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에 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홍콩, 프랑스 합작 영화 는 한마디로 말하면 매우 감각적이다. 전체적인 미장센과 연기와 음악이 삼위일체로 이루어져 영화의 특징적인 톤을 형성했다. 홍콩의 스타일리스트 왕가위는 이번에도 , , 에 이어서 자신의 페르소나인 ‘양조위’와 작업을 함께했다. 그리고 홍콩의 상징적인 여배우라고 할 수 있는 ‘장만옥’을 여주인공으로 채택했다. 결과적으로 이 3인의 시너지는 영화를 한층 더 풍부하게 할 수 있었다.의 영어 제목은 ‘In the mood for love', 즉 ’사랑하고 싶은 분위기‘이다. 이 영어 제목은 영화의 느낌과 상당히 유사하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서정적이면서도 격정적인 사랑의 분위기가 제목에 고스란히 드러난다.그리고, 원제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사랑의 가장 황금기 시절’,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한 때’이다. 이 두 개의 뜻도 제목과 연관되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주인공 차우와 리첸의 은밀한 사랑은 아마 그들 인생에 있어서 사랑의 황금기 였을 것이다. 그리고 리첸의 모습도 아마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때였을 것이다. 왕가위는 영화 내용만큼이나 제목도 감각적으로 탁월하게 잘 짓는다.영화는 강렬한 크레딧 시퀀스로 시작한다. 빨간 배경 위에 큼지막한 하얀색 글씨로 아로새겨진 타이틀은 영화의 전체적인 부위기와 유사하다. 두 주인공의 비밀스럽지만 열정적인 사랑의 분위기는 색으로 치자면 붉은 색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또한 영화의 첫 번째 컷도 의미하는 바가 있다. 화면의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팬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른다. 이런 무빙은 속에서 심심치 않게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배경이 1960년대의 홍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감독 왕가위는 과거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과거를 재구성하고 있다. 그에게 현재는, 과거라는 필터를 통해 여과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왕가위의 ‘시간’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전작 (1990)과 (1994), 본작 에 이어서 비교적 최근작인 (2004)에 까지 이어진다. 왕가위 영화에 매 등장하는 뿌엿게 흐려진 거울은 이런 그의 생각이 담긴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또한 낡은 벽지나 마스킹샷을 통해 마치 액자 속 사진처럼 프레임을 구성해서 그 속에 있는 인물을 잡는 화면 구성 방식도 같은 연유에서 나왔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그리고 오프닝 시퀀스는 1962년 홍콩을 배경으로 해서, 좁은 아파트로 세들어 이사하는 두 집의 모습을 보여준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생각해 봤을 때, 좁은 복도에서 스치듯이 마주치는 차우와 리첸의 모습은 의미심장하다.영화의 중요한 시퀀스를 따지자면 대략 두세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첫번째 시퀀스는 아직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전에, 리첸이 습관적으로 국수를 사러 밖에 나갔다가 차우와 짧은 순간 스쳐지나가는 부분이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감각적인 메인 테마 음악과 함께 슬로우 모션이 쓰인 이 부분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강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앞으로 이 둘의 관계가 결코 평범하게 진행되지 않으리라는 일종의 복선으로도 느껴진다. 찰나의 순간에서 미묘한 감정의 떨림을 잡아내는 왕가위의 스타일이 빛났다고 볼 수 있다.두번째 시퀀스는 두 사람의 식당 대화 부분이다. 관객들은 이 부분의 짧은 대화를 통해서 두 주인공의 배우자들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평범하지만, 핸드백과 타이를 적절한 소재로 사용했고 담배를 피우는 차우의 손을 클로즈업 한다든가 하는 디테일을 사용해서 인물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세번째 시퀀스는 빗속에서 두 사람이 서로 이별연습을 하는 부분이다. 자기들끼리는 스스로를 끝까지 합리화시키며 불륜이 아니라고 다짐하지만, 이 부분에서 결국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음을 시인한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참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그들이다. 사랑의 무게가 컸던 만큼 이별의 순간도 무거운 리첸은 울 수 밖에 없다. 이 부분에선(다른 부분도 그렇지만) 두 배우의 완벽한 연기 호흡과 몰입으로 인해서 감정 전달이 아주 잘된다.영화 속에서, 기존의 영화들과 연관성이 있는 관습적인 요소를 찾아보고자 한다면, 왕가위 특유의 감각적인 음악 선곡 정도가 있을 것이다. 그외에는 관습적인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영화다. 왕가위의 전매특허인 '스텝 프린팅'기법도 이 영화에선 '스톱 모션'으로 대체되었으며, 색채감과 화면 구성도 이전의 왕가위 영화들에 비해 원숙해졌다는게 확연히 드러난다. 대체적으로 빠른 호흡으로 리드미컬하게 흘러갔던 전작들과 달리 는 심도깊고 느린 템포를 시종일관 유지한다는 점도 차이점이다.그리고 무엇보다도, 는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 감독이 이루어낸 감각적인 기법들이 빛을 발하는 영화다. (1) 일단, 카메라는 주인공들을 바라볼 때 관찰자적인 시점을 계속 유지한다. 시점의 주체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은밀한' 쇼트들이 계속 나온다. 