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혁명 영웅을 기리는 청명절을 맞아 천안문 광장에 故주은래 수상을 추모하는 수천개의 화환들이 놓이고 군중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날 밤. 문화 대혁명을 주도했던 강청 등 ‘4인방’의 지시로 천안문 광장에 놓여있던 수천개의 화환들이 모두 철거되고 현장에서 화환을 지키고 있던 57명이 체포되자 1976년 4월 5일 이른 아침 분노한 수만명의 청년과 학생들이 천아문 광장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다”이 사건은 중국의 ‘제 1차 천안문 사건’으로 모택동의 총애를 받던 주은래 총리의 서거와 맞물려 사상을 중요시 했던 모택동의 ‘홍’의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다. 문화 대 혁명이 실패하고 모택동이 사망하면서 4인 과두체제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러한 집단 지도체제는 오래 가지 못하였고, 그 중에 한 리더 역사적인 인물인 덩샤오핑이 등장하며 중국 역사의 큰 획을 긋게 된다.북한에서도 아랍판 시민 혁명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한 글에서 엉뚱한 시작 일지는 모르겠으나, 과거의 중국 모습이 현 북한의 길과 비슷하다고 느꼈고, 북한에서의 혁명 가능성 또한 비관하고 싶지 않다. 김정일의 건강악화와 더불어 피폐해진 민심, 빈번한 자연재해, 내부 고위급 관료들의 부패는 곧 급변사태의 가능성을 알린다고 본다.이에 대한 의견과 근거를 나타내고자 한다.중국의 문화대혁명 이후 피폐해진 민심과 자연재해, 사상보다 국가의 현대화를 원했던 시민들의 합심으로 발생했던 봉기, 아랍권의 계속된 민주화 운동과 그들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은 본래부터 악한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개개인들은 자유와 행복을 원하고 있으며 현 시대에서는 자국 뿐 만아니라 타국가 사람들도 같은 행복을 느끼길 열망한다.현실주의적인 측면이 성악설을 말하고 있다. 국가들 사이에는 이익의 조화는 본질적으로 없으며, 정치는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며, 전쟁은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여긴다.그러나 그런 사고방식은 점차 무너져 가고있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과 자유를 추구하며 서로 상호 공존하는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있다.권력의 힘으로 이루어진 정부가 사라지면서 국가들이 서로가 적이 아닌 국민의 안락과 복지를 확보하는데 필요한 ‘파트너’로 서로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랍판 시민혁명을 대다수가 지지하고, 장기 독재체제가 점차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다.과거 중국의 역사를 예로 들면 북한의 변화 가능성이 보인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모택동과 주은래서거 이 후 4인과두체제가 등장 하였고, 그 후 리더가 탄생하기 까지가 많은 혼란을 야기 했다.김정일이 사망한다면 이 때가 북한의 급변사태의 아주 가장 큰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권력을 빠르게 장악하지 못한다면 북한도 역시 집단지도체제가 나올 것이고 집단지도체제가 과거 수령 개인독재 체제보다는 권력 통제에서 많은 한계를 보일 것이기 때문에 그 경제적인 혼란, 정치적인 자유 요구, 그런 것이 중동 민주화처럼 나올 수가 있다고 본다.반면, 김정일 사망 후 김정은의 권력장악이 바로 이루어 진다면 민중 봉기라기 보다는 북한이 변화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싶다.80년대 생이라는 젊은 나이와, 유학파, 스시와 서양영화를 좋아하는 그는 아버지처럼 폐쇄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변화의 가능성은 충분하다.그가 중국의 덩샤오핑처럼 사회주의 속에서의 자본주의의 도입가능성이 있거나, 또 다른 변수를 가졌을 것이라 믿는다.북한 내 민주화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여지는 soft power측면이다. 중국의 등소평 중반기집권 시절 ‘화평연변’이라는 말이 풍미했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서양 문물을 무력으로가 아닌 정신적으로 서서히 도입하고 있다는 말이다. 북한 또한 아직은 미비하지만 서서히 열리고 있다. “북한 내 휴대전화 가입자수가 올 상반기 18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올해 2분기에만 5만9000천명이 가입해 분기단위 최대증가다” 최근 들어 이런 뉴스 기사는 민주화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로 보인다. 물론 국가의 철저한 감시와 일부 특권 층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지만, 국가의 감시에서 벗어난 소위 ‘암거래시장’의 핸드폰의 수도 무시할 수 없다.시간이 흘러 김정일이 사망한 후엔 더 많은 수가 생겨날 것이고, 한국산 옷, DVD, 중국산 핸드폰 등이 암거래가 아닌 국가적인 도입을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본다.동독은 서독의 TV방송에 의해 무너졌고, 소련은 영국의 BBC방송에 의해 무너졌다고 한다. 서로 송출 방식이 다른 북한과의 TV방송 교류의 시작과 억지 스럽지만 난시청지역 해소를 명분으로 우리의 FM라디오 방송을 북한에서 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한다면 강요하는 것이 아닌 서서히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마지막으로 ‘올 것은 반드시 온다’라는 믿음과 세계인의 합심이다.‘올 것은 반드시 온다’라는 말이 이상적으로 보일 진 모르겠지만, 여럿 아랍권력의 붕괴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지만, 북한은 소셜네트워크는 커녕 인트라넷을 쓰고 있다고 한다. 또한 북한 전역은 지독한 개인 숭배와 최면으로 민주화는 어렵다고들 말한다.