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십계명 이해와 사회윤리』 을 읽고비평 십계명은 기독교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기독교 윤리명령의 핵심이라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나와 있는 계명을 그대로 바라보면 자칫 자신과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 문항이 많아 보인다. 다시 말해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혹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 지에 관하여 막연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 『칼빈의 십계명 이해와 사회윤리』을 읽으면서 이에 대하여 종교개혁자인 칼빈의 시각을 통하여 십계명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실제의 기독교인의 삶으로 어떻게 녹여내야 하는 지를 생각 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 중요성에 대하여 인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좋은 계기였다. 또한 우리 기독교 내에서 얼마나 십계명의 위치와 역할이 축소되었는지에 대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십계명이 단지 계명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되는 법 조항으로서의 접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과 단지 구약에서의 아브라함이나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을 넘어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연결되어지는 계명이며 이것은 두려움으로 지켜야 하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에 은혜에 의한 감사의 표현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지금의 우리가 받은 구원의 상징인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의 자유와 홍해의 기적을 경험하고 난 후 이 율법을 주셨음이 우리의 죄의 결과로 인한 죽음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강을 넘어 믿음을 통한 생명의 구원을 선물로 주신 후 그에 감사하는 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친절한 하나님 아버지의 올바른 천국백성의 지침인 것이다.자칫 개혁을 외침에 있어서 구약은 폐지되었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 시켜주셨으니 새로운 법을 따라야 한다고 착가함에 있어서 율법의 완성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십계명을 바라보라는 것이지 폐지가 아니라는 것임을 본 책에서 일깨워 주고 있다.칼빈은 또한 십계명의 바른 해석에 대하여 전통적인 방법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함을 통하여 그것이 죽은 율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칼빈의 소교리 문답에서 『십계명의 강령을 묻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로 대답한다(소42). 십계명 해설에 앞서 이 강령을 먼저 제시하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대교리문답서는 이어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인 첫 네 계명들의 강령과(대102) 사람에 대한 의무로서 나머지 여섯 계명의 요약(대 122)을 구별하여 문답한다. 십계명의 강령은 예수님의 십계명 요약인데, 십계명을 구약의 관점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설해야 한다는 교시이다.』 이와 같이 율법의 완성이 십계명의 폐지로 오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칼빈의 십계명에 대한 가치의 고백을 통하여 알 수 있게 해 준다.
로마서 12장 1-2절과 기독교 윤리 이해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합당한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윤리를 사전적으로 살펴보면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감에 있어서 마땅히 지키거나 행해야 할 도리”라고 정의 한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윤리적인 위기에 직면 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범죄 들이 만연하고, 심지어 부모 자식이나 다른 가족 간에도 동일한 일들이 서슴없이 자행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한국 사회도 이와 별 다름이 없다. 물론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인구 중 많은 수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 말하고 있음은 부정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 펼쳐지는 현상이 이와 같음은 기독교인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 영할을 올바로 이행하지 못함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기독교 윤리는 현재 성도들이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현실적인 문제나 논란이 되는 사회적 이슈들에 대하여 바른 판단을 하고 그에 바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규범과 실제적인 지침을 제공해 주는 과제를 제대로 수행해 가야 하는 책임이 있다.” 기독교 윤리의 가장 핵심적인 기준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이 변화 하는 시대나 사람이 아닌 불변하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명 하복으로 위에서 아래로만 내려오는 한쪽으로만 치우친 타율적인 행동이 아니다. 이것은 신명윤리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순종의 행위는 그 성격이 쌍방적이고 관계적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외부의 명령의 요소에 초점을 맞추어 평가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생각이다. 또한 인식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인간보다 월등하게 탁월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결코 유치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을 통해서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윤리적으로 어떠한 삶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지 여러 신학자의 의견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영국 더함 대학교의 신약학자 제임스 던은 “유대 백성의 대다수에게 민족적 경계의 구실을 하며 윤리적 기준의 구실을 하는 것이 율법이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로마서 12장 1-2절의 대 주제로 “그리스도인이 책임 있는 삶을 살기 위한 근거를 예배”로 보았다. 1절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에서 구약적인 제사를 통한 관계를 재규정하는 말씀으로 보았다. 즉 단회적인 “제사”로서가 아니라 매일의 생활을 통하여 그 제의 의식이 진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라는 것이다.