그리고 숏을 시작할 땐 인물의 특정 신체 부위에서 시작했다가 끝날 때 쯤에 전체 몸으로 옮아간다. 특히 '장만옥'을 잡을 때 그런 경향이 강하다. 마치 숨어서 훔쳐보는 듯한 느낌의 이런 카메라 시점은 관객에게 시점을 전가하려는 감독의 의도일수도 있고, 홍콩의 유년시절을 기억하려는 왕가위 그 자신의 시점일수도 있다. (2) 초반에는 페이드 아웃을 이용해서 숏의 마무리를 자주 했다. 여기까진 괜찮다. 하지만 이후에는 계속 점프컷이 수시로 사용되었다. 이는, 관객들이 서사에 초점을 맞추지 않도록 하는 효과를 발생시켰다. 이것은, 이야기 보다는 이미지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왕가위식 편집이라고 할 수 있다.(3) 그리고, 영화 속에선 차우의 부인과 리첸의 남편이 한 번도 그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뒷모습과 목소리만 내비칠 뿐이다. 왕가위는 배우자들의 모습을 출연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에겐 방해물일 뿐이었다. 양조위와 장만옥의 사랑에 불씨 지피는 역할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주인공들의 미묘한 감정과 심리 뿐이었다.영화의 컨텍스트는 밀도 깊다. 60년대의 홍콩을 배경으로 삼았는데, 이는 주제적으로 볼 때도 중요하고 작품 외적으로 봤을 때도 중요하다. 당시의 억압적인,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랑'을 구현하기에 꽤 적합하다. 또한 작품 속에서 자신이 성장한 곳인 '홍콩'의 모습을 자주 그려냈던 왕가위가 이번에는 자신의 어렸을 적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과거를 끄집어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그리고 주인공들의 태연한 척, 무심한 척 하는 사랑의 태도는 마치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느낌을 주는데, 결국에는 자신들도 똑같다는 것을 인정하고 마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하지만 비밀스러운 사랑, 뻔한 스토리일지라도 어쨋건 간에 우리네 세상사 속 사랑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아름답게 포장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전혀 어색하거나 가볍지 않다. 감독은 관객이 영화 속에서 의미를 추출해서 관객 개개인의 추억과 맞물려서 생각하도록 만들어버린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엔딩이다. 영화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을 것이다. 왜 하필 '캄보디아' 냐고. 그리고 왜 하필 '앙코르 와트'냐고. 한 때는 화려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앙코르와트 사원은 한 때(1962)는 뜨거웠지만 지금(1966)은 추억이 되어버린 그들의 관계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사원은 '봉인'의 장소이기도 하다. 한 때의 사랑을 밀어처럼 속삭이며 봉인해버리는 차우의 모습은 사뭇 슬프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자승의 뒷머리가 클로즈업으로 잡히는 건, 왕가위 그 자신의 시선으로 볼 수도 있다.사원 내부를 찬찬히 훑으며 관조하는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은 그 이전의 감각적 촬영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사색하는 듯한 느낌까지 준다.영화의 특징적인 스타일을 살펴보자면 몇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1) '자막효과'를 들 수 있는데, 영화 시작과 끝에 삽입되는 문구들이 그것이다. 오프닝에는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어 고개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시작 전부터 미리 결과를 알려주는 듯한 문장이었는데, 영화의 분위기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했다.엔딩에는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순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영화 내내 내밀한 감정에 깊이 빠져버린 관객들은, 앙코르 와트 사원의 빛바랜 모습에 이어서 이 자막을 보는 순간 감정의 격함을 느끼게 된다. 자막들 모두가 상황에 맞는 적절한 선택이었다.(2) 왕가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탁월한 선곡 센스도 이 영화에서 빛이 났다. 이보다 더 영화와 적합할 수 없는 시게루 우메바야시의 '유메지의 테마'는 영화 속에서 무려 9번이나 반복되어 들려지고, 냇 킹 콜의 'Quizas, Quizas, Quizas'도 반복되어 울려퍼진다. 함부로 말할 수 없고, 차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간극을 애절하게 표현하는 OST는 나도 물론이고 많은 관객들에게 강한 울림을 줬다.(3) 그리고,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슬로 모션 이펙트 + 유메지의 테마 OST” 장면구성 기법을 의 가장 특징적인 면으로 꼽을 수 있겠다. 그 순간만은 정지하고픈 순수한 욕망의 시간을 적절하게 표현해낸 왕가위의 재치와 감각에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내내 계속되는 이 기법은 를 다른 영화와 차별되는, 특별한 그 무엇으로 만들어버린다.이어서, (4) '시계'의 반복적인 등장도 눈여겨 봐야 하는 부분이다. 영화 속에서는 '시계'로 시작되는 숏이 몇 개 나온다. 특이한 점은, 시계 속의 시간이 점점 과거로 흘러간다는 점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감독은 현재를 구성하는 창구로서 과거를 기억하고, 그 과거로의 여행을 를 기회삼아 하는 듯 하다. 자신의 유년시절도 회상할겸. 카메라는 시계를 찬찬히 쭉 훑으면서 인물들에게 옮아간다. '시간과 사랑(인간)'의 관계를 포착하는 감독의 연구는 그의 작품 속에서는 계속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