하지만 굶주림이 벼랑 끝으로 치닫고 독재정권이 차례로 무너진 소리는 언젠가 북한의 담을 넘을 것이고, 김정일 정권은 무너질 것이다. 이에는 세계인들의 선한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윗 글에서 언급 했듯이 억지스럽지만 우리 나라의 TV나 라디오, 혹은 야속하지만 계속된 인도적 지원을 빌미로 서신왕래를 요구한다던지 하는 것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켜 올 것이다. 이것은 북한에도 민중들이 깨어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줄 수 있다고 본다.중국의 사례와 soft power, 세계의 도움 등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불가능 할지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점점 세계는 비국가적 행위자를 중요시 여기며, 각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다양한 행위자들 간의 영향력 행사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봉기나 변화를 위해선 각각의 행위자들을 일깨우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PAGE:1중국의 경제발전사..PAGE:2목 차서론등소평의 생애등소평 집권 당시 시대적 배경본론1. 등소평 시대의 시작 (초반집권기 79년~84년)1)경제적 개혁2)정치적 개혁2. 본격적인 개혁개방의 시대 (중반기 85년~91년)3. 과속의 경제성장과 성장통의 후반기 (등소평 은퇴 이후)결론개혁개방의 성과와 문제점/해결방안발표자 느낀점..PAGE:3鄧小平1904.8.22~1997.2.19 덩샤오핑 [鄧小平(등소평) ]쓰촨성[四川省] 출생. 1918년 프랑스로 유학, 1921~1924년 파리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 모스크바의 중산(中山)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1927년 광시[廣西]에서 공산당 지하운동에 종사1933년 반주류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하고, 장정(長征)에 참여함.1949년 장강(長江) 도하작전과 난징[南京]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수립에 공을 세움 (1952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 1954년 당중앙 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1981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 실용주의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단행.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1997년 2월 19일 사망..PAGE:4문화 대혁명 후반기 당시 시대적 배경1. 피폐해진 민심1966년부터 10년간 지속 되 오던 문화혁명이 76년 여명의 대 전환을맞이함. 그 조짐은 1년 전인 1975년 자연재해로 나타나기 시작.1) 1975년 하남성 지구에 강우량 1,631mm에 이르는 4일간의폭우로 수십 개의 저수지가 무너져 사망자 2만 6천명, 이재민1,100만명, 경제 손실 약 100억 위안에 달하는 재난발생2) 1976년 길림시 지역 세계 역사상 전례가 드문 운석비 내림수집된 운석만 100여개가 넘고, 총 중량은 2600kg달함3) 1976년 7월 28일 당산 대 지진발생-> 피폐해진 민심이 주은래 서거 추도 제1차 천안문 사건으로 폭발..PAGE:5문화 대혁명 후반기 당시 시대적 배경2. 궁정 정변 : 문혁4인방(장칭[江靑] ·왕훙원[王洪文]권력 구조는 모택동을 등에 업고 문화대혁명을 주도하고 있던 ‘문혁4인방’ 및 그 추종세력과, 그동안 총리로 줄곧 국정을 운영해오던 주은래 및 등소평간에 대립의 축이 있었음문혁4인방 : 이념 및 선전부분강조 vs 등소평,주은래 : 정치적 안정, 단결과 경제발전 필요성을 강조1979년 1월 8일 주은래 총리 사망 후 모택동은 중도적인 입장이 였던 화국봉을 총리대행으로 임명, 그를 중심으로 중도세력을 규합하여 정국 안정을 도모코자 함.화국봉 세력은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선언하며 문혁 4인방을 숙청..PAGE:6문화 대혁명 후반기 당시 시대적 배경3. 화국봉의 두개의 범시론“무릇 모주석이 내린 결정은 우리 모두가 굳건히 유지 해야하고, 무릇 모주석의 지시는 우리가 한치의 착오도 없이 본받고 따라야 한다.”4. ‘뿌따오옹(不倒翁)’ 다시 일어서다’- 등소평의 복권* 뿌따오옹, 불도옹 :오뚝이처럼 넘어지지 않는 노인문화 대혁명의 피해 당사자들인 구 관료와 간부, 지식인들이 문혁4인방의 죄에대한 비판과 함께 등소평을 비롯한 구 관료들의 복권을 강력 요청-> 권력기반과 통치능력이 취약한 화국봉 세력은 결국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1977년 7월 등소평의 전면적인 복권을 공식결정, 등소평의 복권을 계기로 화국봉 세력의 실질적인 정치 입지는 급속도로 약화됨..PAGE:7문화 대혁명 후반기 당시 시대적 배경5. 실사구시 논쟁1977년 9월 10일자 인민일보를 통해 “모택동 사상의 핵심은 실사구시의 정신에 있으며, 따라서 모택동의 정책과 사상도 현실적 실천의 검증을 통하여 옳고 그름을 검증 받아야 한다.” 고 주장하고,‘모택동의 지시를 시간. 장소. 환경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모두 옳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면서 화국봉의 범시론을 직접 공격함.또한 1978년 5월 11일 광명일보에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다”라는 논문을 발표케 하여 전국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킴. 그 유명한 등소평의 『흑묘백묘론』(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최그 여세를 몰아 ‘사상해방’ 과 ‘실사구시’의 정신에 따라 ‘계급투쟁을 핵심’으로 해오던 당 노선을 ‘경제 건설 위주’로 전환 한다는 대 선언을 함...PAGE:8등소평 시대의 시작 80년대초경제적인 개혁1.개혁, 개방만이 살 길이다“모착석두과해(模 着 石頭過 海),물속의 돌을 더듬어 가며 강을 건너다.”모든 것이 불확실한 형국에서 당시 개혁의 목표는 단순히 ’21세기 중엽, 세계 중등발달 국가 수준에 도달한다’ “일부 사람, 일부 지역으로 하여금 먼저 부유케 한다” 는 선부론 정도 였음.