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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권 06-明淸時代의 國家權力과 紳士(완료)
    明·淸時代의 國家權力과 紳士Ⅰ. 序言*신사계층의 시대사적 중요성: 각 시대마다 사회발전 과정에서 국가의 기능을 가능케 한 윤활유 역할을 한 계층으로 신사가 명대 중엽 이후부터 청대까지 존속함Ⅱ. 紳士層의 形成1. 學位所持者의 出現* 명대의 학교체계는 생원→감생→관료의 방식으로, 과거체계는 생원→거인→진사→관료의 방식으로 구성되었음①生員· 동시(府·州·縣學의 입학시험)에 합격한 학생으로 성적에 따라 국자감에 진학할 수도 있고 향시에 응시도 가능· 향시에는 생원만 응시가능하도록 함으로써 학교가 과거체계내에 포섭· 요역우면특권(?役優免特權)은 종신토록 보장되어 명초부터 특권층으로 포함됨· 국가와 사회에서 사대부로 인정하고 스스로도 자각하고 공의식을 체득하고 있었음②監生· 명초에는 대부분 생원으로부터 선발된 학위소지자로 하급관료역할 수행· 생원과 같은 특권을 가짐③擧人· 송대에는 성시(진사시)에 단 1회 응시할 자격만을 가지는 자격에 불과하였으나 명초부터 자격만으로 입사가 가능하고 국자감에서의 학업도 허가· 특권도 보장받으면서 사대부 계층의 범주에 포함 될 수 있었음④과거제와 학교제의 사회적 기능은 두 제도가 합치되면서 전 시대와는 바르게 변화하였지만 명초에는 관직경력자(紳)와 학위소지자(士)를 신사(紳士)라고 인식하지는 않았음2. 學位所持者의 階層的 固定化①명초 생원이 사회문제를 제기하지 않거나 사회적으로 표출 되지 않았던 이유: 생원의 수가 중기 이후에 비해 1/5~1/10 정도로 적었고 국자감에 진학하는 수가 많았으며, 이갑제 질서하에 향촌이 안정적으로 기능하고 있었으므로②생원수의 급증· 15c중엽 이후부터 정치·사회질서에 이완현상이 나타나고 생원수는 급증· 생원의 공생경쟁률이 300:1, 400:1로 증가하고 향시의 경쟁률도 증가하면서 60~70%의 생원은 단대생원으로 끝날 수밖에 없어짐→출세가 어려워 지면서 당초에 가진 특권을 향유하면서 사리를 추구하는 보신가적 존재로 향촌에 정착③감생의 향촌사회 정착· 홍무 연간에는 정치사건의 빈발로 결원이 많았으므로 감생예감생이 생기면서 감생의 수는 증가하면서 선발되는 관료의 수는 감소→많은 공생·감생이 입사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향촌에 정착· 후에는 생원층과 동질화됨④거인도 입사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정착→이와 같이 미입사 학위층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특정 관인을 배출한 가문이 계속해서 관인을 배출하게 되면서 학위층의 계층 상승은 어려워짐→중기 이후의 학위 소지자들은 하나의 독자적 사회 계층으로 고정화됨3. 紳士層의 成立①명 조정의 학위층 포섭이유· 학위층을 통하여 유교 이념과 통질서를 유지시키고 관료보급원을 확보하기 위함· 사적으로는 보신가적 행동을 하기도 하였으나 공적으로는 사대부로서의 자아의식을 기반으로 국가의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도 전개하였기 때문· 하지만 청초의 고염무는 생원의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비난 하였음②미입사 학위층의 집단 행동· 미입사 학위층은 反 官的인 성격, 관직경력자가 하위층 간의 갈등, 그 지방의 민중여론을 대변하는 성격의 집단행동을 전개 했음· 명 중기 이후 미입사 학위층은 사대부로서의 자아의식 혹은 공통의 이해관계에서 발로된 계층 보호의지 등 광범위한 동류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국가 권력측에서나 사회에서는 이들을 ‘士’라고 하는 하나의 독립된 사회계층으로 인식 하고 있었음· 그러나 그와 같은 인식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는 명백하게 관직 경력자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계층으로 관직경력자와 평민사이의 독특한 ‘사회의 중간계층’으로 볼 수 있음③관직경력자와 학위 소지자가 신사로 연칭되었던 배경· 이념적으로 사대부로서의 자아의식과 공의식이 존재했음· 중국 전래의 좌주문생 전통으로 인한 상호간의 긴밀한 연관성· 명 중기 이후 성행하게 된 서원의 정치비판적 강학풍조로 인한 동지의식· 남송시대 사대부 들이 社 · 會 등의 문학동인 모임으로 발전했다는 점· 동향의식으로 발로· 공적 사적으로 이해가 합치될 때 관직 경력자가 학위층간에 쉽게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던 점④위를 바탕으로 명 중기 이후 신사의 동류의식이 집중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배경· 신사계층이점· 학교제와 과거제의 결합· 이갑제 질서의 해체로 이들이 향촌의 질서유지에 지도적 역할을 증진시켰다는 점· 국가권력과 일반 평민 모두에게 하나의 계층으로 인식되었다는 점Ⅲ. 明代의 國家權力과 紳士1. 元末 · 明初 動亂期의 支配層과 朱元璋集團①원말 자위 세력의 등장과 원조의 대응· 1330년대 말 산발적으로 농민이 봉기하다가 50년대부터 홍건적 대규모로 봉기하면서 향촌사회의 토호나 지주들은 의병, 민병을 조직하여 자위· 원조의 대응: 종전의 차별정책을 그대로 반영하여 화북을 일부 세력에는 통치질서의 보조 세력으로서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화남지방 세력에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②지주세력과 주원장 세력의 결합과정· 고립된 지주자위세력들은 자위를 계속함과 동시에 자신을 보호할 강력한 권력을 갈구· 주원장의 등장: 보편적인 반란집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대부와 지주세력의 포섭을 위한 유교주의와 권농정책을 표방-양자의 이해 합치· 양측의 결합 이후 사대부나 지주세력이 그들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방향으로 주원장을 유도-명조 통치조직 정비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2. 