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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맛보기 전엔 죽지 마라 서평, 독후감
    “죽어라”, “죽지마라”누군가가 당신에게 이렇게 명령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난 지나가다가 문득 누군가가 “죽지마라” 라고 소리친 것을 들었고 그대로 멈추었다. 그리고 내 손엔 책 한 권이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어떤 남자가 자전거를 타다가 지쳐 배고픈 나머지 무엇인가를 열심히 먹는 장면을 표지로 하고 있었다. 그리곤 그 위에 떡하니 박혀있는 극단적인 단어, ‘맛보기 전엔 죽지마라’, 처음 봤을 때 조금 섬뜩했지만 책을 펴는 순간 모든 것이 평온해졌다. ‘이시다 유스케’ 라는 평범한 일본인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그리고 차분한 책의 차례들, 300쪽의 여느 책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책이었다. 많고 많은 책 중에서 왜 하필 그런 책이 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재미있는 여행이 될 것 같았다.‘맛보기 전엔 죽지마라’ 라는 책은 일본인 이시다 유스케가 지었으며 내가 가지고 있던 책은 홍익출판사에서 2007년 9월 7일에 출판한 것으로 처음 인쇄한 것인지 겉표지에서부터 오타가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고, 희한하고, 이상한 각국의 특별요리 73개!’ 라고 말이다. 뭔가 빈틈이 보이는 부제목, 마음에 들었다.이 빈틈이 보이는 책의 저자는 아까 말한 이시다 유스케라는 일본인으로, 1969년 일본의 와가야마 현 시라하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전거로 와가야마 현을 일주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여행의 세계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근무하다가, 1995년에 퇴사하고 세계일주의 꿈을 이루려고 비행기에 오른 것이 여행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3년 반 뒤에 귀국할 예정이었는데 여행이 너무 재미있어서 여행은 7년 반 동안 이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난 와가야마 현의 시라하마가 어딘지도 모르고 이 사람이 무슨 회사에서 뭔 일을 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서 자기가 이룬 것들을 그냥 훌훌 털어버리고 갑자기 떠나버린 것이 무언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자전거로 세계 일주를 한다? 이런 결정은 마음만 먹으면 결국 그것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보통 책들은 서론, 본론, 결론이니 뭐니 해서 정해진 틀에 갇혀 있다는 성격이 크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것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글쓴이의 자유분방한 성격 탓일까, 전에 말한 것처럼 이 수필은 프리스타일이다. ‘무슨 음식이 있는데 이 음식은 어떤 것에서 유래했고 이 음식으로 알 수 있는 이 지역만의 특색은 무엇무엇이다.....’ 하는 것이 보통의 책들이라면 이 책은 ‘여길 갔는데 무슨 음식을 먹었고 맛은 어떠했다. 배탈이 날까봐 걱정되었다.’ 였다. 결국 이런 이야기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쳐보라는 이야기였을까, 난 그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정해진 틀은 없지만 그러한 이야기 속에서 진실로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이 책을 읽으며 나만의 생각과 글쓴이의 생각을 비교해보기로 하였다. 어떤 면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저러한 면에서는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틀에 박힌 것을 싫어하는 글쓴이의 글에 틀에 박힌 생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고, 자기 혼자만의 생각으로만 평가한 것들에 대해 여러 방면의 시각을 제시할 수도 있다. 결국 난 어느 일관성 있는 시각을 정하지 못했다. 만약 정했다면, 그것은 그때그때마다 글쓴이와 같거나, 혹은 다른 관점으로 글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말이 내 생각으론 옳다면 옳다고, 아니야 이건 무언가 틀렸다면 틀렸다고 할 작정이다. 결국엔 글쓴이의 상황과 똑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 하나의 핑계를 덧붙인다면, 이렇게 자유분방한 내용의 책에 딱딱한 어느 일관된 관점을 부여하기 싫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출발한다. 알레스카로, 그리고 자전거 일주를 시작한다. 처음 도착한 알레스카 부터 유스케는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든다. 마켓에 들어갔는데 버섯같이 물컹물컹한 당근에 시들대로 시든 야채들, 어린아이 주먹만 한 양파 몇 개, 그것도 감촉이 홍시마냥 물컹물컹 하였다. 정말 대책 없는 곳에 와 나라로 북서쪽으로는 멕시코, 동쪽은 벨리즈, 남동쪽은 온두라스, 남서쪽은 엘살바도르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1821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커피 재배로 국가 경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독재정치와 쿠데타가 빈발하는데다 좌우 게릴라의 대결이 격렬해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다. 그러니 당연히 요리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아무 음식이나 일단 배를 채우고 보는 습성이 과테말라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다. 유스케는 음식에 대해서 한껏 불평을 늘어놓은 다음 다시 반성하게 된다. 바로 사람들의 순박한 민족성 때문이다. 결국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올 테지만 한 국가의 단면만 보고 그 나라를 평가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걸 계속 느낀다. 유스케는 과테말라를 지나서 남아메리카로 들어선다.끝없이 이어진 바나나 숲, 가도 가도 끝이 없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바나나가 필리핀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바나나 수출량 세계 1위는 바로 유스케가 지나가는 바나나 숲이 울창한 에콰도르이다. 