-> 따라서 등소평은 당, 정 관리들로 구성된 경제대표단을 미국, 일본과 유럽주요국가에 많이 파견하여 서방 세계의 발전을 체험, 학습 토록하였고 얻을 교훈은 무엇인가를 찾는데 주력했다...PAGE:9등소평 시대의 시작 80년대초2. 농촌 개인 생산책임제 실시 : 농민들의 개인부업과 자유시장허용-> 농촌 가정의 부업과 자유 시장 거래는 사회주의 경제의 부속과 보충이며 소위 ‘자본주의 꼬리’라고 비판 할 수 없다 라며 장려3. 4개 경제특구 설치 : 1980년 광동성 경제특구 조례, 발표ㅡ> 선전, 주하이, 싼토우와 쌰면 4개지역에 경제특구 설립..PAGE:10등소평 시대의 시작 80년대초4. 외국 자본. 선진 기술 도입 : 외국 자금 및 선진 기술을 적극 도입하기 위하여 서방 세계에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교류를 강화하는 작업을 등소평이 직접 진두지휘추진방향 : 국제정치 경제환경의 개선작업, 외국 기업 자본의 유치, 중국 내 투자 자본 확립이라는 3가지 각도-> 중외합자경영기업법통과, 중국국제신탁 투자공사 설립 등개체호 장려 : 외국의 자금과 기술을 이용하고, 화교 상인들도 귀향하게 하여 공장을 짓게 하며, 공상업계 인사들이 갖고 있는 돈을 투자하여 기업을 만들거나 관광업에 투자하여 외화를 벌고 인원도 많이 고용할 것을 장려함.-> 외국 자본이든 내국 자본이든 자본 투자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인민 생활 개선에 관심을 가짐..PAGE:11등소평 시대의 시작 80년대초정치적 개이후 화국봉 지지 세력은 거의 숙청되고,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개혁세력이 완전 권력을 장악함+빠른 권력개편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 문화대혁명에 반감을 갖고 있던 지식인들과 경제생활의 개선을 바라는 대중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2. 1국가 2제도 창안 (대만): 통일 후 대만을 특별행정구로 하여 대륙과 다른 제도를 실행하고 대만정권이 기존고유 권력을 향유하고, 사법 독립과 자체 군대를 보유토록 하며, 대륙 중앙 정부의 군대나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대만 당. 정. 군 계통을 대만 스스로 관리토록 하는 것을 보장한다고 밝힘결과 -> 대만의 3불정책(대대륙과의 불접촉, 불협상, 불통행)으로 외면당함..PAGE:12등소평 시대의 시작 80년대초3. 홍콩, 마카오 귀속 협정 체결84년 9월 영국이 홍콩 전 지역을 포기하는 대신 1997년 7월 1일 주권반환 후 50년간 홍콩의 기존 체제를 존속시킨다 라는 공동선언 발표.1986년 포르투갈과의 협정을 통해 마카오도 1999년 12월 31일 회복시키기로 약속함.4. 대만의 제한적 대륙 친척 방문 허용기존 3불 정책은 고수하되 대만 민중의 3촌이내 대륙 친척방문, 서신 왕래 등 에 대한 규정 선포..PAGE:13등소평 집권 중반기 85년~91년1.개혁 개방의 확대 : 농촌 개혁과 4대 경제특구 개방을 통해 큰 성과를 얻은 결과로 1984년 4월 14개 연해 도시 (천진, 상해, 대련, 진황도, 연대, 청도, 남통, 영파, 온주, 복주, 광주, 쟌장, 베이하이)를 대외에 개방*대외개방정책의 발전과정1단계 : 실헙적 "경제특구"정책(1980-1984)->동남연해 지역 일부 도시에 대한 "경제특구"정책2단계 : "연해개방도시"로의 확대(1984)->1단계 경제특구 정책이 기대이상의 효과를 달성하자 연해지역 14개 도시로 개방지역을 확대하여 외자도입을 적극 추진키로 함.->점에서 선으로 확대3단계 : "연해경제개방구"(1985-1989)->선에서 면으로의 확대과정4단계 :전방위 개방(사연:연해,연강,연변,연로)개방->식점 탄생, 모토로라 설립, P&G 등등 외국 회사 대량 들어옴당시 맥도날드는 중국 음식점의 160배의 수입을 기록하며 관광명소로 떠오르기도 함...PAGE:14..PAGE:15등소평 집권 중반기 85년~91년2. 보수파와 개혁파의 견제와 협력화평연변(和平演) vs 치리정돈 (治理整頓)*화평연변: 무력이 아닌 평화적으로 발전시킨다*치리정돈: 경제 환경의 정비와 경제 질서의 정돈:1980년대 중국 사회 전반에 걸쳐 서방 문화사조가 만연하고 이념, 정신적 해이와 물질 만능주의가 사회적,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유명한 화평연변이라는 말이 풍미.등소평의 정책이 서방국가의 무력을 통해서가 아닌 정신사상면으로 중국을 점차 자본주의화하며 발전시키고 있다며 보수세력이 들고 일어남.->대학생들까지 합심하여 호요방 총서기 퇴진과 당내 진보적 지식인들이 여럿 제명당함 보수파 대표 이붕이 총리직 오름...PAGE:16등소평 집권 중반기 85년~91년3. 제2차 천안문 사건: 1989년 4월 15일 등소평과 함께 개혁과 개방을 진두 지휘하던 호요방 총서기의 사망으로 시작+ 급격한 물가고와 경제적 불안 및 사회적 혼란 등에 불만을 가진 시민들과 노동자들이 가세하게 되면서 대규모 민중운동으로 발전.민주주의의 실천만이 관료주의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ㅡ> 중국의 국가 현대화를 위해 개혁 개방 정책을 야심 차게 추진해 온 개혁지도부에 크나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중국현대화 역사에 큰 아픔과 교훈으로 남게 됨...PAGE:17등소평 집권 중반기 85년~91년4. 도광양회와 16자 방침도광양회란 ? “힘과 재간이 있어도 밖으로 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실력을 배양하다가 필요할 때 힘을 발휘하라” 는 뜻16자 방침이란? ‘냉정관찰, 온주진각, 침착응부, 유소작위’로 “정세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자기가 서 있는 진지를 단단하게 지키고, 침착하게 대응하며, 자기 힘과 몫을 기르고 세워라”는 뜻이다.이 방침과 더불어 등소평은 개혁적 성향의 강택민 상해 당위서기를 후임총서기로 등용하고 개혁심화와자진사퇴