中期 以後의 社會變化와 紳士①명조 권력의 지배층에 대한 탄압과 회유· 명조 초에는 향촌질서의 회복과 재생산 기능 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사대부와 지주세력을 우대하지만 사회 안정후에는 이들의 비대화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됨· 황제의 독재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다루기 힘든 창업공신보다는 황제에게 순응하는 신진지배층 확보가 필요하여 4대 의옥사건을 차례를 일으켜 10만여명의 살해 하며 탄압· 탄압과 동시에 생원, 감생, 거인 등의 미입사 학위소지자에게까지 특권을 주면서 새로 지배층이 되게하는 방식으로 신진인재를 우익으로 끌어들이려 함②농촌의 계층분해 과정· 이갑제를 통하여 향촌질서가 유지되었을 때는 학위소지자와 관직 경력자들은 별다른 문제 없이 융합되어 있었음· 15세기 중엽부터 대외적으로는 북변과 동남해안이 불안해지고 대내적으로는 중앙과 지방의 정치지서가 해이해지기 시작함· 그런 가운데서도 농업 증대되어 갔으며 지역간에 상품생산의 분업도 진전→유통망도 발전하게 되면서 상품 · 화폐경제가 발달→세역이 증가하고 은납화되어감· 세역의 가중화로 농민의 부담은 가중되는 가운데 소수의 신사가 세호가는 광대한 토지를 집적하면서도 요역우면 특권을 이용하면서 세역을 탈면→탈면된 부분은 자연스레 다른 이갑호에게 전가되면서 점차 몰락해감③인구이동의 여파· 선진 경제지역→낙후지역, 농촌→금산구역, 농촌→도시의 방식으로 인구이동이 시작· 인구이동의 과정에서 새로 토착인과 객민사이의 경쟁과 갈등이 부가되면서 객민은 정착하고 토착인은 도리어 몰락하는 인구의 대류현상도 발생· 지역사회의 질서도 파괴되어 지역에 따라서는 민란이 발생하는 곳도 발생④신사의 대지주화와 이갑제의 해체· 신사와 비특권 이갑호간의 부담의 격차가 더욱 커지면서 신사는 비특권 지주들의 위탁받는 방식으로 점차 특권적 대지주의 성격까지 겸유하게 됨· 가정연간에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각지에서 진행되는 호구의 격감 때문에 이갑제의 향촌질서 유지 능력은 상실됨⑤명조의 대응 노력· 호구가 격감한 지역에 이수(理數)를 조절하거나 혹은 객민을 부적시켜 이수의 감소를 막고 반대로 인구가 격증한 곳에서 유입민을 수습하여 이와 현을 증편시킴으로서 전국적으로 이갑을 재편· 신사에 대한 우면액을 제한 하려함 but 이미 신사들은 지방에서 강력하게 성장· 십단법, 일조편법, 균전균역법, 순장편리법, 지정은제 등의 개혁은 국가권력이 표면적으로는 신사의 특권을 제한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결국 향촌에서 신사의 실질적인 지배력을 용인하고 그 힘을 이용함으로써 사회질서와 국가지배를 유지하려 한 노력의 산물임3. 紳士의 社會經濟的 役割①향촌에서 해체되어 가는 이갑제의 질서 유지 기능의 공백부분을 대신 담당하기 시작-국가권력이 신사의 사회적 지배력에 의지하고 신사는 이를 배경으로 그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상호의존 구조가 형성②향촌에서 신사의 역할(3가지)· 질서유지 역할: 신사의 공의식과 위기의식의 발로· 경제적 역할: 공의식과 사적 향약, 서원 등의 강학, 혹은 일용유서(日用類書), 선서류(善書類)의 발간으로 향촌의 교화 담당③이갑제 체제의 역할 대행· 종래에 이갑제하의 이장이나 이노인이 수행하던 공공부문의 대사에 대한 건의, 조언, 향촌여론의 환기, 향촌여론관에의 전달, 필요한 노동력 혹은 경비의 염출, 필요한 공사의 감독, 상 · 하 관청간의 이견 조정등의 문제에 대하여 개입하거나 영향력을 행사· 해체된 이갑제 질서에 대한 공백 보완을 국가와 사회에서 강력하게 원하고 있었으므로 신사는 보다 강력하게 추진함과 동시에 마지막 역할까지도 추가 할 수 있었음· 향촌의 이해와 신사의 공의식 혹은 사적 이해와 합치되는 경우에는 신사는 평민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여론을 지배하기도 함④순기능과 역기능의 동시등장· 순기능: 이갑제 기능의 일부를 대행함으로써 왕조의 지배체제를 유지 하는 데 기여· 역기능: 미입사 학위층의 수가 급증하였고 그들의 또한 사리추구활동을 전개하였으므로 특권만큼 농민의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그만큼 사회불안을 조장Ⅳ. 淸代의 國家權力과 紳士1. 明末 · 淸初 動亂期의 紳士와 淸軍①명말의 혼란과 멸망· 17세기 중앙의 당파싸움과 행정의 부조리, 지방의 신사의 영향력 남발과 사리추구의 부작용, 경제적으로는 만력삼대적 후의 재정적자가 민변을 발생시켰고, 대외적으로는 청이 발전하면서 압박· 멸망: 각종 반란 세력 중 이자성의 반란세력이 북경을 함락시킴으로써 명은 멸망②청의 신사층 포섭 노력· 명 멸망후에 순조롭게 입관하나 반란세력과 남명정권의 저항, 점령지역의 질서유지의 곤란으로 인해 우익세력의 확보가 절실했던 상태임· 도르곤은 순치제의 즉위조에서 ①한인 신사의 기득권과 재산 보호, ②관리에의 임용, ③과거 · 학교 등 명대제도의 답습, ④정규의 세역외의 일체의 가파(加派)중지 등을 약속하면서 신사층을 포섭하려 함(이후 동일한 내용을 거듭천명)③화북지방 신사들의 협조: 이자성군과 청군의 침입과 유구, 토적의 활동으로 거의 무질서 상태에 놓여 있었던 화북 지방의 신사들은 청조에 협조④수 과정
    인문/어학| 2011.12.17| 6페이지| 1,500원| 조회(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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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권 05-明·淸代의 農民反亂(완료)
    明?淸代의 農民反亂Ⅰ.머리말(1)명?청대의 농민반란 조감의 주의 사항①명?청이라는 왕조의 교체와 농민반란의 성격의 관계가 해명되어야 함②두 시대의 반란을 구분짓는 성격상의 차이가 보여야 함③두시대의 반란의 기저에 복류하는 연장선의 해명④농민반란의 규명: 농민의 범주에 대해서(민중이란 용어와의 구분여부?)※명청대 농민반란의 과정: 명대 중기 등무칠의 반란(형양의 반란)→이자성과 장헌충 세력을 중심으로 한 명말의 반란→청조 정복기의 농민반란→청 중기의 백련교도의 난→1813년 천리교도의 반란(2)명청대의 농민반란의 특징①명대의 주요 반란은 종교적인 요소가 박약→청조때는 종교적인 측면이 보임②청대는 만주족의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띔③민중반란의 경우 민중생활의 불안정이 주된 배경을 이룸(형양의 반란, 명말의 반란, 가경 연간의 백련교도의 난)Ⅱ. 明末의 農民反亂1. 