유스케는 이러한 대규모적인 바나나 농업 덕분에 현지인들의 생활은 넉넉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는 빛 좋은 개살구다. 이 거대한 플랜테이션은 100% 미국 자본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당연히 이 농업의 노동력은 현지에서 충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농업으로 매년 바나나를 엄청나게 생산해야 한다면 토양이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지 의심이 갔다. 만약 토양의 힘이 약해지면 미국 자본은 떠날 것이고 에콰도르에는 무엇이 남는 것일까, 최근 에콰도르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이 문제가 국가 최대의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다고 했다. 에콰도르로서는 이렇다 저렇다 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끝없는 바나나 숲을 지나서 유스케는 페루에 도착한다. 페루에서 떼강도의 습격도 당하고 수난을 겪지만 일본계 페루인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어서서 안데스 산맥을 넘고, 볼리비아 사막을 지나 칠레로 들어선다. 그리고 칠레의 숲속에서 비를 피하던 중 어느 매점에 들르게 된다. 매점엔 잡다한 잡화들이 놓히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었다. 거칠고, 예의 없고, 그러면서도 돈 앞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 사람들만 보다가 처음으로 매우 조용한 이스라엘 여행객을 본 것이었다. 유스케는 이 사람을 보고 미처 몰랐던 국민성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고 하면서 반성하게 된다. 난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유스케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놓친 점이 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뭉치면 엄청 시끄러운 반면 혼자 있을 땐 너무너무 얌전하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고 있었다. 뭐 내가 직접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여행객은 모든 여행객 사이에서 거의 왕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할 말 다한 듯싶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독자들에게 많은 여행 정보를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랬다저랬다 하면 신뢰도가 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그렇게 칠레를 뒤로하고 아르헨티나로 들어서게 된다. 아르헨티나의 낚시천국이라 불리는 푸에고 섬에서 송어낚시를 하는데 왜 이렇게 부러운지, 난 사실 낚시를 엄청 좋아한다. 루어낚시라는 인조 미끼를 쓴 낚시를 주로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낚시는 너무 힘들다. 서로 싹 쓸어버리려는, 새끼는 방생해주는 그런 것이 전혀 없어서 그런지 어종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인들에게 배웠으면 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조금만 여유롭게 생활해보자는 것이다. 주말만 되면 방파제에 틈도 없이 들어서서 서로 줄이 엉킨다는 등 방해된다는 등 고기도 못 잡으면서 싸움하기 일쑤며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는 낚시가 아니라 서로 먼저 잡아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심보들이니 당연히 외국인들의 그러한 성격들이 부러울 수밖에, 그러한 성격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호화롭게 산다고는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행복은 문명과 모두 정비례하지만은 않는 것이다. 그리곤 혼자만의 생각에 잠시 잠겼다.다시 책에 빠져들었을 때 책은 어느덧 중반부를 넘어가고 있었다. 유스케는 아르헨티나에서 와인공장을 견학하고, 그 후 대규모의 양봉 농가를 보고 너가게 된다.유럽의 덴마크에 도착하자마자 유스케는 엄청난 물가에 입이 쩍 벌어지게 된다. 결국 제대로 된 것은 먹지도 못하고 재빨리 덴마크를 벗어나 노르웨이로 내달려 핀란드, 헝가리, 체코, 그리고 벨기에에 도착한다. 벨기에에 도착할 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참이었다. 거기서 인심 좋은 한 여행객의 가족들을 만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잔뜩 받고, 유스케의 가족들에게까지 우편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내서 유스케를 곤란하게 만든다. 그만큼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정은 우리나라에만 있다고 항상 그렇게 배워왔다. 그러나 그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그건 자기합리화에 불과하였다. 어느 나라에나 정은 존재하며, 단지 적고 많음의 차이지 없고 있음의 차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벨기에를 떠나 런던, 프랑스, 마지막으로 스페인에 도착한다. 스페인에는 술집을 ‘바르’ 라고 부르는데 BAR의 스페인 식 발음이다. 유스케는 ‘신지’라는 동갑내기 여행객과 같이 항구 도시 알헤시라스에서 바르에 들르게 되고 싼 음식 가격 덕분에 바르 내의 거의 모든 안주를 다 맛보게 된다. 그렇게 기분이 좋아져서 일어섰지만, 주인 여자에게 요금을 듣는 순간 술이 번쩍 깨게 되었다. 계산을 실수한 탓인지 예상 가격보다 엄청나게 비싸게 나온 것이다. 주인 여자는 다음에 올 때 줘도 괜찮다고 하지만 유스케와 신지는 내일 스페인을 떠날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여자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괜찮아. 다음에 올 때 줘.” 난 이 이야기를 읽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렇게 둘은 유럽을 떠나 아프리카로 향하게 된다.아프리카의 모리타니에 도착해 달콤한 차를 맛보고, 세네갈을 지나 기니를 거쳐 말리에 도착한다. 아프리카에 대한 유스케의 이미지는, 빼빼 마른 아이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것은 어디까지나 아프리카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유스케는 모르고 있었다. 유스케가 아프리카의 노천식당에서 밥을 먹고 일어나는 순간, 주변에서 놀던 아이들이 일제히 테이블로 달려가 남긴 음식.