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이것이 구체적으로 몸으로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절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다는 것을 통하여 던은 내면에서의 영적인 갱신의 필요하고 이것이 인간의 이성 작용 뿐 아니라 이성의 능력까지도 포함 하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위의 내용을 토대로 로마서 12장 1-2절의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노력하고 그 뜻을 삶으로 가져와 복종의 삶으로 살아가는 삶이고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것이다.결론적으로 제임스 던은 그리스도인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 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 하고 그것이 삶으로 표현되어 져야만 하고 그것을 행 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께 주신다는 것이다.복음주의 신학자 윌리엄 핸드릭슨은 로마서12장 1-2절에 관하여 “의롭다 하심을 입은 신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취할 태도”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1절은 로마서의 대 주제인 이신칭의를 바탕으로 이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몸과 마음을 다하는 완전한 헌신의 예배를 요구 한다는 것이다. 즉 동물을 통한 제사가 아닌 감사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전적인 자기 순종의 제사가 요구 되어 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도가 가르치는 기독교 윤리는 기독교의 교리를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죄의 비참함과 그로인한 하나님의 관계의 단절 그리고 인간의 방법으로 절대 회복 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얼마나 큰지 깨닫고 또한 그러한 죄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이 되었는지 알고, 그 커다란 은혜에 어떻게 감사를 해야 하는지를 그것이 우리가 드려야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2절을 통하여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에 이르는 목표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나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첫째로 성도는 전적인 은혜로 의롭다 칭함 받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도덕적으로 영적 완전의 상태에 도달 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악한 세대의 본을 받지 않기 위하여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주된 목적은 결코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두 번째는 속사람이 변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단 번의 변화가 아닌 계속해서 변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점진 적인 성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은 수동적인 것이 아닌 신자 자신이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과 생활 속에서 활동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셋째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하여 양심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하나님의 지시를 받기 위하여 말씀을 통하여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훈적인 뜻이다. 또한 그 뜻은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삶은 하님께 얼마나 감사하고 서로 간에 사랑을 실천하는 삶인 지를 말하는 것이다. 하님이 보시기에 그러한 삶이 선한 삶이라는 것이다.결론적으로 윌리엄 핸드릭슨은 구원에 대한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삶을 살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그것을 이웃 사랑을 통하여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존 칼빈은 로마서12장 1절을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 하는 것은 공포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대한 자발성에서 와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가르침이나 권면에 의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심사숙고에 의해서 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것이고 이런 이유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성별되지 않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모욕이 된다는 것이다. 구별되지 않은 제물로 드리는 제사에 대하여 신성모독이 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산 제물로 드려 지는 제사에서 제물인 우리 자신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산상보훈』갈릴리 호숫가에 울려 퍼진 예수님의 말씀은 근 2천 년간 수 많은 사람들을 변화 시켰다. 그중 산상보훈만큼 감동적이고 우리의 마음을 잡아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씀이 무시되고 있다. 내용이 너무나 고상하고 높은 수준의 믿음의 소유자들만이 그 대상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또한 그 말씀은 단지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보여 주는 말씀이라 인식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하여 산상보훈을 다시 한 번 조명해 보려 한다.산상보훈 중 하나인 팔복은 영어에서는 8개의 복이 아닌 그냥 복들이라 표기 하였다. 팔복은 몇 가지 케이스로 나누기 보다는 동일한 사람의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천국 백성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팔복은 핍박 복음이다. 모든 내용의 결말로 11절에 나를 인하여 받는 핍박으로 너희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주님으로 인한 고난으로 인하여 복을 받는 다는 것인 것이다. 팔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고 대상 초월 적인 법이다. 즉 복을 받는 기준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은혜라는 말인 것이다.팔복 중 심령이 가난한자는 악한 자로부터 압제 당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인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과의 동행함의 복을 주신다. 애통하는 자는 믿음으로 인한 괴로움과 답답함을 하나님 앞에서 우는 자를 말한다. 그는 현재와 미래의 위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함으로 소망하는 자이다. 그는 미래의 새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서 말하는 의는 ‘칭의’가 아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실제의 의’를 말한다. 