反亂의 발발①명말의 농민 반란 과정· 원인: 기근에 따른 농민의 기아폭동에서 확대 발전-기아에 몰린 농민들이 부호들의 곡식을 약탈하거나 관권과 충돌하면서 유구(流寇)세력으로 성장· 발전: 관리들에 의해 토적, 토구로 불린 세력들이 초기의 분산적 단계를 넘어서 왕가윤이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차츰 결집된 반란의 형태를 구축②병사들의 반란참여(兵變)· 명말 만주족의 압력으로 변진(邊鎭)에 양식의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병사들이 행군하는 동안이나 주둔지에서 이탈하거나 폭동을 일으키는 일이 빈번·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이 기존의 농민 폭동세력과 합세하면서 반란세력으로 성장· 역졸들의 참가: 명의 역참 축소로 생계수단을 잃은 역졸들이 대규모로 반란에 동참③왕가윤 세력의 변화와 명의 대응방식 변경· 왕가윤 등의 반란군이 산서성으로 세력을 확대→1631년 왕가윤이 부하에게 살해 되어 반란군은 구심점을 상실→1633년까지 산서성에서 세력을 유지· 명군의 대처방식 변경: 반군을 초무하는 방식에서 적극적으로 강경진압을 시작하여 산서성 · 하남성의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방위선을 구축하고 압박을 가함2. 이자성의 대두와 대순정권①출생~반란 가담까지· 1606년 섬서성의 다소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에는 글을 익힐 수도 있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전호로서 지내다가 역졸 생활· 역의 철폐로 병졸이 되었다가 병졸의 반란 후 당시 큰 세력을 지녔던 왕좌괘의 부하로 반란군의 생활 시작· 당시 반란분의 원인: 명의 정치적 군사적 약체화와 더불어 왕조의 가혹한 수탈이 체제의 기초인 농민층을 붕괴시켰고 반왕조적 세력을 성장시켜 간 것②독자세력으로의 성장· 1635년 하남성 형양에서 반란군 각파의 회의를 가진 이후부터 명군에 대한 통일적 작전 수행의 주장하며 제파의 승인을 얻어냄· 합의에 이르는 데 이자성의 역할이 두드러져 반란집단 안에서 지위와 위상이 상승→우두머리 고영상이 체포되자 그의 틈왕 칭호를 계승하여 독자세력으로 성장③이암의 등용과 낙양 점령· 세력의 성장: 하남성에서 기아농민과 소규모 반란세력을 흡수하여 성장-정치적인 성격을 지닌 대민정책으로 인기 획득· 이암: 부유한 거인 출신으로 백성에 대한 안무책과 지식을 예우하여 포섭하는 방법으로 이자성의 오른팔 역할 수행· 낙양점령과 그 후: 1631년 낙양을 점령하고 유구적인 성격을 탈피하여 거점을 확보하여 중요 도시에 대한 공격을 개시함과 동시에 주변세력 통합④대순건국과 명 멸망· 호광성등지로 계속 영역을 넓히면서 관료기구, 지방행정조직도 갖춤· 1644년 새로운 왕조인 대순의 개창 선포(연호는 영창)-효과적인 정책으로 지역안정을 도모함· 명 멸망: 40만의 병력으로 태원을 함락하고 북경을 점령하여 대순정권 성립의 목표 달성⑤이자성의 40일 천하· 걸림돌: 새로운 왕조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나 권력구조의 취약성, 직접적인 지배영역도한정됨 & 산해관의 오삼계와 연합하고 있는 만주세력의 위험요소로 대두· 이자성의 몰락: 청의 도르곤의 공격에 의한 패배로 40일 만에 유구적 농민군으로 전락→퇴각을 계속한 끝에 1645년 호북성의 산중에서 자살3. 장헌충의 활동①출생~대서정권까지· 섬서성의 빈농가정에서 출생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일찍 군적에 들어 연수진의 병사가 됨· 범죄사건에 연루되어 처벌 받기전에 도망쳐나와 반란의 대열에 참가-왕가윤의 부하로· 영양의 13가 72영의 회합에서 처음으로 이자성과 접촉· 반란군 쇠퇴후 사천에서 다시 흥기하여 호북·안휘성의 5개의 반군진영을 규합하여 독자세력으로 성장-대서왕(大西王)을 칭함· 사천성에서 성도를 장악하고 국호를 대서 연호는 대순으로 정하여 국가 건설②장헌충의 이해되지 않는 주민의 대량학살· 처음: 향신, 공감, 생원등의 지식인계층의 성도에 모아 살해→가족을 모두 실해· 1646년 부터는 위소의 병사들 가운에 노약자를 살해하고 성도부의 36현의 전주민을 모두 살해→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며 전사Ⅲ. 淸 嘉慶 白蓮敎亂1. 社會經濟的 배경인구가 희박하고 척박 삼성교계지역으로의 대량 이주: 사회불안요소로 작용WHY? 기아, 궁핍, 조세의 체납(抗量)①명 중기에서 말기의 인구이동· 사성교계지역(섬서남부, 사천 동북부, 하남 남서부, 호북 서북부)으로 인구 밀집· 산서, 섬서, 강서지방의 인구가 가장 많이 유출②명말·청초~청 중기까지의 인구이동· 사천지역으로 가장 많은 인구이동: 명 말 장헌충의 난으로 인한 인구 격감으로 이민정책이 시행된 것이 주효· 대만으로 이동: 복건, 광동성 등의 동남 연해지방인이 주로 이동· 만주로의 이동: 산동·하북성인들을 중심으로 본격화(18c)2. 三省交界地(섬서·사천·호북)의 사회※지형: 한수유역의 평야지대와 산간지역으로 구성: 산간지역에서 주로 반란세력 공급★반란세력공급의 원인①행정력의 미약으로 치안의 불안정과 함께 주민들이 관리의 압박을 피할 수 있는 조건이 됨②이주민들의 안정적인 농작물 생산관리에 소홀: 연작으로 지력이 쇠해 계속이동하면서 지주의 이익만 상승③흉년시 약탈과 유적의 발생 확률 증가④산업에서 광업, 수공업이 발달:목재, 종이, 철, 석탄 생산3. 교란의 전개①시작: 건륭제시기의 백련교 계통의 민간종파(혼원교)의 탄압→중요 인물이었던 유지협이라는 인물이 1788년 교파의 재건을 시도하면서 반란사건의 계기 마련→유지협의 삼양교를 재건하여 호북성지역에서 많은 교도를 확보→1794년 전국적인 민간종파의 탄압과정에서 타격-유지협은 살아남아 포교를 계속함②청의 대응 변화· 1796년 호북성, 사천성에서 반란이 급속도로 확산→청군의 공격태세가 정비되어 반공에 나서자 교군은 도시와 산채등의 거점을 잃고 약화· 호북교군과 사천교군이 합류하면서 크게 신장되지만 만주족 군관들이 직접 나서면서 관군은 통일된 기동력으로 사천성의 교군에 압박→유구화 현상③종언· 건륭제가 사망하고 가경제의 친정 후 대응 방식 변화: 내부교란과 민중의 자위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시진(市鎭)에 성벽 구축, 주변의 농민을 성채로 수용하여 보갑을 편성하는 등 향촌 방위체제 구축→교군의 보급을 차단· 1800년 들어서 결정적인 패배로 1805년 이후로는 반란은 소멸4. 교란과 白蓮敎①혼원교, 수원교의 교리의 원천으로서의 백련교 교의(무생노모, 미륵불 사상)※무생노모: 천지가 있기전에 있었던 존재로 우주만물과 억만의 아녀를 낳은 존재, 아녀들이 동토에 떨어져 타락하자 신불조사들을 하범 시켜 선도함으로써 윤회의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하려 함. 이후 미륵불장세의 시대에 아녀들이 모두 구제되어서 무생노모를 만나 장생불로하는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고 믿음
    인문/어학| 2011.12.17| 5페이지| 1,500원| 조회(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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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권 04-淸朝政權의 成立과 發展(완료)
