 혹시 지나치게 현실주의로 생각했어도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이나 체계성의 임무를 잊은 채 권력정치나 관계구도에 치우쳐 마찬가지로 조선왕조의 역사를 10년 이내로 끝내버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측면에서 정치가 정도전은 Ari.의 윤리학의 이상적인 인재에 적합한 정치가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Ⅰ.서론지난 노무현 정부는 북핵 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하며 미국의 대북정책을 수동적으로 참여하기보다 주도적 역할을 모색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를 냉정히 판단했을 때, 한국이 북한 문제 해결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북한이 한국을 협상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한, 한국의 어떠한 정책도 제한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북핵을 비롯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해결하는 데에는 주변국가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일본, 중국, 러시아의 영향과 입김은 상당한 파급효과를 낫는다. 이 중에서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미,일의 정권 변화가 대북정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Ⅱ.본론1. 미국클린턴 정부부터 미국은 북한에 대한 협상과 견제를 뚜렷하게 천명하였다. 클린턴-부시의 경우 대북정책에 대해 정책적으로 일관성을 보인 부분이 있고 차이점을 보인 부분이 있다.1) 정책의 일관성클린턴 - 부시 행정부는 핵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해결범위와 수준에서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즉, 한반도에서의 커다란 변혁을 원치 않았으며 북한에 대한 개입정도는 다소 적었다고 볼 수 있다. 클린턴 대통령은 취임 이후 유럽 현안과제에 우선순위를 두고 NATO의 동유럽 확장과 러시아의 재건 지원, 미국 경제회복에 온 관심이 쏠려 있었다. 또한 개방을 시작하는 중국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려는 정책으로 인해 동북아의 안정과 현상유지는 필수 조건이었다. 또한, 북한의 식량위기로 북한 붕괴가 예상외로 급속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견에 따라 식량지원으로 북한 정권을 안정시켜 제한전쟁 도발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동아시아 미군 10만 병력의 단계적 철수안을 백지화하고 제네바 합의이행을 적극 유도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북한과 평화 조약체결을 제안하고 일괄 타결안을 제시하였다.부시 행정부도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의 현상타파를 불러올 수 있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전쟁의 여파로 한판도 유사시 증원전력 60만명 규모가 지켜지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서 북한 봉쇄정책을 계속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북한이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적대시 정책이라고 여기는 상황이라 미국은 대북정책을 소극적으로 임하였다. 결국 부시 행정부는 한반도에서 정전체제를 변혁시키려는 노력 대신 북한에 대해 개입이탈과 봉쇄로 일관했다.2) 정책의 차이점클린턴 행정부의 핵심 정책 결정자들은 신자유주의적 제도주의자로서 미국이 세계정치경제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개입과 확대를 추구한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군사 우선주의 보다 개입과 확대 과정에서의 다자주의적 대화와 협력을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초 북한이 NPT 탈퇴를 발표하자 북한을 신뢰할 수 없는 정권으로 인식하였으나 외교적 방법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여 불량국가라는 용어 사용을 중지하였다.반면에 부시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강력한 군사력으로 미국의 이해를 관철한다는 현실주의적 국제주의 입장을 천명했다. 즉, 국가 이익과 목표의 선택과정에서 합리성의 성격을 변화시켰으며, 9·11사태 이후 정책결정 핵심내부그룹의 집단사고 폐쇄성은 합리성의 성격을 제한하였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미국을 협박하는 국가로 인식하고 선의의 무시 정책을 취하였다.3) 오바마 정권오바마 행정부의 경우 취임한지 오래되지 않아, 제대로 평가나 흐름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기본적으로 오바마는 부시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였다. 오바마는 BBAB정책을 취하였다. 부시의 정책을 무시하고 클린턴의 정책으로 돌아가겠다는 의미이다. 즉, 일방주의에서 국제협조주의로, 하드파워에서 소프트 파워로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후보시절에 북한의 지도자와 조건 없는 대화와 같은 직접외교를 강조해왔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2. 일본1) 대북정책 원칙 : 상호주의일본의 대북한 정책은 국제변수와 국내변수라는 국내외적 환경요인에 대한 정책결정 자들의 개별적 인식과 목표의 차이 등에 따라 전략 및 수단이 일정한 흐름의 변화를 보여왔다. 냉전종식이후 일본의 정책 결정자들은 국내외의 환경변수를 고려하여 국교정상화라는 정책목표가 지속성을 갖고,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북한의 행동과 태도의 입장이 반영된 환경변수를 고려하여 대안과 정책을 대신한다는 것이 상호주의이다. 따라서 일본에게 있어 대북한 상호주의는 구조적으로 협력이 어려운 북한 측을 협력으로 유도해내기 위한 전략적 접근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2) 제 1기제 1기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냉전종식 분위기의 확산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의 변화, 1990년 9월 3당 공동 선언등을 계기로 일본 정부가 대북 정책을 재검토하고 북한과 관계개선을 위한 수교협상을 8차례 진행한 1992년 12월까지의 시기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일본의 대북정책은 냉전시대와 큰 차이 없이 미국과 한국에 커다란 영향을 받는 가운데 소극적으로 일관하였다. 이는 일본정부의 대북정책이 국교정상화를 목표로 했다기 보다는 당시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한반도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북한과의 관계개선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차원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3) 제 2기제 2기는 제8차 수교협상 결렬직후인 1993년 1월부터 2002년 9월 일.북 정상회담 개최 이전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 일본은 19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인해 일시적으로 대북 강경정책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한·미·일 공조를 기반으로 대화와 압력을 병행하되 북한에게 최소한의 양보나 협력을 통해 화답을 유도한다는 유연한 상호주의에 입각한 대북정책을 전개하였다.