    독후감/창작| 2010.12.12| 7페이지| 1,500원| 조회(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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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식으로 알아본 서양의 문화 - 멕시코
    목 차서론식생활, 그것으로 문화를 알아보자본론1. 역사적으로 본 멕시코의 음식 문화Ⅰ. 아메리카(토착) 원주민의 식생활Ⅱ. 원주민문화 + 스페인문화 + 프랑스문화= 혼혈의 멕시코 음식문화2. 음식으로 본 멕시코의 문화Ⅰ. 옥수수의 나라, 멕시코Ⅱ. 멕시코의 화끈한 맛, 고추Ⅲ. 멕시코의 술, 데킬라Ⅳ. 멕시코의 전통 음식들결론음식으로 본 멕시코, 멕시코의 문화의, 식, 주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식, 먹는 것은 내가 볼 때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옛날 사람들은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고 옷도 홀라당 벗고 살았지만 잘 살아 남았다. 뭐 추운지방 사람들은 모르겠다만 일단 뭐든 먹어야 옷도 만들고 집도 지을 힘이 나지 않겠는가.음식은 흔히 문화라고 한다.뭐 아무생각 없이 음식을 먹는것으로만 생각한다면 먹고 똥만싸겠지만 음식에 대하여 좀 더깊이 생각하게 된다면 음식하나로 그 음식의 배경과 문화뿐 아니라 그 음식을 먹는 지역의 자원, 기후, 풍습, 주변국의영향, 주민들의 감성까지도 엿볼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음식은축제나 종교 의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흔히 “네가 무엇을 먹는지 말해 주면, 나는 네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다.” 라는 말은 그 지역의 고유한 음식을 통해 그것을 먹는 사람의 문화의 정도, 경제 상태, 사회 계층을 짐작할 수 있음을 입증해 주는 말이다. 이렇듯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성격이나 심리적 현상이 다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생물학적 발달까지도 음식과 연관이 있다. 음식만 보더라도 그 나라의 전반적인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식습관은 다양한 문화 중에서도 뿌리가 깊어 쉽게 변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이다.본론으로 들어가서 난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 매콤한 멕시코 음식을 조사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콜럼버스 이전 시대인 토착 원주민 문화부터 스페인 정복기, 스페인인들에 의한 식민 통치기, 해방 후 프랑스 음식의 영향을 받는 막시밀리아노 통치기간,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축적되어 전해지는 현 만들어서 집집마다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평민은 물에 옥수수 가루를 타서 마셨고, 사제들이나 고위층들은 풀케(Pulque : 선인장 밑둥을 잘라 나온 액체를 모아 발효시킨 술)를 마실 수 있었다. 또한 옥수수 말고도 만디오카, 유카, 고구마, 강낭콩, 감자, 호박, 땅콩 등을 재배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살펴 볼 때 아메리카 원주민이 살던 아메리카의 기후는 대충 건조 기후, 고산 기후, 온대 기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음료수와 술을 즐겨 마셨는데, 모두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유카와 바나나에서 얻은 마사토, 파라과이에서 가장 많이 마시는 마테, 용설란에서 얻은 풀케, 옥수수를 갈아 발효시켜 만든 치차, 카카오로 만드는 초콜릿 등이 있었다. 지금도 원주민들은 이러한 음료수를 집에서 만들어 마신다고 한다. 그들은 소금, 바닐라, 고추 등을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한 조미료로 사용했으며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흥미롭게도 아메리카에서는 종교적 이유로 사람의 고기를 먹는 식인의 풍습이 있었는데 이러한 행위는 종교 행사의 일환으로 행해졌으며 사람의 고기는 일종의 성체와 같은 것이었다.4월과 5월에는 여신 치코메코아를(Chicomecoat : 보호의 여신)모양의 토르티야를 만들어 그 속에 콩을 채워 먹었고 음료로는 치아(Chia)차를 마셨다.7월과 8월에는 우이칠로포츠틀리(Huitzilopochtli : 태양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에는 거대한 조각상만한 타말을 만들어 그 속에 칠면조를 통째로 넣거나 집에서 키운 개를 넣기도 하였다. 그리고 꽃이나 깃털로 장식을 하고 몸체를 만들었는데, 이는 전사나 제사의 희생자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타말들은 사제들만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Ⅱ. 원주민문화 + 스페인문화 + 프랑스문화= 혼혈의 멕시코 음식문화오늘날 멕시코 음식문화는 원주민 음식문화와 스페인 음식문화의 혼합으로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의 중남미 정복은 ‘메스티조’ 라는 새로운 인종을 만들어 냄과 동시에 음식문화에서도 혼합된와 수녀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수도원 주방의 수녀들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전해진다.이렇듯 멕시코 음식문화에서 스페인의 영향과 함께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가톨릭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원주민 토착 음식은 스페인의 중남미 정복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예를 들면 마을 공동의 행사가 끝난 후 음식을 참석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데 이때 일반적으로 교회에 가서 음식을 바치고 미사를 드린다. 또한 부활절 주간의 마지막 목요일에 최후의 만찬을 시행하는데 성당 앞마당에 긴 탁자를 놓고 12제자를 상징하는 좌석을 배치한다. 12제자를 현신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적게 먹고 예수를 상징하는 사람은 금식을 한다. 이 모든 것이 멕시코 음식문화에 끼친 가톨릭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는 이후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데 그중 특히 프랑스의 영향력을 많이 받아서 멕시코의 여러 문화에 많은 자취를 남기고 있다. 