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작품 감상문1. 대위의 딸당시의 소설은 어느 정도 ‘현실의 반영’적 측면을 많이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 소설보다는 로망스에 가까워보이기도 하지만, 스토리의 허무맹랑함과 비약 속에서도, 거짓말을 마치 실제 있는 이야기처럼 꾸미려고 애를 쓴 것이 보여진다. 실제 있었던 푸가초프의 반란 사건이나 예카테리나 등의 실존인물 등, 이것이 근대로의 이행기의 소설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기간을 거쳐서 점차 근대소설이 되는 것 같다.문체적 측면은 번역서를 읽었기에 알 수가 없으나, 깊은 내면묘사나, 배경에서도 중요한 어떤 요소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이 아닌 딱히 그래보이지도 않는 것들에 대한 묘사가 있어서 어느 정도 사실주의적으로 보이는 면도 근대성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그러나 소설의 장르는 딱히 고전주의, 감상주의나 낭만주의, 사실주의들 중 어느 것에도 넣고싶지 않았다. 어느 것도 적절하지 않아 보엿다. 낭만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단순히 주인공이 고난을 겪으며 살다가 끝에 가서 잘 되는건 낭만주의가 아니라도 어디에나 있는 구조라고 생각한다.누군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 이 소설은 다만 재미있게 읽히기 위해 쓰여졌을 뿐이다. 최대한 재미있게 만들었으며, 재미있는 이야기, 즉 ‘서사’를 제외한 나머지 요소는 별로 없는 듯 하다. 옛날 이야기를 읽는 듯 한 최소한의 구조를 제외하고는 어떤 형식의 껍데기로 쓰지 않고 순수한 알맹이만 그대로 남아 있다. ‘재미’라는 소설의 본질만을 꿰뚫기 위해 쓰여진 소설이라는 점이 이 소설의 참된 가치가 아닐까 생각한다.2. 예브게니오네긴(우리 시대의 영웅들)예브게니오네긴은 처음엔 분량 때문에 읽기가 많이 꺼려졌던 소설이지만, 이내 그것이 시로 쓰여져서 수 많은 줄바꿈 때문에 많은 여백이 남는다는 것과, 원문과 번역본이 나란히 실려 있어 공간을 두 배로 많이 차지한다는 것을 알고 아무 생각 없이 읽게 되었다. 그러나 읽으면서는 또다시 후회하게 되었다. 어려운 글로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독성 쉬운 산문투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운문으로 쓴 글이 산문처럼 읽히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수업 시간에 책의 내용에 대해 먼저 들어 봤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예브게니오네긴은 우리 시대의 영웅들과 비슷한 점이 많은 소설이라고 보였다. 그래서 이 소설에 대해 생각을 할 때 함께 비교하며 생각해 보았다.처음에는 이 소설에서 예브게니오네긴이 비판받고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낭만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오네긴이 낭만주의자로 설정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은 내내 오네긴을 낭만주의에 대한 비판론자로 설정하면서 오히려 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그의 비극성에 대해서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그 주체는 작가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나 작가는 아닌) 시적 화자였다. 이것은 이것이 산문을 다뤘지만 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과거의 서사시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서사시인 것이다. 그런데 헤겔에 의하면 시는 주관적 장르, 소설은 객관적 장르라는 차이가 있는데, 이 차이로 인해 소설의 세계는 실제 작가의 세계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는 서정적 거리두기라는 장치를 뒀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작가와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독자도 작가의 생각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네긴은 따로 이야기만 들었을 때에는 매우 비난받을 인물이었지만 소설 속에서는 피난받을 수 없도록, 오히려 불쌍한 인물로 그려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시대의 영웅들과 대조적인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우리시대의 영웅들은 산문으로, 즉, 객관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주인물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게 되고, 그에 공감할 수 없어 더 나빠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두 소설에 비슷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데도, 인물을 대하는 독자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이러한 형식 상의 이유도 어느 정도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그리고 두 소설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소설들이 낭만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두 소설을 낭만주의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또한 두 주인공 역시 낭만주의를 싫어하지만 낭만주의가 아닌 다른 무엇인 것도 아니다. 어떤 사상을 근본적으로 거절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회의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대안이 존재해야 한다. 즉, 시대적으로 보면 이들에게는 낭만주의 다음에 오는 사실주의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아직 사실주의가 전면에 등장할 상황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아직 낭만주의이지만 낭만주의에 회의를 느낀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러시아의 근대화와 사람들의 인식 변화로 인한 혼란, 데카브리스트 혁명 실패의 여파, 등 많은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종합해 본 내 결과는 ‘모두가 잠들어 있고 혼자만 깨어 있는 상황에 대한 외로움’이다. 