그는 하나님에 의하여 채워짐으로 만족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불쌍한 사람을 향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행위를 말함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길이 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자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제를 하게 된다. 화평케 하는 자는 악한 일에 대항하지 않으며 도리어 화평을 애쓰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함을 인정받게 한다. 팔복의 마지막인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지금껏 나온 모든 복의 종합이다. 성도가 어떤 일로 실제로 핍박을 받았을 때 그때에 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는 다는 것이다.세상의 빛과 소금인 성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도가 해야만 하는 역할인 것이다.산상수훈 1,2부를 읽으며 느낀 점은 결국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설정이 올바르게 되었을 때 주변의 고난과 시련을 이길 수 있고 이 땅의 것을 바라보는 삶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것을 바라봄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앞에서 칭찬을 받을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세상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신자의 역할을 감당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3부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구약의 율법에 관하여 예수님의 답변은 단호하다.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것이라는 것이다. 완전케 하다는 단어를 완성으로 오해함으로 율법을 이제는 끝이 났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롬13:10에 나온 말씀으로 사랑으로 대치 됐다고 잘못 해석하였다. 하지만 사랑은 율법의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 율법을 포괄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사랑의 구체적 실천은 율법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 하셨다.(마5:18)또한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눅21:33)하지만 이것이 율법이 문자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 율법의 ‘지혜’와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율법을 그리스도의 빛 아래에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킨다는 의미 보다는 누린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 해 보면 율법과 예수님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완성’인 것이다.4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예수님의 가르침이 모세의 율법과 대비 된다는 생각은 율법에 대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해석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유대인들이 들었던 것들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해석을 교정해 주시고. 둘째로, 예수님은 율법의 원래 의미를 드러내시며. 셋째로, 율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고 말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율법의 주체’이시고 ‘실체’이시며 ‘성전보다 더 큰 이’이시기 때문이다.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율법의 근본 의미는 외적인 행동의 제한이 아닌 마음에 까지 확대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적인 모습으로서의 실천이 아닌 마음 깊은 중심에서의 실천을 요구 하시는 것이다. 여러 가지 율법에 대비 하여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두 표면적인 부분의 지킴을 의미하기보다 마음속에서의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외면적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 혹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속에는 썩은 시체가 들어 있음에도 외형적으로는 깨끗하게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그들의 잘 못된 율법관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결국 율법의 지킴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을 통하여 그 율법이 실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율법의 실천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율법과 완성에 관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지키지 않는 것이 맞는지의 문제가 아닌 그 율법의 중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산상보훈』5,6부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절 - 18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선행에 대해서 가르치신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라는 말이 들어맞는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을 의식하여 외식하는 것으로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랑을 행하는 것은 나중에 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바라보지 않고 눈앞의 사람들이 알아주는 영광만을 쫓아 달려 나가게 되는 것이다. 구제함을 은밀히 해야 하고 기도하는 것을 은밀히 해야 한다.금식 또한 금식하는 내색을 하지 않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은밀히 보실 것을 믿고 바라보아야 한다. 기도의 내용도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은밀한 중에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의 약함과 우리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고백해야한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강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께로 오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채워달라고 우리 자신을 용납해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 또한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이 나의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내가 가진 것 모두가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항상 유념해야한다는 것이다. 외식하는 자들은 그것을 망각하고 자신의 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채운다. 