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위한 참여관찰방법에 대한 에세이000000000이 글의 내용은 도시인류학적으로 걷기가 ‘공간을 위한 참여관찰방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필자의 논의다.그럴 수도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반박하지는 않겠다. 단지 도시인류학적으로 거리공간에 대한 연구가 참여관찰의 방법으로 심층적인 연구가 가능하나에 대해서 의문점이 있다.본지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거리는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이다. 거리는 강물처럼 흘러가 버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접촉이 도처에서 목격되는 공간이다. 이처럼 산만한 공간을 연구하는 경우, 문화적 경계가 뚜렷한 집단, 주요 정보 제공자, 라포(rapport)등을 강조하는 기존의 인류학적 조사방법을 그대로 사용하기는 힘들다.’ 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러한 도시공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걷기를 통한 참여관찰의 방법이 옳지는 않다고 생각한다.나는 걷기를 통한 참여관찰은 객관적인 지표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관찰자의 주관이 기준이 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은 거리공간을 걷기의 방식으로 참여 관찰하는 필자의 방법이 내가 느끼기에 단지 체험수기, 또는 일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도시인류학의 연구대상과 조사방법은 본지에서 적어놓은 세가지를 기준으로 파악하자면 참여관찰의 방법은 두 번째 사회관계망(social network), 유사집단(quasi-group)등 개인의 사회적 관계를 다루는 개념에서 가장 적합하고 필요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거리공간을 심도 있게 연구하기 위해서는 셋째, 양적 자료와 공식적 자료의 비중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했다. 거리공간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산만한 공간’이기 때문에 수많은 행위를 한정된 시간에서의 체험으로 연구하고 표현하기에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이것이 참여관찰로서의 거리공간의 연구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비해 발전한 기술은 많은 것들을 정량화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기에 점점 더 거대해져가는 인류학에서 정량화라는 부분은 가장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서울의 젠트리피케이션, 그리고 개발주의 이후의 도시에 대한 에세이0000000000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그 자체의 행위는 어느 분야에서나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의 젠트리피케이션이 큰 이슈가 되는 것은 그것이 일, 주거, 경제이라고 하는 인간 생존의 필수요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젠트리피케이션을 나쁜 것으로 정의하고 사회가 풀어나가야 하는가? 나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토박이들과 예술가로 대표되는 기존의 구성원들이 밀려나는 것은 부정적이지만 한 지역에 한정되어 있던 문화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관점에서 본다면 현상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다만 그것이 자신들의 의지가 아닌 외부의 요인으로 인한 반강제적인 이주이기 때문에 생존에 관한 점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은 문제의 요소가 맞다.예술가들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는 곳에 찾아가 문화를 생성한 것을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의 생산이고 새로운 소비에 대한 방식일 것이다. 또 이러한 것이 지역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현대적인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집약적으로 발전되던 방식에서 여러 군데로 분산되어 또 다시 새로운 문화가 생성되는 것이 도시의 문화에 있어서 다양성을 만들고 부분적인 활성화가 아닌 전체의 활성화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그럼 부정적인 요소를 줄이고 긍정적인 요소를 늘리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젠트리피케이션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 자본에 의한 무형자산의 갈취 문제인데 이것은 점차 발전해 나가는 법적인 규제와 주민들이 규정할 규칙들에 의해 진정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는 마을기업과도 같은 대안들을 이용한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며 토박이와 외부인의 상생을 도모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나가고 있다. 또한 한국의 젠트리피케이션은 현재 지방정권화 되는 추세에 맞춰 각각의 도시브랜드를 지키기 위해 이러한 요소들을 보호해 가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며 그에 따라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는 해결될지도 모른다.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시에 대한 에세이0000000000이 글에서는 제목과 맞게 워커빌리티 ‘보행가능성’ 또는 ‘보행친화성’에 대한 많은 장점들이 나열되어 있다. 건강, 환경, 경제, 안전, 행복 등 물리적 영역에서부터 정신적 영역에 까지 워커빌리티가 적용된다면 많은 부분에서 좋아질 것 이라고 한다. 물론 워커빌리티가 잘 이루어진 도시를 걷기 좋은 도시라고 한다면 그건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살기 좋은 도시를 뜻하지만은 않는 것 같다.하지만 이 글에서 워커빌리티는 엄청난 다양한 방향에서의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워커빌리티가 만능적으로 좋은 것 인지에 대한 의문점이 있다. 물론 기존의 가로는 자동차 위주로 설계된 불완전한 가로일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도 도시가 상업을 위한 도시 또는 주거만을 위한 도시일 때는 맞을 것이다. 하지만 공업을 위한 도시라면 어떨까? 경제적인 손해가 여타의 이득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것이다.도시는 이 글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국지적인 요소만 가져올 정도로 단순하지만은 않다. 물론 더 많은 부분에서 적합한 계획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분명 도시 내에서도 워커빌리티가 필요한 부분과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 명확할 것이다. 특히 산업단지와 같은 곳은 자동차로의 이동이 가장 중요시 되어야 할 부분이고 주거단지나 상업지역 같은 경우에는 워커빌리티는 가장 매력적인 장점이 될 것이다.