차라리 같이 잠들어 버리면 편하겠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이들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대안이 없기에 그를 적극적으로 부정은 하면서도 주인공들은 무기력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여태껏 별을 보며 걸어왔는데, 그 별이 사라졌다면, 달이나 나침반에라도 의지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들에게는 단지 별만 사라졌을 뿐, 다른 무엇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그들의 문제이다. 이것은 단순히 낭만주의의 끝에 있는 문예사조뿐 아니라 당시 귀족장교가 느끼는 허탈감과 모두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이 소설을 보면서 구조주의에 반대하는,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어 여전히 구조주의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것을 후기 구조주의, 모더니즘에 대항하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사조들의 무방향성과 허탈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 단순히 나밖에 없었는지가 의문이다.3. 외투고골리의 소설인 외투는 너무나 유명한 나머지 매우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골리는 비판적 리얼리즘이라는 싫고도 유명하고 재미없는 기법을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보여준 사람이기도 해서 이러한 선입견이 더욱 강해 외투는 그동안 가장 읽고 싶지 않지만 읽어야 하는 소설로서 생각되었다.많은 부담감을 갖고 책을 읽게 되었지만 처음 몇 장을 읽는 순간 내 생각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고골리의 리얼리즘이란 지금의 리얼리즘과는 기법면에서 매우 달랐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때의 리얼리즘이란 사회를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지, 결코 쓸데없이 꼼꼼한 사실주의적 묘사나 어려운 표현기법 따위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외투는 장르로 따지면 코미디에 가까울 정도로 장난스럽게 쓰여졌다. 그러나 외투가 문학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웃긴지 그렇지 않은 지가 아니었다. 어떻게 웃기느냐의 문제였는데, 여기에서 ‘해학’과 ‘풍자’라는 정서의 위대함이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민속극 등에서 자주 쓰이는 것인데, 나의 정서를 주인공에 몰입시킨 뒤, 나와 비슷한 존재인 주인공을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독자를 씁쓸하게 만듦과 동시에 그들을 웃게만들어 감정의 정화를 하고, 나와 불일치되는 인물에 대해서는 풍자를 통해 놀려서 쾌감을 얻는다. 이러한 풍자와 해학은 날카롭지만 결코 진지하지는 않다. 시종일관 장난스러움을 유지하면서 사회비판과 현실인식, 그리고 감정의 정화까지 가져온다.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비판적 리얼리즘이라는 관점에서 이 작품을 본다면 그 효시라는 점 이외에는 대단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공식적인 이론이 아니라 내 생각이긴 하지만,) 확실이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사회를 보다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애초에 진지하지도 않고, 이미 감정은 정화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해학과 풍자는 날카롭긴 하지만 사회를 변혁시키기에는 적절한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탈춤으로 근거를 들자면, 탈춤은 브레히트가 여기서 아이디어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반아리스토텔레스적 극이며 전형적인 브레히트식의 모습을 지녔다. 여기서 사회비판은 관객을 몰입시키지 않고, 해학과 풍자 등의 방법으로 거리를 두면서 이루어지는데, 이를 브레히트는 관객의 지성을 이용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다, 단순히 현안을 알게는 되지만 아무 몰입 없이 그저 탈춤을 탈춤으로 대하게 될 뿐이다. 조선에서도 탈춤은 해학과 풍자 등, 반아리스토텔레스적 방법으로 사회비판을 날카롭게 했었지만 오히려 이를 민중들의 삶의 어려움을 풀어줄 수 있는 탈출구로 보아 양반들은 일부러 이를 허용했고, 심지어는 장려하기조차 했다. 그리고 일부러 이러한 장을 열어두고 자신들은 절대 이것에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탈춤이 더 날카롭게 사회의 부조리를 찌를 수 있도록 열어두었다. 사회비판적 탈춤 좀 본다고 해서 갑자기 백성들의 울분이 치밀어 올라 폭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불합리한 상황을 웃어넘기고 함께 즐김으로써 잊어버릴 수 있는 건전한 해소도구일 뿐이다.
서경별곡의 한국적 여성성과 보편적 미의식서경(西京)이 아즐가 서경(西京)이 셔울히 마르는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닷곤대 아즐가 닷곤대 쇼셩경 괴오마른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여해므론 아즐가 여해므론 질삼뵈 바리시고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괴시란대 아즐가 괴시란대 우러곰 좃니오이다.