< 이터널션샤인을 보고 >>과 목 명 : 철학과 인간 학과 , 학번 :교 수 명 : 이 름 :‘이터널 션샤인’이라는 영화를 처음 접 했던 건 고등학교 때였다. 한창 사랑과 연애에 관심 있을 나이에 학업에 열중해있던 터라 가끔 보는 영화가 일주일 동안의 공부로 쌓인 스트레스나 심신을 위로해주었었다. ‘이터널 션샤인’ 이라는 영화는 말 그대로 영원히 지속되는 햇빛과 같은 사랑을 이야기한 영화이다. 솔직히 말해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이해가 안가기도 했다. 영화가 너무 어렵기도 했고, 옛날 일을 회상하는 장면인지 현재를 말하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레포트를 위해 다시 한번 봤을 땐 한번 더 봐서인지 예전보다 많이 이해되었다. 이 영화는 남녀 두 주인공이 나온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인데 이 둘은 처음 보자마자 마치 오래된 연인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길고 긴 연예 끝에 어느새 지루함도 느끼고 권태가 찾아온다. 그들은 그런 지루함과 짜증을 견디다 못해 헤어진다. 그리고 얼마 후 조엘이라는 남자주인공은 클레멘타인이라는 여 주인공을 찾게 된다. 그러나 클레멘타인은 자신을 철저히 무시한 채 다른 연인과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조엘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내가 조엘의 입장이였어도 ‘대체 왜 날 못알아보지.. 혹시 갑작스런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 아닐까 아니면 날 철저히 외면 하려 그러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 밖에 클레멘타인은 정신과학박사의 실험에 따른 한 사람과의 추억이나 기억을 지우는 시술을 받은 것이다. 조엘은 그런 클레멘타인의 사정을 알게 되고 결국 같은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조엘이 기억을 지우는 과정 속에서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은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억 속에서 그들은 마치 도망자라도 된 듯 손을 잡고 도망다닌다. 자신들의 추억의 장소에서의 기억 속에서도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지우지 않기 위해 뛰고 또 뛴다. 그러나 결국은 기억속에서 조엘은 클레멘타인과 처음 만났던 그곳에서 작별을 고하고 만다. 그렇게 조엘도 사랑하는 사람 한명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그러나 작별을 고하는 그 순간 클레멘타인은 마치 조엘과 다시 만날 것을 약속이라도 하는 듯 어느 장소에서 만나자고 한다. 다음날 조엘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깨어나고, 출근 길에 오른다. 그러나 회사로 가는 지하철이 아닌 갑자기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다른 기차를 탄다. 이렇게 둘은 기억 속에서 약속했던 장소에 이르고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둘은 기억을 지우기 전처럼 처음부터 너무도 뜨거운 감정을 느꼇던 것일까..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만 결국 자신들이 과거에 뜨거운 사랑을 했었고, 뜨거운 사랑에 대한 상처나 기억을 서로 지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억을 지우기 직전에 아무 생각 없이 복받쳐왔던 상대에 대한 슬픔이나 노여움을 녹음한 테입을 서로 듣게 되고 그들은 화가 치밀고 슬픔에 잠긴다. 그러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과거에 자신들이 사랑했기 때문에 받았던 상처를 인정하고, 다시 사랑하기로 약속한다. 어쩜 미래에 다시 과거처럼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안간힘을 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만남과 사랑을 숙명처럼 느끼고 사랑을 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나에게도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 영화에서도 애완견의 기억을 지우려는 사람이 엑스트라로 나왔듯이 나에게도 애완견과의 이별이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비록 사람이 아니라 애완견이였지만, 10년을 같이 지내면서 가족과 같은 정을 느꼈다. 그러나 헤어지고 나서의 후유증은 말로 다 할수 없다. 애완견과의 이별도 이렇게 기억이 또렷한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정말 인생에 있어서 큰 상처 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별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기억을 지우고.. 그런 상대를 따라서 같은 길을 선택하고 그 선택 속에서 후회하고 도망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고 가슴 아팠다. 조엘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그런 사소한 기억들이 그렇게 소중한 기억이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 같다. 비록 나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큰 이별을 겪어보진 못했다. 그러나 이별을 겪고 아파하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커다란 추억이 되고 정신적인 성숙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영화에선 말해주는 것 같다. 조엘이 클레멘타인과 기억 속에서 도망치는 도중에 조엘의 어릴적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어린조엘이 궁지에 몰리게 되자 그를 도와주는 어린 소녀가 나온다. 솔직히 이 장면이 영화에서 무엇을 뜻하는 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해석하길 조엘이 그녀를 기억 속에서 너무도 지우고 싶질 않아서 자신의 어릴적 기억속으로 그녀를 밀어 넣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조엘이 그녀를 너무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억 속에서도 조엘은 그녀를 자신을 구해주는 어린 천사처럼 취급을 했기 때문이다. 