음식문화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반 스페인 정서와 함께 프랑스 음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특히 유럽의 문화와 사상을 동경했던 멕시코 상류층들은 옥수수 대신에 빵을 주식으로 애용했다. 그래서 오늘날 멕시코의 유명한 제과점이나 제빵점들은 대부분 프랑스식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1838년 프랑스가 외채 문제로 멕시코를 침공하여 발발한 양국간의 전쟁을 빵들의 전쟁(Guerra de los pasteles)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멕시코인의 음식문화에 끼친 프랑스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멕시코인들의 하루 식사는 이러한 문화들의 변화에 따라 같이 변화해왔는데 원주민시대의 하루식사는 아침과 저녁 두 번을 먹었으며 식민 기간에는 성당의 종소리를 기준으로 하루에 다섯 끼 식사를 하였다. 오늘날은 일반적으로 세 끼를 먹는다고 한다.2. 음식으로 본 멕시코의 문화Ⅰ. 옥수수의 나라, 멕시코메소아메리카(중앙아메리카)의 문화를 흔히 ‘옥수수문화’라고 한다. 이는 기원전 7000년경부터 재배하기 시작한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심의 농경문화는 토르티야(Tortilla)라는 음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옥수수 가 루를 반죽하여 동그랗고 넓적 한 모양으로 구운 것으로 멕시 코의 대표 음식인 타코의 재료 가 되기도 한다. 타코는 멕시 코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식으 로 토르티야에 여러 가지 속재 료를 넣고 쌈처럼 싸서 먹는 것으로 이 종류는 수십 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나초는 토르티야를 기름에 튀겨서 치즈를 녹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멕시코인들은 이렇게 맛있는 타코를 먹기 위해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스페인 식민 치하에서의 엄격한 신분 제도 시절엔 귀족 계급에서는 타코를 먹지 않으려 했으며 옥수수로 만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경멸했다고 한다. 식민 말기에는 크리오요(중남미계 백인)들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함에 따라 다양한 음식들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 때 타코도 많이 찾게 된다. 독립 후에는 이 우유부단한 크리오요들이 타코를 경원시하고 옥수수로 만든 음식 대신 밀가루 음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또한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투쟁에서도 타코의 선호 여부가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보수주의자들은 밀가루 음식, 자유주의자들은 타코와 토속 음식을 옹호하게 되었다. 이때엔 보수주의자들이 집권할 경우 타코의 요리법이 멕시코 특선 요리책에서도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20세기 초, 프랑스 요리가 물밀듯이 들어오고 이때 타코는 요리책에 오르지도 못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또한 당시 집권층은 타코를 불결한 것으로 보았으며 국가가 낙후된 이유도 타코 때문이라 하였다. 또한 국가가 발전하려면 프랑스빵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런 수모를 겪던 타코는 1910년 멕시코 혁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토속 음식 배격 성향을 일거에 반전시킨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때엔 전국 각지를 대표하는 타코가 출현하기도 하였으며 아예 타코 먹는 시간을 만들려고까지 하였다.결국 오늘날 타코는 이제 멕시코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음식이 되었다. 흔히추장에 대한 생각과 비슷한데, 몰레를 싫어하면 반역자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몰레는 멕시코인들의 사랑을 받는 음식이라 하겠다.몰레의 기원을 살펴보면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멕시코 음식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친 수녀원에서 만들어 진다. 17세기경, 푸에블라 지방의 산타 클라라 수녀원의 수녀들은 대주교님의 갑작스런 방문을 앞두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려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음식을 담당하는 수녀가 여러 생각을 해 보았지만 마땅히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고 결국 주교님의 방문이 임박하자 이 수녀의 보조수녀인 어린 수녀가 다급한 나머지 식품 창고에 있던 여러 재료들을 있는 대로 멧돌에 넣고 갈기 시작했다. 음식 담당 수녀가 그것을 보고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냥 “갈아요(Mole)” 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몰레의 유래이다. 어쨌든 운 좋게도 그것의 맛이 워낙 뛰어나서 칠면조 삶은 것에 이 몰레 소스를 부어서 내놓았더니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몰레는 전 국민의 입맛을 사로잡게 되었다.또한 멕시코의 속담에도 몰레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내 몰레다(Es mi mero mole.)”라는 말은 가장 좋아하거나 자신 있는 것을 나타내며, “몰레에 참깨(Ajonjoli en todos los mole)”는 “약방에 감초”라는 말이며, “몰레에 고추를 넣다(Echarle chile al mole)”라는 말은 무엇이 이제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고추로 만든 몰레소스는 멕시코의 전통 음식을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Ⅲ. 멕시코의 술, 데킬라현대 멕시코인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주류로는 맥주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전통주로는 마게이(Maguey)즙을 발효시켜 만든 우리나라의 막걸리에 해당하는 ‘풀케’를 들 수 있다. 서민들이 주로 마시는 풀케는 맥주가 들어옴에 따라 소비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우리의 막걸리처럼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풀케와 함께 멕시코를 대표하는 술은 ‘데킬라(Tequila)’이다. 10년생 이상의 아가베(.