구스리 아즐가 구스리 바회예 디신달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긴히딴 아즐가 긴힛딴 그츠리 잇가 나난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즈믄해를 아즐가 즈믄해를 외오곰 녀신달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신(信)잇단 아즐가 신(信)잇단 그츠리 잇가 나난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대동강(大同江) 아즐가 대동강(大同江) 너븐디 몰라셔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배내여 아즐가 배내여 노한다 샤공아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네가시 아즐가 네가시 럼난디 몰라셔위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녈배예 아즐가 녈배에 연즌다 샤공아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대동강 아즐가 대동강 건넌편 고즐여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배타들면 아즐가 배타들면 것고리 이다 나난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시와 노래에 대한 미의식은 인류보편성을 관통하지 않을 수 없지만 시의 근원에 해당하는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미의식은 문화적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현대의 문학적 미의식은 고래의 것보다는 서구의 것에 오히려 가깝기 때문에 고전시가의 경우에도 대부분은 현대의 우리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이미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에게도 대부분의 고전 시는 '옛날 것'으로만 존재할 뿐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찾기는 힘들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입에 익어버린 '우리의 얼과 민족의 지혜'는 폭력적 세뇌의 결과였을 뿐, 당시의 나는 '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이후 중등교육을 거치며 공교육에 대한 신뢰에 비해 반항감이 더 높아졌을 즈음에는 고전문학이란 그저 지루하고, 그들끼리만의 고고한 말장난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경별곡은 그런 나의 선입견에 있어 최초의 예외가 되었다.물론 시대의 장벽은 작품 해석에 있어서는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한 시의 정서는 충분히 시대를 넘어선 보편적인 미의식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서구와 구별되는,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한국의 전통적 정서마저도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1연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기 싫은 마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너무 흔해빠져 '사랑은 시대를 초월한 인류보편의 가치'라는 점을 백만 스물 두 번째로 확인하는 것 이외의 문학적 가치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2연에서는 보다 한국적이고, 여성적인 정서가 드러난다.불가능한 상황을 가정하고 그것이 충족될 경우에만 이별하겠다고 한다. 사실은 역시나 이별의 상황을 부정한다는 면에서 별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표현방식은 현대의 기준으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절대로, 떠날 수 없다'는 주체적인 이별의 거부가 아니다. 여성이기에 주어진 삶에 순응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수동성이 헤어지는 상황을 필연적으로 가정하게 만든다. 여기에 절대로 떠나기 싫은 애절한 마음이 부딪히면서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랑과, 이별을 창조해 냈다. 이것은 서경별곡의 여성성을 단순히 로맨틱으로 귀결되게 하지 않게 했다. 사랑에 있어 약자일 수밖에 없던 한국의 여성상이 고스란히 그려진 것이다. 내가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한국적 정서'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3연도 조금 내용은 다르지만 한국적·여성적 정서가 충분히 녹아난다고 할 수 있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별을 맞닥뜨린 상황이다. 당시의 여성에게 이별이란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사랑하는 님은 물을 건너 떠났다. 다시 잡을 수도 없고, 떠나는 상황을 지켜봐야만 하기에 모든 걱정과 질투가 폭발하고, 다른데로 불똥이 튀기도 한다. 이러한 솔직함은 대상이 발화자의 앞에 있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미 상대는 떠났기에 먼 허공에 대고 퍼부을 수밖에 없는 공허한 외침이기에 더 애절한 맛이 있다. 이미 닿지 않는 상대에게 최후의 만류를 외치는 상황만큼 절망적인 이별이 또 있을까? 이 역시 한국적인 여성적 정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안나 카레니나가 고전인 이유대하소설과 장편소설, 단편소설의 중요도나 문학성을 비교한다는 것은 시와 소설, 비평을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웃긴 일이다. 서로 다른 장르 사이에는 다른 판단 기준이 작용하는 것인데, 비교는 결국 같은 잣대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에 공평한 판단이 되지 않는다. 이는 문학에 대해 아주 문외한인, 우매한 사람들이나 생각 없이 던지는 질문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하지만 '시인이 되지 못한 사람은 소설가가 되고, 소설가가 되지 못하면 비평가를 한다.'는 말은 문학인들 사이에서 가끔은 농담삼아, 그러나 가끔은 진지하게 논의되는 말이다. 나름 권위자인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어떠한 이유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대하소설과 장편소설, 단편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톨스토이는 워낙 많은 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해서 대부분이 단편소설인 와중에도 전집이 90여권에 달한다. 그러나 그 중 그에서 유독 첫 장편소설인 '안나 카레니나'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아직까지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점은 뭔가 장르 간에도 위계질서가 사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는 장편 소설로 인정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하지만 대략 종합해 봤을 때 그의 장편 소설의 개념은 지금의 우리의 소설론 개념을 적용시켜 보면 '대하소설'의 개념에 가까운 것 같다. 