    淸朝政權의 成立과 發展머리말①청조사의 구분법과 연구과제· 入關傳史: 명말에 발흥하여 후금을 건설하면서 세력을 확장시켜 대청으로 발전하게 되는 시기· 淸朝: 명조가 멸망한 이후 북경에 진주하여 중국을 통치한 시기· 연구과제: 입관 전의 만주사회에 대한 성격의 파악과 중국정복의 과정과 통치권의 확립과정에서 그 성격이 어덯게 변화되면서 정착되어갔는가 하는 문제 검토②연구의 시작: 정복왕조론-북방민족의 한족에 대한 지배라는 측면· 吸收論: 북방민족이 중국본토에 침입하여 정치적으로는 한민족을 지배하였으나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한족에게 흡수되었다는 이론· 修正論: 요,금, 원, 청의 경우에는 일방적인 흡수가 아닌 한족도 문화적인 측면에서 북방민족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청조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는 만주족의 고유한 성격, 사회구조등에 대한 분석이 전제되어야 함Ⅰ. 滿洲族의 興起와 淸朝의 成立1. 明代의 東北地方(1)동북지방의 지배방식①지배구조(요동도지휘사사-노아간도지휘사사)· 요동도사(요양)· 대녕도사(대녕)· 노아간도사(노아간): 각 지방 위소를 분할통치· 특징: 도사와 위소는 본디 목적인 군사 뿐 아니라 민정까지도 관정하는 군민 합일의 지방행정기관②요동도사의 경제적 발전· 軍屯의 설치: 군량의 자립 성공· 철공업의 발달, 마시(馬市)의 개설: 마시를 통해 주변민족을 통제 내지는 지배수단으로 이용③노아간도사 지역의 지배방식· 요동도사와는 달리 간접적인 지배의 성격이 강함· 흑룡강, 오소리강 유역으로 광활한 지역의 몽고, 여진 계통의 북방민족이 생활했다는 점에서 위소를 부족의 장에게 통치를 위임하는 일종의 羈?政策 시행· 위소의 행정에서는 명조측에서 장악하고 있었고 위소는 명조에 대하여 군사, 경제적 의무 담당→청조는 노아간도사 휘하의 여진계통의 집단에서 성장 한 것!(2)여진의 구조①해서여진: 송화강 하류지역을 근거로 수렵생활②건주여진: 발해의 고토와 오소리강 유역을 근거로 농경생활을 영위-일찍부터 명조와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 누르하치의 성장의 동력③야인여진: 송화강 북출신-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주변 부족들을 공격하기 시작②누르하치의 시기구분: 만주고토의 시기와 요동지배기· 만주고토의 시기: 흥경을 중심으로 만주족의 통일과 그 과정에서 누르하치의 지배권 확립· 요동지배기: 요동지역을 자신의 근거기반을 이동시켜 한인까지 자신의 영역속으로 흡수시키려는 요동지배 모색의 시기③여진부락의 집단 분류· 건주부:· 장백산부: 건주부와 함께 건주여진 계통으로 구성· 동해부: 야인여진 계통· 훌룬부: 해서여진 계통-당시에 가장 강성④누르하치의 여진 통일과정: 건주 5부 공략→훌룬4부, 동해 2부, 몽고계통 3부 연합군에 승리→훌룬 4부와 혼인으로 동맹관계 설정→장백산부를 멸망시켜 건주여진 통일→훌룬 4부를 분열시키는 방법으로 여진 3계통을 통일(2)만주 팔기의 성립과정①구조· 니루: 화살이라는 의미로 혈연적 성격을 지닌 10인에서 지연적인 성격을 지닌 300인을 단위로 한 행정적이며 군사적인 조직으로 변화· 조직 우두머리 임명: 1니루에 1명의 니루어전→5니루에 1명의 잘란어전→5잘란에 1명의 구사어전→1구사(gusa;旗)· 조직 순서: 1607년 홍, 황, 나, 백기, 1616년 양홍, 양황, 양남, 양백의 4기가 첨가(누르하치와 인척관계가 있는 버일러가 구사를 통할)②팔기의 구조에 대한 문제 1. 니루의 기능과 구성원에 대한 문제· 만주족을 대상으로 한 행정조직?: 니루의 구성원 300명이 만주족이고 이들중에서 병사인 甲士가 선발되었다면...· 양병모체?: 갑사가 니루의 구성원이 아닌 만주족으로 충원되고 갑사보다 하위 신분인 주션이 니루ㅡ이 구성원이 되어 주션과 토지가 결합하여 니루이톡소를 형성하여 갑사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당시 만주사회의 신분문제와도 연결· 양병모체: 이르건(일종의 자유민층)이 갑사로 충원되고 그 아래에 양병모체인 니루의 구성원이 주션(예농층)이 있고, 아하로 불리는 사적 노예가 최하층의 존재하였다는 3계층 구성으로 보고 있음③팔기의 구조에 대한 문제 2. 주션의 성격· 주션을 만주사회의 자에 대한 문제 3. 니루와 지연성이 강한 또다른 사회조직인 가샨과의 관계, 종족적 결합관계를 나타내는 무쿤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문제-역동적이고 전반적인 구조로 접근할 필요성이 존재(3)후금의 성립과 요동공략①1616년 후금을 건국하고 여진족의 후예임을 표방하고 명에 대한 침략전을 개시하여 요동을 공략②요동시대 초기의 정책· 한인: 사민책, 만한합주책 시행· 토지분배: 한인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노동력, 곡물, 병역 등의 의무를 부과(計丁授田策)· 만주족: 니루조직을 통하여 지배함으로서 만한을 구분하는 정책 실시③한인의 예속화정책· 배경: 만한합주책에 의한 만주족의 한인 착취, 경제상정의 악화로 인한 착취의 심화, 토착한인과 후금에 귀속한 이주한인과의 갈등· 내용: 심양으로 천도하면서 저항 한인들을 학살, 구제된 한인을 대상으로 톡소를 편성하여 만주족 지배층으로 하여금 장악하게 하는 편정입장책으로 전환(編丁立莊策)3. ‘大淸’으로의 發展(1)후금에서 대청으로 발전 측면: (홍타이지의)만주사회내에서 지배권 공고화①배경: 누르하치가 사후의 국정 기본체제를 8왕합의제로 할 것을 공표했으므로→홍타이지는 칸의 지위를 계승했을 뿐 권력의 8분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음 & 만주8기에서 2개의 기밖에 장악하고 있지 않고 전권을 행사할 수 없었음②왕권 강화책· 자신의 관할인 정황 · 양황기의 무력을 증강· 도르곤을 중용하여 아저거의 실책을 빌미로 양백기를 장악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2)對 한인 정책 변화①요동 한인에 대한 정책 변화· 톡소의 재편: 톡소의 규모 축소, 만주족의 착취 방지를 위해 만한 별주책 시행· 만한 분리정책의 결실: 몽고팔기, 한군팔기가 성립②지배층 출신의 투항 한인관료에 대한 우대책: 네가지의 상황에 따른 보상방편 마련· 요동출신의 무장장집단들이 투항하기 시작· 산동삼소도(山東三所徒)라고 하는 모문룡 휘하의 무장출신이 투항· 한인관료에 대한 우대책이 유효하게 작용하여 국가조직의 정비로 이어짐(3)국가조직의 정비와 대외 관계안정①군정과 민정 합일형태에서, 몽고의 분열을 기회로 도르곤을 파견하여 내몽고를 병탄③대청의 건국: 1636년 大淸으로 국호를 개칭하고 연호를 숭덕으로 호칭: 다민족 국가의 성립과 요동지배의 안정확립의미Ⅱ. 