내 나름의 해석이 였지만 클레멘타인을 향한 조엘의 이런 잠재적인 사랑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조엘 뿐 만아니라 클레멘타인도 기억을 지울 때 조엘만큼이나 후회를 했을 것이다. 그들이 조엘의 마지막 기억속에서 처음 자신들이 만났던 곳에서 재회하자고 약속을 했다. 클레멘 타인도 기억을 지울 때 조엘과 같은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그녀가 재회하자는 말을 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말의 뜻은 상대 이성에게 끌려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사랑으로 인해 고통받고 상처받은 이들이 또 다시 상처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을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의 뜨거움 때문인 것 같다. 열렬히 사랑하고 있을 땐 이별을 생각 하지 않고 사랑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할 때엔 미래에 닥쳐올 부정적인 미래를 생각하기 보단 그 사랑으로 인해 겪을 성숙과 추억을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영화에서 배운 것 같다. 나도 언젠가 이렇게 나의 머릿속에 깊이 박히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 영화는 또한 말한다. ‘기억은 지워지지만 사랑은 지워 질수 없다’ 이 말은 조엘이 그녀와의 함께했던 기억을 지우려 했지만 그런 기억속의 뜨거웠던 사랑으로 인해 기억을 지운 것이 무의미 해진 것을 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나에겐 예전과는 다른 사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생겼다.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처음과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은 참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설레임이 끝까지 이어지지는 않는 것일까 .. 이 영화는 너무도 현실적인 것 같아서 나에게 막연한 두려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재회 장면에선 나도 마치 그들처럼 미래의 이별 따윈 잊어버린 듯 행복해 졌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라는 책의 한 구절처럼 사람이 현재 행복하다면 그걸로 족한 것 같다. 물론 미래의 계획은 중요하다. 그러나 미리 걱정을 하고 그런 부담감을 떠 안다가는 현재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이나 즐거움을 놓치고 말 것이다. 잠재의식 속에서도 사랑을 하는 그들을 보며 나도 함께 애태웠고, 재회를 하는 것을 보며 함께 행복 했던 영화였다. 또한 아직은 알지 못하는 이별에 대한 아픔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해준 영화였다.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것 같다.
과목명: 국제경제관계론제출일: 2009년 12월 1일교수님명:Report((글로벌금융위기 이후의 국제경제관계의 변화))학번:학과:이름:((목 차))서론 1) 금융위기란? 금융위기의 원인2) 현 금융위기와 대공황의 유사점과 차이점본론 1)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제경제 관계 변화2) G 20 국가 중 한국의 역할-국제 경제 관계변화와의 연관성3) APEC 시사점결론 1) 앞으로 국제경제 관계의 과제2) 느낀점“9월말 미국계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세계 경제를 깊은 침체의 수렁에 빠트렸고 한편에서는 1930년대 경제대공황이 재연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이러한 불안 기류에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기침체로 갑자기 급감한 세계 교역량은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교역의존도 비중이 높은 한국이 세계 경기침체의 여파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 이처럼 미국발 금융위기사태는 한국 뿐 만아니라 많은 나라에 타격을 주었고, 이로 인하여 글로벌 금융위기 사태가 도래하게 되었다.글로벌금융위기의 원인을 말하자면 세계화된 21세기 국제 관계 속에서 경제적, 문화적, 여러면에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는 국가인 미국의 위기가 원인이 된다. 세계의 여러나라의 경제에 이미 크게 자리 잡고 있는 미국인데, 이 나라의 위기는 여타국을 크게 흔들어 놓게 된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 사태를 쉽게 말하자면 상한고기와 썩은 야채를 갈고 빻아서 떡을 만들어가지고 웰빙 간식이라고 팔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 가치가 1억인 집에 대출이 2억이 들어있는 집 문서 지분을 10등분하여 다른 좋은 아파트 지분을 일부 섞어서 부동산 투자상품이라고 만들어 내는 것이다. 광고에는 좋은 아파트 지분을 싸게 살수 있는 기회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좋은 아파트만 보고 투자를 하게 된다.문제가 된 것은 1억짜리 집이 1천만원이 되면서 10등분의 의미가 없어지면서 문제가 커진 것이다 .이 의미없는 상품을 다시 돈으로 바꾸어달라는 고객이 늘면서 이것을 판 회사는 돌려줄 돈이 없어지고, 결국 망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 회사에 돈을 빌려준 것이 이 나라 저 나라, 우리나라 까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 파급 효과는 점점 커진 셈 이다.금융위기의 원인 제공인 나라가 미국처럼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나라가 아니였다면,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말이 결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위기와 맞물려 세계화된 국가들의 사슬처럼 묶인 경제관계가 글로벌 경제 위기를 불러 일으킨 것이라고 본다.