즉, 안나 카레니나는 대하소설, 다른 톨스토이는 장편소설으로 인정하지 않는 소설이 일반적 장편소설, 나머지는 단편소설로 구분할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분류로 완벽하게 분류가 되지 않는 소설들이지만 이러한 경향이 어느 정도는 있는 듯 보인다. 이 중 대하소설과 장편소설은 명확한 구분이 힘들고, 분량도 이러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고, 그 인지도의 차이가 크지도 않아 구분이 의미가 있는 것 같지가 않지만, 이들과 단편소설같은 짧은 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톨스토이가 말년에 모두 부정하던 것이 이들 소설이었음에도 대하소설과 장편소설이 (일반적으로는)가장 많은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이 차이는 당연히 같은 작가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또 장르 간의 차이를 이런 논리로 무시해서는 안 되기에 소설의 수준이나 문학성에 차이가 있다고 봐서는 안 된다. 다만 단편소설에 없는 것이 장편소설과 대하소설에 있으며 단편소설에 있는 것들 역시 이들이 가지고 있을 뿐이다. 장편소설은 단편소설같은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탄탄한 구성력, 의미심장한 문장 등을 모두 포함하는 데다가, 대하소설은 더 큰 세계를 총체적으로 세계를 반영하고 큰 강이 흘러가듯, 천천히, 그러나 많은 내용과 다양한, 큰 물줄기 뿐 아니라 작은 지류까지고 자세하고 소상히 그려내는 것이다. 다른 차이가 있다면 분량의 차이 때문에 단편에서는 팽팽한 플롯을 주로 쓰는 반면 장편 이상에서는 느슨한 플롯을 쓴다는 것인데 이것은 정말 길이에 의한 차이에 불과한 것이다. 또 느슨한 플롯이 전개가 지루한 것이 아니라 다만 중심 이야기가 느리게 전개될 뿐인 것이라, 극적 긴장과는 상관이 없다. 이를 통해 봤을 때, 독자가 굳이 장편보다 단편소설을 더 좋아할 이유는 그리 많지 않다.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소감으로 이 소설이 굉장히 좋았다거나 인상깊었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족히 100년 이상은 정전의 지위에 올라있었고 아직까지도 그 지위가 굳건히 유지되는 소설에 대한 평가는 어차피 의미 없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고전은 항상 고전의 가치만큼은 한다는 말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는 소설이다. 때로는 이 소설을 읽으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상대적으로 우리의 문학사가 러시아에 비해 너무나 뒤처지고 열등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문학사의 변화는 발전이나 진보가 아니라 다만 변화일 뿐이라는 것을, 한국의 문학사는 서구의 영향을 늦게 받았을 뿐 그들에게 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냉정하게, 고전의 경지에 오른 작품의 개수나 작가의 지지기반이 현저히 뒤처진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출판된 지 거의 140년 정도가 지났음에도, 그리고 러시아 형식주의가 등장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형식주의의 기법 따위는 이미 독파하고 있었다는 듯, 기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방식이나 이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냐며 벌써 완성된 리얼리즘은 현대의 소설이 기준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확고하게 정전의 위치에 올라와 있다. 어쩌면 문학사조는 세월에 따라 조금씩 변할지라도 톨스토이의 소설이 북극성처럼 그 변화하는 중심에서 기준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있는 어떤 것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문학사조는 아직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변화는 항상 현상을 중심으로 했고, 톨스토이의 소설은 그 중심에 있다.그의 소설은 철저하게 리얼리즘을 추구한 것처럼 항상 인물로부터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구성 상 부정적으로 그려야 할 인물도 직접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브론스키의 친구에 관한 언급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그것마저도 그저 그런 느낌이 간접적으로 드러날 뿐이고 그러한 서술의 목적은 겨우 브론스키의 원래의 생활을 조금쯤 난삽하게 그리려 했던 것 뿐이기에 매우 조심스럽고 간접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리얼리즘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는 소설에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야 할뿐, 작가가 주장하는 의견이나 세계관은 항상 반영되어야 한다. 작가를 완전히 배제하고, 단지 소설 속 세계의 창조주 역할만 한 후 그것을 그리기만 하는 소설은 리얼리즘 소설이 아니라 자연주의 소설이다. 작가는 단지 소설의 아이디어 제공과, 글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하지만 톨스토이는 아직 작가의 힘을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소설이 훌륭했던 이유는 아마 소설과의 객관적인 거리 유지와 소설을 통한 의도 실현을 적절히 분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최소한으로, 하지만 분명히 의도는 존재하고 독자가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받아들이게 한 것은 단순히 리얼리즘과 자연주의의 중간정도를 시도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복수가 될 수 없기에, 한 사람의 입장에서 한 가지 생각밖에는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리얼리즘 소설도 고전소설처럼 작가가 직접 드러나 논평을 하지는 않지만 그와 다름없이 모두가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 자주 드러나는데, 톨스토이는 이러한 점을 매우 완벽하게 극복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다성성'에 대한 부분이다. 