淸朝統治權의 確立1. 中國內地의 征服(1)중국내지 점령까지의 과정①청조의 중국진입에 있어서 문제· 중국내의 여러 세력을 소멸시켜 중국 통일을 완수· 대다수의 내지 한인을 성공리에 지배하는 것②청의 제위계승문제와 도르곤의 정권장악· 1643년 태종 홍타이지 사망이후 장자 호거를 추대할는 양황기세력 vs 도르곤을 추대하려는 여타세력 대립· 결과: 태종의 9자 풀린이 순치제로 즉위하고 도르곤과 지르갈량이 공동섭정· 후에는 도르곤이 쇼토, 호거등을 제거함으로써 양황기를 세력을 약화시켜 사실상 전권 장악③명의 혼란상과 타개과정· 농민반란이 지속되면서 장헌충과 이자성 집단 대두-명조의 멸망·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청조와 연합하여 산해관 부근에서 이자성군 격파· 청조는 명조를 계승하여 전중국 통치한다고 포고하지만 각처의 농민군, 토구, 완강한 한인의 저항에 부딪침(이자성, 장헌충)④한인들의 항쟁과 이에 따른 과제· 명 멸망후 한인들은 명조를 재건하고자 하지만 동림파와 비동림파가 대립하면서 분열되면서 청조의 대항하지 못하고 격파당함· 관료, 지주가 중심이 된 영력제의 남명정권과 농민군의 잔여세력의 항청전은 1661년에 소멸하고 대만의 정성공 집단외에는 항청세력이 제거· 비조직적이고 자위적 성격이 강한 한인들의 저항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형태가 아닌 방식으로 이들을 흡수해야만 함⑤청조와 향촌신사의 결합과정· 향촌 자위집단은 신사와 대지주를 중심으로 구성-향촌의 수호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이익 수호에 중점· 명조의 소멸로 인한 사회적 불안정에서 해결해 줄 강력한 국가권력을 요구-이를 충족시켜줄 필요성이 존재· 청조는 치발령, 圈地政策을 일시적으로 시행했다가 적극적으로 신사 포섭에서 나섬: 신분적 특권 인정, 관직 임명, 학교·과거제의 문호를 넓혀 한인신사층을 파격적으로 등용, 토구와의 대결서는 국가권력의 무력화, 그에 따른 유구와 토적의 발호, 그 피폐의 장기화와 심화로 인하여 새로운 질서의 확립이 신사층으로 절대적으로 요구되었음⇒청조와 신사의 결합(화북지역과 비슷하면서도 남명정권의 존재와 그로 인한 동란상태의 지속이라는 구체적 상황에서의 차이)(2)도르곤 섭정왕의 사망이후 친정체제로의 이행과정(한족 중심의 지배형태와 한인관료의 등장 vs 한인신사에 대한 탄압기)①도르곤의 양백기 세력에서 순치제를 기주로 하는 양황기 세력의 주도권 장악: 하지만 국가의 중요정책은 의정대신회의에서 결정되었고 6부 행정도 사실상 유력한 귀족들에게 좌우되는 등 친정은 실시x②한인관료의 성장과 제도변화· 순치제 자신의 입지 확보하려는 노력의 일환-유교관료의 특성상 순치제의 친정을 보다 강화시킬 수 있는 집단· 내각표의제도 채택: 화제의 지시가 내원에 경유하도록 함으로써 내원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상승, 명조의 환관제 채택③순치제의 친정체제 확립의 이유: 권력구조의 문제-청조특유의 정치조직인 팔기 중심의 권력분산에서 중앙집권적인 황제권력의 확보를 위한 시도로 이해 해야 함2. 三蕃의 亂의 平定과 臺灣征伐(1)강희제의 청조의 지배력 관철노력①강희제 초기의 4대신 보정· 소니, 숙사하, 어빌룬, 오보이의 4대신이 보정: 만주의 우월성과 만주적 가치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함· 순치제때 중국식 제도로 변화된 제도에서 만주적 정치조직과 행정능률을 강조한 방식으로 중앙정부 기구를 개편· 청조의 지배권 관철 둘러싸고 지향성에 대한 문제임과 동시에 순치친정기의 중국화의 문제에 대한 반성으로 만주 우위의 온존, 군사적 성격 우위의 온전을 위한 노력으로 보여짐· 강남신사의 탄압: 정성공의 남경공격사건을 계기로 청조에 대해 군사적, 잠재적 위협 세력으로 판단된 강남신사에 대해 분명한 장악을 위해 강남시간을 탄압하여 위축, 주소안을 통해 국가재정을 안정화②강희제 친정 후 중국지배 안정 - 1. 군사정복· 만주족의 자부심을 고취시키면서 만주귀족을 한인관료와 격리· 만주관료의 고위직 보장함
    인문/어학| 2011.12.17| 7페이지| 1,500원| 조회(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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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권 03-明末·明初의 社會變化(완료)
    明末·明初의 社會變化Ⅰ.머리말※명말 · 청초의 획기론에 대하여①중국사회의 정체성의 비판극복과 세계사적 법칙성 발견을 위하여 명말, 청초의 상품생산의 발전의 역사적 성격을 전향으로 평가②일조편법에서 지정은제로 이어지는 부역제도의 개혁은 지주제의 획기적 변질을 반열하는 것이고 지주제의 형태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것이 중공정권의 개혁이라는 인식③명대 후기에 해체되어가는 이갑제 질서속에 신사층이 그 기능을 대신하여 감⇒토지제와 부역제도의 변화, 사회구조 변화, 상품생산의 전개등의 변화가 동시에 진행된 획기적 시기가 명말, 청초라는 의견Ⅱ. 鄕村秩序의 解體와 再編1. 里甲制秩序의 解體(1) 이갑제의 해체 원인①이갑제는 무엇인가· 의미: 자급자족이 가능한 110호를 1리로 편성하고 인정과 잿나에 다과에 따라 호등을 구분하는 제도· 편성: 상등호 10호를 이장호, 나머지 100호를 갑수호로 하여 10갑에 10호씩 배속매년 이장1명과 갑에서 차출된 갑수 10명이 이내(里內)의 부역징수, 치안유지, 재판, 호적대장 작성등의 향촌 통치 기능 수행이장 외에 이노인을 별도로 설치하여 이내의 여론을 대변하고 질서유지와 권농·상호부조 역할 등을 맡도록 하였다중국 고래의 관습법적 지배자를 실질적인 지배자로 인정하게 된 것②이갑제 해체 원인· 10년 1회의 윤번제인 이갑정역 때문에 권력이 특정한 호에 고정화되지 못함· 명조의 부역 원액주의, 원적 발환주의 원칙· 은에 대한 수요 증대로 부역의 은납화 진전된 것이 농민의 부담 가중③이갑제 해체의 모습들: 농촌의 계층분화, 호구의 격감, 이구이동, 반란의 봉기(2)이갑제의 해체 과정①과거제와 학교제를 통한 관직 경력자와 학위소지자 10만명의 특권층존재: 대개 지주였고 요역면제의 특권을 향유-숫자가 전국민의 0.15%밖에 안되었으므로 사회도 비교적 안정되었고 향촌의 재생산 유지기능도 이장, 이노인을 통하여 어느정도 수행②15세기 중엽의 변화· 명말 특권층의 수가 두배 이상 증가-점차 토지를 겸병하고 부역은 기피· 역의 할당 기준이 은납화 진정과정발전, 상품생산의 전개와 서민의 고양에 따라 전호가 자립화가 진전되면서 항조운동과 노변 때문에 비특권 지주의 소작료 수취가 제한· 서리의 부정, 토지의 편중과 부역의 가중 및 불균등, 상인과 고대리 자본의 수탈로 인해 갑수호와 더불어 이장, 양장호 까지 몰락⇒이갑제 질서 유지가 불가능해짐2. 