    인문/어학| 2010.10.08| 9페이지| 1,500원| 조회(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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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전과 한국전쟁
    냉전이란 무엇인가1947년 3월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오늘날 발트 해에서 아드리아 해까지유럽을 둘러싼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있다.”고 말했다. 이는 곧 세계가 서로다른 두 진영으로 나누어져 있음을선언한 것이다. 그 후 미국의 상하 양원협동 회의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이공산주의를 저지하는 데 지도적인 역할을해야 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이어 6월, 미국은 서유럽 부흥을 위한마셜 계획을 실행해 자본주의 진영의 결속을 강화하였다.소련과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1947년 7월 물자교환협정 및 통상차관협정을 체결했다. 그리고 1948년 4월 서독이 독일 점령 지역에 대한 통합 단행과 통화개혁을 실시하자 이에 맞서 소련은 베를린을 봉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냉전의 시작이다.왜 냉전이 시작되었는가전통주의자들에 따르면 소련은 공격적이고 팽창적이었고 종전 후에도 소련은 동유럽에 오랫동안 군대를 주둔시켰다. 전통주의자들의 견해를 비판하는 수정주의자들은 냉전은 소련의 팽창정책보다 미국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트루먼 행정부의 호전적인 외교정책과 그 배후에 있는 군산복합체의 이윤 동기 때문이라고 했다.그러나 1980년대 이후 등장한 탈수정주의자들은 냉전의 시작에는 미소 모두 책임이 없기 때문에 전통주의나 수정주의 모두 틀렸다고 본다. 탈수정주의에 따르면 냉전은 종전 후 세력균형의 양극체제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후 세계의 주도권이 무너진 상태에서 서로 팽창정책을 채택한 것이고 이러한 양극체제는 상대를 증오하는 적개심의 정치가 재생산된다고 생각한 것이다.냉전속의 열전, 한국전쟁이러한 냉전체제의 대립과 갈등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1948년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된 것은 곧 냉전을 의미하였다. 이후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전쟁은 남북한이 벌인 내전일 뿐만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진영이 군사적 대결을 벌인 국제전이기도 했다.한국전쟁은 왜, 어떻게 일어났는가정치학에서 전통주의 입장은 전쟁의 기원을 소련의 팽창주의적 야욕에서 찾는다. 반면 수정주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서 찾는다.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는 모두전쟁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소련 해체 후 소련의 기밀문서가 공개되었고 북한이 북침 위협에 맞서 통일을 명분으로 남한에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여기까지가 냉전의 시대가 끝난 후에야 밝혀진 한국전쟁에 관한 잠정적 결론이다.냉전시대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실은 정치적 논쟁이었다. 구체적인 증거없이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가설만 난무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연구의 초점은개전에 맞춰졌다. 누가 먼저 침략했는지,소련의 팽창정책 때문인가 미국의 봉쇄정책 때문인가 논쟁은 정치 공방으로흘렀다.하지만 이러한 한민족간의 살육은 누가 먼저 쏘았는가를 넘어서 왜 전쟁이 일어났는가에 답해야 하며 누가 무엇을 얻었는가에 답해야 하는 것이다.냉전은 공포의 균형베를린에서 시작된 냉전은 극동의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을 거치면서 유럽과 세계로 확대되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등 12개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를 결성했으며 이에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진영 국가들은 군사동맹인 바르샤바조약기구를 결성했다. 양국은 막대한 군사비 부담, 동맹 유지비 부담이라는 희생을 치르며 ‘냉전’을 유지했다.냉전의 지속은 곧 군비 경쟁을 부추겼고 1962년 10월 소련이 핵미사일을 쿠바에 설치하려고 하면서 두 초강대국이 전쟁 일보 직전까지 치닫는 극한상황이 발생했다. 이러한 세력균형은 핵무기에 의한 공포의 균형이었다. 또한 미국과 소련은 국지전으로 벌어지는 재래식 전쟁에도 개입했다. 베트남 전쟁이 대표적인 경우였다.이러한 냉전시대에도 긴장이 완화되는 시기가 있었는데 이는 1969년 미군의 베트남 철수를 선언한 ‘닉슨 독트린’ 을 계기로 하여 핵확산 금지조약, 전략무기제한협정 교섭 등으로 긴장완화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전격적으로 방문해 미소 사이의 데탕트가 실현되었다. 이후 핵전쟁 방지 협정, 서독-소련의 불가침협정, 1973년에는 동서독 국제연합 동시가입이 이루어지고 마침내 1975년 7월 헬싱키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 35개국 정상회담’이 개최됨으로써 동서 간의 데탕트는 최고조에 이르렀다.그러나 1980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내 친소 정부를 지원하면서 데탕트는 깨어졌다. 이로 인해 ‘제2의 냉전’이 발생하여 미, 소 양국은 군축협상을 하면서도 제 3세계 국가 내전에 개입했다.1980년 개최된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이 불참하고, 1984년 L.A 올림픽에는 소련과 공산진영이 불참해 반쪽 올림픽을 만들었다. 이후 이러한 극단적 대결은 1983년 미국에서 출발판 한국의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영공에서 격추되는 사건을 낳았고 냉전은 절정에 달하였다.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한 때에냉전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1989년 11월 9일 동독 시민들에의해 베를린 장벽에 무너진 것이다.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91년에소련이 갑작스레 무너졌다. 이로써사실상 냉전체제는 붕괴된 것이었다. 이후 동유럽에서는 잇따른 민주화 운동으로 냉전체제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독일의 동방정책이란 무엇인가냉전체제를 사라지가 한 결정타를 날린 동독의 붕괴와 독일 통일은 어떻게 된 일일까? 동독과 서독은 남북한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냉전체제속의 대결상태에 있었다. 서독의 초대 총리 아데나워는 미국 지향적인 ‘힘의 정치’를 추진하였고 1955년에는 동독과 외교를 맺는 나라와는 일절 외교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서독이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10년 뒤, 서독은 동독의 고립과 수출 확대를 노리고 동유럽에 대한 접근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으로 독일 재통일의 가능성이 어렵게 되자 서독은 현실을 승인하는 ‘동방정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당선되면서 서독의 외교에 새 바람이 불었고 브란트는 동방의 공산진영과 수교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할슈타인 원칙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동유럽에 접근한 것이다. 이후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서구 편향 외교를 보완했고 긴장완화에 일조했다. 이는 분단현실을 인정하는 현상유지 정책이자 재통일로 가는 중요한 방향전환이었던 것이다.서독은 서방 결속의 확고한 기반을 만든 후 동서독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또한 독일이 강대국으로 다시 부상하는 것을 경계하는 서방 국가들의 의구심을 누그러뜨리는 외교 전략이 필요했다. 이러한 동방정책을 유지하는 데는 한스디트리히 겐셔란 인물의 공이 컸다. 그는 1975년 헬싱키 협정을 통해 양보할 것은 양보하면서도 ‘독일 민족은 통일 요구와 함께 자유로운 자결권을 갖는다.’ 는 서독의 정치적 목표를 고수하여 헬싱키 협정에 국경의 평화적인 변경도 가능하다는 내용이 들어가게 하였다. 이에 소련은 처음에는 반대하나 결국 실제로 벌어지지 않을 거란 생각에 동의하고 이로써 통일을 위한 결정적인 실리를 얻어낸 것이었다.