하나님의 아들 된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공급으로 인한 것임을 항상 기도함으로 우리 속에 되뇌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우리나라 교회의 초창기에는 천국 하면 대개 ‘내세 천국’을 생각했다. 소위 ‘천당(天堂)’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이 생각하는 일반적 천국 개념이었다. 1970/80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천국 이해에 약간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알지 못하나 일부 교회의 식견 있는 목사와 성도들을 중심으로 여태까지 너무 내세 천국만을 강조해 왔던 것에 대한 반성과 반작용으로 ‘현세 천국’을 이야기하는 소리들이 조용히 퍼져 나갔다. 이러한 와중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개혁주의 또는 보수주의 신학에서 하나님 나라를 더 이상 ‘장소적’ 개념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reign of God)’ 또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으로 보려고 한 시도들이다.하나님 나라의 요소를 네 가지로 보는데 왕과, 백성, 땅, 주권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왕 되신 ‘하나님’ 또는 ‘예수님’이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 만약 백성이 없으면 그 나라는 텅 빈 나라가 될 것이요, 신하와 백성이 없이 혼자서는 왕 노릇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고려할 요소는 ‘영토(territory)’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장소적 또는 공간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 나라에 영토(공간, 처소)가 없다면 왕과 백성들이 거할 처소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신앙은 공중에 뜨게 되며 우리가 바라는 소망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한 나라를 유지하고 다스리는 데에는 주권이 있듯이 하나님 나라에도 주권이 있으며 통치와 지배 원리가 있다 이 통치 원리는 곧 .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요체는 십계명에 제시되어 있으며, 또한 산상보훈에도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원리가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곳, 곧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주권이 회복되는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생각할 때 다음 세 종류의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해야 한다. 현재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현세 천국)와 현재 저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천당, 낙원)와 미래에 종국적으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신천신지)이 그것이다.현세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세상의 자식들이 서로 섞여 있으며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감추어져 있으며 비밀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피임』 을 읽고기독교 윤리학적으로 낙태에 대하여는 고민 해 본적은 있지만 피임에 대하여는 전혀 생각 해 본적이 없었다. 물론 사후피임약에 대하여 접하였을 때 과연 사후 피임약에 대하여 기독교 윤리학적으로 사용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잠시 생각 해 본적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다 이번 기독교 윤리학 과제를 빌어서 피임에 대하여 한 번 더 숙고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볼 수 있음에 유익함을 느끼게 되었다.피임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임신을 막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한 관점으로 보았을 때 천주교의 전통적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성의 목적에 위배됨으로 이를 금지하고 성행위 자체가 출산과 연계 되었을 때 만 허용이 된다는 입장에 있다. 이는 금욕주의에서 기본적으로 성관계는 죄라는 밑바탕이 깔려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피임은 당연히 출산의 목적이 아닌 성행위에 수반되는 행동이기에 그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것이다. 그것은 피임을 살인과 연계하여 생각한다는 것이다.이에 반하여 개신교에서는 성행위가 늘 출산과 연계되어야 한다는 데에 반대의 입장에 서있다. 이는 성 생활이 부부의 반려자로서의 의식을 굳히게 해 주고 부부관계에서 즐거움을 주는 장치로서 또한 하나님께서 선물해 주신 부부간의 선물로 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부간에 피임을 하고 성행위를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 이유는 남녀 간의 성행위가 단순히 출산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고전7:5에 나오듯이 부부간의 분방에 대하여 기도 외에는 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부부간의 성행위가 출산만을 위함이면 임신 외에는 합방을 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시지 않았을 까 생각을 한다. 왜냐 하면 그 뒷 구절에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물론 항구 도시의 성적으로 문란한 고린도 교회의 특수성이 있었다지만 지금의 세상의 문란함 역시 이에 못지않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본인은 창세기 1:28절 말씀에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 하라”는 말씀에서 자손을 많이 낳으라는 뜻이 아니라는 부분에 대하여 약간의 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음을 적어 보려한다. 충만 하라는 “마라(???)”의 뜻에는 “이뤄지다”라는 뜻 외에도 “채우다”, “가득 차게 하다”라는 뜻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다”라는 뜻으로 해석도 되겠지만 이 땅을 가득 차게 하다도 그 안에 들어있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인구 과잉에 대하여 한 가지 예로 본 논문의 서두에 기록하였듯이 한국 사회에서 전쟁으로 궁핍하였던 시절 빈곤 탈출을 위하여 실시하였던 산아제한 정책으로 한국 자회는 지금의 노령화 사회로 연결되기 까지 하였다. 그로 인하여 이제는 출산 장려 정책으로 바뀜을 보며 이는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한 집에 5명 이상의 자녀가 있는 집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지금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는 노인 부양의 문제도 그렇게 자녀가 많은 집에서는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가정 자체에서 이러한 문제가 해결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저 출산 시대에는 이런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시편127편의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과 같다”는 이야기는 많을수록 힘을 주고 좋다는 이야기 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