그는 마치 스스로 복수형이 된 것처럼 객관적 입장에서 모든 인물을 설명하고 그린다. 그래서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작가에 의해 악인이 징벌당하고, 선인이 보상받는 구조가 아닌, 자기 자신과 세계 자체에 의해 만족스러운 삶을 살거나, 삶의 패배자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 다음 차원에 톨스토이의 본심은 숨겨진 듯 작용하고, 독자는 객관적인 서술을 읽음으로써, 실화처럼 소설의 내용을 더욱 신뢰해 소설을 통해 깊은 깨달음과,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진실되면서도 우리를 고양시킨다. 인물이 다양하고 많아 다성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소설 유형인 장편소설을 톨스토이의 수 많은 소설 중 최고의 명작으로(혹은 그 중 하나로) 꼽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카프문학의 갈림길, 내용형식논쟁목차1. 서론 - 내용형식 논쟁의 중요성2. 당시 카프문학의 전개3. 박영희의 소설 - 지옥순례, 철야, 산양개4. 논쟁 전개 양상5. 논쟁의 쟁점6. 결론 - 형식주의와 프로문학적 순수성※ 참고문헌1. 서론예술, 특히 문학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에 대한 논의는 오늘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입장을 가지는가에 따라 작가의 예술관과 작품의 성격이 나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앞선 논의 중 카프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1920년대에 살았던 박영희와 김기진의 이른바 내용·형식논쟁이다. 1926년에 김기진이 「문예시평」(1926.12,『조선지광』)에서 박영희의 소설, 「철야」와「지옥순례」에 대해 비판하면서 시작된 이 논쟁은 아쉽게도 길지 않은 시간동안 박영희와 김기진이 단 3편의 글을 주고받음으로써 끝나버렸다.이 논쟁은 당시 상대의 견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했고, 서로가 생각했던 쟁점이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게다가 문단 내부의 분열을 야기한 김기진에게 KAPF의 분위기가 불리하게 작용했고, 김기진 또한 소신을 지키며 논쟁하는 것 보다 조직의 단결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생각했기에 이기인,「카프 초기 논쟁에 대한 재검토」,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19, 2003, p.224.그들의 이 논쟁은 명확한 결론이 나기도 전에 끝나버리고 만다.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논쟁과 글들이 아직까지 가치를 가지고 한국문단의 중요한 논쟁 중 한 가지로 여겨지고 있는 이유는 박영희의 소설과 그에 대한 김기진의 비판 자체가 아닌, 프로문학에 대한 이론과 담론이 모자랐던 적시에 그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이 논쟁에 대한 문학사적 중요성과 의의는 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적인 의의를 떠나 현대의 관점에서 바라보기에 이 논쟁은 정확한 이론적 기반도 없고 완성되지 않은 글로 보여져 이렇다 할 가치가 소설을 수준미달이라 비판한 것이다. 외부의 비판에 대해 날카롭게 반응한 박영희가 김기진에게 공격을 받은 것은 일종의 내부 분열로 보일 수도 있는 것으로, 논쟁 자체는 크게 번지지 않고 김기진이 일정 부분 사과를 하며 무마되었지만 이후 카프의 문학적 형식에 대한 고민이 싹트게 되었으며 아나키스트들과의 논쟁 대표적으로 김화산의 문학론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무산계급 예술 운동의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발이며 직접적으로는 박영희의 계급문학 운동 노선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서 김화산은 박영희가 주장하는 계급문학 운동이 종국적으로는 예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이나 1차방향전환 카프는 사회 운동의 방향전환 과정에 따라 아나키스트들을 축출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조직의 개편을 단행하게 되는데 이 과정 가운데 박영희를 중심으로 목적의식론으로 요약되는 방향전환론이 제기된다.등과도 연결되는 사건이 되었다.3. 박영희의 소설 - 지옥순례, 철야, 산양개박영희의 소설 활동은 1925년부터 1926년 사이 2년간에 걸쳐 나타났다. 박영희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무산계급의 궁핍하고 비참한 현실을 부각시킴으로써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보여주고 투쟁 의식을 드러내고 있지만 또한 많은 문제점도 드러내고 있다. 박영희, 홍영희 엮음,『박영희 작품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8.이하 박영희 소설은 이 책을 기준으로 참조했음.1) (1925. 4)정호는 탐욕으로 가득 찬 인물로 재산 보호를 제일의 가치로 여긴다. 자신의 재산 보호를 위해 '사냥개'를 사들였지만 그는 자신이 키우던 사냥개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런 결말은 과도한 재물 축적 욕망을 가진 유산계급의 자기몰락과 비극적 최후를 냉정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박영희의 소설이 작법상의 합리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난이 생겨나는 시초가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조선문단』의 합평회에서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상섭 : 자본계급에 저항하는 계급쟁투를 목표 삼은 것이겠지요.백화 : 계급쟁투니 는 어떤 곳이나 '지옥'이라는 절망적 통찰에 있다고 하겠다.4. 논쟁 전개 양상박영희는 김기진과의 논쟁이 있기 전에도 이미 민족주의 작가들로부터 형식의 미흡함을 지적받았다. 그의 작품은 특히 민족문학파의 염상섭으로부터 신경향파의 작품은 과거의 형식을 대신할 새로운 형식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문예로서의 가치가 없고, 선전으로서의 효과도 없는 미성숙한 사이비 문예라고 혹평을 받았다. 