    인문/어학| 2010.10.06| 5페이지| 1,000원| 조회(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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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교육론 - 교육현장에서의 3.1운동의 역사적 인식과 의미 전달
    ◎머리말1. 3.1운동의 인식을 위한 목표설정[교사가 가져야할 목표]-학습에 들어가기에 앞서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3.1운동의 이미지와 역사적인 인식에 관하여 묻고, 수준과 인식을 파악한다.-최대한 가볍게 시작하여(기초지식) 학생들의 흥미를 유도하고, 전원이 다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전개로 이끈 뒤 각자의 비판적인 의식에 있어서의 가능성을 열어둔다.-3.1운동 이전의 국외. 국내 정세의 관하여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던 세계사와 근. 현대의 우리의 역사와 함께 3.1운동의 배경이 되는 요소들을 함께 전개를 한다.-객관적이고 사실에 입증한 전개와 함께 국권피탈이전과 이후의 우리의 정세를 살펴볼 때에는 학생들과 소통할 수 있는 우리민족만의 공감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과정으로 본다.-3.1운동 이후의 문화통치로 접어든 국내 정세와 세계의 민족운동에 영향을 끼쳤던 상황과 의의를 제시하며 그 인식과 의의를 심어준다.-전체적인 이론과 내용은 실증적인 전개에 입각하되, 학생들과 함께 비판하고 3.1운동이 가지는 우리민족의 뜨거운 가슴을 함께 느끼는 수업으로서 의미를 가진다.[학생이 가져야할 목표]-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고 이로 인해, 3.1운동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안다. (국외가 미친 영향)-청.일 전쟁부터 국권 피탈까지 일제 침략 과정을 분석. 정리할 수 있다. (국내가 미친 영향)-일제 식민 통치 정책의 내용과 특징을 단계별로 이해한다.-3.1운동의 전개와 그 상황의 분위기를 알고 이해한다.-3.1운동 이후, 임정의 수립과 문화통치의 내용을 이해하고 세계의 민족운동의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 의의를 안다.2. 국외. 국내 상황으로 보는 3.1운동의 개관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날이다.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와 일제의 억압적이고 수탈이 이루어졌던 상황에서 해외의 우리 동포도, 국내의 우리민족도,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을 외쳤던 식민통치의 상황과 국권을 잃은 독립의지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는 점과 3.1운동 이전의 숨죽여 전개하던 각계각층의 작은 독립운동들이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3.1운동이 독립운동의 분수령이라고도 표현하며 아울러, 학생과 민중들이 민족운동에서 자신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깨닫고, 학생 운동, 농민. 노동 운동에 나서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3.1운동은 독립운동의 분수령 이라고도 하지만 민족의 저력을 국내. 외 로 널리 알리며, 우리민족의 독립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어, 1910년대의 무단통치에서 1920년대의 문화통치로 넘어가는 일제 식민통치체제의 분수령이라고도 할 수 있다.대외적으로는, 3.1운동이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와 중동 지역의 약소민족들에게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는데 중국의 5.4운동을 비롯해 아시아 여러 민족의 해방운동에 영향을 끼쳤음을 살펴본다.또한 3.1운동이 지도자층의 자진체포 등으로 미처 조직적이지 못하고 체계적으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억눌렸던 각계각층의 산발적인 운동으로 일어났지만 이를 통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어 상하이에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 하게 된다.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민족운동의 본격적인 전개와 문화통치로 넘어가는 분수령으로서, 민족의 저력을 널리 알려 아시아 약소민족들에게 희망이 되어 해방운동으로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임정의 수립까지. 3.1운동의 단적인 부분을 살펴볼 것이 아닌, 전개 과정과 결과를 통해 국내. 국외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 의의를 살펴보며 그에 따른 비판과 역사적인 인식을 크게 함양할 수 있는 계기로 전개해야 한다.◎서론1. 민족의 가슴에 불씨를 올린 국외. 국내의 정세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이전의 어떠한 정세로 어떠한 영향으로, 민족의 가슴에 불씨를 올려놓았을 지의 과정을 마인드맵 형식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밖에서의 영향을 먼저 살펴본 뒤, 내부의이러한 러시아의 사회주의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확산과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해 지지를 선언 하는 것 을 표방하며 그 영향력을 확대 하는데 1910년대에 가혹한 식민통치 아래 있었던 우리민족에게 이러한 윌슨의 원칙을 통해 본 ‘민족자결주의’ 와 러시아 혁명을 통해 선언한 ‘독립운동의 지지’ 에 큰 힘을 얻어 3.1운동을 일으키게 되는 정신적으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이로써 제 1차 세계대전은 4년간의 전쟁을 통해 세계 질서를 다시 잡고 식민지의 개편도 이루며 여러 사상과 영향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이 되는 중요한 사건으로 알 수 있다.