게오로그 짐멜의 ‘대도시와 정신적 삶’에 대한 에세이000000000게오로그 짐멜의 ‘대도시와 정신적 삶‘은 근현대 도시의 의미의 정립에 있어서 인간의 내면의 원칙에 근거하는 내용이다. 이 원칙은 모든 인간의 평등한 삶에 대한 지향하고 많은 정신적인 에너지를 그 것을 유지하는 데에 소비한다는 것이다. 시골의 삶과 도시의 삶이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감각적이든 정신적이든 생활의 리듬을 장소에 적응시키는 것의 차이라 서술한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것에 동의한다.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사람은 익숙한 환경에서 낯선 환경으로 전환을 맞게되면 적응을 하거나 반발을 하게 되는데 적응을 하면 큰 문제가 있지는 않으나 반발을 하면 정신적으로 익숙한 것을 찾는 향수병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대도시에 거주하며 생기는 정신적인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과연 도시에서 살게 되면서 낯설음만 생기는 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사람은 어느 기준 이상의 집단에 속하게 되면 다시 그 집단을 자신이 정한 기준으로 잘게 쪼개는 형식으로 정신적인 영향을 분류화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분류화는 머릿속에서 이해하기 쉬운 이미지나 숫자들로 정리된다고 생각한다. 분류화를 통한 관계의 정립과정에서 정신적인 편안함을 느끼게 되고 그 후 자신만의 개성과 특수성을 발휘할 조건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짐멜이 글에서 강조한 도시의 경제적인 영향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부분은 있다. 시작점에서 도달점까지 생기는 과정의 수가 많아지게 되어 개인의 정신이 버틸 수 있는 인지의 영역을 넘어서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이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좋고 나쁨을 구별할 것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운거 같다. 변화하는 환경이 인간에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러한 판단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단지 그것으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 다원적인 사고를 가지고 판단하여야 한다.
도시문화와 문화적 컨텍스트00000000000현대의 도시에 있어서 도시의 문화는 도시의 정체성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특히 문화 콘텐츠는 도시를 매력적으로 만드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단지 기능적인 도시의 역할과 구분은 도시의 생활을 무미건조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도시들의 브랜드화도 좀 더 다채롭고 특색있는 도시 발전 계획의 일환에서 생겨났다. 그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발전해왔지만 방식의 선택에 관해서는 자본이 많은 영향을 끼친다.예를 들면 중국 상하이는 국제적인 거대자본이 집약된 공간이다. 그래서 상하이는 물질적 기반시설을 토대로 종합적인 문화공간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이런 문화기반시설은 넓은 범위의 문화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진다. 국내도시에 대입해본다면 서울과 부산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쿠바 아바나의 예는 소자본 전문 집중화의 예이다. 소규모의 자본은 인적, 물적으로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 종합적인 문화 전반 모두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기 어렵다. 그렇기에 아바나는 재즈와 무용이라는 분야를 지정하고 전문화하여 문화 콘텐츠를 생산한다. 국내도시에 대입하면 빛과 예술을 메인으로 한 광주를 예로 들 수 있다.자본의 차이가 있더라도 이런 각 도시의 전략적인 문화 콘텐츠의 생산이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는 아무리 자본을 투입해도 어느 성장 이후에는 정체되는 한계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성장한계점으로 인해 상하이는 더 다양화 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하였고 아바나는 범위를 좁혀 특성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하지만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대한 경우는 다르다. 볼로냐는 기존의 도시산업의 유산으로 남겨진 물리적 콘텐츠를 활용한다. 이것은 적정한 자본이 있으면서 유의미한(역사) 콘텐츠가 있을 때 사용된다. 문화는 단지 소비되는 것이 아닌 기반시설의 재생산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존의 방직공장의 넓은 공간을 이용한 전시관으로서 용도 변화나 술집이던 공간을 카페로 탈바꿈하거나 같은 경우가 해당된다. 볼로냐는 이러한 과거에 유용했지만 지금은 무용하게 되어버린 산업시설들이 남겨져 있었고 물리적 콘텐츠와 역사를 바탕으로 문화의 소비과 기반시설의 재생산 방안으로 전략적 특성화를 선택한다. 이런 방식은 쉽게 문화 콘텐츠가 자리 잡을 공간을 구성할 수 있고 공간을 만들어내자 자동적으로 컨텐츠가 채워지고 문화가 소비, 생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