염상섭, 앞의 책, p70.이에 대해 박영희는 기성문단의 형식론을 비판하며, 선전으로서의 문학을 내세웠다. 즉, 민족문학 측의 공격에 맞서 ‘형식=퇴폐적 미의식’, ‘선전=실용적 가치’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내세워 프롤레타리아 문학(이하 프로문학)은 형식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편다. 박영희「신흥예술의 이론적 근거를 논하여 염상섭군의 무지를 박함」, 『조선일보』1926.이후 본격적인 박영희와 김기진의 ‘내용·형식 논쟁’ 김종회 엮음, 『한국문학 명비평』, 문학의 숲, 2009.이하 박영희·김기진 논쟁 전문은 이 책을 기준으로 참조하였음.은 김기진이 「문예시평」(『조선지광』,1926.12)에서 다른 작품들과 함께 「철야」, 「지옥순례」 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시작된다.이 일편은 소설이 아니오 계급의식, 계급투쟁의 개념에 대한 추상적 설명에 시종하고 말았다. 일언일구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서만 사용되었다. 소설이란 한 개의 건축이다. 기둥도 없이 석가래도 없이 붉은 지붕만 입히어 놓은 건축이 있는가.「지옥순례」역시 소설이 요구하는 요건을 구비하지 못해 실패한 작품이다. (…) 그 범죄성을 감추어가지고 있는 기갈에 대한 실감의 고조가 이 소설의 가장 큰 요건인데 작자는 그 요건을 무시하였다. (…) 이 단편에서 작가가 취급한 제재는 인간 사회에 있어서 가장 침통한, 심각한 제재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조금도 침통하지 않고 심각하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냐, 묘사의 공과는 실감을 줌에 있다. 그런데도 여기에 그 묘사가 없다. 모든 것이 작자가 예정한 포인트까지 끌어오외시하고 형식미만 중시했다고 공격했다.(…) 그러므로 작가가 계급을 초월하지 못하며, 문예품의 내용이 계급을 초월하기가 불가능한 이상 프로문예 작가는 역시 무산계급의 XXXXXXX 위해서 역시 계급적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 부르주아문예 평자가 프로문예를 평한다 하면 그는 확실히 프로문예를 박해하려는 수단이다. 그럼으로 작가가 계급 의식을 초월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역시 문예비평가도 계급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은 설명을 기다리지 않고도 알 만한 일이다.박영희는 계급문학은 무산계급의 계급적 의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계급문학 작품의 가치는 그 구성과 묘사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나타난 계급적 의식에서 규정된다는 원칙을 내세워 김기진의 비평적 태도에 계급적 명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그는 계급문학 비평가는 작품을 주석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계급문학 비평가는 작품을 사회현상으로서, 작가를 사회적 존재로서 바라보고, 그 현상과 존재의 사회적 의의를 결정하는 비평, 즉, 이른바 문화사적 비평에 주력해야 한다고 비평가의 임무를 규정했다.그러나 이에 대해 김기진은 무산문예작품과 문예비평에서 또 다른 글을 쓴다. 그는 박영희가 김기진의 비평가적 태도에 대해 비난한 점만을 문제 삼고, 스스로 그의 주장과 박영희의 주장 사이에는 서로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며, 회월의 주장을 6가지 주요 골자로 축약한다.1. 무산계급 문학은 무산계급을 주제로 함은 자연이려니와 무산계급의 XX과 그 XXX지시하는 것이라야 한다.2. 무산계급 작품은 독립된 건축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무산계급의 전문화가 한 건축물이라면 무산계급의 예술은 그 구성물의 하나이니 서까래도 될 수 있으며 기둥도 될 수 있다.3. 묘사의 공과는 가공의 미를 줌에 있다.4. 무산계급과 문예는 묘사로써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에 나타난 XXX 정열로써 그 작품은 “힘”을 얻는 것이다. “힘”을 설명함에는 묘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힘으로써 설명하분에서도 그는 자신은 건축으로 되지 않았다고 하여 박영희의 문학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다만 수법에 의해서만 지적한 것으로, 선전문학도 문학상 요건을 구비해야하기에 그 토대만을 인정한 것이라 하였다.이 논쟁은 아나키스트에 대한 공격으로 소동이 일고 있을 때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김기진은 KAPF 내에서 매우 불리한 입장이었다. 결국 이 논쟁은 KAPF의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토의 끝에 박영희 쪽 지지로 결론이 내려버리고 김기진은 KAPF를 탈퇴하지 않는 한 자기 주장을 꺾어야 하게 되었다. 김기진은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히면서도, 최종적으로는 후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 마지못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부의 압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은 분명 김기진의 선택이었다. 그의 회고록에도 보이듯이 민족문학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부의 분열을 막고 집단적 투쟁을 중시하는 것이 ‘동지들의 뜻’이라면, 그것을 존중하겠다는 태도 표시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문학적 소신을 굽힌 것이 아니라, 조직의 논리를 위해 유보했을 뿐이다. 김기진, 「나의 회고록」, 『세대』, 17, 1964.그는 프로문학의 분열을 의식한 주변의 만류 때문에 자신의 글 중 계급의식 운운에 호감을 가지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하며 논쟁을 종결한다.5. 논쟁의 쟁점이들의 논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을 찾아보면 크게 내용-형식논쟁에 관련된 부분과 비평태도에 관련된 부분으로 나뉜다. 내용-형식 논쟁과 관련된 부분은 문학본질론에 대한 담론임을 알 수 있으며 비평의 관점에 관한 부분은 비평태도론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김기진이 제기한 문학의 내용과 형식에 관한 문제는 곧 무엇이 문학이고 무엇이 문학이 아닌가, 문학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요건은 무엇인가 하는 문학의 본질에 관한 물음이었다. 이에 대한 박영희의 대답은 문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문학의 기능 및 문학가의 태도에 대한 언급이었다. 김영민, 『한국 근대.