지난 2001년부터 제주도를 지방특별자치도시로 만드는 방안과 함께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와 현재 시행되고 있다. 21세기에 영어 공용화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영어 공용화는 영어를 한글과 대등하게 같은 비중으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제2언어와는 달리 관공서, 도서, 의사소통에 있어서 전 영역에 영어를 한글과 동등하게 기록, 저장해야 한다. 말로는 간단해 보일지 모르지만 영어 공용화의 위력과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필자는 영어 공용화에 대해 반대한다. 영어 공용화는 외국에서 들여온 황소개구리처럼 악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영어 공용화를 해도 모두가 영어를 잘할 수 없다. 영어 공용화로 인해 일상대화까지 영어로 사용하게 되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영어 마을, 영어 수업, 영어 교재 등이 개발되어 시행되더라도 10대 이상의 성인은 학교에 다니지 않아 접할 기회도 적고 어린 학생들만 배우게 된다. 이렇게 진행되면 장기적으로 2세대 정도는 지나야 영어가 공용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의 경우도 많은 비용을 통해 공용어 중에 하나인 영어를 교육시키고 있지만 전 국민 중의 3%만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다. 찬성 측에서는 공용화를 해도 큰 문제가 없고 필리핀, 인도, 싱가폴 등의 예를 들며 전 국민이 영어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퀘백 주를 제외한 이런 아시아국들의 경우 식민통치에 의해 영어가 어쩔 수 없이 사용된 특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영어 공용화를 해도 국가 경쟁력이 높아진다고 볼 수 없다. 국가 경쟁력은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국가의 총체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이에는 인적자원, 과학기술, 투명성, 자유성, 기본 인프라 시설 등이 포함된다. 공용화를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점이 많아져 국제화를 통해 국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가 경쟁력을 외교나 국제화 뿐 만이 아니라 국가 전반적인 역량을 높여야 하는 것인데, 외교나 국제화의 실력만 늘린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어 공용화로 인해 나타나는 여러 혼란들이 국가 경쟁력을 낮출 수 있다.영어 공용화는 사교육의 감소를 해결 하지 못한다. 일부 찬성하는 입장에서 영어를 공용화하여 전 국민이 한국에서, 사교육을 통하지 않고 영어를 잘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연간 4조원에 달하는 영어 사교육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한국인의 정서와 생각의 전제를 파악하지 못한 주장이다. 예부터, 한국인에게 교육은 신분상승의 유일하고도 가장 빠른 통로이었다. 과거를 통해 평민에서 양반이 되고, 양반은 양반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현재에도 각종 국가고시, 전문 자격증을 위해 전국의 많은 인재들이 힘을 쏟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국민에게 교육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영어는 단지 교육 중 두드러지게 나타난 과목일 뿐이다. 영어 공용화를 통해 전 국민이 영어를 잘해도, 끊임없는 교육열 때문에 이제 불어나 스페인어, 중국어 등 다른 언어로 영어 사교육비용이 전가될 것이다. 결국 이는 영어로 인한 사교육비용을 줄이지 못한 채 다른 언어로 바톤을 넘겨주는 꼴이 된다. 그렇다면 영어 공용화를 찬성했던 사람들은 이제 중국어 공용화를 주장할지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