위의 뉴스 기사처럼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이 재연될 것이라는 전망도 예상되고 있는데 30년대 대공황과는 상이한 점도 있고, 유사한 점도 있다.매일 경제신문에서는 대공황과 글로벌 금융위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렇게 제시하였다.공통점으로는 경기 침체 전 세계 확산, 주가 폭락과 투자 감소, 보호무역주의 확대, 신용시장붕괴 등을 언급하였고, 차이점으로는 주가 실업률 등 경제지표 차이를 들수 있다. 미국 대공황 실업률 25%였지만 금융위기 실업률 8.1%로 상이한 차이를 볼 수 있다. 또한 미 실업에 대한 사회안정망 강화와 각국 정부 발빠른 경기부양책 등이 있다.이처럼 경기침체를 세계 확산시킨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하여 국제 경제 관계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미국이 이끌어 왔던 수십년간의 세계 질서의 축도 흔들리면서 사회와 경제 및 국제적 헤게모니에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강대국 간에 고도의 정치적 투쟁이 벌어질 조짐도 엿 보이고 있다. 가장 큰 예로, 신 브레튼 우즈 협상체결이다. 금융위기 이후 가장먼저 나타난 현상은 미국 영국 프랑스 3국 정상이 모여 미국중심의 신 브레튼 우즈협상을 체결하자고 제안 한 것이다.즉 이말은 유럽연합이 미국을 밀어 줄테니 계속 패권국으로 있어 달라는 말일 것이다. 이에 가장 격렬히 반대한 나라는 중국인데 이 배후는 중국의 부상을 미국이 견제하는 것으로 보인다.오바마 정부가 힐러리 클린턴이란 국무장관을 내세워 아마도 세계 경찰 국가로써 그 영향력을 잃지 않을 것으로 보여진다.따라서 금융위기 이후의 국제경제 관계의 변화로서의 큰 축은 신 강대국의 부상을 견지하는 기존 패권국의 견제가 큰 축이 될 것이다. 과거의 세계 경제 질서 속에서 독자 노선을 걷던 미국의 견제 세력이 생겨났고, 그와 더불어 여러 타국의 부상 등으로 인한 다극화되는 세계질서 관계로 변화했다는 것이다.미국은 이러한 다극화된 경제 질서 속에서 독자적인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상호 협력, 공조하여 타 국가들과 더불어 발전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글로벌 금융위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마련된 G20 정상회의가 존재한다. 회의가 시작된 계기는 97년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비롯되었고, 정상회의로 격상된 것은 부정기적이었으며 위기를 극복하기위한 회의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G20 정상회의는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환경문제, 세계적 소득격차 문제, 새로운 금융 질서의 재편 등의 이슈를 다뤄 나갈 것이며, 선진국 중심의 질서재편이 아니라 선진국과 신흥국의 공동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체제로써 거듭나게 될 것이다.이러한 변화의 중간점에 한국이 위치해 있다. 선진국과 신흥 주요국이 공동으로 세계질서의 변화를 주도함과 동시에 이들 두 세력간의 연결고리를 한국이 맞고 있는 셈이다. 1차 정례회의(2010년)를 한국에서 개최하는 것도 여기에 기인하는 측면이 강하다.한국은 미국발 금융위기를 가장 먼저 극복해 나가고 있는 국가로써 세계의 이목을 집중 시키고 있다. 97년 이른바 IMF 금융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한데 이어 한국경제의 저력을 세계에 보여주었으며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이 한국에 거는 기대는 더욱 커지게 된 것이다.또한 동북아 협력의 중심점에 한국이 서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난 한중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아세안 +3’정상회의에 맞춰서 3국 정상회담은 동아시아 협력을 추동해 나가는 정상회의로 변모하였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동아시아 지역만 거대 블록을 창출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 변화 추세에 수동적으로 이끌려 갈 수 밖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번 회담을 계기로 동북아 3국이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또는 경제블록화를 만들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따라서 한중일 3국은 G20에서도 세계질서 변화를 주도할 만한 입장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또한 2005년 부산 APEC이 열렸다. APEC이라 함은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을 말하는데,APEC는 80년대 세계경제의 블록화 추세에 맞서 이 지역 국가들도 어떤 형태로든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논의체를 만들자는 취지 아래 출발했다.APEC은 협력 초기 단계에서부터 경제·기술 협력을 중시해 왔으며, 회원국 간 경제불균형을 해소하고 역내 경제·사회적인 복지를 개선함과 동시에 회원국들의 지속적인 성장과 균형된 발전을 도모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APEC에서의 협력은 선·후진국의 공여자·수혜자간 협력이 아니라 동반자적인 대등한 관계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러한 협력관계는 95년 오사카 행동지침(OAA)상의 협력원칙에 잘 나타나 있다.그러나 APEC은 회원국 간의 경제격차로 인한 입장차이가 상존한다. 선진국의 경우 무역·투자 자유화 촉진을 통한 시장개방을 원하고 있으며, 개도국은 경제기술협력확대로 실질적 혜택을 도모하고자 한다.APEC에서의 중요한 시사점은 경제격차의 입장차이 속에서도 선. 후진국의 동반자적인 대등한 관계에서의 후생증대의 추진일 것이다.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담은 G20국가 중에서의 한국의 역할처럼 선진국과 후진국과의 가교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의 커다란 의미가 있는 회담이었다.