고전소설의 천편일률성에 대한 인식과 권선징악목차1. 서론 - 고전소설의 천편일률성에 대한 오해2. 소설의 주제적 측면과 형식적 측면3. 조선후기 고전소설의 유형화 경향4. 권선징악이 지니는 의의5. 결론 - 고전소설의 가치※참고문헌Ⅰ. 서론 - 고전소설의 천편일률성에 대한 오해고전소설(古典小說). 그 심오한 뜻을 풀이해보면 ‘옛 소설(小說) 또는 고전(古典) 주의(主義)의 성격(性格)을 지닌 소설(小說)’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즉, 고전소설은 설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문학의 한 종류로, 갑오개혁 이전까지 쓰였던 옛 소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고전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말해보라고 하면 으레 ‘천편일률적이다’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고전소설이 천편일률적이라는 말은 과격한 어감이 있는 표현이기는 하나 이미 어느 정도는 많은 이에게 공감을 얻고 있기도 하다. 속단일지언정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고전소설은 상투적인 표현, 권선징악적 교훈, 행복한 결말, 평면적인 인간형, 단선적인 시간의 흐름, 주인공의 일대기적 구조 등의 특징으로 요약되며 판에 찍어내는 것과 같다고 하여 다양성이 두드러지는 서양의 소설 작품들에 비해 작품성이 떨어지는 작품군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19세기 말 조선을 다녀간 프랑스의 외교관 모리스 쿠랑은 우리나라의 고전소설에 대해 "고전소설은 두세 권만 읽으면 전부 읽은 거나 다름없다. …그러하니 우리네 아동용 우화 가운데 가장 졸작보다도 오히려 재미가 없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언뜻 맞는 말처럼 보여 한국 사람조차도 한국고전소설의 열등함을 의심하게 되지만 이러한 이유들로 우리 고전소설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그들이 작품을 주마간산 격으로 외형에만 주목하고 그 이면은 들여다보지 못한 까닭이다. 구미에서 리얼리즘과 형식주의, 구조주의 등이 발현하고 전파된 양상에 나폴레옹, 합리주의, 사회주의, 세계 1·2차대전 등이 긴밀하게 얽혀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고전소설도 그 형태를 갖게 된 계기가 등에서 볼 수 있다. 한 남자가 두 처를 두는 것은 현실적으로 용인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소설의 많은 작품에서 한 남성이 이처(二妻) 또는 삼처(三妻)를 두었다. 작품 내용에서 다처(多妻)인 경우 성혼은 숙연(宿緣)을 따라 결연이 되는 것과 권력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자인 경우는 처음부터 서로 화합이 잘 되고 있으나 후자에서는 갈등이 야기되기 때문이다.처첩간의 갈등에는 정실이 첩을 질투하는 경우와 첩이 정실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야기되는 갈등이 있다. 정실이 첩을 질투하여 가정의 풍파를 일으키는 경우는 『옥루몽』에서 양창곡의 정실인 황부인과 소실인 벽성선과의 사이에서 야기되는 갈등에서 볼 수 있다. 첩이 정실을 제거하고자 한 작품은 『사씨남정기』, 『창선감의록』 등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다.이와 같이 처첩간의 갈등에서 양처 또는 정실이 첩을 시기했을 경우에는 화합으로 귀결되고, 첩이 정실을 모해하고자 한 것에는 철저하게 응징하게 된다. 생활 관념에 유가사상이 철저하게 지배했던 조선조 사회에서는 남존여비사상이 강렬했고, 또 다처제가 용인되었으므로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들의 시기와 질투는 용납하지 않았다.3) 남녀 간의 사랑조선조는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가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가의 교훈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의 현실적 여건에서도 애정소설이 많이 저작되었고, 또 독자가 많았던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을 도덕적인 규범으로 지나치게 억압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발이 더욱 가열시켰을 수 있겠고, 또 본능적인 감정은 규범으로써 억제가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조 중기 이후 애정소설이 많이 저작된 원인에 대해 임병양란을 치룬 후 민족적인 자각으로 실학사상이 대두됨에 따라 관념론적인 도학을 배격하고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생활에서 인간 본연의 생활로 돌아가서 참다운 인생을 향유하려는 경향으로 기울어지게 되었고, 또 그 시기 중국으로 부터 많은 애정소설이 들어와서 전파되어 정적생활에 고주제가 다양해지지 못한 이유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설의 형식보다 주제를 중시한 것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는 물론 최근에 와서도 이러한 경향이 있는데, 이에 대해 강재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글의 내용의 충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겉꾸밈보다는 실속있는 내용을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조선시대에 있어 율곡이나 다산은 물론 최근세에 와서도 단재나 만해같은 사상가나 문장가가 강조해온 논의다. 만해는 문예소언에서 문학을 한갓 좁은 의미의 '문예'로 보거나 심지어는 '예술'로만 본, 당시의 서구지향적 문학관을 비판하고, 시집 『님의 침묵』의 「'사랑'을 사랑하여요」에서는 "만일 좋은 문장만을 사랑한다면, 왜 내가 꽃을 노래하지 않고 버들을 찬미하여요"라고 노래하여 겉꾸밈보다는 실질있는 내용을 중시한 태도를 보였다.)