국내의 정세♧일제의 침략과 국권의 피탈[청. 일 전쟁~국권피탈]3.1운동 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바탕이 되는 국내의 상황을 청. 일 전쟁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한반도는 각 열강들의 각축전이 되어오고, 동양 3국 중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점차 제국주의적 대외진출을 도모하는데 청과 계속적으로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어 왔으나 1894년 본격적으로 전쟁을 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하며 지배권의 입지를 굳히고 청에게 배상금과 요동반도를 할양 받는데 이 당시 요동반도의 할양을 저지하고자 나선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의 공동 간섭을(3국 간섭) 하게 되고 이제 한반도의 지배권을 일본과 러시아가 분쟁을 하게 된다.결국 1903년에 러시아가 한반도를 39도선으로 분할을 제시하였지만 일본이 이를 거절하였고, 1904년에 일본이 여순항 을 기습 공격하며 러. 일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일본은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과 미국의 전쟁경비 지원의 힘을 얻어 전쟁을 전개 하게 된다.결과적으로 러시아 발틱함대의 패전으로 일본의 승리가 확신이 되면서 청과 러시아를 물리친 일본이 한반도의 지배권을 굳히게 되는 것이다.러. 일 전쟁 이후, 한반도의 지배를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는 여러 조약들을 맺게 되는데 첫 번째로미국과 맺은 ‘가쓰라태프트조약(1905.고 우리 민족의 정치. 사회. 경제 및 일상적인 생활까지도 억눌렀다.이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내용[길가에서 놀던 아이들이 긴 칼을 찬 일본 순사가 나타나면 순식간에 몸을 숨겼다. “울면 순사가 잡아 간다” 는 말에 울던 아이는 울음을 뚝 그쳤다. 왜 아이들은 이렇게 순사를 무서워했을까?”]-근현대사 ‘생각열기’ 中-♧1910년대 경제수탈(인적. 물적 자원의 수탈의 내용)1. 토지조사사업(1912~1918): 식민통치의 경제기반마련을 위한 일제의 경제 수탈1)목적-명분: ‘공정한 지세 부과, 토지 소유권 보호, 토지 생산력 증진’ 등으로 선전함-실제 의도: ‘식민통치의 경제기반 마련’[1.토지 및 식량 수탈의 기반을 조성한다. 2.일본인 토지 소유의 합법화3.토지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여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자금 마련]2. 과정1)토지조사령 발표(1912)- 막대한 자금과 인원을 동원하여 전국적으로 토지 조사 사업 실시2)내용: 소유권 조사, 토지 가격 조사, 토지 종류(지목)및 지형 조사3)원칙: 기한부 신고제3. 결과1)토지약탈: 미신고 토지, 왕실. 공공 기관. 마을이나 문중 소유의 토지등을 조선 총독부가 차지[짧은 신고기간과 까다로운 신고 절차와 신고 양식, 일본에 대한 반발심 등으로 미신고자가 많았음]-> 이를 이용한 일본.2)식민지지주제: 조선인 농민들은 경작권, 영구 임대 소작권, 입회권 등을 박탈 당함[기한부계약제 소작농으로 전락, 만주. 연해주로 이주, 화전민화 됨]3)일본인 농업이민의 증가: 조선 총독부나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서 토지를 헐값으로 불하 받음4)총독부의 지세수입 증가4. 산업의 침탈1)기간 산업 독점: 철도, 항만, 통신, 항공, 도로의 총독부 운영2)전매제: 인삼, 소금, 담배의 총독부 전매제 실시로 민족 자본의 위축 초래3)산업착취: 회사령, 산림령, 어업령, 광업령 등으로 착취※실제의도를 통해 본 토지 조사 사업토지 조사 사업을 시행하면서 우리가 ‘실제의도’에 눈여겨보아야 한다.겉으로 내세운 토지 조사 사업의 목적은 ‘사1.단체: 선명단, 조선 국권 회복단, 자립단, 기성단, 송죽회 등 활약2.활동: 교사, 학생, 종교인, 농민, 노동자, 여성 등 사회 각계각층 참여※의병투쟁: 채응언의 활약, 황해도 헌병 파견소 공격 등 항일 유격전 전개2. 국외에서의 민족운동: ‘독립운동기지’ 건설, 민족 학교 설립, 항일 단체 조직-만주지역의 독립 운동: 신민회가 시초로 해외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이로서 만주의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게 된다. 서간도에는 신민회가 주도하여 건설하였고 경학사와 부민단을 편성하고 신 흥 강습소를 설립한다. 또한 북간도에는 간민회와 중광단, 서전서숙, 명동학교 등을 설립하였고 북 만주에는 이상설등이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게 된다.-연해주의 독립 운동: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권업회를 세우고, 이상설. 이동휘를 정. 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정부를 조직하며, 3.1운동 이후에는 대한독립의회를 결성하게 된다.또한, 미주지역과 일본과 중국에도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국외에서 민족운동의 터전을 마련하는 준비를 하게 된다.◎본론1. 3.1운동의 전개 [배경, 과정, 결과][3.1운동의 국제적. 국내적 배경과 전개과정의 단계별 특징. 역사적 의의와 한계를 알아본다.]