鄕村秩序의 再編(1)명의 이갑제 해체 따른 대응①원적 발환주의의 완화와 부적주의 채택· 원적 발환주의: 외래의 유민을 원적지로 돌려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 유이민은 이로 인해 부역을 탈면하여 원적지의 이갑호가 몰락하게 됨· 변화: 정통제때 완하여 객민이 많이 유입된 지역에 부적시킴으로써 현이나 리를 증편시키는 부적주의 실시→But! 되도록 원적지로 보내야 된다는 원적 발환주의는 유지했으므로 부적되까지 객민도 요역을 탈면 할 수 있었음②부역제도의 개혁: 일조편법· 내용: 요역의 부과기준을 전토로 하여 하세(夏稅)와 추량(秋量)을 일괄징수하여 은납화하고 신사의 우면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진행· 이점: 부역의 수취 간소화, 유력호의 탈세나 관청의 부당 착취 근절 가능호수 편성을 기초로 한 이갑제의 존재의의는 크게 약화· 문제: 은, 전의 비가(比價)문제, 납기가 추수직전인 점, 이갑정역 중 행정관리 부분이 남아 있던 점③향촌사회에서 교화와 상호 부조, 치안 유지: 향약, 보갑제· 향약: 왕수인이 강서 남부에서 실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실시-향촌의 교화, 민중 상호간의 권선징악, 상호부조, 질서 유지를 도모하고 부재지주와 객상, 고리대의 횡포를 막기 위해 권장-가정, 만력때 각지역에서 실시· 보갑제: 왕수인의 십가패법의 효시로 10가가 1갑을 조직하여 연대책임으로 도적 방어와 향촌의 질서유지 담당· 맹점: 전국에서 획일적으로 시행되지 않았고, 국가존립의 기초인 부역제도와 관련이 없고, 명목상으로 이갑제와 이노인제가 존속하는 상황이어서 서로 상충 & 이와같은 조처를 추진하는 주체도 지방관이나 향촌민의 여론을 받아들인 신사층이었음⇒명의 개혁과 신사와의 관계: 신사는 명 중기 이치 친정기, 강희 연간에 과장안, 소주곡묘안, 강남주소안, 장씨사안등의 강남신사를 탄압②균전균역법의 실시· 시초: 명말 동림, 복사계의 공의식으로 시도되었으나 보수적인 대향신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완결을 보지 못한 채 청조에 정복· 재시행: 강희초에 강소·절강지방을 중심으로 시행· 내용: 일정 호수(戶數)를 기준으로 하는 이갑제(里甲制)의 결함을 바로잡아 전토(田土)를 기준으로 이갑제를 재편성하고 요역을 은납화→지정은제로의 개혁을 가능케함· 문제: 토지와 소유자의 빈번한 이동 때문에 토지를 일정 기준면적으로 유지하기가 극히 여러움→재산 정도에 따라 세량징수를 보다 확실히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세징수제도를 개혁한 것이 지정은제고 그러한 방향으로 향촌질서를 개편한 것이 순장편리법③지정은제의 시행과 그 변화· 일조편법 내용: 종전의 전부(田賦:稅量)와 각종 요역을 지부은과 정은으로 납부· 지정은 제로의 변화: 과세대상으로 인정총액을 고정시키고 그 이후에 증가는 인정에게 정은을 부과시키지 않는 성세자생정을 설정하여 정은 총액 고정→고정된 정은이 지부은에 합산하여 부과하여 토지세 한가지로만 세금이 남게 됨· 이후의 국가 정책의 변화: 토지세의 원천인 전조 확보가 중요해 지면서 지주, 전호의 문제나 항조 문제에 민감해짐④순장 편리법: 이갑제 대신 자연촌락으로서의 장(莊)을 징세와 행정의 기본조직으로 하는 방식⑤사회구조의 재편: 국가지배의 기초인 징세단위가 명초 이래의 획일적인 이갑제에 의한 호 단위 편성에서 지역성이 강한 자연촌락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체제 확립⇒청초의 국가권력이 표면적으로는 신사의 특권을 제한하면서도 내면적으로 향촌에서 신사가 가지는 실질적인 지배력을 용인하고 그 힘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구조의 변화에 대응하게 나타난 양상Ⅲ. 人口의 移動과 그 影響1. 人口移動의 實相(1)인구이동의 배경과 원인①인구이동의 배경: 이갑제와 부역수취제도의 모순, 토지의 편중 등으로 인한 이갑제의 해체②인구이동의 유형· 선진농업경제지역→개발가능지역(경제적 낙후지역)·남부, 사천 동북부, 하남 남서부, 호북 서북부)으로 인구 밀집· 산서, 섬서, 강서지방의 인구가 가장 많이 유출②명말·청초~청 중기까지의 인구이동· 사천지역으로 가장 많은 인구이동: 명 말 장헌충의 난으로 인한 인구 격감으로 이민정책이 시행된 것이 주효· 대만으로 이동: 복건, 광동성 등의 동남 연해지방인이 주로 이동· 만주로의 이동: 산동·하북성인들을 중심으로 본격화(18c)2. 人口移動의 影響(1)農業生産力의 提高①객민의 이동과 성장상· 배경: 사성교계지역, 호광지역, 사천지역등으로의 인구유입· 상인이나 기능인, 몰락직전의 이갑호가 재력을 가진채 이동하여 농토를 개간하거나 수리시설을 축조하여 농토를 확보: 그 지역 농업생산력 향상에 기여· 안정된 객호는 유학을 권장하여 관리가 되는 길을 모색하기 함: 소셜 모빌리티 실현※의 명청대 토지통계를 가지고 당시의 상황을 추론 하는 내용②인구이동지의 전지증가율은 경이로운 정도로 높음: 중국의 경제적인 중심지가 분화되어 송대~명초의 소·절 지방에서 곡창지로서의 지위는 호광에 양도하게 되고 강남 지방은 상업과 직물수공의 중심지로 발전③명말 · 청초의 격심한 동란기에 중국의 농토는 황폐화④농토의 황폐화로 사천으로 인구가 집중되었고 사천은 호광 다음가는 곡창지대로 변화: 경제적으로 강남지방의 직물수공업품 및 소금과 호광·사천의 미곡이 교류되는 중 · 장거리 상품교역 패턴이 이루어짐⑤전토양은 알고보면 명말 수준과 같음⑥객민의 부정적 측면· 호광지역 나름의 사회적 모순상에서 객민이 토착인과 생존경쟁을 하게 되면서 문제가 더욱 격화됨· 내용: 객민의 농토확보와 동시에 일어나는 부역 탈면-토착인이 오히려 몰락하여 유산하는 인구의 대류현상 유발⇒사회질서가 교란되어 명 중기로부터 청 중기까지 사성교계 지역에서는 반란이 일어남(2)중소도시의 발달(인구이동 현상의 제③패턴)①소·절지방 경제구조의 변화: 인구의 이동과 상품생산의 전개로 중국 전역에 걸쳐 중소도시가 무수히 발달했고 괄목할만한 지역이 소·절지방②강남 경제구조의 변화· 배경:동시에 전국적약재시장Ⅳ. 商品生産의 展開와 그 影響1. 