이와 같이 세계질서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동북아 지역의 중요성은 한층 강조되고 있다. 변화하는 세계질서 속에서의 한국의 역할은 막중할 뿐 더러 아시아 한중일 3국 협력의 중간지점에는 역시 한국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제 출 일: 2009년 12월 17일과 목 명:교수님명:Report북한 군대의 특성이 름:학 번:학 과:목 차서론북한군 창설과 북한군 역사본론가) 북한, 남한군의 기능과 특징나) 북한, 남한군의 군사 구조, 군사력비교다) 북한, 남한군의 군사 제도, 군사정책/사상결론앞으로 남,북한의 전망과 느낀점광복직후 한반도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 중국, 소련 등지의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던 애국인사들이 속속 귀국길에 올랐다. 대체로 민족주의, 자유 주의 정치 이념을 추구했던 인사들은 남한으로 들어왔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의 정치이념을 신봉했던 인사들은 북한으로 들어갔다.많은 공산주의 자들의 조직은 갈등과 마찰을 겪으면서 김일성 위주로의 빨치산파: 빨치산파 또는 항일유격대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과 이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성립된 정치 파벌이다. 일제 강점기에 만주 또는 중국과의 국경 지대에서 무장 항일운동을 했던 세력을 가리키며, 김일성을 중심으로 파벌을 구성했다.빨치산 파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빨치산파는 1946년 당, 정, 군의 간부를 양성하기위해서 오늘날의 김일성 대학 전신인 평양학원: 북한의 군사정치학교. 현존하는 대부분의 북한 군사학교들의 모태가 되었다.평양학원 을 설립했다. 그리고 5개월 여 뒤엔 1946년 7월초순 ‘북조선중앙 보안 간부학교’를 창설했다. 초기 북한군 간부 양성은 이 두곳에서 이루어 졌다. 평양학원은 미.소 공동위원회의 합의 사항을 의식해 군이 아니라 학원이라는 명칭으로 설립했지만 실제로는 비밀리에 군 간부를 양성했다. 평양학원은 군사교육도 중요시하였지만 그보다 정치 사상교육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따라서 이 학원 출신자 대부분은 북한군의 핵심 간부가 되었다.49년 1월 평양학원은 제 2군관학교를 발족하면서 정치군관 양성을 위한 정치부 훈련과 군사부 훈련을 병행했다. 제1군관학교인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는 보병, 포병, 통신, 공병을 비롯한 여러 병종의 초급 지휘관들을 전문적으로 키웠고 2년이라는 기간내에 양나로 통합한 지휘체제의 일원화가 되었고 ‘보안간부훈련 대대부’가 창설되었다. 이렇게 하여 북한군대의 형상이 점차 만들어 지기 시작한 것이다.북한지도부는 기존 무력조직을 일괄적으로 ‘조선인민집단군’으로 개편하였고 소련을 배우로 둔 소련식 제식훈련과 각개훈련, 소대, 중대, 대대의 전투훈련을 비롯한 병기학, 전술학, 공산당사, 참모학에 이르기까지 본격적인 훈련을 지도했다. 이같은 준비를 통해 북한은 조선인민집단군으로 개편한지 약 9개월 만에 완전히 정규군을 편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朝鮮人民軍, 영어: Korean People's Army, KPA):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인민군은 로동당 규약 제46조에 "조선로동당의 혁명적 무장력" 이라고 규정하여 당소속하에 있는 당의 군대·혁명의 군대로서의 성격을 갖는다.‘조선인민군’창설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북한은 육군의 창설 및 증강과 함께 해.공군도 창설, 확장했다. 조선 인민군 창설 후 북한 당국은 군비 강화에 끝나지 않고 군사훈련도 적극 실시했다. 북한의 청,장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제2보충 병력을 양성했으며,모든 고급 중학교 이상에는 배속장교: 편제(編制)에 따른 소속 부대를 떠나, 한동안 다른 부대의 지휘 아래 배치되는 장교. 특히 훈련 교관으로 학교나 훈련소 따위에 배치된 장교를 이른다.배속장교를 배치하여 학생들에게 조직적인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가. 북한군의 역사에서처럼 북한 군대는 정부 수립 전에 창설되었다. 북한은 선군후로를 외칠만큼 군대를 중요시하고‘군’이라는 통치이념으로 나라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따라서 북한군의 성격은 조국과 인민을 위해 서슴없이 목숨을 바칠수 있는 혁명전사가 돼야 함을 밝히고 있다. 즉 북한군은 혁명을 위한 군대, 당과 수령을 위한 군대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북한군은 소련의 해체와 동구 사회주의권 몰락을 겪으면서 사회주의 체제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서는 북한군을 정치 사상적으로 무장시키고 최고 사령관의 혁능력을 보유 한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군을 가장 중시하는 군사우선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군민일치’기풍을 강조해 혁명적군인정신에 기초한 사상을 전체 국민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이렇듯 북한 군대는 남침능력보유, 국가방위 뿐 만아니라 전 인민들의 정신사상, 북한 전체를 이끌어 가는 수령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다.또한 북한 군대는 경제, 사회통제 기능도 수행한다. ‘혁명과 해방’을 위한 중요한 무력수단인 동시에 ‘정권과 체제 유지’를 위한 핵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따라서 북한 군은 ‘사회주의체제 수호와 혁명과업 수행의 전위대’로서 체제보위기능 뿐만아니라 경제회생과 사회통제의 기능을 하며 북한정권과 체제를 이끌어 나가는 핵심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북한군과는 다르게 한국군은 북한처럼 수령만을 위한 군대가 아닌, 전 인민 군화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국가 방위의 기능을 갖고 있다. 