즉, 글의 내용과 형식은 칼로 자르듯 뗄 수 없다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되, 우리나라의 소설의 경우 글의 형식적 측면보다 글의 내용의 충실성 자체를 형식적 측면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조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때의 내용의 충실성은 곧 주제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이 때 내용의 충실성의 척도는 도덕과 맞물리고, 도덕은 당대의 시대적 배경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짐작컨대 조선의 성리학적 배경이나 유·불·도의 사상, 도덕론과 인본주의 등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요컨대, 글의 내용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는 주제가 시대가 요구하는 도덕과 결부되어 몇 가지의 패러다임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틀 아래에서 서로 다른 형식과 제재를 생산해나가며 발전하게된 것이다.또한 메레디스와 핏제랄드는 "전통소설의 테마는 소설 속에서 선과 악 사이의 대립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고전 소설의 테마가 선과 악 사이의 대립이고, 이 양상 속에서 가치 있는 것을 소설 속에서 가르쳐주어야 하는 도덕론의 입장을 따를 때 가장 적절한 소설의 주제는 권선징악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앞서 고전소설의 주제에 대한 있다. 18세기 서울 길거리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풍경을 기록한 것 중에는 “전기수는 동문밖에 산다. 언문 패설된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설인귀전 등 전기를 입으로 왼다. 매월 초하루는 첫 번째 다리 아래에 앉았다가, 이튿날은 둘째 다리 아래에 앉고, 사흗날은 이현에 앉고, 나흗날은 교동 입구에 앉고, 닷샛날은 대사동 입구에 앉고, 엿샛날은 종루 앞 개울가에 앉는다. 이렛날은 개울가에서 다시 올라가고, 한두 번 오르락내리락 하면 그 달이 끝난다. 다음 달도 그렇게 한다. 하지만, 책을 잘 읽었기에 주위에는 보는 사람들로 메 터졌다. 가장 끽긴해 듣고 싶은 구절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뚝 그쳐버리고 말이 없으니 사람들이 하회를 듣고 싶어 다투어 돈을 던지곤 했다. 이것을 바로 요전법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저자거리에도 소설을 읽어주는 사람이 존재했는데 이덕무의 『아정유고(雅亭遺槁)』에는 “전에 한 남자가 종가(鐘街)의 담배 가게에서 어떤 사람이 소설을 읽는 것을 듣다가 영웅이 극도로 실의에 빠진 대목에 이르러 문득 눈을 부릅뜨고 입거품을 내뿜더니 담배 써는 칼을 들어 소설을 읽던 사람을 찔러 즉사시킨 일이 있었다.”라고 사건을 인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세책가와 전기수들의 활약은 소설의 독자를 모든 계층으로 확대함으로써 소설의 상업화를 촉진하였다.그러나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설이 유형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설이 대중의 인기를 의식하게 되면서 인기가 있는 작품, 인기 있는 구조, 인기 있는 인물, 배경 등을 점차 자주 쓰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이들의 총체로서 틀에 넣고 찍어낸 듯한 '유형'이 생긴 것이다. 이는 앞서 주제가 같아도 작품의 구조는 다양할 수 있다는 것과는 반대라 할 수 있는데, 구조가 유형화된 이후부터는 비슷한 구조에 다양한 주제를 담기는 힘들게 되어서 비슷한 주제를 가진 작품들이 많아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정한 구조는 그에 부합하는 일정한 갈등구조를 담기에 적절한 그릇이 되는데, 어울리지 않는 갈등이 들어갈 경우 이야기 지역에 따라 거의 불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제는 한정되어 있지만, 그 주제를 형상화시키는 글은 수 없이 많게 마련이다. ‘사랑’과 ‘죽음’이라든지, ‘충·효·열’이라든지, 더 나아가서 ‘권선징악’이라든지, 극히 한정된 추상화된 주제를 구체적으로 글로 나타내기 위해 인물의 설정이나 사건 등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즉 어떠한 형태로든 모든 문학작품은 비슷한 형태의 주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다만 이러한 주제를 나타내기 위해 표현과 내용이 다양해지는 것이다.다음으로 ‘갖가지 폐단’으로 지적되는 사항은, 유형성으로 인하여 빼어난 작품이 없다느니, 갈등구조의 단색성이 강하다느니, 내면세계의 갈등묘사를 여실히 표현하지 못하였다는 등, 결국 사실성의 결여 등등으로까지 지적되는 것으로, 이 갖가지 폐단이 주제의 유형성에서 기인되었다고만 보는 견해도 잘못이라 생각된다. 이는 ‘권선징악’이라는 유형성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타 요인을 말미암은 것이라 생각된다. 주제는 주제일 따름이지, 그 이상으로도 그 이하로도 논의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즉 갖가지 부정적인 폐단이라는 것은 주제와는 관계없는 고전소설의 시대성에 기인하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문제이지, 주제 때문에 그러한 폐단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인물·사건·배경 등 여러 구성요소나 제재 등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주제 때문에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소설의 주세를 윤리적 차원에서 보면 이것으로 인하여 소설은 일정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권선징악은 유·불·도 사상 내지는 인간 본성에서 유래된 참다운 주제로 받아들여져야 하고, 주제가 권선징악이기 때문에 고전소설이 가치가 없다고 파악해 온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는 반드시 타당성을 지니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2) 권선징악의 개념과 선악의 문제‘권선징악’이라는 개념은 가리키는 대상과 실체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선이 승리하고 악이 패망한다는 인류 보편적 관념’, ‘고소설의 일반적 주제’, ‘문학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