♧3.1운동의 배경1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사상과 인식이 한반도에 들어오는데먼저,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의 여파가 들어오게 된다. 이는 레닌의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 지원’을 선언하며 우리 민족에게 큰 힘으로 작용하고, 두 번째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제창에 따른 그 의미에 힘을 얻어 민족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먼저, 1차세계대전을 통해 세계를 다시 정리하려고 하였던 베르사유체제에 따른 ‘파리강화회의’에우리의 민족 대표를 파견하게 된다. 신한 청년당의 김규식을 파견해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고,만주 지역 동포들의 독립선언 발표를 시작으로 전개 되었는데 이는, 조소앙이 기초한 선언서로서,사기와 강박으로 이루어진 일본과의 병합은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
    인문/어학| 2010.10.06| 14페이지| 2,000원| 조회(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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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BS 다큐프라임 - 미래의 학교 감상문
    EBS 다큐프라임 - 미래의 학교 감상문영어 칩을 꽂으면 영어를 할 수 있다? 오우 난 이 제품을 바로 살 것이다.미국의 레이 커즈와일이란 사람은 글을 읽어주는 신기한 기계를 만들었고 그가 말하는 미래는 기계들이 인간 수준으로 높아져 인간과 기계가 합쳐진다고 하였다. 인간 두뇌 속에 나노 봇이 돌아다니고 환상과 현실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단다.유럽은 어떨까? 프랑스에는 좌파와 우파의 사랑을 모두 받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바로 자크 아탈리란 미래학자이다. 그가 말한 미래는 시장의 제국이다. 2050년엔 오로지 돈을 가진 자가 최고가 되고 국가가 사라지며 빈번한 전쟁 속에서 나보다 남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형태의 민주사회를 만들어간다고 한다. 그는 미래의 학교는 사회보다 늦게 변하므로 소외되거나 신뢰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미래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면 먼저 VR(Virtual Reality)을 볼 수 있다. 이는 가상현실로 사람들은 온라인상에서 자신의 분신인 아바타를 가지고 수업을 듣거나 지구 반대편의 이들과 교류를 한다. 가상에서 존재하는 것이 현실로 존재하기 시작하고 현실 교실에서 배운 것을 가상에서 경험하거나 가상에서 배운 것을 현실로 경험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 가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교육이 바로 미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두 번째로 CS(Cyber School)이다. 세계적 명문대 MIT에서는 사이버 공개 강의가 가능하다. 유학을 가지 않아도 최고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세계 모든 사람들의 MIT수준 강의에 익숙해진다면 동네 대학이 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전략이기도 하였다.세 번째로 CI(Collective Intelligence)이다. 이는 함께 협력해서 지식을 쌓아가는 교육이다. 한 사람이 궁금한 단어를 입력했는데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질문을 남기게 되고 여러 사람들이 그 단어에 대한 시시콜콜한 정보를 다 남겼고 수정이 가해지며 결국 하나의 백과사전이 완성되었다. 집단 지성은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 천 수만 명의 지식을 함께 활용해 내가 똑똑한 게 아니라 우리가 똑똑한 것이 되는 것이다. 만약 예를 들어 학교 교육과정을 교사, 학생, 학부모, 교육 전문가 등이 스스로 참여해 분산하여 업무를 한다면 어떨까?네 번째로 PH(Project Happiness)이다. 이는 미래세계가 원하는 세계의 가치 교육이다. 빠른 변화속도에 발맞추어 우리의 가치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 프로젝트는 전 세계 사람들이 모든 매체를 이용해서 행복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한 상호교류 시스템이다. 기술의 좋고 나쁨을 떠나 기술을 어떻게 이용할지 생각하고 전 세계에 의료와 기술을 보급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등 세계가 직면한 문제를 풀어가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미리 본 미래의 몇 가지 미래의 모습은 이와 같았다. 그리고 여러 각국의 학생들이 생각하는 미래의 학교도 이 네 가지 속에 있었다.영국에선 콘월의 미래 교실이라 하여 희한한 수업들을 하고 있는데 미술, 수학, 국어과목 등 여러 과목을 한 가지 주제로 배우고 있었다. 또한 교실은 앞뒤가 없어 뒤에 앉는 학생이 없다. 이건 정말 좋다. 관동대에선 이걸 꼭 실행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또한 리얼타임델파이를 이용한 2030년 교육의 변화 예측과 정책의 대응전략 모색에서 미래 교육에서 중요한 교육법을 투표하였는데 이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독후감/창작| 2010.10.06| 2페이지| 1,000원| 조회(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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