북한군과 비슷한 점이 있다면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한국군을 특징짓는 정신적인 요소는 아마도 충·효·예 정신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충·효·예 정신은 홍익인간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으로써, 우리 민족의 생활규범이었고 역사발전의 원동력이었다. 군인들이 경례를 할 때 구호로 외치는 ‘충성’이라는 것이 바로 충효가 군인정신의 기본이라는 것을 체질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반복에 반복을 하면서 경례를 할 때마다 충성을 외치는 목적은 바로 나라에 충성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체질화시키려는 것이다.따라서 한국군은 혁명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국가에 충성을 다하며 국민들을 보호하는 방위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때에 따라서 대민지원 : 영농기 부족한 농촌의 일손을 돕거나 국가적 재난 발생시 피해 복구 지원대민지원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나. 북한 군사구조는 크게 국방위원회 산하의 인민무력부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무력부 산하의 7개의 부서로 나뉜다. 국방위원회는 체제위기를 해 따라 운용될 수 있다는 것은 개인의 의사에 따라 한반도와 전체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국방위원회 산하기구인 인민무력부는 행정기관중 하나로 우리나라의 국방부와 같은 역할을 하며 조선 인민군을 통솔한다. 또한 국가안전보위부는 한국의 국가 정보원에 해당하는 사찰 및 첩보기관으로서 주민의 사상과 동향을 감시하면서 반 체제사범의 색출과 수사를 전담하고 있다.한국 군대 또한 국방부와 대통령령에 의해 움직인다. 국방부는 국방에 관련된 군정 및 군련 기타 군사에 관한 사무관장. 국방정책 수림, 국방자원(인원, 예산, 장비, 물자 등)의 획득·배분 및 관리, 국방중기 계획 수립. 국방법력·제도 발전 등 군대의 전반적인 지휘 뿐 만아니라 국가 방위의 일을 전담한다.그러나 북한군과 한국군의 구조의 큰 차이로는 최고 사령관의 개인 의사만으로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이다. 한국의 국방부는 산하의 정훈공보관, 법무관리관(군 사법제도에 관한 계획 및 시행의 지도 ·감독 등), 감사관(국방부장관의 지휘·감독을 받는 기관·부대 및 산하단체에 대한 감사 등), 분석평가관(각군 및 기관의 분석평가 및 비용분석의 조정·통제),군비통제관 등 맣은 산하기구를 갖고 있으며 각 부서의 의견과 장관, 대통령령, 국민의사 등을 반영하여 군대를 통솔하는 것이 특징이다.북한군은 지상군(육군), 공군, 해군, 특수부대, 예비전력 등으로 한국군과 똑같이 나뉜다. 크게 한국육군과 북한육군을 비교하자면 한국 육군은 국가 보위의 주력으로서 평시에는 해·공군과 함께 전쟁을 억제하고 전시에는 모든 지상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다. 육군은 육군본부와 3개 군사령부, 항공작전사령부, 특수전사령부와 이를 지원하는 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11개 군단, 50여 개 사단, 18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육군은 주요 전력으로 56만 여명의 병력, 전차 2,250여대, 야포 4,850여문, 장갑차 2,300여대 등을 보유하고 있다.북한육군은 4개의 야전군급 전방군단과 4개의 기계화군단, 1개차는 아직까지 구식인 T-54/55/59형이 주종을 이루나 최근에는 주포구경이 향상된 T-62, 천마호 전차를 자체 생산하여 전방지역과 평양일대에 중점적으로 배치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차들은 자체 잠수함의 수중통기장치(水中通氣裝置).스노클 장치를 이용하여 수심 5.5m까지 도하할 수 있다.그 밖의 예비전력과 군사력을 비교하자면 한국군의 예비전력은 1968년 1월 북한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 기습사건이 있었던 그해 4월 1일부로 창설되었으며, 특히 한국전쟁과 월남전 이후 현재까지 북한의 전쟁도발을 억제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해 왔다. 예비군은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정기적인 교육훈련을 통해 각자의 임무수행 능력을 유지하여 향토방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전시에는 이에 추가하여 부대 증·창설 및 병력손실에 대한 보충요원으로서 현역과 똑같이 전투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현행법상 예비군은 현역복무 등 병역을 마친 후 8년차까지 복무토록 규정되어 있으며, 현재 약 304만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북한은 사회 전체가 거대한 병영체제로서 1960년대 초부터 4대 군사노선을 강력히 추진하여 전 인민을 무장화함으로써 대규모의 예비전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단기간 내에 소집할 수 있는 동원체제를 갖추고 있다. 14세부터 60세까지 전 인구의 약 30%를 동원 대상으로 하여, 현재 745만여 명의 예비병력을 보유하고 있고 연 30일간의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남한북한병력69만명117만명예비전력304만명770만명군단/사단/여단13/49/1919/75/69야포51008700다련장/방사포2004600전투함/상륙함120/10430/260잠수함1070전투기/지원기530/200830/520전차/장갑차2300/24003700/2100다. 북한군의 군 징병제도는 ‘초모제’라는 의무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만 14세가 되면 징집대상자로 등록되며 중학교를 졸업 하면서 군에 입대한다. 이러한 군제도는 한국의 징병제도와 같으며, 나이와 군 복무 기간에서만 차이를 보인다. 북한의 군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