商品生産의 展開①연구의 계기: 1950년대부터 일어난 중국의 자본주의 맹아론의 영향②서도정생의 연구와 한계· 연구의 의의: 종래 이갑제하에서 자급자족적인 농가경영의 영역을 맴도는 존재로만 이해되어 오던 자작농을 농촌수공업을 통한 상품생산자로서의 측면을 새로이 드러냄· 한계: 중국의 역사발전 과정에서 봉건제의 자생적 해체는 인정하면서도 자본제로의 발전에 주체적인 계기는 될 수 없었다고 주장→후의 연구자들이 전대제적 생산지배 내지 매뉴팩쳐의 존재 가능성까지도 검증(1)綿織物업의 展開①발전 내용과 원인: 강남에서 가계보충을 위한 농가부업으로서 적극적으로 시도· 원인: 토지와 기후의 적합성, 수운을 이용한 화북지역 면화의 도입으로 원료의 구득 용이, 고도의 견직기술의 응용→생품생산을 위한 면직업 발전②상인자본의 횡포· 농민의 자금부족으로 상인으로부터 원료를 다시 구입해야 하는 사회분업화 형성: 상인들은 각종 공정에서 상인자본이 개입하여 이윤을 착취· 영세농민이나 수공업자가 이윤을 축적하고 경제적 성장을 성취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여건을 가지고 있었음③매뉴팩처의 모습· 명 중기 이래의 개입 상인은 독립된 영세상인으로 하나의 대상인자본이 일관해서 포괄적으로 장악한 것은 아니고 이동은 생산현장의 외연에서 매매의 가격차로만 영리를 추구하였음· 명말 청초부터는 대상인도 점차 공정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원료전대 생산형태가 등장하기 시작(2)견직물업의 전개①명대의 견직물업: 남경, 소주, 항주, 호주등의 대도시에서 관영생산체제로 운영②반장은제 시행: 관리의 노동착취, 불안정한 급여와 착복 등의 폐단의 시정· 장호의 사경영을 인정하고 장역을 은으로 대납하게 하는 제도· 이후 업자들은 독립수공업자로서 상품생산을 추진할 수 있게 됨③견직물 소비양태의 변화· 봉급의 은 지급으로 관료들이 비단의 소비자로 등장· 평민들도 견직물을 착용하는 풍습이 유행→대도시의 민간 기호가 관용이나 관리를 상대로 하는 고급견직물뿐 아니라 평민을 위한 물품이
    인문/어학| 2011.12.17| 8페이지| 1,500원| 조회(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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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4권 02-陽明學의 成立과 展開(완료)
    陽明學의 成立과 展開머리말(1)황제 지배체제의 발전에서 명대의 특징①황제권의 절대화: 황제권의 절대화를 제도적 장치를 통해 보장②고도의 관료제 발달: 학교제와 과거제를 정비하고 전통적 유교 정치이념 표방(주의할점은 통치측에 위험이 될만한 역성혁명론을 배제시킨 상태)(2)명대의 사회 경제적 변화①신사의 등장: 이갑제의 해체에 따라 향촌사회에서 관료의 역할을 대신②신사의 사회지배로 인한 분권성: 국가통제의 약화와 상공업, 상품경제의 발달로 뚜렷화③정부의 개혁과정에서의 오판: 사회경제적인 국내변화를 체제내에 효과적으로 흡수하지 못하고 동림파가 신사층을 대변한 정치운동 전개Ⅰ. 陽明學의 성립1. 明代의 心學의 대두(1) 朱子學과 明代 前期의 사상계①심학과 이학의 차이: 중용의 (尊德性而道問學)의 해석에 대한 주희와 육상산의 차이· 주자: 학문에 의존하는 것이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 상산: 덕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반박→왕양명이 추존②성즉리설과 심즉리의 차이· 성즉리: 인간이 성인이 되기위해 사서오경을 공부하여 천하사물의 이법을 밝히는 것을 중시· 심즉리: 이학이 아닌것은 아니지만 理자체가 心으로 심을 함양하는 것으로 족함③주자학의 체제이데올로기로서의 발전과 경직화: 원대 이후 명대까지 관학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 유기, 송렴, 방효유: 송유(宋儒)를 비방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음· 맹자의 역성혁명설을 부정· 팔고문(八股文)의 제정으로 과거를 통한 사상의 통제· 영락대전, 성리대전 등 주자학의 부흥을 위한 국가적 사업 시행④군주권과의 밀착으로 인한 사상 내용이 희박해지고 형식적 허구성만 남게됨⑤심학의 선구자 등장: 백사 진헌장(2)陽明의 格物致知의 새 해석①양명의 대성까지의 과정· 격물치지설을 체득해 보려고 일초일목(一草一木)의 이(理)를 궁구한다는 자세로 뜰앞의 대나무를 대상으로 격물하는 공부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으나 병을 얻음· 28세에 진사가 되어 환관 유근의 정치에 반대하여 투옥되었다가 유배되어 야만적인 생활 영위· 정좌하여 명상하던 어느날 밤 홀연이 대오(大悟에 나아가 그 이법을 궁구하면 일조(一朝)에 활연(豁然)히 관통하게 된다라고 함· 양명: 格=正, 物=조금이라도 있는 뜻이 있는 心中의 物이라고 보아 격물을 심의 부정을 바로 하는 것이라고 함致知=良知이라하여 사람이 타고난 본연의 지인 양지를 실현한다고 해석⇒심즉리를 사고의 바탕으로 하여 탄생한 개념③육상산과 왕양명의 차이· 상산: 천리(天理)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인간에 내재화하였기 때문에 心-理 합일 주장, 주자의 知先行後의 설에 동의· 양명: 인간의 심이 이를 낳았다고 생각하여, 지행합일설을 주장(예: 효의 덕목은 행위의 형식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를 공경하는 자연적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는 것)2. 양명학의 인간관(1)성인관①인간평가의 기준: 본질에 두고 재력의 유무에 두지 않음-성인의 分(良知)과 현인의 分(良能)은 성과 현이 같으나 그것을 이루느냐 이루지 못하느냐의 구분②인간을 도덕적, 본질적으로 평등한 것으로 봄③滿街都是聖人: 양명의 인간관을 잘 드러내 줌(2) 사민평등관①예기에 있는 그대의 대학을 취하여 3강령중 하나인 親民을 주자학에서 처럼 新民으로 읽지 않고 백성을 친하게 한다고 주장· 新民: 백성을 지도 교화한다는 뜻으로 사대부 관료의 치자적 입장 강조· 親民: 서민을 도덕실천의 주체로 파악②친밀설은 양명을 사민평등관에 기초 한 것③양명의 궁극적 목적: 심체(心體)의 동연(同然)함을 회복하여 일체(一體)의 인(仁)을 이루는 대동적 이상사회의 건설④방법론에서의 논리적 허점: 개인적인 도덕적 자각에 호소할 뿐⑤주자학과의 차이: 사대부 관료를 실천주체로 하여 민(民)을 위에서부터 덕화(德化) 한다는 방식과 그 실천을 위한 독서, 궁리의 방법론이 도학군자적 방법과의 사이에 차이가 존재→주자학의 정분론에 대한 양명의 비판을 이해할 필요성3. 陽明學 성립의 사회적 배경(1)주자학의 정분론 비판①주자의 경세론(理氣論)· 이(理): 천지만물의 각각에 성(性)=동일성을 부여하는 원리· 기(氣): 성에 형(形)=차별상을 부여하는 원리· 사물에 이 회복된 상태이며, 범인의 기질의 성에 은폐된 상태의 인간으로 봄→인간 세계를 성인에서 범인에까지 종적상하관계로 형성하는 근거· 일체의 인간관계는 이=도리에 의하여 보장되어야 하며 이에 어긋날때는 가차없는 형벌이 내려져야 한다는 흡사 법적 주장이 등장하게 되는 것→윤리적 권위를 가지고 상위자의 편에서 하위자에게 도리를 강요하며 이에 반대하는 것은 패륜으로 몰아감②이기론에 대한 양명학의 시선· 기본적으로 관심밖에 일: 心이 곧 理이므로 心(良知)이 관심사· 심즉리에 근거하여 기는 거부되며 기가 문제되면 기의 條理로 이로 보아 넘김· 즉, 分=차별은 기의 차별이 아닌 능의 결과로 부어 분을 원리상 부정③양명학의 정분론 타파노력· 정분론은 사회적으로 계급성을 띈 신분으로 나타나 그것에 의한 계제적(階梯的) 일체사회성이 제출· 양명은 천부적인 재능에 의한 ‘분’을 인정하면서도 사민평등론을 내세워 주장학적 정분론을 타파하려 함(2)명대 심학 성립의 사회적 배경①이갑제 해체에 따른 사회적 모순: 향촌에 향신지주, 훈척등의 세습적 특권지주가 등장 하거나 상공업의 발전으로 부가 축적→영세한 농민은 전호나 노복, 용공(庸工)으로 지배하면서 계층분화가 심화②성리학의 한계: 급격한 사회적 변화가운데서 단순화되고 형해화된 理가 명대 중기 이후의 사회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새로운 원리 내지 이론의 창출의 필요③성리학의 현실반영적 내용· 성격에 있어서 양지설이 전통적 질서기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님· 친민설: 향촌의 질서를 민(民)의 지평에 서서 재편성하려는 시도· 주자학과는 달리(군과 과에 관한 언급) 효제 관한 언급이 잦음: 지주-전호의 관계에서 주복(主僕)의 관계에서 장유의 관계로 변한 현실 반영4. 萬物一體思想과 三敎觀①대동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발본색원론: 만물일체의 仁 회복· 중국 고대의 대동사상이 송유의 만물 일체사상을 거쳐 발전· 수평주의적 성격으로 이천, 주자계통의 계제적 대동사회설과는 차이· 만물일체사상+심즉리+지행합일=치양지설(의 기초로 작용)②치양지설과 사상연마론· 것이 아닌 자기의 양지를 믿고 이를 발휘 하는 것)③양명의 사상에 대한 비판· 사회의 갈등을 씻어 대동사회를 이루도록 계도해 나갈 뜻을 함께 하는 호걸지사에 기대 할뿐· 사민이 평등을 강조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귀천앞에서 단지 지족안분, 동심일덕이란 도덕적 자각에 호소하는 수준에 그침→도덕적 당위론으로 흐르수 밖에 없음· 양명의 이상사회에 대한 광의식(狂意識): 그와 함께하는 호걸지사를 모아 천하대동을 이룩하는 것으로 이상적인 인간의 차등을 부정하려는 의욕과 현실적인 사회 불평등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식의 표현④양명의 경전관· 심학과 같이 성인의 도가 인간의 심중에 있는 까닭에 경전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지 않음· 經과 史의 관계에서도 경사일체를 강조⑤경전관의 확대: 三敎一體의 견해· 유교는 大公을 추구하기 때문에 大道, 불교는 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小道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견해· 양지라는 초월적 원리에 입각학 양명학: 성인관 경전관의 장벽을 허물고 정통, 이단의 가치기준을 혼동→반유교적 요소 잉태Ⅱ. 陽明學의 展開四句敎선(선)도 없고 악(惡)도 없는 것은 마음의 본체요(無善無惡心之體)선이 있고 악이 있는 것은 의욕의 움직임이요(有善有惡意之動)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은 양지요(知善知惡是良知)선을 하고 악을 버리는 것은 격물이다(爲善去惡是格物)1. 四句敎과 양명학의 좌우분파①문제의 발단: 사구교의 해석을 둘러싼 전서산과 왕용계의 논쟁왕용계전서산심성론마음의 본체에 선악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성무선악설적 입장에서 후천적으로 오염된 마음을 공부에의 의하여 떨쳐버려야 함사구교에 대한 입장사구교는 양명의 정법(正法)이 아닌 권법(權法)사구교는 양명의 정법임학문방법선천적인 마음의 본체를 깨치는 일을 강조知에 照覺하는 후천적 意念에서 일할것이 있게 되고 사물에 접촉해야 함(공부 강조)명칭사무설사유설명교적성격반 명교적 성격-좌파명교적 성격-우파②양명은 두 내력을 두루보고 절충보완하도록 당부: 양명학의 학문적 특징은 좌파에 의하여 발전 적으로 계승③시무설에 대한 니라 본원적 동적 성격으로 순간순간에 理를 창조하며 이와 절대화 고정화를 용인하지 않음②용계의 기에 대한 긍정· 양지의 동적 성격이 기의 철학과 깊은 관계를 갖고 전개· 性은 마음의 생리에서 性善의 단서가 나타날 때 비로소 보임(측은한 마음, 부끄러운 마음) 기가 없으면 성이라 이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주자학에서 악으로 보던 기질을 긍정③현성 양지론· 양지는 항상 ‘현재’가 기준이 되어 생기 발랄하게 움직임· 현재의 양지는 현재 그대로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따로 어떠한 공부를 기다리지 않고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해야 함· 공부를 아주 인정하지 않는 것을 아니지만 사구교언에 대한 해석 때와 같이 방편에 지나지 않는 다고 판단④삼교합일에 대한 설명· 불교와 도교에 대하여 삼교가 모두 심학의 요소를 지닌 공통성이 있다고 하지만 성인의 학은 體와 用을 겸비하고 있는 데 반해 나머지 둘은 그렇지 못하는 다는 것- 體=良知, 用=經世致用· 양명학이 경세를 주도하는 유학의 입장에 서면서도 양지를 儒의 전유물이 아니고 각 학문을 학문답게 하는 것이라하여 초월성을 강조· 즉, 현성양지 그 자체는 유도 도도 불도 아님⑤현성 양지의 포용성은 나아가 유가로부터 이단으로 배처되어 온 제가의 학설에 대하여도 포용하게 됨: 고염무는 이를 기초로 하심은, 이탁오와 같은 명교 비판의 거두들을 용계의 학문계통에 직접 연결⑥용계의 사상적 한계: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대단히 소극적이었음3. 왕심제의 회남격물설①심제의 태주파 등장 배경· 심제의 출신이 염정(鹽丁)의 아들로서 서민 출신· 심제를 시조로 하는 태주파의 출현으로 명대 중기 이후부터 서행한 서원강학의 조류를 타고 서민층에까지 확대②학문적 배경과 성격(회남격물설)· 만학(晩學)에다가 용계와는 대조적으로 독서의 폭이 넓지 못했으나 사회성이 강하고 실천적이라는 특성을 가짐·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신, 가, 국, 천하 가운에서 身을 本으로 하는 견해· 논설에 있어서 치밀성을 덜하지만 간결하고 실천성이 강함· 대장부론: 대장부가 나아가 제왕의意識)
    인문/어학| 2011.12.17| 7페이지| 1,500원| 조회(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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